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뉴욕 의류 공장로 무려 146명이 사망했다. 노동자들이 근무 시간 중 딴 짓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문을 잠궈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런데 문을 잠근 공장주는 결국 풀려났다. 1920년대까지도 경제 활동은 사적인 영역이었다. 국가가 개입할 수 없었다.

그러던 기조가 대공황을 계기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공황으로 인해 대규모로 거리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생계 보장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그저 공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동시에 공장에서 만들어낸 물건의 소비자였다. 그들의 생존에 자본과 국가의 생존이 달려있었다. 국가가 나섰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노동 3권, 8시간 노동이 보장되었다. 금융 기관을 규제하여 예금자를 보호했다. 급진적인 뉴딜 정책, 국가의 개입이 위기의 미국 경제를 되살려냈다. 

 

 

이처럼 '위기'는 국가의 위상을 제고하게 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 생태, 보건 위생적 관점에서 국가의 역할이 급격하게 변화를 겪고 있다. ebs다큐 프라임 포스트 코로나 3부 국가의 탄생은 코로나 시대 변화하는 국가의 위상에 대해 논의한다. 

19세기가 노예 해방, 20세기가 보편적 선거권 도입의 시기였다면 21세기는 기본 소득의 세기가 될 것이다.


벨기에 경제학자 필리프 판 파레이스 교수는 그의 책 <21세기 기본 소득>에서 주장한 말이다. 2018년 출간된 이 책은 '기본 소득'과 관련된 다양한 사회적 주장을 담았지만 그것의 '실현'은 그리 쉽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그 '기본 소득'의 문턱을 코로나가 넘어서게 만들었다. 바로 우리나라에서도 시행된 전국민 재난 지원금이다. 

21세기는 기본 소득의 시대?
국가가 직접 국민들에게 돈을 준다? 코로나 이전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일시적이냐 지속적이냐 라는 차이는 있지만 개별적으로, 보편적으로, 그리고 의무 조항없이 전국민 모두에게 돈을 나눠준다는 기본 소득, 하지만 코로나는 이 불가능할 것같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었다. 

지금까지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국가가 유도했던 방식은 이른바 '낙수효과'를 노리는 것이었다. 중앙 은행에서 대형 금융 기관으로, 그리고 기업으로 돈이 흘러들어가게 하여 고용을 유지하고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코로나는 이런 방식이 더는 유효하지 않게 만들었다. 문을 닫은 거리의 가게들, 그로 인해 거리로 나앉게 생긴 자영업자들, 그리고 생계의 위협에 내몰린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코로나로 인한 봉쇄 기간 동안 '생존'을 위해 금기시되던 현금을 지원하는 것이 최선의 방식이었다. 

효과는 놀라웠다. 소비자 심리 추이가 단 몇 달 사이에 눈에 띄게 증가했고, 재난 지원금을 받은 75.7%가 만족감을 드러냈다. 경제가 호전되었고, 사회적 스트레스가 완화되었다. 특히 당장 돈이 필요하지 않은 고소득층이 돈을 저축 등으로 흡수하지 않고 '소비'로 이어질 수 있도록 기한을 정한 것이 유효했다. 

 

 

하지만 일시적인 재난 지원금을 지속적인 기본 소득으로 이어가는건 쉽지 않다. 무엇보다 '재원'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이러한 기본 소득의 딜레마를 알래스카 영구 기금은 현명하게 해결한 사례로 꼽힌다. 1982년 도입된 기급은 천연 자원으로 기금을 조성하여 그 운용 이익을 1년 이상 거주한 사람에 한해서 매년 지급한다. 

이 기금의 효과는  파격적이었다, 공짜로 돈을 나눠준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외려 일자리가 늘어났고, 가난한 가정의 3세 이하 아이들의 비만이 개선되는 등 양극화 문제 해소에 기여하였다. 물론 이는 풍부한 석유와 상대적으로 작은 70만 정도의 인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풍부한 석유와 함께 석유를 공유자산으로 여기는 사회적 공감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지속적인 기본 소득이 불가능한 것일까? 기본 소득의 재원으로 '토지'를 제기하는 학자가 있다. 다량 탄소 배출 상품에 '탄소세'를 얹어 이를 재원으로 삼자고도 한다.  인간을 대신하는  '로봇'에 매기는 세금은 어떨까? 하지만 아직은 그 어느것도 사회적 공감대를 얻는 것이 쉽지는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전국민 재난 지원금으로 이미 기본 소득의 첫 발을 떼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과연 이 첫 발을 뗀 기본 소득이 21세기 보편적 화두가 될 것인가, 그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이 주목되는 시점이다. 

코로나와 관련된 국가적 통제, 어디까지여야 할까? 
재난 지원금과 관련된 기본 소득의 실현이 국가의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역할에 대한 지점이라면 코로나와 관련하여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면 지점도 있다. 바로 '통제'적 측면이다. 

지난 해 8월 호주는 코로나와 관련하여 강력한 4단계 봉쇄 정책을 펼쳤다. 일몰 이후 외출을 금지하였고,  낮에 쇼핑, 산책 등으로 외출을 하여도 5km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으며, 이를 어길 시 150만원의 벌금을 물도록 하였다. 계엄령에 준하는 봉쇄령이었다. 당연히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2020년 9월 빅토리아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안전을 위한 것이라며 찬성을 표명했다. 

코로나로 인한 국가의 강력한 통제가 당연시 되는 세상이 되었다. 일상 생활에 국가가 개입했다. 

 

 

2020년 3월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대테러 작전용으로 씌이던 디지털 추적을 코로나와 관련하여 국민들에게 허용하도록 하였다. 휴대전화가 위치 정보, 동선이 추적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중국의 경우 디지털 감시 시스템이 상용화되고 있다. 횡단 보도에 설치된 안면인식 전광판, 무단 횡단을 할 경우 안면 인식을 통해 전광판에 신상 정보가 표시된다. 벌금을 내거나 사회 봉사를 해야 지워진다. 이 기술은 마스트를 착용하더라도 식별할 수 있도록 업그레이드 되는 중이다. 텐왕 쉐량 프로젝트라는 기술적 통제를 통해 전국민적 삶이 기록되고 있다. 

과연 이러한 통치 편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국가의 기술적 통제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시민 사회의 붕괴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다. 원론적으로 질병의 통제가 국가의 역할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다큐는 묻는다. 여기 팔찌 하나가 있다. 중앙 집중적 서버에 연결된 팔찌는 당신의 정보를 통해 미리 당신의 질병을 경고할 수 있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이 팔찌를 원하는가라고 묻는다. 정부의 통제에 당신의 신상을 넘겨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미 코로나로 인해 과도한 신상 정보의 공개가 사회적 화두가 되었던 우리 사회에서 국가적 역할의 한계에 대한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1930년대 네덜란드에서는 복지 효율화 정책의 일환으로 이름 등 다양한 개인 정보를 담은 인구 등록부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나치'에 의해 학살용 데이터베이스로 활용되고 만다. 이와 다르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코로나로 인한 신상 정보의 공개가 문제된 바 있다. 극한의 위기 상황에 선택한 극한의 조처지만 지나친 노출로 인해 '인권의 사각 지대'가 되어 '낙인'이 되고 '트라우마'를 남기게 된 것이다. 

결국 코로나로 인한 정부 역할의 증대는 21세기의 또 다른 '빅브라더'의 탄생을 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진보적인 박노자 교수는 최근 벌어지는 일련의 국가적 통제 상황을 '인권의 부정'이라고 주장한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함정'이라 정의내린다. 쉴러가 주장한 '삶은 최고의 선이 아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선택한 편의가 '위생 독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일까? 

by meditator 2021. 1. 29. 19:34

ebs 다큐 프라임은 1월 25일부터 3부작으로 <포스트 코로나>를 방영 중이다. 백신 접종이 이미 해외에서는 시작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올해 안에 백신 접종과 함께 집단 면역이 조심스럽게 점쳐지는 상황, 끝이 보이지 않던 '코로나 팬데믹'라는 터널의 끝이 보일 것같은 시절에 다큐는 코로나 이후에 대해 말문을 연다. 

첫 회 '언택트'한 삶 속에서도 새로운 유대관계를 형성하며 '사회적 동물'로서의 삶의 의지를 다지는 다양한 창의적인 시도를 살펴본 다큐는, 그에 이어 2회에서 우리 안의 코로나를 살펴본다. 

 

 

세계 그 어느 나라국가도 코로나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코로나 환자들은 늘어나고 있는 상황, 백신도 치료제도 없는 감염병이라는 상황을 처음으로 겪어본 인류, 하지만 여전히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이 감염된 사람들보다 많다. 그러나 코로나를 겪은 이전과 우리는 더 이상 같지 않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 안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혹 코로나를 직접적으로 겪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 건 아닐까? 코로나를 온몸으로 겪은 '전지적 코로나 시점'에서 본 세상은 어떤 것일까? 코로나 이후를 논하기 위해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를 다큐는 다룬다. 

지난 2월 한 종교 단체의 집단 감염으로 인해 급작스럽게 확진자가 증가하기 시작한 대구, 특별 재난 지역이 선포되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도움의 손길 덕분에 어려움을 극복해 냈다. 하지만 당시 의료 일선에 있던 의료진은 입을 모은다. 운이 좋았다고. 

그 운이 좋았다는 평가의 또 다른 이면에는 간호사들의 중노동이 숨겨져 있다. 대구 만이 아니다. 그 방역의 최일선에서 자신을 던졌던 간호사의 목소리로 다큐는 시작된다.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한 영웅, 간호사 
환자 때문이 아니라 동료 때문에 버텼다는 유연화씨, 그 현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음압 병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코로나 병상이 된 병원에서 일을 하게 되었단다. 

코로나의 영웅이라고 치켜세우지만 유연화 씨는 눈물을 흘린다. 대단한 일을 했다지만 엄마가 나가서 자신이 코로나 병동에서 일한다고 밝힐 수 없었던 게 현실이었단다. 집에서도 마스크를 써야만 했다. 자신이 아니라 코로나 병동에서 일하는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위험해질까봐, 자신이 집에 없어야 가족들이 안전한 상황,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출근을 할 때 마음이 가뿐해 졌다고 한다. 

의료진이라면 필수 장비인 PAPR(전동식 호흡 보호구)는 밖의 공기를 빨아들여 깨끗한 공기를 공급해주는 장비다. 하지만 이것조차 제 때 공급받지 못했다. 방역 체계는 수시로 바뀌었다. 자신의 안전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 마치 자신들이 전쟁에 방패막이처럼 세우는 병사들같았다.  게다가 처음 경험해보는 감염병으로 인해 '총도 쏠 줄 몰라요'하는 경험 부족한 의료진과 함께 일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지친 티조차 낼 수 없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자신이 도망치며 동료들이 힘들까봐 참았다. 이른바 '전우애'로 버텼다. 과연 코로나 병동에서 일하는 자식에게 '큰일 한다'며 기꺼이 응원해주는 엄마가 몇이나 있을까 라고 묻는다. 앞에서는 박수를 쳐주다 뒤에서는 꺼려하는 세상이 자신들을 대하는 이중적 잣대가 연화씨를 무엇보다 힘들게 했다. 


광화문 집회 참가자의 항변 
이중적 잣대에 항변하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지난 8월 광화문에서 집회를 연 이른바 태극기 부대의 일원이었던 60대 여성, 그녀는 항변한다. 왜 광화문은 막으면서 해운대에 모여든 2~30만 인파에는 눈을 감냐고. 

광화문에 나갔다는 이유만으로 친했던 친구가 '앞으로 나 볼 생각마'라고 농담식으로 말하는데 화가 났단다. 내 손주가 살아갈 나라를 위해서 더위도, 추위도 감수하며 거기로 나선 건데, 자신들의 마음을 몰라준 채 손가락질 받는데 억울하다. 편향이 아니다. 무모함이 아니다. 확신이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코로나는 재수없으면 걸리는 병이다. 

슈퍼 전파자의 뒷 이야기 
지난 2월 18일 대구의 31번 확진자. 본인이 증상을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종교 시설, 병원, 마트 등을 돌아다녀 슈퍼 전파자로 이목을 끌었던 장본인이다. 

그녀가 확진 판정을 받은 그 날 이후 쏟아져 나온 수백명의 확진자로 인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그녀가 코로나에 걸려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작성한 리스트의 지인들 중 코로나에 걸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그녀를 만났다고 거짓 진술한 20대는 처벌을 받았다. 후에 그녀가 슈퍼 전파자가 아니라 2차 감염자일 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이미 슈퍼전파자라는 낙인이 찍혀 버렸다. 

두 아들의 엄마이자, 평범한 가정의 주부였다는 31번은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는 속담으로 항변한다. 슈퍼 전파자가 된 그녀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었다. 그로 인해 평범했던 그녀의 가정은 서로가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암보다 더한 코로나 
확진의 무게는 깊다. 암보다도 더하다. 송파구 어린이집에서 보조 교사로 일하던 정효숙 씨는 7월에 확진 판정을 받았다. 유방암 수술을 받은 바 있었던 효숙 씨, 하지만 암이 걸렸다는 사실도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그녀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순간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암은 나혼자 걸리면 되는 거였지만 코로나는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에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단다. 

결국 남편도 양성 판정을 받았다. 다니던 교회에서 20여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왜 조심하지 않아서 걸렸느냐는 말, 부주의했다는 말들이 그녀에게 오래도록 깊은 상처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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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확진의 무게 
이렇게 코로나는 우리 사회에 걸린 사람과 걸리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넘어서기 힘든 벽을 만들었다. 이를 설치 미술 작가 박카로 씨는 'A와 B의 경계'라는 작품으로 표현했다. 

해외 여행 후 마포구 15번 확진자가 된 그녀, 2주간 자가 격리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이동 동선이 많았던 그녀가 우선 든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자신의 확진 결과를 알리는 구청 홈페이지에 그녀의 신상을 캐고 욕을 해대는 댓글들을 보며 공개 처형당하는 듯했다. 

별 증상이 없던 카로씨였는데 병실에 도착하자 열이 나기 시작했다. 가짜였는데 진짜가 되어버린 듯한 상황, 하지만 열은 약과였다. 그때부터 전화가 쏟아졌다. 왜 동선을 숨기지 않았느냐는 항의, 내 얘기는 말아달라는 부탁, 걸리는 거보다 일을 못하게 되는 현실의 항의가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 역시 피해자인데, 가해자가 되어버린 상황, 그래서 그녀의 작품에는 '마음 떨어짐 주의' 표시가 등장한다.

환경을 지키기 위해 플라스틱을 안쓰고 싶어도 모든 것이 일회용품으로 제공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모든 행위에 죄책감이 들었다. 입원 기간 동안 안쓰고 모았던 50개의 플라스틱 숟가락이 전자 저울 위에 놓였다. 작품 명, 죄의 무게. 

차별과 혐오의 대상, 확진자 
김지호씨는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했던 이태원 N차 감염자이다. 지인들과의 식사 자리, 대각선에 앉았던 친구로 인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10580번, 50일의 입원 일과를 기록으로 남겼다. 창문도 열수 없도록 못으로 고정된 병실, 에어컨은 물론, 환풍기도 비닐로 막았다. 복도에 샤워실이 있어 샤워 대신 수건으로 몸을 닦아야 했다. 

하지만 사회적 동물로서 겪어야 하는 '격리'는 참을 수 있었다. 구급차도, CT도 젊은 그에게는 모두가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처음 겪는 건 그 뿐이 아니었다. 막연한 차별이나 혐오도 처음 겪어 보았다. 퇴원을 하고 출근한 회사에서 마스크를 벗고 담배를 피던 사람들이 그를 보자 다시 마스크를 썼다. 회사는 사과를 요구했다. 사람들이 무서워졌다. 

코로나의 최일선에서 일하던 간호사도,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도 코로나가 아니라 코로나로 인해 달라진 사람들의 태도로 인해 세상과 자신 사이의 벽을 절감했다. 바이러스보다 더 큰 마음앓이를 하고 있다. 평범한 일상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경험한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두려움'이 앞섰을 것이라 다큐는 진단한다. 

가장 평범한 일상을 살던 사람들이 코로나로 인해 위험한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포스트 코로나를 말하는 시절, 백신도 필요하고, 치료제도 필요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다쳐버린 사람들의 마음, 코로나로 인해 서로에게 벽을 느낀 사람들의 관계를 들여다보고 치료해야 할 숙제도 잊지 않아야 하겠다. 


by meditator 2021. 1. 27. 01:58

얼마전 sns에 꽃을 통해 나를 확인하는 이벤트가 성황을 이루었다. 몇 가지 질문에 답을 하면 나를 상징하는 꽃을 알려주고 그와 함께 내 성격을 말해주는 방식이었다. sns를 통해 지인들과 이 이벤트를 나누었는데 모두들 열심이었다. 새로운 화장품을 선전하기 위해 마련된 이 이벤트는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mbti의 또 다른 형태와도 같았다. 

코로나로 인해 대면 접촉이 한결 줄어든 2020년 인기를 끌었던 것이 mbti와 같은 '나를 찾아가는' 각종 '리트머스' 프로그램들이었다. 관계를 통해 나를 확인하던 사람들은 잦아든 관계 대신 프로그램을 통해 나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이 다양한 프로그램들은 '칼 융'의 심리 유형 이론을 기반으로 한다. 즉 사람들이 저마다 서로 다른 자아의 특징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실천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아이디어가 <소울>의 영화 감독 피트 닥터 감독의 출발점이다. 

 

 

이미 지난 2015년 '머릿속 감정 컨트롤 본부' 속 기쁨, 슬픔 등 다섯 가지 감정을 캐릭터로 구현한 <인사이드 아웃>을 통해 우리의 '감정'을 작품화한 바 있는 피트 닥터 감독은 이제 '영혼'에 캐릭터를 입힌다. 이제는 23살 된 아들이 어릴 적부터 사람든 저마다 고유한 영혼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고유한 '자아 의식'은 어디로부터 왔을까? 그런 의문이 <소울>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한다. 슬픔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조차도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주제를 통해 우리의 모든 감정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도록 도왔던 피트 닥터 감독은 <인사이드 아웃>에서 함께 했던 디즈니와 픽사의 협업을 통해 영혼들의 이야기를 통한 삶의 긍정성을 또 다른 각도에서 조망하고자 한다. 

삶의 절정에서 죽음의 세계에 빠져버린 조 
이야기의 시작은 '영혼'들의 세계가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이다. 재즈 뮤지션이었던 아버지의 뒤를 잇고자 하는 조 가드너, 하지만 현실은 뉴욕의 고등학교에서 밴드를 가르치는 강사 신세이다. 가르치는 밴드의 불협화음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재능이 있는 학생 조차도 음악에 대한 열정의 싹수가 요원하다.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학생들에게 '재즈'의 묘미를 절묘하게 설득하고자 애쓰는 조 선생님, 그런 그의 진지한 열정에 하늘이 감복해서일까. 교장 선생님이 찾아와 그가 '정규직'이 되었음을 축하한다. 

하지만 정규직이라는 안정된 직장에도 그의 얼굴이 밝아지지 않는다. 그때 걸려온 전화 한 통 그토록 그의 제자였던 재즈 밴드 멤버가 갑작스럽게 빠진 멤버 대신 연주를 부탁한 것이다. 어쩌면 연주자로서 피아노를 연주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은 나이, 하지만 우려스러운 시선을 불식하고 멋들어진 연주로 첫 연주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그의 '농담 아닌 농담'이 현실이 된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머나먼 저세상을 향하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오늘 밤 연주를 위해 어떻게든 다시 지구로 돌아가려 애쓰던 조는 엉뚱하게도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 어린 영혼들을 멘토링 하는 '유세미나'에 가게 된다. 그리고 멘토로 착각되어 태어나기 싫다는 시니컬한 영혼 22를 맡게된다. 

 

 

조와 22의 동상이몽 
본의 아니게 멘토가 되어버린 조, 그런데 어떻게 해도 돌아갈 수 없는 지구의 통행증을 22를 통해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조는 22의 마음을 돌이키려 애쓴다. 
하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구로 돌아가겠다는 조와 달리 그간 테레사 수녀, 아인슈타인 등 유명인 멘토들이 두 손을 들고 나가떨어진 22의 마음은 쉽사리 돌려지지 않는다. 그러다 길잃은 영혼을 구해주는 모험가 문윈드 등의 도움을 얻어 함께 지구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조의 기대와 달리 22가 조의 몸에 그리고 조는 고양이 미스터 미튼스가 되어버린다  조가 되어버린 22 영혼을 구슬러 어떻게든 오늘 밤 있을 연주를 준비하려 애쓰는 조의 한바탕 해프닝, 그 해프닝을 통해 <소울>은 삶의 의미를 되살려 낸다. 

안정적인 정규직의 일자리 따위 그에게 찾아온 재즈 밴드 연주에 목숨을 거는 조, 그렇게  음악적 열정으로 충만한 조의 몸에 들어간 22는 삶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느낄 수 없던 음식의 맛을 깨닫고, 그를 손들게 했던 멘토들의 교육을 통해 얻은 해박한 식견으로 조의 주변 사람들과 능숙하게 소통한다. 심지어 음악을 포기하겠다 찾아온 밴드부 학생의 마음을 돌려놓을 만큼 식견과 혜안이 밝다. 영화는 저세상의 골칫덩어리 22가 유세미나에서의 부적응 과정의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지상의 소통왕이 되는 과정을 통해  <인사이드 아웃>의 슬픔이처럼 저마다 영혼의 존재론적 가치가 있음을 역설한다. 

저마다 다른 '캐릭터'를 가진 어린 영혼이 지구에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불꽃을 획득해야 하는 통과 의례,  그걸 삶의 의미를 터득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조와 22는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정작 22 가슴에 불꽃이 빛나도록 한 순간은 삶의 아주 사소한 순간이었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바로 거리에 앉은 22에게 떨어지는 꽃잎 한 장이었다.  삶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살아갈 만한 것이 아니라 삶이 주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는 그 순간이 바로 우리가 살아갈 준비가 된 것이라고 영화 속 삶의 불꽃이 반짝이며 전한다. 

하지만 그렇게 삶의 의지를 회복한 22의 불꽃은 조의 몫이 된다. 다시 지구로 돌아와 그토록 원하던 도로테아 윌리엄스 밴드와의 협연을 끝낸 조는 행복했을까?
<소울>은 조와 22의 엇박자 '멘토링'을 통해 각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 가도록 한다. 조가 되기 위해 애쓰다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은 22처럼, <소울>은 조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는 셈이다. 저세상에 와서도 멘토링을 하고, 기꺼이 자신에게 온 유일한 기회와 '저세상에서의 마지막 멘토링'을 맞바꾸는 조가 살아온, 살아갈 '캐릭터'는 무엇일까? 

 

 

당신이 어떤 모습이라도 
<소울>의 성격 파빌리온에서는 새로 태어날 영혼들에게 각양각색의 캐릭터를 부여한다. 모두가 좋은 것만 받을 것같지만 그건 아니다. 누군가는 매우 우울한 성격을, 또 다른 누군가는 시시콜콜 따지는 까다로운 성격을, 영화는 가장 까칠했던 22를 통해 세상 그 어떤 성격도 삶의 과정에 모두 저마다의 몫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성공한 연주자만을 바라보며 살아왔지만 인간 세계에서나 저 세상에 가서도 '멘토'의 숙명을 피할 수 없는 조 역시 마찬가지다. 

다시  mbti로 돌아와서, 타인을 통해 자신을 확인할 수 없는 시절에 사람들이 mbti에 몰두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내가 이러이러하게 세상에 유용하다는 자기 확인이 아닐까 싶다. 타인을 통해 증명받아왔던 나의 가치를 그 소통이 적조해지는 시절에 검사지를 통해 당신을 이런 면에서 유용하며 의미가 있는 존재라는 삶의 확인 도장같은 거 말이다. 공교롭게도 mbti가 붐을 이루는 시절에 <소울>은 우리 영혼의 캐릭터를 논한다. 그리고 결국 그런 각양각색 생명의 캐릭터를 통해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세상을 살아갈 만하다고 어깨를 두드려준다. 그리고 그 당신이 살아갈 세상은 당신이 무엇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세상 자체로 살만 한 것이라도 덕담도 잊지 않는다. 


by meditator 2021. 1. 26. 00:50

<경이로운 소문> 16부가 완결되었다. 다음의 인기 웹툰이었던 작품의 드라마화가 결정되었을 때부터 화제가 되었던 작품으로 10% 내외의 시청률을 넘나들며  ocn 장르물의 부진을 말끔하게 씻어준 작품이 되었다. 

16부, 드디어 신명휘(최광일 분) 시장 속에 들어간 완전체 악귀와 카운터들의 마지막 일전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끝을 보자며 심기일전 신명휘에게 달려든 카운터들, 그런데 신명휘는 14회차에서 결계를 치며 그들이 싸우던 그 '악귀'가 아니었다. 애꿏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며 보다 업그레이드된 악귀는 강력한 기운을 내뿜으며 카운터들의 공격에 끄덕도 하지 않는다.

 

 

결자해지 
하지만 카운터들의 결기도 만만치 않다. 이제 더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카운터들의 의지는 추여사(염혜란 분)가 벽에 부딪쳐 코피를 흘리며 나가떨어져도, 도하나(김세정 분)가 머리끄덩이를 잡혀 밀쳐져도, 가모탁(유준상 분)의 얼굴이 악귀의 카운터에 돌아가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가모탁의 말대로 이 싸움의 끝은 완전체 악귀와 경이로운 경지에 이른 소문(조병규 분)와의 대결이 된다. 

보다 강해진 악의 기운으로 카운터들을 물리친 악귀의 신명휘, 그런 가운데 소문이의 다리가 꺽이고 만다. 허겁지겁 소문이의 다리를 치유하려는 추여사, 하지만 소문이는 그런 추여사를 말린다. 처음 카운터가 되고 추여사가 저는 소문이의 다리를 고쳐주기 이전처럼, 다시 다리를 절게 된 소문이는 그 다리로 절뚝이며 악귀를 향해 걸어간다. 그리고 몸으로 부딛치는 대신, 염력으로 주변의 것들을 들어올려 온 힘을 다해 악귀를 공격한다. 드디어 휘청거리며 쓰러진 악귀, 그 악귀에게 다가간 소문이는 있는 힘껏 악귀를 소환한다. 

하지만 악귀의 마지막 단말마적 저항도 만만치 않다. 미리 소문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차에 납치하고 그 차를 향해 트럭을 달려오게 만든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인가, 아니면 악귀를 소환하여 아버지와 어머니를 구출할 것이냐로 소문이를 시험에 들게 만든다. 자신의 모습을 삼켜버린 소문이 엄마의 모습으로 변하게 하여 소문이를 흔든다. 하지만 그 모든 악귀의 저항도 16부를 줄기차게 달려온 소문이의 일관된 소망을 물리칠 순 없다. 

 

 

결국 지청신의 모습을 한 악귀는 지옥으로 떨어졌고 소문이는 처음 카운터가 될 때의 소망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난다. 그리고 무려 7년 동안 소문이를 괴롭혔던 자신으로 인해 부모님을 죽음으로 내몰렸을 것이란 소문이의 오랜 죄책감이 부모님의 따스한 품에서 풀어진다. 

그렇게 <경이로운 소문>을 시작했던 모든 이야기들이 완결되었다. 소문이는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죄책감에서 풀려났고, 도하나 역시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가무탁은 형사로서 그가 추적했던 신명휘를 비롯한 조태신 등이 저지른 중진 시의 비리를 만천하에 고발했다. 살아남은 자로써 짊어졌던 죽음의 무게에서 모두가 자유로워지는 시간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융이라는 특별한 공간, 그곳의 명을 받아 인간 세계에서 악행을 저지르는 악귀를 소탕하는 카운터라는 독특한 캐릭터들의 활약으로 주목받았던 신선한 장르물은 수미일관한 서사를 완성했다. 

완결은 했지만 완성도는 ? 
물론 완성은 했지만 뒷맛이 완전히 개운한 건 아니었다. 중반부에 들어서 지청신, 신명휘를 비롯한 악의 축들이 활개를 치면서 상대적으로 초반부 정의의 이름으로 학교를 휘어잡던 소문이의 기세는 한풀 꺽인 채 카운터들의 활약이 미미해져 갔다 .대신 1회차 1신파라는 우스개가 등자할 정도로 매회 등장 인물들과 관련되 눈물 적시는 애닮은 사연들의 에피소드가 이어졌다. 

웹툰을 통해 이미 화끈한 활약상에 기대가 부풀었던 시청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러기에 더욱 아쉬운 전개가 이어진 가운데 작가 교체와 관련된 잡음이 표면화되며 시청자들의 불만은 거세졌다. 

더욱이 15회차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 카운터들과 악귀와의 일전이 무색하게 뜬금없이 까메오로 손호준이 등장하며 극의 흐름이 끊겼다. 느닷없이 외국에서 활동하는 카운터로 등장한 오정구가 나타난다. 추여사와 같은 '치유' 능력을 가진 오정구는 앞서 결계 공격 과정에서 심한 부상을 입은 추여사를 치료하고자 최장물(안석환 분)이 불러들인 것이다. 그리고 아직 회복되지 않은 추여사 대신 출동했다가 가모탁을 구하고 대신 죽음을 당한다. 

 

 

물론 오정구의 죽음을 통해 소문이 역시 보다 완전체인 카운터로 업그레이드 된다는 설정이었지만, 오랫동안 카운터로 활약해왔다는 오정구의 죽음은 제쳐두고 오정구의 몸에 깃든 융인의 죽음만이 슬픔의 대상인 듯한 스토리 진행은 한 회에 눈물흘릴만한 신파적 설정에 대한 강박이라도 되는 양 개연성의 아쉬움을 남긴다. 

16부 역시 애초에 풀고자 했던 이야기들이 완결되었다는 점에서는 완결성을 지니지만, 이른 신명휘의 퇴장 이후 뜬금없이 개그식의 대사 주고받기로 긴장감을 떨구더니 그간 못했던 ppl의 향연으로 시간을 할애하며 마지막 회의 긴장감을 사그라들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경이로운 소문>은 부모님의 죽음 이후 다리를 절던 고등학생 소문이가 또 하나의 가족같은 카운터들을 만나 가족을 잃은 아픔도 치유받고, 카운터로서 활약을 통해 자신감과 자부심을 획득해 가는 긍정적인 성장 드라마로서 그 몫을 다했다. 특히 소문이 조병규를 비롯하여, 가모탁, 추여사, 도하나 등 카운터들을 비롯하여 지청신, 신명휘 까지 누구 하나 빠지지 않는 고른 열연으로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였다.  벌써부터 시즌 2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가는 상황, 부디 시즌 2로 돌아온다면 보다 완결성 있는 구성과 서사의 준비 과정이 마련되길 바란다. 

by meditator 2021. 1. 25. 02:42

나는 아무도 없는 텅빈 거리에 혼자 있어. 
태양이 하얗게 빛나고 있는데 절대 틀릴 리 없는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어. 
나는 궁금해져. 
지금은 낮일까 밤일까?


지난 해 11월 30일 첫 선을 보인 tvn의 드라마 <낮과 밤>은 이 모호한 문학적이고 상징적인 문구로 서막을 열었다. 28년전 온통 불바다가 된 하얀 밤 마을, 사람들은 죽고, 서로 죽이며 마을 전체가 몰살로 이어지는 상황, 살아남은 한 소년이 독백처럼 저 문구를 되뇌인다. 

 

 
연쇄 살인 사건으로 소환된 하얀 밤 마을 사건 
낮과 밤이란 상징적인 문구가 결국 드러낸 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처럼 실험체로 씌인 아이들에게서 드러나는 해리성 인격 장애, 즉 괴물이 되어버린 아이들이다.그 시작은 28년전 하얀 밤 마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28살의 젊은 사회사업가 손민호(최진호 분)가 일군 마을 공동체 하얀 밤 마을, 성공적인 재건 사회 사업으로 언론에 조명되었던 집단 공동체였다.

하지만 그건 드러난 일면에 불과했다. 그 내부에서는 조현희와 공일도(김창완 분)등의 맹목적인 신념의 과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정부와 군의 지원을 받은 국가적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프로젝트는 일찍이 진시황의염원이었던 부와 권력으로도 닿을 수 없었던 '불사영생'의 공식을 완성하는 것으로 그를 위해 하얀 밤 마을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실험체가 되어 희생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프로젝트는 하루밤의 화재와 마을 주민들의 몰살로 수면 아래로 사라진 듯 보였다. 28년 후 6건의 의문의 사망사고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때까지는. 수수께끼같은 암호가 적힌 살인 예고가 이지욱 기자(윤경호 분)에게 전달되고, 그 살인 예고에 맞춰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살인이라지만 살인을 당한 사람들은 미소를 띠며 스스로 옥상에서 떨어지고, 물에 뛰어들고, 차로 뛰어들어 '자살'과 같은 죽음을 자처한 상황, 과연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건 무엇일까?

그 수사에 연쇄은행강도 수사를 맡았던 도정우를 팀장으로 한 서울 경찰청 특수팀이 뛰어든다. 그리고 그들의 수사를 돕기 위해 FBI출신 범죄 심리 전문가 제이미 레이튼(이청아 분)가 합류한다. 그리고 범인 색출을 청와대 비서관 오정완(김태우 분)까지 나서 독려인지 협박인지 모를 압력을 행사한다. 오정완만이 아니다. 이제는 내로라하는 사회사업가로 사회 유력층이 된 손민호까지 정보 관리부장 이택조(백지원 분)와 내통하며 수사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백야 재단이 된 하얀 밤 마을의 주도 세력 
드라마는 하얀 밤 마을 사건 28년후 다시 벌어진 연쇄 살인 사건을 통해 여전히 우리 사회에 지도층이 된 28년전 하얀 밤 마을의 배후 세력을 '백야 재단'으로 등장시킨다. 그들은 28년전 마무리되지 못한 '영생 불사'의 프로젝트를 당시의 연구원이었던 조현희와 공일도를 앞세워 진행중이었다. 

그리고 도정우라 범인으로 쫓기는 6건의 살인 사건을 계기로 당시 하얀밤 마을에서 사라졌던 4명의 생존 아동들이 나타난다. 도정우, 제이미, 그리고 세번 째 아이였던 문재웅(윤선우 분), 거기에 대통령 비서관 오정완의 심복으로 움직이는 네 번 째 아이 김민재(유하준 분)까지. 

이들은 모두 하얀 밤 마을에서 실험 대상이 되었던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 실험 과정에서 남다른 특별한 능력을 지니게 되었고, 동시에 그 실험의 부작용으로 '해리성 인격 장애'를 지니게 되었다. 그들의 해리성 인격 장애는 세번 째 아이에 의해 6건의 자살과 같은 연쇄 살인을 낳았고, 그 연쇄 살인을 해결하기 위해 도정우는 자신을 내던진다. 

도정우가 사건 해결을 위해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은 건 바로 그 자신이, 아니 그에게 가해진 실험 부작용으로 그의 내면에서 튀어나온 '괴물'이  28년 전 하얀 밤 마을 몰살 사건을 벌인 주범이기 때문이다.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세번 째 아이를 찾고, 오랫동안 제이미 박사의 고통을 해결해주기 위해 뇌수술까지 받게 한 도정우,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여전히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막고자 한다. 

그렇게 스스로 괴물이 된 아이들이 자신을, 그리고 또 다른 아이들을 희생양으로 만든 백야 재단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세울 때, 그들의 맞은 편에서 오정완을 비롯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거침없이 실험의 성공을 위해 아이들을 '조달'하는데 전력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이들을 희생으로 삼는 실험이 인류를 위한 일이라는 몰가치적 신념을 가진 수사관 공혜원(설현 분)의 아버지 공일도와, 도정우와 제이미의 생모 조현희가 있다. 

 

 

낮과 밤; 도정우와 아이들의 결자해지 
16회, 실험을 막고자 하는 도정우를 비롯한 아이들과, 여전히 자신의 지적인 탐욕과 영생에의 욕심에 눈이 먼 무리들과의 마지막 일전이 치뤄진다. 특히 28년만에 자식을 눈 앞에 보고서도 반가움 대신 그들의 혈청을 탐하는 도정우의 생모 조현희와 경찰에 잡혀와서도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공일도의 모습은 아우슈비츠에서 실험을 한 과학자들이 연상케 한다. 

자식보다 자식의 혈청을 탐하는 생모 앞에서 결국 '낮'이었던 도정우의 선한 의지를 괴물 도정우가 먹어버린다. 28년전 그날처럼 모두를 파멸로 이끌려는 상황, 동생 제이미와 공혜원의 간절한 목소리는 도정우를 '낮'으로 되돌리고 몰살의 비극은 재연되지 않는다.  그리고 28년전 그날부터 '괴물'의 원죄로 시달린 도정우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어머니 조현희와 함께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폭발의 현장에 남는다. 

생체 실험으로 염력을 비롯하여 슈퍼맨과 같은 능력을 지닌 주인공, 그리고 그가 맞서 싸우는 권력과 부를 넘어선 영생불사를 향한 맹목적인 무리들, 무엇보다 아이들의 혈청을 기반으로 하여 100세가 넘어서도 자신을 숨긴채 젊은 대통령 비서관으로 살아왔던 오정완이나, 아들의 혈청으로 늙지 않는 조현희의 모습, 그리고 그런 그들의 악행이 또 다른 괴물이 되어버린 세번 째 아이의 살인으로 세상에 드러나는 스토리는 그 자체로 신선하고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그런 악의 무리들을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갖가지 능력을 발휘하여 속시원하게 파헤치고 단죄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16부작을 정주행한 시청자들의 속을 후련하게 했다. 더구나 '죄'의 대가를 기꺼이 치루고자 하는 세번 째 아이와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불 속에 남은 도정우의 모습은 인상깊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죽은 줄 알았던 도정우가, 불속에서 살아남아 돌아온 <터미네이터>의 아놀드 슈와제네거처럼 되살아 온 도정우, 시즌 2를 향한 히어로의 재등장인듯하지만, 그가 결자해지로 불속에 뛰어들었던 도덕적 딜레마가 뒷마을 씁쓸하게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by meditator 2021. 1. 20. 02:45

인도 영화라고 하면 선입관이 있다. 실사 영화 <알라딘>에서 차용하였듯이 진지하거나 코믹하거나 이야기가 진행되다 어느 시점이 되면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흥겨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할 것 같은 것이다. 이른바 '발리우드' 영화이다. 하지만 이런 인도 영화에 대한 선입관을 깨준 영화가 1월 15일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찾아왔다. 바로 <인생은 트리방가처럼>이다. 

트리방가는 극중 여주인공 아누(카졸 분)이 추는 인도 전통 춤의 오디시 동작 중 하나이다.  주인공 아누는 그 트리방가라는 동작을 빌어 자신을 표현한다. 말끝마다 욕을 달고 사는 아누식 표현대로 하자면 '삐딱하다?' 몸을 한번 꺽는 것도 쉽지 않은데 무려 세 번이나 꺾는 고난이도의 동작, 그건 그녀 자신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살아왔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말한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렇게 자신을 표현한 '트리방가'를 영화 속 세 모녀 나얀(탄비 아즈미 분), 나얀의 딸 아누, 그리고 나얀의 딸 마샤(미틸라 팔카르 분)의 삶을 상징하는 단어로 선택한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많은 딸들이 '난 엄마처럼 살지 않겠어'라고 외치며 살아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면 그 닮고 싶지 않던 어머니와 가장 많이 닮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의 삶을 거부하고 살아온 딸, 그리고 딸이 낳은 딸은 다시 그 어머니와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애쓰고, 이렇게 3대의 여성이 서로를 부정하고 또 부정하며 살아왔던 모습이 나얀의 뇌졸증을 계기로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며 해묵은 '모녀'의 이야기가 풀려나간다. 

 

 

엄마이자 작가였던 나얀 
한 여성이 있다. 그녀는 글을 쓴다. 샘물이 솟아오르듯 쉴 사이 없이 떠오르는 그녀의 영감은 빠른 그녀의 손끝에서 작품화되었다. 그녀를 사랑하던 남자는 그녀의 '문재'를 아꼈고 결혼해서도 계속 글을 쓸 수 있게 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않았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의 시어머니는 하루종일 책상 앞에서 손을 놀리는 며느리를 용납할 수 없었다. 자기 자식이 죽어나가도 글을 쓸 것이라며 막말을 서슴치 않았고 그녀를 찾아온 문학계 동료들 앞에서 수모를 안겼다. 그녀의 글을 사랑해서 결혼했다던 남편은 자신의 어머니를 이해시키기는 커녕, 두 사람의 갈등 앞에 안락하지 않은 가정을 불평했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한다면 떠나자했지만 외아들인 남편은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그녀가 떠났다. 

아이들을 돌보아주는 비말, 그리고 아이들, 새로운 사랑, 그리고 두번 째 작품의 출간, 그녀는 행복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만의 생각이었을 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그녀를 엄마라고도 부르지 않는다. 엄마 대신 '나얀'이라고 불리는 여성, 여성 3대의 어머니 나얀은 자신의 자서전을 쓰며 이런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아이들이 그런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비난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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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정하는 아이들 
왜 아이들은 엄마를 나얀이라 부르며 외면하게 되었을까? 나얀은 그녀가 활동하던 1980년대 인도 사회에서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 집을 나온 이후 남편이 더 이상 아이들의 보호자 역할을 하지 않자 남편 성 대신 자신의 성을 아이들에게 붙였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결정이었다. 케케묵은 가부장제에 대항하여 그녀의 결정을 관철시키기 위해 법정에서 10년간 싸웠다. 

가부장제에 대항하여 자신을 굽히지 않은 강인한 엄마이자 문필가, 하지만 그런 엄마의 결정을 감내해야 하는 건 고스란히 아이들의 몫이었다. 이혼이 흔치 않았던 1980년대의 인도 사회에서 아이들은 부모의 이혼이라는 이별을 맞닦뜨린데 더해, 자신들의 성을 엄마의 성으로 바꾼 상황에서 학교에서 놀림을 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런데 딸 아누를 정작 고통에 빠뜨린 건 그런 주변의 놀림이 아니었다. 엄마의 두번 째 사랑인 사진가가 시시때때로 나얀을 성적으로 희롱했던 것이다. 아누에게 더 고통스러운 건 엄마가 이걸 알면서도 '묵인'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누에게 엄마는 딸인 자신보다 작가인 엄마 자신을, 그리고 주변의 시선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그리고 이는 아누 자신이 미혼모로 고통을 받는 과정에서 갈등의 정점에 이른다. 

 

 
늦은 화해 
그렇게 엄마를 외면했던 두 남매가 뇌졸증으로 쓰러진 엄마의 병실에서 모인다. 그리고 엄마의 자서전을 써왔던 밀란을 통해 뒤늦은 엄마의 진심을 확인한다. 잘못한 걸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꺼이 자신의 삶을 내보이고 아이들에게 비난받겠다는 엄마의 진심을 깨달으며 외면했던 마음이 돌아선다. 

아누는 엄마를 거부하고 외면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가부장제에 맞서 아이들에게 자신의 성으로 하기 위해 법정에서 싸웠던 엄마가 싫었던 아누 역시 정작 한 남자와 평생을 사는 걸 바보짓이라 일축한다. 결혼을 사회적 테러라고 여기며 당당한 삶의 태도를 일관한 아누는 결국 엄마 나얀의 딸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엄마인 나얀에 반항하며 살아왔던 아누의 딸 역시 아누의 삶과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애쓴다. 학부모 상담일마다 매번 새 남자를 데리고 나타나는 엄마가 싫었던 딸은 평범한 가족의 일원이 되고자 애쓴다. 영화의 제목처럼 세 번의 굴곡이 할머니, 어머니, 손녀 삼대를 통해 드러난다.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 그런 엄마처럼 살기 싫은 딸, 하지만 그들은 모두 어떤 의미에서 서로 닮은 여성 3대이다. 아직 사회적으로 이혼이 수용되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던 작가와 자유분방한 여배우라는 캐릭터를 통해 인도 사회 내 여성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영화는 그리고자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인도'라는 지역성을 넘어 엄마와 딸의 이야기로 보편적인 울림을 전해준다. 









by meditator 2021. 1. 18. 17:36

인기 웹툰 <경이로운 소문>이 드라마화된 ocn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은 화제작답게 ocn 장르 드라마로는 드물게 10% 내외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상승세를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소문난 잔치여서 그럴까 최근 작가 교체가 되었다는 낭보와 함께, 제작진의 잡음이 표면화되었다. 극중 출연자가 이에 '믿고 따라와봐요'라는 응답을 하는 듯한 sns를 했지만 들썩이는 여론은 쉬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저 '작가 교체'라는 내부적 요인 때문일까? 그것보다는 이미 웹툰을 통해 시청자들이 기대하고 있는 <경이로운 소문>과 드라마로 구현된 드라마가 시청자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던 점이 제작상의 갈등을 통해 표출되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경이로운 소문> 
<경이로운 소문>이  ocn 장르 드라마로써는 획기적으로 시청률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건 무엇보다 이미 원작의 '재미'를 담보하고 있어서이다. 그렇다면 원작의 그 '재미'란 무엇일까? 

극중 주인공들은 '카운터'들이다. 이 새로운 캐릭터들은 '융'이라는 지상과 하늘을 잇는 '영계'의 명을 받아 악귀를 사냥하는 신선한 '존재'들이다. 마지막으로 카운터가 된 소문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코마' 상태에 있던 사람들, 죽음 대신 삶의 기회와 함께 저마다의 놀라운 능력치를 얻어 그를 통해 악귀가 된 사람들을 쫓아 그들의 악령을 소환한다. 소문이(조병규 분)의 경우 그 자신이 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악귀에게 희생된 케이스로 마지막 카운터의 주자로 합류했다. 

당연히 시청자들은 이들 카운터들의 활약상을 따라 드라마의 흐름을 쫓는다. 그저 악귀를 사냥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 악귀들의 악행이 이들이 머물고 있는 중진 시의 신명휘 시장과 그의 조력자들의 사회구조적인 비리와 연결이 되며 판을 키운다. 거기에 이들의 비리를 추적하다 죽음을 당할 뻔한 카운터 가모탁(유준상 분)과 역시나 부모님을 잃은 소문이의 사연이 더해지며 우연은 운명적 만남이 된다. 거기에 단계를 높여가며 카운터들과 대척점을 이룬 악귀 지청신(이홍내 분)이 신명휘의 조력자가 되며 악과 카운터들의 대립은 중진시라는 거악의 척결로 귀결된다. 

 

 

활약 대신 사연이 
이렇게 판을 키운 <경이로운 소문>, 하지만 판이 커진 것에 비해 정작 회를 거듭하며 시청자들이 보고자 했던 카운터들의 화끈한 악귀 사냥은 힘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2.7%로 첫 출발을 끊었던 <경이로운 소문>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건 부모님을 잃은 사고로 다리를 절게 된 소문이 카운터가 되며 두 다리로 멀쩡하게 걷게 됨은 물론, 그간 소문이와 친구들을 괴롭히던 가해 학생들을 속시원하게 '응징'하는 장면에서 부터였다.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은 물론 그 누구라도 괴롭히지 말라며 단호하게 소리치며 힘으로 자신들을 괴롭히던 학생 무리들을 한 방에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장면은 말 그대로 체증이 확 풀리는 장면이었다. 

바로 이러한 속시원한 활약을 기대하며 시청자들은 <경이로운 소문>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다리를 절던 소문이 두 다리로 걷고 뛰고 건물을 날아오르듯 융의 위겐들의 영적인 도움으로 카운터들이 악귀들을 제압해나가는 장면을 그 자체로 '카타시스'인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반부에 들어서며 <경이로운 소문> 속 카운터들의 활약은 지지부진했다. 악귀를 사냥하는 대신, 가무탁의 과거 사연과 소문이 부모님의 사연, 그리고 도하나(김세정 분)이 풀리며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반면, 카운터로서의 활약은 그런 사연 속 조미료처럼 감질맛나게 등장했다. 심지어 융의 위겐들이 과거 사연과 관련하여 카운터로써의 영역을 넘어선 카운터들의 활동을 문제삼아 소문이의 능력을 빼앗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주인공의 능력을 상실하는 상황은 '히어로물'에서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통과 의례이기는 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클리셰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가운데 악의 주구인 지청신을 비롯한 중진시의 악의 전횡이 드라마를 지배하며 극을 이끌어 가는 것이 누군인가 라는 의문이 생기게 만드는데 있다. 

장르물에서 흔히 오판을 하게 되는 경우가 시선을 사로잡는 '악'의 존재감이 커지며 극의 흐름을 '악'의 축이 끌고가게 되는 경우이다. <경이로운 소문> 역시 지청신과 백향희라는 악귀가 사람들의 목숨을 밥먹듯이 해치우며 악의 단계를 상승하며 극중 존재감을 키워나간다. 그런가 하면 신명휘와 그의 조력자 조태신의 전횡도 점입가경이었다. 

 

 
그렇게 악의 무리들이 그 힘을 키워나가는 동안 카운터들은 저마다의 사연에 천착하여 딜레마에 빠진다. 사람으로 자신이, 자신의 부모님이 죽음에 이르게 된 사연은 그 무엇보다 곡진하고 애달프지만 이러한 '신파'적 정서로 스토리를 진행해가다보니 카운터로서의 면모가 상대적으로 아쉬워지게 되는 것이다. 

소문이의 경우는 매번 부모님과 관련된 상황에서는 이성을 잃는다. 이미 그런 상황에서의 단독 행동으로 인해 자신은 물론, 동료들마저 위험에 빠뜨려 카운터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기도 했던 소문이였는데, 이제 다시 13, 4회에서 소문이는 여전히 분노하고 폭발한다. 지청신의 자살로 신명휘에게로 옮겨간 악귀를 확인한 소문이가 동료 카운터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신명휘의 집 담장을 뛰어넘는 상황은 용맹한 카운터라기보다는 여전히 부모님의 상실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등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 보인다. 즉 소문이의 사연은 안타깝지만 드라마는 카운터들 중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소문이라는 캐릭터를 늘 소리치고 분노하는 일차원적 캐릭터로 소모하는 경우가 많다. 

도하나 역시 마찬가지다. 혹시라도 자신을 통해 자신의 과거가 드러날까 자신을 만지지도 못하게 하던 도하나의 과거와 관련된 트라우마는 이제 종착지를 남겨둔 14회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그녀 혼자 살아남았다는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악귀 사냥꾼으로서 카운터들의 저마다의 매력이 한껏 드러나지 못한다. 심지어 카운터들은 카운터로서의 활약 대신 신명휘 시장 대선 출정식에서 똥물을 뒤집어 씌우는 실소 넘치는 해프닝이나 속여넘겨 선거 자금 빼앗기와 같은 카운터답지 않은 작전으로 스토리를 이어간다.  13회에서도 결계라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만들어 놓고 카운터들조차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상황에 뜻밖에 등장한 아이로 인해 기회를 다시 놓치는 웃지 못할 상황을 만들어 버린다. 

물론 이러한 지지부진한 카운터들의 시행착오가 이제 대미를 장식할 15,16회의 결전으로 이끌어 가기 위한 밑밥일 수 있다. 하지만 마치 잔칫날 잘 먹자고 내리 굶기는 상황처럼 16부의 여정에서 사연은 구구절절했던 반면 카운터들의 활약상은 상대적으로 아쉬움을 남긴다. 탄탄한 원작에도 불구하고 16부라는 여정마저 버거워보이는 흐름이었기에 작가 교체와 같은 내부 잡음이 시청자들의 불만섞인 목소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21. 1. 18. 01:34

모리스 뤼블랑의 <괴도 뤼팽>은 '탐정'이 중심이 되어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 소설계의 '반전'이다. 징죄를 받아야만 하는 범인이 주인공이 되어 그를 잡으려는 경찰을 희롱하며 권력을 가진 자들과 부호들을 농락하는 이야기는 <셜록 홈즈>로 대변되는 정의의 서사의 맞은 편에서 또 다른 장르를 개척하며 추리소설의 고전이 되었다. 

 

 

<셜록 홈즈>가 영국 드라마로 시즌을 거듭하며 인기를 끌며 주인공 베네딕트 컴버베치에게 명성을 선사해 왔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며 <기암성>에서 셜록 홈즈와 비극적 대결 구도를 그렸던 <괴도 뤼팽>의 현대적 해석이 당연히 기대되는 상황, <넷플릭스 오리지널>은 이런 대중의 기대를 절묘한 서사를 통해 5부작으로 재해석해낸다. 

<괴도 뤼팽>의 첫 작품은 <왕비의 목걸이>이다. 1874년 태어난 뤼팽, 아버지와 어머니가 헤어진 바람에 어머니 앙리에트와 함께 드뢰-수비즈 백작 부부 집에 얹혀사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백작 부부로 인해 갖은 수모를 겪게 되는데, 뤼팽은 이런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백작 부부의 가장 아끼는 보물인 마리 앙토와네트의 목걸이를 훔치며 '괴도'로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현대 프랑스 사회의 사회적 모순을 담은 뤼팽 
<넷플릭스 오리지널 -뤼팽>은 바로 이 <왕비의 목걸이>를 모티브로 오늘날 프랑스, 아니 유럽 사회가 가진 구조적인 모순을 갈등의 고리로 엮는다. 세네갈에서 유럽으로 온 아산 부자, 아산의 아버지는 재벌 펠레그레니 집에서 운전수로 일을 하게 된다. 

비오는 날 차에 시동이 꺼져 고충을 겪던 펠레그레니의 아내, 그 차에 다가가 도움을 주겠다는 아산의 아버지, 하지만 펠레그레니의 아내는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위협을 느끼며 차문을 잠근다. 바로 이 장면에서 이민자로서 아산 부자를 대하는 당시 프랑스의 시선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가난한 이민자였지만 아산의 아버지는 성실했고 어린 아산에게 학구열을 독려한다. 하지만 운전수라는 직업을 통해 프랑스 사회에 적응하려 했던 아산 부자의 열망은 펠레그레니 집안에서 사라진 왕비의 목걸이를 훔친 범인으로 아산의 아버지가 지목됨으로써 무너진다. 증거가 불충분했지만 가진 것 없는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는 죄를 추궁당한다. 결국 감옥에 갇힌 자신의 펠레그레니에게 농락당한 것을 알고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홀로 남은 아산은 복지원으로 가야만 했다. 

그리고 25년의 시간이 흘러, 아산의 아버지가 훔쳤다던 그 목걸이가 다시 펠레그레니 집안에서 등장하고 펠레그레니 재단 창립 기금을 위해 루브르 박물관에서 경매에 붙여진다. 그리고 25년만에 나타난 아산(오마르 사이 분)은 유유히 그 목걸이를 훔친 채 사라진다. 자기 어머니가 당한 수모를 되갚기 위해 목걸이를 훔친 <괴도 뤼팽>의 첫 번 째 작품의 오마주이다. 


 

 

​​​​​​​아버지의 유지, 뤼팽 

5개의 시리즈로 이어진 <뤼팽>은 이렇게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한 아산의 신출귀몰한 모험담이다. 세네갈에서 온 이민자 가정의 아산은 흑인 이민자라는 이유만으로 죽어간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뤼팽 속 스토리를 활용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이 <뤼팽>인 이유는 그저 <괴도 뤼팽>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서사 때문만이 아니다. 세네갈에서 온 이제는 고아가 된 소년 아산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책이 바로 <괴도 뤼팽>이었다. 그리고 <괴도 뤼팽>은 감옥에서 죽어간 아버지가 아산에게 남긴 메시지북이기도 하다. 

복지원에서 사립 학교로 이어지는 학창 생활 동안 성경 사이에 아버지가 남긴 <괴도 뤼팽>을 끼워 아산은 읽고 또 읽으며 '뤼팽'으로서 거듭났다. 그렇다면 뤼팽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뒷골목 건달들과 한탕을 위해 루브르 경매에 나온 목걸이를 훔치는 것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그 모든 계획이 경매장에 신흥 갑부로 등장한 아산이 여유롭게 목걸이를 훔쳐내기 위한 페이크 작전이었다.

<괴도 루팽>이 <셜록 홈즈>와는 또 다르게 도둑이지만 때로는 홈즈보다도 더 정의로워보였던 의적인 뤼팽의 설정처럼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라는 기본 설정을 밑바탕에 깔려 있다. 거기에  뤼팽의 이야기처럼 한 편의 마술처럼 알고보니 뤼팽의 큰 그림이었다는 식의 서사가 <뤼팽>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괴도 루팽> 속 뤼팽처럼 분장을 통해 자유자재로 변신하며, 극단의 상황에서도 신출귀몰하는 기지로 위험을 돌파해내는 기지로 아산은 뤼팽이 된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훔친 목걸이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펠레그레니에게 통쾌한 복수를 선사한 아산은 그에 이어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쫓아간다. 남의 주머니를 슬쩍 터는 건 기본, 말 몇 마디로 경찰을 따돌리고, 자산가의 보물을 한 손에 쥐는가 하면, 진실을 찾기위해 스스로 감옥으로 들어가는가는 위험을 감수하기도 한다.

또한 무기 거래를 통해 부를 축적한 펠레그레니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전직 기자와 손을 잡고 sns를 비롯한 방송 출연이라는 첨단의 '폭로' 전술을 쓰는가 하면, 펠레그레니와 손을 잡고 그의 아버지를 잡아간 당시 형사에게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인공지능 홈iot는 물론 드론 활용하는 등 아산 버전의 뤼팽은 현대 문물의 귀재가 되어 법망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나우 유 씨 미: 마술사기단>, <인크레더블 헐크> 의 루이 리터리어 감독이 연출을 맡은 시리즈는 이미 시즌을 거듭하고 있는 <셜록 홈즈>와는 또 다른 프랑스 사회의 모순을 담은 갈등 구조를 풀어내며 고전 해석의 새로운 지평을 열며 시즌 2를 기약한다. 

by meditator 2021. 1. 12. 02:30

당신의 사랑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요?

2021년 벽두부터 던지기에는 좀 오글오글한 질문일까? 아마도 이 질문은 받아든 사람들이 머리에  떠올리는 사랑의 모습에 따라 질문도, 대답도 그 성질이 달라질 것이다. 누군가는 만남의 장소를 떠올릴 지도 모를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무슨 얼어죽을 놈의 사랑이라고 넘겨짚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으로 삶의 물길이 다르게 흐르기 시작한 걸 경험했던 누군가라면 한번쯤 그 사랑의 시작에 대해 상념에 젖지 않을까. 

<가을의 마티네>는 1999년 약관 23살의 나이에  <일식>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한 히라노 게이치로의 로맨스 소설 <마티네의 끝에서>가  원작이다. 2015년부터 마이니치 신문에 연재되며 뜨거운 반응을 일으킨 이 소설을 <용의자 x의 헌신>의 니시타시 히로시 감독이 동작품을 함께 했던 배우 후쿠야마 마사하루와 함께 영화화했다. 

소설의 제목처럼 주인공 마키노(후쿠야마 마사하루 분)와 요코(이시다 유리코 분)의 사랑은 마키노의 연주회가 끝난 곳에서 시작된다. 당신의 사랑이 어디에서 시작됐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첫 번 째 대답이 될 것이다. 

연주회를 마친 마키노는 자신의 대기실에서 공황 상태에 빠져든다. 무려 20주년 독주회, 하지만 연주를 거듭할 수록 그의 이마에 배어나오는 땀방울처럼 그에게는 이젠 날이 갈수록 자신의 기타 연주가 버겁다. 그럼에도 장사진을 이룬 팬들, 그들을 말리는 충복같은 매니저 미타니(사쿠라이 유키 분), 해프닝처럼 마키노의 앨범을 의논하려고 온 소부에, 친구인 요키가 마키노와 마주하게 된다. 

 

 

미래가 과거를 바꾼다. 
교감, 아마도 사랑의 시작은 이런 감정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서로 다른 삶의 궤도를 살아온 두 사람이 운명처럼 만나게 되는 지점,  마키노와 요키는 '미래가 과거를 바꾼다'는 역설적인 문구을 통해 교감한다. 마키노를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좋아하는 미타니의 최측근 미타니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두 사람은 눈빛으로 나눈다. 

영화는 내내 '미래가 과거를 바꾼다'는 화두를 되풀이 한다. 마치 역사학자 E.H. 카의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역사에 대한 정의를 뒤집은 듯한 문구이다. 원작자 히라노 게이치로는 E.H. 카와 다른 말을 한 것일까? 아니 외려, 영화를 보고나면 히라노 게이치로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은 E.H. 카의 인생 버전이 아닐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마키노와 유키가 첫 교감을 했던 이야기는 유키의 본가 마당에 있는 너른 바윗돌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릴 적 유키가 그곳에서 소꼽장난을 즐겨했던 곳, 그래서 좋은 추억으로 기억된 그곳에서 그만 할머니가 머리를 부딪치셔서 돌아가시게 되었다. 그래서 유키는 마음이 아프다고 하였다. 왜 마음이 아프냐는 마키노의 매니저 질문에 마키노가 '미래가 과거를 바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좋은 기억이었던 과거가 현재에 벌어진, 즉 '미래'의 사건으로 인해 이제는 아픈 추억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마음아픈 일을 많이 겪는다. 그리고 그 '상처'에 머물러 오랫동안 고통을 받는다. 그런데 원작자 히라노 게이치로는 우리가 '천착'해 있는 상처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의해 얼마든지 다시 '각색되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E.H.카가 말한 역사도 결국 현재의 시선에서 과거의 역사를 재해석함으로써 미래를 지향한다는 뜻에서 히라노 게이치로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영화 속 마키노와 유키는 모두 '상실'을 겪는다. 기타리스트로서 더는 기타를 칠 수 없을 만큼 슬럼프에 빠진 마키노, 그런데 그가 고통 속에서 연주한 20주년 연주회에서 유키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유키는 그가 유일하게 만족했던 마지막 앵콜 브라암스 곡의 진정성을 알아봐주며 마키노의 마음을 울린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로 돌아간 유키는 파리에서 발생한 테러 사건의 와중에서 동료를 잃고 트라우마를 겪는다. 그런데 그런 유키를 위로해 준 것이 바로 마키노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상실'의 과정을 겪어가며 서로의 진심을 나누고, 사랑을 약속한다. 유키는 파혼을 하고 프랑스 생활을 접고 마키노가 있는 일본으로 온다. 

하지만 운명은 얄궃게도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한다. 그로 부터 다시 몇 년의 시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궤도의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4년이라는 시간동안 두 사람은 각자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살아간다. 

오랫동안 기타를 연주할 수 없었던 마키노가 그를 13살에 발탁하여 가르쳐 준 스승님의 추모 앨범을 계기로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에야 두 사람의 멈췄던 인연의 시계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각자 겪은 개인적인 상실은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의 사랑을 시작하게 만든 '계기'가 된다. 각자 아픔은 겪었지만, 그 아픔 속에서 서로의 존재가 빛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키노가 슬럼프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연주 중 유일하게 스스로 만족한 브라암스에 감명한 유키에게 마음이 그렇게 쉽게 갔을까? 마찬가지로 동료를 잃고 슬픔에 잠긴 유키의 마음을 어떻게든지 달래보려 애쓴 마키노의 정성이 없었다면 유키가 마키노에게 마음을 온전히 줄 수 있었을까?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시련을 맞이한다. 이별이라는 '현재'는 아마도 그들이 함께 했던 '과거' 조차도 아픔으로 기억되게 했을 것이다. 마치 유키네 집 마당의 바위가 어린 시절 추억을 할머니의 죽음으로 덮었듯이. 심지어 그 이야기를 마키노와 나누었던 그 기억 때문에 더더욱 본가로 돌아간 유키에게 그 바위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픔 가운데에서도 마키노도, 유키도 서로가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을 상처로만 덮지도 머물러 있지도 않았다. 마키노는 스승의 추모 앨범에서 '미래가 과거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하며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의 그 이야기에 유키가 화답한다. 

영화는 어딘가로 바쁘게 가던 유키가 뒤돌아 고향 마을 집에 있는 것과 비슷한 거리의 바윗돌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키노에게 화답한 유키가 다시 바라본 그 바윗돌은 이제 어떤 의미였을까? 

2021년 새롭게 떠오르는 해를 보며 지난 아픔을 접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처는 상처인 채 놔두면 그대로 아픔으로 기억될 뿐이다. 그 아픔에 천착하는 대신 그 아픔의 삶을 딛고 거기에 새로운 역사를 부여하는 순간, 아픔은 우리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상실과 상처, 우리를 고통받게 하는 것들이다. 영화는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각자의 삶과 사랑에 용기를 내보라 권한다. 바윗돌 하나에도 오고가는 다른 기억이 얹히듯이 우리가 살아오며 가지게 되는 아픔과 고통들에 대해, 그것들을 '승화'할 수 있는 삶을 살아보라 영화는 권한다. 영화 속 마키노가 자신의 슬럼프를 딛고 나아가며 사랑을 되찾듯이, 그리고 유키가 과거에 머무는 대신 성큼 자신의 삶에, 그리고 사랑에 용기를 내보듯이. 그래서 이제 유키가 밝은 표정으로 거리의 바윗돌을 보듯이 우리 역시 우리 삶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재해석할 수 있을 거라, 그래서 '미래가 과거를 만든다'고 영화는 거듭 말한다. <가을의 마티네>란 서정적인 제목 아래 숨겨진 영화 속 의미는 2021년 아름다움 삶과 사랑을 향한 덕담이다. 





by meditator 2021. 1. 9. 00:42

작년 10월 8일부터 롯데 뮤지엄에서는 장 미쉘 바스키아의 전시회가 진행 중이다. 장 미쉘 바스키아, 이제는 현대 미술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이름을 듣게 되는 화가이다. 그것보다는 데이비드 호크니에 이어 그의 작품이 가장 비싸게 팔리는 유명 화가라고 하면 더 익숙할 지도 모르겠다. 

 

 

사회적 장벽 앞에 선 1980년대의 스타 작가 
스스로를 '영웅'이라 칭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장 미쉘 바스키아는 1980년대 초 뉴욕 화단에 등장하여 겨우 8년이라는 짦은 기간 동안 3000 여 점의 작품을 쉴틈없이 쏟아낸 스타 작가이다. 그리고 그 짧은 작품 활동 기간은 유색인종으로서 장 미쉘 바스키아가 여전히 인종 차별적 시선이 사라지지 않은 사회에 자신의 작품으로 저항한 기간이기도 하다. 

낙서와 같은 문구와 현대 문화의 아이콘 같은 이미지들로 가득한 그의 작품은 그런 그의 메시지를 반영한다. 전시회 작품 중 가장 가격이 비싸다는 작품은 해부도 속 인물과 같은 인간과 소가 그려져 있다. 바스키아가 그린 동물은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한 유색인종 자신들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그가 그린 피흘리는 예수는 그와 같은 피부빛깔이고, 당대 최고의 야구 선수 행크 아론은 역시나 그와 같은 유색 인종의 영웅으로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한다.

전시회에서 만난 한 장의 사진, 바스키아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한 자리에 모여 찍은 사진이 있다. 모두가 백인인 동료들 사이에서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바스키아, 이십대의 감수성 예민한 흑인 청년이 그 백인들 중심의 예술계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지레 짚어볼수 있는 지점이다. 그가 가장 믿고 따랐다던 앤디 워홀조차 그에게 너무 그렇게 인종적 차별에 민감한 그림에 천착하는 것을 말리기도 했다니, 그럴 수록 젊은 바스키아가 느끼는 사회적 고립감은 도를 더해갔을 것이다. 담배 한 갑을 사기 위해 그려준 그림이 단 일주일 만에 화랑에 비싼 가격에 전시되는 스타 화가였다. 전용비행기를 타고 다녀도 바스키아는 1980년대 미국에서 여전히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하는 유색인종이었다. 

 

 

1920년대의 흑인 청년의 좌절 
1980년대의 흑인 청년이 그럴진대. 1920년대를 살아가는 흑인 청년이 느끼는 사회적 좌절은 어땠을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선보인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는 또 한 명의  흑인 청년의 좌절을 그려낸다. 

영화를 여는 건 '블루스'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민요가 우리 고유의 '한'이라는 정서에 기반한 것처럼 음악 장르로서의 블루스는 노예로 살아가던 흑인들의 '한'을 음악적으로 승화시킨 장르이다. 그리고 '마 레이니(비올라 데이비스 분)'는 바로 그런 흑인들의 한을 구현하는 블루스 장르의 대표적 가수이다. 첫 장면에 선보인 그녀의 소울넘치는 음악에 흑인 관중들은 영혼의 '정화'를 느낀다. 

그런 블루스의 대표적 가수 마 레이니, 그녀가 음반 녹음을 위해 대표적인 북부의 도시 시카고에 등장한다. 트럼펫 연주자 레비(채드윅 보스먼 분)는 마 레이니의 연주를 위한 세션의 한 사람으로 동행한다. 

마 레이니를 비롯하여 세션들이 지나는 시카고 거리, 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백인들이다. 백인들은 그들을 마치 범법자 대하듯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본다. 먼저 도착한 세션들은 녹음이 예정된 공간이 아닌 창고같은 지하 공간으로 안내되어 음반에 필요한 음악을 맞춰보도록 요구된다. 그들의 동선만으로도 1920년대 흑인들이 처한 사회적 위치가 절감된다. 

오거스트 윌슨이 쓴 동명의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답게 영화는 지하의 세션 연습장과 마 레이니의 동선을 따라 오가며 소동극처럼 진행된다. 호텔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녹음실에 이르기까지 마 레이니는 블루스의 여왕이라는 자신의 유명세를 내세워 갖가지 해프닝을 벌인다. '몽니'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때로는 말이 되지 않는 요구들을 내세우며 녹음 작업을 지연시키지만, 그런 마 레이니의 '몽니' 저변에 깔린 건 저들 백인들이 자신을 블루스의 여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채 오로지 돈을 버는 수단으로만 여긴다는 불편한 자의식이다. 

그렇게 마 레이니의 해프닝과 함께 지하 녹음실을 중심으로 피아노와 트럼펫,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세션들 사이에 말의 향연이 벌어진다. 그 중심에는 늙수그레한 다른 세션들과 달리 아직 젊은, 그래서 마치 하룻강아지 범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에 어울릴 법한 태도로 일관하는 청년 '레이'가 있다. 

자신의 곡을 음반사에 선보인 레이는 한 마디로 눈에 뵈는 것이 없다. 그의 악보가 마 레이니 저리 가라하게 잘 나갈 것같은 자신감으로 충만한 그는 선배 세션들을 깔보며 마 레이니의 세션이 아닌 자신만의 악단을 꾸려 승승장구할 것이라 장담한다. 마 레이니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자기 스타일의 음악으로 녹음을 할 것을 제안하는 등 자신감이 넘치는 레이와 선배 세션들은 사사건건 충돌하게 된다. 

드러난 건 마 레이니라는 여가수의 녹음실 해프닝이지만,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말의 성찬을 넘은 갈등을 드러내며 결국 1920년대 흑인들의 현실을 토로한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아웅다웅하던 선배 세션들과  레이, 선배들은 레이를 그저 철부지로 치부하지만 알고보니 레이에게 백인들로 인해 부모님을 잃게 된 슬픈 과거가 있었음을 알고 동지애를 느낀다. 나이도, 취향도, 다루는 악기도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차별받은 유색인종이라는 지점에서 '블루스'의 정서같은 깊은 '상실'의 상흔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영화 초반 그저 '나대는 것'처럼 보이던 레이의 '조증'이 영화가 진행될 수록  밟히고 싶지 않은 한 흑인 청년의 자기 방어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의 동지애는 마 레이니의 녹음 현장에서 무력하다. 블루스의 여왕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 한껏 대접받고자 하는 마 레이니의 횡포에 가까운 녹음 작업에서 튀어나온 못과도 같던 레이는 결국 소외되고 주어진 기회마저 잃게 된다. 새 구두를 사고, 자신의 악보만 팔면 이제 고생 끝, 마 레이니 따위가 우습게 연주자로서 승승장구할 꺼라던 청년의 조급한 꿈은 단 한 순간에 나락으로 빠져버린다. 그의 조증만큼이나 순식간에 모든 걸 잃은 청년의 분노는 동료는 물론 자신을 자멸의 길로 이끈다.

녹음실의 해프닝으로 채운 영화은 그 안에서 1920년대 흑백 차별이 여전한 사회의 풍경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리고 번듯한 듯 하지만 저 마다 차별과 상실의 아픔을 안은 채 살아가는 흑인들 내면의 풍경을 보여준다. 백인과 흑인, 그리고 흑인과 흑인 사이의 다시 갈라진 벽은 결국 한 청년의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영화의 후반부, 단돈 2달러 헐값에 팔라던 레이의 악보는 백인 뮤지션에 의해 녹음된다. 그 모습은 마치 8년의 생애 동안 어엿한 인류의 일원으로 흑인의 존재를 세우기 위해 자신을 던져 싸웠던 바스키아의 작품들이 세계적으로 가장 비싼 작품으로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풍미하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늘 흑인 인권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왔던 채드윅 보스먼의 유작인 <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는 여전히 신산했던 1920년대 추락한 흑인 이카루스의 삶을 그려낸다. 

영화 속 레이, 그리고 바스키아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흑인이라는 자신의 사회적 존재에 그 누구보다도 '민감'했다. 그리고 그들의 생애 내내 그들이 몸으로 체감했던 차별적 삶에 날카롭게 반항하다 자신을 산화시킨다. 청년, 젊은 그들은 누구보다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하지만, 그들의 사회적 존재는 그런 그들의 열망을 불태워버린다. 

by meditator 2021. 1. 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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