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니버스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우리들의 블루스>, 3회로 한수(차승원 분)와 은희(이정은 분)의 이야기가 마무리됐다.  시청자들의 예상대로 한수는 어떻게든 은희에게 돈을 빌리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고, 그런 줄로 모르고 은희는 몇 십 년만에 한수와 둘이 온 목포 여행에 설레기만 한다. 

아내와 별거를 한다며 은희에게 둘만의 여행을 떠나자고 하는 한수, 함께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은희의 입가에 묻은 과자를 떼어주고, 그 시절의 솜사탕을 함께 먹고, 없어진 자리에 생긴 호텔에 함께 머문다. 은희의 마음은 드라마 속 OST로 등장하는 Quando, Quando, Quando, 언제 내 사람이 될 지 말해 주세요. 제발 말해주세요, 언제일지, 언제일지, 언제일지."라는 듯 간질간질하다. 하지만 그 시간 미국을 떠난다는 아내와 딸에게, 특히 골프가 더는 재미없다는 데도 골프가 없이 니가 어떻게 사냐며 절규하듯 전화를 끊은 한수는 거울을 보며 연습한다. '은희야, 나 2억만 빌려줄래?'

 

 

은희, 첫사랑을 잃다
하지만 은희의 설레임은 오래가지 못한다. 명보를 만나 한수의 처지를 알게 된 인권과 호식이 은희에게 그 사실을 알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은희는 친구들의 말을 믿지 않으려 하지만 사실 '별거'도 하지 않는다는 친구들의 증거 사진 앞에 황망하다. 안그래도 소개를 받으려 해도 다들 자기 돈만 본다며 한수에게 토로했던 은희, 오랜만에 찾아온 첫사랑 한수마저 그러니 마음이 찢어진다. 


오늘 나랑 놀고, 이제 같이 잘 거냐고 . 아님 돈을 빌려주냐고 직진하는 은희, 그런 은희 앞에 한수는 무너진다. 한수를 쿠션으로 마구 치며 은희는 울부짖는다. '네가 나를 친구로 생각했으면 (중략) 이런 데 끌고 오지 말고, 잘 사는 마누라랑 별거네 이혼이네 말하는 순간 너는 나를 친구가 아닌 너한테 껄덕대는 푼수로 안거지'. 그렇게 은희는 친구도 잃고, 첫사랑도 잃었다. 

여기까지가 <우리들의 블루스>의 예상 가능한 스토리였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역시 노희경 드라마인 이유는 여기부터이다. 한수와 함께 호텔에 와서 호텔 방에 누워 본 은희는 울컥한다. 몇 개의 가게와 엄청난 현금 동원력을 가진 '부자'가 될 때까지, 그동안 돈 버느라 이런 좋은 데 한번 와보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눈물이 나오는 거다. 그런데 이 무슨 호사인가, 몇 십년만에 돌아온 첫사랑과 함께 이 좋은 곳에. 하지만 환타지는 금세 끝났다. 

과연 이럴 때 어떻게 할까? 아마도 대부분 그 호텔 방에서 은희처럼 한 것처럼 한바탕 퍼붓고 '똥 밟았다'하면서 두번 다시는 뒤도 돌아보지 않지 않을까? 친구들에게 조식을 먹고 가겠다고 말했듯이 다음날 아침 홀로 앉아 조식을 끄적이는 은희, 생전 처음으로 온 호텔에 눈물짓던 때가 언젠가 싶게 처량맞다. 그때 호식에게 온 전화, 은희는 친구들에게 퍼붓는다. 니들이 친구냐고. 집도 절도 없다는 한수, 그런 한수에게 돈이 여유가 있으면서도 꿔주지 않은 형식이, 빌려주고 이자놀이하듯 하는 또 다른 친구, 그리고 신나서 뒷담화하는 너희들', 이라며 은희는 말한다. '돈많은 나를 챙기듯, 돈없는 한수도 챙겼어야지.' 

'역지사지', 그 하룻밤 사이에 은희는 많은 생각을 한 것이다. 다 거짓말은 아니었다고 말하던 한수, 자신의 꿈이 가수라던 은희에게 농구가 꿈이라던 한수, 아이는 자신처럼 돈때문에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그랬다던 한수, 그리고 평생 돈을 벌어 남 좋은 일만 하던 은희에게 차마 그 소중한 추억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서 말못했다던 한수의 마지막 말, 그리고 친구들이 전한 한수의 처지, 그 모든 것을 은희는 짚어본 것이다. 

제주로 돌아와 희망퇴직을 친구에게 부탁하고 떠나던 한수에게 온 문자, 은희는 한수에게 2억을 보냈다. 그 돈은 돈이 있어서 보낸 돈이 아니다. 그래도 한수를 이해하려고 애쓴 은희는 지난한 노력의 결과이다. 한수와 함께 바닷가에 간 은희는 한수에게 말했다. 잘 자라줘서 고맙다고. 이제 은희는 잘 자라주지 못한, 자신의 꿈조차 이루지 못해, 그 꿈을 자식을 통해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바둥대는 한수를 그래도 '친구'로 접어준 것이다. 호식 등의 친구들에게 은희는 말했다. 니들은 어려울 때 나한테 돈을 잘도 꾸면서, 왜 한수는 나한테 돈 빌리면 안되냐고. 

사람의 참모습은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드러나게 된다. 고등학교를 함께 졸업하지 못했음에도 동창회의 주역이 된 은희, 그리고 은희 주변의 사람들, 그건 그저 은희가 돈이 많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을 꼬셔 돈이라도 빌려보려던 첫사랑, 어른들 말대로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은희는 돈을 빌려준다. 첫사랑은 잃어도 친구는 잃고 싶지 않은 은희의 '휴머니즘'이다. 

 

 

그렇게 노희경 작가는 은희를 통해 사람살이를 이야기한다. 이십년도 더된 첫사랑, 그 첫사랑도 '집도 절도 없는 현실'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가장으로 바둥거리는 한수의 고단함을 은희는 헤아려준다. 그리고 힘들 때는 스스럼없이 자신에게 손을 벌리는 친구들의 자리에 앉혀준다. 그저 '밑진 장사'한 셈치고. 돈은 잃어도 사람은 잃지 않겠다는 은희는 큰 그림이다. 우리는 어떨까? 과연 그럼에도 '사람'을 잃지 않으려 했을까? 나의 설움, 나의 아쉬움, 그리고 나의 손해에 주판알을 튕기느라 연연하다 사람도 놓치지 않았던가. 

참 멋진 여자다. <우리들의 블루스> 3회를 본 소감이다. 그 멋진 여자를 이정은 배우만큼 멋지게 표현할 배우가 있을까. 참 멋진 여자 은희 씨는 일기장에 자신의 마음을 꾹꾹 눌러 첫 사랑을 보내고, 노래를 부른다. 멋지게 나이드는 거 쉽지 않다. 딱 그녀의 노래다. 

그날은 생일이었어 지나고 보니/ 나이를 먹는다는것/ 나쁜 것만은 아니야
세월의 멋은 흉내낼 수 없잖아/ 멋있게 늙는 건 더욱 더 어려워
(중략)그렇게 세월은 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것도/ 즐겁다는 것도
모두다 욕심일 뿐/ 다만 혼자서 살아가는 게/ 두려워서 하는 얘기
얼음에 채워진 꿈들이/ 서서히 녹아 가고 있네
(중략)내 맘 나도 모르게/ 차가운 얼음으로 식혀야 했다
 



by meditator 2022. 4. 17. 19:03

학교와 락음악이라 하면 이제는 고전이 된 <스쿨 오브 락>이 떠오른다. 우연히 음악 교사가 된 로커 듀이 핀(잭 블랙 분), 자신이 혹한 그룹에서 쫓겨나 학교 대리 교사인 친구 집에 얹혀사는 신세이지만, 고답적인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던 아이들과 '락 페스티벌'에 참여하며 함께 성장하는 영화이다. 학교로 간 락이라는 설정만으로도 신선했던 영화, 이제 또 한 편의 락 영화가 학교로 간다. 


 

그런데 이번에는 락을 하는 선생님이 아니다. 스스로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락을 선택한 아이들 케빈과 헌터, 그리고 에밀리의 이야기다. 

왕따, 부적응자, 그리고 감정 조절 장애 학생의 선택 
헌터(에드리언 그린스미스 분)는 아버지와 둘이 산다. 아버지는 매냥 헌터가 비아냥대듯이 여성들의 가슴에 '식염수 주머니'를 넣는 성형외과 의사이다. 어릴 적 엄마가 아버지와 이혼 후  떠나고 그 엄마 얼굴이 가족 사진에서 잘려 나간 이후 늘 일과 연애로 바쁜 아버지, 헌터는 자신의 외로움에 대한 구원을 '락'에서 찾았다. 지하의 그의 방 곳곳을 메운 메탈리카 등 메탈 락 밴드의 사진들(실제 메탈리카 멤버들이 결정적인 장면에 까메오로 등장한다), 긴 머리, 가죽바지, 그에게 메탈은 '구원'이자, 삶의 열쇠이다. 하지만 그 거친 복장에도 불구하고, 학교 주먹 좀 쓰는 애들한테 맥없이 나자빠지고 마는 헌터의 모습처럼 그 '구원의 열쇠'는 어쩐지 '찌질'한 헌터의 어색한 포장지같다. 

또 한 명 <그것>의 제이든 마텔이 분한 케빈은 헌터의 유일한 친구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친구가 된 계기가 헌터처럼 케빈이 친구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는 걸 헌터가 구해줘서이다. 체육 수업을 받는 대신에 고적대를 택했듯이 케빈은 학교 생활의 주변을 조용히 맴돈다. 그런데 고적대 작은 북이나 겨우 치는 케빈에게 락에 심취한 헌터가 드러머의 길을 종용한다. 헌터가 만든 '고문 기계'라는 곡, 하지만 그걸 치기 위한 장비도, 능력도 케빈에게는 없다. 

그런 케빈의 눈에 들어온 한 소녀가 있다. 같은 고적대에서 클라리넷을 불던 에밀리(아이시스 헤이스워스 분)다. 감정 조절 장애가 있는 에밀리는 약을 끊는 바람에 혼자 다른 음악을 하듯 부는 클라리넷을 지적하는 선생님께 욕을 하며 대들고 만다. 근데 그런 에밀리가 어쩐지 케빈은 맘에 든다. 더구나 에밀리가 첼로를 연주하는 것을 본 케빈은 그녀가 헌터와 함께 하는 메탈 밴드의 '베이스' 파트를 맡았으면 좋겠다. 


 

요즘은 '청소년 영화'라고 해도 '청소년 관람 불가' 내용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메탈 로드>도 청소년 관람 불가라는 딱지가 붙었지만 막상 영화는 '순한 맛'이다. 상대 밴드의 드러머의 상습 약물 복용, 폭력, 베드씬 등 적나라한 내용들이 들어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이 머리를 밀고 검고 하얀 색으로 칠을 해도 무시무시하게 '메탈릭'해 보이기 보다 어쩐지 애잔하고 심지어 귀여워 보이는 수준이다. 무엇보다 그런 장치들이 세 주인공들의 우정과 애정의 삼각 관계 속에서 적당하게 양념처럼 뿌려진다. 

아마도 <메탈 로드>의 가장 큰 미덕은 왕따이거나, 부적응자, 그리고 감정 조절 장애를 겪는 청소년들이 '메탈'이란 음악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려 애쓰는 지점에 있지 않을까 싶다. 카드는 허용해도, 아들을 위해 시간과 맘을 허락해 주지 않는 아버지 대신, 아버지의 카드로 '메탈' 장비를 사서 학교의 '배틀 오브 밴드'에 출전하고자 한다. 사실 '메탈 밴드'를 표방하지만 헌터의 겉멋과 어설픈 케빈의 연주가 버무려진 상황이었을 뿐인데, 그래도 두 사람은 열심히 준비해 간다. 무엇보다 겨우 작은 북 리듬 정도를 연주하던 케빈이 헌터가 준 음악을 들으며 메탈릭한 연주자로 거듭나는 부분이 흥미롭다.

청소년 영화답게 이들의 밴드 출전은 험란하다. 물론 그 험란함은 충분히 해피엔딩을 예상할 정도의 험란함이다. 둘도 없는 친구 헌터와 케빈은 케빈의 여자 친구가 된 에밀리와의 문제 등으로 갈등을 겪는다. 게다가 늘 카드만 쥐어줄 뿐 무관심했던 아빠는 헌터의 폭주를 더는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처방을 내린다. 물론 '영어'의 몸이 된 헌터를 케빈이 구하며 두 사람은 결국 애초에 목적한 대로 '베틀 오브 밴드' 경연에 나서게 된다. 


 

어설프기만 했던 두 찌질한 소년이 '메탈' 정신을 표방하며 좌충우돌한 끝에 선 경연장, 거기에 에밀리가 합류한다. 예의 '메탈' 정신을 늘 운운하던 헌터의 연주와, 앳된 미소년에서 제법 거친 드러머가 된 케빈의 성장도 볼만 하지만, 소심과 폭주를 오가며 자신없어 하던 에밀리가 케빈의 응원에 힘입어 약대신, 메탈릭한 첼로 연주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한껏 뿜어내는 장면은 통쾌하다. 청소년의 불안정한 감정을 그저 '약'으로만 다스리려는 오늘날의 세상에 한 방을 먹이는 듯한 설정은 주목할 만한 장면으로 남는다. 

'순한 맛'이라고 했던 것처럼 <메탈 로드>는 예측 가능한 설정과 스토리의 영화이다. 마치 예전에 주말마다 하던 디즈니랜드 아동물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를 보며 마음이 따뜻해 지는 이유는 그저 잡풀처럼 밟힐 것 같은 아이들이 그 누구의 도움없이 밟혀도 다시 일어서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고, 우정과 사랑을 일궈가며 영화의 제목처럼 자기 삶의 'Lords'가 되어가는 과정은 '순한 맛'이지만 보는 이를 미소짓게 만든다. 게다가 <스쿨 오브 락>의 한 주인공이 음악이었던 것처럼 클래식에서 부터 메탈에 이르기까지 음악들은 빠질 수 없는 듣고 볼 거리이다. 


by meditator 2022. 4. 17. 13:12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