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밤 11시 12부작으로 종영한 <나 홀로 연애중>의 뒤를 잇는 것은 새로운 관찰 예능 <엄마가 보고 있다>이다.

'세대간 소통의 부재가 화두가 되는 시대, 자녀들의 치열하고 고단한 하루를 그들을 궁금해 하는 엄마가 지켜보며 그들의 좌절과 극복의 과정을 공감하고자 하'는 <엄마가 보고있다>는 말 그대로 자녀의 24시간을 엄마가 지켜보는 '관찰 예능'이다. 

프라이버시 침해와 엄마의 관심 사이에서 
첫 회 프로그램의 취지를 설명하자 대뜸 출연진 중 김부선이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가 아니냐?'는 반문을 하는 반응에서도 보여지듯이, 연예인이 아닌, 본인이 동의하지 않는 개인의 24시간을 프로그램으로 온전히 보여지게 한다는 것은 분명 '프라이버시 침해'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런 취약한 '관음'의 토대를, 이후 하지만 '나도 엄마의 품을 떠난 내 딸이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하다'는 '품안의 자식'에 대한 엄마의 숨길 수 없는 관심이 추동한다. 그래서, <엄마가 보고있다>는 첫 회에서 보여지듯이, '취준생의 하루'라는 다큐를 빙자하여 출연자의 '관음'에 대한 정당성을 취득한다. 

무엇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아무리 엄마라 한들, 이제는 '엄마의 품'을 떠날 나이가 된 성인이 된 자식들의 하루을 엿보는 예능의 정당성을 어떻게 구하랴. 물론, 자식이 결혼을 해서도 끼고사는, 아니, 역으로 결혼을 해서도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모에게 의지하고 사는 '캥거루족'이 등장하는 세상에서, 부모가 자식의 하루를 보고 싶다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무리'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엄연한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부모라 해도 넘볼 수 있는 정당성을 설득해 가는 것이 <엄마가 보고있다>의 관건이다. 



그리고 그 '관건'을 위해 프로그램이 선택한 것은 38세 취준생의 하루이다. 취업준비생 200만명시대, 대학 문을 나선 순간 상당수가 '취업'이 아니라, 취업 준비생이 되는 시대, 심지어 30대 취업 준비생이 20만명인 시대에, 낼 모레 마흔을 바라보는 38세 라는 극한의 나이의 취준생을 들이민다. 고향 대구를 떠나온지 8년, 엄마는 아들의 집을 가보지 못했지만 아들에게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친구 오피스텔에 얹혀 사는 친구가 잠을 깰까봐 아침을 물 한 잔으로 때우는 그의 처지가 그런 것이다. 아침부터 취업 정보를 알려주는 구직센터로 향하는 그는 빈속이다. 아니, 그의 첫 끼니는 구직센터의 상담을 끝내고, 느지막히 대학원 수업을 듣는 학교식당의 가장 싼 2500원짜리 도시락이다. 그것이 그의 첫 끼니이자, 유일한 하루 식사이다. 심지어 300원짜리 커피 자판기가 되지 않자, 커피는 사치라며 건너뛰는 것이 그의 형편이다. 

그러면서도 걸려온 엄마의 전화에 밥 많이 먹었다고 대답하는 아들, 오랜 병치레를 하는 아버지를 돌보는 어머니, 경제적 능력이 없는 부모님을 돌보기 위해서는 250만원의 월급이 필요하다는 장남의 숨은 사연이 '관음'하는 엄마와 패널들, 그리고 시청자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며, 지켜보길 잘 했다는 정당성에 안심을 하게 만든다. 

38세 취준생의 서글픈 하루를 통한 설득
첫 회를 선보인 <엄마가 보고있다>는 이렇게 취준생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카드를 내보이며, 그리고 고향을 떠난 자식이 밥 한 끼라도 제대로 먹는지 노심초사하는 엄마의 마음을 들어, 자식의 24시간을 지켜보는 정당성을 설득해 낸다.
비록 취준생이라기엔 너무 늦은 38세의 장남의 현재에 대한 여러가지 의견이 오간다 해도, 고향을 떠나 8년째 객지에서 소식도 없이 살아가는 아들의 형편에 목말라 하는 엄마의 마음을 전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과연 이런 극적인 사연을 매회 어떻게 이어갈지 그것이 색다른 관찰 예능의 관건이지만, 벌써 '사연모집'란을 가득 메운 엄마들의 신청 접수 건수에서 보면, 대한민국 엄마들의 자식들의 열렬한 관심은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시청자 게시판에서 보여지듯이, 혹시나 내 엄마가 신청할까 두려운 자식들의 마음, 그것이, <엄마가 보고있다>의 또 다른 복병이기는 하다. '품 밖의 자식이라도 알고 싶은 엄마의 마음, 이제는 다 컸으니 알아서 하게 뇌두세요'하는 자식의 반응, 과연 이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메워 나갈 것인가, 그것이 <엄마가 보고있다>의 숙제이다.  

그런 기본적인 정당성 외에, '예능'으로서 <엄마가 보고있다>의 첫 발은 아직 서투르다. 초반 화려한 '신스틸러'들을 모아놓은 시끌벅적한 오프닝에 비해, 패널인지, mc인지 모를 이들의 쓰임새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초반 토크는 재미있었지만, 이미 얼굴이 알려진 '신스틸러'들을 상황극에 쓰는 것이고, 그런 상황극을 위한 출연이라기엔 그들의 존재가 너무 무겁다. 또한 눈물을 함께 쏟아내기 위한 초빙자라기엔 너무 수가 많다. 이 쟁쟁한 '신스틸러'들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엄마가 보고있다>의 예능으로서의 향방이 점쳐지지만, 막상 아들의 24시간을 지켜보는 '관찰'에 기초를 둔 이 다큐성 예능에, 그들의 자리가 그리 넓어보이지가 않는다. 

무엇보다, 어설픈 상황극 이후에 엄마가 들고 나온 한 상으로 썰렁하게 마무리되는 엔딩 '엄마에게 자식의 24시를 알려주는 것'외에 정당성에 대한 고민을 남긴다. 
by meditator 2015. 4. 26. 11:21

8회를 경과한 <냄새를 보는 소녀>의 관전 포인트는 제주도 해녀 부부 살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그의 딸, 최은설이었던 오초림의 존재를 과연 최무각과 권재희 중 누가 먼저 알아낼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신경전이다. 또한 그 누구에게도 친절한 '스윗가이'이지만 목격자라는 이유만으로 대번에 칼을 그어 죽여버리는 잔혹한 살인을 서슴치 않는 냉혈한 사이코패스, 그리고 그 맞은 편에 가장 평범한 이십대 남자의 모습으로, 따스한 마음으로 자신의 동생과 그리고 이제 상처많은 오초림과 사랑을 가꿔가는 '온기넘치는' 무감각한 최무각의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있다. 그리고 그 숨막히는 신경전을 채워가는 건 온전히 최무각을 연기하는 박유천과, 권재희를 연기하는 남궁민 두 사람의 연기 자체이다. 



로코와 스릴러의 간극을 봉합하는 박유천의 '평범한' 최무각
8회에 이르러 이제 대놓고 '키스'까지 한 최무각을 두고 그가 '무감각한' 존재가 맞냐는 설왕설래가 있다. 이는 극 초반 얼굴에 피가 흐르고, 팔이 빠지면서도 범인을 향해 돌진하던 '무감각한' 캐릭터를 완벽하게 구현해 낸 탓에, 시청자들이 지레 그의 '무감각'을 '무감정'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회 오초림을 부르는 '최은설'이라는 한 마디에 대번에 눈시울이 붉어지던 이 남자, 그의 무심한 표정은 동생을 잃고, 감각마저 잃고 삶의 의미를 잃었던 상실감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오초림을 만나 변화해가는 최무각이 설명해 낸다. 그래서, 강력계에 들어갈 욕심으로 '냄새를 보는' 오초림과 딜을 하기 위해 마지 못해 참여한 '만담' 과정에서 능청스레 변하던 그의 표정은, 오초림과 '썸'을 타며 감정이 자연스레 드러난다. 

그런데 그게 안쓰럽다. '동생 바라기'였던 장난기많은 한 남자가 그 동생을 잃고 '복수'만을 위해 살아왔던 '무감각한' 시간들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또한 동생 또래의 오초림을 만나, 그녀의 틈을 헤집고 그녀의 속사정을 헤아리며 깊어가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그저 '남녀 사이'를 넘어, 최무각이란 인물이 얼마나 따스한 인물인가를 알수 있도록 박유천은 '온기있는' 남자 최무각을 구현해 낸다. 

'로코'와 '스릴러'라는 무모한 결합을 시도한 <냄새를 보는 소녀>에서 두 극단의 장르의 이질성을 결합하는 건 실질적으로 온전히 박유천의 몫이다. 7,8회, 오초림을 만나 현실의 남자처럼 뒤끝 넘치게 '썸'을 타는가 싶더니, 동생을 죽였다고 믿었던 천백경의 죽음을 확인하고 지하주차장이 뒤흔들릴 정도의 '절규'를 한다. 막내로 들어간 수사반에서 그 누구보다 '촉'이 빠른 수사관이요, 처세에 능한 신참이다. 브리핑 현장에선 '쪽집게 강사'저리 가게 귀에 쏙쏙 들어오는 수사 상황을 전한다. 그런가 하면, 홀로 나간 컨테이너 수사 현장에서, 칼에 찔리고도 뒤늦게서야 그것을 알아차리고 땅에 고꾸라지는 무감각해서 안타까운 극적인 엔딩을 선사한다. '췌~'를 연발하는 코믹한 캐릭터와, 눈물어린 절규, 무감각해서 안타까운 피습씬까지, 도저히 화합하기 어려운 장면들을, 박유천이란 배우의 내공으로 온전히 풀어낸다. 그래서 때로는 무리수같은 개그씬도, 어설픈 수사 상황도, 장르적 분위기가 생소한 스릴러의 장면도 박유천이 풀어내는 연기의 스펙트럼 안에서 자연스럽게 봉합된다. 

<냄새를 보는 소녀>에서 박유천의 연기가 보여주는 강점은 그가 이 작품을 하며 내보인 '평범한 연기'의 비범함에 있다. 데뷔를 하자마자 '스타'가 되었던 연예계 11년차의 그는 가장 평범한 현실 남자의 그것을 자연스레 보여준다. 동생을 잃은 따스한 남자, 사랑하는 이를 잃어 감각을 잃은 상실감, 분노, 그리고 이제 사랑하는 이를 만나 자연스레 빠져들어가는 젊은 남자의 그런 것들을 스물 아홉 최무각이란 우리 곁에 존재할 것만 같은 인물로 구현해 낸다. 가장 비정상적인 캐릭터를 가장 평범한 이십대 남자의 그것으로 설득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장르적 널뛰기를 하는 <냄새를 보는 소녀>는 박유천이 해석한 '평범한 이십대 남자'의 아픔, 고뇌, 설레임, 분노를 통해 자연스레 설득력을 얻어간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그런 그가 구현내 내는 우리 곁에 살 것만 같은 최무각에게서  불과 몇 년전 같은 작가의 작품이었던 <옥탑방 왕세자>에서의 이각, 역시나 같은 형사였던 <보고싶다>의 한정우, 비슷한 직업군이었던 <쓰리데이즈>의 한태경, 심지어 바로 전에 했던 <해무>의 동식과의 유사점을 좀처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욕심많은 배우의 한계가 어디인가 궁금해질 정도로. 



압도적 존재감의 사이코패스 권재희, 남궁민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린 천백경(송종호 분)을 살해하는 과정에서, 그가 남긴 '황금 물고기는 외로운 남자를 만나야 해'라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와, 그에 근거한 '황금 물고기', '외로운 남자' 그리고 결정적으로 권세프에게 사로잡혀 있는 동안 천원장이 쓴 일기로 인해 권재희는 이제 8회까지 진행된 <냄새를 보는 소녀>에서 용의자 오초림의 존재에 가장 많이 접근한 인물이 되었다. 그가 한 발 한 발 사건에 접근해 가는 것만으로도 <냄새를 보는 소녀>의 시청자들은 가슴이 '쫄려온다' 그의 접근을 기대하고 잠복해 있던 병원의 최무각 팀들에게 보기좋게 '이벤트 남'을 통해 한 방을 먹이고 유유히 드뷔시의 '달빛'의 볼륨을 높일 때, 역대 그 어떤 사이코패스 보다 버전이 높은 권재희의 면모는 단숨에 드러난다. 하지만, 이런 캐릭터의 면모을 배가시키는 건 남궁민의 존재다. 

첫 회부터 주마리의 애인으로, 레스토랑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그리고 이제 죽은 천원장의 측근으로 그의 장례까지 치뤄주는 그가, 용의자 키 178~180 정도의 근육질 체격의 서울 말씨를 나긋나긋하게 쓰는 남자와 가장 유사한 외모를 가졌음에도 가장 유사한 존재임에도 쉽게 의심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스윗함'이다. 매번 용의선상에 올라감에도 눈 하나 찡그리지 않고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는 여유로움, 다짜고짜 팔을 꺽고, 레스토랑을 찾아오는 불손함에도 능숙하게 대처하는 처세술에, 끈 떨어진 오초림을 거둬주는 자애로움, 거기에 요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잘 나가는 쉐프라는 직업까지, 보통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으로서 권재희를 그간 여러 드라마에서 여심을 울렸던 남궁민은 가장 자연스레 구현해 낸다. 

하지만, 그의 색다른 면모는, 6회, 그 부드러운 얼굴에서 눈빛 하나만 바뀐 순간, 시청자들이 소름끼치게 연쇄 살인범의 존재를 자각하게 만드는 그 순간부터 빛을 발한다. '연쇄살인'이란 미니 시리즈로서는 부담감있는 설정을, 가장 '스윗한' 연기에 일가견있는 잘 생긴, 심지어 바로 얼마전에 '가상 결혼'을 통해 연예계 화제가 돠었던 잘 생긴 남궁민이 연기함으로써 '살인 사건'을 마주하는 찜찜함을 한결 완화시켜 주는 동시에, 그 캐릭터의 간극으로 인해 스릴러의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것이다. 

그의 연기적 변신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2006년 영화 <비열한 거리>에서 일찌기 영화 평론가들은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 조인성의 친구로 그를 배신하는 양면적 캐릭터를 연기한 민호 역의 남궁민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최근 작인 <로맨스가 필요해2>나, <마이 시크릿 호텔>에서 그가 연기한 캐릭터 역시 신비로운 비밀을 지닌 음모적 인물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런 서사의 시작과 상관없이 언제나 로맨틱 멜로물의 장르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던 이들 드라마는 남궁민이란 배우의 입지를 여주인공 바라기만으로 소모함으로써 아쉬움을 남겼다. 그의 연기적 스펙트럼은 장르물까지 펼쳐졌지만, 언제나 그의 연기는 '멜로'의 틀 안에서 숨죽여 왔었던 것이다. 그러던 남궁민이, 그가 가진 연기적 잠재력을, 지금까지 그 어떤 사이코패스보다도 극과 극을 오가는 권재희라는 인물을 통해 마음껏 풀어내고 있다. 잔잔하게 미소를 띠며 '내가 죽였는데'라고 말하는 장면을 남궁민보다도 전율을 일으키며 연기할 배우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냄새를 보는 소녀>의 스릴러는 남궁민으로 인해 완성된다. 
by meditator 2015. 4. 24. 10:22

2012년에 방영한 이희명 작가의 <옥탑방 왕세자>는 300년전 조선에서 현재로 온 왕세자의 세자빈 살인 사건과 진정한 사랑 찾기가 극의 주된 이야기였다. 300년이란 시공간을 둔 과거의 왕세자와 현재의 박하가 나누는 사랑은 시대를 건너뒨 해프닝으로 시작하여, 결국은 '기억'을 매개로 한 절절하면서도 숭고한 사랑으로 마무리되어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하지만, 이런 기막힌 사랑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중반부를 점철한 이른바 '세나의 난'이라고 애청자들이 질타했던 진짜 세자빈의 악행은 순순한 사랑 이야기에 옥의 티가 되어 <옥탑방 왕세자>의 완성도에 누를 끼쳤다. 

2013년에 방영된 <야왕>은 비록 최고 시청률 25%를 육박하며 인기를 누렸지만 그 인기의 원인은 '막장'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밑도 끝도 없는 주다해의 악행이었다. 박인권의 <대물;야왕전>을 모토로 시청자들은 그녀의 악행에 시선을 빼앗겼지만, 어설픈 기업물에, 개연성이 희박한 악행과 복수의 연속이 실소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그래서 2015년 이희명 작가가 <냄새를 보는 소녀>라는 웹툰을 원작으로 로코와 스릴러를 융합한 복합 장르로 돌아온다고 하였을 때, 역시나 복합 장르였던 <옥탑방 왕세자>의 미완성도와, 또 역시나 만화를 원작으로 하였으나 '막장'으로 치달았던 <야왕>을 기억하던 시청자들은 우려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런 우려는 무색하게, 이제 7회를 맞이한 <냄새를 보는 소녀>는 '로코'와 '스릴러'라는 양 극단의 장르를 기가 막히게 융합해 내는데 성공한다. 초반, 로코와 스릴러의 장르 사이에서 갈짓자를 걷는가 싶더니, 7회에 이르러, '천의무봉'(하늘 나라의 옷은 바느질 자국이 없다. 즉 꾸민데 없이 자연스럽다)이란 사자성어처럼, 어디가 로코이고, 어디가 스릴러인지 구분이 안갈 만큼 시청자들이 한 시간 남짓의 방영 시간 동안 빠져들게 만들어 버린다. 



로코와 스릴러의 절묘한 결합
5회 초 레스토랑 쉐프 살인 사건 수사 과정에서 냄새를 쫓다 범인에게 쫓기는 오초림(신세경 분) 앞에 느닷없이 최무각이 등장하는가 싶더니, 오초림의 힌트 하나로 대번에 대마초를 키우는 꽃집과 쉐프를 죽이는 범인을 찾아내는 사건 때만 해도, '입수사'가 아닌가 싶게 최무각에 의해 마무리되는 사건이 어설퍼 보였다. 하지만, 그런 사건의 흐름이 6회 백숙집 비밀의 방에서 되풀이 되면서, 이제 이것은 어설픔이 아니라, <냄새를 보는 소녀>만의 독특한 클리셰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마치 일본 만화 명탐정 코난에서 일련의 사건의 정황이 펼쳐지고, 그 모든 것이 코난의 정리 한 방으로 해결되어지는 것처럼, 매회 해프닝처럼 제시되는 사건은 만화처럼 가볍게 최무각(박유천 분)의 정리로 마무리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다. 그 사건을 통해 '만담'도 하고, '사건'도 해결하기로 약속한 최무각-오초림 커플의 활약이 '주'가 되는 것이다. 사실 엄밀히 오초림의 '냄새를 보는 능력'에 기반한 사건 해결이기에 '과학 수사'로서 애초에 어패가 있는 설정을 가볍게 풀어가며, 오히려 그 과정에서 두 연인의 '썸'인듯, '썸'이 아닌 '로코'적 관계에 방점을 찍는 것이 <냄새를 보는 소녀>만의 장치이다. 

사건 수사에 함께 한 오초림이 위험해 질 수 있음을 느끼자 그녀를 사건에세 배제시키려는 최무각의 무심한 듯한 한 마디는 그 어떤 연인의 보살핌보다 은근하고, 그런 최무각의 걱정에, 최순경님이 나를 지켜주면 되잖아요 라는 오초림의 대답은, 직설적인 사랑 고백보다도 짜릿하다. 이제 7회에 이르러, 최무각은 그렇게 지켜달라는 그녀에게, 내가 옆에서 위험하지 않게 해주겠다며 화답한다. '남자 친구'는 아니라고 뻔뻔하게 고개를 젖지만, 함께 밥을 먹고, 현장 검증한답시고 '뽀뽀'까지 해버리는 이 커플의 알콩달콩 '썸'은 '수사'를 타고 기가 막히게 진행된다,



1회적 사건을 넘어선 복선
하지만 이 무감각-초감각 커플의 사건 수사가 그저 연애의 진행을 위한 보조 수단만은 아니다. 6회 포상으로 간 닭죽집에서 '라면' 냄새를 매개로 밝혀낸 '비밀의 방' 사건은 이후, 세프 권재희의 비밀의 서재가 보여지면서, 그저 1회성 사건만이 아님을 보여준다. 
7회, 초림의 친구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게 되어 최무각-오초림 커플이 수사를 하게 된 '인천 차이나 타운 알리바이 사건'의 한 편에서 천백경을 죽인 권재희의 치밀한 알리바이 조작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뜬금없이 등장한 자잘한 사건들이 의미심장한 커다란 '바코드 연쇄 살인'의 복선으로 등장하며, 이후 그 사건들이 권재희의 사이코패스적 악행을 밝히는데 결정적 단서로 자리매김할 것을 드라마는 예고한다. 

사건만이 아니다. 극중 등장하는 각종 상황들조차 의미심장한 복선으로 자리매김한다. 동료 형사와 헬스장 트레이너가 공모한 살인 사건에서 시작하여, 최무각이 거리에서 산 인형으로 이어진, 1+1의 설정, 그리고 자신에게 전해준 인형에서 최무각이 동생에게 전하는 목소리를 듣고 되물리는 과정에서 등장한, '어느 게 진짜고, 어느 게 덤'이냐는 질문은, 결국 같은 최은설이지만, 두 사람이게 되는 오초림과 최무각의 동생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하나인 듯 보이지만, 결국은 둘인, 애초에 최무각에게는 자신의 동생만 진짜였고, 오초림은 덤처럼 등장하지만, 결국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는 본말이 전도될 수 밖에 없는 사건의 본질을, 드라마는 빈번하게 암시를 준다. 그 어떤 우스운 상황도 그저 지나칠 수 없는 묘미를 가진다. 



리메이크를 넘어선 창작
<냄새를 보는 소녀>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만취 작가의 동명의 웹툰 <냄새를 보는 소녀>를 원작으로 한다. 이 웹툰이 드라마화 된다고 했을 때, 반기면서도 가장 많은 우려를 표명했던 것은 바로 웹툰의 애독자들이었다. 심지어, 이 웹툰이 '로코'화 된다고 했을 때, 반기를 들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드라마가 된 <냄새를 보는 소녀>에서, 웹툰<냄새를 보는 소녀>를 고스란히 느끼기는 힘들다. 웹툰이 로코화 된다고 했을 때 애독자들이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다름아닌, 이 원작이 가지는 음습한 분위기에 기인한다. 냄새를 보는 여주인공은 부모님이 죽은 기억은 물론, 그 과정에서 괴물처럼 변해버린 자신으로 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하지만, 그중 '냄새를 보는 능력'만을 가지고, 부모님을 잃은 기억을 잃은 오초림으로 돌아온 드라마 속 여주인공은 한결 가벼워졌다. 원작은 원작만의 재미를 가지고 있지만, 드라마로 하기엔 어두운 분위기를 드라마 냄새를 보는 소녀는 일소해 버렸다. 

소녀만이 아니다. 지금 극의 중심을 이끌어 가고 있는 '바코드 살인 사건'의 범인 권재희는 웹툰의 '콜렉터'편과 유사하다. 만화 속 콜렉터는 자신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받은 학대를 타인의 삶을 기록하고 그를 죽이는 범죄를 통해 보상받고자 한다. 드라마 속 권재희는 그 기록을 '책'으로 대신한다. 만화 속 콜렉터는 어두운 지하도 구석에 아지트를 마련했지만 잘 나가는 쉐프 권재희는 그의 집에 비밀의 방을 만들었다. 만화 속 한량없이 어두었던 공간을 화려한 쉐프의 레스토랑과 집으로 드라마적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또한, 웹툰에서 미처 그려지지 않은 듯했던 남자 주인공의 설정은, 거기에 동생을 역시나 바코드 연쇄살인으로 잃고 감각조차 잃은 사연을 통해 사건에 주도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만들어 진다. 어디 그뿐인가, 웹툰에서 양념처럼 등장한 잃어버린 강아지 찾기등의 사건이, 권재희 쉐프의 애완견 뭉치를 오초림이 찾아주는 스토리로 역시나 적절하게 씌인다. 분명 원작의 어느 곳에선가 만날 수 있는 설정들이, 마치 풀어헤친 퍼즐이 새로운 그림을 완성하듯, 드라마 <냄새를 보는 소녀>로 재탄생된다. 

이렇게 이희명 작가는 웹툰 <냄새를 보는 소녀>를 이희명 표 로코와 스릴러의 완벽한 융합물 <냄새를 보는 소녀>로 재탄생시켰다. 함께 '만담'도 하고 '수사'도 하는 최무각-오초림 커플은 매회 사건에 뛰어들면서 야곰야곰 사랑도 키워가고, 거대한 바코드 연쇄 살인의 실체에 다가가는 중이다. 물론, 7회에 들어서면서 본격화된 연쇄 살인범 권재희의 악행이 이희명 작가의 전작처럼 완성도에 폐가 될까 우려는 되지만, 7회 정도의 절묘한 배합이라며, 이번에는 이희명 작가를 믿어보고 싶어진다. 부디 이렇게 마지막까지 정진하여, '로코;와 스릴러의 결합이라는 어려운 시도를 성공하기를 바래본다. 


by meditator 2015. 4. 23. 06:41

<풍문으로 들었소>의 유준상이 연기하는 한정호는 법무법인 한송의 대표다. 아버지 대부터 이어온 우리 나라 최고의 법무 법인의 대표로서, 우리 사회 갑 중의 갑이다. 그의 손에서 시작된 각종 법안들이, 결국 우리 나라를 움직이는 것으로 드라마 속에서 그려진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뒤늦은 사춘기가 찾아왔다. 자신의 딸이 한정호의 아들로 인해 상심을 하자, 그 보복을 하겠다고 한정호를 새삼 유혹한 첫사랑 지영라(백지연 분)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정호의 뒤늦은 사랑은 여느 드라마처럼 다큰 어른들의 불장난처럼 그려지지 않는다. 이제 중반을 들어선 <풍문으로 들었소>는 갑 중의 갑 한정호의 철딱서니 없는 사랑을 통해, 이른바 우리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아노미'를 적나라하게 해부한다. 




한정호, 한인상 부자가 선택한 다른 길
아니, 도덕적 아노미라고 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한정호가 지영라를 만난 후 보이는 일련의 행동들은, '탈도덕적'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행동 패러다임을 통해, 우리는 현재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이른바 지도층의 '탈도덕적' 습성들을 짚어볼 수 있다. 

초반 만삭이 된 서봄을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 아들 한인상에 대한 한정호 부부의 반응, 그리고 이후 이어진 서봄의 집안에 대한 처분 등에서, 한정호 부부는 일관되게 무자비한 '갑질'을 행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갑질은 자식을 둔 부모 맘이라던가, 처지가 다른 사돈을 하루 아침에 맞닦뜨린 처지라던가 하는 묘한 공감대를 통해 희석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분명 '갑질'을 했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지는 한정호 부부의 적나라한 '인간적' 반응들이, '속물'로 세상을 살아가는 시청자들에게 그저 밉게만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뒤를 밟고, 뒷조사를 하고, 교묘하게 자신이 가진 모든 정보를 이용하여, 사돈댁을 손아귀에 쥐려는 처지조차, 그러려니 하게 유준상이 연기하는 한정호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들보다 더 똑똑한 서봄을 기꺼이 '변종교배'를 통한 집안을 업그레이드 시킬 존재로 받아들이는 융통성까지 발휘하니. 이제 바야흐로 서봄과 한정호네 식구의 진정한 '융합'이 이루어지는가도 싶었다. 더구나, 한정호네 집안의 시스템을 재빨리 학습한 서봄이 '작은 마님'으로 등극하니, 그녀의 입지전적 성공기로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였다. 

하지만, <풍문으로 들었소>는 그리 호락호락 '화해'의 손을 내밀지 않는다. 오히려 잠시 '작은 마님'에 취했던 서봄이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한인상과 함께, 한정호에 대한 반란을 도모하면서, 이 평화로운 모드는 균열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아버지의 교모한 법리적 해석으로, 작은 아버지와, 민주영의 오빠가 다니던 회사의 노조 사람들에게 부당한 결과라 판결되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심리적, 신체적 손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서봄과 한인상은 민주영을 도와 그 일을 해결하고자 한다. 

여기서 한정호의 아들 한인상은 그가 서봄을 택했듯이, 아버지와 다른 길을 선택한다. 그의 달느 선택을 묻는 서봄에게, 그간 자신이 먹여 키웠던 그 돈의 근원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는다. 그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어려움을 외면하면서, 그들을 핍박하면서, 그 반대편에 서서 지금의 한송을 만들어 왔는지 어렴풋하게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정호 괴물로 키워지다
그리고 이런 아들 한인상의 깨달음과 부끄러움의 맞은 편에 한정호의 후안무치가 있다. 공교롭게도 아들 한인상이 대산 노조의 끝나지 않는 법정 투쟁에 함께 하기로 마음을 먹은 그 시점에, 그 아버지인 한정호는 첫사랑 지영라에게 다시 눈이 먼다. 그의 어머니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와 이루어 질 수 없었던 재벌집 안주인 지영라, 번연히 남편이 있는 그녀에게 그는 다시 마음을 빼앗기고, 그 마음을 숨기지 않고 질주한다. 

그리고 <풍문으로 들었소>라는 제목답게, 그 소식은 한정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스캔들'이 된다. 심지어 그의 아내와, 아들과 딸조차도. 
그렇게 남의 아내라는 현재의 처지조차 상관없이 함께 외국 여행을 꿈꾸는 그를 두고, 그의 아랫 사람들은 뒷담화를 한다. 어린 시절부터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꺼질세라 키워졌던 한정호, 심지어 사춘기 시절 혹시나 여자 문제를 일으킬까, 과목 별로 이쁜 여자 선생님을 붙여주었다는 부모 밑에서, 그는 오로지 자기 자신이 최고인 줄 아는 '괴물'로 키워졌던 것이다. 그렇게 그를 괴물로 지칭한 그의 비서는 덧붙인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한정호 식 교육을 부러워해서, 너도 나도 그런 방식을 본땄다고. 

아들의 2차적 성징과 그에 따른 자연스런 호기심조차도, 과목별 이쁜 과외 선생님을 통해 충당해 주는 부모들, 그렇게 성적인 관심조차도 케어받은 아이는, 자라서, 자기 자신은 물론, 타인의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괴물이 되었다. <풍문으로 들었소> 한정호가 가장 잘 하는 것은, 바로 그에게 닥친 상황에 임기 응변과 합리화에 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한정호에게 스킬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바람핀 것을 알고 그의 머리를 박은 아내에게, 먼저 용서를 하겠다는 엽서를 보냈듯이,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내에게 사과의 선물을 비서를 시켜 보내면서, 동시에 지영라에게도 선물을 보내듯이, 도무지 '인간적인 반성'을 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아내의 분노 대신, 아내가 혼자 먹는 라면에 더 눈이 가고, 자기 자신을 챙겨주지 않는게 더 화가 나는 사람, 아내와의 싸움에서, 그녀가 자신이 애지중지 하는 머리칼을 움켜 쥔 것에 분노하는 한정호에게, 진정한 반성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타인에 공감'할 수 없는 오로지 '자기'만으로 존재하는 한정호를 그를 오래도록 수행한 비서는 거침없이 '괴물'이라고 부른다. 

이제 중반에 들어선 <풍문으로 들었소>는 그저 드러난 갑들의 속물적 행동 양태를 넘어, 그들의 '속물성'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해부한다. 그리고 그 해부를 위해 가장 사적인 한정호의 '바람'을 등장시켰고, 그 과정에서 그가 어떻게 '괴물'로 성장되어 왔는가를 그려낸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갖추어줘서 괴물이 된 그의 맞은 편에, 이제 막 '자각'과 '부끄러움'에 첫 발을 딛은 한인상과 서봄 부부가 있고, 다시 그 구석에, 몸도 마음도 '무소유'라 떳떳하고 초라한 서봄의 아버지가 있다. 

서봄의 아버지는 그의 아내에게 한없이 당당하지만, 무기력하고, 아내와 아들 앞에서도 부끄러움조차 느낄 수 없는 괴물 한정호는 모든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저 드라마 속 한정호와 서형식(장현성 분)의 존재가 아니라, 슬프게도 우리가 사는 사회 속 관계의 상징이다. 우리가 매번 총리를 갈아치우고 또 갈아치워도 매양 그 사람이 그 사람일 수 밖에 없는 이유, 국회 검증 과정에서 털면 털수록 각종 비리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이유를, <풍문으로 들었소> 속 한정호를 통해 알게 된다. 그렇게 부모 대에서부터, '도덕'이라고는 '개나 줘버리듯'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순종'으로 '양육'되어져 온 그들은, '타인'에 대해 '배려'는 커녕, '타인'의 존재를 느끼지도 못하는 '도덕적 불감증' 괴물들인 것이다. 그런 한정호들이기에, 민주영의 오빠나, 서봄의 작은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의 고통 따위는 가볍게 즈려밟고, 마치 '타짜'들이 화투판을 '작전'짜듯이 이 나라의 법을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주무를 수 있는 것이다. 풍자의 도를 더해가는 <풍문으로 들었소>, 우리가 만나게 되는 건, 괴물 한정호, 바로 우리 사회 갑 오브 갑들이다. 

by meditator 2015. 4. 22. 05:49

<건축학 개론>으로 시작되었던 90년대 열풍이, <응답하라> 시리즈로 만개하더니, <무한도전 토요일토요일은 즐거워9이하 토토즐)>로 대미를 장식하였다. 그 시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은 <무한도전>에 등장한 그 시대의 가수들을 보며 함께 웃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그 시대를 추억하였다. 그리고 그 추억의 잔향은 깊었다. <무한도전 토토즐>이후 많은 사람들이, 그날의 충격을 되새김질했고, 짚어보려고 하였다. 4월20일 방영된 <mbc다큐스페셜-90년대와의 인터뷰> 역시 그 일환이다. 




X세대라 칭해졌던 90년대의 문화 
시작은 역시 <무한도전 토토즐>이다. 방송에 등장하지 않았던 90년대의 대표적 가수 김원준을 시작으로, 90년대에 청춘이었던 만화가 김풍, 영화감독 장항준, 주부 박모아, 치킨집 사장 등을 통해 그 열풍의 근원을 추적해 본다. 
자신이 출연하지 않았음에도 몇 번을 돌려보았던 김원준, 방송을 보고 함께 춤을 추다, 공부만 하지 않았던 엄마의 과거를 들켜 무안했던 주부 박모아씨, 그리고 결국 관객석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는 김풍까지, <무한도전 토토즐>은 그들에게 '청춘'의 시절을 되살려 준다. 마치 영화<건축학 개론>에서 배우 이제훈이 귀에 이어폰을 꽂고 김동률의 '이제~'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를 듣는 순간, 함께 90년대의 그 시절의 감성으로 회귀하듯이, 그렇게 <무한도전 토토즐>에 등장한 이제는 나이든 가수들이 한참 활동하던 자신들의 젊은 시절에 대해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열광했던 90년대의 그 시대는 어떤 것이었을까? 90년대 열풍에서 한 발 더나아가, 다큐는 그 시대를 규명한다. 
이른바 'X세대'라 불리웠던, 최초로 세대명을 부여받았던 , 하지만 그 다양성과 자유분방함으로 정의내릴 수 없는 정체성을 가진 X세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가방을 사도 'X제너레이션'이라고 새겨져 있던 시대, 90년대의 청춘들은 그들이 원하는 삶을 살고자 분출했다. 이에 대해, 그 세대 김풍은, 즐겁고 재밌는 것을 위해 심취하고 파고들었던, 그래서 가볍지만은 않았던 세대'라고 정의내리고, 우석훈 교수는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았던 현대적 세대'라 정의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있었던 X세대는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을까? 그 시대적 배경을 짚어본다. 바로 거기에는 IMF이전까지 마지막 황금기를 누리던 한국 경제가 있었다. 장항준의 말대로, 꿈을 꾸기 위해 살았던, 대학을 나와도 어떻게든 취직이 되든, 다른 것을 하든,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았던 경제적 풍요를 자신의 꿈과 즐거움으로 환원할 수 있었던 세대의 경제적 배경을 짚어본다. 또한 그 꿈은 당시 '벤처 사업' 등으로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삐삐'에서 'PC통신'을 거친, 아나로그와 디지털의 두 문화 사이에서, 90년대의 X세대들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문화 지형에서, 각자의 꿈을 현실화시켜 나가고자 하였고, 그것이 가능한 시대였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면에, 우리가 간과한 역사의 비극도 있다는 사실을 다큐는 놓치지 않는다. 진압하는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강경대 군의 치사 사건이 있었고, 그에 대한 극렬한 시위 과정에서, 학생 운동의 고립화도 함께 진행되고 있었다. 개성을 중시하고, 자아를 존중하는 X세대에게 더 이상 공동의 적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싸워나가자는 구호는 공허했다. 광장에서 함께 어깨를 겯고 노래를 부르는 대신, 화려한 조명이 켜진 노래방에서 절규하듯 독창을 했고,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노래 운동패의 노래를 '음악'으로 환호했다. 

화려한 시절 이후 X세대의 삶은?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우리 사회를 강타한 IMF와 함께 한국 사회의 풍요도, 90년대의 화려한 문화도, 그리고 X세대의 자유도 함께 마무리되었다.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풍 백화점이 주저앉듯이 잘 나가던 한국 경제가 브레이크가 걸리고, 그 경제의 융성을 즐기던 세대도 함께 무너져갔다. 90년대의 대표적 가수였던 김원준은 자신의 쇠퇴기와 함께 하던 한국 사회의 몰락을 지켜보았고, 한때 잘 나가던 벤처 사업가는 이제 치킨집 사장이 되었다. 

그래서 <90년대와의 인터뷰>는 말한다. 성수대교가 무너지듯 스스로 주저앉아버린 IMF이후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90년대 세대에 대해, 그들은 그 이전 6,70년대를 경제 성장을 위해 희생한 어른들에, 7,80년대를 정치적 민주화를 위해 싸워왔던 선배들에, 그들에 비해 풍요로운 삶을 누렸지만, 그저 물질적 문화에 탐닉한 측면이 있었다고. 부식되어가는 한국 사회에 눈을 돌리지 않고, 자신들에게 던져진 풍요를 즐기다, 함께 직격탄을 맞았다고 아쉬워한다. 

그렇다면, 이제 와 다시 언급되고 복기되고 있는 X세대가 현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저 <무한도전 토토즐>을 함께 즐기는 것으로, 그리고 이후 그 명칭에서부터 말썽을 빚은 <토토즐> 콘서트를 보러 가면 되는 것일까?



<90년대와의 인터뷰>는 단지 그 시대를 진단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현재를 사는 그 세대와, 그 가능성, 한계를 짚어보고자 하는데서, 이 기획의 의미가 있다. 
그러기 위해 마흔 줄이 된 X세대는 어떻게 살아가는 가를 살펴본다. <무한도전 토토즐>을 즐겁게 본 엄마는, 엄마도 공부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린 아들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그녀가 다니는 댄스 동호회 사람들과 90년대 댄스 이벤트를 마련한다. 보고 즐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SES가 돠어 몸을 흔든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불고 있는 이른바 '키덜트' 열풍의 주인공도 바로 나이든 'X세대'이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찾아서 즐겼던 그 X세대'의 정체성이, 나이가 들어서도 밤을 세워 레고를 조립하는 열정으로 유지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숨길 수 없는 그들의 X세대의 열정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그에 대한 판단에서 의견이 갈린다. 회사를 그만 두고 아이들과 함께 제주로 내려가 집을 짓는 한 가족의 모습에서 보여지듯이, 장항준 감독은, 그 시대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치달았던 열정이, 먹고 살기 위해 달려왔던 우리 사회에 먹고 사는 것만이 아닌 다른 의미를 생각해 보는 여유있는 삶을 생각해 볼 여지를 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반대의 의견도 있다. 90년대의 정치적 안정, 경제적 풍요를 누렸던 세대였기에, IMF이후 가장 큰 좌절감과, 무기력감, 그리고 그런 현실에 저항하는 세대가 바로 X세대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들이, 풍요를 물질적으로 만끽하였기에, 또한 지극히 개인적으로 소비하였기에 그 한계를 뛰어넘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역시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같은 현상을 보고 우석훈 교수는, 그들이 가졌던 문화적 다양성, 그리고 개성이, 획일화된 한국 사회를, 경제적 동물이 되어 뛰어 온 한국 사회의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짚기도 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90년대와의 인터뷰>는 그저 문화적 신드롬으로 등장한 우리 사회의 90년대 열풍을, 한 세대의 특성과, 삶으로 서사적으로 풀어가고 하는 성취를 보였다. 또한 그들이 가진 시대적 한계를 짚었고, 그 시대적 한계가 또 다른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저 90년대 자신만의 문화를 즐겼던 사람들이 아닌, 이제는 어엿한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갈 주역으로 자리매김한 90년대의 X세대에 대해 규명한 점, 그 역사적 사회적 존재를 드러내고자 한 점이 이 다큐의 가장 큰 성과다. 
by meditator 2015. 4. 21. 13:38

4월 18일 두 편의 드라마가 동시에 시작되었다. mbc의 <여자를 울려>와 sbs의 <이혼 변호사는 연애중>이 그것이다. 주말 안방을 찾아간 두 드라마는 각가 9시(8;45)와 10시대를 공략한다. 3년만에 돌아온 김정은으로 화제를 모은 <여자를 울려>는 전작 첫 시청률을 뛰어넘은 14.2%(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로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고, 늘 상대방 mbc의 주말 드라마에 눌려 기를 못펴던 sbs의 주말극 역시 타 드라마를 넘기에는 버거웠지만, 전작이었던 <내 마음 반짝반짝> 마지막 회보다 높은 5.5%로 가능성을 보였다. 그런데 새로이 시작하는 두 드라마들 다른 방송사, 다른 방송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도 공통적인 부분이 찾아진다. 



일하는 여자들, 고척희와 정덕인
mbc 주말 드라마가 다양한 연령대의 여주인공을 등장시켰지만, 전작 <전설의 마녀>에서도 차앵란(전인화 분)과 심복녀(고두심 분)의 가정사가 극의 주된 스토리를 끌고 갔듯이 중장년층의 시점을 중심으로 하였듯이, <여왕의 꽃> 역시 마희라(김미숙 분), 최혜진(장영남 분), 레나정(김성령 분) 등 중년의 배우들이 활약을 한다. 그에 반해 차별성이라도 두듯이, 이미 한예슬과 주상욱의 달달한 러브 스토리를 다루었던 <미녀의 탄생>이후, sbs의 주말극은 상대적으로 젊은 연령대의 사랑 이야기에 촛점을 둔다. <이혼 변호사는 연애중> 역시 다르지 않다. 

<이혼 변호사는 연애중>은 이혼 전문 변호사였던 고척희(조여정 분)가 한때의 실수로 변호사직을 잃고 호구지책으로 그의 사무장이었던 소정우(연우진 분)의 사무장으로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와 연애담을 다룬다. 당연히 이 드라마의 관전 포인트는 이 변화된 갑을 관계에서 빚어지는 갈등이다. 이름에서도 연상되고, 그녀의 책상에 당당하게 놓여진 '처키 인형'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척희는 공포 영화 속 저주의 인형처럼 부하 직원들을 달달 볶으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성취지향형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던 그녀가 자신의 변호사 직을 잃고 이제 어쩔 수 없이 부하직원의 사무장이 되었지만 여전히 변호사 시절의 습성(?)을 잊지 못하여 벌어지는 해프닝이 이 러브스토리의 출발점이다. 

그에 반해 <여자를 울려>의 정덕인(김정은 분)은 스스로 전직을 그만두었다. 동네 양아치 정도쯤은 혼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치우는 이 여자, 전직 강력계 형사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누군가를 때려잡는 그 일이 싫어졌다. 자신이 누군가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더 이상 형사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또한 아들을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것이 아들 학교 앞에서 밥집을 차린 것이다. 하지만, 이 아줌마, 전직을 숨길 수가 없다. 그저 밥이나 팔면 될 것을 폭력으로부터 아이들을 지켜주는 홍길동이 되어버린다. 일진 들과 맞서고, 한 술 더 떠서, 학교 안나오는 아이의 집을 찾아나서다, 그 아버지를 찾아온 일수꾼들과 맞선다. 이러고서야, 말이 밥집아줌마지, 형사 할 때나 마인드가 달라진 게 없다. 

<이혼 변호사는 연애 중>의 고척희와 <여자를 울려>의 정덕인은 모두 따박따박 제대로된 돈을 받던, 심지어는 더 잘 나가던 전직, 변호사와 형사였던 사람들이다. 그러던 그녀들이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전직에서 놓여나, 거친 세상의 그물에 던져졌다. 이젠, 내로라하는 직함 대신, 신참 변호사의 목숨 달랑달랑한 사무장이거나, 학교 앞 밥집 아줌마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하방'된 자신의 새로운 직업에 구애받지 않는다. 이혼을 하겠다는 아줌마를 부추겨 그녀 남편이 든 모텔을 찾아간 고척희는 모처럼 자신의 주 업무 분야 '이혼'에 관한 일을 하게 된 것에 흥분을 감출 수 없다. 정덕인 역시 그녀에게 한낮 가녀린 여자는 저리가라이다. 북한도 무서워 한다는 일진 무리를 상대하고, 야구 방망이를 든 조폭 나부랭이도 무섭지 않다. 하지만 사실, 그녀들이 전직이 변호사였다거나, 형사였다거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녀들이 이제 변호사가 아니건, 형사가 아니건, 겨우 일개 사무장이건, 밥집 아줌마이건, 그녀들은 여전히 자신의 삶의 주도성을 놓치지 않고 맹렬하게 적극적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진취적 삶을 사는 주말 드라마 속 여주인공들
물론 <여자를 울려>의 정덕인의 결혼은 위태롭고, 그녀의 결혼 생활은 남편은 물론 시댁 식구까지 거둬먹여야 하는 현모양처 형이고, 고척희는 이혼 변호사로 날리며 번 돈을 몽땅 동생을 위해 퍼부어 주어 집조차 없는 신세이지만, 그래도 그녀들은 자신의 삶에 열렬하다. 자신의 일이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위치야 어떻든 자신에게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중심으로 세상과 싸워나갈 '전사'들이다. 다소곳이 남자에게 차이고 버려져 복수의 칼을 갈던 여자들의 세대와 다른 삶의 양식을 가진다. 그녀들에게는 전문적이었던 일이 있었고, 지금도 호구지책이든 어쨋든 그녀들의 삶의 중심엔 '일'이 있다. 그 일을 매개로 가족을 먹여 살리고, 남자를 만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이것이 새로이 등장한 주말 드라마 속 여성상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게 이렇게 새로이 시작한 주말 드라마 속 여성들이 진취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데 반해, 그녀의 상대로 등장하는 남자들은 영 시원치 않다. <이혼 변호사는 연애중>의 소정우는 이제는 고척희의 사무장이었던 시절을 벗어나 변호사가 되었지만, 아직도 고척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변호사 200만 시대에 그녀를 좋아하던 친구의 소개로 겨우 변호사 자리를 얻었지만, 신참 변호사인 그의 능력은 아직 검증된 바 없다. 이혼을 하겠다고 찾아온 여자에게 남편의 장점을 공책 하나로 써보라는 소정우의 갈 길은 아직 멀고, 고척희가 나서서 도와줄 수 밖에 없어 보이는 애숭이 변호사이다. <여자를 울려>의 고등학교 교사 강진우(송창의 분) 역시 모양새가 그렇다. 2회, 학생 집을 찾아가 일수꾼에게 몰리자, 그걸 나서서 물리친 사람은 정덕인이다. 그녀의 뒤에 숨어 전전긍긍하고, 심지어 다리를 접질러 정덕인 등에 업히려 하고, 완전히 여성과 남성의 전형적 역할이 전복되어 나타난다. 

이렇게 기존 드라마에서 보여지던 여성과 남성의 관계가 전복되어져 나타나고, 거기에 여성들은 자신의 일을 중심으로 열렬하게 살아가는 모습, 그것은 현재 우리 사회 속 여성들의 모습을, 혹은 기대되어지는 모습을 반영한다. 심지어, 좋은 남자를 만나는 대신에, 무엇이 되었든 스스로 호구지책을 해결해야 하는 현실조차도 냉정하게 담는다.  <여자를 울려>와 <이혼 변호사는 연애중>의 고척희가 억척스러우면서도 정겹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by meditator 2015. 4. 20. 11:25

4월 16일 잊지 않겠다며 우리 사회가 눈물 흘리며 기억하려 했던 '참척'의 시간이 흘러 어느덧 1년이 되었다. 하지만, 잊지 않겠다던 다짐이 언제였냐는 듯이 사람들은 '이제 지겹다'고 말하고, '언제까지 할꺼냐'고 다그치고 외면한다. 세월호를 인양하겠다던 정부는 정부의 목을 죄는 정치적 사건이 터진 다음에야 마지 못해 팽목항을 찾아 세월호를 인양하겠단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국가가 우릴 벌레보듯 한다'며 진실을 밝혀 달라며 삭발까지 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그렇게, 아이들을 잃은 마음으로 하나 되었던 나라가, 저 마다 이기심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채 다시 한번 부모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기고 있는 이 시점, 세월호 사건 1년을 맞이한 방송들의 모습은 어땠을까?




1주기를 추모하는 저마다의 방식
세월호 1년을 맞이하여 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곳은 역시나 각 방송사의 뉴스 프로그램이다. <jtbc>를 비롯한 뉴스들은 팽목항에서의 세월호 1주기를 비롯한 세월호 사건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꼭지들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jtbc뉴스에서 세월호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지난 1년 우리 사회가 빨리 세월호를 잊고 지워버리려 했을 때, 꿋꿋하게 세월호가 난 지 며칠이라는 것을 환기하며 세월호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자 하는 노력을 경주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뉴스들에게 세월호 1주기가 새삼스러운 1주기 특집 꼭지였다면, <jtbc뉴스>의 세월호는 늘상 해오던 일의 연장 선상이었다. 세월호 사건 이후 지킴이처럼 수척해져가면서 팽목항을 지키던 김관 기자를 다시 팽목항으로 내려보내어 그곳의 동정을 전하는 <jtbc뉴스>가 새삼 울컥하게 전해지는 이유는, 그 길고 지난한 노력의 시간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세월호 1주기를 기리기 위해 각 방송사는 드라마는 방영하는 대신, 각종 예능 프로그램을 다큐나 영화로 대체했다. 공중파 중에서 유일하게 특집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방영한 곳은 kbs1tv뿐이었다.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나서 오랜 시간 방송을 전폐한 채 아픔을 함께 하려했던 방송의 모습에 비하면 그 세월의 간극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편성표였다. 

kbs1tv의 세월호 1주기 특집은 2부로 구성되었다. 1부는 <천 개의 기억, 천 개의 바람>으로 가족을 잃은 아픔에 고통받는 세월호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참사 1년 아직도 팽목항을 떠나지 못하는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아닐까', 그게 가장 힘들다는 사람들, 그리고 유가족이 되고 싶다는 슬픈 바람이 아직도 그곳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낸다.또한 '천벌이 다름아닌 자식의 장례를 치는 것이라며'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3보 1배 30만번의 절을 하며 그리움의 힘겨운 걸음을 걷는 이들을 조명한다. 
그리고 사제가 되고 싶었던 소년이 다니던 성당에 모여 그를 기억하고 치유하는 사람들을 통해 상처의 치유에 대해 고민해 본다. 후배들을 통해 '뮤지컬'등의 방식을 통해 기억되는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멈춰버린 시간도 담는다. 

이어 2부는 좀 더 구체적으로 세월호 이후 남겨진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모색을 한다. 생존했지만 지독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일상 생활이 힘겨운 또 다른 피해자들의 모습을 조명하고, 세월호 참사 이후 1년 아직도 출범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진상조사 위원회'와 세월호 인양과 관련된 해법을 찾아보고자 한다. 또한 우리 사회 안전 불감증 문제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외국의 사례를 통해 모색을 한다. 

이렇게 kbs1이 2부작 특집을 통해 세월호 참사 1년의 고통과 과제들을 총체적으로 되돌아 보고자 한데 비해, mbc는 2014년 5월 20일 25일 2부작으로 방영되었던 재난 특별 기획 <기족의 조건>을 한 회 분으로 재방하였다. 또한 sbs 역시 2014년 11월 9일 sbs스페셜로 방영되었던 <망각의 시간, 기억의 시간>을 다시 방영하였다. <기적의 조건>은 재난을 당한 해외 각국이 그 재난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시스템을 갖추어 가는 과정을 각국의 사례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재난 이후의 과제를 설파한 수작이었고, 역시나 <망각의 시간, 기억의 시간> 역시 팽목항에서 시작하여 일본과 독일의 사례를 통해 '현재 진행형'인 재난 기억 방식을 다룬 작품이었다. 두 작품 모두 훌륭한 작품이었지만, 과연 세월호 참사 1주기 우리 사회의 달라진 패러다임을 적절하게 대변할 작품이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아쉽다. 



1주기에 짚어야 할 이야기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이하여 이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에 가장 큰 이슈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세월호 자체를 인양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이다. 또한 삭발을 하며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30만번의 절을 하며 '진실을 규명해 달라'고 절규하는 유족들의 외침이다. 1주기를 맞이한 방송이었다면 그런 현실의 외침을 외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4월 11일 방영된 <추적 60분-세월호 가족의 멈춰버린 1년>은 여느 세월호 다큐처럼 여전히 팽목항을 지키고 있는 실종자 가족들으로 부터 시작된다. 아픈 몸을 이끌고도 팽목항을 떠날 수 없는 엄마, 심지어 엄마는 혹시나 딸이 돌아올까봐 큰 수술조차도 미룬 채 딸을 기다린다. 또한 여섯 살난 딸만 생존한 권재근 씨 가족, 유가족이 되고 싶다는 허가윤의 엄마, 다큐는 이들의 기다림이 현재형이라는 시점을 놓치지 않는다. 또한 그 고통을 담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실종자 아홉 명이 배 안에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고심한다. 그리고, 그렇게 애달픈 가족들의 고통을 달래기 위해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세월호를 인양하는 것임을 단호하게 직시한다. 그저 그들이 가족을 잃어서 안타깝고 슬프다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들의 고통을 달래줄 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4월 14일 방영된 kbs1의<시사기획 창>은 1주년을 맞이한 여러 기획 들 중 가장 날카롭게 벼려진 작품이다. 다큐는 반문한다. 1주기를 맞이하여 다시 한번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정말 '추모'라고 생각하는가 라고. 그리고 세월호 참사의 의미를 되짚는다. 세월호 참사는 그저 하나의 재난 사고가 아니라, '돈'을 향해 달려왔던 한국인의 자화상이라는 재미 언론인의 말을 다시 한번 복기한다. '절제하는 브레이크 대신 엑셀레이커가 내장된 한국인의 자의식, 빨리 빨리 돈 벌어야 하고, 빨리 빨리 성공해야 하는 그 자의식이 선진국으로 부상하는데 원동력이 되었지만, 균형과 절제력을 잃으면서 한국을 부식시키고 있으며, 그 상징이 바로 세월호 참사'라는 것이다. 또한 이런 의식이 사회 전반을 사로 잡는 가운데, 남을 위해 희생하기 보다는 내 잇속을 차리는 것이 당연히 되었고, 그러니 해양 마피아나, 이익을 위해 외화를 빼돌리고 배을 개조한 선주를 방치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짚는다. 

<시사 기획 창>의 가장 예리한 지적은 바로 현재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잊고자 하는' 의식의 프레임에 대한 비판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는 그 사건의 본질을 조명하고, 그것을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반성과 시스템에 대한 개선으로 가져 가는 대신, 서둘러 희생양을 마련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수순으로 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이어서는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그래왔듯이 재난은 또 다시 되풀이 될 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얼마전 일어난 인천 대교 100중 추돌 사고가 그랬듯이. 나만 아니면 돼 라고 우리가 외면한 참사들이, 우리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면 언젠가 우리의 삶을 강타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한다. 

이렇게 <시사 기획 창>이 정공법으로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이한 우리의 과제를 정확하게 짚는다면, <썰전>은 참사 1주년 기획 '여론 조사'를 준비하였다. 4월 16일의 여론 조사가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 사회에 팽배한 '잊자' 혹은 '지겹다'라는 여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파헤쳤다는 것이다. 이 날의 여론 조사 결과, 현재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이하여 '지겹다', 잊자' 라는 여론의 중심 연령층과 지역 대가 보수층의 지지층과 정확하게 겹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사회의 여론이라는 것조차, 보수의 프레임으로 씌워진 채 그것이 보편적 여론인 양 득세하고 있다는 것을 <썰전>은 정확하게 분석해 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세월호 인양 반대'라는 것이 대중의 자연스런 여론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조작된 여론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일베 어묵 사건'을 예로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우리 사회에 횡행하는 세월호에 대한 악질적 '프로파간다'를 짚는다.



1주기를 맞이하여, 아직도 끝나지 않은, 아니 오히려 1년이 지나가면서 더 심해 깊은 곳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세월호 참사을 과연 방송들이 공익의 자세로 접근했는가를 짚어보았다. 다큐와 토론 프로그램으로 1주기를 맞이하여 저마다 그날의 슬픔을 기억하고 그 과제를 다시 되새겨 보려고 했지만,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꾸준한 환기와 노력이 경주되어 왔는가에 대한 반성이다. 1주년 특집도 좋지만, 지난 1년간 자식을 잃은 가족들의 아픔을 달래주고, 그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해 방송이 진지한 노력을 경주했는가, 반성해 보아야 할 시간이다. 


by meditator 2015. 4. 17. 13:08

'우연희 내게 오나봐, 봄 향기가 보여'

<냄새를 보는 소녀> ost 중 '우연희 봄'이라는 노래이다. 그 노래의 봄향기처럼, 최무각(박유천 분)에게 '동생'이 왔다. 물론 지금은 '아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동생이다. 하지만, '아는 여자; 였던 그 관계는 이제 차츰, 스며드는 향기처럼 '동생'에 더 방점이 찍혀간다. 

최무각에게 '동생'이란 어떤 존재일까? 제주도에서 아직 동생이 죽기 전, 수족관을 찾아와, 상장을 자랑하던 동생에게 최무각은 '아유, 내 새끼'라고 너스레를 떤다. 내가 오빠 자식이냐며, 그래서야 장가는 가겠냐며 퉁바리를 주는 동생에게, 최무각은 너를 시집보내놓고, 나는 장가를 가든가 말든가 하는 동생 바보다. 아니, 그에게 동생은 정말 자식같은 존재였다. 그런 동생이 죽었다. 그것도 작은 상처로 간 응급실에서 비명횡사를 하고 만다. 더 억울한 건 도대체 누가, 왜, 동생을 죽였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동생을 잃은 상실감에 잠도 잘 수 없었던 최무각은 며칠인가 잠을 못이루며 괴로워하다 수족관에서 정신을 잃었고, 그 후유증으로 감각을 잃었다. 그리고 무능한 경찰이 원망스러운 최무각은 스스로 범인을 잡아죽이겠다며 경찰이 되었다. 



최무각의 변화
그리고 3년이 흘러, 그의 앞에 어떤 여자가 나타났다. 동생을 잡은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정보에 접근하기 위해 강력반에 들어가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그의 앞에, '수사를 도울테니, 만담을 해달라는' 이상한 여자가 말이다. '이 여자야, 지금이 그럴 때니!'라며 힐난하던 최무각은 그녀의 냄새를 보는 능력이 범인을 잡는데 매우 탁월한 힌트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냥개처럼 그녀를 데리고 범죄 현장으로 향한다. 대신 만담 파트너를 해주고. 

그렇게 호혜적 쌍방간의 이해 관계로 만났던 두 사람, 5회에 들어 두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사빠'처럼 첫 만남부터 자신을 질주하는 차로부터 구해주던 최무각에게 눈빛이 흔들리던, 그리고 자신의 본래 눈빛을 보고 자신 역시 괴물이며 외계인이라 말해주는 오초림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밥을 먹어도 배부른 걸 느끼지 못한다는, 그리고 상대에게 진탕 얻어 맞아도 눈빛하나 흔들리지 않던 최무각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최무각과의 만담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하는 오초림의 말에 최무각의 눈빛이 흔들린다. 약속을 어긴 최무각 때문에 개그 극단에서 쫓겨나고, 술에 취해 경찰서까지 데리고 온 오초림을 최무각은 한참이나 들여다 본다. 그리고 다음 날 그녀를 '아는 동생'이라고 소개하더니, 이제 5회에서는 그 예전 동생에게 주었던 인형을, 동생을 생각하며 그녀의 납골당에 다시 갖다 놓았던 인형을 1*1이라는 핑계를 대며 오초림에게 준다. 무엇보다, 동생을 잡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던, 최무각이 그의 최고의 수사 비법이던 오초림을 포기하겠단다. 그녀가 위험에 빠질까봐. 

뿐만 아니다. 이 사람이 무감각한 남자가 맞나 싶게, 최무각의 변화가 짚어진다. 드링크제를 사들고 경찰서로 찾아온 그녀가 신경쓰이고, 그녀가 다른 남자들에게 관심을 보이면 더 신경이 쓰인다. 어느새, 우리 오초림이란다. 그러곤 언제나 오초림이 앞에선 타박이다. 혼자서 사건을 쫓았다고 야단치고, 그래서 무릎에 난 상처를 보고 야단치고, 그래도 안쓰러워 약을 사다줘놓고서는 약을 발라주지는 않고 바쁘다며 휭 하니 가버린다. 딱, 무뚝뚝한 오빠 모습 그대로다. 물론, '오빠 구려'란 동생의 말에, '넌 예뻐'라고 응대하는 동생 바보 오빠의 모습 그대로는 아니지만, 자꾸 '아는 동생' 오초림에게 최무각의 경계는 풀려가고, 걱정인지, 사랑인지, 그녀에게 신경을 쓴다. 술김에 머리에 국물이 튀었다며 머리를 쓰다듬기 까지 한다. 

동생을 사랑하는 것을 자기 삶의 존재 이유로 삼았던 최무각, 그래서 삶의 이유를 잃고, '복수'만을 마음에 새겼던 최무각에게, '아는 동생' 오초림이 들어와, 마음마저 굳었던 그의 감각을 조금씩 말랑말랑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무감각한 사람 맞아 싶게, 한결 부드러워진 최무각의 변화, 그의 치유의 시작이다. 



로코 8, 수사2의 딜레마
그런데 아쉬운 것은, 이렇게 봄바람처럼 찾아온 최무각의 변화가, 5회를 맞이한 <냄새를 보는 소녀>에서 충분히 만끽하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최무각에겐 동생 죽음의 실체를 알게 된 충격적인 한 회이자, 동시에, 그 동생을 대신할 '아는 동생'이 한결 더 스며든 한 회였는데, 레스토랑 살인 사건 에피소드를 한 회만에 종결짓겠다는 욕심이, 마치 '빨리 감기'를 하듯 숨도 쉴 틈이 없이 그래서 주인공의 감정선에 집중할 여유도 주지 않은 채 한 회를 밀어부쳐 버렸다. 

미드 수사 드라마 들 중, <ncis>등과 같이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중심이 되어 수사를 이끄는 드라마들의 경우 사건 수사 과정에 실소가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수사극으로 보자면, <냄새를 보는 소녀>도 그와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제작 발표회에서 백수찬 pd의 언급대로 로코 8에 수사 2의 비중으로 드라마를 끌고 가고자 하니 자연스레 극 중 수사는 구렁이 담 넘어 가는 식일 수 밖에 없을 듯하다. 하지만, 4회에 이어, 5회에 보여진 사건 수사 방식은, 차라리 '수사'가 없는 게 낫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냄새를 보는 소녀>의 딜레마로 작용하고 있다. 

물론, <냄새를 보는 소녀>의 수사가 기본적으로 어불성설인 것은 분명하다. 수사라고는 하지만 결국은 오초림의 냄새를 보는 능력이 결정적 힌트를 제공하기 때문에, 선무당이 사람잡듯 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충 넘어가는 것에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데, 4회 가짜 바코드 사건에 이어, 5회 또 다시 최무각의 단정적인 언어로 모든 사건을 해결해 버리면, 제 아무리 '로코'에 집중한 시청자라도 실소가 나올 수 밖에 없다. 게다가 5회 초반 홀로 범인을 쫓던 오초림에게 슈퍼맨처럼 등장하는 최무각은 뻔히 그럴 줄은 알았지만, 너무 개연성 따윈 개나 줘버리듯 느닷없이 등장에서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도 재미가 덜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이미 기존 시청층을 쥐고 있는 앞선 두 작품을 따라가야 하는 후발 주자로서, 스피드한 사건의 전개가 관건이라 여겼던 듯 싶다. 거기에 큰 수사의 줄기로 바코드 살인 사건을 두고, 매회 에피소드 식으로 바코드 사건에 힌트를 제공하는 작은 사건들을 배치하다보니, 한 회 안에 그걸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같은 것이 제작진에게 작용한 듯 싶다. 하지만, 5회를 보면, 주인공들의 감정선조차 무언가에 쫓기듯 허겁지겁 우겨넣는 듯한 편집에, 감자탕 집에서 쓰러지듯 자던 무각이 다음 장면 대뜸 벚꽃 나무 아래서 자고 있으면 제 아무리 벚꽃이 아름답다 한들,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이다. 

생방에 쫓기는 하는 촬영에, 허겁지겁 많은 내용을 보여주어 견물생심으로 시청자들을 낚으려는 얕은 수 보다는 기왕에 반응이 오고 있는 주인공 두 사람의 감정을 좀 더 차분하게 따라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자신의 냄새 보는 능력을 믿고 범인을 쫓다 위험에 빠지는 여주인공 에피소드는 그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한 회 분량으로 시청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을 텐데, 굳이 거기에 레스토랑 사건 완결이라는 무리수를 쓰다보니 의욕 과다다. 냄새보는 능력으로 범인을 쫓는 에피소드는 원작에 기반을 두었다 치더라도, 형사와 동생의 옷에서 나는 아기 용품 냄새로 범인을 쫓고, 쑥과 비슷한 향기를 지닌 대마초를 추적하는 에피소드는 그 자체로 이해하기도 쉽고, 설득력있는 스토리였는데, 그것들을 너무 겉훑기식으로 다루다보니, 개연성이 떨어져 '추리'에 관심을 가졌던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게 된 것이다. 거기에 뜬금없이 '코난'이 되어버린 최무각의 선견지명 역시 이질감이 돋는 건 어쩔수 없는 것이다. 그의 사건에 대한, 혹은 수사를 잘 하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은 별개의 부분인데, 그의 입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어 버리면, 매력이 아니라, 실소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어수선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냄새를 보는 소녀>가 가진 두 주인공의 매력은 회를 거듭할 수록 배가되고 있다. 스피디한 전개 속 허겁지겁 연결된 씬들에서도, 세상 어디에도 없는 평범한 오빠같은 '츤데레' 최무각과, 그녀의 오지랖과 헤픔마저 사랑스러운 오초림의 매력은 숨길 수 없다. 오히려 단점이라면 이 두 사람이 호흡와 연기가 좋다보니, 두 사람이 함께 있지 않은 장면들이 눈에 띄게 심심해 진다는 점이다. 부디 이런 장점을 잘 살려, 시청률에만 급급하지 않고, 주인공 두 사람의 감정선을 제대로 살려 치유의 드라마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래본다. 
by meditator 2015. 4. 16. 09:31

4월13일 첫 선을 보인 mbc 월화 드라마 <화정>, 50부작의 포문을 연 것은 다름아닌 단 한 회만에 생을 마감한 '선조'(박영규 분)였다. 자신의 아들 중 하나였지만 광해군(차승원 분)이 누군인지 알아보지도 못한 아비, 사랑하는 애첩의 아들 대신 죽어도 될 만만한 존재로 세자를 책봉한 얍삽한 아비,  야반도주를 하다시피 궁을 버리고 떠나는 자신을 대신해 백성을 독려하고, 왜군에 맞서싸우던 자신보다 더 '임금님' 같던 세자를 정적으로 여기던 아비, 그는 명의 고명을 핑계로 16년이나 된 나이가 지긋한 세자 대신, 왕후의 몸에서 난 어린 대군을 세자로 다시 옹립하려 한다. 


이렇게 <화정>은 문제적 인물 광해군을 설명하기위해, 그 보다 더 문제적 인물이었던 아비 선조를 등장시킴으로써, 광해군이 가진 존재론적 고뇌를 단번에 설명해 낸다. 아직도 역사상 정당한 임금으로 대우받지 못한 채 군으로 남겨진 문제적 군주 광해를 설명하기 위해 당시의 정치적 세력의 대력부터, 광해군의 중도적 외교 노선 등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이 첫 회의 서막만으로도, 선조의 편을 들어 어린 세자를 옹립하려 했던 중신들과, 못이기는척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싶어하는 인목대비, 그리고 그 밖의 왕가의 사람들 사이에서, '아비와는 다른 왕'이 되고자 했으나 결국 그럴 수 없었던 광해의 존재론적 한계를 설득해 낸다. 



'사극의 트렌드로서의 '선조'
역사에도 유행이 있던가? 한때는 사극만 했다하면 '정조'가 등장했었다. <화정> 작가인 김이영 작가의 2007년 작품도 정조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산>이었듯이, 여러 사극들이 개혁 군주로서의 정조의 열망을 그려내기에 앞다투었다. 하지만, 이제 개혁의 기치를 올린 정조 대신, 백성을 두고 줄행랑을 친 선조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2015년 종영한 <왕의 얼굴>에서 부터, kbs1tv의 대하사극 <징비록>, 그리고 이제 새로이 시작한 <화정>까지, 실패한 지도자 선조의 모습을 다각도로 그려낸다. 

<화정>이 자신의 아들을 정적으로 여기며 그를 몰아내고자 하자 목숨을 잃은 노회한 아비의 모습으로 선조를 그렸다면, <왕의 얼굴>은 광해를 백성을 생각하는 개혁 군주로 그려내기 위해, 아비 선조를 정통성을 가지지 못한 자신의 컴플렉스에 시달리면서도, 끊임없이 아들을 의심하고 조련하는 '소시오패스'적 성향을 가진 인물로 그려낸다. 자신의 부족한 정당성을 '관상'이란 대상에 실어 부족한 자신의 얼굴을 보완해 주는 인물을 찾는데 집착하는 인물, 그래서 자신보다 더 왕의 얼굴을 가진 광해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견제하는 인물로 그려낸다. 

<징비록> 역시 마찬가지다. 주인공은 '징비록'의 저자 유성룡이지만, 실제 드라마적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결정적 인물은 '문제적 인간' 선조이다. 김태우가 분한 선조는, 임금이 될 깜냥이 안되는 인물이, 지도자의 능력을 갖추자 못한 사람이 리더가 됨으로써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그려내는 듯하다. 

왜 선조일까?
백성들을 버리고 평양으로가지 도망간 선조, 그를 원망하는 듯한 일부 중신들의 시선에 선조는 반문한다. 그럼 내가 죽었어야 했냐고. 그리고 그런 시선을 의식한 듯 평양을 배수의 진으로 삼아 왜적들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고자 한다. 군사를 모으고, 자신이 외면한 백성들의 환심을 사고자 손수 백성들에게 장국을 나누어 주는 등 솔선수범 리더의 모습을 보이고자 한다. 하지만, 군령이 혼란을 겪는 시기, 자신이 임명한 군 지도자를 따르지 않는다 하여 그의 통솔을 벗어난 소속 군관의 목을 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그런 선조의 명령이 잘못된 명령이었음을 알게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선조가 명령을 내린 얼마 후, 적들을 보고 도망간 지도자를 벗어나 직접 적과 맞서 싸워 임란 최초의 전승을 거둔 그가, 적들의 수급을 자랑스레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선조는 절규하며 명령을 다시 내리지만 이미 그 시각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 <징비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까지, 그리고, 전란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잘못된 리더쉽을 끊임없이 보이고 있는 선조를 그려낸다. 김태우의 열연으로 형상화되는 선조는, 자기 중심적인 인간, 그리고 리더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 한 나라의 운명을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를 낱낱이 고발한다. 



그저 드라마일 뿐이라고 할 지 몰라도, 드라마의 트렌드는 귀신같이 사람들의 정서를 복사한다. 정조를 앞다투어 주인공으로 삼던 시기에는, 그래도,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나라를 '구제해줄' 누군가가 등장할 거란 희망의 메시지를 사람들이 기대했었던 듯하다. 그렇다면 이제, 새삼, 재삼 등장하는 선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을 그려내는 방식은 정신적으로 불안한, 혹은 인간적으로 미흡한 등 다양한 접근이지만, 결국 그것이 어떤 것이든, 한 나라의 리더로서의 그릇을 갖추지 못했다는 결론으로 귀착한다. 

한 나라의 왕이지만, 백성을 이끌고, 중신들을 다스려야 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조차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인물, 그래서, 자기 마음가는대로, 결국 자기 자신과, 자기가 끌리는 핏줄을 지키기 위해 정치적 모험을 벌이는 인물, 아들 광해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제대로 된 신하들을 중용하지 못하듯이, 제대로된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 없고, 애초에 그럴 능력조차 가지지 못한 리더의 자격을 가지지 못한 그래서 실패할 수 없는 리더의 존재를 드라마는 끊임없이 복기한다. <왕의 얼굴>은 개혁 군주가 될 광해를 그리고자 했으나, 실패한 리더 선조의 그림자가 짙었고, <징비록>은 아예 대놓고 임진왜란에 피할 수 없는 책임을 가져야 하는 존재로 선조라는 부실한 리더를 그리는데 골몰한다. 그리고 이제 다시 <화정> 역시 혼돈스런 광해를 그리기 위해 그 아비 선조의 부덕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결국 엎어치던 메치던, 리더가 될 깜냥이 안되는 인물이 리더가 된다면, 그리고 그의 좁은 소견과 안목으로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면, 그의 대는 물론, 그의 다음 대까지 역사가 어떻게 절단나게 되는가를, 선조는 계속 증명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런 선조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자기 이익와 자기 주변의 이익, 그리고 자기 이해 관계에 맞춘 리더쉽이 한 나라를 어떤 지경으로 끌고가는지는 우리가 최근 우리 사회의 모습을 통해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선조의 미흡한 리더쉽이 낯설지 않은 세상, 그런 세상에서, 리더를 통한 희망 대신, 실패한 리더쉽을 복기하고 있어야 하는 우리의 처지가 안쓰럽다. 

by meditator 2015. 4. 15. 11:48

건반 악기 하나 공명 상자 안에 85 이상 강철선 망치 설치하고건반 발판으로 연주한다음역 넓고 표현력 풍부하다.


피아노를 설명하는 사전의 항목이다. 하지만 18세기 초에 만들어져, 1900년대 선교사를 통해 이 땅에 첫 발을 들인 피아노란 악기가 우리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지평은 남다르다. 그 현대사의 문화적 상징이자 추억인 피아노가 거리로 나선다.

여유있는 문화의 상징으로 '피아노'
중년이 넘은 기자에게도, 노오란 피아노 가방을 들고 피아노 교실을 다니던 언니는 선망의 상징이었다. 그 언니가 흑백의 건반을 눌러 '음악'을 만드는 장면은 일찌기 보지 못한 신기료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후에, 나에게도 그 신기료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기계적 연습의 반복에 질리면서도, 환타지같은 '연주'의 실마리를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시절, '벽돌로 지은 이층집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라는 광고의 문구와도 같은 문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피아노'는 당시 서민들로서는 부담하기 힘든 가격의 이 악기를 집에 들이고, 매달 배우게 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의 상징이었다. 즉, '피아노'라는 문화를 누릴 수 있는 여유의 필수품이 되어갔다. 나 역시 고학년이 되어서 공부를 하라했지만, 사실은 집안 형편이 매달 피아노 학원을 보내 줄 형편이 되지 못해서였다. 

거리로 나선 피아노에 노인들은 멀찍하니 앉아있다. 차마 다가서지 못한다. 그리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 아이가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했는데 달걀 열 알을 온전하게 살 수 없었던 그 때 형편으론 꿈도 꾸지 못할 이야기였다고. 그 반대편의 이야기도 있다. 월남전에 참전하고, 중동에 가서 돈을 벌어왔던, 하지만 이제는 몰락한 아버지는, 구룡마을 철거전 비닐 하우스 집 구석에서 온갖 물건들을 떠받치며 견디고 있는 낡은 피아노를 버리지 못한다. 왜 피아노를 버리지 못하냐는 제작진의 질문에 아버지는 '미련'이라고 답한다. 딸들의 성화에 못이겨 비싼 피아노를 무리해서 월부로 샀던 늙은 어머니는 이제 딸들조차 가져가지 않는 피아노를 집을 옮길 때가 되어서야 버린다. 

피아노 키드의 탄생
피아노란 악기는 묘하다. 조금만 연습하면 완결된 곡을 연주할 것 같지만, 막상 한 곡을 그럴 듯하게 연주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계적인 연습 기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피아노가 발명된 18세기 이래, 집안에서 아이들의 피아노 소리를 듣기 위해 무수한 연주법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피아노가 문화적 여유의 상징으로 우리 사회 속에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피아노 학원은 호황을 누리기 시작하였다. 부모들은 자신들의 여유를 피아노를 통해 증명하기 시작하였고, 그 여유를 누리지 못한 자식들은, '포한이라도 풀듯이, 자신이 커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래서 언제인가 부터 피아노는 초등학교 무렵 아이들이 거쳐가야 할 필수 학원 코스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여의도 증권가 그곳에 피아노가 놓이자, 뜻밖에도 깨끗한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둘러 맨 남자들이 피아노를 친다. 그것도 제법. 바로 피아노 학원을 전전했던 세대이다. 거기서 만난 한 보험맨, 그는 한때 앨범까지 낸 전직 가수였지만 몇 년 전 보험맨으로 이직했다. 잠자는 시간마저 아깝다는 그는 1조를 목표로 보험맨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제는 악기를 만진지 오래 되어 피아노 코드조차 헷갈리는 그는 기타를 둘러맨 거리의 젊은이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단다. 그 시절의 삶이 얼마나 팍팍한 지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신입 사원 교육에서, 그래서 그는 당당하게 말한다. '대한민국에서의 삶은 '답이 없다'고. 

그런가 하면,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던 피아노를 유일한 밥벌이의 동아줄로 여긴 사람도 있다. 이 다큐의 나레이션을 맡은 유희열은 청소년 시절 어려워진 집안 형편으로 피아노에까지 붙인 빨간 딱지에서 자기 집안의 몰락을 읽었다고 한다. 종이 피아노로 대학 실기 준비를 했던 그는 하다못해 나이트 클럽에 가서라도 피아노 연주를 하여 자기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었다고 하고, 그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그의 여전하 모토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삶의 행복은, 어린 시절 자신과 형이 치던 피아노에 행복해 하던 엄마의 모습처럼, 사진 한 장처럼 소중하게 기억되는 찰라의 감정이라며, 그 감정의 소중함을 놓치지 않고자 한다. 피아노는 이렇게 엇갈린 두 욕망의 교차점이 되어 우리에게로 온다. 

그런가하면 그 욕망은 대를 이어간다. 어린 시절 집이 어려워 피아노를 꿈도 꿀 수 없었던 엄마는 아이를 낳은 후 아이들에게 무조건 피아노를 가르쳤다. 경포대 바닷가를 배경으로 들려오는 아이들의 익숙한, 하지만 기계적인 피아노 연주. 엄마는 계면쩍게 웃는다. 엄마의 열망이 아이들의 즐거움으로 이어지는 것같지는 않다고. 그런가 하면 은행잎이 노오랗게 깔리는 산책길에서 만난 아기 엄마는 아이를 키우던 그 손으로 능숙하게 피아노를 연주한다. 능숙하게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뒷바라지 해주던 아버지, 하지만 그녀에게 아버지는 늘 미흡한 부모였었다고, 이제야 눈물짓는다. 또 이제 막 아이를 낳고, 아이를 낳을 부모들은, 자신들의 부모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도 아이들에게 '피아노 정도는 가르치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진다. 

거리의 피아노, 거리의 삶
거리로 나선 피아노에서는 퍽퍽한 현실의 삶도 엿볼 수 있다. 붕대를 감고, 커피 찌꺼기가 낀 손톱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명동의 젊은이, 한때 호른을 전공했던 그녀는 어려워진 집안 형편 때문에 이제는 바리스타를 하다 인대까지 늘어난 처지에 놓여있다. 부모님이 마음 아파하실까봐 집에선 호른조차 꺼내지 못한다는 그녀에게 피아노는 유보된, 아니, 어쩌면 영영 조우하지 못할 '꿈'의 상징이다. 

우리 사회로 쏟아져 들어 온 조선족들의 집단 거주처 가리봉동에서 만난 중년의 여인은 낯설게 그러면서도 애증의 대상으로 피아노를 대한다. 연변 방송국 pd로 오십 평생 '선생님' 소리를 듣고 살았던 그녀, 하지만 이젠 서울의 한 집 가사 도우미로 날마다 피아노를 닦아야 한다. 닦아도 닦아도 닦은 티가 나지 않는 피아노가 그녀는 이제 싫다. 하지만, 그 피아노를 닦아 모은 돈이 연변의 아파트 한 채이기에, 과거의 흔적을 지운 채 오늘도 '아줌마'로 살아간다. 

단 한 시간, 거리로 나선 피아노를 통해 만난 우리들의 삶은  지난 1년간 거리로 나선 피아노를 통해 완성된 이야기이다. 한때 문화적 여유의 삶이었던 피아노는, 이제 사는 사람보다 파는 사람이 더 많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피아노 배달'만 해도 먹고 살 수 있겠다던 중개상은 이제 낡은 피아노를 중국으로 옮기는 일을 한다. 공장 안을 가득 채운 허름한 피아노들, 그것은 마치 경제 부흥기를 겪고 지쳐버린 우리들의 모습과도 같다. 그저 피아노 한 대, 하지만 그 피아노를 통해 산업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왔던 우리 삶을 꿰뚫어 보고자 했던 <거리의 피아노>, 그 시간은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피아노 연주에 맞춘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온 우리들의 주제가와도 같았다. 서정적이었지만, 결코 서사가 숨겨지지 않는. 
by meditator 2015. 4. 14. 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