'당신은 언제 첫사랑이 그리운가요?'
첫사랑과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 속에 첫사랑을 추억하는 방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을 들여다 보는 건 언제일까? 내 주변의 사람들과 행복하게 희희낙락할 때는 첫사랑을 추억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살기가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지금 내가 사는 삶의 무게에 허덕일 때, 이상하게도 사람은 내 마음 속에 숨겨둔 순수했던 지난 날의 추억을 꺼내들게 된다. 그건 단지 첫사랑이 아니라, 그 시절의 아직은 많은 가능성을 품었던 나를 꺼내보는 것이니까. <응답하라 1997(이하 응7)>에 이어, 호응을 얻고 있는 <응답하라 1994(이하 응4)>는 흡사, 이렇게 다시 꺼내보는 첫사랑과도 같다.
한때 우리 문단에서 '후일담 문학'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질풍노도와도 같은 80년대를 살아낸 386세대들이 그 시절을 마감하고 90년대에 들어서서 그 시절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내용을 문학의 형식을 담은 것이었다. 공지영을 필두로 해서, 그 시절의 386 문인이라면 누구나 '후일담 형식'의 작품들을 배출해 냈었다.
왜 그랬을까? 지금의 세대에게는 생뚱맞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은 '혁명'을 꿈꿨다. 가장 전선에 서서 '투쟁'을 하던 사람들이건, 그들의 뒤에서 묵묵히 따라가던 사람들이건, 아니 그 마저도 하지 못한 채 뒤쳐져 바라보던 사람들이건, 19세기의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그 역사적 사건이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나야 한다며 세상을 뒤바꿀 꿈을 꾸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걸 버리고 현장으로 들어가고, 그게 아니라도 넥타이를 매고 거리로 나서고, 박수를 보냈고, 묵묵히 그런 그들을 지켜보아 주었다.
그러던 시절이 흘렀다. 세상이 얼마나 변혁되었는가와 상관없이, 순수한 이상으로 자신을 헌신하던 젊음은 나이가 들고, 이제 그저 생활인이 된 한 개인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 그들에게,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줄 무언가가 필요했었다. 그리고 그 역할을 한 게 바로 '후일담 문학'이었다.
그리고 이제, 90년대의 젊음을 살아낸 세대에겐 또 다른 형식의 '후일담'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런데 왜 그게 '문학'이 아니라, '드라마'냐고?
우리 문화에서 90년대는 대중 문화의 '르네상스'와도 같았던 시대다. 80년대에 청춘들은 '들국화'를 좋아했지만, 텔레비젼을 통해 그들을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015B', '서태지' 등 90년대 세대들이 즐겨 듣던 노래는 브라운관을 통해 흔쾌히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이 즐기던 운동은 '마지막 승부'라는 드라마가 되어 공감을 얻었다. <응4>와 <응7>에 나오듯이그들은 '책' 대신에 컴퓨터 게임을 하고, 음악을 듣고, 운동 경기를 관람하고, '삐삐'나 '핸드폰'을 통해 교류하였다. 드라마에서도 나온다. 강의에 들어오는 학생에게 교수님이 제발 '책'좀 가지고 오라고. 그렇듯이, 이제 그 세대는 더 이상 2차원의 종이를 차치하고, 보다 역동적인 '대중문화'의 호혜를 듬뿍 누린다.
<응7>에서 드라마의 시작이 아이돌 그룹의 '빠순이'로 시작되고, <응4>에서 농구 '빠순이'로 시작되는 건, 그 시대의 일반이 그러했다기 보다는, 바로 그런 정체성을 가졌던 그 시대의 젊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것은, 한낱 '빠순이'가 아니라, 그런 문화에 열광했던 젊음을 정당한 '문화'의 수혜자이자, 담당자로 재정립하는 것이기도 하다.
드라마의 캐릭터를 보면,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90년대의 그 시절에는 한없이 철없어 보이는 '빠순이'요, 서울에 와서 하숙집조차 제대로 못찾아가고, 패스트 푸드점에서는 주문 조차 못하는 '모질이'로 시작된다. 그런데, <응7>에서도 그랬듯이, 그런 그들이 현재로 오면 대단한 사람들이 되어있는 것이다. 연세대가 분명해 보이는 학교를 다니면서도 한없이 부족해 보이던 그들이, 2013년의 현재로 오면, 강남의 고층 주상 복합인 듯한 아파트에 살며 넥타이를 맨 그럴 듯해 보이는 '성공'한 사람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엘리트주의'를 조장하는 환타지라는 부정적 요소가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로 대변되는 그 시대의 상징성을 의미하는 바가 더 클 것이다. 그렇게 가수만 쫓아다니고, 농구장이나 들락거리고, 뭐 하나 제대로 한 거 없어 뵈는 철없는 아이들이 자라서, 대통령 후보도 되고, IT강국의 주체가 되고, 그럴 듯한 직업을 가진 어른이 되었다는, 그런 인물들을 만들어 냈다는 세대적 자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장치이다.
90년대의 세대가 누구인가, 고단했던 정치적 격변기를 살아낸 선배 세대와 달리, 정치적으로는 상대적 안정기를 겪으며, 경제적으로는 그 어느 세대보다도 풍족하게 젊음을 누렸던 세대다. X 세대다 뭐다 라며 유별난 별칭을 가질 수 있었던 것, '빠순이'가 될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한 문화를 누릴 여건을 지녔던 세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랬는데, 오히려 그들이 지금 이 사회의 중추가 되어 살아가는 삶은 고달프다.
경제는 장기적 불황기에 들어서, 앞선 세대와 달리 직장도, 집도, 그 어느 것도 녹록하게 내 몫으로 돌아오는 것이 풍족치 않다. 풍족치 않을 정도가 아니라, 불안한 사회 안전망으로 인해 늘 위태롭고 흔들릴 뿐이다. 정치적으로는 어떤가, 지난 대선이 세대 대결이라는 평가가 나왔을 정도로,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온갖 첨단의 SNS등을 통해 '투표'를 독려했으나, 최근 불거진 대선 결과를 둘러싼 부정 음모들처럼, 그 수단은 오히려 역으로 이용당했으며, 나이든 세대들의 일사불란한 결사에 밀려, 처참한 패배 의식을 떠안았을 뿐이다. 획일적 문화와 조직적 사고 방식에 물든 세대들을 지양하고, 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개인을 흔들고 나락에 빠뜨리려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세대적 불안함과 허무함을 위로한 것이 <응답하라> 시리즈이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노리고 있는 것은 단지 추억팔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추억을 길어 현실의 고단함을 툭툭 위로해주고자 하는 것이다. 마치 그 옛날 나탈리 우드가 나왔던 영화 <초원의 빛>처럼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라며 그 시절의 아름답고 화려했던 젊음을 다시금 조명해 준다. 현실에 지치고 고달픈 이 시대의 주역들에게, 너희들에게 이렇게 빛나고 아름다운 청춘이 있었어. 그리고 그런 시대를 지나, 너희는 이만큼 성장하고 이루어 내었어, 라며 위로의 손길을 내민다. '자존감'을 가지라고, 첫사랑을 꺼내보듯, 그 찌질하지만 순수하고 아름답던 청춘을 되새기며 위로 받으라고.
물론 '추억'은 위험하기도 하다. 첫사랑과의 추억에 빠지다 지금의 사랑을 놓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주저앉아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는 때, 때로는 빛이었던 자신의 젊은 날이 다시 한번 일어설 힘이 되어 주기도 할 것이다. 부디, 고달픈 현실을 살아가는 90년대 세대에게 위로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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