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7일자 <비밀> 안도훈(배수빈 분) 이 맘에 들지 않는 조민혁은(지성 분) 그를 만날 때마다 이기죽거린다. 더구나, 그가 자신의 k그룹에 변호사로 들어오자, 그 강도는 더욱 세진다. 조민혁은 안도훈의 아킬레스 건을 건드린다. 정의를 내세우던 니가 영혼을 구걸해 들어온 k그룹은 결국 내꺼라고. 하지만 안도훈도 호락호락지는 않다. 노는 시간조차 아껴 여기까지 올라온 나와 당신은 다르다. 당신은 아버지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이 결정적 차이다. 라고.


<비밀>이란 드라마에서 비밀이 시작된 계기는 교통사고이다. 하지만, 교통사고라는 외면적 계기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바로 안도훈의 사시 합격이었다. 이제는 금의환양만을 앞둔 그에게 교통사고는 청천벽력이다. 그리고 그 하늘이 무너지는 걸 봉합한 건, 사랑하는 이의 희생이었다. 
무능력한 아버지, 식당 일등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 갖은 알바를 전전하는 사랑하는 이, 그리고 무너져가는 동네 빵집을 지키는 그녀의 아버지. 이 모든 사람들의 희망은 안도훈의 입신양명에 달려있었다. 검사가 된 후에도 여전히 생선 몇 상자를 두고 싸움을 하는 그의 부모처럼, 좀처럼 나아지지 않던 그의 집안 환경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사람들이 그에게 바란 것은 그저 '부'만이 아니었다. 정의로운 검사가 되어 '없는'사람들 편에 서달라는 막연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검사가 된 안도훈에게 닥친 현실은 어떤가. 
사랑하는 유정(황정음 분)을 감옥으로 보내는 희생을 치르면서 쟁취한 검사직은, 그에게 '정의'보다는 '줄타기'를 가르쳤다. 그는 비록 뺑소니를 칠 만큼 부도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을 무마할 정도로 정의롭고 싶었지만, 그의 정의는 법원에서 길을 잃는다. 그가 정의로우면 정의로울 수록, 그에게 돌아오는 건 동료 검사들의 비웃움을 넘어 또 한번의 부도덕한 검사라는 낙인이다. 
그리고 그는 쉽게 '정의'를 버린다. 처음 사랑하던 사람을 희생시킨 것을 시작으로, 그는 쉽게 자신의 도덕적 영혼을 판다. 그런 그를 버티는 건, 도덕적 순수성이나 정의로운 세계관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고생해서 이 자리까지 왔는데 라는 자기 희생의 논리와 그에 대한 보상 심리 밖에 없다. 그러기에 더 좋은 '자리'를 위해서는 자기를 제외한 타인의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안도훈을 조민혁은 우습게 본다. 니가 그래봐야, 결국 니가 일하는 건 나를 위해서라고. 유정이를 희생시키기 위해 유정이의 아버지를 죽음으로까지 몰아가는 안도훈을 지켜보며, 그리고 자신의 애인을 죽인 사람이 유정이라 생각하여, 그녀에게 온갖 가혹행위를 일삼던 조민혁이 어느새, 집착적 스토커를 넘어 연민으로 다가가며, 시청자들은 그에게 빠져든다. '조토커, 조스패치'라는 그의 별명들은, 말이 스토커지, 사랑스러움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다. 물론 <비밀>이란 드라마에서 모든 불행의 시작은 안도훈이요, 그의 거침없는 변신과 배신은 분명 지탄의 대상이지만, 아버지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조민혁과 그를 배태한 k그룹이란 권력에 드라마를 보는 우리들은 쉽게 녹녹해진다. 
부도덕한 사고에도 불구하고 정의로우려고 했던 안도훈을 몰아부친 것도, 지금껏 유정이를 그리고 혹시나 사고가 들킬까 노심초사한 안도훈의 곁에 들러붙어 집착을 했던 힘도 결국은 조민혁, 그리고 그를 키운 재벌이라는 사실을 드라마를 보는 우리는 쉽게 잊는다. 그리고 어느새 조민혁과 유정이가 잘 되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을 쉽게 잊는 것처럼. 

하나의 변수가 더 있다. 바로 조민혁의 약혼자 신세연이다. 
4선 국회의원의 딸이자, 그 힘으로 이제는 호텔의 지분조차 획득한 정략 결혼 상대자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경으로, 조민혁이란 재벌과 결혼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녀가 운영하는 갤러리를 통해 k그룹의 비자금 형성에 적극 개입할 정도로, k그룹과의 커넥션은 긴밀하지만, 오히려 그녀를 방해하는 건, 조민혁을 어릴 적부터 의지하고 좋아했던 마음이다. 조민혁의 불성실한 약혼자로써의 태도에 분노하는 그녀가 쉽게 위로를 받는 건, 안도훈이지만, 그건 단지 그의 저돌적 태도때문만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재벌의 그늘에서 그의 힘에 기생하여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왔던, 둘의 태생적 동일성도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돈을 제외한 많은 것들을 가진 그들은 그저 가진 게 돈밖에 없는 누군가를 향해 쉽게 동맹군이 될 수 있다. 

그렇게 k그룹을 둘러싸고,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가, 이합집산을 할 동안, 유정이와 그의 아버지는, 그저 그들의 농간 속에서 가진 것을 다 잃고 갈대처럼 흔들리고 흔들릴 것이다. 



얼마전 모 그룹의 회장 형제가 자신의 경영권 확보를 위해 엄청난 회사의 자금을 잘못된 정보의 선물 거래등을 통해 날려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건 뒤에는 어이없게도 회장의 절대적 신임을 받은 일인이 있었다고 한다. 회사의 정상적 시스템을 통한 투자가 아니라, 일개인의 '신기'에 일임한 투기가,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재계 몇 위의, 가장 첨단의 기술을 다루는 기업에서 벌어졌다. 안도훈의 대사가 떠오르는 장면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버지 밖에 없던 무능력한 아들, 뉴스를 통해 마주한 가진 게 돈밖에 없던 아들의 말로이다.
그런가하면, 이제는 잠잠해지고 있는 검찰 총장의 혼외 자식 논란도 있다. 입 가진 사람들은 다 누구나, 말 안듣는 총장 찍어내기라는 풍설을 거들었다. 정의롭고 싶었으나, 그 자신이 비리 검사가 되어 쫓겨나는 안도훈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무수한 재벌가와 정치권의 결혼 인맥은 예를 들자니 입이 아플 정도이다. 심지어 그들은 정치의 계절이 지나가면 이혼과 소송도 불사한다. 

유정이의 희생, 그리고 안도훈의 배신, 조민혁의 집착이라는 인간사의 이야기에 몰두하게 만들며 야곰야곰, 가장 우리 사회의 정형화된 계급의 전형들이 드러나고 있다. 
조민혁은 가진 게 돈 밖에 없고, 신세연은 그녀가 얻어가진 지분을 통해 권능을 행사하고, 안도훈은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사실은 입신양명을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가진게 없는, 알량한 가진 것 조차 빼앗긴 유정이는 양심껏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며 자신을 농락한 자에게 빛을 갚느라 애쓴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드라마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어쩌면 이 드라마의 진짜 비밀은, 유정이가 희생했던 사건의 진실이 아니라, 회를 거듭할 수록 속속드러나는, 사회적 군상들의 적나라한 모습이 아닐까. 그래서 쉽게 유정이와 조민혁의 사랑을 응원할 수 만은 없다. 




by meditator 2013. 10. 18. 10:24

'남편이 죽었다. 

남편이 죽은 1주기, 남편이 하던 블로그의 이웃들과 함께 남편의 죽음을 추모한다. 그 자리에 남편의 후배라는 여자가 나타난다. 그런데, 후배라는 여자, 이 여자에게서 남편의 향기가 느껴진다.'

보통 우리나라 드라마의 스토리가 여기까지 진행되면, 대체적으로 그 이후에 나오는 스토리의 진행 방향은 '복수'일 경우가 많다. 나를 속이고, 나를 배신하고 딴 '년'을 사랑해? 용서할 수 없어. 죽은 너도, 그리고 너의 사랑을 받은 그 '년'도. 이렇게 되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속담에서도 그러지 않나, 씨앗에게는 부처님도 돌아앉을 거라고. 

그런데 <드라마 스페셜- 그렇고 그런 사이>는 이런 통념의 궤를 벗어난다. 아니, 통념은 통념이되, 그 통념을 좀 더 마음을 열고 들여다 본달까?


오랫동안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았던 예지원은 <그렇고 그런 사이>의 시나리오를 보고 출연을 결정했다고 한다. 드라마를 보니, 예지원이 출연을 결정했다고 하는 그 마음이 십분 이해가 간다. 

<그렇고 그런 사이>는 서울의 오래된 낡은 동네, 그 중에서도 주인공들의 집은 한옥이다. 중2가 되는 딸 유정이(이영유 )가 아토피가 심하자, 남편 태수(조연우 분)가 이곳으로 이사오기로 결정을 했다고 한다. 

화면에서 보여지는 한옥은 지난 여름의 더위가 분명한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더위에 흐트러짐이 보여지지 않는다. 
서로 가로지른 창살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창호지 문이 둘러싼 마당은 좁지만 답답해 보이지 않고, 그 한 가운데 덩그머니 놓여진 수도와, 그 위에 드리워진 빨랫줄, 그리고 그 옆의 평상은 느긋한 한 폭의 수채화로 그린 풍경화같다. 마당 뿐만이 아니다. 꽉 짜여진 네모 칸에 갇힌 아파트와 달리, 뒷마당하며, 대문 간까지, 사람과 사람이 서로 부대끼지 않고 숨돌릴 공간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건축'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한옥은 애물단지란다.
조상들이 살던 그 모습은 정갈하고 아름다우나, 이미 문명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이 살기에는 너무도 불편한 것 투성이이기 때문이다. 한 여름 날 수돗가와 빨랫줄은 아름답지만, 계절이 바뀌면, 그건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야 하는 대상이 된다. 그래서 늘 푸근한 한옥이 좋아서 이사를 한 사람들은 그곳에서 버틸 것인가, 그 한옥의 정체성을 편의에 맞춰 변형시켜 살아낼 것인가라는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보기엔 아름답지만, 품고 살아내기엔 고통이 따르는, 그게 한옥이다.

그래서, <그렇고 그런 사이>에서 한옥은 마치 죽은 남편의 은유와도 같은 공간이다. 
딸의 병을 고치지 위해 고집을 부려 한옥으로 이사오도록 했지만, 사회적 성취가 바쁜 그는 한옥에 머무를 시간이 없다. 심지어 중2짜리 딸이, 아버지를 기억할 꺼리조차 남기지 않은 채. 그런 한옥을 지켜가는 사람은 아내 은하(예지원)다. 

은하가 지켜가고 있는 것은 비단 한옥만이 아니다. 죽은지 1년이나 지나서도 그의 블로그 이웃을 불러모아 추도식을 할 정도로, 남편의 삶을, 그리고 남편에 대한 사랑을 지켜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사랑이, 이쁘장하고 젊은 후배의 등장으로 흔들린다. 


남편의 블로그에 남겼던 뜻모를 사진과 메시지, 아니, 지금껏 편의적으로 미화시켰던 그 모든 것들의 의미가 그녀의 등장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한다. 잊지못했던 남편이, 잊을 수 없는 나쁜 놈이 되어간다. 중2 딸조차 이젠 지겨워 하던 그에 대한 추모의 감정은 배신으로 돌변한다. 아름답게 '집착'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 되었다. 

하지만 정갈한 한옥을 카메라를 통해 한껏 음미하듯, 드라마는 '질풍노도'와 같은 은하의 감정을 그저 지나가는 여름날 소나기처럼 다룬다. 
그리고 다른 드라마가 하지 않았던 것들을 들여다 본다. 남편이 나를 배신했다는 사실 뒤에 숨겨진 진실들을. 나 혼자만 좋아하려고 했다는 후배 준희(송하윤)의 다짐처럼, 후배를 주기 위해 샀던 꽃을 아내에게 돌리고, 오래된 한옥처럼 변함없이 살아가려고 다짐한 남편의 마음을 짚어본다. 그녀로 인해 죽음에 까지 이르렀지만, 그의 감정을 그저 불손한 것만이 아니라, 그의 감정이 닿으려고 노력했던 또 다른 지점을 염두에 두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소나기가 휩쓸고 지나가 다시 맑아진 한옥의 여름처럼, 남편에게서 헤어나지 못하던 은하는 남편을 보낼 수 있게 된다. 

한옥은 불편하지만, 한옥이라 가능한 것들이 있다고 한다. 기와를 다시 얹고, 벽을 다시 바르고, 기우뚱한 기둥을 잇대어 지탱하고, 사람의 손이 가면, 한옥은 오래오래 사람과 함께 그 수명을 연장해 간다고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불행해 지는 경우가, 나의 사랑은 완벽해야 하고, 완성형이 되어야 한다는 집착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고 그런 사이>의 은하를 힘들게 했던 것도, 잊을 수 없는 남편이 가졌던 완벽한 남편이라는 아우라가, 어느 날 나타난 후배로 인해 흐트러뜨려 지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온전한 나의 소유였어야 하는 그의 마음이 헤매던 그 어느 지점, 그래서 그를 죽음으로 까지 몰고간 그것을 은하는 감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 없는 한옥을 지키듯, 은하는, 인간으로서의 남편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흔한 바람핀 남편에 대한 용서가 아니다. 사랑 앞에 고뇌했던 인간으로서의 남편을 이해해 주는 것이다. 오래된 한옥을 고쳐 살듯, 일그러진 남편을 그 사람대로 받아들인다. <그렇고 그런 사이>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남편과 아내라는 사회적 관계를 넘어, 인간으로서의 연민과 이해까지 확장된 지점. 
모처럼 드라마를 보며 마음이 넉넉해 진다. 


by meditator 2013. 10. 17. 10:11

<네 이웃의 아내>는 흡사, 한때 jtbc의 10시 드라마로 세간의 이목을 모았던, 김희애의 <아내의 자격>의 속편처럼, '아내'라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있다. 시간도 같은 시간대다. 뿐만 아니다. 김희애의 열연으로, 중년 아내의 가정 내 갈등과 사랑 찾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야심차게 잡아보인 수작으로 두고두고 회자되었던 <아내의 자격>처럼, 벌써 방송 초반임에도, <네 이웃의 아내>는 <아내의 자격>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19금의 수위도 마다않고 부부의 속내를 들여다 보고, 그 속내를 풀어내는 배우들의 연기는 화려하다. 더구나, <수상한 가정부>가 1위를 수성함에도 불구하고 11%(닐슨 코리아, 전국)의 비교적 낮은 수치에, 그보다도 맥을 못추는 <미래의 선택>이나, <불의 여신 정이>로 보았을 때, <네 이웃의 아내>가 <아내의 자격>만큼의 신드롬을 불러일으킬 여지는 충분해 보인다. 




<네 이웃의 아내>는 종편인 jtbc의 주시청층인 중년에 타깃을 분명히 한 드라마이다.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다닐 정도로 결혼 생활을 오래 한, 잠자리를 반년 넘게 가지지 않아도 그게 이상해 지지 않는, 드라마 안선규(김유석 분)의 친구 말대로, 이제는 '우정'이라 해도 낯설지 않는 부부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오래된 관계에서 쌓이는 건 우정만이 아니다. 드라마 속 홍경주(신은경)은 남편의 밥을 푼 다음 침을 뱉는다. 그런 아내에게 남편은 눈 하나 끔쩍하지 않고 혼자 포장도 하지 않는 이사를 강권한다. 능력없다는 남편의 닥달에 아내는 사람이 죽어나간 집을 서슴없이 고르고 청소하며 마주한 핏자국을 스스럼없이 닦아낸다.
< 네 이웃의 아내>가 초반 눈을 끄는 건, '권태'라는 단어로 규정하기조차 무신경하고, '애증'이라는 단어로 포장하기엔 적대적이 되어버린 오래 산 부부들의 현실이다. 비뇨기과 광고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들이 서슴없이 안선규와 채송하(염정아 분) 부부 관계의 주된 화두가 된다. 19금이지만, 그것이 그저 낯뜨겁지 않은 이유는, 바로 우리네 안방에서 벌어지는 현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아직도 실제 대한민국 한 켠에서 버젓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가부장적 부부 관계도 홍경주와 민상식(정준호 분)의 과장되어 보이는 듯한 관계 속에서 적나라하게 읽혀진다. 홍경주의 살의가 그저 남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주부들이 많은 것이다. 
부부 관계 만이 아니다. 민상식과 채송하가 조우하게 되는 '일'의 이야기를 다루는 폼새도 만만치 않다. 마흔을 넘은 직장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혹은 그 자신도 모르게 밀려나고 있는 직장의 풍속도가 현실감있게 그려진다. 
그런 <네 이웃의 아내>의 중년 부부들의 풍속도를 그려내는 제작진과, 거기에 얹힌 배우들의 연기는 그런 사실을 '공감'으로 승화시키는데 손색이 없다. 



하지만, <네 이웃의 아내>가 그저 현실을 그려내는데 그쳤다면 <사랑과 전쟁>이 되었을 것이다. 거기서, 드라마는 환타지를 제공한다. <사랑과 전쟁>에서 사건으로만 다뤄지던 불륜을, 그것도 심지어 '스와핑'을 연상시키는 구도는 <네 이웃의 아내>로 오면, 오랜 결혼 생활을 한 부부의 환타지로 탈바꿈한다. 
서로 다른 직장을 다니지만,이젠 중견 사원이 되어 느끼는 고뇌를 공감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군분투하는 상대방의 배우자에게 감정적으로 다가가게 되는 민상식과 채송하의 관계, 그리고, 강한 배우자로 인해 삶의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살다, 상대방의 가벼운 호의에 스르르 무너지고 마는 안선규와 홍경주의 관계는, '권태'로운 부부들의 환타지를 또 다른 사랑으로 유혹하기에 충분하다. 그러기에 공감할 만하고, 그러기에, 미드 <위험한 주부들>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과연 이 뜨거운 감자, 엇갈린 사랑의 씨앗을 <네 이웃의 아내>는 어떻게 요리해 나갈지 궁금해 진다. 모처럼 화면을 통해 선을 보인 정준호의 연기에, 신은경, 염정아, 김유석의 호연이 헛되지 않게, 그저 막장이 아닌, <아내의 자격>처럼 21세기의 또 다른 결혼과 가정에 대한 화두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by meditator 2013. 10. 16. 10:13

플레이 오프 야구의 마지막 경기, 하지만 야구를 즐기지 않는 누군가라면 드라마로 리모컨의 향방이 향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 시작하는 kbs2의 <미래의 선택>과 sbs의 <수상한 가정부>중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사극 매니아들의 <불의 여신 정이>가 야구로 인해 결방하고, 아직은 낯설은 그리고 대놓고 cg로 만화 캐릭터까지 들이밀며 로맨틱 코미디임을 표방하는 <미래의 선택>이 낯설다면, 결국 선택은 <수상한 가정부>의 몫이다. 그 덕분인지, <수상한 가정부>의 전주에 비해 상당히 높은 향상을 보였다. (닐슨 전국10.6%, 서울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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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7회, 드라마가 시작하자마자 스스로 죽을 용기가 없으니 자신을 죽여달라며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고 절규하는 맏딸 한결이의 해프닝은 이목을 끌 만큼 충분히 충격적이다. 더구나, 그에 이은 어머니의 죽음을 생각해 보라며, 자신이 죽은 후 자신을 위해 슬퍼해주는 사람들이 없다면 죽어도 된다는 가정부 박복녀의 해법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실제 부모의 이혼이나, 부모 사이의 불화를 두고, 자녀들의 경우, 생각 외로 그 탓을 자기에게 돌리는 경우가 많다는 조사 결과로 보았을 때, 자신을 임신하는 바람에 아버지와 결혼하게 된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던 아버지로 이루어진 가정의 원죄를 한결이가 자신에게 돌리는 이유는 충분히 공감이 갔다. 어머니의 죽음이후, 뻥튀기처럼 뿜어져 나온, 하지만 그저 수상하고 낯설기만 하던 한결이네 가족 이야기들이, 조금씩 조금씩 우리네 가족의 고민거리 속으로 들이밀어 진다. 
물론, 한결이네 가족이 뿜어내는 각양각색의 사건들은 가장 현대 가족의 시금석이 될 문제꺼리들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자살에 이어, 아버지의 불륜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실제 많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가족 지상주의' 대한민국에선 선뜻 인정하기 힘든 사실들이다. 더구나 여전히 가부장적인 잔재가 흠씬 남아있는 대한민국에서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다고 아버지를 내쫓거나, 남자 친구를 사귀자마자, 그 아이랑 자느니 마느니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청소년은 대놓고 공감할 수 없는 '사실'들이다. 

그러던 <수상한 가정부>가 아버지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그 방법을 가정부 박복녀에게 묻고, 부모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자식이 망가지는 것이라는 대답에 그 말을 실행하기 위해 남자 친구와 밤을 보내고, 가출을 감행하는 한결이의 반항에 들어서면서 공감의 밀도는 한결 짙어져 간다. 뿐만 아니라, 한결이네 가족 문제와 맞물려 조금씩 풀려나가는 박복녀의 비밀들이 다음을 기약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상한 가정부>가 일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듯이, 현대 가족이 지니는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그 해결 역시 감동적으로 끌고나가는 전체적인 틀이라는 점에서는 동의는 하지만, 과연 지금 여기서 그것이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여전한 의문을 남길 수 밖에 없다. <사랑과 전쟁>의 에피소드 들을 실감나게 보면서, 그것들이 다른 드라마 속에서 등장하면 '막장'이라고 규정하는 묘한 이중 잣대가 여전한 것이다. 


게다가 <수상한 가정부>의 박복녀 식 해법은 결코 에돌아 가지 않는 직문직답이다.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싶다고 하면, 망가지는 것이라 답해주는 식이다. 이런 방식의 해법은 드라마에서 보듯이, 꼭 한결이의 가출, 외박, 심지어 자살시도처럼 극단적인 수순을 밟아, 가족의 화해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런 식의 문제 해결 방식은 <여왕의 교실>에서 마여진 선생의 방식과 동일하다. 자율성있는 아이들로 키우기 위해, 가장 타율적인, 그리고 죽자고 공부에만 매달리게 했던 역설적 해법이다.
그런데, <여왕의 교실>이 상대적으로 낮은 시청률 추이를 보았을 때, 그런 충격 요법이 우리


나라 현실을 제대로 그려냄에도 불구하고, 그 방식이 공감의 정도에서는 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비슷한 양식의 일본 드라마를 리메이크 하면서, <수상한 가정부>는 그런 <

여왕의 교실>의 여러 결과물들을 전혀 반면교사로 삼지 못한 채 진행시키고 있다. 


심지어, 한 술 더떠, 2013년 동안 리메이크 되었던 일본 드라마 중 가장 원작의 색채를 그대


로 드러낸다. 각 에피소드 별 해법이 빈번하게 폭력과 죽음으로 치닫는 방식도 극단적이다. 


극단적 선택이나 죽음을 통해 정반대의 결과에 도달하는 방식은 '개똥으로 굴러도 이승이 


최고'라는 현실적이고 낙천적인 한국인의 정서랑 어긋난다. 


그래서 아쉽다. 조금 더 우리나라의 현실에 맞는 각색을 했었더라면 하는.

박복녀의 복색이나, 말투를 그대로 따라한 것은 이제와 새삼 또 지적하는 것조차 입 아픈 일

이다. 하지만, 최지우라는 배우에 맞는 박복녀로 재탄생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매번 드라마를 볼때마다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제 아무리 최지우가 노력을 한다 해도, 대중들에게 각인된 최지우는 여전히 멜로드라마의 

가련한 여주인공이다. 선덕여왕에서 이미 신라를 쥐락펴락하던 카리스마를 발산했던 미실

의 고현정도, 그 등장만으로도 스크린을 꽉 채우는 김혜수가 아닌 것이다. 최지우의 매력은 

그녀의 가녀린 몸매와, 우수에 젖은 얼굴에서 품어져 나오는 비련의 아우라인 것이다. 그저 

일본 여배우가 했듯이 딱딱한 대사를 흉내내는 듯한 말투가 아니라, 최지우스러운 사연있는 

대사였다면 <수상한 가정부>는 훨씬 더 보고싶은 비밀을 간직한 드라마가 되었을 듯 싶다. 



이미 중반에 들어선 <수상한 가정부>가 궤도를 수정하기엔 늦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 더 섬세하게, 우리의 정서와, 우리의 상황, 그리고 그것을 연기하는 배우를 배려한 대

본과 연출이 된다면, <수상한 가정부>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유종지미'를 거둘 수 있

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그 유종지미를 거둘 수 있는 가장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

다. 


by meditator 2013. 10. 15. 10:18

영화 <화이>를 보고나서, 문득 어디선가 이 비슷한 이야기를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봤는데.......아, <스캔들>! <스캔들>의 그 '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은 영화 <화이>와 유사하다. 괴물이 된 아버지를 맞딱뜨린 아들, 아들들에 대한 또 다른 보고서이다. 


무엇보다 두 이야기는 모두 '유괴'가 사건의 실마리가 된다. 
영화 속 아버지들도, <스캔들>의 아버지 하명근도 아이를 유괴한다. 그리고 그 유괴는 그저 단순한 유괴라는 범죄만이 아니라, 그 순간 충동적이었건 그렇지 않건, '징벌'의 의미를 지닌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또 다른 아버지에 대한. 
그리고 두 영화 모두, 유괴해 온 아이를 죽이지 않는다. 그 아이를 죽이면, 자신은 완전 범죄로 후환을 없앨 수 있음에도 결국 그 아이를 품고 산다. 그리고 아이는 유괴범을 아버지라 부르며 자란다. 유괴범을 닮아가며. 유괴범을 배워가며. 

(사진; osen)

물론 여기서 영화와 드라마의 길은 나눠진다. 
애증의 휩싸여, 늘 하은중이 된 장은중에게 거리감을 두었던 하명근 형사는 그럼에도 어느새 자신의 아들만큼 그에게 깊은 정을 주어버린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유괴범이 되었지만, 여전히 '태하'의 비리를 밝히는데 주저하지 않는 강직하던 형사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하명근을 하은중은 닮아간다. 
반면, <화이>는 아버지를 다섯이나 두었고, 그들 각각의 방식으로 넘치는 사랑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들처럼 되어가는 방식도 훈련받는다. 그리고, 괴물이 된 아버지들의 전사에는 또 다른 괴물이 존재한다는 걸, 그리고 그 괴물에게서 도망가기 위해 괴물이 되어야 했음을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아니다. <스캔들>이 다른 것이 아니다. 하명근과 하은중 부자의 관계가 '부전자전'의 긍정적 효과였다면, 장태하와, 그의 두 자식, 장은중, 지금의 구재인, 그리고 장주하는, 아버지를 닮은 괴물로 키워진다. 구재인은 자신이 빼앗긴 장태하의 아들 자리, 태하 그룹의 후계자 자리를 되찾기 위해, 또 다른 장은중을 없애달라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태하 그룹을 얻기 위해 장인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장태하처럼, 그의 품에서 자란 자식들은 그의 방식대로 사는 것을 배운다. 

두 작품이 말 하고자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괴물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세대, 그리고 그 아버지 세대의 방식대로 보고 자란 아들의 세대가 살아가는, 살아가야 하는 방식에 대해, '부전자전'의 태도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에서, 사건을 확산시키는 계기로 '철거'가 등장하는 것은, 당대성을 상징하는 가장 적절한 소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스캔들>의 장태하는 자신의 부를 완성하기 위해 부자비한 철거를 감행한다. 주저하는 경찰과 철거 용역들 앞에 그 스스로가 불도저를 밀고 들이 닥친다. 철거와, 건설이라는 두 단어로 상징되는, 개발 경제 시대의 아버지이다. 
<화이>의 아버지들은, 경찰과 철거 용역조차 해결해 내지 못한 단 하나 남은 철거 현장의 집을 없애기 위해 투입된 특수 용역인 셈이다. 우리가 그런 일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결국 경찰의 끄나풀이, 기업의 하수인이 된 또 다른 세대의 아버지들을 상징한다. 

<화이>의 아버지들이 그들을 괴롭히던 괴물을 피하기 위해 그 스스로 더 잔혹한 괴물이 되어가는 방식을 택한 것처럼, 그 아버지들은 그들의 방식을 화이에게 강요한다. 너도 우리처럼 괴물이 되어서 살면 편하다고.<스캔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십 여년 만에 처음 만난 아들에게 장태하가 권하는 것은 자기 대신 재판에 나가, 자기처럼 철면피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장태하의 아들이 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아버지들은 '사랑'의 이름으로 아들들이 자신과 같은 삶을 살기를 강요한다. 

<화이>도, <스캔들>도 결국에 돌아오는 건 질문이다. 그것이 개발 독재 시대의 아버지들이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괴물이 되어버린 그 이후 세대의 아버지들이건, 결국 모든 사건의 열쇠는 결국 아들의 손으로 넘겨진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화이>는 영화답게, 두 시간에 모든 것을 끝장내야 하는 완결적 스토리답게, 그리고 청소년답게, 화끈하게 징벌과 극복을 해소해 버린다. 말 그대로, 괴물을 삼켜버린다. 
반면, <스캔들>의 해법은 복잡하다. 장은중과 또 장은중은 사회 물도 먹을 만큼 먹은 만큼, 머릿 속이 복잡하다. 계산해야 할 것들이 많다. 더구나, 36부작의 장편을 이끌어 가야 할 만큼 고민할 꺼리도 많다. 
그래도 역시나 길을 두 가지이다. 이제는 구재인이 된 장은중처럼, 그 아버지가 그랬듯이, 자신의 것을 쟁취하기 위해, 자신이 상처받은 걸 돌려주기 위해 괴물이 되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은중이었던, 이제는 장은중이 선택한 방식은 <화이>의 방식일 것이다. 화이가 화끈하게 몇 자루의 총으로 해결했던 청소를, 장은중은 아주 복잡하게 도대체 아직은 그 해법이 무엇인가조차 그저 짐작만 할 수 있게, 큰 그림의 청소를 해나간다. 그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 않는 여자와 재판에서 대면해 놓고서도, 그녀의 공소 사실을 천연덕스럽게 부인할 만큼 속을 내보이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믿어달라고 외칠 만큼, 그의 행보는 의심스럽지만, 의지는 확고하다. 

하지만 그 무엇이 되었든, 공은 <화이>와 <스캔들>을 보는 관객과 시청자들에게로 굴러온다. 
당신들이 부정해 마지 않는 역사가 이제 당신들의 몫으로 던져졌다. 당신들은 어떤 방식을 택할래? 하고, 언제까지 아버지가 나뻐서 라고 징징거릴 때가 아니야! 라고 .

* <스캔들>에는 괴물이 되느냐, 마느냐 서로 다른 두 아들의 선택이란 흥미진진한 볼거리와 함께, 현실이 고스란히 투영되는 대사를 쫄깃하게 즐기는 재미가 더해진다. 
에피소드 1; 윤화영이 검찰 총장을 찾아갔다고 하자, 장태하는 그 검찰 총장을 구워 삶으라 한다. 하지만 그 검찰 총장이 강직해서 그럴 것이 없다고 하자, 없는 애라도 만들어서 신문에 뿌리라고 한다. 
에피소드2; 조진웅 태하 건설 사장과, 그의 아버지 조치국 장관이, 개발제한 구역 땅을 풀어 땅 장사를 한 이야기를 나눈다. 뭣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땅 장사에 빛을 내서 끼어들어 망해가는 것을 조롱하며. 대한민국은 땅도, 집도, 강도 모조리, 자기들 봉이라며 낄낄거린다.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빛을 내서, 그걸 사지 못해 안달을 한다고 비웃는다. 


by meditator 2013. 10. 14. 10:14

이제 수능이 한 달도 채 남지않은 아들과 함께 <화이>를 보고 왔다.

어라, <화이>는 청소년 관람불가인데? 다행히도 우리집 고3은 이미 주민등록증이 나왔다. 게다가 생일이 빠른데, 1년을 숙성시켰다 초등학교를 입학한 바람에 실질적으론 대학 1학년 나인인 셈이라, 법적으로 하등 <화이>를 관람하느데 문제가 없다. 그래도 나이로는 대학생이라도, 아직 고등학생이라서, 정체성은 여전히 '고딩'인지라, <화이>라는 영화를 받아들이는 건 딱 고딩 그 수준이다. 
<화이>를 보고 나온 아들 녀석의 한 마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그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굳이 설명되지 않아도 되는 영화같다. 설정은 충격적이지만, 화이와 아버지들의 연기가 그 잔인함을 뛰어넘는다.'

살부(殺父)의 스토리를 가진 <화이>가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에서 근본적으로 청소년 관람가가 되기는 힘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에 장준환 감독도 일찌감치 청소년 관람가 따위는 포기하고 한껏 폭력의 미학(?)을 심화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에서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중학년, 아니 저학년 때 이미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비를 오인하여 죽이고, 심지어 자신의 어미와 결혼을 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만화로 된 것 부터 안기는 우리나라에서, 좀 더 직설적이고, 폭력적이라고 해서, 화이의 살부 스토리를 청소년 관람불가로 처분하는 것은 어찌보면 눈 가리고 아웅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니 대한민국에서 자신을 입시제도라는 틀에 눌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하지만 이미 그 속에는 진짜 괴물이 들어있어, 피씨방만 가면, 흠씬 두들기고 패죽이고 나오는 청소년들 속의 괴물이 혹여라도 튕겨나올까봐 절대 그런 불손한 이야기는 청소년들에게 알려져서는 안되기에 절대로 청소년 관람가가 될 수 없는 것인지도.

화이

하지만 역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성장'과 '극복'의 담론이 가장 진지하게 필요한 세대가 누굴까 하고 생각해 보면, 바로 청소년들이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직, 간접적 폭력에 가장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는 세대 역시 청소년들이다. 
그러기에, <화이>의 주제 의식이 정치적 함의까지 확장되기 이전에, 보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청소년 화이와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의 근간을 놓고, 함께 논해 보기에는 청소년 세대보다 더 좋은 대상이 없을 듯하다. 

아들; 그런데, 화이가 자신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안 것까지는 좋은데, 그래도 좀 더 해명이라도 들어보지 다짜고짜 아버지를 죽이기 시작한 건 좀 그랬어.
엄마; 그건 바로 화이가 청소년이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너네들이 그러잖아. 욱 하고 행동부터 들어가고. 이 영화에서 화이의 행동방식은 '매우 청소년적'이지 않니?
아들; (끄덕끄덕)그건 그렇네.

역시나 아들에게는 그래도 방식이야 어떻든 자신을 키워 준 아버지를 죽이는 화이가 충격적이었던 거 같다. 그래서 다시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주었다. 신화에서 영웅들은, 오이디푸스처럼, 아버지를 죽이거나, 아버지를 떠나거나, 아버지가 없다고. 그리고 그건, 실제의 아버지가 아니라, 한 사람이 성장하면서 극복하고 지양해야 할 그의 앞 세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즉, 신화 속 성장이란, 앞선 세대를 밟고 일어서 자신만의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화이>는 또 하나의 신화적 상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절주절 부연 설명을 붙여본다. 

몸은 이미 중학생만 돼도 어른만큼, 아니 어른보다 훌쩍 커버린 요즘 아이들에게, 정신적 성숙을 아무도 논하지 않는다. 특목고도 모자라, 국제중이란 특수 학교가 만들어 지면서, 초등학교부터 아이들은 입시 전쟁에 휘몰리고, 중학교 학제 조차 교장 재량이란 이유만으로 제 멋대로 바뀐지 오래다. 하루에 수학을 몇 시간씩 공부해도, 예체능 따위는 1학년 때 몰아 때려넣고 때우는 과목이 되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아무도 그들의 균형잡힌 성장과 성숙을 배려하지 않는다. 어른 세대는 너무도 폭력적이지만, 그들은 이유도 모른 채 교육이란 이름으로 당하고만 살고, 웃자란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에 귀기울일 수 없다. 그저 '일베'나 기웃거리며 감정을 배설할 밖에. 그들이 대학이란 목표를 향해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이 시기가 어떤 정신적 성숙을 거쳐야 하는 시기임을 모른 채, 반항과 반발로 채우며 왜곡되어 가는 것이다. 그 시기를 거쳐 괴물과 싸우던, 삼키던 자신의 것을 만들어 가야 하는 과정의 의미라고는 씨알만큼도 깨닫지 못한 채. 

<화이>의 아버지 역 김윤석은 인터뷰를 통해, 이 영화를 통해 진지한 논쟁이 벌어지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그 진지한 논쟁이 청소년들에게 까지 확장되기를 바란다. 
교실과 입시에 갇힌 그들에게, <화이>를 통해, 그들이 겪어내야 할 성숙과 성장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을 부여받았으면 한다. 괴물을 벗어나기 위해 괴물이 되어버린 아빠들과, 괴물이 삼켜버린 화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 그 무엇보다, 이 시대의 '괴물'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종종 좋은 영화 보고 난 후 평론가나 큐레이터가 들어 와 영화를 해석해 주고, 질의 응답을 받는 시네마 톡이 진행되곤 한다. <화이>를 청소년들이 단체 관람을 하고, 영화가 끝난 후, 진지하게 성장의 의미를 놓고 '시네마 톡'을 하는 불가능한 신화를 기대해 본다. 


by meditator 2013. 10. 12. 10:33

재미있는 구도다. 

jtbc뉴스9에 손석희 앵커가 들어온 후로, 과연 가장 핫한 정치적 이슈에 대해 <jtbc뉴스9>과 <썰전>이 어떤 식으로 요리해 가는가를 비교하는 재미가 생겨났다. 
그도 그럴 것이, <jtbc뉴스9>은 뉴스이지만, 그날에 촛점이 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인터뷰까지 심층 취재와 보도를 통해 그 사안을 집중 해부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썰전>의 위클리 이슈와 일과 주의 단위가 다를 뿐 다루는 방식이 동일하다.  
<jtbc뉴스9>이 손석희라는 앵커가 중립적 위치에 서서 모든 팩트의 서열을 정리 정돈하는 방식을 통해, 시청자들이 사건의 실체에 보다 진실에 가깝게 다가가도록 해준다면, <썰전>은 이철희와 강용석이라는 여와 야를 대변하는 두 평론가가 나와 사안에 대한 자신의 진영적 입장에서 분석을 해주고 시청자들은 그 서로 다른 입장을 들으며 새로운 평가의 시각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차이를 낳게된다. 
그런데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사안에 대한 두 프로그램의 분석과 해석을 보면, <썰전>이 <jtbc뉴스9>보다 못하다는 평가가 나올만한 경우가 종종 눈에 띤다. 
(사진; tv리포트)


<썰전>이 <jtbs뉴스9>보다 못해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주 단위로 사건을 다루는 시의성의 뒤처짐 때문이 가장 커보일 것이다. 
10월10일자 <썰전>에서는 국가 정보원에서의 남북 정상 회담 기록과 채동욱 검찰 총장 사퇴를 다뤘다. 이 중 회의록 사안은 아직도 정치적 논제의 핵심에 있는 핫한 이슈인 반면, 채동욱 검찰 총장 사건은 물론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지나가고 있는 논제인 것이다. 결국 뉴스의 현장성에서 약간 밀려나 있다는 것인데, 결국 그 사안을 다룸에 있어, 패널의 해석력이 사안의 이슈를 되살려 낼 수 있는 관건이 되는 것이다. 실제, <썰전>에서는 이미 흘러가 버린 뉴스임에도, 그것을 냉철한 분석을 통해 재해석해내는 기지를 선보였던 바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채동욱 사건에 대해서, <jtbc뉴스9>에서 보여진 것처럼 '채동욱 검찰 총장 찍어내기' 이상의 해석을 해내지 못하고 있는 바, 그리고 심지어 자꾸 촛점을 '혼외 자식'이라는 가쉽성 논란에 치중하고 있는 한에서는 <썰전>의 매력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특히나 <썰전>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데는 강용석의 '아니면 말고'식의 무책임한 가쉽성 자세가 한 몫 한다. 10월 10일 <썰전>에서 강용석은 국정원 회의록 실종과 관련해, 야당이 정상 회담을 하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 문제를 덮어달라고 하기 위해서 라는 발언을 한다. 그러자 당연히, 또 다른 패널 이철희 소장이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냐?'고 발끈한다. 그러면 강용석 변호사는 꼬리를 내리면서 말한다. '아님 말고, 그저 내 생각이라'면서. 이런 강용석 변호사의 태도는 이른바 종편의 '가쉽성 보도 태도'를 대변한다. 마치 증권가 찌라시처럼 온갖 흘러 돌아다니는 루머를 보도의 내용으로 삼고서는, 아니면 말고, 내 생각이 그렇다는 식의 무책임한 보도 태도 바로 그것인 것이다. 
분명히 강용석은 그저 '내 생각'일 뿐이라고 했지만, 과연 정말 속으로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강용석이라는 여당을 대변하는 패널이 그 자리에 앉아서 하는 말을 그가 '내 생각'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일까? 
오히려 이철희 소장의 말 그대로 아직 결론도 나지 않은,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 그것을 두고 야당 대표가 그걸 덮기 위해 여야 정상 회담을 이용하려고 했다는 루머는, 민주당,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 측에서 그것과 관련하여 캥기는 구석이 있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발언인 것이다. 사실 만큼 아니 때로는 사실 만큼 무서운 것이 '카더라' 통신이다. 아님 말고 식의 카더라로 인해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세상에, 강용석은 다시 아님 말고 식의 자기 생각을 위클리 이슈 분석 시간에 내뱉는다. 

그리고 바로 이런 지점에서 <썰전>은 <jtbc뉴스9>의 뉴스 분석에서 뒤지게 되는 것이다. 처음 출사표에서 사실만을 다루겠다는 그 말처럼, 손석희 앵커는 '사실'만을 다룬다. 물론, 의도적으로 다루지 않는 사실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날의 보도 사안이 된 한에서는 냉정하게 사실만을 다룬다. 국정원 기록과 관련하여, 양 측의 입장을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거기에 한 마디 더 얹을 만도 하건만, 절대 손석희 앵커는 그러지 않는다. 그저 명명백백한 사실들만을 나열해 준다. 판단은 당신의 몫이라고. 하지만 그런 정확한 사실의 나열만으로도 이미 시청자들은 충분한 해석의 근거를 가진다. 
물론 <썰전>은 그와는 다르다. 이미 자신의 입장을 가진 패널들이 존재하고, 그들에 의해 재해석된 뉴스가 등장한다. 하지만 재해석이 막무가내 식 내 의견이어서는 안된다. 더구나, 루머나, 가쉽의 태도를 가져서도 안된다. 그 자리에서 패널의 의견은 사견일지 모르지만,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는 그의 말은 이미 정치적 입장을 지는 담론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번번히 매 사안 별로, 해박한 지식과는 별개로, 그 사안을 다루는 태도에서, 찜질방 한 구석에서나 어울릴법한 가쉽성 해석으로 일관하는 강용석의 태도는 아쉽다. 더구나, 국정원 사건을 덮기 위해 여야 영수 회담을 바랐다는 의견(?)은 거의 tv조선 급의 시각이다. 

이런 태도는 이어지는 '예능 심판자'에서도 마찬가지다. 
10월11일자 검색어에는 김희철의 sm 디스라는 단어가 올라와 있다. 실제 방송에서도 강용석이 조마조마하다고 할 만큼 김희철은 sm의 드라마들이 망했다는 것을 대놓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건 사실이 아닌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데, 패널들도 그렇고, 사람들도 마치 큰 일이라도 한 양 호들갑을 떤다. 물론 이 반응은, 현재 방송가에서 sm이라는 거대 기획사가 드리운 권력의 그림자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 방송에서 사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미 사실로 밝혀진 sm드라마가 망했다는 발언이 아니라, 그에 대한 해석이다. 
김희철은 말한다. 그토록 sm이 자사가 제작하는 드라마, 심지어 뮤비에 조차 자사 아이돌들을 투입하는 이유를, 너무나 sm이 자사 아이돌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서라는 식으로 표현했다. 과연 그럴까? 문어발식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그 프로그램마다 자사 소속인들을 투입하는 걸, 그저 '사랑'이란 추상적 표현에 기대어 해석할 수 있을까? 이런 식의 해석이, 예능 심판자에 어울리는 대중문화 평론의 방식일까? 섭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프로그램에 투입되는 sm 아이돌들을 그저 이수만 사장님이 그 아이들을 아껴서 라고 표현한는 건, 앞서 강용석의 발언과 다르지 않다. 예능 심판을 하겠다는 자리에 나와서 하는 평론에 어울리는 발언이 아니다. 
김희철이 sm이라는 소속을 가지고, 현직 아이돌로써 <썰전>예능 심판자에 나와서 객관적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노력과 객관의 거리는 아직 간극이 있는 듯하다. 차라리 강용석처럼 난 여전한 여당인이요, 야당의 저격수라면 헷갈리지나 않지, 객관적인 듯 하면서도, 누가 누구를 아낀다는 식의 '인정에 끌리는'표현은 여전히 김희철을 sm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게 하고 있다. 


(사진 ; 오마이 스타)
이처럼 <썰전>은 여전히 평론과 가쉽의 경계에서 종종 혼돈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드러난다. 그리고 그 경우는, 강용석이나, 김희철처럼 자신의 소속이 분명함에도 그 소속의 정파적 입장을 객관으로 치부한 '사적 의견'의 불공정성, 주관성에서 기인한다. 이런 점에 대한 자기 점검이 꾸준히 계속되지 않는 한, 독한 혀들의 전쟁 <썰전>은 시시해질 수 밖에 없다. 


by meditator 2013. 10. 11. 10:30

10월 9일 <라디오 스타>는 '강추' 특집의 자리를 마련했다. 

즉 4명의 mc가 밀고 싶은 예능 기대주 네 명을 이른바 '강력 추천' 해 마련한 자리였다.  늘 누군가를 추천하는 자리면 어김없이 김국진이 안쓰러워 불러내는 김수용에, '애제자'라는 미명 하에 불려온 윤종신 소속사 가수 김예림, 그리고 두말하면 잔소리인 규현과 한솥밥을 먹는 려욱까지, 제목부터가 노골적이었으니, 당연히 그 자리에 초대받은 게스트의 면면이 mc의 이른바 '내 논에 물대기'식이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그런 와중에 돋보이는 건 단연, 김구라가 초대한 봉만대 감독이었다. 김구라의 말 대로 친구라지만 10년 동안 단 두 번을 봤다는 봉만대 감독은 말 그대로 김구라가 강추하고 싶은 순수한 의미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9일자 라디오 방송은, 말이 강추 특집이지, 결국은 '봉만대' 특집이 되었다. 

(사진; 엑스포츠 뉴스)

봉만대 감독이 누구인가. 
장르 영화가 자리잡지 못한 우리나라에선 보기 드물게 이젠 에로 영화의 거장으로 대접받는 감독이다. <라디오 스타>에서는 우스개로 봉준호와 함께 봉봉 브라더스 운운했지만, 그의 작품 세계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대한민국의 또 한 사람의 봉감독인 것이다. 최근 <아티스트 봉만대>를 통해 자신의 작품 세계를 노골적으로 '디스'하고, 그것을 통해 결국은 진솔함으로 다가가는 시도를 했던 봉감독은, <라디오 스타>에 나와 꺼리낌없이 자신의 작품 제작 방식에 대해 '수세미'까지 예를 들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에로'라던가, '섹스'라던가 라는 단어가 아직도 그대로 발음하기 조차 어색한 공중파에서 그 분야를 자신의 작품 세계로 추구하는 감독을 초대한 김구라의 배짱과 안목도 대단하고, 그것을 거침없이 소화해 내는 봉만대의 조합은 모처럼 <라디오 스타>의 b급 정서를 제대로 살려낸 듯했다. 

하지만 그에 비해 다른 mc들의 게스트들은 낯뜨거웠다. 
'강추 특집'의 초반, 소개되는 게스트의 면면을 보면서 김구라는 불편한 듯 일갈한다. 이건 뭐 예능 기대주라고 했는데, 다 자기 측근들을 데려다 앉혔다고. 그러자, 윤종신이 낮두껍게 반문한다. 그러는 당신도 측근을 데려오지 그랬냐고. 그러자, 김구라는 그런 식이면 난 동현이를 데려다 앉혔다고 말문을 막아버린다. 
언제부터인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기 논에 물대기 식의 게스트 섭외와 토크가 당연한 일이 되어간다. 메인 mc와 같은 소속사의 아이돌이 보조 mc로 들어가는 건 공식같다. 특정 기획사에서 제작된 프로그램은 당연히 그 기획사의 mc가 시청률과 상관없이 메인을 맡는다. 당연히 밉보인 jyj와 같은 그룹은 방송계에 설 자리가 없다. '예능 기대주' 강추란 미명이 당연하게 내 측근 데려다 앉히는 자리가 되었다. 마치 내가 선생인 우리 반에 내 자식을 전학시켜다 앉혀 놓는 것처럼, 내가 사장인 우리 회사에 사원으로 내 친척을 들이미는 것처럼. 내 연줄, 내 인맥을 끌어대는 것이 뻔뻔하거나,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되어간다. 그저 대한민국은 인맥이 짱이야! 라는 진리를 몸소 실천 중이다. 아니 인맥을 넘어 이젠 '카르텔'이 되어간다. 

1년에 5번 정도 예능 나들이를 한다는 김수용은 <라디오 스타>에만 유독 출입이 잦다. 능력은 있지만, 운이 따라 주지 않는다는 그에 대한 소개 멘트가 이젠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김국진이 신혼 여행 비용을 대주었다는 에피소드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 차라리, 방송 말미 그가 케이블에서 한다는 19금 토크쇼를 화제로 삼았다면 봉만대 감독이랑 접점이라도 있었을 텐데, 여전히 불쌍한 수용씨는 '강추'하기엔 좀 진부하다. 

윤종신이 예능 기대주라고 말하면서 그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듯, 그의 소속사 가수 김예림은 <라디오 스타> 방영 내내 알듯 모를 듯 미소만 짓는 얼굴로 비춰졌다. 윤종신의 소속사 가수 김예림이라서 나올 수 없는 곳이어도 안되겠지만, 예능 기대주라 밀어붙이기엔 낯 부끄러운 게스트였다. 그래도 어거지로 갖다 붙여도 그러려니 하는게 언제부터인가 <라디오 스타>가 되었다. 그나마 그걸 가지고 웃음의 소재로 삼았으니, 면피했다고 할 수 있을까. 방송 말미, 지금의 이미지가 좋으니 오히려 굳이 예능으로 뜨려 할 필요 없는 김구라의 한 마디야 말로 김예림의 소속사 사장 윤종신에게 필요한 촌철살인의 한 마디였다. 

그나저나 궁금해지는 게 있다. 과연,sm 소속이 아닌 규현의 인맥이 등장할 날이 <라디오 스타>에 올까? 어김없이 규현의 예능 기대주는 그와 같은 그룹의 멤버 려욱이었다. 처음 슈퍼 주니어 멤버 이특, 최시원, 은혁을 필두로 해서, 설리, 크리스탈에, 지난 추석에 김민종, 다나, 키에 이르기까지, 이러다 sm 소속 연예인들은 <라디오 스타>에 안나오는 게 이상한 상황이 될 듯하다. 마치 전용 토크쇼인 듯이, 잊을만 하면 sm 소속 연예인들이 둥그렇게 게스트의 자리에 앉아있다. 

(사진; 아주 경제)

'강추'를 받아 나왔지만 김구라를 폭로하겠다던 봉만대는 김구라의 단점이 이른바 '라인'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렇게 카르텔화 되어가는 연예계에서 봉만대의 지적은 일견 의미있다. 누구나 다 라인을 따라 밥 벌이가 정해지는 상황에서 '독고다이'로 살아가는 건, 앞날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의미이니까. 
하지만, 엄마들 사이에서, 엄마의 이른바 '푸쉬'로 밀어붙일 수 있는 아이의 성적은 중학교 까지라는 씁쓸한 우스개가 있다. 고등학교 정도 되면 머리가 커서 더는 엄마의 푸쉬와 잔소리를 들어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고등학교만 돼도 내 손을 넘어가는 아이들인데, 다 큰 연예인들의 '푸쉬'가 어느 정도 먹힐 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렇게 김국진이 기대주라고 밀어 줘도, 여전히 일년에 몇 번 예능 출연을 못하는 김수용을 보면, '푸쉬'만이 능사가 아닌 건 맞는 거 같기도 하고. '디스'를 예능감으로 착각하는 듯한 려욱을 봐도, 기회가 모든 걸 해결해 주는 건 아닌 건 분명한 듯 하다. 하지만, 이른바 '공적 영역'이라는 방송이 특정인들의 카르텔화 되는 걸, 그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시청자들은 뭔 죄란 말인가. 

허긴 대학을 가서도 수강 신청도 엄마가 해주는 세상에, 국적을 포기해서라도 자식의 군대를 빼주는 세상에, 연예계 캥거루 족이 뭐 그리 새삼스러운 것이냐 하면 유구무언이기는 하다.


by meditator 2013. 10. 10. 10:28

파일럿 방송 후 그다지 높지 않은 시청률, 미미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뛴다>가 <화신>의 자리에 정규 편성이 되었다.


<심장이 뛴다>의 정규 편성은, 엄밀히, 새 프로그램의 긍정성보다도, 그 이전에 폐지를 할 수 밖에 없는 <화신>의 부정성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시작할 때의 <화신>은 신동엽이 의욕적으로 시도했던, 성인용 콩트와 토크의 콜라보레션을 지향했다. 굳이 토크만 하려고 했다면, 그럭저럭 시청률이 나왔던 <강심장>을 그만 둘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연 <화신>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다. 콩트는 어설펐고, 토크는 그 예전의 <야심만만> 같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화신>은 숱한 변주에 변주를 거듭한다. 콩트는 사라지고 결국 '풍문으로 들었소'라는 <강심장>류의 신변잡기 토크만 남았다. 심지어, 메인 mc였던 윤종신 대신에 김구라를 투입하는 강수를 뒀지만, 여전히 <라디오 스타>의 아류라는 오명을 뛰어넘지 못했다. 심지어, 토크로서는 무리수였던 생방송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그 역시 화제성조차 얻지 못한 채 초라한 퇴장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꼭 <화신>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지부진한 <라디오 스타>에, 겨우겨우 게스트와의 합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해피투게더>에서 보여지듯이, 이젠 연예인들을 몇 명 불러놓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집단 토크쇼 자체가 한계점에 봉착해 있기 때문이다. <라디오 스타>의 '돌아이' 특집처럼 특정한 주제에 맞춰 게스트를 새롭게 조합하는 방식조차도, 처음 시도했을 때는 신선했지만, 너도 나도 써먹다 보니, 이젠 뻔하고, 때론 어거지다 싶은 토크로 이어지는 상황이 되었다. <해피투게더>의 방영한 다음 날 검색어 순위에 오르는 대부분의 것이  그날의 야식 메뉴라는 사실 자체가, 집단 토크쇼의 현재를 상징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진짜 사나이>의 소방서 버전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패를 다하지 않은 리얼리티 예능의 선택은 불가피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여전히, 과연, 소방서로 간 연예인의 예능은 의문부호를 넘어서기 힘들다. 

10월 8일 방영된 <심장이 뛴다>에서는 119 구급대로 비상 출동을 한 최우식이 맞딱뜨린 고독사를 다뤘다. 
응급 환자가 있다는 호출을 받고 간 그 곳에 이미 죽은 지 시간이 꽤 흘러, 부패가 시작된 시신이 있었던 것이다. 이사를 온 후 동네 사람 그 누구와도 일면식이 없던 홀로 살던 남자는 그의 죽음조차 쓸쓸히 홀로 감내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구급대는 아무도 없는 집의 창문을 뜯고 들어가 이미 죽은 남자의 법정 죽음을 확인해야 하는 상황이고. 
이미 파일럿 프로그램에서 주사 바늘이나 피에 대해 트라우마가 있었던 최우식은 그 상황에 지레 눌려 버린다. 선배 소방사들은 그런 최우식을 배려하느라, 현장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하고, 최우식은 그런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심장이 뛴다
(사진; tv데일리)

<심장이 뛴다>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최우식이라는 초보 소방사가 그런 상황을 겪으며 스스로 극복해 가는 성장통을 다루고자 한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보자면, 10월 8일의 방송은 일면 성공적이었다. 
고독사한 시신의 현장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던 최우식은 다음에 출동한 뇌종양 환자를 도와 병원까지 수송하는 과정에서는 그의 몫을 십분 해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선배 소방사로부터, 같이 한 연예인들 중 가장 적재적소에서 자신의 일을 해낸다는 평가까지 받으며. 

하지만 그건 제 아무리 상황을 미화한다 하더라도 예능이다. 
최우식은 연예인이고, 그는 그저 잠시 소방사 코스프레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제 아무리 그 상황에서 그의 마음이, 자세가 진정성을 지녔더라도, 그건 가짜다. 만들어낸 상황이다. 그런데 그런 예능적 이벤트를 위해 소비된 진짜 상황들, 사람들, 그리고 시신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미 파일럿 프로그램에서 자살을 시도한 여자가 등장했었다. 그리고 이제 홀로 죽은 채 냄새를 풍기며 부패되어 가는 시신이 등장했다. 다음엔, 뇌종양 환자다. 비록 뿌옇게 뭉개버리기는 했지만, 상황을 실감나게 보여주기 위해, 방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시신에, 변기를 붙잡고 토하는 환자에 카메라를 맞췄다. 제 아무리 자막으로 그들의 죽음과 아픔을 애도한다 하더라도, 이건 예능의 몫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만약에 최우식이 연예인이 아니라 진짜 신입 소방 대원이었다면, 그리고 <심장이 뛴다>가 예능이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뛰는 소방대원들의 삶을 다루는 다큐였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게다가 상황이 급박하거나, 절박하다 보니, 실제 <심장이 뛴다>에서, 소방대원으로서 연예인들의 몫이 애매하다. 방치된 시신을 거둬야 하는데 연예인을 투입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나마 안전이 보장되는 상황에만 들어가야 하다보니, 몫이 적어지고, 후일담 식의 에피소드가 되는 것이다. 응급 상황의 연속인 소방서의 일에서, 정말 연예인 소방대원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 현장에 뛰어드는 날이 올까? 죽음의 위험조차 감내하며? 그리고 정말 그럴 만한 의미가 있을까? 예능에서? 

피만 봐도 온 몸에 힘이 빠지는 최우식이 시신이 있는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한다. 그 모습은 <스플래쉬> 마지막 회 어찌어찌 하다가 다이빙대 위로 내몰린 씨스타의 소유가 그 위에서 안절부절하는 모습에 겹쳐진다. 물론 소유는 다이빙대에서 뛰어 내렸다. 최우식도 그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듯 했다. 방송은 그런 그들의 성장담을 그려내고. 하지만 나무의 나이테 위에 남겨진 태풍의 상흔처럼 혹시나 그들의 정신에 남겨질 상흔에 대해 세상은 무심하다. 트라우마가 될 지도 모를 그런 일까지 겪으며 예능을 해야만 하는 걸까? 

고독사의 죽음과, 말기 뇌종양 환자조차 예능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 세상이 두렵다. 성장통 혹은 자기 극복이라는 이름의 트라우마도 가혹하고. 리얼리티라는 이름의 거침없는 질주는 어디까지가 그 한계일까?  kbs2의 <다큐3일>에나 어울릴 내용이다. 


by meditator 2013. 10. 9. 09:59

10월 7일 방영된 <적과의 동침>은 아예 부제를 '도다리의 역습'이라고 붙여 놓고 시작했다. 도다리라니? 이른바, 사람들이 좋아하는 광어가 되기를 원하는, 도다리, 즉, 국회의원이지만 지명도가 떨어지는 의원들이 출연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방송의 초반, 상당한 시간을 들인 소개 부분에서도 바로 이 지점, 지명도가 떨어진다는 지점에 촛점을 맞춘다.


이런 소개의 방식은 사실 여타 예능 프로그램이랑 동일하다. <라디오 스타>에서, 김구라는 지명도가 떨어지는 출연자가 등장하면 대놓고, '인지도가 떨어지는' 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적과의 동침>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주 여야의 거물급 정치인인 김무성, 박지원이 출연한 거에 비해, 과연 사람들이 잘 모르는 다수의 의원들과 함께 하는 방송이 재미가 있을지 의문이라는 말을 김구라는 잊지 않았다.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예능인 <적과의 동침>에 출연한 이유가 인지도의 상승이 목표라는 점에서 연예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박민식 의원은 전과는 다르게 거리를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알아본다며 얼굴에 화색이 돈다. 박인숙 의원은 대놓고 사람들이 동네 아줌마랑 구별을 못한다면 이번 기회에 자신을 알리고 싶다며 속내를 털어 놓는다. 예능 프로그램 출연 한 번에 인지도 상승을 노리는 목표라는 점에서, 연예인과 정치인의 모양새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적과의 동침>에 출연한 게스트들이, 그저 우리가 그들을 보고 웃고 즐길 수 없는 국회의원이라는 사실은 방송 중 곧 드러난다. 
예능 코치로 함께 한 가수 솔비가 이미 <적과의 동침>을 통해 개그맨 못지 않은 예능감으로 거의 고정이 되다시피한 김성태 의원에게 '김성태 씨'라고 할 때, 굳어지는 그의 얼굴에서 이것이 여느 예능 프로그램이 아님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지난 주 김무성 의원 앞에서 갖은 애교를 부리고, 웃긴 춤도 불사하던 그가, 자신을 '의원님'이라고 불러주지 않는, 자신을 모르는 다른 연예인에게 불편함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자, 옆에 있는 김흥국이 해명이랍시고 한다는 말이,' '씨'라고 부르면 낙선한 거 같잖아, '의원님'이라고 불러야지'. 하자, 여기저기서 맞단 호응이 나온다. '의원님'이란다. 

<적과의 동침>은 호시탐탐 이 프로그램이, 정치인을 욕받이로 쓰는 프로그램이라고 밝힌다. 즉, 자신들은 국회의원을 데려다 놓고, 그들을 희화화하며 마음껏 물고 뜯고 즐기며 답답한 국민들의 속을 풀어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의 '정' 자도 모르는 연예인들을 연예 코치라며 합류시켜 말도 되지 않는 고양이 애교를 시키고, 우스꽝스런 게임을 하게 만들고, 사회적 문제와 관련된 단어들을 맞추지 못하면 면박을 주는 것으로 국민들의 속을 풀어주었다고 자부하는 듯 하다. 심지어, 이미 국민들의 선택을 받은 국회의원들을, 한참 의정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인지도가 떨어진다고 '도다리'라 거침없이 취급하는 것으로, 그들이 만만하게 다루었다고 자평하는 듯 하다. 

하지만, 그런 <적과의 동침>의 시도가 딜레마인 것이 불과 4회 만에 드러나고 있다. 같은 당 형님 앞에선 순한 양과도 같았던, 구르라면 구르기라도 할 것 같은 의원이, 다른 연예인 게스트 앞에서는 고압적인 얼굴을 숨기지 않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당연히 자신은 '의원님'이어야 한다며 헛기침을 한다. '가왕' 조용필을 우리는 조용필 가수님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얼굴도 잘 알지 못하는 국회의원은 여전히 '나으리'이다. 

(사진; 뉴스엔)

정치인 예능을 만만하게 생각했던 딜레마는 4회에 바뀐 프로그램의 내용에서도 드러난다. 그간 어지간히 정치인 예능에 대한 혹독한 평가에 노심초사했는지, 프로그램 초반 <적과의 동침>은 이 프로그램을 향한 대중의 여론이 다양하다는 점을 여러 번 강조했다. 진짜 다양했다면 굳이 그렇게 해명할 필요가 없을 텐데 말이다. 
거기에 덧붙여, 유치한 게임에 대한 비난 여론을 의식한 듯, 성격을 바꾸어, 상대방 지지자들이 새누리당과 민주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10개의 문항을 맞추기 게임을 집어 넣었다. 
사실 이 부분은 4회간 방영되었던 <적과의 동침> 그 어떤 순간보다도 가장 재미있는 순간이었다. 나는 인지도가 떨어져요, 나는 재미있는 사람이예요 하던 '의원님'들이 본색을 가감없이 드러낸 '본격 '리얼리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적과의 동침>을 사람들이 재수없어 하는 이유가 무얼까? 바로 그들이 촬영장에 나와 여깨를 곁고 친한 척을 하고,너스레를 떨고, 심지어 춤을 추며, 저 좀 봐주세요 해도, 국회의원 뺏지만 달면, 국민들은 저리 가라 자신의 당리 당론에만 몰두할 사람들이며, 자신들 정당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몸싸움도 저리가라에, 힘 있는 기업과 대통령을 위해 파렴치한 발언과 법안을 만드는데 찬성표를 던질 사람들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스튜디오에 모여, 나비 넥타이를 매고, 난 연예인처럼 인지도에 목말라요 하다가, 정치와 관련된 의견들이 나오자, 숨겨진 본성을 드러내는, 불통의 정치인으로 돌아가, 그건 민주당의 의견이요, 매번 지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요, 자신들은 그 어떤 정당보다도 민주적인데, 이런 의견을 이해할 수 없다는 꽉 막힌 모습을 보일 때, 정말 속이 다 시원했다. 민주당이라고 다르지 않다. 때를 만난 듯 비아냥거리는 모습도 그닥 품이 넓어보이진 않았다. 새누리당이건, 민주당이건 그간 뒤집어 썼던 양의 탈을 벗어던진 늑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적과의 동침>의 딜레마는 바로 이거다. 양인 척 하는 늑대들을 데리고, 양들의 놀이를 즐기는 것. 하지만 호시탐탙 늑대들은 자신들을 건드릴 때 마다 '으르렁, 으르렁' 거린다. '의원님'이라고 불러, 우리가 불통의 당이라고, 어디 감히 우리를! 이러면서. 이게 진짜 웃기는 거다. 어설프게 '도다리'로 치부하고, 몇번의 면박으로 그들의 인지도나 올리는데 기여하는 게 본래의 의도가 아니라면, 진짜 국민 욕받이 방송이라면, 거침없이 그들의 가면을 벗어제끼게 만들고 국민들 앞에 본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내 줄 때 <적과의 동침>의 참 재미가 생겨날 것이다. 
그런데, 히히덕거리다 얼굴이나 알리고 가려고 출연했다가, 자신의 당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나오자 정색하던 의원님들이, 과연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적과의 동침>이 진행된다면 계속 나오려고 할까? <적과의 동침>의 귀추가 주목된다. 


by meditator 2013. 10. 8. 0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