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1일은 임시정부 수립일이다. 임시 정부 100년을 맞이하여 이 날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려 했지만 무산됐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임시 정부'에 대한 '조명'이 활발하게 이루어 지고 있다. 그런데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여 기리고자 하는 '임시 정부'는 제대로 '조명'되고 있을까? 혹시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역사로서의 '임시 정부'는 몇 사람의 역사가 아닐까?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전 의원이 기억하고 있는 임시 정부를 거쳐간 사람들은 어림잡아도 2000 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몇몇 사람의 임시정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과연 저 2000 여 명 중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선열들은 몇 분이나 될까? 바로 이 '기억되지 않은, 하지만 기억해야 할 독립 운동사, 독립운동가'에 대해 삼일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시리즈로 방영되고 있는 <역사의 빛 청년>는 간절하게 문제 제기를 한다. 그래서 시작은 우리의 기억 속에 남겨져 있지 않은 하지만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한 축이었던 '하와이 독립운동'으로 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5부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려면>에서는 '조명하 의사'를 잊혀진 기억에서 떠올린다. 

 

 

일본 육군 대장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의거 
1928년 5월 14일 일본의 지배를 받던 당시의 대만, 구미노미야 구미요시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이자 일본 육군 대장의 환송식이 있었다. 무개차를 타고 환송 인파들 사이를 서서히 지나가던 구미노미야, 그때 인파 가운데에서 뛰쳐나온 청년 조명하가 단도로 그를 찔렀다. 이 사건으로 당시 대만 총독은 해임이 되었고, 결국 구미노미야는 8개월 뒤 복막염으로 사망하였다. 

1905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조명하 의사, 군청 서기로 근무하던 중 1926년 좀 더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야간 학교를 다니며 고학을 하던 중 송학선이 사이토 총독 암살 시도하려 했던 금호문 사건, 나석주의 동양 척식회사 폭파 사건 등을 겪으며 독립 운동에 헌신하고자 마음먹었다. 이에 임시정부로 가고자 했던 조 의사, 상해로 가기 위해 대만에 들러 찻집에서 일하던 중 일본 육군 대장이 대만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척살을 결심했다. 그 자리에서 체포된 조명하 의사는 '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게 한스러울 뿐이며 죽어 저승에 가서도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유언을 남기신 채 10월 10일 타이페이 형무소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꽃보다 할배>에 출연했던 이순재 배우가 조명하 의사를 기리기 위해 대만을 다시 찾았다. 사람들이 아침부터 줄을 서서 먹는다는 맛집 거리, 우리나라에서 대만을 방문한 사람들이라면 빠짐없이 찾는 곳이다. 그런데 그 거리 맞은 편에 조명하 의사의 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대만 여행기를 다뤘던 <꽃보다 할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맛집 거리의 맞은 편에는 타이페이 형무소의 벽이 남아있다. 죽은 미군 병사의 기념비가 있어 길가던 외국인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돌아가신 조명하 의사의 기록은 없다. 

 

 

기억되기 위한 조건 
그 이유를 다큐는 찾아간다. 조명하 의사에 대한 기록은 단 두 장의 사진, 의사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의 끝머리에 늘 태워라라고 덧붙이셨다. 그래서 남겨지지 않은 기록, 기록으로 남겨져야 기억되는 역사에서 자신을 지워야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결의는 역사의 행간 저편으로 흩어지기 십상이었다. '이대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윤봉길 의사의 편지를 받고 윤봉길 의사에 대한 모든 것들을 안방 천장 위에 숨기고, 피란 길에도 품에서 놓지 않았던 윤봉길 의사의 동생 윤남의 씨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윤봉길 의사가 있었듯이 '기록의 소실'이 많은 독립 운동가를 오늘의 우리가 기억하기 힘든 첫 번째 이유이다. 

거기에 더해 왜곡된 기억이 독립 운동가들을 역사 저편에 묻는다. 조명하 의사의 의거 뒤 무려 한 달 만에 대만 일일신보는 조명하 의사의 의거를 다뤘다. 하지만 내용은 딴 판이었다. 모르핀 중독자, 세상을 비관하여 자살을 결심하고 충동적으로 사건을 벌였다는 식이다. 이봉창 열사의 의거를 취업이 어려웠다는 식으로 폄하했던 그 방식이다. 이러한 '의도를 가진 역사의 왜곡'의 여파는 길다. 대만 타이중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조명하 의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김상호 교수는 오늘날 대만 만 역사 사전에 여전히 일본의 왜곡된 기사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는 것을 통해 대만에 대한 안정적 통치와 자국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지키려 안간힘을 썼던 일본의 저열한 정책을 복기한다. 

 

 

재조명에 성공한 독립 운동가의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우당 이회영 선생이다. 남겨진 사진은 겨우 두 장, 기록도 없이 은밀하게 활동했던 이회영 선생, 그런 이회영 선생에 대한 기록을 부인 이은숙 여사의 수기 <서간도 시종기>가 되살려 냈다. 그리고 이회영 선생을 받들었던 후배 독립 운동가들의 증언도 더해졌다. 

그렇다면 조명하 의사에게는 후손이 없었을까? 아니 후손이 있다. 단지 저 멀리 호주 시드니에 있다. 얼굴도 몰랐던 아버지, '이게 네 아버지의 유골이란다'는 어머님이 보여주신 유골로 만난 아버지를 우리 사회가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아들 조혁래씨는 선양 사업에 뛰어들었다. 1988년 10월 10일 서울대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시달림은 심각했다. 감사 계통 사람들에게 뇌물까지 줘야 했다. 아들이 못나서 아버지를 큰 사람을 못만들어 드렸다는 죄책감만을 짊어진 채 조혁래씨는 눈을 감았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남은 가족들은 이렇게 고생하는데,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이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건가 라는 자괴감을 안고 손자는 조국을 떠났다. 

왜 똑같이 독립 운동을 하셨는데 기억되는 분들과 그렇지 못한 분들이 계실까? 여기엔 '시대적 변화'라는 외인도 무시할 수 없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했다. 윤봉길 의사의 후손은 수교 이전에도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홍커우 공원에 기념관을 세우고자 했다. 중국 정부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국교가 정상화되자 윤봉길 의사의 흉상이 세워지고 기념관이 만들어 졌다. 수교 이후 이회영 선생에게는 중국 정부가 발행하는 유공자 증서인 '혁명 열사 증서'가 수여됐다. 가족들도 몰랐는데 중국 정부가 나서서 이회영 선생이 돌아가신 여순 감옥에 안중근,  신채호 선생과 함께 이회영 선생의 기념관을 만들어 줬다. 반면 동시에 그간 수교 상태에 있었던 대만과 단교 상태가 되어 버렸다.  대만의 입장에서는 우리 나라가 대만을 버린 셈이 되어 버렸다. 조명하 의사는 배신자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 된 것이다. 대만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조명하 의사는 주목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아니 외국과의 관계만이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 때는 이승만과 가까운 사람들만 독립 운동가로 인정받아 국가 유공자가 되었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때는 '좌익 계역 운동가들'이 주목받았다. 최근 모 정치인의 아버지가 독립 운동을 한 이유로 국가 유공자가 된 사례에서 보여지듯이 정권의 입맛에 따라 독립 유공자들의 인정과 등급이 달라져 왔다. 그런 가운데 아나키스트들은 상대적으로 등급이 낮다. 조명하 의사는 그 조차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조명하 의사만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조명하 의사들이 있을까?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조명하 의사를 대만에 있는 한국 교포들은 해마다 잊지 않고 기린다. 타이페이 한국 학교에는 조명하 의사 흉상이 있다. 매년 추도식을 하고, 조명하 의사를 기리는 글짓기를 하고 그림을 그린다. 조명하 의사 의거 90주년 이제서야 조명하 의사 연구회가 우리나라에서도 만들어 졌다. 손자 조경환씨도 참여했다. 고국에 돌아온 조경환 씨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아버지의 유지를 뒤늦게라도 받들어 할아버지의 의거를 살아있는 역사로 만드리라 다짐했다. 

기록이 없어서, 아니면 기록이 왜곡돼서, 기억해줄 후손이 없어서, 혹은 있어도 기억하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좌절해서, 그리고 그 기억에 시대와 정권의 변덕스런 흐름이 있어서, 이런 여러 이유로 우리의 수많은 조명하 의사들이 제대로 된 독립 운동가로 '조명'을 받고 있지 못한 상태다. 임시 정부 100년 임시 공휴일제정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기록되지 못한 역사를 당당한 우리의 독립 운동사로 소환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큐 프라임 역사의 빛 청년이 개척하는 길은 반갑고 소중하다. 

by meditator 2019. 4. 11. 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