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 이 작품을 운운하면 어쩔 수 없이 연식이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는 1973년 만들어 졌다. 후에 <소머즈>로 우리 나라에서 인기를 끌었던 '린지 와그너'가 여주인공을 맡았다. 하지만 영화보다는 우리나라에서는 1978년 무려 58부작으로 만들어졌던 tv 시리즈로서의 <하버드 대학의 공부 벌레들>이 인기를 끌었다. 

2021년에 1970년대에 만들어진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을 소환하는 이유는 <로스쿨>의 수업이 이 작품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트군, 1936년 "하트군, 1936년 피터 와그너 법을 제정하여 노동3권을 인정하고,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를 규정한 노동법 제정의 의미를 설명해보게"

드라마 속 킹스필드 교수(존 하우스만 분)는 수업에 가까스로 들어간 주인공에게 대뜸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진다. 이른바 '소크라틱 메소드'이다. 이런 대뜸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답을 하고, 대답이 시원치 않은면 다시 논박을 받고, 이런 식의 문답법식 수업에 대처하기 위해 학생들은 밤을 세워 스터디를 하고 법학서를 줄줄 욀 정도로 공부를 한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했던 로스쿨 제도, 그 제도가 2009년 도입되었다. <하버드 대학의 공부 벌레들>이 방영되던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법관'이 되는 유일한 방법은 '사법고시'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드라마에서처럼 로스쿨 제도가 만들어 진 이후 <로스쿨>에서 처럼 전직 의사도, 사회 복지학과 출신도, 의상학과 출신도 법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높은 등록금으로 '가진 자'들의 '사다리'가 되지 않도록 차상위 계층 특별 전형도 마련됐다. 

 

 
양크라테스의 소크라틱 메소드 수업으로 문을 연 <로스쿨>
4월 14일 jtbc를 통해 방영된 <로스쿨>은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을 본 사람이라면 추억을 소환할 수 있도록 예의 소크라틱 메소드를 통해 드라마를 연다. 중후하면서도 엄격했던 킹스필드 교수님 대신, 한때 '강마에'로 카리스마를 날렸던 김명민 배우가 패셔너블하지만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양크라테스'로 돌아왔다. 

<하버드 대학의 공부 벌레들>에서 가난한 집안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법학 대학원의 밤을 불태웠던 주인공은 그 시절처럼 첫 수업에서 양크라테스의 숨쉴틈 없는 질문에 결국 구역질을 해대며 강의실을 뛰쳐나가는 차상위특별 전형 출신의 강솔A가 되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코리아 버전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인가 했던 드라마는 겸임 교수였던 서병주(안내상 분)의 죽음 이후 국면을 달리한다.

전직 검사장 출신, 로스쿨에 자신이 불명예스럽게 검사장을 물러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땅값 56억원을 기부하며 '속죄'하듯 교수가 되었던 서병주였다. 그가 자신의 대기실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서병주는 누가 죽였을까? 
그런데 서병주와의 악연으로 법복을 벗은 사람이 또 한 사람 있다. 바로 <로스쿨>의 킹스필드 교수, 양크라테스 양종훈이다. 서병주가 '법'을 이용하여 '법망'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자, 검사복을 벗어던진다. 제 아무리 '법'이 정의로워도 '법조인'이 정의롭지 못하다면 결국 서병주와 같은 이들이 판치게 될 것이라는 그의 깨달음이 양종훈을 한국대 로스쿨 기피 1호 '양크라테스'로 만들었다. 

그렇게 양종훈의 법복을 벗도록 만들었던 서병주였기에 당연히 서병주 죽음이 자살이 아니면 가장 유력한 '살해 용의자'가 된다. 그리고 그 '의심'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1회 엔딩, 형사들은 양종훈의 손에 수갑을 채운다. 

하지만 사건은 그리 간단치 않다. 드라마는 서병주가 머물렀던 방에 등장한 여러 사람들의 족적을 보여준다. 알고보니 서병주의 조카인 한준휘(김범 분) 에서부터 부원장 강주만(오만석 분), 서지호 (이다윗 분) 등, 그리고 서병주를 발견한 전예슬(고윤정 분)까지, 많은 사람들이 서병주의 방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모두 '의문스런' 눈빛을 드러낸다. 잡힌 건 양종훈이지만 그들 모두가 의심스럽다. 

이렇게 드라마는 <하버들 대학의 공부벌레들>인 듯하다 서병주의 죽음을 둘러싼 '스릴러'의 장르로 넘어간다. 출소 후 판사 출신 민법 교수 김은숙(이정은 분)의 강의에 들이닥쳐 협박을 하던 파렴치한 성폭행범 이만호(조재룡 분)는 뺑소니 사건으로 양종훈과 얽혀있다. 과연 뺑소니범은 누구일까? 게다가 서병주에게 땅을 준 죽마고우' 고형수(정원종 분)는 차기 대권 주자이다. 범죄 스릴러인 줄 알았는데, '정치'적 배경도 만만치 않다. 

이렇게 <로스쿨>은 여전히 '명불허전' 김명민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앞장세우며, 동시에 긴장감넘치는 살인 사건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등장인물의 관계를 통해 기대감을 키운다. 그래서일까. 전작 <시지프스; the myth>를 넘어 5.113%로 순조롭게 출발하는 중이다. 

by meditator 2021. 4. 15. 16:27

<나빌레라> 7회, 심덕출(박인환 분) 씨가 '알츠하이머'였음이 드러났다. 
기승주가 데려간 발레단에서 잠시 공연을 선보이며 자신감을 되찾은 덕출 씨, 덕분에 아내와의 약속에 늦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 덕출 씨가 흘리고 간 수첩, 앞에는 채록의 매니저로, 뒤에는 초보 발레리나로 덕출 씨는 모든 걸 기록하려 애썼다. '할아버지는~'하며 채록이 집어든 수첩, 제일 앞 장에는 심덕출 씨의 사진과 연락처, 그리고 '나는 알츠하이머입니다'라고 적혀있었다. 

74살, 친구의 죽음을 통해 더 나이들기 전에 자신의 꿈을 향해 '날아보고 싶다'던 노옹의 소원은 7회를 통해 국면을 달리한다. 그저 더 나이들기 전이 아니라, 알츠하이머라는 진단을 받고, 그리 시간이 많지 않음을 깨닫고 나선 길이었던 것이다. 그간 왜 그렇게 덕출 씨가 조급해 했는지, 비지땀을 흘리며 홀로 연습을 했는지 보다 명확해 진다. 나이가 들어서 시간이 없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과 '알츠하이머'라 시간이 없는 건 다른 것이니까. 

 

 

'엔드 게임' 
엔드게임, <나는 나답게 나이들기로 했다>의 저자 이현수 씨의 말처럼 어벤져스 시리즈의 부제가 아니다. '첫 늙음'을 감지한 그 순간부터 시작되어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피할 수 없는 각자의 게임이다. 

'기억, 운동, 감각, 언어, 신체 등에서 예전에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오류가 일어나기' 시작하면 우리는 엔드 게임에 들어선 것이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공간이 시간으로 재단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살아왔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들어'선 이 게임의 시간에 그 누군들 억울하지 않으랴. 더구나 그 '엔드 게임'의 엔딩은 공평하지 않다.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것도, 가진 재산이 많다는 것도, 엔딩은 불공평해서 공평하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공원 벤치에 앉은 덕출 씨 눈 앞에 주마등 처럼 살아온 시간이 스쳐지나간다. 그의 마음은 발돋움을 하여 처음 발레 공연을 보고 혼자 거리에서 다리를 쭉쭉 뻗던 그 어린 시절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서러운데 '치매'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74살 덕출 씨가 울먹인다. '아버지, 어머니, 나 어떻게 해요.'

엔드 게임의 노년기는 불가항력일까? <나는 나답게 나이들기로 했다>는 이에 대해 '태도'를 말한다. ''못먹어도 고'의 상황에 놓인 자신을 충분히 자각하고, 아쉬워하고 나면 오히려 용감해지고 단단해진다고 한다. 선택의 폭이 좋아지면 훨씬 더 집중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더 치열하게 밀도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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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하고, 밀도있게 
야심차게 발레를 시작하는 노년의 심덕출 씨를 보며 막연하게 그 '꿈'의 앞길이 그리 밝지만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말 그대로 '엔드 게임'의 여정에서 심덕출 씨의 꿈에 무슨 그리 밝은 미래가 있겠는가. 거기다 조금씩 무언가를 잊는 모습을 보여주는 덕출 씨의 일상을 통해 <나빌레라>가 결국 '치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구나 하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런데 7회 마지막 수첩에 적힌 '나는 알츠하이머입니다'를 통해 <나빌레라>는 지금까지 '치매'를 다뤄왔던 다른 드라마와 다른 '화법'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알츠하이머라는 걸 알게 된 덕출 씨는 공원에 앉아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며 자신에게 들이닥친 병마에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어쩌면 암보다도 더 무서운 진단인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덕출 씨는 거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발레를 시작한 것이다. 충분히 자신에게 닥친 병에 안타까워 하던 덕출 씨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남은 생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집중'의 결과물이 '발레'였다. 알츠하이머에 걸렸지만 밀도있는 삶을 향한 여정이다. 

동네 아줌마가 '춤바람'이라고 하는 발레를 74살의 노인이 선택하는게 어디 쉬웠을까. 당장 7회에서 '주책'이라는 말에 덕출 씨가 움츠러든다. 채록이는 연습만 해도 빛이 나는데, 덕출 씨는 연습복을 입은 모습부터가 스스로 '무안'하다. 나이듦은 '추레'하다. 스스로를 위축시킨다. 그저 '존재'자체만으로 빛나는 젊음과 다르게 무엇하나 '뽀대'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덕출 씨는 포기하지 않는다. 운전을 하지 말라는 의사의 말에 따라 차도 손녀에게 선사한 덕출 씨다. 그래도 식전 댓바람부터 연습실로 나선다. 선생님 채록이가 없어도 온종일 땀을 흘리며 연습을 한다. 

여담이지만 이 글을 쓰는 기자도 매일 요가와 필라테스를 배운다. 그런데 일년이 넘어가는데 여전히 뻣뻣하다. 연식이 유연성을 향한 훈련을 앞지른다. 한 달된 젊은 처자들이 쭉쭉 몸을 뻗는다. 구부러지지 않는 허리로 끙끙거리는 처지다. 그런 처지여서 그런가, 다리 한번 들면서 부들거리시는 덕출 씨에 공감 만배이다. 다리 하나, 팔 하나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제 아무리 해도 구부러지지 않는 허리와, 천근만근인 다리, 하지만 덕출 씨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저 나이가 들어서 꿈을 이루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아서이다. 

이모부님이 덕출씨와 같은 병마에 시달리신다. 최고의 학부를 나오고, 최고의 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하셨던 분이다. 뭐든 배우고자 하면 스스로 독학을 해서 뚝딱 해치우시던 분이셨다. 그런 분이 속절없이 변해가신다. 제 아무리 배움이 많아도, 한 일이 많아도 '나이듦' 앞에는 속수무책이다. 

그 속수무책의 시간, 덕출 씨는 그냥 앉아서 자신의 병에 당하는 대신, 평생의 '로망'에 자신을 던진다. 엔드 게임의 시간을 맞이하는 덕출 씨의 태도이다. 엔드 게임의 시간은 우리에게 공평하지만 그 시간이 어떤 시간이 되는가는 결국 우리에게 달렸다고 드라마는 전한다. 

거기에 더해 나이듦의 미덕도 놓치지 않는다.  나이가 드는 건 모든 게 다 나빠진다는 것이다. 신체적 기능도, 정신적 기능도 약화된다. 하지만 딱  하나 좋아지는게 있다고 한다. 바로 '지혜'이다. 다리를 다쳐 다가올 콩쿨에 나갈 수 없어 좌절하는 채록, 기승주도, 은교수도 달래보지만 불투명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채록의 마음을 달래기가 쉽지 않다. 그때 덕출의 조언이 채록의 불안을 다독인다. 다음이 있다는 말, 그 평범한 말에 실린 덕출의 삶이 주는 '지혜'가 채록에게 한 발 물러설 용기를 준 것이다. 

<나빌레라>가 빛나는 건, 노년의 삶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어서이다. 어느덧 우리 사회에서 '퇴적층'이 되어가는 노년층을 지나온 삶의 지혜가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갈 '꿈'을 꾸는 사람들로 그린다. 알츠하이머라는 최종 진단 앞에서도 말이다. 

나이듦은 본의 아니게 ktx에서 무궁화호로 갈아타는 상황과도 같은 것이다. 심지어 그 갈아탄 열차의 종착지가 아주 다르다. 가고 싶어서 가는 것도 아닌 노년의 열차, 하지만 그 여행길을 어떻게 가는가는 탄 사람에 달렸다고 <나빌레라>는 말한다.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래서 더 소중하고 과감하게 보낼 수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기자 역시 지난 1,2년 사이 열차를 갈아탄 듯하다. 그래서일까, 덕출 씨 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도 무모하게 용감해졌다. 나에게 찾아온 '인연'을 받아들였고, 그저 '하고 싶어서'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었다. 그래서일까, 발레를 향한 덕출 씨의 눈빛에 공감 백배이다. 그건 '사랑'이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이다. 

가파르게 늘어나는 노년층, 사회적 시스템은 나이듦을 따라가지 못한다. 하지만 그저 시스템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이 아니다. 각자 자신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여정의 삶에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빌레라>는 그저 치매 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이듦의 시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by meditator 2021. 4. 13. 16:19

지난 2020년 4월 '하나의 사물(it)을 오브제로 정하여 세상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잇겠다는 야심찬 포부로 매주 목요일 밤 <다큐 잇it>이 문을 열었다. '반지하'로 부터 시작된 오브제는 마스크, 청약통장, 주식, 캠핑 고양이, 치킨, 배달까지 현재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를 종횡무진 섭렵하며 달려왔다.

하나의 주제를 통해 서로 다른 세대를 잇고 그를 통해 사회적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자 했던 다큐의 새로운 모색, 하지만 오브제의 고갈인 건지, 아니면 낮은 시청률의 한계였던 건지, 결국 지금 여기 우리 시대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다루고자 했던 시도는 3월 25일 1년간의 여정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우리가 '현재형'으로 살아가고 있는 삶의 터전에 발을 굳건하게 딛고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제작진의 노고와 열정에 감사를 드리며, 또 다른 좋은 작품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3월 25일 다큐 잇it의 대문을 닫은 작품은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가족' 제도의 문제를 짚은 <우리는 가족입니다>이다. 

민법 779조는 '가족'을 정의한다.
1. 다음의 자는 가족으로 한다. 
 1) 배우자, 직계 혈족 및 형제, 자매
 2) 직계 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 혈족 및 배우자의 형제, 자매
1. 제 1항 제 2호의 경우에는 생계를 같이하는 자에 한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족'은 혈연이나, 혼인, 입양에 의해 이루어진 관계이다. 2021년, 과연 현행 이러한 가족법은 '현실'을 제대로 담고 있을까? 

 

 

남편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아내 
김남숙 씨는 '아내'다. 하지만 '법'은 김남숙 씨를 '아내'로 인정하지 않는다. 20년을 살다 헤어져 10년간 소식이 두절됐던 남편은 남숙 씨가 사는 동네 주변에서 이불 10장을 뒤집어 쓴 노숙자로 나타났다.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다'고 했지만 행려병자로 돌아온 남편이 반가웠다. '똥을 싸도 남편이 있어야 나는 행복인 거야'라고 했지만 그 행복은 길지 않았다. 

지난 2월 남편이 죽었다. 임종까지 지켰지만 장례를 치룰 수 없었다. 남숙 씨가 법적인 아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무연고 사망자가 된 남편, '법'은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된 가족을 찾았다. 그렇게 안치실에서 20여 일이 지나서야 남숙 씨는 남편의 '장례주관자'가 될 수 있었다. 

가장 오랜 시간 '가족'이었던 사람, 하지만 현행 가족법은 그들을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족'이 있음에도, 혹은 '가족'처럼 지내는 지인이 있음에도 무연고 사망자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2020년 지침이 바뀌었다지만 여전히 '법'과 충돌되는 점들이 많다.

74세의 김복남 씨와 84세의 권정수 씨는 복지관의 잉꼬 커플이다. 두 사람 다 배우자와 사별을 하고 시름에 겨워하고 있던 시절에 만났다. 그로부터 14년을 함께 했다. 자식들이 양해를 했지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법적' 관계는 배제한 체 지난 시절을 함께 했다. 

둘이 함께 하는 생활 자체가 '장수'의 비결이라는 권정수 씨,  이제는 공주님이 됐다는 복남 씨, 하지만 아내 복남씨보다 나이가 많은 정수 씨는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갈 일이 걱정이다. 

 

 

변화하는 가족 
1인 가구 중 노인 가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이미 젊은 세대를 넘어서고 있다. 또한 2015년 23.5%에서 2019년 24.9%로 그 비율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누구나 외롭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하지만 1인 가구의 '고독한 삶'에 '법'은 배려가 없다. 

노인 가구만이 아니다. 19세에서 39세가지 1083명 중 70.8%가 법적인 구속력이 없는 '동거'에 대해 찬성한다. 가족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고 있다. 2020년 국민 인식 조사에 따르면 생계나 주거를 공유하거나 (69.7%), 정서적 친밀성을 유지하면(39.9%) '가족'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이 바뀌고 있다. 

장신재 씨의 경우, 4~5년간 자취 생활을 전전하다 보니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졌다. 그러면 결혼? 아니 그녀가 선택한 건 결혼이 아니라, '셰어 하우스'였다.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는 방 3개의 큰 집을 얻고 함께 사는 '동반자'들을 구했다. 

 

 

서로 하는 일도, 사는 취향도 다른 다섯 명의 여성들이 한 집에 모여살기로 했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귀가하니 반겨준다. 연락이 안된다며 걱정해 준다.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의논한다. 어느덧 함께 사는 이들이 아침에 내는 소음들이 잠결에 정겨워질 정도로 서로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게 되었다. '혈연'의 끈끈함 대신, 같은 가치관에 기반한 소속감으로 함께 한다. '가족'이 아니고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변화하는 시대, 달라져가고 있는 삶의 형태에 맞춰 법도 개정되어야 한다. 몇 십년을 얼굴도 안보고 산 피붙이들이 '가족'이라며 생애의 마지막을 함께 하는 대신 가장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 '가족'의 권리를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정체조차 모호한 '정상 가족'의 낡은 관념을 덜어내고 법 밖의 가족들을 위한 '생활 동반자법'이 마련되어야 하는 이유다. 

by meditator 2021. 4. 10. 01:24

최근 tvn의 드라마 <나빌레라>가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70이 넘은 나이에 발레에 눈을 뜨고 그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주인공 심덕출(박인환 분)씨의 모습이 세대불문 삶과 행복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만큼의 시간이 더는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시간 만이 아니다. 동시에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듯이 살아갈 수 없다는 삶의 기회와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이듦은 '제한',이나 '한계', 혹은 '후퇴'로 받아들여지기가 십상이다. 그러기에 70이 넘은 나이에 발레를 해보겠다는 <나빌레라>의 심덕출 씨의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지난 2016년 개봉한 후시하라 켄시 감독의 <인생 후루츠>는 어떨까? 발레에 도전하는 심덕출 씨와는 또 다른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두 부부가 우리에게 '노년'을 살아가는 방향을 열어준다. 

 

 

실패한 젊은 건축가의 선택
젊은 건축가가 있었다. 일본 주택공단의 에이스였던 쓰바타 슈이치가 그 주인공이다.  해발 0m의 마을이 태풍으로 인해 수몰되자 정부에서는 고지대에 뉴타운을 만들고자 했다. 뉴타운 건축 책임을 맡게된 슈이치는 산이었던 그곳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숲이 산으로 들어올 수 있는 도시를 계획했다. 하지만 젊은 건축가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밀한 아파트들로 가득채워진 뉴타운,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슈이치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대신 300평의 땅을 샀다. 그로부터 50여 년, 과일 50종, 채소 70종을 키우며 키우며 그곳을 '자연'으로 꾸렸다. 그리고 뉴타운 단지 뒤의 민둥산을 도토리 나무로 무성하게 가꿨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작고한 일본의 배우 키키 키린이 나레이션한 영화는 할머니의 흙 예찬론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농작물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흙이 좋아야 한다는 할머니의 지론은 아파트 단지 속 뉴타운에서 숲을 만들기 위해 지난 50년의 세월을 살아온 할아버지의 건축론에 닿는다. 

 

 

집은 삶의 보석상자여야 한다. 
영화에 소개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정의다. 할아버지에게 '보석상자'로서의 집은 '자연'친화적인 존재였다. 그의 꿈은 '개발'에 밀려났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땅을 샀고, 집을 지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차근차근, 시간을 모아서, 천천히', 50년 동안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왔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도, 내 생각이 이러니 세상이 알아주어야 한다는 생각도 접어둔 채 스스로 자신이 그러해야 하는 삶을 살았다. 그렇게 90세가 되었다. 

영화 속 할아버지는 말한다. 건축가들은 집을 지어놓고 막상 그곳에 살지 않는다고. 자신이 살지도 않을 집, 이라는 할아버지의 질타 속에 '문명'이란 이름으로 지구를 오염시킨 숱한 '개발'의 잔해들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할아버지 슈이치는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스스로 어떤 집을 짓고 살아야 하는 가를, 어떤 공간에서 삶을 누려야 하는 가를 오랜 시간에 걸쳐 보여주었다. 그 결과물이 <인생 후르츠> 속에 등장하는 수려한 나무들로 둘러싸여있고, 일년 내내 자급자족이 가능한 수확물들을 공급해주는 농장을 품은, 사시사철 빛이 들어오는 슈이치 부부의 집이다. 

건축가 슈이치 씨가 평생 자신이 꿈꿔온 건축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여자 친구'이자 동반자인 아내 츠바타 히데코가 있어서이다. 월급이 4만엔이던 시절에 70만엔짜리 요트를 사겠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았다던 아내 히데코이다. 영화가 시작할 때 그녀의 나이 87세, 그 세대의 여성들이 그러하듯 그녀 역시 '남편'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히데코의 삶이 그저 전근대적 여성의 숙명적 삶이라고만 여겨지지 않는다. 매 끼니 밥을 먹는 남편을 위해 <인생 후루츠>가 2018년 서울 국제 음식 영화제에 초빙을 받을 정도로 죽순 덮밥에서 부터 생딸기 케잌, 푸딩에 이르기까지 '진수성찬'을 차려내는 건 '의무'의 경지를 넘어선다. 남편의 뜻을 따르는 거, 남편이 하고자 하는 바를 평생 따라왔다는 그녀는 그런 자신의 '의지'가 결국은 돌고돌아 좋은 일로 올 것이라 믿는다. 

우리 시대에 '행복'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룬다는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살아보면 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는 시간보다 이루지 못해 안달하게 만드는 시간이 더 길다는 것을. 삶이 주는 케잌은 달콤하지만, 그 케잌은 생각만큼 넉넉하게 여유롭게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거나 때론 아예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런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오래 살수록 인생이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인생은 후루츠>는 두 노부부가를 통해 현명하게 나이들어가는 삶의 방식, 아니 나이를 차치하고 지혜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남편인 슈이치는 건축가로서 자신의 뜻을 뉴타운 건설 과정에서 관철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좌절'하여 뜻을 꺾는 대신, 그 이후 50년에 걸쳐 '나 하나만이라도'라는 뜻을 가지고 자신의 집을 '자연'의 품으로 돌려주고자 하였다. 자신과 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이면 도시 전체가 다시 '자연'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내 히데코 역시 자신의 뜻보다는 늘 자신의 삶에 '가족'들부터 끌어들이는 남편으로 인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그렇게 남편의 주도적인 삶의 방식에서 그녀는 가족에게 좋은 것이 곧 자신에게 좋은 일로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풍성한 밥상을 차려주지만 자신은 단촐한 토스트 한 조작으로 한 끼를 대신하는 '융통성'도 놓지 않았다. 

 

 

평생을 함께 해온 부부, 하지만 장어 덮밥을 먹고 잠든 남편 슈이치는 다음 날 눈을 뜨지 않았다. 아내는 담담하게 남편을 보내려고 한다. 대신 오래도록 남편의 영정 앞에 그가 좋아하던 음식을 마련한다. 영화가 시작할 때 90살이던 남편처럼 90살이 된 아내, 지난 65년 남편과 함께 했지만 이제 더는 그럴 수 없다. 늘 남편의 뜻을 따라 살던 아내에게 지금의 삶은 때로는 덧없이 느껴진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는 다시 의연하게 살아간다. 슈이치는 갔지만 그의 생각은 자연친화적인 병원으로 이어진다. 그들이 살아왔듯 삶은 그런 것이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 아름답게 늙어가는 것, 그건 영화 속에 등장한 대사처럼 '꾸준히 무언가를 최선을 다해서 하며'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by meditator 2021. 4. 8. 23:56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을 처음 만난 건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였다. 국사 교과서 실학자를 소개하는 부분에 정약전이 물고기 백과 사전과 같은 '자산어보'를 썼다고 하였을 때 시쳇말로 좀 '없어보였다.' 동생인 정약용이 유배 기간 동안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등 정치, 경제 다방 면에 걸쳐 일가를 이루는 동안 겨우 물고기 책이라니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 정약전에 대해 내 관점을 달리해주는 책을 만난 건 2006년이었다. 아이세움에서 '나의 고전 읽기' 시리즈 첫 권으로 나온 손택수의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는 한낱 물고기 책이나 쓴 정약전에 대한 내 '색안경'을 벗겨주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였음에도 '공도'정책이라는 무지몽매한 정책으로 오늘날 '독도' 문제의 빌미를 자초한 것처럼 '유교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나라였다. 그런 세상에서 제 아무리 유배을 갔다해도 '선비'가 백성의 터전인 바다와 그 바다의 산물에 대한 책을 펴냈다는 건 정약전의 성취와는 또 다른 '실학'의 본류요,  어찌보면 '혁명적인 도전'이었다는 걸 <바다를 품은 책>은 알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십 여년이 흘러 이준익 감독을 빌어 정약전과 그의 자산어보를 다시 만났다. 무지한 해양정책을 폈던 책상물림의 나라 조선에 분노했던 그 시절로부터 십 수년이 흘러 다시 만난 정약전과 자산어보는 그 흐른 세월만큼이나 묵직하고 깊게 다가온다. 

 

 

약전, 흑산으로 가다 
영화의 첫 장면은 '관직'에 나선 약전이 정조 임금을 만나는 장면이었다. 관직에 나서는 대신 청나라에서 들어온 서양 학문과 과학 기술에 천착했던 정약전이 '관직'으로 나선 결의를 유머러스하게하게 밝히는 장면에서 정조 임금은 형만한 아우가 없다고 정약전에 대한 믿음을 밝힌다. 그리고 '버티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정조 임금의 당부는 그의 죽음과 함께 흩어져버린다. 서양 학문과 함께 수용한 '서학'이 정약전 형제의 목을 죈다. 약전이 스스로 배교자를 자처하며 애써 지키려 했지만 약종의 목숨은 구하지 못했다. 당대 최고의 파워엘리트이자 학자였던 동생 약용과 약전은 조선 땅끝과 바다 건너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1790년 문과에 급제, 전적, 병조좌랑 등의 관직을 역임하다 1798년 정조의 명을 받아 책을 편찬하는 등 뜻을 제대로 펴보기도 전에 정조의 죽음과 함께 1801년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그의 정치적 희망은 꺾였고, 홀로 바다 건너 흑산도로 향하게 되었다. 날개가 꺽이다 못해 뜯겨버린 처지인 셈이다. '어려서는 얽매이지 않으려는 성격이었고 커서는 사나운 말이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듯했다'는 표현처럼 호방했다는 인물 약전, 설경구가 연기한 약전은 눈물로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동생 약용(류승룡 분) 앞에서 의연히 흑산도로 향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오늘 밤은 으르렁대던 파도가 잠잠해지고
잠자는 구름 아래 어등(魚燈)이 빛을 뿜는다.
공활한 하늘이 훤히 펼쳐 있고
다닥다닥 별 떼가 반짝이는데
나뭇잎 사이로 이따금 꺼졌다가 켜지며
반공중에 까닭 없이 모였다가 흩어진다.
잠 못 들고 몇 개 섬을 돌고 났는지
왁자하게 흩어지는 새벽이 됐다.


제 아무리 동생 앞에서 의연하게 길을 떠났지만 겨우 300 명 남짓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흑산도의 유배 생활이 쉬웠을까. 그의 시, 어화(漁火)가 잠못들고 섬을 서성이는 선비 정약전의 맘을 드러내준다. 

 

 

실학자 약전, 자산어보를 쓰다
영화는 그런 복잡한 심경의 선비 정약전을 넘어, 실학자 정약용의 열의를 앞세운다. 나무로 지구의를 만들고,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바늘구멍 사진기를 만들던  실사구시(實事求是)' 학자' 정약전 앞에 흑산은 그저 유배지가 아니었다. 농부가 밭을 갈듯, 어부들의 밭이었던 바다, 그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을 제대로 '조사'해 기록으로 남기는 건 정약전 식의 '목민심서'였던 것이다. 

1816년 죽을 때까지 정약전은 섬을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 속 약전은 죽음의 순간까지 붓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동생 약용마저 풀려난 유배길, 홀로 남아 끝까지 그가 남기려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날 것의 바다를 정화시킨 흑백의 화면은 오롯이 약전의 성실한 삶을 드러낸 보인다. 방대함과 정밀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산어보, 비늘이 있는 것과 없는 것, 껍질이 단단한 개류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잡류 등등 분류에서 부터, 붓으로 찍어 쓸 수 있는 오징어 먹물에서 부터 돗돔에 이르기까지 자산어보의 내용은 그 자체로 실학자 약전의 실천적 삶이다. 

청나라의 문물과 서학을 눈밝게 수용했던 진보적 지식인이자, 그 뜻을 정조 치하에서 펼쳐보려했던 실천적 정치가, 하지만 그 꿈은 멸문지화로 끝맸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풍운'의 꿈을 꾸던 이들이라면 여기서 자신의 뜻을 멈추지 않았을까? 더구나 조선 시대에 육지가 아닌 섬은 이 세상이 아닌 곳과 같은 의미이다. 그곳에 홀로 떨어진 학자, 정약전은 하지만 거기서 다시 시작한다. 

이준익 감독을 통해 다시금 소환되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정약전은 아는 사람만 아는 조선 실학자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심지어 그가 죽어가면서도 쓴 '자산어보'는 그가 죽은 뒤 어느 집 벽지로 붙여져 세상에서 사라질 뻔했다가 동생 약용이 보낸 제자에 의해 '구제'되었다. 이렇게 기약할 수 없는 자신의 작업에 필생을 바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영화 <자산어보>속 바다를 향한 멈추지 않는 정약전의 열정은 그걸 자꾸 짚어보게 만든다. 

거기에 <자산어보> 속 등장했던 섬소년 창대는 영화에서 약전이 흑산에서 애써 키운 '상놈'의 제자로 재현된다. '상놈의 제자'는 상징적이다. 서학쟁이라 약전을 경원시했던 창대에게 약전은 처음부터 호의적이었고 기꺼이 그의 스승이 되었다. 영화 <일포스티노>의 네루다와 마리오와도 같다. 약용을 찾아간 창대가 약용이 아끼는 제자와 맞서 시 대결을 벌이는 장면, 정약용의 제자조차도 감히 '상놈 주제에'라는 편견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창대는 통쾌하게 약용 제자의 말문을 막아버린다. 그리고 그런 창대를 절에서 일하는 '상놈'들이 경이롭게 쳐다본다. 

이 장면은 문자에 관심이 있어,  물고기에 밝아서 창대가 제자가 된 것만이 아니었음을, 진보적 지식인으로 정약전이 가졌던 양반도, 천민도 없는 조선 사회에 대한 그의 세계관이었기에 가능한 '실천'이었음을 영화는 뒤늦게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그렇게 아끼던 제자 창대는 결국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약전을 떠난다. 그리고 물론 '상놈' 창대의 높은 뜻은 세상과 조우할 수 없었다. 뒤늦게 돌아온 창대가 받아든 약전의 묵은 서신, 학 대신 검은 무명천, 그저 뭇 백성으로 성실하게 살아감의 의미를 집은 약전의 말은 자기 자신에 향하는 결의가 아니었을까. 

 

 

흑산을 살 것인가, 자산을 살 것인가 
한때는 진보적 지식인이었지만 날개를 꺾이다못해 찢긴 약전, 그를 2021년 이준익 감독이 초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때는 386이었다가, 이제 586이 되어가는 기자의 세대,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표가 불과 20 여년의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어느덧 퇴색되고, 심지어 불명예의 상징이 될 지로 모를 기로에 놓여있다. 

586으로 상징되는 세대는 그들이 세상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늘 '원심력'의 기세로 살아왔다. 그 겨울 광화문을 밝히던 촛불 속에서도 그들의 목소리는 높았다. 그렇게 세상을 향해 늘 자신을 '발산'하던 세대에 대해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 정약전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 보기를 권하고 있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늘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관철하고 실현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오던 세대, 어쩌면 이제 세상에, 젊은 세대에 그 몫을 물려주고 물러나야 하는 시간, 그 '퇴장'의 시간에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러기에 정치적 무대에서 강제적으로 '퇴장' 당한 약전의 삶은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화두'일지도 모르겠다. 불과 10여 년의 관직 생활, 뜻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채 바다 건너로 유폐당한 약전은 하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상놈' 창대를 학문적 벗삼아 <자산어보>를 필생의 작업으로 삼음으로써 약전은 오래도록 우리에게 기억된다. 정조 연간의 관리 약전은 우리에게 낯설지만 자산어보는 오래도록 남았다. 

玆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黑은 너무 캄캄하다. 玆는 또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도 있으니 좋지 않으냐,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이 자산이다"


김훈은 정약전을 그린 소설<흑산>에서 이렇게 푼다. 흑산을 '자산'의 스토리로 다시 쓰는 삶, 흑산을 살 것인가, 자산을 살 것인가, 우리 시대의 화두이다. 

by meditator 2021. 4. 5. 23:06

 

'트라우마'란 과도한 위험과 공포, 스트레스 상황에 대한
심각한 심리적 충격을 일컫는다. 타인이 죽음이나 상해의 위험에
놓이는 사건을 목격했을 때에도 사람들은 트라우마를 겪는다.


다큐 영화 <당신의 사월>은 주디스 허먼의 저서 <트라우마>의 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2014년 4월 16일, 제주도로 수학 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 등 총 476명을 태우고 인천 항을 떠난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침몰의 순간부터 벌어졌던 많은 일들은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만의 일이 아니었다. 한 배의 침몰을 통해 우리는 시스템, 나아가 사회, 결국 '국가'의 침몰을 확인했고 결국 그 책임을 당대의 대통령에게 물었다. 세월호의 침몰은 우리 사회 전체의 상흔이었다.

그리고 7년, 우리는 그 해 4월로 부터 어디쯤 와있을까? 타인의 죽음이나 상해의 위험에 놓이는 사건을 목격했을 때도 겪는다는 그 '트라우마'로부터 우리는 '치유'되고 '회복'되었을까? <당신의 사월>은 유가족이 아닌 그 시절을 견뎌내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우리 사회에 여전히 드리워진 세월호의 그림자를 살펴본다.   

 



그 해 4월, 다른 곳에서 

서촌에서 커피 공방을 10년째 하고 있는 박철우 씨는 지난 촛불 집회 때 세월호 유가족들을 도와 '심야 식당'을 했었다. 거리로 나온 사람들께 밥 한끼 대접하고 싶다는 세월호 유가족의 말씀에 그럼 함께 하자며 나섰던 것이다. 평범했던 커피 가게 사장님이던 그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 통의 전화였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 동네 박사장의 전화였다. 여의도에서 농성을 하던 유가족들이 밤을 걸어 청와대로 향하니 뜨거운 물이라도 준비해달라는 전화 한 통에 그는 유가족을 맞이했다.

기사로만 접하던 세월호, 유가족을 볼 일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직도 추운 봄날의 새벽, 담요을 둘러쓴 채 묵묵히 걸어오는 가족들을 보며 그분들이 조금이라도 상처받아서는 안되겠다는 심정이 앞섰다. 차마 따뜻한 물 한 잔 마시라고 말조차 걸 수 조차 없었다. 그렇게 박철우 씨의 4월은 첫 걸음을 뗐다.    진도의 어부였던 이억년 씨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좌초 현장으로 나갔다. 거의 5~10 미터 근처까지 갔을 때 왔다갔다 하는 '물체'를 목격했다. 미역 양식줄에 꼬여 올라온 하얀 '무언가'를 확인하기도 했다. 어부의 4월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중학교 선생님이었던 조수진 씨는 옆 자리 선생님이 보여주는 컴퓨터 화면에서 세월호를 만났다. 얼마 전 아이들과 함께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왔기에 남의 일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구하겠지 했었다. 계속 속보가 이어지는 상황에 본의 아니게 b급 호러 무비의 관람객이 된 듯한 무기력감에 빠졌다.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 눈빛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인천항이 가까운 학교에서는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그 뱃고동 소리에 자꾸만 세월호가 오버랩됐다. 교실이 마치 배같았다. 아이들을 구하겠다고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선생님, 만약 내가 그런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하나란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  권수영, 윤인아 선생님은 자신이 살아오지 못할 꺼라는 걸 예상하셨을 것이다. 그런 선택을 해야 하는 교사의 책임이 무겁게 다가왔다. 부모님 얼굴이 스쳐지나갔을 텐데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들이 촛불 집회에서 전교조 대표로 조수진 선생님을 세우도록 만들었다. 5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집안 곳곳에 노란 리본을 비롯하여 세월호와 관련된 기억들을 붙여놓았다.  '잊지않겠습니다'라는 취지로 아이들과 함께 추모 수업을 하고 모임을 가진다. 선생님에게 세월호는 현재형이다. 자발적으로 추모 모임을 이끌어 가는 아이들을 보며 '희망의 씨앗'을 느꼈다. 버티니 '희망'이 보였다.

인권운동가이던 정주연 씨는 진도 앞바다로 달려갔었다. 그저 옆에 앉아 있는 것으로 주연 씨의 4월은 시작되었다. 그저 곁에서 유가족들의 슬픔을 온전히 들어드리는 것이 전부였다.

곁에서 지켜 본 유가족의 무게는 무거웠고 슬픔은 깊었다. 고개를 숙이고 사람들을 피했다.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꺼내어 보이며 아이들을 이야기할 때면 다시 예전 으로 돌아가는 엄마들, 하지만 관광객이라도 오면 고개를 숙였다. 사회가 짊어지우는 피해자다움, 유가족다움이 가족들을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유가족만이 아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고통에 시달리는 잠수사들, 하지만 마치 delete 버튼을 누르듯 그들을 지워버린듯하는 사회와 국가, 여전히 진실은 규명되지 않았는데 '지겹다'고만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악몽을 꾸어가면서도 화가인 정수진 씨 남편은 잠수사들의 모습을 남기려고 애쓴다. 정주연 씨네 방식의 '잊지않겠습니다'이다. 

 



우리는 충분히 기억하고 애도했을까?
당시 고 3이었던 이옥영 씨는 '수능'이라는 현실에 가급적 세월호와 관련된 기사를 접하지 않으려 했었다. 수능을 마치고 세월호 기억 교실 대신 만들어진 기억저장소에서 봉사 활동을 하며 이옥영 씨의 미래는 달라졌다.  시간과 함께 세상에서 '유실'되어가는 세월호의 흔적들을 보며 '기록관리학'이라는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다. 

진도 앞바다를 바라보던 돔마저 철거되었지만 어부 이억년 씨의 집 안에는 여전히 돔이 한 채 남아있다. 아이들을 보고 싶어 진도 앞 바다에 온 세월호 부모님들을 이억년 씨는 그곳에서 머무르게 한다. 영화 내내 카메라로 영상으로 기록을 남기던 문지성 학생의 아버님 문종택 씨는 딸이 있는 그 바다가 가장 편하다고 하신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자신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이억년  씨와 모처럼 웃음을 나눈다.  

영화는 세월호로 인해 삶의 시간이 변화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 '평범'한 사람들은 어쩌면 영화가 끝나고  '도움을 주신 분들'의 마지막에 '그리고 당신'이라는 자막처럼, 또 다른 우리들일 수도 있다. 세월호가 좌초되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들은 아이들이 더 이상 세상 밖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때 우리는 모두 <당신의 사월> 속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트라우마'를 겪었다. 그 트라우마는 우리를 그 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게 만들었다. <당신의 사월> 속 사람들은 아직도 저마다의 사월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노란 리본은 현재형이다. 우리의 노란 리본은 어디쯤 있을까.

시간이 흘렀다. <트라우마>의 주디스 허먼은 '회복에는 기억과 애도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우리는 충분히 기억하고 애도했을까? 

by meditator 2021. 4. 5.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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