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끝나고 난 후 심정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지인들이 많다. 누군가는 앞날의 사태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고도 했고, 또 다른 이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접게 되었다고도 했다. 냉소를 지으며 팔짱을 끼는 이도 있고, 서둘러 다시 신발끈을 묶는 이도 있다. 답답한 시절이라 느끼는 사람들, 과연 이 시간을 어떻게 해쳐나가야 할까? 이런 때 EBS 다큐 프라임은 4월 11일부터 <절망을 이기는 철학 제자백가> 중 몇 편을 다시 방영하고 있다. 아마도 암담하다 느끼는 이들에게 '등불'을 켜주고픈 시도가 아닐까 싶다. 삶이 고단할 때 그 위기를 헤쳐나갈 지혜를 선인들로 부터 다시 찾아보자는 권유일 것이다. 

 

 

성균관대 신정근 교수, 홍콩 중문대 류사오 간 교수, 펜실베이나 대 빅터 메이어 교수, 하와이 대 로저 에임스 교수 등 동양 고전의 대가들이 해석을 더한다. 

공자가 제자들과 길을 가는데 무덤 앞에서 슬피우는 한 여성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호랑이가 시아버지와 남편, 아들을 다 잡아먹었다며 슬피우는 여성, 그러면 호랑이가 없는 곳으로 가서 살면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여성은 답한다. 가혹하고 악독한 정치가 없기에 이곳에 살았노라고. 공자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잘들 기억하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고. 

공자와 맹자, '공감'의 정치 
BC 771년 주나라 요왕이 죽임을 당하며 춘추전국 시대가 도래했다. 기존의 가치가 무너지고 전쟁이 일상이 되었다. 무엇보다 약자의 삶이 짓밟히는 시대, 하지만 절망적이기에 절실하게 희망을 찾는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이들이 '공자', '장자' 등 동양 고전의 진수를 만든 '제자백가'들이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정치란 무엇인가요?' 공자는 군사를 키워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며, 신뢰를 얻는 것이라 답한다. 자공이 그 중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하겠냐고 묻는다. 그러자 공자는 답한다. 군사를 포기하고, 그도 안되면 경제를 포기할 수도 있지만, 백성들의 신뢰는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고. 너도 나도 군사력과 경제를 앞세우지만 정작 나라의 근간은 백성의 신뢰, 전문가는 이를 '소통'과 '공감'이라 해석한다. 

 

 

그렇다면 그 '소통'과 '공감'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한때는 공을 세우는 장군이었지만 모함을 당해 두 다리가 잘린 이, 그런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아들을 버리지 않는다. 공자는 이런 '가족 관계' 속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타인에 대한 존중'의 출발선으로 본다. 

그래서 전쟁에 승리하고 공을 세우기 위해 자식을 죽여 끓인 국을 들이킨 위의 장수 '악양'을 '지 지삭의 고기를 먹으면 누군들 못먹겠냐'며 인간의 도리를 벗어난 사례로 든다. 하지만 '가족'은 출발점일 뿐이다. 이런 가족으로 부터 비롯된 도덕적 윤리를 이웃, 나아가 인간 전체로 확산시켜야 한다고 공자는 말한다. 

제자 자공이 또 묻는다. 평생동안 지켜야 할 원칙이 있습니까?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다른 사람도 마땅히 하기 싫어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己所不欲勿施於人 )라고 공자는 답한다. 전문가들은 이를 현대의 '공감 의식'이라 해석한다. 자신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을 견주어 볼 수 있는 마음, 이기심을 넘어서는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도덕전 존재로서의 '인간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공자의 '도덕적 인간관'은 어떻게 실천되어야 할까? 우리에게도 익숙한 맹자의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학자들은 이를 일종의 '사고 실험'이라 본다.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구하려는 마음, 즉 측은지심(惻隱之心 )은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거나, 칭찬을 받으려는 것을 넘어선 직접적 감정으로 인간의 기본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공자의 서(恕; 용서할 서, 인자할 서, 동정할 서 )로 통한다. 즉 인류애이자, 연대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이런 '측은지심'이 백성에 대한 '연민'으로 확장되어 '어진 정치(仁政)'을 펼치는 것이 '정치'의 길이라 다큐는 새삼 확인한다. 

 

 

무엇을 버려야 할까? 
공자와 맹자가 '정치'의 기본을 찾아갔다면, 장자에게서는 '난세'를 살아내는 지혜를 구한다. 바다 위에서 폭풍우를 만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이럴 때 사람들은 무엇을 지킬까라고 생각하지만 '무엇을 버릴까'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장자는 말한다. 

중국 월나라의 계승자 수의 예를 든 장자, 그는 '왕의 자리'를 박차고 도망친다. 이미 선왕 3 명이 횡사를 당한 상황,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권력 대신, 살아남아 자유로워지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 것이다. 즉, '물질적 이득'에 '생명'이 앞선 것이다. 또한 이는 '정치 권력'에 '자유'가 우선한다는 의미도 된다고 학자들은 해석을 더한다. 

그래서일까? 초나라 유왕이 낚시질을 하는 장자를 찾아 재상으로 초빙을 했지만 '비단 옷을 입히고 좋은 대우를 받지만 결국 제물로 바쳐지는 소'의 예를 들어 거절한다. 제물로 바쳐질 때야 돼지가 되고 싶다 울어도 그럴 수 없는 처지가 되기보다는 평범한 삶의 '자유'를 누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장자는 세상을 '국가와 사회라는 촘촘한 그물'로 보고 그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했다. 즉 장자에게 있어 생명의 본질은 자유였다. 그런 그였기에 아내가 죽었을 때 슬퍼하기 보다 생명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진 아내를 위해 북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디 사람 살이가 완벽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사람 사는 세상에 어우러져 살면서 자유를 지키는 방법은 없을까? 여기서 장자는 장자- 새 - 사마귀 - 매미로 이루어지는 '사슬'을 예로 든다. 날지 않는 새를 잡으려 다가선 장자,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새는 눈 앞의 사마귀에 정신이 팔려있었고, 그 앞의 사마귀는 매미를 잡으려 하고 있었단다. 정작 그런 장자조차 새를 잡으려 남의 울 안에 들어갔으니(당랑박철 螳螂搏蟬). 이 처럼 자기 잇속만 차리다 보면 남이 자신을 노리는 지 조차 모르다 죽음에 이른다고 경고한다. 

앞만 보고 달리는, 특정 방향만 따라 가는 것, 혹은 물질적 성공에 눈이 머는 거 모두가 자기 재주만 믿고 날뛰는 원숭이와 다르지 않다고 장자는 말한다. 쓸모없는 나무가 정작 재목이 되어 잘리는 운명을 피하듯 사회적 열망에서 '자유'로워져 지금 현재를 살라는 것이다. (無用之大用 ) 장자는 자신의 발자국과 그림자가 싫어 도망을 치다 결국은 쓰러지고 마는 인간의 예를 더한다. 그저 지금 여기 나무 아래에 누워 쉬면 될 것이라며. 즉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함, 결국 장자의 도가 이르는 길이다. 

처음 무엇을 지킬까, 무엇을 버릴까에서 파도와 풍랑은 내가 어쩔 수 없듯이 난세의 흐름 역시 '나의 의지'를 넘어선 것이라 말한다. 그럴 때 그 흐름을 거스르기 보다, 버릴 것은 버려 몸을 가벼이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장자는 말한다. 또한 그런 '버림'에는 '고착화된 사고'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권력을 얻기 위해 자식을 죽여 바치는 시절, 춘추전국 시대 그 난세에 동양 사상의 두 본류인 '공감의 정치'와 '자유의 사상'이 탄생되었다. 과연 2022년 우리는 이 시절을 무엇에 기대어 건널 수 있을까? 

by meditator 2022. 4. 13. 20:28

삼포도 아니고 '산포'다. 노른자 위 서울을 둘러싼 흰자 같은 경기도, 그 중에서도 전철을 타고, 다시 또 마을 버스를 타고도 한참을 걸어 들어가는 곳에 사는 삼남매가 있다. 염제호 씨댁 기정(이엘 분), 창희(이민기 분), 미정(김지원 분)이다. 

경기도에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나 역시 경기도민으로 서울 웬만한 곳에서 약속을 잡으면 넉넉하게 2시간을 잡고 움직인다.  한 시간 정도면 괜찮은 거리다. 이런 이야기를 서울 시민인 친구들이 들으면 눈이 휘둥그레해진다. 30분이 넘으면 멀다고 생각하니 그럴 만도 하다. 이런 내게도 마을 버스 타고 전철 타고 매일 출퇴근을 하는 삼남매가 애잔하다. 웬만하면 '독립'한다고 할 만도 하건만 꿋꿋이 셋은 택시를 타고서라도 집으로 간다. 

집에 갈 택시 잡을 궁리를 하다 여자 친구에게 '촌스럽다'는 타박을 당하고 헤어지게 된 창희는 어렵사리 아버지 앞에서 자동차를 사겠다는 말을 꺼낸다. 몇 년 전에도 차를 사서 그 할부를 못갚는 바람에 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처지, 전기차라서 비용이 거의 안든다느니, 집에 오는 택시비가 더 든다느니, 이리저리 구색을 맞춰보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아버지의 손 앞에 불가항력이다. 

 

 

흰자위같은 동네
4년 만에 돌아온 박해영 작가는 <나의 아저씨>에서는 서울 변두리 동네를 배경으로 삼형제의 이야기를 풀어내더니, 이제는 그 보다 조금 더 떨어진 경기도 한 동네로 시선을 옮긴다. 우러러 볼 만한 경력도, 부러워 할 만한 능력도 없이 그저 순리대로 살던 아저씨들은 이제 2030 세대의 '갑남을녀'들이 '프레임'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아저씨들이든 2030세대이든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다. 기정, 창희, 미정 역시 부대끼는 지하철에서 만나는 평범할 대로 평범한 젊은이들이다. 

모처럼 찾아온 동네 친구에게 창희는 말한다. 내가 서울에서 살았으면 너랑 친구 안했을 거라고. 그 말인즉, 서울에서 살았으면 친구는 '선택'의 대상이 되지만,  이 작은 마을에서 '친구'는 가족처럼 날 때부터 그냥 주어지는 거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그런 면에서 동네 운동장에서 술을 먹는 건지, 축구를 하는 건지 모르겠던 <나의 아저씨> 친구들이 떠오른다. 그렇다. 사람 냄새나는 곳, 하지만 그래서 '촌스러운' 곳, 그곳이 이들의 '터전'이자, '아킬레스 건'이다. 그렇게 박해영 작가는 <나의 아저씨>에 이어 또 다시 '장소'를 전면에 내세우며 '삶의 풍경'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시청자들은 주인공들의 사연에 앞서 그들이 처한 공간의 정서 속에 물씬 빠져들게 된다. 

그런데 계란 흰자같은 경기도민의 한계에 대해 구구절절 하소연을 하는 창의 곁에서 미정이 반문한다. 서울에서 살았으면 달랐을까? 그럼, 서울에서 살면 달랐지라고 강하게 답하는 창희에게 미정은 말을 잇지 않는다. 그리고 혼잣말을 더한다. 서울에서 살아도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고. 

 

 

사는 것도 흰자위
노는 날에도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나가 머리를 볶고 들어와 맘에 안든다고 감았다, 그걸 다시 드라이로 풀어내느라 난리를 치는 큰 딸, 그 딸을 보고 엄마는 속터져하며 말한다. 지랄도 팔자라고. 지 성질머리가 지 팔자를 들볶는다고. 하지만 새벽부터 해질 녁까지 싸구려 싱크대에 밭일까지 쉬지 않고 일하는 아버지 염씨 앞에 오며 가며 시간을 다 보내느라 연애할 시간이 없다고 창희의 말처럼 지랄 맞아 보이지만 술 마시다가도 꼬박꼬박 집에 들어가는 삼남매의 고분고분한 일상은 머리라도 볶아야 숨통이 트일 것처럼 보인다.

미정이 생각은 안하냐는 엄마의 지청구 앞에 기정은 미정이는 젊잖아?란다. 젊다고 다를까? 카드 회사 계약직 직원인 미정은 어디서나 그림자같다. 오빠가 전기차를 사겠다고 아버지 앞에 야심차게 들이대다 맞을 뻔하는 해프닝을 벌이는 옆에서도 미정이는 꾸역꾸역 밥을 입에 넣는다. 회사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 역시도 출퇴근 시간에 쫓겨 그 흔한 회식 한번 못하고, 그 덕일까 '이쁘지만 매력이 없다'는 평가를 받으며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로 살아간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다. 그렇게 미정과 같은 이들을 회사의 '행복 지원센터'가 부른다. 볼링 동호회라도 들라는데, 함께 불려간 박상님 부장은 나지막하게 말한다. 그냥 이런 사람들도 있는 건데 그냥 이렇게 살게 놔두면 안되는 거냐고. 하지만 그냥 그런 걸까? 

팀장에게 넘긴 보고서가 빨간펜 선생님이 매긴 답안지처럼 빨간 줄이 정신없이 그어진 날, 그런 자신을 두고 팀원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회식 자리로 떠나가는 것을 보며 미정은 답답한 마음에 '가상의 당신'을 찾는다. 세상 사람들에게 선뜻 자신을 드러내보이는 것이 힘든 미정만의 '해방'이다. 가상의 그가 과연 미정을 해방으로 인도할까?

그런데 염씨네 삼남매만 답답한 게 아니다. 전기차라도 사겠다고 그래야 뽀뽀라도 하지 않겠냐고 궁여지책으로 말을 건네보는 창희의 처지도 이해가 되지만 그런 창희에게 종주먹을 들이대려는 아버지 염제호의 삶도 녹녹치 않아 보인다. 흰자위같은 동네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흰자위같은 삶은 세대 불문이다. 하지만 이들 사이의 공감은 멀다. 

<나의 해방일지>는 그렇게 사는 게 참 답답해 보이는 젊은 세대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옴짝달싹하기 힘들게 옭죄어 오는 삶, 일도, 연애도, 아니 사는 것이 통털어 무엇 하나 그리 뽀족하게 '씨원'하게 풀리는 것이 없는 기정, 창희, 미정 삼남매를 통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말한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로 젊은 세대에서부터 중년의 세대에 이르기까지 위로와 힐링을 주었던 박해영 작가, 과연 이 답답한 삼남매의 '해방 일지'를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다시 한번 비빌 언덕이 되어줄수 있을까?


by meditator 2022. 4. 10. 17:33

우리 '액션' 영화의 오래된 갈증이 무엇이었을까? 나현 감독의 <야차>를 보면 그 답이 나온다. 4월 8일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한 이 영화는 사천왕을 모시는 8명의 신 중 하나인 '야차'를 제목으로 내세운다. '사람을 잡아먹는 포악한 귀신'이지만 '부처님을 수호'하게 되는 야차가 가지는 양면성을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강인(설경구 분)와 '블랙팀'을 통해 한껏 구현해 낸다.

4년 전 홍콩의 뒷골목, 차에 다가가 무언가를 건네는 인물, 그런데 갑자기 지프 한 대가 전속력으로 달려오더니 다짜고짜 그 차를 들이받는다. 한바퀴를 돌아 나뒹구는 차, 보통 액션 장면에서의 호흡보다 한 번 더 나아가며 이 영화의 정체성을 각인한다. 그리고 들이받는 지프에서 유유히 등장하는 지강인, 거래를 하려했던 인물은 동료들을 배신한 지강인과 한 팀이었던 인물이다. 그에게 총을 들이댄 지강인은 배후를 묻지만 답을 얻지 못한다. 잠시 뒤 하늘을 울리는 총소리, 배신자에게는 '자비'없는 처단만이! 이렇게 '야차같은' 장르의 이름표를 내보이며 영화는 시작된다. 

 

 

선양을 배경으로 한 무한액션 
'한국' 사회는 총기 소지가 불법이다. 물론 그럼에도 요즘 장르물을 중심으로 '총기'의 등장이 빈번해지고는 있다. 하지만 총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구구한 장치들이 필요하다. 액션 장르에서 황야의 결투처럼 총기를 들고 끝장을 보는 서사에 대한 갈증, 그 갈증을 풀어내기 위해 <야차>는  '선양'이라는 지역적 장치를 선택했다. 

선양, 한때 만주족의 수도였던 도시, 하지만 이제 중국에서 가장 큰 공업 도시가 된 이곳을 영화는 동북아 각 나라 스파이들이 각축전을 벌이는 도시로 설정한다.  번성한 도시답게 밤에 더 화려하게 빛나는 도시, 하지만 조금만 깊숙한 골목으로 들어가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잘해줄게'를 연발하며 데려가 신장, 간, 쓸개 등을 해체해 버리는 '법'과 '불법'의 경계가 모호한 도시이다. 또한 마약 등의 사건에 현장범은 그곳에서 '사살'이 가능한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대낮에 북한로동당에서 외화벌이를 총괄하던 문병욱이란 인물을 두고 북한 스파이들과 검은 복면을 한 사람들이 총격전을 벌인다.

그런데 여기에 지강인을 팀장으로 한 국정원도 연루되어 있다. 애초에 블랙 팀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한 문병욱, 하지만 그 사건으로 문병욱의 행방은 오리무중, 지강인은 그를 되찾기 위해 D7라 불리는 일본인 스파이 오자와(이케우치 히로유키 분)의 아지트를 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렇게 문병욱이라는 인물 찾기라는 사건을 씨줄로 선양을 배경으로 스파이들의 살벌한 쟁투를 풀어낸다. 그리고 그걸 통해 '정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정의를 묻다 
정의에 대한 질문, 그 시작은 대한민국이다. 그리고 강직한 검사 한동훈이 등장한다. 가진 자들의 부도덕과 불공정은 더 많은 이들을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만든다는 신념을 가진 한동훈 검사는 재벌 총수를 구속시키려 하지만 절차 상의 문제로 인해 스스로 물러선다. 수사관들이 무단으로 총수의 사무실에 들어갔다는 그 이유만으로 다된 밥에 스스로 코를 빠뜨리는 고지식함, 이렇게 영화는 한동훈이 내세운 원칙적인 정의의 한계를 먼저 내보인다. 

한동훈은 좌천되고 다시 돌아가 수사를 마무리하고 싶은 그의 열망이 스스로 선양이라는 도시로를 택하게 만든다. 그저 선양 국정원 팀의 불투명한 보고를 감찰하면 된다는 명목이었는데 도착한 그를 맞이한 건 블랙 팀의 총격전이다. 

영화는 날 것의 액션씬에 더해, 지강인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의와 한동훈의 원칙적 정의를 대비시키며 서사적 흥미를 자아낸다.  적에 대해 가차없는 작전, 거기에 더해 배신자에 대해서도 추호의 용서도 없으며,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의문의 여성에게 고문을 마다하지 않는 방식이 사사건건 한동훈으로 하여금 반발하게 만든다. 거기에 더해 첫 장면, 지강인이 같은 팀원이었던 인물을 '처단'하게 만들었던 '두더지'라는 암약하는 이중 스파이의 존재가 그 갈등의 고뇌를 깊게 만든다.

물과 불처럼 결코 섞일 수 없을 것같은 지강인과 한동훈, 그리고 블랙팀을 위기에 빠뜨리게 되는 한동훈에 대해 반발하는 블랙팀원들과의 신념과 인간적인 갈등을 영화는 주된 관전 포인트로 삼는다. <오징어 게임>에서 멀쩡한 대기업 직원에서 결국 자신의 승리를 위해 '협잡꾼'이 되어버린 상우였던 박해수가 이번에는 그 반대로 고지식하고 원칙적이어서 스스로 위기에 빠지게 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고지식해서 종종 웃픈 상황을 자아내는, 하지만 그래서 지강인이란 인물과 '버디(BUDDY)'가 되어가는 캐릭터를 맡아 극중 주된 재미를 이끌어 낸다.

 

 

<야차>는 어떤 면에서는 '정의를 이루어 내는 모든 방법이 정의로워야 한다'며 절차적 정의에 천착했던 , 순수했던 인물 한동훈이 '선양'이라는 공간에서 '정의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야 한다;며 불법과 탈법의 경계를 넘는 블랙팀의 작전을 통해 스스로 '정의'에 대해 물으며 변화해 가는 '성장 서사'이기도 하다.  그 성장의 결과물은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통쾌하게 선사된다. 

물론,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한동훈의 맞은 편에 배신을 하는 이는 가차없이 처단해 버리는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지만, 결국 그 밑바당에 팀원들이 목숨을 내어줄 정도의 '의리'를 장착한 지강인이란 중심이 우뚝 서있어야 한다. 설경구란 배우가 오래도록 우리 영화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지만,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을 기점으로 다른 질감과 색채를 가진 배우로 새롭게 다가왔다. <야차>에서 설경구는 <불한당>이래 그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질감의 연기, 그 연장선상에서 '니 껍데기를 벗겨줄게'란 대사에 전혀 이물감을 느끼지 않도록 만드는  '야차'같은 캐릭터로 영화의 중심을 잡아낸다. 

제작진이 해보고 싶었다는 총성이 마구 울리며, 거침없이 상대방의 머리를 겨누는 선양이라는 스파이들이 번성하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무한 액션, 거기에 '정의'의 방식을 둘러싼 주연들의 갈등과 화해라는 서사적 재미를 통해 <야차>는 흥미로운 장르물이 된다. 물론, 눈밝은 관객이라면 예측 가능한 악역들, 굳이 <야차>만이 아니라 액션 장르의 절정에서 드러나는 보여주기 식 선악의 대결 등이 입맛을 다시게 하지만, 그래도 또 다른 도시에서 한동훈을 소환하는 지강인의 호출에 다음 편을 기대하게 만든다.  







by meditator 2022. 4. 9. 14:10

거울이 깨지고, 건물이 우그러진다. 세상의 위 아래가 바뀐다. 마치 영화 <인셉션>의 한 장면같다. 그런데 노은비라는 인물의 기억 속이다. 주마등 위기 관리팀의 주련(김희선 분)과 최준웅(로운 분)이 뛰어든 곳이다. 주마등 위기 관리팀은 왜 노은비의 기억 속으로 뛰어들었을까? 바로 그녀의 우울지수가 극에 달해 '자살' 위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과연 위기 관리팀은 그녀를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을까?

 

 

mbc의 금토 드라마 <내일>은 흥미로운 설정의 드라마이다. 때로는 야쿠르트 아줌마처럼, 때로는 기세 등등한 여왕의 모습으로 시시때때로 그 모습이 바뀌는 옥황(김혜숙 분)은 저승 독점 기업 주마등의 회장이다. 그녀가 이끄는 '주마등'은 '저승사자' 들이 죽은 자들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곳이다.

자살자를 구하는 저승사자들
그런데 옥황이 이번에 새로운 부서를 하나 만들었다. 이른바 '위기 관리팀', 그런데 이 위기 관리팀에 대한 기존 저승 사자들의 눈길이 곱지 않다. 왜냐하면 죽은 자를 저승으로 데려오면 될 것을 굳이 스스로 죽으려는 자들을 '저승사자'들이 나서서 구해주기 때문이다. 옥황이 '위기 관리팀'을 만든 취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들이 너무 많아 '지옥'이 붐비고, 직원들의 업무가 과중하기 때문이라는데, 과연 그뿐일까? 

자살자의 죽음을 막지 못해 위기에 봉착한 '위기 관리팀', 주마등의 앱에 붉은 색 경고음이 울린다. 자살 위기에 놓인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은 방송 작가로 일하는 노은비, 그녀에게로  팀장 구련과 '코마' 상태로 반인반혼의 존재 최준웅이 달려간다. 

죽음에 이를 정도로 우울이 극에 달한 노은비, 위기 관리팀은 그런 그녀를 구하기 위해 <인셉션>처럼 그녀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위기 관리팀이 찾아간 그녀의 기억 속, 그곳엔 학폭 피해자 노은비가 있었다. 

노은비는 앞 자리 친구와 함께 재미난 일을 이야기 하며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웃었다는 이유만으로 김혜원과 그 친구들은 노은비를 학교 건물 뒤로 불러내 마구 때린다. 그리고 말한다. 이제 부터 김혜원이 볼펜을 똑딱거릴 때마다 웃으라고. 김혜원 무리에게 마구 맞고 발로 채인 노은비에게 김혜원이 볼펜을 똑딱이고, 노은비는 결국 억지로 일그러진 웃음을 지어보인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녀들, 특히 김혜원은 볼펜을 똑딱여 노은비를 반 아이들 앞에서 이상한 아이를 만들고, 수시로 그녀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우유를 붓고, 사물함에 오물을 채우고, 반 아이들에게서 왕따를 만들었으며 가장 친한 친구마저 그녀를 외면하도록 만든다.

그래도 그 고통스러운 시절을 노은비는 견뎠다. 그래서 이제 어엿한 방송작가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녀가 만드는 방송에 김혜원이 게스트로 등장한 것이다. 학폭 피해에 대한 웹툰을 그린 작가로, 노은비는 그런 김혜원을 인터뷰해서 방송을 만들어야 하는 처지였다. 도저히 할 수 없다는 노은비에게 피디는 겨우 예전 일로 그러냐고 '프로 정신'을 운운했고, 다시 나타난 김혜원은 다시 볼펜을 똑딱이며 노은비를 몰아부친다. 

또 다시 나락으로 빠져든 노은비, 학창 시절처럼 아무도 그녀의 편이 되주지 않는 현실에 결국 건물 옥상 난간에 올라선다.  '과거'가 아니라 무한루프처럼 되돌아 온 '학폭'의 트라우마, 위기 관리팀은 그런 노은비를 어떻게 죽음에서 구해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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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해답이라면, 죽어!
그런데 난간에 기대선 노은비에게 구련은 외려 뛰어내리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냉정하게 말한다. 죽는다고 해결될 것은 없다며. 노은비는 죽으면 이 힘든 상황에서 벗어날 수는 있지 않겠냐고 울며 답하고. 구련은 말한다. 죽으면 자신의 죽음을 마음아파하는 이들의 마음을 짊어진 채 끝없는 후회의 길을 걸어야 하는 '지옥'이 기다릴 뿐이라고. 

'견뎌야 해', '이겨내야 해', 구련이 던진 말들, 그런데 그건 노은비가 바로 스스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울며 했던 말들이다. 자신이 견뎌왔던 시간을 되돌이킨 노은비,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게 '죽음'이 아니라, 삶이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미 발을 헛디뎌 건물에서 떨어져 버리고 마는데, 그런 노은비를 '저승사자' 구련이 가뿐히 안아 구한다. 

그런데 아직도 '위기 관리팀' 속 노은비의 붉은 신호음은 꺼지지 않는다. 그때 특별출연 정준하와 나타난 최준웅, 노은비가 힘들때마다 꺼내본 <무한도전>의 정과장의 모습으로 나타난 정준하는 예의 정과장이 되어 노은비를 웃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노은비를 최준웅은 안고 위로한다. 괜찮다고. 

구련이 노은비로 하여금 현실을 올바로 직시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면, 최준웅은 상처입은 노은비를 품어 주었다. 드라마는 죽음의 위기에 빠진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 다시 생각케 만드는 장면이다. 

드라마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죽음의 늪에서 한 걸음  빠져나온 노은비가 세상에서 만난 뉴스, 그건 여전히 그녀 앞에서 가해자였던 김혜원의 가증스런 가면이 벗겨지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비로소 노은비는 용기를 낸다. 자신이 피해자임을 증언할 수 있다고. 아마도 그 빌딩 옥상에서 죽음을 선택했다면 노은비는 그런 뉴스도 볼 수 없었고, 스스로 피해자의 그늘에서 벗어날 기회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구련의 말처럼 지옥의 길고 긴 후회의 길을 걷고 또 걷기만 했을 것이다. 

자살자 구원의 환타지로써 <내일>은 끝까지 그 몫을 다한다. 김혜원 앞에 나타난 구련은 김혜원을 과거의 기억 속으로 보낸다. 이젠 김혜원이 그 시절 김혜원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처지이다. 배를 차이고, 우유를 머리에 뒤집어 쓰고, 살려달라 애원하는 김혜원, 구련은 말한다. 겨우 한번을 당하고. 살려달라 하냐고. 너는 기억못한다는데 노은비는 내내 고통받으며 살아왔다고. 그리고 들려오는 김혜원의 실체에 대한 뉴스, 허물어지는 김혜원에게 죽지 말라고, 지금보다 더 끔찍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말을 남기고 구련은 자리를 뜬다. 

이처럼 <내일>은 자살 위기에 몰린 학폭 피해자를 죽음에서 구하는 에피소드로 '주마등 위기 관리팀'의 활약을 연다. 1, 2회 걸쳐 주마등처럼 스쳐간 노은비의 기억, 그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은 왜 노은비를 자살로 부터 구해내야 하는지 공감한다.

<인셉션> 식의 과거 탐험을 혼란스러웠지만, 그럼에도 옥황상제를 필두로 주마등 주식회사라는 신선한 컨셉으로 등장한 저승사자의 자살자 구출 프로젝트는 신선하다. 구련이라는 사연깊은 캐릭터의 단호한 조처, 그리고 그런 그녀와는 반대로 우선 자신을 던져 피해자를 구하고 보려는 최준웅의 따뜻한 인도주의가 맞물리며 '위기 관리팀'의 매력이 더해진다. 거기에 가해자에 대한 처절한 응징이 환타지로서의 통쾌함을 더한다. 

by meditator 2022. 4. 7.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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