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공무원이 된 목적은 '무사안일'이었다. 그래서 '복지부동'으로 일관하려 했다. 그렇게 6년을 보냈다. 자신을 찾아와 호소하는 노동자들의 하소연에 눈을 질끈 감았다. 좋은 게 좋은 거니 서로들 말로 해결을 해보시라고 했다. 알바생의 시급을 떼어먹은 점주를 '감독'하는 대신, 알바 생에게 봉투를 주며 어차피 돈 받기 힘들다며 억울하면 공부 열심히 해서 이런 대접 받지 않게 살라는 계면쩍은 핑계를 댔다.

그런데 딸 아이가 '아빠가 부끄럽다'고 했다. 하필이면 그가 감독해야 할 운수 회사에서 이제는 운수 노동자가 된 오래 전 제자를 만났다. 돈 3000원 때문에 '버스비 횡령'으로 해고될 처지의 제자는 그간 못받은 돈도 돈이지만 억울하다 했다. 두 눈 질끈 감고 살려고 했는데, 그게 맘처럼 쉽지 않다. 아니 애초에 '복지부동'으로 살기엔 그의 피가 너무 뜨거운 탓이 아닐까? 한때 조장풍으로 날렸던 전직 유도 선수에 전직 선생님이었던 근로 감독관 조진갑말이다. 

 

 

적폐 청산의 주역이 된 감사와 근로 감독관 
mbc 주중 미니시리즈는 '적폐 청산'의 시대다. 월화 드라마 < 더 뱅커>가  '대한은행'을 배경으로 '정재계의 카르텔'에 날을 세우더니, 그에 이어 수목 드라마 <특별 근로 감독관 조장풍>은 명성 그룹을 주축으로 미리내 재단, 성도 운수 등 재계의 카르텔을 저격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바로 그 '적폐 청산'의 선봉에 선 당사자들이다. <더 뱅커>가 전직 사격 선수에 별정직 사원으로 은행에 입사한 고지식한 은행원이었다가 행장의 복심으로 감사가 된 노대호(김상중 분)라면, <특별 근로 감독관 조장풍>의 조진갑은 공교롭게도 전직 유도 선수에 의협심이 강해서 선생을 그만 두게 된 공무원 조진갑이다. 

말끝마다 아재 개그를 남발하는 자타공인 썰렁한 아재 노대호나, 전작인 <손 the guest>와의 캐릭터 차별성을 위해 장장 10kg를 찌워서 돌아온 초등학교를 다니는 딸까지 둔 조진갑은 말 그대로 '아재'들이다. 그리고 그저 맡은 바 일을 '충실하게' 해내며 자신의 직업에서 '정년'을 맞이하고 픈 평범한 직장인들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먹고사니즘'의 근원이 된 바로 그 '일'이 그들을 '정의'의 선봉으로 밀어버린다. 

은행의 감사가 회계에서 부터 업무 전반에 걸쳐 '감사'를 하는 일의 성격적 특성으로 부터 그 일을 '제대로' 하는 과정에서 '적폐의 카르텔'과  맞부닥치게 된다면, 조진갑의 직업인 '근로 감독관' 역시 직업적 특성으로 부터 '정의'가 도출된다. 즉, 두 드라마는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해내는 주인공'들을 통해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된 '적폐 청산'이 되기 위해서는 누가 주축이 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근로 감독관이 된 한때 조장풍 선생이던 조진갑 
근로 감독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근로 기준법'에 명시된 내용의 실시여부를 감독 지도하는 고용노동부 소속 공무원이다. 일찌기 전태일 열사가 스스로의 몸을 불태우며 '근로 기준법을 지켜라'고 한 게 1970년, 하지만 이 근로 기준법의 실시 여부를 감독 지도하는 공무원인 근로 감독관은 드라마에서 그린 대로 과도한 업무에 밀려, 또한 '갑'인 업주가 가진 '재력'의 위세와 권능에 밀려,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기에는 늘 역부족이라 평가받는 직업이다. 이 직업을 가진 공무원들이 '일'을 제대로 했다면 우리 현대사의 구비구비을 채운 그 수많은 쟁의와 투쟁들은 없었을 것이다. 

바로 그렇게 '법'과 그 직업의 현실의 행간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진갑의 후배 이동영(강서분 분)의 말처럼 자긍심보다는 자괴감이 앞서는 직업, 안타깝게도 '복지 부동'과 '무사 안일'을 모토로 하여 6년을 버티던 조진갑 역시 그런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딸은 부끄럽다고 하고, 그것도 어떻게 눈을 질끈 감아보려 했는데, 6년 전 그로 하여금 선생직을 그만두게 했던 그 사건의 피해자 선우(김민규 분)가 체불 임금 노동자로 그의 앞에 나타났다. 

<특별 근로 감독관 조장풍>은 '실화'에서 부터 출발한다. 현금 승차 승객이 낸 3100원으로 인해 해고를 당하게 된 버스 기사의 사연, 거기서 부터 주인공 조진갑과 선우의 만남이 시작된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6년전 유도 선수 출신으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 선도에 앞장서던 조 선생이던 시절, 선우는 학교 이사장 아들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다, 그만 손에 잡힌 시멘트 블럭을 휘둘러 학창 시절을 미처 다 마치지 못하게 된 조선생의 아픈 손가락이다. 

 

 

2015년 학창 시절 좀 놀았다던 엄마의 사연과, 이제는 고등학생이 된 그 딸의 겪는 교육의 문제를 '과거'의 사연과 현재의 사건을 절묘하게 직조하여 '교육 문제'에 '메스'를 들이댔던 김반디 작가는 <특별 근로 감독관 조장풍>을 통해 다시 한번 '과거'가 매개된 현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 적폐'에 날카로운 비판의 칼을 들이댄다. 

명성 학원이라는 사학 재단을 중심으로 왕따를 선동했던 재단 이사장 아들과, 그의 하수인으로 불가피하게 폭력을 행사했던 천덕구(김경남 분)과 왕따의 피해자였던 선우, 그리고 그 사건에서 중재하려 애썼지만 그 자신 역시 선생직을 잃게 되며 가정까지 놓쳤던 선생 조진갑의 '과거 악연'은 이제 명성 그룹이라는 재계 카르텔과 그 계열사 상도 여객에서 부당 해고를 당한 선우, 근로 감독관이 되어 선우를 만나게 된 조진갑, 그리고 흥신소 직원이 되어 돌아온 덕구를 통해 새로운 '현재'으로 조우하게 된다. 즉 과거의 해결되지 않은 악연이 결국 부메랑처럼 다시 '현재'의 사건으로 등장하며 '적폐'를 실감케 한다. 

과거 왕따 폭력 사건으로 인해 오지랖에 '욱함'과 '개도 안물어갈 정의감'의 3종 세트로 인해 직업도 잃고 가정도 잃었던 조진갑, 한때 조장풍 선생은 공무원을 준비하며 그 반대의 삶, '복지부동과 무사안일'의 삶을 살겠다 다짐했었다. 하지만 아픈 손가락이었던 선우가 다시 목숨마저 위협을 받는 처지에 이르자, 그는 다시 한번 예의 '욱'을 발동하며 근로 감독관으로서의 오지랖을 펴기 시작한다. 

4회를 마친 <특별 근로 감독관 조장풍>은 이렇게 한때 조장풍이었던 조진갑의 과거를 풀어내며 악연의 역사를 드러내고 성도 운수를 중심으로 미리내 재단을 이끄는 구대길(오대환 분)을 등장시키며 '악의 축'을 구축하고, 그에 대응하여 어떻게든 복지부동하려 했지만 과거의 조장풍으로 돌아간 조진갑의 활약상을 그려낸다. 근로 감독관이라는 '법'의 테두리와, 흥신소 덕구를 활용한 법의 경계를 넘어선 '조력', 거기에 끝내 주먹이 앞서는 조장품의 욱함은 <손 the gust>의 윤화평을 잊게 만드는 김동욱을 비롯한 출연진의 호연과 김반디 작가의 과거와 현재를 종횡무진하는 대본을 절묘하게 풀어내는 박원국 피디의 적절한 조율로 선배 <더 뱅커>을 훌쩍 넘어 월화 드라마의 강자로 등극할 기세다. 

by meditator 2019. 4. 10. 05:33

깡마른 몸, 창백한 피부, 이마에 칼자국같은 흉터까지 있는 11살 소년은 고아다. 위압적인 이모부와 냉정한 이모 슬하에서 짖궃은 사촌들에게 시달리며 계단 및 벽장에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그렇게 희망이 없던 소년에게 어느 날 찾아온 한 장의 초대장, 보잘 것없던 소년은 하루 아침에 '마법 학교'의 촉망받는 학생이 되어 '세계'를 구하게 된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가난한 소년, 그에게 찾아온 '마법'과도 같은 행운은 일찌기 <소공자>, <소공녀> 이래 고전적 클리셰이다. 이 '고전'적 서사는 시대에 따라 다른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되어왔다.  마술 지팡이와 함께 찾아왔던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물체를 공중에 띄우는 마법 주문)' 마법을 소환하여 한 시대를 호령하더니 이제 아예 '히어로'로 변신시킨다. 바로 <샤잠>이 그 주인공이다. 

 

 

그런데, 히어로가 된 소년이 어쩐지 새로운데 새롭지 않다. 바로 마블의 막강 소년 히어로 <스파이더 맨>이 있기 때문이다. 이모 할머니와 혹은 이모와 둘이 사는 고아 소년에, 그다지 넉넉치 않은 가정 형편까지 <샤잠>의 빌리와 <스파이더 맨>의 피터 파커는 비슷하다. 그렇게 비슷한 처지의 두 소년에게 찾아온 뜻하지 않은 '마법같은 기회'를 통해 히어로로 성장하는데 어째 버전과 장르가 달라진다. <스파이더맨>이 다양한 시리즈를 통해 성장 서사를 넘어 마블의 주인공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면, 덩치만 큰 어른이 되어버린 빌리와 그의 가족(?)들은 어쩐지 <파워레인져스>나, 디즈니 아동물인가 싶은 '동화의 세계'에 여전히 천착해 있는 듯하니, 그 세계에 어우러지기 위해서는 <파워 레인져스> 정도에 열광했던 시간으로의 역주행은 필수적일 듯싶다. 

히어로 간택의 바늘 구멍을 통과한 소년
<샤잠>의 시작은 뜻밖에도 '빌런'으로 부터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히어로의 선택, 그 멀고도 어려운 길에 대한 이야기로 부터다. 아빠와 형으로부터 사사건건 무시당하는 어린 소년, 형이 비웃던 소년의 장난감은 뜻밖에도 소년을 마법사의 동굴로 데려간다. 히어로가 될 기회를 얻은 소년, 하지만 소년은 뜻밖에도 히어로가 될 기회인 마법사의 지팡이 대신 악의 구슬에 현혹되는 바람에 기회를 잃는다. 그리고 그렇게 소년처럼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유행병처럼 마법사에게 소환당한다. 마법처럼 찾아올 행운에 자신을 걸고 싶었던 소년, 하지만 마법사에게도 팽당하고, 사고를 당한 아버지와 형이 그걸로 더 자신을 무시하자, 소년의 '자괴감'은 그를 '빌런'으로 성장케 한다. 이미 그 소년은 악의 구슬을 손에 넣기 이전에 '빌런'으로서의 필요 조건을 갖춘 것이다. 

 

 

물론 또 다른 '악'의 가능성을 가진 소년도 있다.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간 놀이 동산에서 엄마가 따서 준 나침반을 가지고서도 길을 잃었던 아이 빌리(애셔 엔젤 분), 그는 시간이 흘러 청소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나침반을 가지고 길을 잃은 어린 아이의 상태에서 성장하지 않은 채 '엄마'를 찾아 헤맨다. 덕분에 벌써 몇 번째나 위탁 가정에서 '파양'된 형편. 그런 그에게 새로운 위탁 부모가 나섰다. 하지만 빌리의 달아난 마음에 새 부모와 형제들이 들어올 틈은 없다. 심지어 같은 방을 쓰는 프레디(잭 딜런 그레이져 분)의 소중한 물건을 자신의 도망 비용으로 쓰기 위해 슬쩍할 정도다. 그래도 프레디가 친구들에게 괴롭힘당하는 건 두고 보지 못했던 빌리, 아니 그 와중에 등장한 '엄마'란 단어가 빌리의 상흔을 건드렸다.  

두 악동을 피해서  탄 지하철에서 빌리는 늙고 지친 위자드가 기다리는 히어로의 공간으로 순간 이동을 한다. 꼭 빌리여서라기 보다 이젠 더는 진짜 히어로가 될 인물을 기다릴 시간이 없어 허겁지겁 '솔로몬의 지혜, 헤라클레스의 힘, 아틀라스의 체력, 제우스의 권위, 아킬레스의 용기, 머큐리의 스피드까지 신들의 능력을 총망라한 '샤잠'의 능력을 빌리는 계승하고 빨간 쫄쫄이 의상의 어른 '샤잠'이 되어 돌아온다. 

 

 
소년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아마도 <샤잠>에서 가장 돋보이는 지점은 바로 어른이 되어버린 소년의 해프닝일 듯하다. 거미에 물렸다던가 본의 아니게 히어로가 된 주인공들은 저마다 과도기적 통과 의례를 겪는다. 자신에게 들이닥친 '힘'에 대한 경이, 천착을 넘어 자아 성찰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힘을 뽐내기 위해 무리수를 두다, 힘의 무게, 혹은 힘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깨닫게 되며 본격적으로 히어로로 거듭나게 된다. 

<샤잠> 역시 다르지 않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  <스파이더맨>과 같은 소년 영웅들보다 한 발 더 '치기'의 세계로 빠져든다. 이른바 '중2병'의 전형적 캐릭터로 등장했던 빌리는 그 거침없는 캐릭터답게 자신이 가진 힘을 청소년의 호기심을 만끽하는데 우선 소용하며 b급 코믹 버전으로 넘어선다. 성인의 몸을 얻은 효과를 누리기 위해 '어른'들만이 갈 수 있는 곳, 어른만이 살 수 있는 것을 해본다던가  등등, 그러다 자신의 힘을 온라인에 시리즈로 올리는 것에서 한 술 더 떠서 사진을 찍어주며 돈을 받는 등 '무리수'의 경지에 이른다.

그러다 엇나간 그의 힘이 고가도로를 달리던 버스의 추락 사고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히어로'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며 '위기'를 모면한다. 이 장면은 흡사 <스파이더 맨>에서 히어로로서의 활약을 하려다 외려 카페리호를 두 동강 내고만 씬과 비교된다. 자신이 가진 힘의 사회적 여파에 대해 '자각'의 계기이지만 두 씬의 무게감은 다르다.  '아이언맨'같은 아저씨와  빌리 못지 않은 프레디라는 친구의 충고의 무게감의 차이를 차치하고서라도. 히어로라는 책임감을 애썼던 소년과 아직 자신의 힘 자랑에 천착한 소년의 자각의 무게는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빌리의 질풍노도와도 같은 히어로 입문식을 종식시키는 건 강력한 빌런의 등장이다. 몸은 샤잠이지만 여전히 청소년의 유아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빌리를 닥터 샤데우스는 성급하게 히어로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거기에 그가 마음을 열지 않았지만 본의 아니게 한 가족이 되어버린 위탁 가정에 들이닥친 위기가 '빌리'를 본격 히어로의 세계로 등을 떠민다. 

 

 

그런데 영화는 샤잠과 닥터 샤데우스라는 두 힘의 대결이지만, 그 안의 내용으로 치자면 '성장하는 소년'과 '퇴행한 소년'의 싸움이다. 엄마를 찾기 위해 그토록 여러 가정을 전전했던 소년 빌리는 버스를 추락시키고서도 자각하지 못했던 자신의 존재를 엄마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돌아갈 곳을 찾는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가족들의 존재를. 반면 닥터 샤데우스는 이미 '닥터'가 될 정도로 부와 능력을 가진 '어른'이 되었으면서도 자신이 가진 힘을 제일 먼저 '가족'을 제거하는데 쓰듯 '퇴행적이며 유아적인 자아'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해리 포터>나 <스파이더맨>이 마법이나 자신에게 들씌워진 마법같은 능력을 통해 '사회적 자아'로 성장해 가는 것과 달리, <샤잠>은 '가족'이란 구심점으로 회귀한다. <샤잠>은 히어로물이지만, 히어로물을 기대하고 간 사람들 중 다수가 기대를 내려놓게 된 이유가 바로 이런 훈훈한 '가족주의'적 구성에 있지 않을까 싶다. 엄마, 아니 엄마로 대변된 가족이 그리웠던 소년 빌리는 결국 '샤잠'이라는 마법과도 같은 능력을 통해 '가족'을 얻었다. 그의 히어로로서의 본격적인 도약은 다음 편을 기대해야 할 듯하다. 

빌리를 비롯한 모두가 히어로로 거듭난 서사는 한 편에서 보면 빌리가 그러했듯 온갖 그리스 영웅적 신들의 이름을 모아 만든 호칭이 무색하게 영웅 설화의 숭고함 따위를 벗어난 반영웅적 해석이라는 측면에서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막상 스크린에 등장한 다수의 샤잠들은 본 관객에게 다가온 것은 그러한 '누구나 히어로가 될 수 있다'는 영화의 의도보다는 <파워 레인져스>의 재현같은 치기어린 설정으로 헛웃음을 짓게 만들고마는 히어로들의 탄생 역시 <샤잠>의 소박함에 한 몫을 하고 만다. 

그나저나 이 시대에 몸도 마음도 가난한 소년들을 위로하는 건 '판타지'밖에 없는 것일까? 

by meditator 2019. 4. 9. 04:30

섬, 사월의 바람은 / 수의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들의 울음같은 것,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중략)
섬은 오래전부터/ 통풍을 앓아온 환자처럼, 다만/살같을 싸다듬는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 (이하 생략)  -바람의 집, 이종형 

제주도는 전국민적인 관광지이다. 최근에는 '올레' 길이 각광을 받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제주를 찾고 있다. 그런데 제주의 마을 구비구비를 찾아드는 올레 길, 그 마을들, 특히 북제주쪽 마을들의 초입에서 만나게 되는 건 죽은 이들의 명패, 놀러온 관광객들이 밟고 지나서는 그 땅은 70여 년 전 그 마을 사람들의 피로 물든 땅이었다. 

 

 

2018년 10월 18일 휠체어를 타고 지팡이를 짚고 부축을 받으며 평균 연령 90세인 18명의 노인들이 제주 지방 법원에 들어섰다. 수용인 명부가 있을 뿐 이제는 기록조차, 아니 그 당시에도 기록조차 남기지 않았던 군사 재판을 통해 국방 경비법 위반에서 부터 내란죄까지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옥고를 치뤘던 이들의 재심 재판이 있던 날이었다. '죽기 전에 명예를 회복시려 달라'라며 절박한 호소에 대해 재판부는 '공소 기각'으로 답했다. 

세월도 덮을 수 없는 이들의 억울함, 아니 억울함조차 호소하지도 못한 채 죽어간 사람들, 과연 70여 년 전 제주에선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ebs 다큐프라임은 생존자 5인의 증언과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를 토대로 제주 4.3 사건을 '재연'한다. 배우 고두심의 나레이션과 제주도의 방언을 그대로 살려낸 입말의 생생함을 더한 '재연드라마' <바람의 집>을 통해 해방 공간 제주의 비극이 되살아 난다. 

 

 

들끓는 민심, 그리고 한라산 무장대와 서북 청년단 
1947년 이제는 아흔이 넘은 부원휴 옹 등은 당시 중학생이었다. 한 마을에서 중학교를 보내는 집이 몇 안되던 시절의 중학생, 중학교를 졸업하면 서울로 올라가 출세를 하겠다는 꿈에 부풀던 시절이었다. 3월 1일 여느 때와 같이 학교로 향하던 부언휴 학생은 당시 제주시의 중심이었던 관덕정을 중심으로 '신탁 통치 반대', '미국 과자 반대' 등의 슬로건을 내건 가두 시위 행렬을 목격한다. 시위대열을 지켜보는 것도 잠시 오후 2시 45분 경찰의 발포로 거리는 아비규환으로 변한다. 기마 경찰과 시위대열이 뒤엉키며 발생한 소요에 대한 경찰의 발포로 아이를 업은 엄마, 어린 학생 등 6명이 희생이 된 것이다. 이에 대해 경찰은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발포라 해명했지만 이는 외려 민심을 들끓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947년 3월 10일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에 해당하는 166개 기관 4만 명의 사람들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런 제주도민의 궐기를 남로당의 선동으로 몰고갔다. 이들을 색출하기 위해 서북 청년단이 바다를 건너왔다. '공산주의 박살내고 통일 조국 건설하라'는 과격한 반공주의를 내세운 단체, 북에서 부모와 재산을 잃고 홀홀단신 내려온 이들은 경찰, 경비대 작전에 가담하여 무자비한 '좌익 사냥'에 앞장섰다. 선거를 앞두고 단독 선거에 대한 국민적 불만을 조속히 정리하고자 하는 정부와 미군정의 의도가 서북 청년단의 횡포와 폭거를 조장했다. 

이렇게 경찰의 가혹한 수색과 탄압이 계속되며 제주도의 좌익 세력은 위기를 느낀다. 이에 한라산에 은신해 있던 무장대는 4.3일 '전국민이여 궐기하라', '단독 선거 결사 반대'를 주장하며 오름에 봉홧불을 올리고 화북면 경찰지서 등 12개 경찰서를 습격하고 경찰과 우익 인사를 공격, 이 과정에서 12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2명이 행방 불명이 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전국에서 선거가 실시됐다. 전국 평균 투표율 95.5%, 하지만 제주도 전체 투표율은 62.8%, 그 중에서도 북제주는 46.6%로 과반수에 미달, 제주도 세 개의 선거구 중 두 개가 무효화되었다. 전국의 선거구 중 유일하게 5.10 단독 선거를 '보이코트'한 지역이 되었다. 단독 선거를 반대한 후폭풍은 거셌다.

 

 

배반의 땅 제주, 가혹한 댓가 
제주도가 공산주의자에 의해 점거되어 조속한 진압 작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정부와 미군정은 부산, 대구, 여수의 3개 대대 병력을 증파했다. 10월 17일 포고령이 내려졌다. 해안선으로부 부터 5km이상 들어간 중간산 지역의 통행이 금지되었으며 지역 주민들의 소개령이 내려졌다. 

11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잔혹한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었다. 11월 중순부터 해가 바뀐 다음 해 2월까지 중간산 마을을 불에 탔고, 남아있던 주민들은 학살되었다. 해안에 피신한 주민들 중에도 무장대의 가족이란 이유로, 혹은 무장대를 도왔다고 즉결 처분의 대상이 되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 갈곳없는 사람들, 밭고랑에 시체가 수북했고 피가 흥건했다. 이런 포악한 진압 작전으로 인해 주민들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산으로 도망치려 했고, 그럴 수록 작전의 애꿏은 희생자는 늘어만 갔다. 4개월 동안 중간산 지역의 마을 95%가 방화로 소실되었고, 1949년 6월까지 10,761명이 희생되었다. 이들 중 10% 이상이 노약자였다. 2만5천에서 3만으로 추정되는 제주도민의 8분의 1에 해당하는 희생되었다.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폭도'로 체포되었다. 

 

 

그렇게 폭도로 체포된 이들에게는 가혹한 고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장대에 쌀을 조금 준 것 밖에 없다는 호소에도 경찰과 서북 청년단은 전깃줄로 묶어 감전을 시키고, 오물을 먹이며 무장대를 불으라 했다. 포승줄에 묶어 산지축항(제주항)을 통해 육지로 호송되던 이들은 정식 재판도 거치지 않고 증인이나 증거도 없이 내란죄 등의 죄를 물어 징역 1년에서부터 7년의 판결이 내려졌다. 바로 2019년에서야 '공소 기각'이 된 그 판결이다. 

 

 

이제는 아흔이 넘거나 아흔 줄의 조병태, 박내은, 박동수, 부원휴 등 당시를 증인이 된 이들은 70년의 세월 동안 그 '내란'의 족쇄를 지고 살아왔다. 제주도에서 드문 중학생이 되어 뽐내던 소년, 서울로 올라가 출세하겠다던 포부를 지녔던 아이, 심지어 외삼촌이 선거 위원이란 이유만으로 무장대에게 죽임을 당한 가족,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라며 집에서 식구들과 밥을 먹다 자신의 눈 앞에서 형과 형수가 죽임을 당하는 걸 지켜봐야만 했던 동생, 이 평범했던 제주도민들이 무차별적인 초토화 작전 와중에 가족과 세월을 잃었다. 7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내려진 사건번호 2017의 '공소 기각', 그러나 4.3 희생자들은 여전히 '명예 회복'의 길이 이제 첫 삽을 떠졌을 뿐이라며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로써 제주 4.3에 대한 제대로 된 규명이 끝까지 이루어 져야 한다 주장한다. <ebs 다큐 프라임- 바람의 집> 2부작은 민간인 희생자였던 증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공권력의 폭압과 희생이라는 측면을 부각시키고자 노력했다. 


by meditator 2019. 4. 5. 13:57

70주년을 맞이한 제주 4.3 추념식에는 뮤지컬 <화순 칸데라 1946>가 초대 받았다. 왜 제주에 '화순'의 이야기가 담긴 뮤지컬이? 이에 대해 제주 4.3 추념식 본부는 '화순 광부 학살 사건'으로 기억되는 화순 10월 항쟁이야 말로 4.3 이전의 4.3, 4.3의 시작이라 정의를 내렸다. 왜 '화순 사건'이 4.3의 시작인 것일까? kbs1에서 <특집 다큐 화순 칸데라 1946>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화순에 해방은 어떻게 왔는가?
해방 무렵 전남 화순 지역에는 남한에서 세번 째로 큰 탄광이 있었다. 수 천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터전을 일구며 살던 이 곳에도 해방은 찾아왔다. 일제가 남기고 간 탄광, 노동자들은 '자주 관리' 체계를 통해 나라의 석탄 자원을 원활한 공급을 위해 노력했고, 나아가 노동조합 조직인  '전국 평의회'가 이의 관리를 이어 받았다. 해방된 나라의 노동자가 할 일은 열심히 '생산'하는 것이라는 모토 하에 의기투합한 노동자들, 일제 강점기 2500여 노동자가 한달 기준 7,8000 천 톤 정도를 생산하던 석탄을 1300여 노동자가 13000톤을 초과 생산하는 획기적인 생산 증가의 기적을 일구어 냈다. 

하지만 그 '기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45년 10월 일본군 대신 동남아시아에서 실제 전투에 참가했던 보병 부대가 '또 다른 점령군'으로 능주 초등학교에 주둔했다. 왜 '능주'였을가? 능주 치안대가 미처 후퇴하지 못한 채 오합지졸이 된 일본군에 대해 무장 해제한 일 등으로 '미군'은 이 '화순' 지역을 관심 지역, 혹은 위험 지역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앞서 1945년 10월 일본이 남긴 재산, '적산'은 조선 군정청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발표했던 미군, 당연히 '화순 탄광'처럼 우리가 스스로 '관리'에 들어간 공장, 탄광 등에 대해 '불법'으로 여겼다. 1945년 11월 미군은 탄광 접수를 공표했고, 노동조합 간부들에게 24시간 이내 떠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임금 투쟁 등을 할 시 5년 이상의 징역형을 살게 될거라 협박하며, 인원 감축을 핑계로 100 여 명을 해고했다. 

이러한 미군의 태도는 당시 미군정청의 책임자로 부임한 하지 장군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 당시 남한을 '불만 대면 터질 화약통'이라며 '자신이 지금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의 가장 자리에' 있다는 식의 표현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당연히 노동자와 노동 조합은 반발한다. 해방 후 비로소 우리의 나라, 우리의 공장이라는 '해방 공간'이 하루 아침에 '또 다른 점령군'에게 빼앗기게 생긴 것이다. 이에 1946년 2월 '최저 생활 확보 임금제를 실시하라' 등을 내걸고 싸웠다. 

해방 1주년,  피로 물든 너릿재 
그렇게 싸움을 지속해 나가던 중 1946년 8월 해방 1주년이 다가왔다. 화순 탄광의 노동자들은 광주에서 열리는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너릿재'를 넘어가고자 했다. 탄광 노동자와 아이를 등에 업은 엄마와 아이들까지 1000 명이 '해방'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광주로 향하는 대열, 미군과 경찰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총검 등으로 이 대역을 저지, 30 여 명이 '머리가 잘리는' 등의 학살을 당하고 500 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런 미군과 경찰의 무차별적 탄압에 맞선 화순 탄광의 노동자들의 투쟁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자신들의 탄광이었던 그곳에 '일본의 앞잡이'였던 이들이 다시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는 그런 '해방 이전'의 상황을 그 누구라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점령'이 되어버린 '해방'을 수긍할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거기에 더해 당시의 심각한 식량 사정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더울 불살랐다. 미군은 통치를 시작하며 일제가 하던 '쌀 공출' 제도를 폐지했다. 자신들의 자본주의적 방식에 맞춰 쌀의 자유 시장화를 위해 1945년 10월 '조선 미곡 자유 판매'를 실시했다. 대혼란이 빚어졌다. 당시 자유 시장 제도에 부응할 수 있었던 건 일제에 협력했던 대지주나, 중급 이상의 지주, 미곡상들 뿐이었다. 거기에 더해 매점매석이 이루어졌다. 몇 개월 만에 쌀값이 두 배 이상 폭등했다. 결국 미군은 다시 공출, 배급제로 회귀했지만 <뮤지컬 화순 칸데라 1946>의 ' 네 홉 주던 걸 세홉으로 줄이다니, 하루도 못버틸 양으로 닷새를 버티라니, 배때지에 들어오는 것이 없으니 못살겠어'라는 대사처럼 이번에는 배급량이 문제였다. 

농민이든, 노동자이든 그 누구라도 이런 식이라면 당장 굶어 죽을 것같다는 절박함으로 '쌀을 달라'며 노동조합 탄압을 규탄하며 1946년 10월 다시 광주로 향해 나섰다. 그리고 이런 화순의 10월 항쟁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그 들불의 최종 귀착지는 제주도였다. 

1946년 11월 4일 3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을 당했고 화순 탄광 폐쇄령이 떨어졌다. 6일에는 75명의 노동자가 체포되고, 11일에 경찰서를 공격하던 노동자들 중 3명이 사망했다. 결국 46년말 화순 탄광을 중심으로 했던 노동자들의 투쟁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일군의 노동자들이 산을 향했다. 그들은 화순 주변 지역 산에 '웅거'하여 '화탄 부대'가 되었고, 이들이 바로 빨치산의 시초라 추측된다. 또한 부모를 잃은 아이들도 산으로 가 '소년 부대'가 되었다. 결국 조정래의 대하 소설 <태백산맥>을 통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난 빨치산,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자신들의 자본주의를 섣부르게 이식하려 했던  '점령군' 미국이었다. 

 

 

서울대의 정근식 교수는 화순 탄광 노동자들의 투쟁을 촛불 항쟁에 비유한다.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을 메웠던 사람들이 과연 모두 좌파였을까? 마찬가지다. 1987년 시청 앞 광장을 메웠던 넥타이 부대는 어떤가? 이런 정부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며 촛불을 들고 나선 사람들처럼 아마도 1946년 너릿재를 넘던 노동자, 농민과 그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 마음이 아니었겠느냐는 것이다. 어떤 사상, 이즘에 앞서 해방된 나라를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 가고 싶었던 마음, 자신들의 권리를 존중받고 싶었던 마음, 먹고 살게 해달라는 생존의 절규가 바로 너릿재 고개를 넘던 대부분의 이들의 마음이 아니었냐는 것이다. 

화순, 그리고 이어진 여순, 그리고 제주 4.3까지 우리의 역사는 그 모든 것을 묻어 버렸다. 2009년 자신의 큰아버지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바탕으로 오봉옥 시인이 <붉은 산 검은 피>를 통해 비로소 역사의 행간에 묻혔던 화순 사건이 드러났다. 그러나 오봉옥 시인은 '이적 출간물 출간'으로 인한  '국가 보안법' 실형을 살아야 했다. 이제 4.3 70주년을 경과한 시간, 늦었지만 우리 사회가 이제라도 좀 더 나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 역사의 행간 속에 묻혀져 있던 비극의 역사를 제대로 복기해 내야 할 것이다. 


by meditator 2019. 4. 3. 06:03

2003년 개봉된 영화 <언더 월드>는 지상 세계를 차지한 뱀파이어와 그들에 의해 지하 세계로 밀려난 늑대 인간의 끝나지 않는 전쟁을 그리고 있다. 같은 선조 코르니누스로 부터 시작된 후손들,  하지만 박쥐와 늑대를 통한 유전학적 변이로 인해  그들은 서로 달라졌고, 그 다름은 곧 '전쟁'의 이유가 되었다. 이렇게 고전적 뱀파이어와 늑대 인간이라는 설화적 콘텐츠를 통해 지상과 지하로 이분화된 세계를 상징했던 <언더 월드>의 2019년 판은 '설화'에서 부터 '과학'으로 그 수단이 변경된다. <어스>는 자막으로 부터 시작된다. 미국 대륙 아래 수많은 땅굴들이 파헤쳐져 있는데 그 중에는 용도가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 있다고. 땅굴? 하는 의문도 잠시, 관객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시끌벅적한 놀이 공원을 지나 유령의 집에서 벌어지는 은밀하고도 숨막히는 서스펜스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공포 영화 그 자체만으로도
<어스>를 보고 나오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영화 속에서 풍성하게 제시되는 갖가지 상징 체계들로 인하여 조던 필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를 독해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어스>가 영리한 영화인 것은 물론 더 풍성하게 영화를 보기 위해서라면 영화 후일담이 필요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그저 공포 영화로서의 '스릴'과 서스펜스', 그 자체를 만끽할 수 있도록 영화가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릴'과 '서스펜스'의 출발점은 무엇일까? 개체로서의 나, 그리고 나아가 집단으로서의 나에 대한 위기와 전복의 불편함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삶 자체가 유동적임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정착하고 뿌리내리고 싶어하는 지속적인 갈망 위에서 '정착'을 지향한다. 그 정착의 갈망에 대해 '이반'의 삽질이 시작되는 지점에 바로 '스릴'과 '서스펜스'가 작동한다. 나에 대한 공격, 내 가족에 대한 공격, 그리고 내가 깃든 공간, 즉 집에 대한 공격은 곧, 삶에 대한 위기로 이어진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렵게 내가 일군 것들에 대한 공격은 그 어떤 공포보다 크게 다가온다. 최근 공포 영화들에서 '집'이란 공간이 배경으로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관객들이 보기엔 어리석을 정도로 그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집착'으로 공포를 추동해 나가고 그런 '집착'에 지점에 대한 영리한 공격에서 바로 '공포'는 극대화되어간다. 

 

 

<어스> 역시 바로 그 지점에서 공포가 시작된다. 어린 시절 공포의 집에서 어떤 일로 인해 실어증을 겪었던 애들레이드(루피타 뇽오 분), 하지만 이제 사춘기의 딸과 장난꾸러기 아들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여름 별장으로 휴가를 떠나는 어엿한 주부가 되었다. 남편이 산 낡은 보트, 딸이 포기한 육상, 아들의 어이없는 장난 등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처럼 넉넉한 중산층 가정의 여유로운 소음과도 같다. 어릴 적 '사건'이 났던 산타크루즈 해변에 대한 찜찜함을 지울 수 없지만 가족이 좋다면야 엄마는 자신의 불편함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일상의 잡음, 소음들은 그 날 밤 이 가족을 찾아온 의문의 일가족들 앞에는 그야말로 새발의 피 수준이다. 저마다 가위를 들고 다짜고짜 애들레이드 가족의 별장에 쳐들어온 가족, 놀랍게도 그들은 스스로 주장하는바 애들레이드 가족의 그림자, 도플갱어들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영화는 애들레이드 가족으로 말미암아(?) '지하 생활'을 했다는 그림자 애들레이드 가족의 '복수극', 탈환극에 대항한 애들레이드 가족의 처절한 생환기로 이어진다. 

 

 

일방적인 공격에서, 적들의 빈틈을 노린 기지로 회생하는 가족들, 그리고 자신들을 공격했기에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처절한 보복, 그리고 우역곡절 끝에 다시 한번 위기를 겪으며 끝내 가족의 완벽한 생환, 하지만 과연 '우리' 가족은 여행을 떠나던 그 '가족'이 맞을까 라는 의혹의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는 엔딩까지, <어스>는 잘 짜여진 가족 스릴러의 성공적인 전형을 따라간다. 즉 영화가 풍성하게 자아내고 있는 갖가지 상징적 기호들을 굳이 독해하지 않더라도 스릴러 영화로서의 '재미'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어스>는 조던 필 감독의 이전작 <겟 아웃>의 흥미롭고 신선한 구성의 계보를 따른다. <겟 아웃>이 순진한 흑인 청년에게 닥친 뜻밖의 위기라는 모티브를 충실하게 풀어내며 새로운 공포 영화로서 관객들에게 '호평'의 불을 지펴갔듯이, <어스> 역시 평화로운 휴가 길에 나선 한 가족에게 들이닥친 '도플갱어'들의 공격이라는 흥미로운 요소만으로도 충분히 '볼 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어스, 그 풍부한 상징
하지만 이미 <겟아웃>을 통해 미국 내 흑백 갈등을 절묘한 상징을 통해 풀어낸 조던 필 감독에게 열광한 바 있었던 관객들은 애들레이드 가족을 찾아온 지하 세계의 그림자 가족들에 대해 해석을 더한다. 

'we are the world', 'amrica is beautiful'이란 슬로건 아래 굶주린 이들을 위한 기금 모금을 위해 이루어 졌던 산타모니카 해변을 비롯 미국 전역에서 이루어진 인간 사슬 만들기, 하지만 <어스>는 그 '우리'라는 미국이, 세계가, 아름답다는 아메리카가 사실은 차별적 구조로 이루어진 사회임을 드러낸다.  휴일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놀이공원에서 여유를 즐길 때, 그와 똑같은 모양을 한 지하의 사람들은 같은 모습, 다른 행태의 서글픈 삶을 보여준다. 그저 그들이 '복제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하지만 영화는 그 '복제 인간'의 구분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주인공에게 '트라우마'로 기억(?)되는 과거의 진실을 통해 고발한다. 마치 <겟아웃> 속 늙은 백인들이탐한 건강한 흑인들의 육체처럼 구획과 구분, 차별의 무의미함을 통렬하게 꼬집는다. 

여기서 조던 필 감독은 그러한 인간과 복제 인간이라는 차등적 구도를 낳은 이유로 '무차별적인 과학 실험'을 든다. 복제 인간이 지상으로 뛰쳐나간 지하의 공간에서 철장을 벗어나 산발적으로 널려진 토끼들, 그들이 복제 실험의 희생양이듯, 토끼로 부터 시작된 인간들의 무차별적 실험은 결국 같은 '인간'으로 귀결되었다는 '묵시록'적 세계를 감독은 펼쳐 보인다. 

이러한 감독의 인식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본주의 문명을 초래한 원인이 '과학 기술의 발달'에 있음에 대한 예리한 인식으로 부터 기인한다.  1차 산업 혁명, 2차 산업 혁명, 그리고 3차, 나아가 4차 까지 인간 사회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과학'의 발달을 추동하고, 그에 기반하여 자신의 문명들을 업그레이드 해왔다. 하지만 그런 문명이 안타깝게도 '인간 사회의 수평적 구조'에 이바지 하는 대신 되풀이 되는 수직적 위계 구조의 재생산으로 귀결되어 왔다는 감독의 인식이 영화 속 복제 인간과 인간의 차별적 구조로 나타난다. 

 

 

영화 속 복제 실험의 결과물로 등장한 '도플갱어들이 꾸린 장대한 해방의 대열은 <겟아웃>의 흑백 차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가진 자와 못 가진자에서부터 혹은 토착민과 외래인, 그리고 사회 내의 갖가지 차별화된 구조 속 인간들의 상징으로 풍성하게 읽어 낼 수 있다. 그러기에 <어스>의 어스는 우리 가족의 그 us에서 부터, 미국을 상징하는 united states를 넘어 우리가 사는 세계에까지 이르른다. 

<겟아웃>은 상대적으로 우리가 보기엔 편했다. 왜냐하면 바다 건너 아메리카가 품은 역사적 차별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한 발 더 나선 <어스>는 과학 기술 문명에 기댄 인간 사회가 치달아 낸 결과물로서의 차별적 구조에 대한 묵시록적 구조를 드러냄으로써 여기의 우리 역시 그 구조의 일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겟아웃>이 저들의 이야기였다면, <어스>의 그 '우리'는 여기의 '우리'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기에 <어스>가 주는 본질적 공포는 바로 그 영화에서 드러난 묵시록적 세계의 일부분에서 내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점의 불편함으로 도달한다. 나를,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피치못해서를 넘어 거침없이 폭력과 살인을 자행하는 영화 속 애들레이드 가족에 '동일시'했던 시선이 나 역시 그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깨달음으로 향할 때, 어쩌면 나 역시도 '나와 내 것'에 도전하는 그 누군가를 향해서는 '적개심'보다 더한 것을 휘두를 수도 있다는 서늘함이야말로 <어스>가 주는 가장 큰 공포가 아닐까. 

by meditator 2019. 4. 1.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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