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李箱)

본명 김해경,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에 총독부 기관지 표지 공모에 당선될 정도로 재능을 보였지만, 각혈로 퇴직한 후 '제비'등을 경영하며 소설 [날개]와, 시 [오감도]등 실험성이 강한 작품을 발표했다.

이상이 드라마 페스티벌에 등장한 이상에 대한 가장 적절한 약력일 것이다.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면 누구나 이상의 [날개]나 [오감도]쯤은 접해봤을 것이지만, 또 그것을 접해봤음에도, 철이 들어서도 여전히 이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의 삶도, 그의 작품도 미스터리한 채 남아있다. 그래도 '날개'를 펴라는 소설까지는 이해가 되겠지만, 제1의 아해가 뛰어간다오, 제2의 아해가 뛰어간다오 라는 식의 시에 이르르면 범인의 이해도는 그의 시 앞에서 주눅들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작가들은, 그 이해할 수 없는 이상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풀어내려고 했다. 일찌기 이상의 삶과 미스터리한 작품을 대상으로 한 <건축무한 육면각체의 비밀>이 1999년 유상욱 감독의 영화로, 그리고 2007년에는 장용민이 발표되었다. <훈민정음 살해사건(2012)>의 김재희 작가는 아예 <경성 탐성 이상>이란 작품을 통해 이상을 탐정으로 전직을 시키기도 했었다. 

<드라마 페스티벌- 이상 그 이상>은 바로 이런 미스터리한 이상의 캐릭터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작품이다. 드라마 속 이상(조승우 분)은 자신의 작품 오감도를 게재하는 신문사 앞에서 시위를 하는 군중들에게 라이터를 빌려주고 스스로 그의 작품이 실린 신문더미를 불태우는데 앞장서는 기인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 기행은, 경혜의 언급을 빌어 나타나듯이, 청계천 다리 밑의 굶주린 빈민들과, 화려한 경성 거리를 활보하는 '모던'걸, '모던'보이의 괴리감 속에서 스스로 자학하며 미침을 선택한 자의식 가득한 천재로 그려진다. 일찌기 뮤지컬을 통해 무대에서 빛을 발하던 조승우의 연기는, 자학을 숨긴 채 자신을 희화화시키는 이상을 그려내는데 그보다 더 적역이 없는 듯하다. 

<이상, 그 이상> '비운의 천재시인'으로 돌아온 조승우! 이미지-3

그런 그에게 총독부 동료였던 히야시가 고종의 밀지가 담긴 서찰을 전하고, 히야시의 죽음 이후 묘령의 여성 경혜(박하선 분)까지 합류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고종이 숨겨두었다는 황금 찾기에 돌입한다. 

<이상 그 이상>은 이상의 신비로운 캐릭터를 진작시키기 위해, 당시 제비의 사환이었던 수영(조민기 분)이 나이가 들어 이상의 그림을 들고 표구상에 등장하는 것으로, 과거와 현대를 오가며 전개된다. 하지만 나이든 수영의 등장이 미스터리함을 배가시키기는 했지만, 과연 그의 부연 설명이, 드라마의 스토리에 보탬이 되었는가는 미지수일 정도로, 한 시간 여의 짧은 런닝 타임 동안 꾸겨넣은 이상의 탐정기는 버거워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이상이라는 캐릭터에 방점을 찍는데는 성공했음에도, 이상을 제외한 그가 탐정으로써 고종 황제의 밀서를 통해 황금을 추적해 가는 과정은, 어설프기가 그지 없었다. 탐정물의 기초는 시청자로 하여금 극의 진행에 따라 함께 머리를 쓰도록 만드는데 있다. 방위를 이용한 추리의 과정은 그럴 듯했지만, 그것조차 대사로 나열하는 것에 그치고, 경혜의 등장과, 히야시가 알고보니 이상을 좋아했다던가의 결정적 힌트를 말로 설명해 버리는 식의 추리극은 매력이 떨어진다. 무엇보다, 숨겨진 고종의 황금 찾기가 결국은 '살아있는 민비'라는 또 다른 대한 제국의 미스터리로 전환해 가는 과정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극의 절정에서 조승우의 '뒷방 늙은이가 결국 생각했던 것'운운의 분노 작렬하는 연기가 없었다면, 동굴 속 반지를 발견하는 장면은 실소가 나올만한 장면이었다. 

민비가 살아있다는 스토리는 김재희 작가의 [경성 탐정 이상] 중 '그녀가 살아있다]를 통해 이미 차용된 이야기이다. 물론 이 스토리 자체가 망해가는 대한제국에 대한 백성들의 열망이 자아낸 미스터리로 구전되었던 것이기에, 또 한번 차용되었다는 것에 문제제기를 삼을 것은 아니라 본다. 하지만, [경성 탐정 이상]에서는 여전히 민비가 살아있어 그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하지만, <이상 그 이상>의 결론은 허무하다. 그래서 민비가 살아서 뭐 어쨌다는 건가?란 의문이 든다. 작가는 고종 황제 황금 미스터리를 살아있는 민비의 미스터리로 전환시킨 것이 큰 열쇠인 양 의기양양 했겠지만, 그것만으론 황금을 향해 폭주하던 스토리를 진화시키기엔 역부족인 듯 싶다. 그것이 애초에 없을 거란 이상의 대사를 복선으로 깔았다 해도 말이다. 한 시간 안에 이상의 활약상에 집중하다 보니, 결국 스토리의 개연성을 깍아먹은 결과가 되버린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의식 가득한 조선의 지식인 이상의 캐릭터를 텔레비젼을 통해 만나는 건 즐거웠다. 어설픈 사건의 전개, 황당무개한 추격전에도 불구하고, 이상이란 인물을 다음에 또 만나고 싶으니까. 마치 어설픈 소극장 무대의 풋풋한 작품을 만나듯, 잔뜩 의욕이 앞선 이상의 탐정물은 그 실험 정신만으로도 반은 먹고 들어간다. 뭐 이런 어리숙한 맛이 드라마 페스티벌의 강점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시청률이 고공행진을 하는 드라마들이 뭐 그렇게 개연성이 있는 것도 아니잖는가. 


by meditator 2013. 11. 29. 09:59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탄광촌의 한 소년이 발레리노가 되어, 백조의 호수를 공연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난다. 11월 26일 방영된, <감자별2013QR3(이하 감자별)>에서, 여주인공 나진아 역시, 빌리 엘리어트의 주인공처럼 무대 중앙을 향해 드높게 도약하며 시트콤은 끝이 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13년의 나진아는 자신의 꿈을 이룬 발레리노가 아니다. 클럽으로 간 21세기의 '빌리 엘리어트' 나진아는 그래서 더 애잔하다.



대처 영국 총리의 죽음이 알려지자, 영국 탄광 노조는 '대처의 자유주의 시장의 상징이었지만, 그 이익을 취한 것은 소수에 불과했다'며 혹독한 부고의 성명을 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처의 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것이 바로 영국의 탄광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바로 그런 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대량 감원과 사업 축소가 휩쓸고 간 영국의 탄광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빌리는 바로 그 마을에서 노조 일을 맡고 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시피 증기기관의 발명과 함께 산업 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영국의 석탄 산업이다. 바로 그 석탄 산업이 자유주의란 미명 하에 정리 대상이 되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없는 나진아의 아버지는 삽자루를 타고 놀던 시절의 아이디어를 살려 (주)콩콩의 오늘을 만든 견인차 역할을 한 사람이다. 하지만, 역시 나진아의 아버지 역시 토사구팽의 처지다. 먹고 살 걱정없이 해주겠다는 장담은 겨우 1년에 쌀 한 푸대요, 길거리에 나앉게 된 나진아와 그의 엄마에게 베풀어준 온정이란게, 냉기가 도는 차고요, 노수동네 집의 가정부 몫이다. 

빌리의 아버지이건, 나진아의 아버지이건, 영국과 한국이라는 국적을 달리하건, 상관없이, 그들의 청춘과 아이디어와 노동을 곳감 빼먹듯 한 후에,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하라는 식의 처분은 마찬가지이다. 당연히 그들의 자녀들은 가난을 대물림한다. 

(사진; 스포츠 경향)

빌리는 남자라면 축구와 권투만이 최고인 마을에서 발레에 매료되어 아버지의 원망을 산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결국 배신으로 남은 아버지와 같은 '블루 칼라'가 아닌 삶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빌리는, 그런 아버지의 소망은 애저녁에 제껴버리고, 거기서 한 술 더 떠, '게이'라 오해받기 십상인 발레를 택했다. 당연히 아버지는 반대를 한다. 때리기도 하고, 가두기도 하고, 하지만 빌리의 소망을 꺽을 수 없다. 결국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원론에 충실한 영화는, 자식을 위해 노조원들에게 등을 돌리는 아버지를 그린다. 그리고 결국 아들이 자신과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하던 아버지의 소망은 성공을 거둔다.

나진아 역시 자신의 이름이 불려진 무대를 향해 도발적 표정을 짓고 달려나간다. 하지만, 나진아는 빌리처럼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섹시 댄스 대회 상금을 위해 나진아는 영화 속 빌리와 같은 혹독한 댄스 수업에 불철주야 충실한다. <감자별>은 빌리 엘리어트을 빌어오되, 빌리가 꿈을 향해 매진하는 상황을 섹시 댄스 대회 출전이라는 상황으로 비틈으로써, 21세기 청춘의 고달픔을 극대화시킨다. 

누구하나 돌보아주지 않는 가정 환경에, 열악한 탄광촌이라는 배경 속에서 그래도 빌리는 '발레'라는 자신의 꿈을 키운다. 그래도 그 무능력해 보이던 아버지는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어 가면서 아들의 꿈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하지만 나진아에겐 그런 아버지가 없다. 노수동네 가정부로 들어간 어머니는 '은혜'를 빙자한 노수동네 식구들의 '홀대'를 감수하기도 바쁘다. 하루 아침에 노수동네 아들이 되어버린 홍버그, 준혁이도 아버지가 준 '골드카드'로 나진아에게 꽃등심을 살 정도가 되었는데, 나진아에겐 그저 얻어먹으며 민망해 할 자유만이 있다. 자신의 꿈은 아버지같은 멋진 아이디어를 내서 (주)콩콩의 일원이 되겠다는 것이지만, 현실은 회사가 '인턴'이란 이름으로 그의 노동을 날로 먹고 있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진아가 비상할 수 있는 곳은, 불가능하다 여겨지는 클럽 섹시 댄스 대회이다. 그저 돈 300만원을 잡기 위해 날아오른다. 바로 2013 대한민국 청춘의 현실이다. 




by meditator 2013. 11. 27. 09:46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남편/문정희


11월25일 <네이웃의 아내> 중 채송하(염정아 분)는 친구 지영이 들려주는 문정희 시인의 남편이라는 시를 듣다 결국 눈물을 터트리고 만다. [남편]이라는 시 속에서 문정희 시인은, 자신에게 이제는 남자같지도 않은, 자신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편에게 그래도 여전히 밥을 해서 나누어 먹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채송하는 그 남편과 더 이상 함께 마주앉아 밥을 먹지 않기를 결심한 터이다. 


누가 보건 말건 밖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던 민상식(정준호 분)과 호텔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채송하, 그런 그녀의 집에서는, 그녀의 남편 안선규(김유석 분)와 홍경주(신은경 분)가 다정히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다. 

분명 채송하와 안선규가, 그리고 민상식과 홍경주가 공식적 부부사이인데, <네 이웃의 아내>에서 사랑의 작대기는 어긋나버렸다. 드러난 사실로만 보면, 이건 뭐 암묵적 스와핑 방조 드라마인가 싶게,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하지만, <네 이웃의 아내>를 꾸준히 지켜 본 사람이라면, 이 드라마에 섣부르게 '막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중년의 권태와 외로움에 대한 보고서에 가까운 드라마라 할 수 있다. 


마흔을 공자는 '불혹(不惑)'이라고 하셨다. 세상사 그 어느 것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2013년 대한민국의 마흔은 어떨까? 팔십을 넘는 나이가 평균 수명이 되는 세상에 마흔은, 삶의 한 가운데, 아직 한참 피가 뜨거운 나이다. 세상의 유혹에 눈감기에는 너무 팔팔하다. 하지만, 일찌기 이십대에 한 결혼은 한 고비를 넘겨, '권태'라는 수식어가 붙어 나른해져만 간다. 아내는 더 이상 여자 같지 않아, 함께 잠자리를 할 수 없게 되고, 남편은 그저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동거인일뿐, 아버지와 오빠의 중간 정도의 애매모호한 존재가 되었다. 시인의 시에서처럼, 제일 먼저 의논하고 싶은 사이라도 되면 다행이지만, 21세기를 사는 오늘의 부부에게 서로는 가장 가깝워야 하는 강박은 가지지만, 기실은 가장 먼, 그래서 가장 상대방을 외롭게 하는 존재라는 걸 드라마는 그려내고 있다. 채송하는 말한다. '외롭지 않으려고 결혼을 했는데, 왜 점점 더 외롭니?'라고.


(사진; 서울경제 신문)


그래서 그 외로운 사십대의 중년에게 '미혹(迷惑)'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늘상 홀로 가부장의 자리를 버텨온 민상식에게는 당당한 커리어 우먼 채송하가 다가왔다. 그런가 하면 채송하 역시 마찬가지다. 강직함을 무기로 경제적으로는 무능한 남편 안선규 대신, 책임감있는 민상식이 듬직해 보였다. 이 커플에게 사랑은, 그들의 삶에서 채워지지못했던 그 무엇이었다. 

반면, 안선규와 홍경주 커플에게는 '첫사랑'이란 로망의 완성이다. 아내로 인해 완성되지 못했던 첫사랑, 채송하로 인해 빼앗겨버린 첫사랑에, 두 사람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린다. 물론 첫사랑이라고 하지만, 두 사람 역시 자신의 결혼 생활에서 결코 채워질 수 없었던 그 무엇을 첫사랑이란 이름으로 대신 적어넣고 있는 중이다. 


결혼이란 게 특정한 사람과 또 다른 특정한 사람의 만남이니만큼, 처음엔 특정한 누군가 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 나를 매료시켜 그와 '백년가약'을 맺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흐르다 보면, 그 '매력'이 가장 증오할 대상이 되어버리곤 한다. 더구나, '사랑'을 전제로 한 부부라는 제도는 오히려 그 사랑이 짐이 되어, 사랑을 해야 한다는 명제에 매달려, 서로를 할퀴고 실망하게 되는 것이다. 


<응답하라 1994> 6회에서 나정의 어머니(이일화>는 생리가 끊긴 걸 페경인 줄 알고 우울증에 빠져든다. 그걸 눈치 챈 아버지(성동일 분)가 웅크리고 있는 어머니에게 다가간다. 그런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인제 내는 여자도 아니다. 괘안나?'라고 묻고, 그런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다정하게, '임자, 그러면 이제 의리로 살면되네.'라고 대답해 준다. 더 이상 여자가 아니라 섭섭하지 않냐라는 질문에, 의리로 살면 된다는 질문은 생각하기에 따라 여전히 외양은 여자인 어머니에겐 섭섭할 수도 있는 대답이다. 하지만, 자식 하나를 먼저 보내고서도 여전히 금술이 좋은 나정이 부모님에게는, 그 말이 동문서답이 아니라, '아'하면 '어'하는 선문답같은 거였다. 

하지만, <네 이웃의 아내>의 부부에겐, 그 '아'하면 '어'할 수 있는 교감이 빠져있다. 오회려, '아'하면 '왜?'할 정도로 서로가 , 서로에게 날카로워져 있을 뿐이다. 각자, 자신이 지고 있는 나이의 무게에 눌려 상대방을 보지 못한다. 홀로 외로워 하는 네 사람을 보면, 어쩌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기 보다는'우정'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네 사람은, 응답하라의 나정이 부모님이 세월로 채워왔던 '의리' 대신에, 지금의 헛헛함을 새로운 '사랑'에서 구한다. 응답하라 나정이 부모님의 해결 방식이 구세대의 그것이라면, <네 이웃의 아내>의 도발은, 2013년, 부부이지만 외로운 중년의 부부에게 던지는 질문과도 같다. 십 여년을 살아, 이제는, 덤덤해지다 못해, 원수같은, 당신의 부부 관계를 어쩌시렵니까? 그 허함을 첫사랑으로 달래보시렵니까? 내 파트너가 갖지 못한 그 무엇을 가진 새로운 사랑으로 달래보시렵니까? 라고. 

문정희 시인이 돌아본 남편은, 그래도 내 아이들을 가장 사랑하는 이였다. 2013년 위기의 중년 부부들 갈라진 틈을 메우고 여전한 아이들의 부모로써 남을  수 있을까? 

by meditator 2013. 11. 26. 21:04

지난 주까지 2주에 걸려 방영된 <최후의 권력>이 인류 최초이자, 최후의 완벽한 권력의 형태로 인정받고 있는 원시공동체의 '빅맨'을 반면교사로 삼아, 실제 정치인들의 '빅맨'실험을 해보았다면, 11월24일 5부작 <최후의 권력>은 세 번 째 시간으로 현대까지 유지되고 있는 왕권제도의 존재 이유를 통해 권력의 또 다른 존재 이유를 살펴본다. 


<3부 왕과 나>에 등장한 21세기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왕권 국가에는 브루나이와, 스와질랜드, 그리고 부탄이 있다. 

카메라는 스와질랜드에서 벌어지는 '갈대축제'를 집중 조명한다. 스와질랜드 전국에서 성년이 된 여자들이 모여 왕의 여자로 간택받기 위해 반나의 모양새로 춤을 추며 벌이는 '갈대 축제'가 21세기에도 여전히 벌어지는 것을 두고 이견이 분분하다. 그에 반대하는 혹자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왕의 여자 간택 과정을 매년 수행한다는 과정 자체가 전근대적이며 여성 비하적이라는 주장을 편다. 이에 반해 찬성하는 측은, 만약 그 과정에서 진짜로 왕비가 간택되었다면 지금까지 왕의 왕비만 40~50명에 이르렀을 것이라며, 그것은 그저 성년에 들어선 여성들의 성인식 같은 통과의례이자, 전통 축제라고 선을 긋는다. 이런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되는 가운데, 젊은 여성들은 그 며칠 동안 축제 분위기에 들떠 흥겨워하며, 왕을 실제 만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자신에게 행운이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들떠있는다. 

(사진; 스와질랜드 국왕, 스포츠 월드)

하지만 13번 째 왕비가 뽑힌 이후로, 축제는 그저 축제일 뿐이었다. 사실 13번째의 결혼도 기실 알고보면 축제를 통한 간택이 아니었고, 우리가 역사를 통해 보아왔던 왕권 제도의 결혼들처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약한 왕권을 다지기 위한 정치적 제휴의 한 형태일 뿐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스와질랜드에서 '갈대 축제'를 둘러싼 논란의 본질은, 왕의 여자가 간택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하는 국민 소득과, 에이즈 세계 1위라는 치명적인 삶의 조건의 문제다. 그런 현실 속에서 여전히 희희락락 축제나 벌이고 있을 때냐는 반문이 축제를 반대하는 측 목소리의 본질이다. 

스와질랜드와 같은 처지에 놓인 왕권 국가가 또 있다. 바로 희말라야 산속의 이상향 부탄이다. 가난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삶의 만족도 1위인 국가 부탄도 여전히 6대째 왕권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 나라 역시 지표상 삶의 만족도가 높은 것과 상관없이 국민들의 가난을 구제하지 못하는 문제가 왕권의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스와질랜드와 부탄은 왕이 스스로 근대적 의회제도를 도입하는데 앞장을 선다고 다큐는 설명한다. 스와질랜드에는 군주제와 투표제도를 결합한 독특한 정치 시스템 틴쿤들라(Tinkhundla)가 있다. 총 95명의 상하원 의원 중, 30명은 왕이 임명하고 65명은 선거를 통해 선출한다. ‘군주 민주주의’라고 설명되는 이 시스템을 통해, 국왕은 민의를 반영하는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의회에 행사한다. 부탄의 4대 국왕 지그메 싱예 왕추크가 시작했고 그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아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정체의 변화를 꾀한 5대 국왕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추크. 백성은 파도와 같고, 왕은 그 파도 위에 띄워진 배와 같기에 백성을 따르기 위해, 왕은 앞장서 민주주의 제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최후의 권력>이라는 프로그램의 관점에 대해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미 역사를 통해 누누히 학습해 왔듯이, 권력을 가진 자가, 스스로 자신에게 집중된 권력을 나누어 주는 경우가 있었던가? <최후의 권력>은 왕이 앞장서 근대적 의회제도를 도입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21세기에도 여전한 전근대적인 제도를 고집하는 정치 제도의 퇴행에 불만을 느낀 국민들의 움직임에 불안을 감지한 국왕이, 그런 제도의 도입을 통해,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고자 한 타협의 결과물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징후는 스와질랜드와 부탄과 함께 조명된 브루나이 왕국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강고한 왕권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브로나이는, 왕의 재산으로 된 오일머니를 국민 복지에 쏟아부음으로써, 서유럽 어느 국가 못지않은 복지국가의 면모를 보인다. 자식이 열 댓 명이 넘어도 브로나이 사람들은 걱정이 없다. 나라에서 다 해결해 주니까. 반면, 가난에 시달리고 에이즈에 시달리는 스와질랜드와, 행복하다고는 하지만 가난은 구제하지 못하는 부탄은 왕이 앞장서 근대적 정치 제도와의 제휴를 실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진; 브루나이 술탄 하사날 볼키아; 스포츠월드)

하지만, 그것마저도 인터뷰에 등장한 스와질랜드 국회의장이 국왕 형이라는 사실로 볼 때, 과연 왕에 의한 근대적 정치 제도가 프로그램 중에 등장한 스와질랜드 국민들의 희망처럼 제대로 된 정치를 구현해 낼까 역시 미지수다. 

즉 21세기로 오면서, 세상의 권력은 그 주체가 왕의 권력의 유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듯이, 1인 왕권에서, 다수의 '백성'의 품으로 그 주체가 바뀌어 갔던 것이다. 그런 역사적 흐름을 브로나이는 오일 머니를 통한 복지를 통해 변형시켜 가지만, 그것마저 할 수 없는 스와질랜드와 부탄은 왕이 앞서, 근대적 형태의 민주주의를 이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결코 왕의 '은덕'이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역사는 없다. 

현대에 있어서도 여전한 '왕권'이라는 권력 형태를 조명해 보고자 하는 시도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 관점이 '왕'에 머물러서는, 또 다른 나라의 '용비어천가'가 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3. 11. 25. 09:56

'서로 가까이에 인접하여 사는 집'을 이웃이라고 한다. 가족애가 우월한 우리나라 사람들이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웃을 '이웃 사촌'이라며 혈육만큼 진한 사이로 인증하고 있다. 하지만, '이웃 사촌'도 옛말이다. 간간히 뉴스에 등장하는 '주차 문제'나 '층간 소음 문제'로 인한 시시비비 혹은 심지어 살인까지도 초래하는 사건들은 '이웃사촌'이라는 단어가 무색해 지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허긴 가까운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세상이다. 그렇게 변화된 의미(?)의 '이웃 사촌'의 세상에서, kbs2의 <인간의 조건>은 '이웃의 도움으로만 살기'라는 난해한 미션에 도전했다. 


그간 주어진 <인간의 조건>의 미션들이 그 어느 것하나 호락호락한 것이 없었지만, '이웃의 도움으로만 살기'라는 미션이 더더욱 난감해 보였던 것은 바로 '더불어' 살아야 하는 곤란함에 있다. '핸드폰, 텔레비젼, 컴퓨터 없이 살기'나 '쓰레기 버리지 않기' 같은 것은 나 하나 잘 하면 되는 것이었다. 기껏해야, '친구'를 찾고, 돈없이 사는 데 필요한 '물물교환'을 위해 측근 누군가를 찾거나, 간혹 이웃의 도움을 받는 정도였다. 그런데 온전히 이웃의 도움으로만 6일을 살아야 한다니! 그것도 '요즘'같은 세상에!

여섯 멤버들에게 주어진 미션이 더더욱 난제인 이유는 그들이 미션 때마다 이용해 왔던 연남동 게스트 하우스 때문이기도 하다. 그간 미션 과정 중에 가장 많이 이용했던 연남동 게스트 하우스는 그만큼 촬영으로 인한 이웃들의 피해 정도가 가장 심한 곳이었다. 촬영이라는게, 그저 출연자들만이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을 촬영하기 위한 스텝에, 출연자 개인 스텝까지 수십 명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대공사(?) 이다 보니, 한적한 주택가 골목에 자리잡은 연남동 게스트 하우스가 그간 촬영으로 인해 주야를 가리지 않고 번잡했으며, 그로 인해 주민들의 피해가 작심했을 것이며 그로 인한 주변 이웃의 불만도 종종 표출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사진; tv리포트)

그런 난감한 상황을 제작진은 역설적으로 활용한다. 그저 주변 이웃에게 입에 발린 사과 몇 마디를 전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조건>의 미션으로 '이웃의 도움으로 살기'를 제시한 것이다. 
왜 이 미션이 기발한 것인가는 3주에 걸쳐진 미션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으로 설명된다. 당장 한 끼조차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는 <인간의 조건> 멤버들은 어쩔 수 없이 연남동 동네 속으로 들어간다. 다짜고짜 이웃집의 문을 두드려 아침 밥을 구하고, 집에 남은 멤버들을 위한 음식 적선을 부탁한다. 거기서 조금 더 진화하면 체계적인 끼니 구하기에 돌입한다. 동네 문화센터에 들러 거기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문화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이웃들 얼굴을 익혀가며 먹거리를 구하거나, 그곳 직원들의 식사에 숟가락을 얹는 식이다. 한 발 , 한 발 연남동 동네 주민의 삶 속으로 <인간의 조건> 멤버들이 스며들어  가게 되는 것이다. 뜨네기 연예인들이, 야곰야곰 들어와 동네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정말 신기한 것은,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들어와 밥을 적선하는 이들에게 문을 열어주고 끼니를 나누어주는 이웃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이 먹는 밥상에 수저 한 벌을 더 얹어 식사를 함께 하고, 곳간을 열어 가진 음식을 나누어 주고, 심지어 깨질지도 모를 그릇까지 선뜻 빌려주는 이웃이 여전히 서울 하늘 아래 있다는 사실을 여섯 멤버들은 알아간다. 물론 연예인이라는 친근감이 작용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신의 집 문을 열어 무언가를 나누어 주는 스스럼없는 행동을 하는 '이웃'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이웃의 도움으로 살기' 미션은 일정 정도 성과를 얻은 것이라 보여졌다. 가까운 사람이 제일 무서운 사람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따뜻했다. 여섯 멤버가 6일을 이웃의 덕분으로 살아갈 만큼. 

물론 '이웃의 도움으로 살기'가 그저 이웃집에 숟가락 하나 얹는 미션이 아닌 만큼 여섯 멤버들은 이웃에게 받은 도움을 갚아나간다. 밤늦은 시간 집에 돌아오는 여성들과 함께 늦은 밤길을 걸어주기도 하고, 홀로 사시는 할머니를 위해 도시락 배달에 나서기도 한다. 그저 밤늦은 시간에도 시끌벅적한 촬영을 견뎌준 이웃에게 '떡 한 덩이'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려고 벌였던 행사를 결국 연남동 동네 잔치까지로 확장하여 멤버들의 감사는 진화한다. 40여년을 한 곳에서 살아온 분들이 계신 곳이지만, 이제는 얼굴을 아는 이웃보다 그렇지 않은 이웃이 더 많은 곳이 된 연남동에서 동네 잔치를 통해 주민들은 이제는 서로 거기를 지나다 인사라도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어간다. 그저 동네에서 자주 민폐를 끼치던 연예인들이었던 <인간의 조건> 멤버들도 이제는 떠나는게 아쉬운 동네 주민이 되었고. 이웃에게 끼치던 폐를 갚기 위해 시작한 미션이었지만, 지금까지 미션 중 '자각'과 '계몽'을 넘어선  '뿌듯한' 결과물이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성과을 얻어냈다. 

물론 아쉬운 점도 남는다. 연남돈 주민 잔치와 함께 병행하여 보여졌던 박성호가 벌였던 구미시 동네 잔치는 상대적인 초라함의 기억만으로 남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주일 동안 연남동 주민들 사이에 스며들어 차곡차곡 관계가 쌓여진 행사와 그렇지 않은 행사는 다를 수 밖에 없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차라리, 이웃의 도움으로 살기 지방판으로 속편의 형식으로 기획했다면 더 좋았을 부분이다. 

또한 이웃의 도움으로 살기의 과정이 연남동 주민들과의 관계 설정에 치중한 부분도 아쉽다. 그간 <인간의 조건>이 매 미션마다 그 미션에 어울리는 공공부분의 견학을 했던 분량이 꼭 들어갔었는데, 이번 '이웃의 도움으로 살기' 미션에서도 실제 마을 공동체를 잘 꾸려내고 있는 '성미산 공동체 마을'이나 실제 <다큐3일>을 통해 방영된 '산새마을'같은 곳을 방문해 보는 것도 좋았으리란 생각이 든다. 아예 '성미산 마을 공동체'같은 경우는 '공동체로 살아보기'란 미션으로 권장해 보고 싶다. 

멤버간 대화에서도 등장했듯이 파일럿으로 잠깐 방영된 <인간의 조건> 여성편이 기대 이상의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결국 남성판 <인간의 조건>의 숙제로 남는다. 이제 멤버별 개성이 충분히 알려진 상황에서, 결국 미션 별로 진행되는 <인간의 조건>이 계속 승승장구할수 있는 방향은, 탁월한 기획력 밖에 없을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웃에게 끼쳤던 민폐를 '이웃의 도움으로 살기'란 미션을 통해 연남동 동네 잔치로 승화시킨 이번 미션은 성공적이다. 더더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다시 멤버 개인으로 돌아가 자신이 실제 사는 곳의 이웃을 방문하는 후일담까지 곁들인 마무리는 '화룡점정'이었달까.


by meditator 2013. 11. 24. 10:57

<웃음을 찾는 사람들2(이하 웃찾사)> 의 한 코너 '굿닥터' 중에서,

연애 상담을 하려고 찾아온 남녀, 여자는 매사에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남자에게 짜증을 낸다. 남자; 알았어, 알았어, 담배 끊을게
여자; 그래? 그러면 대신 사탕 먹어
남자; 사탕? 무슨 맛 먹을까?
주원 선생; 안됩니다. 안됩니다. 사탕은 안됩니다. (목소리가 바뀌며)사탕보다 달콤한 네가 필요해~
여자와 간호사, 동시에 격렬하게 환호하며 주원 선생에게 매달린다. 

(사진; tv리포트)

이 코너의 상황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여자와 남자는 동일하게 한국말을 사용하지만, 여자가 쓰는 한구말에는 통역이 필요하다는 것과,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런 여자들이 쓰는 한국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남자도 마찬가지다. <웃찾사>의 또 다른 코너, '내남자'는 남자들의 상황을 개그로 풀어낸다. 등장한 네 명의 남자들은 몸이 아프다며 누워있다. 친구가 만나자고 놀러 나가자고 해도 다 귀찮단다. 그러던 남자들이, 여자를 만나기로 했다는 소리에, 그 여자가 혼자 산다는 소리에, 벌떡벌떡 일어선다. 여기서 남자들은 오로지 '여자'와 그 여자와의 스킨쉽 등 맹목적인 메뉴얼에만 반응하는 외계에서 온 독특한 생명체이다. 

굳이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찾아보지 않아도 요즘 텔레비젼을 틀면 이렇게 서로 다른 별에서 사는 외계인같은 여자와 남자에 대한 담론들이 차고 넘친다. 개그 프로그램이라면 한 코너 이상은 여자와 남자의 다름에 대한 것을 웃음의 소재로 삼는다. jtbc의 <마녀 사냥>은 아예 프로그램 내내 서로 다른 여자와 남자가 서로를 이해하며 사랑을 이루어 가는가를 놓고 진지한 토론을 벌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마녀 사냥>을 비롯한 프로그램들의 목적이 서로 다른 여자와 남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일 터인데, 보고 있노라면 여자나 남자를 이해하게 되기 보다는, 공부해도 늘지 않는 외국어처럼, 점점 요지경 속에 빠져버리는 느낌이다. 매주 나오는 다양한 사례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며, 여자와 남자는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라고 소리를 높인다. 과연 이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종족을 하나의 인간종에 묶어도 될까 라는 회의가 들 정도로. 

게다가 이해를 돕는다는 전제를 깔며, 오히려 차이를 부각시키는 경우도 종종 있다. 위에 제시한 예처럼, <마녀 사냥>의 패널들은 친절하게, 자기 여자 친구의 속마음을 몰라 우물쭈물하는 남자 상담자에게, 여성의 그런 반응은 이런 것이라면 친절하게 해석을 해준다. 그런데 그 해설이 더 오묘하다. 사탕을 주겠다는 여성의 속마음이 사실은 네가 더 달콤해 라는 대답을 원한다는 걸 이해할 남성이 몇이나 되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마녀 사냥>이든, <웃찾사>나, <개그 콘서트>의 몇몇 코너들에서 등장하는 남녀의 모습이 점점 더 전형화되어간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웃찾사>의 '내남자'들처럼 앉으나 서나 한 가지 생각만 하고, 여자들은 호시탐탐 밀땅을 하지 못해 안달이 난. 

'여성학'의 입문 과정에 전제로 깔리는 것이 있다. 실제 조사를 해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여성과 남성 간의 차이보다, 동성간, 즉 여성이면 여성, 남성이면 남성 간의 차이의 편차가 훨씬 크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방송 속 여성과 남성은 전형적이다. 최근, 저런 식으로 여성과 남성의 심리를 소재로 삼는 프로그램들은 더더욱 그런 경향이 강하게 부각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마녀 사냥>의 경우, 다양한 사례가 등장하기는 하기만, 거개가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식이다. 

(사진; osen)

아마도, 차이가 더욱 부각되는 이유는 '사랑'이라는 과정의 맹목성에 있겠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이라는 동질의 감정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맹목적 열정이, 여자와 남자의 다름, 아니 기본적으로는 성의 차이가 아니라, 나고 자라나고 교육받아온 과정 속에서 빚어지는 인간적 차이를 고까워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리라. 
하지만 , 텔레비젼 속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들은, 지구별에서 함께 살아가야하는 인간의 다름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서로 다른 외계의 자기 별에만 머무르려는 이방인의 관점만을 부각시키는 듯하다. 그래서 보면볼수록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낯설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마치 수능 문제집을 더 많이 푼 학생이 좋은 점수를 받는다는 불변의 진리를 따르듯, 남녀의 심리에 천착하게 된다. 

논어에 나오는 대표적 이념이 바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이 자구에 대해 신영복 선생은 다름을 인정하며 화합한다는 것으로 해석하신다. 그 말에 반대말이 동이불화(同而不和)이다. 남녀 관계도 결국 인간 관계다. 사실 가장 문제는 서로 다른 외계별에 살았던 과거가 아니다. 이제는 지구별에서 함께 사랑을 꾸려가야할 현재인 것이다. 다른 별의 언어는 제 아무리 독해를 해도, 외계어일 뿐이다. 그런데 남녀의 심리를 다루는 프로그램들은 시시콜콜 그 다른 외계어를 독해해주는데 골몰한다. 제 아무리 많은 문제집을 풀어도, 그것을 관통하는 원리를 꿰지 못하면, 조금만 틀어놓은 문제가 나오면 틀리는 건 당연지사다. 아니, 애초에 남녀관계가 서로 문제를 내주고 풀어보라는 식이어서는 안되는 게 아닐까. 


by meditator 2013. 11. 23. 10:06

정말 이상한 논리같겠지만, '꽃보다 남자'까지는 참겠는데, 왠지 그 말 자체부터 '예쁜 남자'는 견디기가 힘들다.

'꽃보다 남자'는 언어적 유희로 볼 때 '비교법'이자, '상징법'이다. 즉 여성들이 가장 좋아할 대상인 꽃보다도 '남자'가 더 좋다는 직접적 표현이자, 남자가 꽃보다도 아름답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에 반해, '예쁜 남자'는 어디 상상의 나래를 펼 여지도 없이 다짜고짜 남자가 이쁘단다. 이쁜 거야, 꽃도 이쁘고, 남자도 이쁠 수 있지만, 꽃보다 남자라고 하는 거랑, 그냥 남자가 이쁘다고 하는 거랑은, 그 말이 전달되는 당사자에게 닿는 느낌이 천양지차다. 물론 처음 '꽃보다 남자'라는 단어가 등장했을 때도, 남자가 꽃보다 낫다니 하며 면구스러웠지만, 이쁜 남자 쯤되면, 그 어떤 상상도 닫아버린 그 직설적 표현에 선제 공격을 당한 듯 움칠하게 된다. 즉 꽃보다 남자가 그래, 남자가 꽃보다 어떻다고? 하며 도전해 볼 여지가 있다면, 이쁜 남자는 듣는 즉시, 내가 그 편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 노선을 정해야 할 것만 같다. 그렇게 드라마 <이쁜 남자>는 드라마를 보기도 전에, 궁금증을 유발하기 보다는 '선험적 정의'를 통해 결정을 내리기를 강요한다. 이쁘다는 남자를 볼 것인지, 말 것인지.

드라마 <이쁜 남자>도 마찬가지다. 대번에 주인공 독고마테(장근석 분)의 아름다움과, 그에게 반한 여자들을 나열한다. 부동산 재벌 잭희도, 여주인공인 김보통도, 그리고 독고마테가 가는 곳이 버스든 어디든 모든 곳의 여자들은 그에게 반한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한다. 
대놓고 아름다운 남자들을 들이대며, 호객 행위를 하는 방식은, 사실 이미 <꽃보다 남자>을 통해 증명된 방식이다. 왜 <꽃보다 남자>가 꽃같은 남자를 네 명이나 내세웠을까? 마찬가지로 <이쁜 남자>와 동시간대 방영되는 <상속자들>이 그들의 사연을 제대로 엮어주지도 못하면서 각 드라마에서 내로라 하던 꽃미남들을 긁어 모았는가 말이다. 말 그대로 취향대로 골라 감상하시라다. 그래서 늘 꽃미남들이 등장하는 드라마들은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를 둘러싸고 치열한 지분 싸움이 벌어지곤 한다. 
물론, 독고마테를 연기하는 장근석은 이제 곧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연기도 제법 한다. 하지만, 인간의 아름다움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물론 여전히 미스코리아도 뽑고, 미스 유니버스도 뽑지만, 길을 걷는 백 사람이면 백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면, 그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다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장근석은 아름답지만, 드라마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장근석을 아름답다고 동의하기는 힘들다. 그러기에, <이쁜 남자>의 오프닝은 장근석이 이쁘다고 동의하는 사람만 모여라~ 하는 듯하다. 물론 2회 말미 이장우가 합세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는 다수의 여성들을 홀리기에는 역부족이다. 


뭐 그래도 장근석이 이쁘다고 동의한다고 치자. 그가 가는 곳이면 여자들을 홀리고 다닌다는 설정도 그렇다고 치자 말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스토리가 발목을 잡는다. 동생이랑 악을 빾빽쓰며 싸워대는 주인공 아가씨가 고등학생인가 했더니, 대학도 졸업한 백수란다. 그런데, 이 보통이 아가씨 첫 눈에 독고 마테를 보고 반했던 고등학교 시절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백수처럼 지내다가 마테 오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쏜살같이 달려간다. 자기가 마테 오빠를 지키는 슈퍼 우먼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껏 하는 일이 오빠 창고에 쌓인 양말을 내다, 이상한 마네킹 다리를 어깨에 걸고 세 개 천 원씩에 파는 식이다. 남자 주인공이 한심하면, 여자 주인공이라도 좀 인간미가 있어야 하는데, 그저 귀엽게 생긴 걸루 봐주기에는 하는 짓이 역시나 한심하다. 

1회 말미, 홀로 투병을 해오던 마테의 어머니는 결국 마테에게 '암호'도 알려주지 않고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불현듯 나타난 유라(한채영 분)는 마테가 MG그룹의 서자란다. 그 사연을 들은 마테는 당연히 MG 그룹을 찾아가지만, 나홍란(김보연 분)에게 수모만 당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복수를 꿈꾼다. 그때 다시 유라는 복수의 칼을 갈기 위해 여자들을 잘 이용하라고 충고한다. 부동산 재벌 잭희를 통해 부자가 되는 수업을 받으라는 식이다. 
헷갈린다. 과연 이 드라마에서 마테가 지닌 출생의 비밀이 본류인가, 아니면, 그 조차도, 마테가 여자들과 어울리는 스토리를 이어가기 위한 수단인가? 즉 본격 '제비'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드라마 사상 최초로 출생의 비밀을 이용한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냥 대놓고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는 이야기로 이어가기 민망하니까, 어거지로다가, 같다 붙인 게 MG그룹의 서자가 아닐까 라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이것은 오빠에게 민폐를 끼쳤다며 가지고 있는 물건을 다 들고 나와 좌파을 꾸린 보통이가 우연히 최다비드(이장우 분)를 만나게 되는 것처럼 개연성없어 보이는 것이다. 

<이쁜 남자>는 정말 참 만화같다. 하지만, 진지한 듯 하다가, 어느새 보면 찌질해져 버리는 주인공들 캐릭터는 딱 만화의 그것이고, 얼토당토않은 스토리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만화도 종류가 있다. 만화 같다고 해서, 만화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만화같은 드라마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이쁜 남자>가 그 전략을 차용하고 있는 <꽃보다 남자>에서 정작 주인공들은 더할 나위없이 진지했다. 이른바 '병맛'코드는 찾아볼 수 없다. 종종 '병맛'코드가 등장하는 그 인기있다는 '원피스'조차, 그 병맛을 참아넘길 만큼, '해적왕이 될꺼야'라는 허무맹랑한 희망을 지지하게끔 만드는 설득력있는 논리적 전개가 있다. 그런데, <이쁜 남자>에서는 장근석이 이쁘고, 아이유가 귀여운 것을 넘어 선 그 어떤 것들을 찾아내기 힘들다. 진지한 듯 하다가 찌질해지다가도, 그들의 이야기에 설득당해 넘어가 줄 그 무언가가 없다. 

1,2회 <이쁜 남자>를 보며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일렉 선녀가 등장했던 부분이다. 전기가 흐르는 막대를 부딛치며 전기를 발생시키며 뒤에 수많은 원숭이들이 울부짖는 장면은 그 예전 <얼렁뚱땅 흥신소>를 연상시키는 괴기스러운 '병맛'의 최고봉이었다. 그 밖에도 소소하게 만화적인 상상력이 돋보이는 장면들은 더 있다. 하지만, 드라마는 스크롤을 내리고 끝내 버리는, 혹은 뒤적이다 덮어버리면 그만인 웹툰이나 만화가 아니다. 드라마가 십여부작을 넘는 동안 시청자들을 사로잡아 두기 위해서는 순간 반짝이는 매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야기가 필요하다. 

 


by meditator 2013. 11. 22. 10:27

국가적 차원의 중차대한 시책이라고만 생각되었던 인공위성을 한 개인이, 그것도 티셔츠를 팔고 모금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대출까지 해서 우주로 띄웠던 송호준은 물론 그 이전에도 화제를 몰고 다녔지만 <라디오 스타>에 나온 후 그의 행보가 대중적으로 보다 더 각인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에 고무된 <라디오 스타> 제작진은 송호준에 이어, 로봇을 만드는 한재권 박사를 게스트로 초빙하였다. 이로써, 그저 해프닝이었던 인공위성을 만드는 송호준은, 로봇을 만드는 한재권으로 이어지면서, 그저 연예인들만이 출연해왔던 <라디오 스타>에 신선한 모색으로 자리잡고 있다. 11월 20일 방송의 주제가 '중독'이었던 것처럼, 누가 개그맨이고, 가수이고가 아니라, 다종다양한 레고 조립 장난감과, 피규어를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거기서 시작해 이제는 로봇을 만들 게 된 사람이라는 동질성을 부각시켰다. 물론 방송 초반 의기양양하게 자신이 아끼는 리모컨으로 작동되는 호빵맨 피규어를 출연시켜 의기양양했던 김신영이, 한재권 박사가 데리고나온 로봇 군단의 '빠빠빠' 율동과, 재난구조 시범을 보면서 기가 죽기는 했지만, 정작 시청자 입장에선 그게 무안하다기 보다는, 저런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저렇게 로봇까지 만들게 되는구나라는 공감대를 충분히 느끼도록 했다. 
이미 <라디오 스타>를 비롯하여 다수의 집단 게스트 토크쇼가 범람하고, 게스트들간의 중복 출연이 불가피해지면서, 신선한 기획의 주제조차도 점점 그저 또 그 사람이 나와 돌려막기 식의 토크의 재연이 되는 경우가 많아, 이제는 한계에 봉착한 듯한 상황에서, 연예인과 일반인이, 자신이 좋아하는 그 무엇을 가지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충분히 신선했다. 

(사진; tv리포트)

하지만, 그 신선한 모색을 담아내는 내용조차 신선한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번 송호준의 출연에서도 그가 인공위성을 쏘아올림으로써, '지식과 정보의 공개'라는 화두를 실천하고자 했던 송호준을 동대문 티셔츠 장사로 폄하하며 우스개로 만드는 과정은 웃자고 하는 방식이었음에도,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 들었었는데, 20일 방송분을 보면서, 그건 단지 송호준이 출연했던 회차가 아니라 최근 일련의 <라디오 스타>의 흐름의 경향성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엄밀하게 <라디오 스타>에서 '본말이 전도된다'라는 문제 제기는 어불성설일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늘 <라디오 스타>는 출연했던 게스트가 하고자 하려고 했던 말보다는, 그가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끄집어 내는 것이 장기인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작가진의 '국정원'이 울고갈 정보력은 출연자조차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들을 끄집어 내 당황시키곤 해왔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틀에 박힌 언론 플레이를 넘어, 출연자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라디오 스타>가 과연 그럴까? 20일 방송에서 김신영과 케이윌이 그들이 애지중지하는 조립식 장난감과 프라 모델을 들고 나왔을 때, mc들의 반응은 '웬 장난감이야'라는 식이었다. 심지어, 그것이 애써 어렵게 만든 것들이었는데도 함부로 덥석 덥석 만지다, 부숴뜨리고,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키덜트'라는 용어까지 등장했을 정도로 이제 어른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을 취미 생활이 된 것이 이젠 하등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라디오 스타>의 mc진은 한결같이 그들이 들고나온, 심지어 구하기 힘든 한정판을 그저 한낱 장난감이려니 한다. 
그리고 그런 흐름은 김구라에 의해 주도된다. 그런데 그 방식이 익숙하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세바퀴>에서 하던 식이다. 아줌마, 아저씨들이 그들의 세대에게 낯선 그 무엇을 보았을 때, 우선 '뭐야?'하면서 반응하며,  호시탐탐 '별 거도 아닌게' 하다가, 비싸거나, 대단한 것이며, '어, 그랬어?'하며 꼬리를 내리는 식이 고스란히 재연된다. 심지어, 지난 번에 나온 송호준을 한재권과 비교하기를 무람없이 해버린다. 마치 옆집이 우리집보다 넓은 평수에 사니, 더 행복한 집이라는 식으로. 그리고 그렇게 주도적으로 흐름을 끌고가버리는 김구라의 방식에 김국진은 물론, 윤종신도, 심지어 젊은 규현조차 어깃장을 놓지 못한다. 기껏해야 김구라가 실수를 해야, 말꼬리를 잡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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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wow한국 경제)

<라디오 스타>의 정신은 'b급 정신'이었다. 좀 모자르고, 찌질해 보여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라디오 스타>의 기획을 보면, 20일의 '중독'특집처럼 여전히 <라디오 스타>만의 b급 정신이 살아있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기획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라디오 스타>의 정신은 '속물 정신'의 한 색깔로만 칠해지고 있는 듯하다. 가진 것이 부족한 b급들이, 자신보다 더 많이 가지고, 나은 그 무엇 앞에 한없이 약해지고 비겁해 지는 것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반응일 뿐이었다. 거기에 최고의 mc가 되기 전에 김구라가 일관되게 속물주의노선을 추구했다면, 거기에 어깃장을 놓는 누군가가 있었었다. 세상이 '자본'과 '주류'에 함락되어도, 여전히 자기 멋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게 <라디오 스타>였었다. 그러기에, 송호준의 인공위성 해프닝도, 다르파 로봇 챌린지에 출전하는 한재권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돌아온 김구라는 mbc연예 대상을 노릴 만큼 mc계의 대세가 되었다. 윤종신도 이제는 자신의 소속 가수를 출연시키는 제작사 사장이다. 규현 역시 아이돌계의 대세다. 대세가 되어버린 그들의 눈에, 찌질한 b급들은 그저 찌질함으로만 규정된다. 그 예전에 함께 모자르고, 부족하던 시절, 하지만 각자 자신만의 자부심으로 가득찼던 그 시절의 느낌이 아니다. 대세가 되기 전의 김구라의 속물주의는 애잔하고 보호해 주고 싶었지만, 이제 비싼 시계를 찰 수 있는 김구라의 속물주의는 불편하다. 윤종신이 공감해주는 다양함에 어쩐지 힘이 빠진 듯하다. 예전에는 게스트들을 물어뜯고 흠집내도, 그것이 결국은 그들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그 무엇이 되곤 했었는데, 최근의 <라디오 스타>는 비범한 것조차 평범하고 속물적으로 만든다. 

아마도 예전의 (이제는 그 예전이 언제인가조차 까마득) <라디오 스타>였다면, 김신영과 케이윌의 취미들을 그저 장난감으로만 치부해 버리지는 않았을 듯하다. 조금더 그들이 '홀릭'한 그것들에 함께 심취할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 등산 좀 가본 김구라가 등산 용품을 들고 나온 이봉원의 취미생활을 대하는 자세와, 김신영과 케이윌의 취미 생활을 대하는 자세에서 그 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로봇이라는 존재감만으로 출연자를 제압시킨 한재권 박사의 경우를 차치하고, 애지중지한 자신의 소장품을 어렵게 들고나온 김신영과 케이윌이 20일의 방영분을 보며 무엇을 느꼈을까? 


by meditator 2013. 11. 21. 10:21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모래알처럼 구별이 안 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면 어떤 얼굴이든 독특하고 딱 하나뿐이라는 것이었다. 그 얼굴들은 엄마의 얼굴이거나 아빠의 얼굴이고, 누이 혹은 형제의 얼굴이며, 딸의 얼굴이거나 아들의 얼굴이다. 그 얼굴에는 수많은 기억들이 아로새겨져 있어서 다른 누구의 얼굴과도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애착의 핵심이고, 그 애착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특질이다. -붉은 낙엽, 토마스,H.쿡


흔히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뇌리에 떠오르는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일 것이다. 인류가 수만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자손손 융성을 이루는 기본이 되어온 남녀간의 끌림, 하지만 곰곰히 다시 생각해 보면, 어쩌면 인간의 삶을 보존하는데 거 원초적인 것은, 남녀간의 원초적 끌림보다도 더 맹목적인, 내 새끼를 보호해야 한다는 부모들의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었을까? 더구나 다른 동물들과 달리, 나이가 지긋해서야 지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인간이란 동물의 생존에는, 이성에의 사랑보다 육친의 맹목적 보호가 더 선험적이 아닐까 싶다. 흔히, 육친에의 사랑이라고 하면, 모성성을 우선으로 치지만,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비의 자기 유전자에 대한 집착이란 어미의 모성성 못지않은 한가닥을 하는 것으로 증명되고 있다. 


11월 17일 KBS드라마 스페셜, 단막극 2013, 드라마 극본 공모 당선작 시리즈 마지막 편으로 방영된 <불청객>은 이 맹목적 부성애에 발목을 걸며, 인간으로서의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 숭고한 이유는 죄의식이 있어서래요'라며.



이야기의 구조는 복잡하지 않다. 매의 눈을 가진 강력반 반장 국서, 그의 집에 불청객이 찾아온다.

그는 바로 7년전 국서가 살인죄로 집어넣었던 범인 이태호다. 그는 7년전 사건의 범인이 자신이 아니었으며 국서 자신도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냐며 다그친다. 그렇다. 매일 밤 한 컵의 소주를 들이키고도 잠을 못이루는 국서는 알고있다. 그날 밤 죽은 자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 태호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막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는 딸을 둔 아빠는 현장에 떨어진 핸드폰으로, 딸이 범인임을 직감한다. 그리고, 딸의 핸드폰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고, 대신 엄한 태호를 범인으로 몰아 감옥에 보낸다. 결국 참지못한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슬며시 흘린 채. 그 한 마디에 단서를 얻은 태호는 7년만에 감옥에서 나와, 다짜고짜 국서의 집을 찾아 들어와 복수를 하겠단다. 그의 복수란 건, 국서 스스로 경찰에 자신의 딸을 고발하라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딸을 죽이겠다고 태호는 협박을 해댄다. 


드라마 스페셜 극본 공모 당선작 시리즈의 카피는, '한 줄의 상상이 한 편의 드라마가 되는 순간'이다. 지금까지 방영된 네 편 중, 10월 23일 방영된 <마귀>는 역사의 행간에서 길어올린 파발꾼을 역사적 인물로 형상화시켰고, 11월3일 방영된 <나에게로 와 별이 되었다>는 이 시대 88만원 세대의 슬픈 사랑이 자화상을 그려내었다. 11월 10일 방영된 <오빠와 미운 오리>는 '출생의 비밀'이라는 상투적 반전이 또 기존 드라마와는 또 다른 반전이 되는 사고를 담아내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시리즈인 <불청객>은 가장 공모작 카피에 어울리는 상상의 폭과 깊이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마치 한 방울의 물감이 종이 한 장을 다 물들이듯이, 그저 집에 찾아온 불편한 사람이라는 에피소드는 아버지와 딸, 그리고 억울한 범인과 그를 범인으로 몰아간 형사, 라는 표면적 관계를 넘어, 인간다움의 근원을 헤집는다. 

좋은 드라마일수록, 등장인물들의 면면이 단선적이지 않다. <불청객>은 보는 내내 등장하는 누군가의 편을 들어 우리 편 이겨라 하는 심리로 편하게 드라마를 보던 시청자들을 괴롭힌다. 느닷없이 쳐들어 온 불청객인 줄 알았더니,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사람이요, 그래서 그의 편을 들고자 했더니, 그의 협박은 도를 넘고, 이미 아비와 딸은 충분히 고통을 받은 거 같아 보인다. 그래서 다시 불청객을 미워하려 했더니, 아뿔사, 그는 그 7년 동안, 그나마 자신을 혹처럼 생각하는 아비가 죽은 것도 모른 채 그 자신도 죽을 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저 드라마의 마무리에 이르러, 내뱉을 수 있는 단어는, '이를 어째'이다. 


삶은 언제나 불신과 추측으로 무너진다. 사실과 진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아니라 확인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의심이 모든 것을 망쳐놓는다. 혹시 혹은 만약에, 라는 생각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것이다-토마스, H쿡


부모 자식의 연을 맺고 사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국서가 맞딱뜨린 상황에서, 맹목적인 부성애의 결정에 토를 달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단지 부성애와 인간의 도리를 대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7년이 지난 후, 딸은 울부짖으며 대든다. 아버지는 왜 한번도 그날의 일을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았느냐고, 아버지는 지레 자신이 피해자를 죽였으리라 예단한 거 아니었냐고. 아버지는 나를 한번도 믿지 않았다고. 그러면서 드라마는, 우리가 원초적이라 접어두는, 그 맹목적 육친애의 맹목성에 질문을 던진다. 과연 당신 자식을 사랑한다는 그 사랑이 진짜 사랑이냐고. 



토마스 H쿡의 소설 <붉은 낙엽>은 그 막연한 부성애가, 어떻게 세 명의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두 가정을 무너뜨려 가는지를 증명해 내는 소설이다. 드라마 <불청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막연히 내 자식을 사랑한다고 지레 짐작한다. 그러면서, 사실 누구보다 앞서 내 자식을 의심하고 불신하며 자식들을 몰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 빚어지는 수많은 왜곡된 부모 사랑들이 그 증거로 넘쳐나고. <불청객>은 그 눈감은 내리 사랑에 발을 건다. 그리고, 그 맹목성이 가지는 잔인함을 가슴 절절하게 그려낸다. 태호의 죽음이 마치 내 잘못인 것처럼 뜨금하도록. 언제나 그렇듯 좋은 드라마는 고해성사와도 같이 우리를 정화시킨다. 


<불청객>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절찬리에 종영한 kbs2의 수목 드라마 <비밀>이 떠오른다. 운전대의 주인을 바꾼 남녀의 어긋난 사랑이 펼쳐가는 파장은, <불청객> 아비의 잔인한 내리 사랑의 파장과 유사하다. 똑같이 좋은 드라마에서 풍기는 향내가 난다. 조만간, 또 한 편의 무시무시한 명작 속에서 이은미 작가와, 노상훈 피디의 이름을 발견할 것같은 예감이 든다. 벌써부터 기대로 어깨가 들썩거린다. 

by meditator 2013. 11. 18. 10:19

sbs는 11월16일부터 5부작으로 <최후의 권력>을 방영한다. 그중 1,2부는 이병헌의 나레이션으로, 정봉주, 금태섭, 천호선, 박형준, 차명진, 손수조, 정은혜 등, 여, 야를 망라한 전, 현직 국회의원들 7명이 코카서스 산맥을 종주하는 일종의 리얼리티 다큐 프로그램이다. 


국회의원 시절, 서로 여, 야의 저격수로 만났던 박형준, 차명진, 그리고 정봉주 의원은, 공항에서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돌아서려 했다는 정봉주 의원의 말처럼, 사석에서도 대면하기가 껄끄러울 만큼 정치적인 앙금이 남아있는 사이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마치 감옥에서 출소한 사람처럼, 국회의원이라는 권력 밖으로 튕겨져 나와, 현실에 힘겹게 적응해 가는 처지이다. 
정봉주 의원은, 공항에서 떠나기 전 아내가, 만약 지금 당신이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면, 아내인 나도 당신을 뽑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번 여행으로 그 이유를 곱씹어 보라고 했던 아내의 전언으로 참여 이유를 밝힌다. 그와 정치적 적대 관계를 형성하던 차명진 의원도 마찬가지이다. 현역 시절 '안하무인'이라는 말에 딱 맞에 과격하기 이를데 없는 야당 저격의 논평으로 이름을 날렸던 차명진 전 국회의원은 그간 자신이 옳다고 굳건하게 믿었던 정치의 방식을 되돌아 보고자 한다. 정치적 입장을 서로 달리하지만, 이렇게 일곱명의 정치인들은, 우리 시대 권력이란 무엇인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제작진의 취지에 동의하며, 7박8일간의 험준한 코카서스 산맥의 여정에 동참한다. 


(사진; 마이데일리)

비록 서로 정치적 입장이 다르지만, 7명의 정치인들은 순조로운 여행을 위해, 그리고 애초에 제작진이 제시했던 '권력 탐사' 취지에 발맞춰, 하루에 한 사람의 '빅맨'을 뽑아 여행을 지휘하도록 한다. 
그렇다면 '빅맨'이란 무엇일까? 
제작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시작되었고, 가장 오래되었으며, 가장 이상적이었다는 '빅맨'을 설명하기 위해 아프리카 부르키나피소의 티벨레 부족의 마을로 카메라를 옮긴다. 한 해의 농사를 기념하는 추수감사제에 등장한 빅맨, 그의 앞에서 춤을 추는 부족민에게 한 사람, 한 사람 복을 기원해 준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흥겹게 둘러앉아 잔치의 음식을 먹는데도, 부족민으로부터 귀중한 선물도 받은 빅맨은 결코 한번도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다. 뿐만 아니다. 그 마을의 땅은 모두 빅맨의 것이지만, 결코, 빅맨은 사람들에게 무언가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빅맨이 불철주야 자신들을 위해 일하느라 바쁜 사람이라고 증언한다.
이런 이상적 지도자 빅맨은, <최후의 권력>의 박권홍 피디가 만든 전작<최후의 제국>에서도 상세하게 다루어 졌었다. 마을 사람들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는 아버지와 같은 지도자, 그것이 빅맨이었다. 
하지만 빅맨이 전지전능을 과시하지는 않는다. 외적을 막기 위해 두터운 흙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의 건물을 세우는 일은 여자들의 몫인 이 마을의 건축 일에서, 지도자는 빅맨이 아니라, 빅맨이 인정한 '퀸마더'였다. 즉, 빅맨은 마을 사람들의 능력을 적재적소에 쓸 줄 알고, 권력을 제대로 배분할 줄 아는 리더였던 것이다. 

이런 이상적인 지도자 '빅맨'을 제작진은 일곱 명의 정치인들에게 날마다 돌아가며 해볼 것을 권했고, 그 결과 첫 번 째 날의 지도자로 금태섭 변호사가 자천타천으로 뽑혔다. 
길조차 알 수 없는 코카서스 산맥의 종주길에서, 한때 저마다 한 가닥을 했던 일행은 빅맨을 뽑아 놓았음에도 매 결정의 순간마다 목소리를 높여 빅맨의 권위를 추락시킨다. 결국 금태섭 변호사는 험준한 길의 선봉대로 차명진, 정봉주 의원을 뽑는 것으로 그의 권위를 다하고, 스스로 빅맨의 자리를 내려놓는다.

(사진; osen)

프로그램은, 그 결정의 과정, 그리고 빅맨의 결정 이후의 일행이 목표 지점까지의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겪은 빅맨의 심정, 그리고 다음날 빅맨이 아니었던 일행의 평가까지 가감없이 드러내 보인다. 
마치 일곱 명의 정치인이 각자 빅맨에 도전하는 과정은, 2010년 1월에 방영되었던 <sbs스페셜 완장촌>의 또 다른 버전과도 같았다. 이상적인 권력을 찾아간다고 했지만, 결국 빅맨이 된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빅맨의 권위는 다양한 양태를 띨 수 밖에 없고, 그리고 언제든지 자신 역시 빅맨이 될 수 있는, 그래서 진지하게 빅맨의 권위를 모색하기 보다, 마치 정적을 감별하듯 혹독한 심사 과정 역시 권력에 목말라하던 완장촌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다. 

아직은 서로가 다른 정당, 그리고 한때 반목을 거듭했던 기억에 지배되고 있는 정치인들이지만, 첫 날의 여정에서, 고소공포증으로 길을 잃은 정봉주를 찾기 위해, 어렵게 도달한 정상을 뒤로 하고 그를 찾으러 다시 돌아간 차명진이라던가, 결국 조우한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의 어색함을 저리 미뤄둔 채 서로의 별명을 부르며 얼싸안는 과정은 이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by meditator 2013. 11. 17. 1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