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영화라고 하면 선입관이 있다. 실사 영화 <알라딘>에서 차용하였듯이 진지하거나 코믹하거나 이야기가 진행되다 어느 시점이 되면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흥겨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할 것 같은 것이다. 이른바 '발리우드' 영화이다. 하지만 이런 인도 영화에 대한 선입관을 깨준 영화가 1월 15일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찾아왔다. 바로 <인생은 트리방가처럼>이다. 

트리방가는 극중 여주인공 아누(카졸 분)이 추는 인도 전통 춤의 오디시 동작 중 하나이다.  주인공 아누는 그 트리방가라는 동작을 빌어 자신을 표현한다. 말끝마다 욕을 달고 사는 아누식 표현대로 하자면 '삐딱하다?' 몸을 한번 꺽는 것도 쉽지 않은데 무려 세 번이나 꺾는 고난이도의 동작, 그건 그녀 자신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살아왔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말한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렇게 자신을 표현한 '트리방가'를 영화 속 세 모녀 나얀(탄비 아즈미 분), 나얀의 딸 아누, 그리고 나얀의 딸 마샤(미틸라 팔카르 분)의 삶을 상징하는 단어로 선택한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많은 딸들이 '난 엄마처럼 살지 않겠어'라고 외치며 살아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면 그 닮고 싶지 않던 어머니와 가장 많이 닮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의 삶을 거부하고 살아온 딸, 그리고 딸이 낳은 딸은 다시 그 어머니와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애쓰고, 이렇게 3대의 여성이 서로를 부정하고 또 부정하며 살아왔던 모습이 나얀의 뇌졸증을 계기로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며 해묵은 '모녀'의 이야기가 풀려나간다. 

 

 

엄마이자 작가였던 나얀 
한 여성이 있다. 그녀는 글을 쓴다. 샘물이 솟아오르듯 쉴 사이 없이 떠오르는 그녀의 영감은 빠른 그녀의 손끝에서 작품화되었다. 그녀를 사랑하던 남자는 그녀의 '문재'를 아꼈고 결혼해서도 계속 글을 쓸 수 있게 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않았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의 시어머니는 하루종일 책상 앞에서 손을 놀리는 며느리를 용납할 수 없었다. 자기 자식이 죽어나가도 글을 쓸 것이라며 막말을 서슴치 않았고 그녀를 찾아온 문학계 동료들 앞에서 수모를 안겼다. 그녀의 글을 사랑해서 결혼했다던 남편은 자신의 어머니를 이해시키기는 커녕, 두 사람의 갈등 앞에 안락하지 않은 가정을 불평했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한다면 떠나자했지만 외아들인 남편은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그녀가 떠났다. 

아이들을 돌보아주는 비말, 그리고 아이들, 새로운 사랑, 그리고 두번 째 작품의 출간, 그녀는 행복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만의 생각이었을 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그녀를 엄마라고도 부르지 않는다. 엄마 대신 '나얀'이라고 불리는 여성, 여성 3대의 어머니 나얀은 자신의 자서전을 쓰며 이런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아이들이 그런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비난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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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정하는 아이들 
왜 아이들은 엄마를 나얀이라 부르며 외면하게 되었을까? 나얀은 그녀가 활동하던 1980년대 인도 사회에서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 집을 나온 이후 남편이 더 이상 아이들의 보호자 역할을 하지 않자 남편 성 대신 자신의 성을 아이들에게 붙였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결정이었다. 케케묵은 가부장제에 대항하여 그녀의 결정을 관철시키기 위해 법정에서 10년간 싸웠다. 

가부장제에 대항하여 자신을 굽히지 않은 강인한 엄마이자 문필가, 하지만 그런 엄마의 결정을 감내해야 하는 건 고스란히 아이들의 몫이었다. 이혼이 흔치 않았던 1980년대의 인도 사회에서 아이들은 부모의 이혼이라는 이별을 맞닦뜨린데 더해, 자신들의 성을 엄마의 성으로 바꾼 상황에서 학교에서 놀림을 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런데 딸 아누를 정작 고통에 빠뜨린 건 그런 주변의 놀림이 아니었다. 엄마의 두번 째 사랑인 사진가가 시시때때로 나얀을 성적으로 희롱했던 것이다. 아누에게 더 고통스러운 건 엄마가 이걸 알면서도 '묵인'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누에게 엄마는 딸인 자신보다 작가인 엄마 자신을, 그리고 주변의 시선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그리고 이는 아누 자신이 미혼모로 고통을 받는 과정에서 갈등의 정점에 이른다. 

 

 
늦은 화해 
그렇게 엄마를 외면했던 두 남매가 뇌졸증으로 쓰러진 엄마의 병실에서 모인다. 그리고 엄마의 자서전을 써왔던 밀란을 통해 뒤늦은 엄마의 진심을 확인한다. 잘못한 걸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꺼이 자신의 삶을 내보이고 아이들에게 비난받겠다는 엄마의 진심을 깨달으며 외면했던 마음이 돌아선다. 

아누는 엄마를 거부하고 외면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가부장제에 맞서 아이들에게 자신의 성으로 하기 위해 법정에서 싸웠던 엄마가 싫었던 아누 역시 정작 한 남자와 평생을 사는 걸 바보짓이라 일축한다. 결혼을 사회적 테러라고 여기며 당당한 삶의 태도를 일관한 아누는 결국 엄마 나얀의 딸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엄마인 나얀에 반항하며 살아왔던 아누의 딸 역시 아누의 삶과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애쓴다. 학부모 상담일마다 매번 새 남자를 데리고 나타나는 엄마가 싫었던 딸은 평범한 가족의 일원이 되고자 애쓴다. 영화의 제목처럼 세 번의 굴곡이 할머니, 어머니, 손녀 삼대를 통해 드러난다.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 그런 엄마처럼 살기 싫은 딸, 하지만 그들은 모두 어떤 의미에서 서로 닮은 여성 3대이다. 아직 사회적으로 이혼이 수용되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던 작가와 자유분방한 여배우라는 캐릭터를 통해 인도 사회 내 여성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영화는 그리고자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인도'라는 지역성을 넘어 엄마와 딸의 이야기로 보편적인 울림을 전해준다. 









by meditator 2021. 1. 18. 17:36

인기 웹툰 <경이로운 소문>이 드라마화된 ocn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은 화제작답게 ocn 장르 드라마로는 드물게 10% 내외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상승세를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소문난 잔치여서 그럴까 최근 작가 교체가 되었다는 낭보와 함께, 제작진의 잡음이 표면화되었다. 극중 출연자가 이에 '믿고 따라와봐요'라는 응답을 하는 듯한 sns를 했지만 들썩이는 여론은 쉬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저 '작가 교체'라는 내부적 요인 때문일까? 그것보다는 이미 웹툰을 통해 시청자들이 기대하고 있는 <경이로운 소문>과 드라마로 구현된 드라마가 시청자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던 점이 제작상의 갈등을 통해 표출되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경이로운 소문> 
<경이로운 소문>이  ocn 장르 드라마로써는 획기적으로 시청률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건 무엇보다 이미 원작의 '재미'를 담보하고 있어서이다. 그렇다면 원작의 그 '재미'란 무엇일까? 

극중 주인공들은 '카운터'들이다. 이 새로운 캐릭터들은 '융'이라는 지상과 하늘을 잇는 '영계'의 명을 받아 악귀를 사냥하는 신선한 '존재'들이다. 마지막으로 카운터가 된 소문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코마' 상태에 있던 사람들, 죽음 대신 삶의 기회와 함께 저마다의 놀라운 능력치를 얻어 그를 통해 악귀가 된 사람들을 쫓아 그들의 악령을 소환한다. 소문이(조병규 분)의 경우 그 자신이 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악귀에게 희생된 케이스로 마지막 카운터의 주자로 합류했다. 

당연히 시청자들은 이들 카운터들의 활약상을 따라 드라마의 흐름을 쫓는다. 그저 악귀를 사냥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 악귀들의 악행이 이들이 머물고 있는 중진 시의 신명휘 시장과 그의 조력자들의 사회구조적인 비리와 연결이 되며 판을 키운다. 거기에 이들의 비리를 추적하다 죽음을 당할 뻔한 카운터 가모탁(유준상 분)과 역시나 부모님을 잃은 소문이의 사연이 더해지며 우연은 운명적 만남이 된다. 거기에 단계를 높여가며 카운터들과 대척점을 이룬 악귀 지청신(이홍내 분)이 신명휘의 조력자가 되며 악과 카운터들의 대립은 중진시라는 거악의 척결로 귀결된다. 

 

 

활약 대신 사연이 
이렇게 판을 키운 <경이로운 소문>, 하지만 판이 커진 것에 비해 정작 회를 거듭하며 시청자들이 보고자 했던 카운터들의 화끈한 악귀 사냥은 힘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2.7%로 첫 출발을 끊었던 <경이로운 소문>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건 부모님을 잃은 사고로 다리를 절게 된 소문이 카운터가 되며 두 다리로 멀쩡하게 걷게 됨은 물론, 그간 소문이와 친구들을 괴롭히던 가해 학생들을 속시원하게 '응징'하는 장면에서 부터였다.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은 물론 그 누구라도 괴롭히지 말라며 단호하게 소리치며 힘으로 자신들을 괴롭히던 학생 무리들을 한 방에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장면은 말 그대로 체증이 확 풀리는 장면이었다. 

바로 이러한 속시원한 활약을 기대하며 시청자들은 <경이로운 소문>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다리를 절던 소문이 두 다리로 걷고 뛰고 건물을 날아오르듯 융의 위겐들의 영적인 도움으로 카운터들이 악귀들을 제압해나가는 장면을 그 자체로 '카타시스'인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반부에 들어서며 <경이로운 소문> 속 카운터들의 활약은 지지부진했다. 악귀를 사냥하는 대신, 가무탁의 과거 사연과 소문이 부모님의 사연, 그리고 도하나(김세정 분)이 풀리며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반면, 카운터로서의 활약은 그런 사연 속 조미료처럼 감질맛나게 등장했다. 심지어 융의 위겐들이 과거 사연과 관련하여 카운터로써의 영역을 넘어선 카운터들의 활동을 문제삼아 소문이의 능력을 빼앗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주인공의 능력을 상실하는 상황은 '히어로물'에서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통과 의례이기는 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클리셰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가운데 악의 주구인 지청신을 비롯한 중진시의 악의 전횡이 드라마를 지배하며 극을 이끌어 가는 것이 누군인가 라는 의문이 생기게 만드는데 있다. 

장르물에서 흔히 오판을 하게 되는 경우가 시선을 사로잡는 '악'의 존재감이 커지며 극의 흐름을 '악'의 축이 끌고가게 되는 경우이다. <경이로운 소문> 역시 지청신과 백향희라는 악귀가 사람들의 목숨을 밥먹듯이 해치우며 악의 단계를 상승하며 극중 존재감을 키워나간다. 그런가 하면 신명휘와 그의 조력자 조태신의 전횡도 점입가경이었다. 

 

 
그렇게 악의 무리들이 그 힘을 키워나가는 동안 카운터들은 저마다의 사연에 천착하여 딜레마에 빠진다. 사람으로 자신이, 자신의 부모님이 죽음에 이르게 된 사연은 그 무엇보다 곡진하고 애달프지만 이러한 '신파'적 정서로 스토리를 진행해가다보니 카운터로서의 면모가 상대적으로 아쉬워지게 되는 것이다. 

소문이의 경우는 매번 부모님과 관련된 상황에서는 이성을 잃는다. 이미 그런 상황에서의 단독 행동으로 인해 자신은 물론, 동료들마저 위험에 빠뜨려 카운터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기도 했던 소문이였는데, 이제 다시 13, 4회에서 소문이는 여전히 분노하고 폭발한다. 지청신의 자살로 신명휘에게로 옮겨간 악귀를 확인한 소문이가 동료 카운터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신명휘의 집 담장을 뛰어넘는 상황은 용맹한 카운터라기보다는 여전히 부모님의 상실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등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 보인다. 즉 소문이의 사연은 안타깝지만 드라마는 카운터들 중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소문이라는 캐릭터를 늘 소리치고 분노하는 일차원적 캐릭터로 소모하는 경우가 많다. 

도하나 역시 마찬가지다. 혹시라도 자신을 통해 자신의 과거가 드러날까 자신을 만지지도 못하게 하던 도하나의 과거와 관련된 트라우마는 이제 종착지를 남겨둔 14회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그녀 혼자 살아남았다는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악귀 사냥꾼으로서 카운터들의 저마다의 매력이 한껏 드러나지 못한다. 심지어 카운터들은 카운터로서의 활약 대신 신명휘 시장 대선 출정식에서 똥물을 뒤집어 씌우는 실소 넘치는 해프닝이나 속여넘겨 선거 자금 빼앗기와 같은 카운터답지 않은 작전으로 스토리를 이어간다.  13회에서도 결계라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만들어 놓고 카운터들조차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상황에 뜻밖에 등장한 아이로 인해 기회를 다시 놓치는 웃지 못할 상황을 만들어 버린다. 

물론 이러한 지지부진한 카운터들의 시행착오가 이제 대미를 장식할 15,16회의 결전으로 이끌어 가기 위한 밑밥일 수 있다. 하지만 마치 잔칫날 잘 먹자고 내리 굶기는 상황처럼 16부의 여정에서 사연은 구구절절했던 반면 카운터들의 활약상은 상대적으로 아쉬움을 남긴다. 탄탄한 원작에도 불구하고 16부라는 여정마저 버거워보이는 흐름이었기에 작가 교체와 같은 내부 잡음이 시청자들의 불만섞인 목소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21. 1. 18.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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