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이 무너져내렸다!'

<스캔들;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이 방영되는 동안 두 번이나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첫 번째 건물이 무너져 내린 것은, 바로 이 드라마 속 사건이 시작인, 장태하가 만든 상가 건물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부실 공사로 인해 금이 가기 시작한 건물을 장태하는 폭탄을 사용해 부수어 버린다. 80년대 건설 입국의 시대, 그 속에서 자재를 빼돌리는 등'부실'로 몸을 불리던 건설 재벌의 실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그리고 그 무너진 건물 더미 아래서 하명근의 어린 아들이 자신을 구하러 올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회, 다시 한번 건물이 무너져 내린다. 하지만 이번엔 부실로 인한 붕괴가 아니다. 부실을 덮기 위한 의도적 폭발이 아니다. 하염근이 알아낸 여전히 건설 자재를 빼돌리며 부실 공사를 한, 그리고 그것을 의롭게 알리려다 우아미의 남편 공기찬 대리가 죽어간 주상 복합 제우스가 '태하 건설'의 '결자해지'로 스스로 주저앉아 내렸다. 우리가 뉴스를 통해 그토록 많이 접한 '부실'이란 단어가, 이렇게 해결될 수도 있구나, 보고 있는 내 눈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해결되어야 하는구나. 하지만 이런 일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그저 재밌는 드라마라기며 박수쳐 주기엔 많은 생각이 오간다. 하지만 도저히 현실에서 불가능할 거 같은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구나. '사람'이라면 해낼 수도 있겠구나 라는 깨달음이 두렵다. 


두 갤의 건물이 무너지는 '수미상관'의 어법 사이에, 또 하나의 '수미상관'의 장면이 겹쳐든다. 아들의 손을 잡은 아버지이다.
처음 노란 유치원복을 입은 아들의 손을 잡은 아버지는 나쁜 놈이다. 사실은 아버지가 아니다. 자기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태하를 죽이기 위해 그의 집에 갔다가 얼떨결에 그의 아들을 유괴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유괴범이었던 아비와, 유괴를 당했던 아들은 다시 손을 잡고 간다. 예전에는 조그마한 아들과 커다란 아비가 쫓기듯 길을 걸었지만, 이젠 반대로 쪼그라든 아버지와 듬직해진 아들은 웃으며 손을 잡고 산길을 오른다. 허정거리는 아비의 걸음에 아들은 다가와 손을 잡아 지탱해 준다. 
영화<화이>에서 자신이 유괴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화이는 자신을 키워준 아비들을 모두 죽인다. 그 아비들과 함께 했던 시절을 추억할 여지도 남기지 않고, 영화의 남은 시간을 몽땅 아비와, 아비가 그렇게 되도록 만든 자들을 죽이는데  쏟아 붙는다. 
하지만 똑같이 유괴를 당한 하은중의 결말은 다르다. 이제는 장은중이 된 하은중은 그의 아비를 용서한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한다. 
'내리 사랑'이라고 거기엔 아비들의 삶이 있다. <화이>에는 유괴를 한 아이를 자신과 같은 괴물이 되도록 키울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친부를 살해하게 만든 다섯 아비들의 현실적 역사가 있다면, 드라마<스캔들>은 아름다운 동화로 마무리된다. 
애증의 세월을 거쳐 이제는 화해를 해가던 아버지가 사실은 자신을 유괴한 사람이라는 걸 안 아이는 아버지를 증오하지만, 결국 그 아버지가 오랜 세월을 거쳐 자신을 '사랑'해온 마음에 감복한다. 은중은 말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만 않았어도' 라고. 
그리고 절대 해결할 수 없었던 부실 재벌의 패악의 고리를 푼 것도 '사랑'이다. 유괴범 아버지가 아들인 자신을 사랑했던 방식으로, 돌아온 아들 은중은 그에게 총을 겨누었던 아비 장태하를 돌아서게 만든다. 그리고 그 속죄의 방식으로, 제우스는 무너져 내렸다. 

MBC 주말특별기획 스캔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이하 스캔들)이 27일 오후 종영한 가운데 정통드라마로서 성공적인 행보를 보여 호평을 받고 있다./MBC 제공


영화 <화이>의 마지막 장면은 화이와 그의 아비 김윤석의 대결이 아니었다. 모든 아비들을 해치운 화이가 아비들에게 용역을 수주한 건설 재벌 진사장을 죽이는 장면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결국 이 모든 악의 시초였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를 처치함으로써, <화이>는 상징적이지만, 즉자적으로 왜곡된 우리의 현대사를 청소한다. 

<스캔들>의 화법은 좀더 은유적이다. '사랑'을 논하지만, 그 사랑은 그저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피상적 사랑이 아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장태하가 그의 아들을 되찾아 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가 사주한 살해 음모를 시인하고 감옥에 가고, 그 사건의 시발이 된 건물을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다. 하명근 역시 마찬가지다. 장태하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 혈육과의 생이별을 가했지만, 그의 온생애에 걸쳐 장태하의 아들을 사랑으로 키워내야하는, 그래서 그 아이가 '용서와 화해'의 전도사가 될 수 있게 키워내야 하는 형벌을 스스로에게 짐지웠다. 
<화이>의 청소는 명쾌하지만 깨림찍하다면, <스캔들>의 사랑은 이상적이지만 난해하다. 적을 내 사람으로 품어낼 수 있는 용기와, 사랑의 이름으로 희생할 수 있는 한계를 묻는다. 

하지만 그 무엇이 되었든 왜곡되고 꼬인 현대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에 용기를 내었다는 점에서 박수를 보낸다. 더구나, <스캔들>은 혈연으로 꼬아붙인 건설 입국의 모순을 응징과 보복도 아니고, 어설픈 혈연주의나, 인지상정도 아닌, '진정한 화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래서, 드라마가 끝난 후 각자 어려운 숙제 하나를 얻어든 듯 묵직하다. 

마지막 회 현실의 '채동욱 검찰 총장'사건이 연상되는 사건이 등장한다. 현실의 채동욱 검찰총장은 찍어내 졌지만, 드라마에서는 그 일을 설계한 사람이 용기있게 나서 증언한다. '찍어내기' 시도는 누군가의 용기로 허사가 되었다.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일의 결과는 천양지차다. <스캔들>이 희망이 잦아드는 시대에 독려하고픈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즉자적 현실 비판을 넘어, 우리 시대의 문제 해결을 위해 작가가 피나게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훌륭한 대본, 그것을 결코 훼손하지 않은 좋은 연출에, 심지어 적재적소에서 탄성을 자아낼 만한 기막힌 ost까지 제작진의 합이 <스캔들>이 마지막 까지 있었다. 어느 한 회도 흔들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묵묵히 자기 할 말을 다한 보기 드문 드라마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완주에 톡톡히 제 몫을 한 것은, 역시나, 조연 누구 한 사람까지 빠지지 않는 캐릭터에, 그 캐릭터를 멋지게 연기해 낸 배우들이 있겠다. 아버지의 세대건, 아들의 세대건, 심지어 곁다리로 끼어든 인간 군상들까지, 누구 하나 그냥 넘어갈 연기가 없었다. 박수를 보낸다. 


by meditator 2013. 10. 28. 10:01

영화 <화이>를 보고나서, 문득 어디선가 이 비슷한 이야기를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봤는데.......아, <스캔들>! <스캔들>의 그 '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은 영화 <화이>와 유사하다. 괴물이 된 아버지를 맞딱뜨린 아들, 아들들에 대한 또 다른 보고서이다. 


무엇보다 두 이야기는 모두 '유괴'가 사건의 실마리가 된다. 
영화 속 아버지들도, <스캔들>의 아버지 하명근도 아이를 유괴한다. 그리고 그 유괴는 그저 단순한 유괴라는 범죄만이 아니라, 그 순간 충동적이었건 그렇지 않건, '징벌'의 의미를 지닌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또 다른 아버지에 대한. 
그리고 두 영화 모두, 유괴해 온 아이를 죽이지 않는다. 그 아이를 죽이면, 자신은 완전 범죄로 후환을 없앨 수 있음에도 결국 그 아이를 품고 산다. 그리고 아이는 유괴범을 아버지라 부르며 자란다. 유괴범을 닮아가며. 유괴범을 배워가며. 

(사진; osen)

물론 여기서 영화와 드라마의 길은 나눠진다. 
애증의 휩싸여, 늘 하은중이 된 장은중에게 거리감을 두었던 하명근 형사는 그럼에도 어느새 자신의 아들만큼 그에게 깊은 정을 주어버린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유괴범이 되었지만, 여전히 '태하'의 비리를 밝히는데 주저하지 않는 강직하던 형사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하명근을 하은중은 닮아간다. 
반면, <화이>는 아버지를 다섯이나 두었고, 그들 각각의 방식으로 넘치는 사랑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들처럼 되어가는 방식도 훈련받는다. 그리고, 괴물이 된 아버지들의 전사에는 또 다른 괴물이 존재한다는 걸, 그리고 그 괴물에게서 도망가기 위해 괴물이 되어야 했음을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아니다. <스캔들>이 다른 것이 아니다. 하명근과 하은중 부자의 관계가 '부전자전'의 긍정적 효과였다면, 장태하와, 그의 두 자식, 장은중, 지금의 구재인, 그리고 장주하는, 아버지를 닮은 괴물로 키워진다. 구재인은 자신이 빼앗긴 장태하의 아들 자리, 태하 그룹의 후계자 자리를 되찾기 위해, 또 다른 장은중을 없애달라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태하 그룹을 얻기 위해 장인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장태하처럼, 그의 품에서 자란 자식들은 그의 방식대로 사는 것을 배운다. 

두 작품이 말 하고자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괴물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세대, 그리고 그 아버지 세대의 방식대로 보고 자란 아들의 세대가 살아가는, 살아가야 하는 방식에 대해, '부전자전'의 태도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에서, 사건을 확산시키는 계기로 '철거'가 등장하는 것은, 당대성을 상징하는 가장 적절한 소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스캔들>의 장태하는 자신의 부를 완성하기 위해 부자비한 철거를 감행한다. 주저하는 경찰과 철거 용역들 앞에 그 스스로가 불도저를 밀고 들이 닥친다. 철거와, 건설이라는 두 단어로 상징되는, 개발 경제 시대의 아버지이다. 
<화이>의 아버지들은, 경찰과 철거 용역조차 해결해 내지 못한 단 하나 남은 철거 현장의 집을 없애기 위해 투입된 특수 용역인 셈이다. 우리가 그런 일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결국 경찰의 끄나풀이, 기업의 하수인이 된 또 다른 세대의 아버지들을 상징한다. 

<화이>의 아버지들이 그들을 괴롭히던 괴물을 피하기 위해 그 스스로 더 잔혹한 괴물이 되어가는 방식을 택한 것처럼, 그 아버지들은 그들의 방식을 화이에게 강요한다. 너도 우리처럼 괴물이 되어서 살면 편하다고.<스캔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십 여년 만에 처음 만난 아들에게 장태하가 권하는 것은 자기 대신 재판에 나가, 자기처럼 철면피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장태하의 아들이 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아버지들은 '사랑'의 이름으로 아들들이 자신과 같은 삶을 살기를 강요한다. 

<화이>도, <스캔들>도 결국에 돌아오는 건 질문이다. 그것이 개발 독재 시대의 아버지들이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괴물이 되어버린 그 이후 세대의 아버지들이건, 결국 모든 사건의 열쇠는 결국 아들의 손으로 넘겨진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화이>는 영화답게, 두 시간에 모든 것을 끝장내야 하는 완결적 스토리답게, 그리고 청소년답게, 화끈하게 징벌과 극복을 해소해 버린다. 말 그대로, 괴물을 삼켜버린다. 
반면, <스캔들>의 해법은 복잡하다. 장은중과 또 장은중은 사회 물도 먹을 만큼 먹은 만큼, 머릿 속이 복잡하다. 계산해야 할 것들이 많다. 더구나, 36부작의 장편을 이끌어 가야 할 만큼 고민할 꺼리도 많다. 
그래도 역시나 길을 두 가지이다. 이제는 구재인이 된 장은중처럼, 그 아버지가 그랬듯이, 자신의 것을 쟁취하기 위해, 자신이 상처받은 걸 돌려주기 위해 괴물이 되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은중이었던, 이제는 장은중이 선택한 방식은 <화이>의 방식일 것이다. 화이가 화끈하게 몇 자루의 총으로 해결했던 청소를, 장은중은 아주 복잡하게 도대체 아직은 그 해법이 무엇인가조차 그저 짐작만 할 수 있게, 큰 그림의 청소를 해나간다. 그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 않는 여자와 재판에서 대면해 놓고서도, 그녀의 공소 사실을 천연덕스럽게 부인할 만큼 속을 내보이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믿어달라고 외칠 만큼, 그의 행보는 의심스럽지만, 의지는 확고하다. 

하지만 그 무엇이 되었든, 공은 <화이>와 <스캔들>을 보는 관객과 시청자들에게로 굴러온다. 
당신들이 부정해 마지 않는 역사가 이제 당신들의 몫으로 던져졌다. 당신들은 어떤 방식을 택할래? 하고, 언제까지 아버지가 나뻐서 라고 징징거릴 때가 아니야! 라고 .

* <스캔들>에는 괴물이 되느냐, 마느냐 서로 다른 두 아들의 선택이란 흥미진진한 볼거리와 함께, 현실이 고스란히 투영되는 대사를 쫄깃하게 즐기는 재미가 더해진다. 
에피소드 1; 윤화영이 검찰 총장을 찾아갔다고 하자, 장태하는 그 검찰 총장을 구워 삶으라 한다. 하지만 그 검찰 총장이 강직해서 그럴 것이 없다고 하자, 없는 애라도 만들어서 신문에 뿌리라고 한다. 
에피소드2; 조진웅 태하 건설 사장과, 그의 아버지 조치국 장관이, 개발제한 구역 땅을 풀어 땅 장사를 한 이야기를 나눈다. 뭣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땅 장사에 빛을 내서 끼어들어 망해가는 것을 조롱하며. 대한민국은 땅도, 집도, 강도 모조리, 자기들 봉이라며 낄낄거린다.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빛을 내서, 그걸 사지 못해 안달을 한다고 비웃는다. 


by meditator 2013. 10. 14. 10:14

전두환 전 대통령이 추징금 1672억을 내지 않고 버틴 결과, 2013년 9월 그의 두 아들이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가진 돈이 단돈 29만원 밖에 없다며 버티던 전직 대통령은 검찰의 수사가 그의 두 아들에게로 향하고, 밤을 세워 조사를 받게 되고, 자칫하면 조만간 감옥에 들어갈 처지가 되자, 마지 못해 자녀들이 가진 부동산을 내어놓는 것으로 추징금을 갚겠다고 나섰다. 철면피한 아버지를 둔 덕에 아들들은 졸지에 전국민의 눈총을 받으며 검찰을 들락거리게 된 것이다. 아니다. 부도덕한 아버지를 둔 덕에, 어쩌면 멀쩡한 사람으로 살 수 있을 지도 모를 기회를 박탈당하고(?), 그 부도덕의 대를 이어, 비밀리에 비자금을 해외에 빼돌려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고, 그림을 사모아 은닉 재산을 지키는 대를 이은 부도덕한 사람으로 거듭나 결국 검찰청 건물을 들락거리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 결과를 놓고 아들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선 감수해야 할 부도덕한 관례라 생각할까? 아들의 삶을 가장 좌지우지 하는 건, 아버지의, 아버지의 세대가 살아온 삶이다. 

기사 관련 사진

<스캔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이하 스캔들)>이란 드라마의 정점은 장태하가 그의 진짜 아들이 누군인 줄 알게 되었을 때라고 생각되었다. 모든 진실을 알게되어 자기 자신의 욕망 때문에 자기 아들을 죽이려 했다는 그 충격적 진실 앞에 무너지고 참회할 장태하를 자연스레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은중이, 하명근 형사가 유괴한 아이가, 진짜 장은중이었음을, 그리고 그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려 했음을 알고 나서도 장태하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참회하기는 커녕, 자신의 핏줄을 속였다는 분노, 자신의 핏줄을 빼았겼다는 결핍감으로 인해 더더욱 극악무도한 욕망의 화신으로 변해간다. 아내의 남편이자, 은인이던 장인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 재산을 빼돌린 부도덕한 인간을, 죽어가는 아이가 있는 건물 무더기를 불도저로 밀어버린 파렴치범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건물의 부실을 알리는 직원을 죽인 살인자를 너무 만만하게 보았었던 거 같다. 
마치 인지상정으로 전직 대통령인데 설마 추징금을 띵겨 먹겠어? 하는 상식의 선에서 기대를 하던 국민들이 아들들을 법정에 세우려는 극한의 수순을 밟아야, 겨우 땅뙈기를 내놓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수법을 써야만 했듯이, 부도덕한 아버지들에게, 인간적인 참회와 반성이란 개나 물어갈 이야기였던 듯하다. 
결국 그런 장태하의 반성없는 폭주하는 기관차같은 욕망은, 그의 친아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뻔 하더니, 이제 겨우 찾은 친아들로 하여금, 자신을 길러준 유괴범에게 총구를 들이밀게 만든다. 친아버지가 길러 준 아버지를 없애는 불상사를 대신하기 위해, 아들이 미리 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꼴이다. 결국 범죄의 아비가, 아들을 다시 범죄로 몰아넣는다. 

하은중이 장은중임이 밝혀진 이후, 날뛰는 장태하와, 모든 처벌을 달게 감수하려는 하명근이라는 두 아버지의 다른 선택 사이로, 또 다른 삶을 선택하는 두 아들의 모습이 대비된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일들은 대를 이어 되풀이 되는 것이다.
비록 유괴범이었지만, 자신의 아들을 죽인 장태하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아들을 유괴하고, 윤화영이 가짜 장은중을 내세운 바람에 장은중을 돌려주지 못한 하명근은, 이제는 하은중이 되어버린 장은중이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몸서리를 치면서도, 그를 결국 자신의 아들로 품어내는 인고의 과정을 겪어 냈다. 그래서, 이제 장은중으로 돌아가겠다는 하은중은 여전히 의협심이 강한 형사 그대로이다. 
반면, 진짜 장은중이 돌아오는 바람에 하루 아침에, 부모도, 집도, 직업도 잃어버리게 된 장은중은, 그의 작은 어머니의 마음 속 소리를 그대로 뇌되인다. 어느 누가 감히 태하 그룹의 그 거대한 재산을 포기하겠냐고. 장태하가 아들 바보라며 키워낸 아들은 어느새 장태하처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려 드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장은중이 된 하은중에 의해 구해져 하명근의 집에 누워, 하명근이 떠주는 죽을 먹으며 흘린 윤화영의 눈물에서 유괴는 정말 용서받을 수 없는 나쁜 일임에도, 유괴범의 아들로 자라나 다행히도 엄마를 구할 수 있는 아들이 된 하은중이 떠올라 보는 사람의 눈시울마저 시큰거린다. 그 시간 엄마가 숨어있는 곳을 아버지에게 알리며 자신의 생사를 딜하는 가짜 장은중과 달리 말이다. 

(사진; 한국 경제)

<스캔들>은 선정적인 제목, 불량스러운 부제와 달리, 10시 드라마로는 근자에 보기 드물게, 막장의 요소도, 연기의 부조화도 없는, 게다가 우리 시대를 상징적으로 설명해내고, 고민하게 만드는 명작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 막장의 향연이라고 불리웠던 전작에 비해서도 시청률이 낮고, 같은 날 말도 안되는 스토리라 비난받고 있는 같은 방송국의 9시 드라마보다도 시청률이 낮다. 말이 되지 않건, 멀쩡하던 연기자들을 단칼에 쳐내도, 자극적 스토리만 있으면 관심을 끌 수 있는게 역시나 시청률의 정답인 듯하다. 그저 부디 이런 좋은 작품의 뒤에 시청률의 욕심에 다시 막장으로 회귀하지나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도, 한편에선, 우리 시대의 진실을 부도덕한 방식이지만 충격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스캔들>이 이나마 선전하는 게 어딘가 싶다. 비록 주말 시청률 1위는 아니더라도, 동시간대 1위를 고수하며, 쭈욱 자신이 하고픈 바를 마지막 까지 통쾌하게 풀어내기를 바란다. 


by meditator 2013. 9. 16. 10:05

"어떻게 다 자기 감정, 자기 입장만 생각해요!"

언제나 고분고분하고 화를 속으로만 삭이던 금만복(기태영 분), 아니 장은중이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그럴 만도 하다. 이십여년을 내 엄마라, 아빠라 믿고 왔던 사람들이 사실은 친부모가 아니라더니, 엄마의 친아들을 유괴한 사람의 재판에 엄마가 앞장선단다. 어디 그뿐인가. 사실은 배다른 오빠인 사람에게 여동생은 좀 더 사귀어 보고 싶다고 하고.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드라마 <스캔들>의 관계 구도는 따지고 보면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유괴범에 연민을 느끼는 엄마, 배다른 오빠와 여동생의 계약 연애, 심지어 조미료처럼 쳐진 장태하의 첩 고주란(김혜리 분)과 강주필(최철호 분)전무의 불륜아닌 불륜까지. 장은중(김재원 분)이어야 할 아이가, 하은중으로 자라났다는 것만으로, 완전 콩가루 집안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동생의 꺽이지 않는 연애 방식을 빗대 장은중이 아버지 장태하(박상민 분)와, 어머니 윤화영(신은경 분)에게 말하듯이, 어른들 때문이다. 어른들의 욕심때문이다. 

(사진; 뉴스엔)

장태하는 부실 시공을 한 건물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그걸 덮기 위해 88올림픽을 이용한다. 그 과정에서 하명근(조재현 분) 형사의 아들 하건영이 죽어갔다. 그리고 하명근 형사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그리고 비리를 권력으로 덮으려는 장태하를 해치려 그 집에 갔다가 얼떨결에 그의 아들을 유괴한다. 죄책감에 시달리다 그의 아들을 돌려주려 그 집에 갔지만, 이미 그 집엔 다른 장은중이 있었다. 그래서 진짜 장은중은 하은중이 되어야 했다.
진짜 장은중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한 것은 엄마 윤화영이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아버지의 사업체를 강탈한 남편 장태하에 대한 복수를 자신의 아들이 그의 뒤를 잇게 하는 것으로 하려던 윤화영은 아들이 유괴되어 죽었다는 쪽지를 보고, 가짜 금만복을 장은중으로 만든다. 
18일 방송에서, 하명근 형사가 병원에 드나들던 이유가 밝혀졌다. 췌장암이다. 이제 겨우 3개월 남짓 남았다고 한다. 자식 바보인 하형사는 그 소식을 듣자, 남은 개월 수를 손으로 꼽다가, 남겨진 아이들 김장 걱정을 한다. 처방전을 버리고 홀로 벤치에 앉아 오열하는 하명근 형사에 시청자들의 가슴도 미어진다. 그리고 그런 하형사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 윤화영이다. 그녀 역시 오랜 시간 밤잠을 못이루고 병원을 수시로 드나드는 신세다. 하명근의 애끓는 부정이, 윤화영의 채워지지 않는 모성이 안쓰럽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저질렀던, 그래서 이제 그들의 죄로 인해 아이들까지 고통받는 업보가 덮어지지는 않는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전래 동화를 분석하는 입장에서는 전래 동화에 나오는 의붓딸과, 계모의 관계를 실제 모녀 관계의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성장하는 딸과, 그 딸의 성장을 원치 않은 엄마의 존재로, 서양의 오이디푸스 신화도 마찬가지다. 거기서 등장하는 아버지 살해는 실질적인 아비의 살해가 아니라, 아버지의 존재를 뛰어넘어야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날 수 있는 남성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스캔들>의 부모 세대 역시 상징적이다. 비리로 부와 권력을 세운 장태하는 원시적 자본주의 축적의 원형이다. 그렇다면 윤화영과 하명근은 무엇일까? 윤화영은 그의 비리를 알면서도, 그의 비리의 희생자이면서도, 그의 떡고물을 받아먹을 수 있는, 그것을 통해 자신도 그 부과 권력의 대열에 참여할 가능성이 열려있던 많은 투항자들을 의미한다. 현대사에서 적당한 지위와 부를 누렸던 많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하명근은 그 반대의 위치이다. 현대사의 제물이었지만, 힘이 없어, 옹졸한 사적 복수 밖에 하지 못했던 그리하여 그 자신도 피해를 입고 살아가야 했던 희생양을 상징한다. 
지난 시절 윤화영과 하명근은 장태하의 비리를 알았으면서도, 자신의 이익이 우선해, 그리고 힘이 없어, 시절이 하수상해 만천하에 그의 비리를 폭로하지 못했다. 그저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적인 보복뿐.  그 시절이 윤화영과 하명근이 장태하의 비리를 덮어둠으로써 다시 오늘에 이르러 아파트는 여전히 부실 시공으로 다시 붕괴될 가능성을 지니게 되었고, 공기찬이 죽고, 그의 아내는 아이를 잃었다. 
드라마는 말한다. 정죄되지 않는, 해결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더 큰 고통을 돌려주며. 심지어 그 고통은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자식 세대까지 침식할 것이라고. 


스캔들 시청률
(사진; tv데일리)

그런 의미에서 장태하를 향한 윤화영과 하명근의 재판은 상징적이다. 결국은 또 다른 고통만을 만들어 놓은 사적 복수를 벗어던지고, 정당한 절차를 통해 장태하를 징벌하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윤화영은 선언한다. 이제라도 자신이 나서서 장태하의 질주를 막겠다고, 그러기 위해서, 비록 상대가 아들이라고 해도 멈추지 않고 재판을 맡겠다고. 
하명근도 마찬가지다. 그저 남의 아들을 유괴했던 옹졸한 사적 복수가 아니라, 자신이 희생양이 되더라도 그때 하지 못했던 장태하의 비리를 만천하에 밝히는 내부 고발자가 되어 정죄를 완성하려 하는 것. 
나빴던 어른들이 뒤늦게 하는 '결자해지', 하명근 형사에게 남은 시간이 3개월 남짓,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이제라도 그 모든 것을 제대로 돌려놓으려는 그와 윤화영의 노력이 부디 원하는 결과로 마무리지어 지길 바란다. . 


by meditator 2013. 8. 19. 10:16

서양 문화에서 팜므 파탈(프랑스어로 '치명적인 여자'. 흔히 우리나라에서는 악녀(惡女)의 캐릭터로 통한다. 화려한 외모와 선정적인 몸매의 한 여자가 한 남자를 감미롭게 유혹한 후 파멸로 이끈다-네이버 지식백과)의 전형적인 인물로 받아지는 대표적 여성 중 한 사람이 유디트이다.

유디트는 구약 성서에 나오는 인물로, 홀로페르네스가 이끈 앗시리아의 부대가 이스라엘을 점령하자, 과부였던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를 육체적으로 유인해 하룻밤을 보내고, 그의 목을 잘라 성벽에 걸어놓아 앗시리아을 물리친 여성이다. 그녀가 적장의 목을 자른 그 모습은, 그 본질적 의미에서 임진왜란 당시에 적장을 부등켜 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와 같지만,  유디트는 그 이후 많은 미술가들을 통해 명작의 한 장면으로 남아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으며, 팜므 파탈의 전형은 물론, 프로이트 의 심리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상징적 인물로 재해석되며 서양 문화의 여성 캐릭터의 한 전형으로 거듭나고 있다. 


유디트라는 여성 캐릭터의 정의는 두 가지다.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자신의 성을 목적,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희생했다는 것 하나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희생은 숭고한 가치를 위해 씌여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찾아보자면 대의와 명분을 중시하는 우리의 역사 행간에 수많은 유디트들이 존재하겠지만,  이글의 원활한 설명을 위해, 상징적인 존재로 서양 문화의 유디트를 모셔온다)

그리고 바로 그 유디트와 같은 인물들이 공교롭게도 최근 화제를 끌고 있는 드라마들에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매우 충격적이도 부도덕한 사건'이라는 부제를 가진 <스캔들>에서 직접적으로 사건을 일으킨 주범은 하은중을 유괴한 하명근이지만, 사실 그 못지않게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빌미를 제공한 것은 윤화영(신은경 분)이다. 
윤화영은 아버지의 강요로 인해 장태하와 결혼을 하게된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토록 신임하던 장태하는 아버지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윤화영의 아버지를 경찰에 고발하고, 그가 감옥에서 죽어가게 만들어 버린다. 지금에 이르러서까지 장태하를 애증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윤화영은 그와 결혼을 할 때부터 한결같이 장태하를 무시하고 인정할 수 없다. 그런데 심지어 그가 아버지를 죽였으니, 받아들이기는 커녕 복수를 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 쓴 것이 바로 윤화영 자신이 낳은 아들 은중이었다. 하지만, 은중이가 유괴되어버리고, 장태하에게 버림을 받게 된 윤화영은 생면부지의 금만복을 장은중으로 둔갑시켜 지리하지만  무시무시한 복수를 이어간다. 


이미지

지난하지만 알고보면 더 무시무시한 복수로 치자면, <황금의 제국>의 한정희(김미숙 분)도 못지않다. 그녀 역시 자신의 남편 배영완이 성진 그룹 최동성으로 인해 죽었다고 생각하여 복수의 칼을 간다. 최동성의 아내가 되어 살아가며, 배동완의 아들인 배성재를 최동성의 아들로 키워냈으며, 한결같은 현모양처로 처신하며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만을 노려왔다. 최동성의 목숨이 경각에 놓인 순간, 비로소 본색을 드러내며,  복수를 실행하고자 한다. 

윤화영과 한정희의 공통점은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을 위해 자신의 '성(性)'을 이용한 복수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남편의 복수를 위해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살아가며 복수의 시기를 노린다. 윤화영의 복수의 끝은, 기고만장한 장태하의 뒤를 자신의 핏줄, 혹은 대리 핏줄로 잇게 만드는 것이며, 한정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들이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복수 자체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찌기 유디트가 그녀가 속한 공동체 이스라엘을 위해 자기 한 몸을 헌신하듯, 윤화영과 한정희 역시 그녀 자신의 권력이 아니라, 그녀가 속했던 남자들에 대한 복수로 일생을 보낸다.  지고지순하다는 말로 대신하기엔 집요하고, 퇴행적이다. 

이렇게 여성의 성을 도구로 이용한 방식은 엄밀하게 '약자'의 방식이다. 정정당당하게 권력을 놓고 한 판 붙어낼 수 없는 , 그런 수단을 가지지 못한 여성들이 편법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도하는 방식인 것이다. 잘 나가는 로펌의 대표 변호사이지만 건설 재벌이 된 장태하에게는 역부족인 윤화영이, 최동성의 사랑 외에는 자신의 남편의 억울함을 풀 그 어떤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은 한정희가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권력을 쟁취하기엔 미약한 한정희, 윤화영 세대들의 복수법이다. 
그리고 이제 그 다음 세대인 최서윤 역시 자신의 성을 무기로 삼는다. 장태주와 결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방식은 이전 세대들의 맹목적 복수와는 좀 다르다. 일종의 '제휴'이다, 

(tv리포트)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드라마 속 유디트들의 복수는 별로 성공적이지 않다.
윤화영이 벌인 복수극은, 그녀가 자신의 아들 대신 금만복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자신의 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았고, 이제 그녀의 친아들은 아버지의 대를 이은 핏줄의 복수 대신에, 아버지로 인해 죽임을 당할 지도 모르는 위기에 빠지게 되어 있다. 
한정희도 마찬가지다. 그토록 긴 세월 한결같은 최동성의 사랑을 외면하며 복수의 칼날을 세워왔던 그녀의 복수는 허무하다. 아들을 성진 그룹의 후계자로 만들지도 못했고, 이제와 알고보니 정작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최동성도 아니요, 어쩌면 자기 자신일 지도 모른다는 아이러니한 진실에 맞닦뜨리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유디트가 성녀로 받아들여지며 구원의 팜므 파탈로 명화 속을 유람할 때, 우리의 드라마들은, 윤화영, 한정희 세대의 '도발적' 복수 방식을 용인하지 않는다. 적장의 목을 성문 밖에 건 유디트는 존경 받으며 105살까지 살지만, 우리 드라마 속 유디트들에게 돌아온 것은 자기 파멸 뿐이다. 아직도 남성들의 권력은 우월하며 견고하다. 
그런 의미에서, 최서윤의 계약 결혼의 행보가 궁금하다. '성'을 무기로 한 최서윤 세대의 흥정은 과연 어떤 결말로 이어질까. 그 앞선 세대의 실패를 뛰어넘은 성취를 보일까. 하지만 잊지말아야 할 것은, 여전히 최서윤 역시 성진 그룹의 최서윤이란 사실이다. 


by meditator 2013. 8. 14. 10:17

장태하로 인해 죽은 자신의 아들의 복수를 하러 갔다가 부지불식간에 장태하의 아들 장은중을 유괴하고 말아버린 하명근 형사는 그 아들을 돌려주려 했지만 이미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린 또 다른 장은중때문에 결국 장태하의 아들을 하은중은 만든 채 십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하지만 그 세월동안, 하명근 형사는 선배 형사였던 그리고 지금 하은중 형사의 상사를 만나 아직 하은중이 자신으로 인한 상처를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는 것처럼, 장태하의 아들에게 자신의 성, '하'씨를 물려주었지만, 그 아이의 이름 은중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아들이면서, 원수의 자식이라는 애증에 휩싸여 10년을 보냈습니다. 

어린 시절, 하명근 형사는 죽어가면서도 까먹던 자신의 아들을 떠올리며 기일을 맞이하여 사놓은 카라멜을 은중이가 동생과 신이 나서 까먹었듯이, 하명근 형사의 마음은 기른 정이라는 말로 놓여지지 않는, 은중이의 아비에 대한 10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 증오와, 그의 아들을 '유괴'했다는 자신의 범죄에 대한 자책으로 인해 늘 요동칩니다. 그리고 그 요동치는 마음은 고스란히 이제는 '하'씨가 된 은중에게 전달되어 아물지 않은 상처가 되었지요. 아들이 들어오지 않는 날을 체크하는 아버지가 된 하명근씨와 아버지의 옛날 경찰 복을 잊지 않고 세탁해 놓는 속정 깊은 아들 은중이는 여전히 어딘가 서먹한 그늘을 지울 수 없습니다. 


(사진; 뉴스엔)


하지만 그뿐일까요? 가끔은 내 속으로 낳은 내 자식이지만, 그 아이의 어떤 부분이 내가 참 싫어하는 배우자의 어떤 부분을 닮았을 때, 더 미워질 때가 있습니다. 괜히 넘어갈 거 한 소리 더 하게 되고, 심지어 어떤 분들은 대놓고, 넌 꼭 꼴보기 싫은 것만 닮냐고 지청구를 주기도 한다지요. 

아마도, 하명근씨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이제는 내 자식이려니 키우려고 해도, 문득문득 그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낯설음 혹은 어떤 익숙함이 하명근 씨로 하여금 은중이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그런 면이 있지 않았을까요. 하명근씨에게 어딘가 친근함을 느끼며 다가서는 윤화영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내 자식이 살아있는 걸 알면서도 내 자식처럼 키우고 있는 장은중, 그리고 버젓이 생모가 있음에도 역시나 내 자식이려니 하고 키우고 있는 장주하, 때로는 집이 더 낯설 때가 있다는 그녀의 말은 그녀가 처한 상황에 대한 솔직한 고백일지도 모릅니다. 


9, 10회,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의 장태하, 하은중 두 사람의 모습은 그런 의미에서 참 비슷합니다. 

두 사람 모두 심하게 무뚝뚝합니다. 장태하의 무뚝뚝함은 '불도저'로 상징되는 고도 성장기의 건설 산업의 오너 그 자체입니다. '살인'을 불사할 정도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가로막는 누군가를 견디지 못하지요. 하지만, 냉랭한 아내가 자신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술잔을 나눠준다는 말에, 밖에서 밥을 먹었어도 앉아서 봐주겠다는 말에 풀어지는 얼굴에서, 장태하의 또 다른 이면이 보여집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아들 장은중이 놀릴 정도로 천하의 장태하 회장이 세상에 둘도 없는 아들 바보랍니다. 

그런데, 하은중 형사도 무뚝뚝하기가 장태하 저리가라입니다. 기업 회장이고, 그 일가이건 눈치고 뭐고 내가 하겠다면 하는 사람이 장은중입니다. 똑같은 스타일인데, 누군가는 그 스타일로 비리로 탑을 쌓아올린 기업인이 되고, 그 아들은 그 스타일로 돌직구 형사가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역시나, 아버지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자신에게 애증의 태도를 놓지 않았는데도, 하은중 형사는 그 아버지의 직업인 형사를 하고 있고, 아버지의 옛날 제복을 세탁합니다. 심지어, 동생 바보랍니다. 툭툭 막말을 하는 듯 하면서도, 동생 옷을 만들어 입히고 싶을 정도로 동생 걱정이 앞서고, 잠은 못자도 동생 입사 선물을 사는 바보 맞습니다. 


김재원 박상민 스캔들

(사진 ; tv데일리)


이런 장태하를 가장 닮은, 이른바 '물보다 진한', '피는 못속이는' 하은중 이기에 아버지 장태하와 더 첨예한 대립각을 세울 것입니다. 동생 바보 였던 그 마음이 어느새 슬그머니 우아미 바보로 옮길 조짐을 보이고 있는 하은중은 우아미를 집에 데려다 주면서 이미 우아미 남편인 공기찬의 사망 사건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우아미의 집이 날아가고, 우아미는 다쳤으며, 그녀의 손에서 'th'의 이니셜이 새겨진 커프스가 발견되었으니 하은중은 더욱 그 불도저처럼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가겠지요. 


최근 드라마를 통해 재벌들의 이야기가 많이 다뤄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드라마 속 재벌들이 대부분 좋은 사람만은 아닙니다. 고도 성장기의 신화 속에 가려져 있던 그 모습들이 여러 드라마를 통해 낱낱이 까발려지고 있으니까요.

배유미 작가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내 아들을 죽인 재벌,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재벌의 모습을 통해, 논리적인 분노를 넘어, 인간적으로 분노하게 만드는 재벌의 모습을 통해, 공분을 느끼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웃 이야기는 세상에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꺼리가 되지만, 그게 내 처지가 되면 사정이 달라지듯이, '피'로 얽혀지며 아비와 자식이 서로를 겨누는 이야기는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공감을 낳을 수 있을테니까요. 


by meditator 2013. 7. 29. 10:03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