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을 처음 만난 건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였다. 국사 교과서 실학자를 소개하는 부분에 정약전이 물고기 백과 사전과 같은 '자산어보'를 썼다고 하였을 때 시쳇말로 좀 '없어보였다.' 동생인 정약용이 유배 기간 동안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등 정치, 경제 다방 면에 걸쳐 일가를 이루는 동안 겨우 물고기 책이라니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 정약전에 대해 내 관점을 달리해주는 책을 만난 건 2006년이었다. 아이세움에서 '나의 고전 읽기' 시리즈 첫 권으로 나온 손택수의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는 한낱 물고기 책이나 쓴 정약전에 대한 내 '색안경'을 벗겨주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였음에도 '공도'정책이라는 무지몽매한 정책으로 오늘날 '독도' 문제의 빌미를 자초한 것처럼 '유교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나라였다. 그런 세상에서 제 아무리 유배을 갔다해도 '선비'가 백성의 터전인 바다와 그 바다의 산물에 대한 책을 펴냈다는 건 정약전의 성취와는 또 다른 '실학'의 본류요,  어찌보면 '혁명적인 도전'이었다는 걸 <바다를 품은 책>은 알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십 여년이 흘러 이준익 감독을 빌어 정약전과 그의 자산어보를 다시 만났다. 무지한 해양정책을 폈던 책상물림의 나라 조선에 분노했던 그 시절로부터 십 수년이 흘러 다시 만난 정약전과 자산어보는 그 흐른 세월만큼이나 묵직하고 깊게 다가온다. 

 

 

약전, 흑산으로 가다 
영화의 첫 장면은 '관직'에 나선 약전이 정조 임금을 만나는 장면이었다. 관직에 나서는 대신 청나라에서 들어온 서양 학문과 과학 기술에 천착했던 정약전이 '관직'으로 나선 결의를 유머러스하게하게 밝히는 장면에서 정조 임금은 형만한 아우가 없다고 정약전에 대한 믿음을 밝힌다. 그리고 '버티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정조 임금의 당부는 그의 죽음과 함께 흩어져버린다. 서양 학문과 함께 수용한 '서학'이 정약전 형제의 목을 죈다. 약전이 스스로 배교자를 자처하며 애써 지키려 했지만 약종의 목숨은 구하지 못했다. 당대 최고의 파워엘리트이자 학자였던 동생 약용과 약전은 조선 땅끝과 바다 건너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1790년 문과에 급제, 전적, 병조좌랑 등의 관직을 역임하다 1798년 정조의 명을 받아 책을 편찬하는 등 뜻을 제대로 펴보기도 전에 정조의 죽음과 함께 1801년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그의 정치적 희망은 꺾였고, 홀로 바다 건너 흑산도로 향하게 되었다. 날개가 꺽이다 못해 뜯겨버린 처지인 셈이다. '어려서는 얽매이지 않으려는 성격이었고 커서는 사나운 말이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듯했다'는 표현처럼 호방했다는 인물 약전, 설경구가 연기한 약전은 눈물로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동생 약용(류승룡 분) 앞에서 의연히 흑산도로 향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오늘 밤은 으르렁대던 파도가 잠잠해지고
잠자는 구름 아래 어등(魚燈)이 빛을 뿜는다.
공활한 하늘이 훤히 펼쳐 있고
다닥다닥 별 떼가 반짝이는데
나뭇잎 사이로 이따금 꺼졌다가 켜지며
반공중에 까닭 없이 모였다가 흩어진다.
잠 못 들고 몇 개 섬을 돌고 났는지
왁자하게 흩어지는 새벽이 됐다.


제 아무리 동생 앞에서 의연하게 길을 떠났지만 겨우 300 명 남짓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흑산도의 유배 생활이 쉬웠을까. 그의 시, 어화(漁火)가 잠못들고 섬을 서성이는 선비 정약전의 맘을 드러내준다. 

 

 

실학자 약전, 자산어보를 쓰다
영화는 그런 복잡한 심경의 선비 정약전을 넘어, 실학자 정약용의 열의를 앞세운다. 나무로 지구의를 만들고,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바늘구멍 사진기를 만들던  실사구시(實事求是)' 학자' 정약전 앞에 흑산은 그저 유배지가 아니었다. 농부가 밭을 갈듯, 어부들의 밭이었던 바다, 그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을 제대로 '조사'해 기록으로 남기는 건 정약전 식의 '목민심서'였던 것이다. 

1816년 죽을 때까지 정약전은 섬을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 속 약전은 죽음의 순간까지 붓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동생 약용마저 풀려난 유배길, 홀로 남아 끝까지 그가 남기려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날 것의 바다를 정화시킨 흑백의 화면은 오롯이 약전의 성실한 삶을 드러낸 보인다. 방대함과 정밀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산어보, 비늘이 있는 것과 없는 것, 껍질이 단단한 개류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잡류 등등 분류에서 부터, 붓으로 찍어 쓸 수 있는 오징어 먹물에서 부터 돗돔에 이르기까지 자산어보의 내용은 그 자체로 실학자 약전의 실천적 삶이다. 

청나라의 문물과 서학을 눈밝게 수용했던 진보적 지식인이자, 그 뜻을 정조 치하에서 펼쳐보려했던 실천적 정치가, 하지만 그 꿈은 멸문지화로 끝맸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풍운'의 꿈을 꾸던 이들이라면 여기서 자신의 뜻을 멈추지 않았을까? 더구나 조선 시대에 육지가 아닌 섬은 이 세상이 아닌 곳과 같은 의미이다. 그곳에 홀로 떨어진 학자, 정약전은 하지만 거기서 다시 시작한다. 

이준익 감독을 통해 다시금 소환되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정약전은 아는 사람만 아는 조선 실학자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심지어 그가 죽어가면서도 쓴 '자산어보'는 그가 죽은 뒤 어느 집 벽지로 붙여져 세상에서 사라질 뻔했다가 동생 약용이 보낸 제자에 의해 '구제'되었다. 이렇게 기약할 수 없는 자신의 작업에 필생을 바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영화 <자산어보>속 바다를 향한 멈추지 않는 정약전의 열정은 그걸 자꾸 짚어보게 만든다. 

거기에 <자산어보> 속 등장했던 섬소년 창대는 영화에서 약전이 흑산에서 애써 키운 '상놈'의 제자로 재현된다. '상놈의 제자'는 상징적이다. 서학쟁이라 약전을 경원시했던 창대에게 약전은 처음부터 호의적이었고 기꺼이 그의 스승이 되었다. 영화 <일포스티노>의 네루다와 마리오와도 같다. 약용을 찾아간 창대가 약용이 아끼는 제자와 맞서 시 대결을 벌이는 장면, 정약용의 제자조차도 감히 '상놈 주제에'라는 편견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창대는 통쾌하게 약용 제자의 말문을 막아버린다. 그리고 그런 창대를 절에서 일하는 '상놈'들이 경이롭게 쳐다본다. 

이 장면은 문자에 관심이 있어,  물고기에 밝아서 창대가 제자가 된 것만이 아니었음을, 진보적 지식인으로 정약전이 가졌던 양반도, 천민도 없는 조선 사회에 대한 그의 세계관이었기에 가능한 '실천'이었음을 영화는 뒤늦게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그렇게 아끼던 제자 창대는 결국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약전을 떠난다. 그리고 물론 '상놈' 창대의 높은 뜻은 세상과 조우할 수 없었다. 뒤늦게 돌아온 창대가 받아든 약전의 묵은 서신, 학 대신 검은 무명천, 그저 뭇 백성으로 성실하게 살아감의 의미를 집은 약전의 말은 자기 자신에 향하는 결의가 아니었을까. 

 

 

흑산을 살 것인가, 자산을 살 것인가 
한때는 진보적 지식인이었지만 날개를 꺾이다못해 찢긴 약전, 그를 2021년 이준익 감독이 초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때는 386이었다가, 이제 586이 되어가는 기자의 세대,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표가 불과 20 여년의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어느덧 퇴색되고, 심지어 불명예의 상징이 될 지로 모를 기로에 놓여있다. 

586으로 상징되는 세대는 그들이 세상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늘 '원심력'의 기세로 살아왔다. 그 겨울 광화문을 밝히던 촛불 속에서도 그들의 목소리는 높았다. 그렇게 세상을 향해 늘 자신을 '발산'하던 세대에 대해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 정약전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 보기를 권하고 있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늘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관철하고 실현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오던 세대, 어쩌면 이제 세상에, 젊은 세대에 그 몫을 물려주고 물러나야 하는 시간, 그 '퇴장'의 시간에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러기에 정치적 무대에서 강제적으로 '퇴장' 당한 약전의 삶은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화두'일지도 모르겠다. 불과 10여 년의 관직 생활, 뜻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채 바다 건너로 유폐당한 약전은 하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상놈' 창대를 학문적 벗삼아 <자산어보>를 필생의 작업으로 삼음으로써 약전은 오래도록 우리에게 기억된다. 정조 연간의 관리 약전은 우리에게 낯설지만 자산어보는 오래도록 남았다. 

玆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黑은 너무 캄캄하다. 玆는 또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도 있으니 좋지 않으냐,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이 자산이다"


김훈은 정약전을 그린 소설<흑산>에서 이렇게 푼다. 흑산을 '자산'의 스토리로 다시 쓰는 삶, 흑산을 살 것인가, 자산을 살 것인가, 우리 시대의 화두이다. 

by meditator 2021. 4. 5. 23:06

 

'트라우마'란 과도한 위험과 공포, 스트레스 상황에 대한
심각한 심리적 충격을 일컫는다. 타인이 죽음이나 상해의 위험에
놓이는 사건을 목격했을 때에도 사람들은 트라우마를 겪는다.


다큐 영화 <당신의 사월>은 주디스 허먼의 저서 <트라우마>의 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2014년 4월 16일, 제주도로 수학 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 등 총 476명을 태우고 인천 항을 떠난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침몰의 순간부터 벌어졌던 많은 일들은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만의 일이 아니었다. 한 배의 침몰을 통해 우리는 시스템, 나아가 사회, 결국 '국가'의 침몰을 확인했고 결국 그 책임을 당대의 대통령에게 물었다. 세월호의 침몰은 우리 사회 전체의 상흔이었다.

그리고 7년, 우리는 그 해 4월로 부터 어디쯤 와있을까? 타인의 죽음이나 상해의 위험에 놓이는 사건을 목격했을 때도 겪는다는 그 '트라우마'로부터 우리는 '치유'되고 '회복'되었을까? <당신의 사월>은 유가족이 아닌 그 시절을 견뎌내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우리 사회에 여전히 드리워진 세월호의 그림자를 살펴본다.   

 



그 해 4월, 다른 곳에서 

서촌에서 커피 공방을 10년째 하고 있는 박철우 씨는 지난 촛불 집회 때 세월호 유가족들을 도와 '심야 식당'을 했었다. 거리로 나온 사람들께 밥 한끼 대접하고 싶다는 세월호 유가족의 말씀에 그럼 함께 하자며 나섰던 것이다. 평범했던 커피 가게 사장님이던 그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 통의 전화였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 동네 박사장의 전화였다. 여의도에서 농성을 하던 유가족들이 밤을 걸어 청와대로 향하니 뜨거운 물이라도 준비해달라는 전화 한 통에 그는 유가족을 맞이했다.

기사로만 접하던 세월호, 유가족을 볼 일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직도 추운 봄날의 새벽, 담요을 둘러쓴 채 묵묵히 걸어오는 가족들을 보며 그분들이 조금이라도 상처받아서는 안되겠다는 심정이 앞섰다. 차마 따뜻한 물 한 잔 마시라고 말조차 걸 수 조차 없었다. 그렇게 박철우 씨의 4월은 첫 걸음을 뗐다.    진도의 어부였던 이억년 씨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좌초 현장으로 나갔다. 거의 5~10 미터 근처까지 갔을 때 왔다갔다 하는 '물체'를 목격했다. 미역 양식줄에 꼬여 올라온 하얀 '무언가'를 확인하기도 했다. 어부의 4월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중학교 선생님이었던 조수진 씨는 옆 자리 선생님이 보여주는 컴퓨터 화면에서 세월호를 만났다. 얼마 전 아이들과 함께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왔기에 남의 일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구하겠지 했었다. 계속 속보가 이어지는 상황에 본의 아니게 b급 호러 무비의 관람객이 된 듯한 무기력감에 빠졌다.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 눈빛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인천항이 가까운 학교에서는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그 뱃고동 소리에 자꾸만 세월호가 오버랩됐다. 교실이 마치 배같았다. 아이들을 구하겠다고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선생님, 만약 내가 그런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하나란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  권수영, 윤인아 선생님은 자신이 살아오지 못할 꺼라는 걸 예상하셨을 것이다. 그런 선택을 해야 하는 교사의 책임이 무겁게 다가왔다. 부모님 얼굴이 스쳐지나갔을 텐데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들이 촛불 집회에서 전교조 대표로 조수진 선생님을 세우도록 만들었다. 5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집안 곳곳에 노란 리본을 비롯하여 세월호와 관련된 기억들을 붙여놓았다.  '잊지않겠습니다'라는 취지로 아이들과 함께 추모 수업을 하고 모임을 가진다. 선생님에게 세월호는 현재형이다. 자발적으로 추모 모임을 이끌어 가는 아이들을 보며 '희망의 씨앗'을 느꼈다. 버티니 '희망'이 보였다.

인권운동가이던 정주연 씨는 진도 앞바다로 달려갔었다. 그저 옆에 앉아 있는 것으로 주연 씨의 4월은 시작되었다. 그저 곁에서 유가족들의 슬픔을 온전히 들어드리는 것이 전부였다.

곁에서 지켜 본 유가족의 무게는 무거웠고 슬픔은 깊었다. 고개를 숙이고 사람들을 피했다.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꺼내어 보이며 아이들을 이야기할 때면 다시 예전 으로 돌아가는 엄마들, 하지만 관광객이라도 오면 고개를 숙였다. 사회가 짊어지우는 피해자다움, 유가족다움이 가족들을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유가족만이 아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고통에 시달리는 잠수사들, 하지만 마치 delete 버튼을 누르듯 그들을 지워버린듯하는 사회와 국가, 여전히 진실은 규명되지 않았는데 '지겹다'고만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악몽을 꾸어가면서도 화가인 정수진 씨 남편은 잠수사들의 모습을 남기려고 애쓴다. 정주연 씨네 방식의 '잊지않겠습니다'이다. 

 



우리는 충분히 기억하고 애도했을까?
당시 고 3이었던 이옥영 씨는 '수능'이라는 현실에 가급적 세월호와 관련된 기사를 접하지 않으려 했었다. 수능을 마치고 세월호 기억 교실 대신 만들어진 기억저장소에서 봉사 활동을 하며 이옥영 씨의 미래는 달라졌다.  시간과 함께 세상에서 '유실'되어가는 세월호의 흔적들을 보며 '기록관리학'이라는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다. 

진도 앞바다를 바라보던 돔마저 철거되었지만 어부 이억년 씨의 집 안에는 여전히 돔이 한 채 남아있다. 아이들을 보고 싶어 진도 앞 바다에 온 세월호 부모님들을 이억년 씨는 그곳에서 머무르게 한다. 영화 내내 카메라로 영상으로 기록을 남기던 문지성 학생의 아버님 문종택 씨는 딸이 있는 그 바다가 가장 편하다고 하신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자신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이억년  씨와 모처럼 웃음을 나눈다.  

영화는 세월호로 인해 삶의 시간이 변화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 '평범'한 사람들은 어쩌면 영화가 끝나고  '도움을 주신 분들'의 마지막에 '그리고 당신'이라는 자막처럼, 또 다른 우리들일 수도 있다. 세월호가 좌초되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들은 아이들이 더 이상 세상 밖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때 우리는 모두 <당신의 사월> 속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트라우마'를 겪었다. 그 트라우마는 우리를 그 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게 만들었다. <당신의 사월> 속 사람들은 아직도 저마다의 사월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노란 리본은 현재형이다. 우리의 노란 리본은 어디쯤 있을까.

시간이 흘렀다. <트라우마>의 주디스 허먼은 '회복에는 기억과 애도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우리는 충분히 기억하고 애도했을까? 

by meditator 2021. 4. 5.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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