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주년을 맞이한 제주 4.3 추념식에는 뮤지컬 <화순 칸데라 1946>가 초대 받았다. 왜 제주에 '화순'의 이야기가 담긴 뮤지컬이? 이에 대해 제주 4.3 추념식 본부는 '화순 광부 학살 사건'으로 기억되는 화순 10월 항쟁이야 말로 4.3 이전의 4.3, 4.3의 시작이라 정의를 내렸다. 왜 '화순 사건'이 4.3의 시작인 것일까? kbs1에서 <특집 다큐 화순 칸데라 1946>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화순에 해방은 어떻게 왔는가?
해방 무렵 전남 화순 지역에는 남한에서 세번 째로 큰 탄광이 있었다. 수 천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터전을 일구며 살던 이 곳에도 해방은 찾아왔다. 일제가 남기고 간 탄광, 노동자들은 '자주 관리' 체계를 통해 나라의 석탄 자원을 원활한 공급을 위해 노력했고, 나아가 노동조합 조직인  '전국 평의회'가 이의 관리를 이어 받았다. 해방된 나라의 노동자가 할 일은 열심히 '생산'하는 것이라는 모토 하에 의기투합한 노동자들, 일제 강점기 2500여 노동자가 한달 기준 7,8000 천 톤 정도를 생산하던 석탄을 1300여 노동자가 13000톤을 초과 생산하는 획기적인 생산 증가의 기적을 일구어 냈다. 

하지만 그 '기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45년 10월 일본군 대신 동남아시아에서 실제 전투에 참가했던 보병 부대가 '또 다른 점령군'으로 능주 초등학교에 주둔했다. 왜 '능주'였을가? 능주 치안대가 미처 후퇴하지 못한 채 오합지졸이 된 일본군에 대해 무장 해제한 일 등으로 '미군'은 이 '화순' 지역을 관심 지역, 혹은 위험 지역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앞서 1945년 10월 일본이 남긴 재산, '적산'은 조선 군정청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발표했던 미군, 당연히 '화순 탄광'처럼 우리가 스스로 '관리'에 들어간 공장, 탄광 등에 대해 '불법'으로 여겼다. 1945년 11월 미군은 탄광 접수를 공표했고, 노동조합 간부들에게 24시간 이내 떠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임금 투쟁 등을 할 시 5년 이상의 징역형을 살게 될거라 협박하며, 인원 감축을 핑계로 100 여 명을 해고했다. 

이러한 미군의 태도는 당시 미군정청의 책임자로 부임한 하지 장군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 당시 남한을 '불만 대면 터질 화약통'이라며 '자신이 지금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의 가장 자리에' 있다는 식의 표현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당연히 노동자와 노동 조합은 반발한다. 해방 후 비로소 우리의 나라, 우리의 공장이라는 '해방 공간'이 하루 아침에 '또 다른 점령군'에게 빼앗기게 생긴 것이다. 이에 1946년 2월 '최저 생활 확보 임금제를 실시하라' 등을 내걸고 싸웠다. 

해방 1주년,  피로 물든 너릿재 
그렇게 싸움을 지속해 나가던 중 1946년 8월 해방 1주년이 다가왔다. 화순 탄광의 노동자들은 광주에서 열리는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너릿재'를 넘어가고자 했다. 탄광 노동자와 아이를 등에 업은 엄마와 아이들까지 1000 명이 '해방'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광주로 향하는 대열, 미군과 경찰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총검 등으로 이 대역을 저지, 30 여 명이 '머리가 잘리는' 등의 학살을 당하고 500 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런 미군과 경찰의 무차별적 탄압에 맞선 화순 탄광의 노동자들의 투쟁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자신들의 탄광이었던 그곳에 '일본의 앞잡이'였던 이들이 다시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는 그런 '해방 이전'의 상황을 그 누구라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점령'이 되어버린 '해방'을 수긍할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거기에 더해 당시의 심각한 식량 사정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더울 불살랐다. 미군은 통치를 시작하며 일제가 하던 '쌀 공출' 제도를 폐지했다. 자신들의 자본주의적 방식에 맞춰 쌀의 자유 시장화를 위해 1945년 10월 '조선 미곡 자유 판매'를 실시했다. 대혼란이 빚어졌다. 당시 자유 시장 제도에 부응할 수 있었던 건 일제에 협력했던 대지주나, 중급 이상의 지주, 미곡상들 뿐이었다. 거기에 더해 매점매석이 이루어졌다. 몇 개월 만에 쌀값이 두 배 이상 폭등했다. 결국 미군은 다시 공출, 배급제로 회귀했지만 <뮤지컬 화순 칸데라 1946>의 ' 네 홉 주던 걸 세홉으로 줄이다니, 하루도 못버틸 양으로 닷새를 버티라니, 배때지에 들어오는 것이 없으니 못살겠어'라는 대사처럼 이번에는 배급량이 문제였다. 

농민이든, 노동자이든 그 누구라도 이런 식이라면 당장 굶어 죽을 것같다는 절박함으로 '쌀을 달라'며 노동조합 탄압을 규탄하며 1946년 10월 다시 광주로 향해 나섰다. 그리고 이런 화순의 10월 항쟁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그 들불의 최종 귀착지는 제주도였다. 

1946년 11월 4일 3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을 당했고 화순 탄광 폐쇄령이 떨어졌다. 6일에는 75명의 노동자가 체포되고, 11일에 경찰서를 공격하던 노동자들 중 3명이 사망했다. 결국 46년말 화순 탄광을 중심으로 했던 노동자들의 투쟁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일군의 노동자들이 산을 향했다. 그들은 화순 주변 지역 산에 '웅거'하여 '화탄 부대'가 되었고, 이들이 바로 빨치산의 시초라 추측된다. 또한 부모를 잃은 아이들도 산으로 가 '소년 부대'가 되었다. 결국 조정래의 대하 소설 <태백산맥>을 통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난 빨치산,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자신들의 자본주의를 섣부르게 이식하려 했던  '점령군' 미국이었다. 

 

 

서울대의 정근식 교수는 화순 탄광 노동자들의 투쟁을 촛불 항쟁에 비유한다.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을 메웠던 사람들이 과연 모두 좌파였을까? 마찬가지다. 1987년 시청 앞 광장을 메웠던 넥타이 부대는 어떤가? 이런 정부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며 촛불을 들고 나선 사람들처럼 아마도 1946년 너릿재를 넘던 노동자, 농민과 그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 마음이 아니었겠느냐는 것이다. 어떤 사상, 이즘에 앞서 해방된 나라를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 가고 싶었던 마음, 자신들의 권리를 존중받고 싶었던 마음, 먹고 살게 해달라는 생존의 절규가 바로 너릿재 고개를 넘던 대부분의 이들의 마음이 아니었냐는 것이다. 

화순, 그리고 이어진 여순, 그리고 제주 4.3까지 우리의 역사는 그 모든 것을 묻어 버렸다. 2009년 자신의 큰아버지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바탕으로 오봉옥 시인이 <붉은 산 검은 피>를 통해 비로소 역사의 행간에 묻혔던 화순 사건이 드러났다. 그러나 오봉옥 시인은 '이적 출간물 출간'으로 인한  '국가 보안법' 실형을 살아야 했다. 이제 4.3 70주년을 경과한 시간, 늦었지만 우리 사회가 이제라도 좀 더 나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 역사의 행간 속에 묻혀져 있던 비극의 역사를 제대로 복기해 내야 할 것이다. 


by meditator 2019. 4. 3. 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