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6살 때였나, 이웃에 또래 친구가 이사를 왔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나이'를 까보니, 그 '또래' 친구는 아이보다 한 살이 많았다. 그런데 또 이 또래 친구는 2월이 생일이라 이른바 '빠른'으로 아이와 같은 학년에 입학할 처지였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했다. 과연 이 두 아이들은 '친구'가 되어야 할까? '형, 동생'이 되어야 할까? 그저 동네 친구 하나 만드는 일인데 당사자의 엄마들은 물론, 그 주변 '아줌마'들까지 심각하게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 할 문제가 되어 버렸다. 결론은 이십 여년이 지난 지금도 두 아이들은 '친구'로 잘 지내고 있다. 그런데 만약 두 아이가 그 때 형 동생이 되었다면 지금도 친구로 지낼 수 있었을까? 거기엔 '형'뻘인 아이와 엄마의 '혜량'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나이' 등을 둘러싼 호칭과 관계의 문제는 녹록치 않다. sbs스페셜은 바로 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언어'와 '권위'의 문제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한다. 바로 <왜 반말하세요>이다. 

 

 

말로 부터 시작된 관계의 해체 
다큐의 시작은 '도발적'이다. 방송국에 견학온 고등학교 방송반 학생들과 선생님, 그런데 학생들은 흰 머리가 히끗히끗한 마흔 줄의 선생님을 대놓고 '이윤승'이라 부른다. 이름만 부르는 게 아니다. '친구'처럼 편하게 말을 놓는다. 도대체 이 방송반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윤승 선생님이 이윤승이 되기 까지 '사연'이 있다. 학교 안에서도 군기가 세기로 소문났던 방송반, 후배들은 저만치 선배가 가는 게 보이면 달려가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히며 안녕하십니까 선배님하고 복창을 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한다. 당연히 방송반의 모든 일들은 그에 따라 '상명하복'. 선생님은 오죽했을까? 새로이 방송반을 맡은 이윤승 선생님은 이런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방송반의 관례를 깨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바로 '내가 먼저 권위를 내려놓는 방식', 그래서 이윤승 선생님은 이윤승이 되었다. 선생님은 그렇게 자신에게 이름을 부르는 학생들이 '나 이거 하기 싫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현재의 상황이 좋다고 한다. 

호원이가 된 도련님의 사례도 있다. 이미 sbs <b급 며느리>를 통해 방영된 김진영 씨의 사례다. 결혼을 하기 전부터 친해서 '호원'이라 불렀던 남편의 동생, 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시댁에서는 편하게 불렀던 시동생에 대해 '도련님'이나 '삼촌'이라는 호칭을 요구하며 형수와 시동생의 관계는 서먹해졌다. 형수의 여동생들에 대해 남편은 자연스레 이름을 부르는데 왜 남편의 동생에게는 호칭을 불러야 하는 것일까? 주변에서는 그냥 잠깐인데 참으면 된다지만 형수는 이런 호칭에서 부터의 차별이  '여자의 삶'을 어그러뜨리는 게 아닐까 고민이 된다. 

 

 

당신을 당신이라 부르지 못하는 사회
가족에서 부터 사회까지 우리 사회에서 '호칭'으로 부터 시작되는 '관계'의 문제는 복잡하다. 그 이유를 전문가는 '너, 당신'이라는 직접적 호칭의 부재에서 찾는다. 207개의 언어 중 '너, 당신'을 직접적으로 부르지 않는 7개의 언어, 그 중 하나가 한국어라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너와 당신을 부를 수 없기에 새로운 호칭을 찾아야 했고, 그를 위해서 당신은 누군인가를 알기 위한 신상 정보에 대한 파악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 

그런 언어의 특수성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다큐는 그 이유를 '상명하복'이 내재화된 우리 사회의 위계 질서에서 찾는다.  5,6살 아이들의 키즈 까페에서도 '너 몇 살이냐'로 시작되는 위계의 파악, 위계가 파악되면 바로 '형', '동생'이 되고, 동생 뻘의 아이에게 당장 '니라고 하지 마라'며 , '형이니 내가 먼저할게'가 자연스러운 우리 사회의 권위적 질서 체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 시작을 조선 시대의 장유유서에서 원인을 찾는다. 하지만, 다큐의 생각은 다르다. 고미숙 고전 인문학자는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 달리 조선 시대 서당은 나이 차를 두지 않는 '통교육 체제'였음을 밝힌다. 뿐만 아니라 옛 사람들은 나이에 대해 관대하여 25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서신으로 학문을 논했던 기대승과 이황처럼 나이를 막론하고 우정을 나누는 사례가 흔했다고 전한다. 

오히려 이렇게 상대적으로 나이에 대해 '관대'했던 조선의 전통이 일제 강점기를 통해 오늘날과 같은 '민증부터 까고 보는' 연령별 위계 질서로 고착되었다고 오성철 교수는 지적한다. 모리 아리노리에 의한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군국주의 일본의 사상으로 채택되고 일본을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의 사범 학교를 군대식으로 재편했다. 이른바 '사범형 인간'은 상급생을 '신'으로 받들게 하며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의식을 퍼뜨렸고, 군대 내 상명하복의 질서를 고스란히 근대 교육 제도화한데서 오늘날의 권위주의적 위계 질서가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민주의의 잔재는 오늘날의 위계 질서를 만든 50%의 책임이 있다고 다큐는 부연 설명을 한다. 즉, 식민지의 유산이 절반의 책임이라면 학도 호국단, 국민 교육 헌장 등 일제의 관행을 고스란히 부활시킨 박정희 시대의 권위주의 교육이 오늘날 우리 사회 권위주의적 질서의 또 다른 한 축이라 다큐는 정의내린다. 사회 구조와 맞물려진 언어, 결국 정치적 권위주의가 일상의 권위주의가 되었고, 이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관행에 대한 성찰로 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다큐는 주장한다. 이를 위해 제기한 것이 바로 '수평적 사회를 향한 수평적 언어'에 대한 고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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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주의와 독재 정권의 권위주의만의 문제일까? 
단 몇 개월의 차이라도 형, 동생이 되는 우리 사회의 '연령별 수직 구조'에 대한 인식은 예리하다. 더구나 그 원인을 '식민주의와 독재 시대의 권위주의'에서 찾고자 하는 바는 진일보된 신선한  접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획일적일 수도 있다. 다큐에서 사례로 등장한 <대리 사회>의 소설가 김민섭씨의 사례처럼, 대학원생이던 그가 대리 운전 기사가 되자, 당장 '아저씨'에서 부터 '야, 너'로 호칭의 급격한 '전락'에서 보여지듯이, 과연 우리 사회 권위적 호칭의 문제가 '나이'의 장벽만의 문제일까?

다큐는 독일 68세대에 의한 나치 잔재 세력에 대한 일소를 통한 정치적 권위주의 해소 사례를 예로 들었듯이, 최근 우리 사회에서 뒤늦게 대두되고 있는 일제 잔채 청산, 그리고 나아가 독재 잔재 청산에 대한 일련의 흐름에서 '권위주의적 언어'의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하지만, 과연 몇몇 사례로만 제시한 조선시대를 덜 권위적 사회라 예단할 수 있을까? 대리 운전 기사에게, 콜센터 직원에게 다짜고짜 '야'하고 하대하고 보는 그 의식은 외려 조선시대의 반상제도에서 그 기원을 찾는 것이 정확한 것은 아닐까? 또한, 우리 사회의 완고한 가부장적 권위 주의의 기원 역시 조선 시대 유교를 차치하고서 설명할 수 있을까?  과연 대학원 내에서 교수와 대학원생간의 자유로운 토론이 불가능한 것이 수평적 언어 관계가 아니기 때문일까? 

다큐를 도발적으로 연 이윤승 선생님 역시 수평적 언어의 관계가 쉽지 않음을 토로한다. 우선 그의 혁명적 관계 시도가 동료 교사들의 불편함에 대한 토로로 고충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아이들과 말을 놓는 건 권위주의적 관계를 탈피하고자 하는 것이지 진짜 친구처럼 막역한 사이가 되고자 하는 건 아닌데 수평적 언어가 때론 관계의 혼돈을 낳기도 한다고 고민을 전한다. 뿐만 아니라 다큐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it기업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에서 붐처럼 일었던 수평적 언어 관행으로서의 '별명' 혹은 '외국 이름' 부르기와 같은 움직임이 상당수의 경우 이름만 '수평'적이며 실제 관계는 수직적인 '웃픈'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보고가 이어지고 있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다큐가 새로운 움직임으로 제시한 수평적 언어 모임,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이와 직업을 묻지 않는 이 모임을 통해, 자신들이 권위적인 사회 속에서 느꼈던 갑갑함을 풀어낸다. 하지만 대표적 권위주의적 집단으로 제시된 해병대 전우회처럼, 우리 사회의 다수, 그 중에서도 남자 중 상당수가 '군대'라는 일정 기간 동안 '상명하복'에 대한 고강도의 훈련을 겪고 그 논리를 내재화하며 지내야 하는 상황에서 탈권위적 사회를 향한 출발점으로서 수평적 언어에 대한 모색은 녹록치 않아 보인다. 

by meditator 2019. 4. 15. 05:26

배우 김윤석이 감독 김윤석이 되었다. 그 첫 작품이 <미성년>이다. 아마도 김윤석 배우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우가 오랫동안 감독에 대한 꿈을 꾸어 왔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미성년>은 반가운 영화다. 누군가의 오랜 꿈이 이루어진 현장이니까. 나이가 들어 퇴색되고 무뎌지지 않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미쁘다.

하지만 <미성년>은 그저 그렇게 배우 김윤석의 첫 데뷔 영화라는 측면에서만 반가운 것이 아니다. 모처럼 우리, 인간에 대한 '넉넉한 시선'을 풀어놓은 영화라는 측면에서 반갑다. 마치 하루 종일 격식에 맞춰 정장을 입고 있다가 집에 돌아와 무릎 툭 튀어나온 낡은 츄리닝을 입고 퍼질러 앉아 기지개를 펴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렇게 편하게 나, 우리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보는게 참 오랜만이란 생각이 든다. 

 

 

어른의 딜레마 
'엄마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흔히 부모님들이 하는 말씀이다. 그 떡이 생길 어른 말씀이라는 거의 전제는 어른 말씀은 옳다라는 것이다. 어른은 믿을만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성년>은 그 옳다는 어른에 대해 질문한다. 과연 그런가 라고. 

그리고 이 '옳지 않을 수도 있는 어른'에 대해 영화는 가장 흔하고도 속된 주제 '불륜'을 들고 나온다. 대원(김윤석 분)은 이 땅 어디에서나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아재'다. 그런데 이 '아재'에겐 비밀이 있다. 본인만 비밀이라고 생각하고 남들은 다 알아버린 비밀, 바로 미희(김소진 분)와 불륜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아버린 딸 주리(김혜준 분)가 미희의 가게 주변에서 기웃거리다 미희와 미희의 딸 윤아(박세진 분)에게 틀키고, 그 바람에 아내 영주(염정아 분)까지 알아버렸다.

아니 그건 어쩌면 타이밍의 차이일 뿐일 지도 모른다.  이미 아내와 각 방을 쓴지 2년 여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져가는 아내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 대원의 바람은 그야말로 시간 문제인 듯 보여진다. 아니 그것보다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 미희의 배는 어떻고. 게다가 회식 장소를 두고 오리집으로 할까요 하며 빙글거리는 직원을 보니 정말 대원을 빼고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이다. 

'혹' 해서는 안될 '미혹'의 나이에, '혹'하면 안되는 아내와 딸이 있는 가장의 바람인지, 불장난인지, 사랑인지는 동심원을 그리며 여파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세상에서 젤루 이쁜 딸도 알고, 아내도 알고, 미희는 아이를 '조산'하고 그 대책없는 상황에 대원은 그만 내빼버린다. 그가 '미희'와 시작했던 그 '사랑인지 바람인지'에서 고려치 않았던 결과들이다. 미희 말대로 '맘대로 되지 않는 바람'이라서 그런가, '책임'이란 단어와 동음이의어로 쓰이는 어른이 대원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듯하다. 

이 대책없는 대원의 불장난, 그 마주쳐야 소리를 낸 당사자, 어쩌자고 남의 집 남편의 아이까지 가졌냐며 다그치는 딸에게 외려 너라도 엄마를 좀 이해해 주면 안되겠냐며 울음을 터트리는 미희. 돈만 쥐면 도박판으로 달려가는 남편 대신 열 일곱에 '책임'을 진 딸을 키우며 오리집을 하며 살아가는 미희의 삶을 들여다 보니 그녀가 뒤늦게 매달린 '사랑'이 짠하다. 하지만 그래도 '어른스럽지는 않다. 

 

 

이 대책없는 두 사람으로 인해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은 영주, 여전히 딸 주리 앞에서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을 보이려고 하지만 그 허울은 얇다. 더구나 미희의 조산 앞에 그녀의 자존심마저 약해진다. 아니 그녀를 더욱 약하게 만드는 건 그녀가 자신의 이름으로 된 통장하나 없이 지켜왔다고 생각하는 가정, 그리고 남편인지 웬수인지 모를 대원.

이렇게 <미성년> 속 어른들은 다 어쩌지 못하는 처지에 놓인다. 어른답지 못한 일을 '저지르고', 그 저지른 일에 대해 어쩌지 못한 채 '책임'지는 대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거나, 방임한다. 아니 '책임' 조차도 어쩌면 상대방에 대한 배려보다는 '내 맘'이 먼저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 와중에 '어른'이라며 아이들을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서 저만치 밀어낸다. 즉 <미성년> 속 어른들의 상태는 바로 '어른' 그 자체의 '딜레마'다. 책임질 수도, 책임 지지지도 못할 상황에 놓여버린 어른의 삶. 그건 어쩌면 '도덕'이라는 교집합으로는 쉬이 메꿀 수 없는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삶 자체일 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가 정의내린 어른이라는 깜냥 자체 미달인 '어른'들의 이야기. 이를 통해 '어른'이라는 우리의 고정 관념에 질문을 던진다. 당신들이 짊어지고 사는 그 '어른'이 정말 어른맞냐고. 아니 우리가 만들어 놓은 '어른'이라는 성채가 허상이 아니었냐고. 

 

 
어른스러우려하지만 여전히 아이들인 아이들 
그리고 이렇게 어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맞은 편에 정작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 '대략난감'인 어른들보다 어른스런 아이들을 내세운다. 공부의 세상 속에 밀어넣으며 아이들의 문제 조차도 해결해 주겠다는 어른들의 세계에 기꺼이 책임감을 가지고 발을 밀어넣는 아이들. 

어찌어찌해서 아빠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딸 주리는 흔히 드라마가 설정하듯 철부지 딸의 캐릭터 대신에 어른스레 그 사실을 알게되어 충격을 받을 엄마를 걱정하고 수습하려 애쓴다. 윤아는 어떻고. 대책없는 엄마를 다그치면서도 어떻게든 그 사태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자신의 주머니를 털고 파탄난 가정을 봉합해보려 아버지를 찾아나선다. 심지어 그 사태로 인해 등장한 '동생'을 들여다 보며 책임지려 까지 하며.

 

 

구멍난 '가족'의 틈을 메우려 애쓰는 아이들. 어른들이 방기한 책임의 세계에 자신을 기꺼이 들이미는 아이들. 그렇게 <미성년>은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고정 관념, '철없고 대책없는 아이들'이란 세계에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이들이 책임지고자 하는 '어른'의 세계에 아이들은 아직 역부족이다. 아니 영화의 엔딩처럼 아이들은 어른스러우려 하지만 아직 '아이들'일 뿐이다. 아니 '아이들'이기에 어른들의 그 심각한 사태에 웃을 수 있고, 엉뚱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미성년>은 그렇게 어른스럽지 못한 어른들과 어른스러운 아이들을 통해 '어른'의 경계를 해체한다. 어른됨의 버거움을 피력하고, 어른됨의 난센스를 드러내며,  애초에 우리 사회가 불문율처럼 정의한 '어른'이라는 존재 자체에 의문을 표한다. 반면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듯 그렇게 철딱서니 없지도 않고 생각이 없지도 않다. 결국 <미성년>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어른스럽지 못한 어른과 어른다운 아이 그 흐트러진 경계를 통해 이 사회가 강력하게 선을 그어 놓은 '어른'과 아이'라는 선이 어쩌면 불분명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찌질하기 한량없는 대책없는 고딩같은 대원과 아우토반 중2병같은 미희의  깜냥에,  자신의 감정조차 추스리기 힘들어 보이는 영주의 흔들림에 엄격한 학칙의 잣대를 들이대다 한참 모자란 찌질이들을 마주하듯 실소가 흘러나온다. 미희와 대원이 해맑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던 낡은 놀이 공원을 찾은 아이들의 미소처럼. 결국 <미성년>이 도달한 곳은 그 모자람에 대한 인정이요, 이미 늘어진 고무줄같은 어른의 세계에 대한 '관용적 이해'다. 그리고 그건 지금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괴물같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여유'의 틈이다. 

by meditator 2019. 4. 15.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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