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열의 스케치북>을 즐겨보는 애청자라면 통하는 한 마디가 있다.
'무엇을 기대하던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늘 특집 때마다 시작하기에 앞서 mc 유희열이 다짐하는 말이다. 썰렁한 크리스마스 특집이던, 화려한 고고장 특집이건, 언제나 유희열은 시청자들의 기대치를 낮추라는 이 말을 빼먹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말이 정말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유희열이 그 말을 하는 순간, 관객과 시청자들의 기대치는 올라간다. 오늘은 또 어떤 '스케치북다운' 특집을 보여주려나 하고.
하지만, 1월 3일 신년 특집으로 꾸민 '가요 톱텐'은, 유희열이 손범수를 코스프레하며 가요 톱텐 시절의 음악들로 주옥같이 꾸몄지만, '스케치북'답기는 했지만, 어쩐지 한 김 빠진 <불후의 명곡>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가요톱텐' 특집에 앞서, 유희열은 이 특집에서 절대 케이블의 모 드라마를 연상하지 말라고, 자신들은 이미 6년전(?)부터 이 특집을 기획해 왔다고 했다. 물론 특집이란게 정말 말 그대로 특집으로 제작진들이 기획하기 나름이고, 거기에 굳이 개연성을 요구할 필요는 없겠지만, 과연 2014년의 새해 특집으로 무려 20년의 과거를 거스른 '1994'으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6년 전부터 기획해 왔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답하라 1994>의 장면들이 오버랩되는 015B의 음악으로 시작하는 건 더더욱 그랬다.
(사진; 세계일보)
015B에 이어, 김건모, 김동률, 룰라, 듀스, 마로니에를 거쳐, 김광진, 조관우로 순항한다. 때로는 그 시절의 가수 015B, 김광진, 조관우가 직접, 그게 아니면 허각, VIXX, 쥬니엘, 케이윌, 강민경에 새롭게 불려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그들 뒤에 있는 자막은 부지런히 이것이 '가요톱텐' 특집이라는 걸 복기하는 양, 그 시절의 영상을 보여준다. 물론 이제는 고풍스러운(?) 느낌조차 나는 1994년의 <가요톱텐>을 다시 보고, 그 시절에 유행했던 노래를 다시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향수에 젖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보면, '가요톱텐' 특집은 풍족하다.
하지만, 어쩐지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일까? 그것만으로는 어쩐지 아쉽다. 선배 가수들을 제외하고, 출연했던 가수들의 면면을 보자, 허각, 강민경, 켘이윌, 어딘가 익숙한 조합이다. 그렇다. <불후의 명곡>에서 몇 승을 거머쥐고, 1등을 했던 가수들의 명단이다. 그리고, 이미 <불후의 명곡>을 통해, 1994년의 노래들을 숱하게 불려졌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이들 가수들이 <불후의 명곡>에서 했던 무대랑 비교하게 되어진다. 화려한 편곡, 그리고 그보다도 더 화려한 퍼포먼스, 그리고 거기에 뒤질세라 얹혀졌던 가수들의 절창, 거기에 비하면 어쩐지 <유희열의 스케치북>의 무대는 조촐하단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벤치에 쭈그리고 앉다 못해, 웅크리고 누워 부르는 케이윌의 '기억의 습작'이 '가요 톱텐' 특집의 묘미라면 어쩔수 없지만, 그래도 고품격 음악 방송 <유희열의 스케치북>이라면 이젠 특집을 위한 특집, 그래봐야, 결국은 무대에 있어서는 <불후의 명곡>에 비할 바 못되는 무대를 꾸밀 바에야, 이젠 정말 고품격 음악 방송으로서의 본령으로 돌아가 보면 어떨까 싶은 거다.
사실 015B의 음악은 좋지만, 어쩐지, 어색하게 그 시절의 015B를 코스프레 하는 나이든 015B의 키치스러운 무대보다는, <응답하라 1994>의 훈훈한 그 시절 장면 뒤로 흐르는 OST로서의 015B음악이 더 분위기 있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간극에서 느껴지는 유머와 페이소스가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이끄는 주된 매력인 건 알겠지만, 거기에 고여있는 느낌은 그렇다.
차라리 노골적으로 <응답하라 1994>의 붐에 더해 추억팔이를 하겠다면, 이제는 너무나 뻔해진 그 시절의 015B, 듀스, 김동률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 속에 놓친 그 시절의 다른 음악을 소개했다면 어땠을까? 아니, 015B, 김동률이라도, 우리가 뻔히 기억하는 그들의 음악이 아니라, 우리에게 잊혀졌던 그들의 또 다른 음악이라면? 1월 3일 방송 말미, '마법의 성'을 부른 김광진에게 보여진 것은, 몇 주에 걸쳐 1위 후보곡이었음에도, 결국은 신승훈의 '그후로 오랫동안'에 밀려 결국은 1위 한번 못해본 과거 영상이었다. 그렇듯이, 이제는 우리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하지만, 그 시절에는 나름 인기 있었던 좋은 명곡들이 있었다.
(사진; TV리포트)
김동률의 '기억의 습작'이 물론 좋은 노래고, 인기있는 곡이었지만, 그 곡을 오늘에 길어 올린 건, 영화 <건축학 개론>이었다. <응답하라 1994>도 마찬가지다. 우리 기억의 책장 속에서 먼지 쌓인 채 묵혀가던 곡들을 되살려 낸 것이다. 하지만, 이제 '기억의 습작'이나, '어디선가 나의 노래를 듣고 있는 너에게'는 이미 길어올려져 회자되는 유행가가 되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고품격 음악 방송의 본령에 충실하려면, 이미 유행가가 다시 되어버린 곡들을 그럴 듯한 그 시절의 분위기를 재연하며 재탕하는 것이 아니라, 미처 우리가 길어올리지 못했던 곡들을 재발견 해주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너무나 대표적인 곡이 되어버린 015B의 음악 대신에 그와 함께 1위를 다투었던 최연제의 '너의 마음을 내게 준다면'이 신선한 선택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가요 톱텐' 특집은 <유희열의 스케치북> 본연의 해학적 요소도 충분히 보여주었고, 여전히 좋은 그 시절의 음악을 다시 한번 들려주어서 흐뭇했다. 하지만, 금요일 늦은 밤,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눈비비며 기다리는 마음은 어쩐지 그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은 고품격 음악에의 갈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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