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한 살 한 살 더 먹어 갈수록 연례 행사로 치루게 되는 '건강 검진'이 두렵다. 시간을 내서 심지어 이제는 제때 나오지도 않는 대변까지 챙기고, 나이가 들 수록 참을 수 없는 공복감을 다스려 치뤄야 하는 그 과정이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기실 그 보다 더 두려운 건 이제 덜컥 어떤 병적인 결과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오래된 육신을 가진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고 새로이 들였던 가전제품들 중에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새로운 신제품이 나와서, 오래 써서 고장이 나서, 하물며 기계들도 그런데, 사람의 몸이야, 그러니 여기저기 잔고장은 점점 당연한 것이 되고, 생명이 오고가는 결과도 무람없이 들이밀어지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어렵사리 2017년의 끝자락에서야 겨우겨우 만난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가 상영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돼지 않아 내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영화를 다보고 나와 화장실에 가니 덕지덕지 휴지가 얼굴에 들러붙어 있을 정도로 눈물은 흐르고 또 흘렀다. 객관적 척도와 상관없이, 적어도 나에겐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뒤늦게 찾아온 2017년에 최고의 영화 였다.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아버지 모금산, 영화를 만들다
금산 시내, 말이 시내지 흑백의 질감이 아니더라도 그 을씨년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시골 도시라는 이 언밸러스한 조합의 거리에 미스터 모의 '마을 이발소'가 있다. 그리고 그곳엔 심심한 상호명 '마을 이발소' 못지 않게 더 심심한 삶을 살아가는 '뻥튀기 애호가' 모금산 이발사가 있다.
낙이라고는 뻥튀기 먹는 거 말고는 없어보이는 아직도 연탄 난로를 때는 이발소를 지키며, 아내와 아들이 떠난 빈집에서 버티며 수영과 수영이 끝난 후의 맥주 한 잔으로 일과를 마무리하는 이 나이든 남자의 일상은 '색깔이 사라진 흑백' 그 자체다. 변수래봐야 같이 수영하는 아가씨와의 맥주 한 잔이지만, 그 조차도 그녀의 일방적 수다, 그 심심함이야 어디 가지 않는다. 

그런데, 임대형 감독이 모금산 역에 기주봉 배우를 선택한 '몸에 배어있는 체념과 달관의 태도'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루틴'의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흑백의 색채감때문이었을까? 밤이면 잠이 안와 베개를 주먹으로 치다 깃털을 난무케 해버리는 불면의 일상, 그러나 그는 다음날 아침이면 똑같이 천변을 거닐어 마을 이발소를 열고, 무한 반복의 삶에 누선이 터지고 만다. 무덤이 즐비했던 산을 깍아내고 본데없이 세워진 아파트, 그 아파트에 입주할 때만해도, 아내가 생존하고, 그 아내가 잘생긴 남편과, 그 남편만큼 잘생겼다며 그걸 비디오에 담으려 할때만 해도 윤기나고 색감이 흘러넘쳤을 그의 삶은 이제 아들 방 책상에 쌓인 먼지처럼 되었고, 그 먼지가 쌓인 시간만큼 그와 그의 가족을 벌어먹여 살려주었던 마을 이발소도 낡았다. 그리고 그만큼 모금산도 나이가 들고. 기주봉 배우와 묵묵한 그가 채워넣는 일상이 보여준 '시간의 무게'가 묵직히 다가오며, 겨울을 버티는 나무처럼, 나이들어가며 견뎌내는 삶에 그만 마음이 열리고 마는 것이다. 희한하게 영화는 보여주지 않은 그가 견뎌온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도록 만든다. 



하지만 무심히 버텨내는 것도 쉽지 않다. 마을 보건소의 의사가 모금산에게 큰 병원에 가볼 것을 청한다. 위암이 추측되는 상황, 과연 불면의 밤을 보내며 일상을 근근히 버텨가는 듯한 모금산의 선택은? 뜻밖에도 그가 선택한 방식은 자신이 주인공이 된 영화를 제작하기로 한 것이다. 

영화 감독지망생이지만, 뜻한 바에 길이 막혀 방황하고 있는 모금산이 평가하기에 덜 떨어진 아들 스데반(오정환 분)과 그의 '똑부러진 이쁜이 여친' 예원(고원희 분)을 금산으로 불러내린다. 스데반의 방에 쌓인 먼지만큼이나 격조했던 이들 부자의 관계, 그 시간과 비례하여 멀어진 간격의 틈을 무시하고 아버지의 영화가 툭 던져지고, 장발 아들이 이발사인 아버지의 이발을 거부하듯, 감독 아들은 아버지의 영화를 거부하고 본다. 그러나, 소품부터 준비를 시작하며 영화를 밀고 들어오는 아버지, 거기에 '어떻게 저런 덜 떨어진 아들에 이쁜이 여친이 생겼는지 모르겠다던 ' 예원이 반응을 보이며 아버지의 영화가 시작된다. 

그저 아버지, 마을 이발소를 지키던 노땅인 아버지와의 영화를 만들며, 어쩔 수 없이 아버지 모금산의 이야기가 풀려나간다. 트롯이나 들을 것같은 마을 이발사 모금산,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준비한 영화 속 캐릭터는 '챨리 채플린'을 떠올린다. 그렇게 해서 어머니가 좋아했던 챨리 채플린과, 아버지가 좋아했다던 스티브 맥퀸을 비롯한 그 시절의 배우들이 소환되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맞선을 본 다방과 그곳의 계란 동동 쌍화차가 세대를 건너 스데반과 예원의 가운데 놓여지고, 마지못해 시작된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그 연인의 시간 여행 '로드 무비'가 된다. 그리고 그 끝에서 마주친 뜻밖의 출생의 비밀. 

위트넘치는, 그러나 어른스런 아버지의 영화, 그리고 아버지의 삶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한국 영화에 등장하는 드라마틱한 요소는 다 등장한다. 시한부 판정에, 출생의 비극까지. 그런데 이 극적 요소들이 모금산 씨와 만나면서, '어른의 삶'을 설명하는 가장 유효한 소재가 된다. 무료한 삶을 버텨온 모금산 아버지는 시한부 일지도 모를 자신의 삶에 들이닥친 뜻밖의 사건에, 영화 제작을 결심한다. 그런데 그가 만들고자 하는 영화는, 이제 영화 감독을 포기하려는 아들에게, '영화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야지'라는 아버지의 설득이다. 또한 영화 속 그가 선택한 캐릭터는 그가 아닌 이제는 자신의 곁에 없지만, 남의 자식 딸린 자신을 기꺼이 잘 생겼다며 거둬준 고마운 아내가 좋아했던 챨리 채플린이다. 뒤늦게 아내에게 바치는 헌사랄까? 

아버지의 병을 알고 당황하던 아들에게, 혹은 비록 짠 음식일망정 그를 돌봐주려 했던 그의 동생 내외 등, 여전히 그의 '친지'들에게 그는 자신에게 닥친 병을 '사제 폭탄을 삼킨 남자'를 통해 위로한다. 심지어 그 영화를 통해 뒤늦게 어쩌면 자신이 없을 세상에 아들 녀석에게 그럼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혈육을 찾아주는 포석까지 깔아놓는다. 



스물도 안된 철부지 시절 아들 스데반을 낳고, 한때는 영화배우가 되고 싶은 꿈을 따라 서울로 상경하여 도시를 전전하던 파란만장한 젊음을 보낸 모금산은 이발 기술을 배우고 선으로 만난아내와 구석에서 이발소를 하며 '어른'으로의 삶을 살아냈다. 그리고 그가 살아왔던 혹은 버텨왔던 어른의 삶처럼, 이제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병조차, 기꺼이 어른스럽게 마무리하고자 한다. 

남들에게는 위로라지만, 평소에는 말 한 마디 없이 동네 중학생 녀석의 인사조차 무심히 지나치고, 함께 맥주를 마시러 간 수영장 동료 아가씨의 수다에 무반응과 달리, 매일 매일 꼼꼼하게 해학넘치게 채워간 그의 일기와 같은 '위트넘치는 그만의 결론'이다. 또한 매일 홀로 수영장을 찾은 외로운 아가씨를 향해 뿜어낸 그의 물분수처럼, '치기넘치는 어른스런 배려'이다. 

젊은이들에게 모금산의 삶은 참 쓸데없어 보일 지도 모른다. 아니 젊은이가 아니라도 연배가 상관없이, 모금산의 삶은 무료하고 적막하다. 하지만, 그 무료함과 적막함은 어쩌면 그가 일기장에도 숨겨놓은 치열했던 그의 삶의 부산물이다. 이제 그 부산물조차 여의치 않는 상황, 과연 늙그막에 찾아온 병의 의미는? 자신의 병을 '시한 폭탄'이란 '위트'로 넘기듯, '어른' 모금산에게 병은 어쩌면 그 심심한 일상과 다를 바 없을 지도 모르겠다. 죽지 못해 살거나, 살지 못해 죽거나처럼. 그냥 그건 책임감있는 삶의 한 과정일 뿐이다. 의연하고 거뜬한 삶에 대한 자세라니!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거창하게 아버지 모금산이 살아온 삶을 칭송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낡은 이발소가 기능하듯, 그 자리에 여전히 존재하는 이제는 초라해지고 사라져가는 아버지 세대의 삶을 흑백의 화면을 통해 설득한다. 기주봉이 연기한 덤덤한 일상을 통해 그의 외로움과, 그가 견뎌온 시간이 적나라하게 느껴져서 당황스러운 영화, 그리고 비록 종종 방황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책임지려하는 스데반과 예원을 통해 아들의 세대를 긍정하는 영화, 굳이 거창한 화두와 관계에 대한 담론이 없이도, 한 세대와 또 다른 세대의 삶을 포용하고, 그래서 서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이야기를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덤덤하게 하지만 묵직하게 보여준다. 
by meditator 2018. 1. 2. 16:41

'남은 달력 한 장/ 짐짓 무엇으로 살아왔냐고/ 되물어 보지만/ 돌아보는 시간엔/ 숙맥같은 그림자 하나만/ 덩그러니 서있고/  비워야 채워진다는 진실을/ 알고도 못함인지/ 모르고 못함인지/ 끝끝내 비워내지 못한 아둔함으로/ 채우려는 욕심만 열 두 보따리 움켜쥡니다......'

                                                        -오경택,<12월의 공허> 중,

한 해를 보내는 심정은 대부분 위의 시와 같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을 시간, 그 시간을 채워넣지 못한 아쉬움, 그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일까? 대부분 연말 tv프로그램은 각 방송사 별로 '내 논에 물주기식' 공치사 수상식으로 떠들썩하게 채워진다. 그 '화려한 쇼'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덧 재야의 종소리가 울리고, 스리슬쩍 새해가 치고 들어온다. 한 살 더 먹는 무안함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그 어수선한 연례 행사가 번잡스러운 사람들은 그래서 일찌감치 tv를 꺼버리고 만다. 그런데 다행히 그런 천편일률적인 연말 tv프로그램에 변화가 생겼다. 바로 2부작 드라마를 편성한 jtbc 덕분이다. 2017년 12월 31일 8시 40분부터 2부작으로 <한여름의 추억>이 방영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고전적 하루> 갈라콘서트로 차분하게 한 해를 마무리하도록 했다. 



사랑을 통해 한해를 반추하다. 
최강희 주연의 <한여름의 추억>은 2부작 드라마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원히 물기가 탱탱 넘치게 살아갈 것 같았지만 어느 틈에 서른 일곱이 되어버려, 더 이상 여자가 아닌 '휴먼'이 되어버린,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던(?) 라디오 작가였던 한여름의 '지난' 사랑 이야기를 드라마는 반추한다. 

드라마는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들이 그녀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청소년 시절 그녀가 첫사랑이었던 남자 최현진(최재웅 분)은 맛선 자리에서 그 '첫사랑'을 그저 '찢고 까불었던' 불쾌한 기억으로 거부한다. 지금의 애인과 언쟁 과정에서 그녀를 기억해 낸 대학 시절 그녀와 캠퍼스 커플이었던 김지운(이재원 분)은 그 시절 불같이 화를 내며 떽떽거리던 열정적이던 그녀가 싫었다. 지금 그녀와 프로그램을 같이 하는 피디 오제훈(태인호 분)은 솔직하고 당찬 그녀가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그녀와 3년이나 사귄 끝에 결혼을 결심했던 박해준(이준혁 분)은 결국 자신의 청혼을 자신의 욕심으로 거부했던 그녀로 인해 '결혼'에 대한 기피증이 생겼다. 

서른 일곱 한여름을 그녀가 소녀 시절부터 사랑해 왔던 네 명의 남자를 통해 설명한다. 첫 사랑 앞에서 내숭이 심했던 소녀, 대학 시절 자유분방하고 감정기복도 심하고, 자신의 감정에 거침이 없었던 20대, 그리고 사랑하지만 자신의 욕심때문에 불안정한 직업의 팝 칼럼니스트와의 결혼을 기꺼이 거부하던 서른 무렵의 여전히 자신만만했던 여성, 그리고 영원히 빛날 줄 알았건만 어느 틈에 빛을 잃은 채 스스로 한없이 초라하다고만 느끼는 서른 후반의 한여름. '사랑'이라고 쓰고, 그녀가 가장 애착을 가지고 맺어왔던 관계들을 통해, 그리고 그 관계들을 반추하는 한여름을 통해 '삶'을 되새긴다. 



흔히 '이불 킥'이란 용어가 가장 적확하게 못이룬 지난 날의 부족했던 사랑을 설명하듯, 한여름이, 그리고 그녀를 기억하는 남자들의 기억 속에서 지난 시간들은 미처 채워내지 못한 자신들의 '욕심, 욕망'들이다. 그러나, 그 채워지지 못한 욕망들은 1부의 마지막, 뜻하지 않게 한여름에게 닥쳐온 사고로 인해 빛깔을 달리하기 시작한다. 

'사실은 12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다/ 생각해 보라/ 12월이 없으면 새해가 없지 않은가/ 1년을 마감하고 새해가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천상병, <12월은 참말로 잔인한 달이다> 중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한 해를 보내는 공허함, 지난 사랑에 대한 회한, 우리의 마음 속에서 스며나오는 이 '아쉬운 감정'들은 결국 아직도 여전히 더 잘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의 다른 이름에 아니다. 하지만, 마치 12월 다음에 다음 해가 시작되지 않는다면?처럼 더 이상 이 세상에 한여름이 존재하지 않는 순간, 그녀와의 추억들은 다른 버전의 해석으로 기억된다. 드라마는 절묘하게 한여름의 지난 사랑을 통해 우리의 시간들을 설명한다. 

아쉬움, 회한? 그건 삶의 다른 이름 
솔직하지 못했던 소녀 여름은 첫사랑의 풋풋한 속내였으며, 그 질리도록 떽떽거리던 젊은 날의 한여름은 20의 솔직하고 열정적인 감정이었다. 여러 부담없는 변수 중의 하나였던 그녀가 남긴 마지막 솔직한 말은 이제 자신의 상처난 자존심에 철갑을 두룬 이제훈에게 던져진 진솔한 충고가 되었고. 그녀가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 전해진 뒤늦은 사과는 늦지 않게 박해준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이름 '한여름'은 중의적이다. 여주인공의 이름이자, 동시에, 12월 31일일에 만나는 반가운 '여름'의 열기라는 계절적 배경이다. 또한, 언니네 집으로 떠나는 한여름이 남긴 마지막 인삿말처럼, '찰라'와도 같은 시절, 찰라와도 같은 시간, 찰라와도 같은 관계의 기억들을 뜻한다. 세숫물도 온천수같다며 제발 에어콘을 사자고 조르던 김지운의 말이 무색하게 어느새 선선한 바람에 밀려가버리는 여름은, 이제는 기억으로만 남겨진 한여름의 생이다. 그리고 그 한여름을 통해, 우리는 2017년과 함께 가고 있는 각자의 지난 날을 반추해 본다. 

아쉬움으로 헛헛한 시간, 빛나고 싶었지만 초라했던기억들. 하지만, 그 초라함조차,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기에 가능했던 아쉬움이라는 것을 드라마가 충격적으로 알려주는 순간, 한 해를 보내는 회한의 시간은 한여름을 아프지만 아름답게 기억해 내는 그의 옛사랑들처럼, 충분히 반짝거렸던 기억들로 새롭게 해석된다. 덕분에 쓸쓸함 대신 여름과 같았던 2017년의 추억으로 한 해를 마감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다. 언제나 그렇듯 '최강희'였기에 20대와 30대, 심지어 빛을 잃었다던 서른 일곱에는 반짝였던 한여름을 설득했던, 2017년 겨울이 선사한 여름날의 온기같던 드라마, <한여름의 추억>이다. 부디, 2018년 12월 31일에도 이런 뜻깊은 선물을 또 받고 싶다. 
by meditator 2018. 1. 1. 15:21

오래 전에, 멀리 떨어진 은하 파파러웨이에서 벌어진 선과 악의 세력의 끝나지 않는 싸움, 스타워즈. 1977년 시리즈가 시작된 이래 하나의 시리즈 영화를 넘어 문화적 코드이자 전설이 되었다. 애초에 조지 루카스 감독에 의해 9부작을 기획되었다던 이 시리즈는 199년부터 다시 시작된 프리퀼 시리즈 세 편을 통해 전설의 시작을 훑어본 후, 2015년 <깨어난 포스>로 다스베이더의 죽음 후 30년 후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악을 주체적으로 수행해내던, 그러나, 그 악을 응징하기 위해 검을 (광선검을) 들었던 루크에게 충격적인 'I'm your father'출생의 비극을 알려주었던 실질적인 시리즈의 주체였던 다스베이더의 죽음은 결국 스타워즈였던 전설의 주체적 동력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30년후, 악의 주체는 사라진 줄 알았지만 오히려 그 세력을 강화해 '퍼스트 오더'가 은하계를 장악하고 다스베이더에 필적할만한 카일로 렌(아담 드라이버 분)이 등장했으며, 마지막 제다이였던 루크는 사라졌다. 악이 횡행하고 전설이 사라진 세상, 그 악의 시대에 저항의 불씨는 루크의 쌍둥이 여동생인 레이아 공주와 그녀를 따르는 레지스탕스 저항군으로 부터 지펴지기 시작하는데, 그들은 저항 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마지막 제다이였던 루크를 찾기에 고심하고, 이 루크를 찾는 여정에서 반가운 한 솔로의 복귀와 함께 레이(데이지 리들리 분), 핀(존 보예가 분), 포(오스카 아이삭 분) 등 새로운 전설의 후계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전설의 지양; 살부(殺父)의 신화 
스타워즈 시리즈의 요점을 몇 줄의 말로 정의내릴 수는 없지만, 운명으로 정해진 '포스'를 지닌 정의의 기사 '제다이'와 그 맞은 편에 악의 세력 시스가 있다. 이들은 은하계를 두고 끝이 없는 선과 악의 전쟁을 벌인다. 그리고 그 전쟁의 가운데에는 포스를 지닌 가문, 가족의 비극사가 자리잡고 있다. 정의의 제다이가 되어 악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루크, 그런데 바로 그 루크가 제거하려 했던 악의 주구가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는 비극적 혈연사야 말로, '선과 악'의 미묘하고도 비극적인 운명으로 <스타워즈> 관객들을 매료시킨다. 

그리고 제다이의 영웅적 활약상과 이 비극적 가족사는 <스타워즈> 전설의 요체가 된다. 그리고 이제 30년 후 새로이 시작된 시리즈는 바로 이 '전설'의 지양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흔히 '지양'이라고 하면 없앤다, 하지 않는다 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지양(止陽)은 헤겔의 변증법에서 '아우프헤벤(aufheben)'을 뜻하며, 여기에는 '폐지한다, 유지한다, 고양된다'의 의미가 담겨있다. 즉, 하나의 테제가 안티테제가 되는 과정에서, 테제 그 자체가 사라져서도 안되며, 그 성질이 유지되면서도, 동시에 다른 것과 만나 자신을 극복하고, 보다 높은 단계로 고양되어지는 나선형의 발전 과정이다. 

스타워즈는 '포스'를 지닌 '제다이'의 이야기이다. 그 중심에는 마지막 제다이였던 루크가 있다. 하지만, 이미 하나의 완결된 시리즈를 지난 루크는 전설의 제다이가 되었지만, 그것은 시리즈의 상징인 동시에, 시리즈를 이어가는데 가장 큰 부담이 된다. 30년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한 그 '영광'의 후광, 그 후광을 <스타워즈>는 제다이 마스터로서 루크가 키워낸 또 다른 비극적 가족사 '카일로 렌'을 통해 '제다이 전설'의 종말을 설득하고자 한다. 



결국 어둠의 하수인이 된 아버지 다스베이더를 '지양'하는 서사가 된 1977년으로 부터 시작된 시리즈, 그리고 당당하게 라스트 제다이로 전설의 자리에 서게 된 루크, 하지만 그가 쌍둥이 여동생을 설득하여 키워낸 자신과 같은 '포스'를 지닌 조카 '카일로 렌', 그러나 루크는 그에게서 발하는 '어둠의 포스'를 두려워하며 결국 그를 '시스'의 손에 넘겨주고 만다. 

30년 후 강력한 '포스'를 지닌 두 인물, 샤일로 렌과 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에 필적했던 레이의 캐릭터는 흡사 <해리 포터> 속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고뇌하는 소년 해리와도 같다. 즉 아직 선과 악으로 자신의 편을 정했지만, 그 어느 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경계에 선 성장기의 인물, 그러나 루크는 렌에 잠재되어 있는 악의 포스에 '예단'을 하여 렌을 제거하려 했고, 이는 렌의 트라우마이자, 그를 악의 편에 서도록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만다. 하지만 루크를 찾아가 수련을 받고자 했던 레이 역시 그것이 시스의 조작된 의도였을 망정 렌과 교감을 나눌 만큼 모호한 경계의 존재로 등장한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살부'의 의식을 치른다. 렌은 이미 앞선 <깨어난 포스>에서 자신의 악을 증명하기 위해 친부 한솔로를 죽인 바 있으며, 이제 그 반대로 <라스트 제다이>에선 그의 정체성의 근간이었던 사스의 주구 스노크를 스스로 제거한다. 
반면,  루크를 찾아가 가르침을 간청하는 레이. 하지만, 이미 렌의 경험을 통해 제다이로서의 훈련의 의미, 아니 더 나아가 '제다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된 루크는 그런 레이의 요청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녀의 용기에 마음을 돌린 루크는 그녀에게 세 가지 가르침을 주는데, 그 가르침의 끝에는 렌과의 교감 속에서 혼란을 겪던 레이가 스스로 선한 포스를 가진 자신의 길을 선택하듯,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 몇 남지 않은 레지스탕스들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루크 스스로 렌이 지휘하는 '퍼스트 오더' 군과의 전투에서 산화하며 '젊은 포스'들의 거름이 된다. 

이는, 서양 고전 신화에서 아버지를 지양하고, 영웅으로 거듭나는 성장 서사의 얼개를 그대로 번복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아비와 적이 되어 싸우며 악에 물든 아비  다스베이더를 극복하고 전설이 된 제다이 루크는, <라스트 제다이>를 통해 스스로 새로운 세대에게 길을 터주며 장렬하게 전사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제다이 루크의 전설 시리즈는 이제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스타워즈'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제다이의 지양
루크가 좌절한 것처럼, 루크에 의해 제다이로 선택받은 자였던 렌은 그 스스로 '시스'의 지도자 스노크를 제거하지만, 제거한 이후의 선택은 그 스스로 '퍼스트 오더'의 리더가 되는 것이었다. 선택받은 '제다이'로 훈련받은 자의 일그러진 선택, 레아 공주와 한솔로의 아들, 루크의 조카이자, 선택받은 제다이였던 렌의 실패는, 앞서 다스베이더가 연상되며, 루크의 '선택받은 기사', 제다이에 대한 회의론으로 귀결된다. 아니, 부제 '라스트 제다이'처럼, 루크로 마무리된, 제다이의 역사가 '지양'된다. 루크는 기꺼이 자신을 희생시켜 새로운 시대를 연다. 

대신 누구의 딸인지도 모르는, 아니 알 필요조차 없는, 선택받지 않은 자쿠 행성 출신의 레이, 훈련받지도 않은 상태에서 렌에 필적할만한 '포스'를 드러내었던, 선과 악의 경계에서 스스로 굳건하게 선의 자리에 선 , 훈련되지 않은, 보잘 것없는 출신의, 여성이 악에 대항하는 세력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는 <스타워즈>의 설정은 그녀와 함께 하는 레지스탕스의 흑인 핀, 그리고 이번 시리즈에 그의 조력자로 등장한 동양인 켈리 마리 트랜과 함께 또 다른 전설의 '탄생'을 알린다.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찾아헤매던 '라스트 제다이' 루크의 '산화'와 함께 이제 더는 의지할 '전설'도 없이, 지원군조차 없는 초라한 일행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퍼스트 오더에 굴하지 않는 '선의 행군'을 떠나며 새로운 전설의 시작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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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을 지양하고 새로운 시리즈를 준비해야 하는 이 야심찬 시도는 그 덕분에 때로는 <해리 포터>인 듯, 혹은 때로는 <반지의 제왕>인 듯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와, 절대 악, 그 혼돈 속에서 궁극적 여정을 떠나는 일군의 동행들을 구축해 가며 '장황한 새 시대'의 서사를 연다. 덕분에 그 풍성하다 못해 구구절절한 새 시대의 도입부는, 한편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그대로 별들의 전쟁을 기대했던 화려한 액션 어드밴쳐의 구성에서는 어쩐지 아쉬움을 남긴다. 다음 시리즈를 위함이라지만 새로운 파트너 쉽을 선보인 핀과 로즈가 어렵사리 적진에 침투하고 싸움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잡히는 그 순간에는 실소가 나오고 만다. 아직 완전체가 되지 못한 주인공들은 매번 스스로의 싸움을 주도해내지 못한다. 성장의 서사는 간곡했지만, 마치 2차 대전의 우주 버전과도 같은 전투의 장면들은 전설로 탄생할 주인공들의 본격적인 활약이 될 다음 시리즈에 대한 기대로 접어두며 아쉬움을 남긴다.   
by meditator 2017. 12. 29. 04:59

올 겨울은 예년 겨울과 다르게 유난히 춥다. 그리고 눈도 많고. 날이 추워지면, 마음도 추워지고, 그래서일까? 올 겨울 뜨겁게, 혹은 잔잔하게 반응을 보이는 '연인'들의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 중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건, 바로 주말 드라마 <황금빛 내인생>이다. 주말 드라마의 아성 kbs2의 토일 8시 자리야 높은 시청률이 따놓은 당상이지만, <황금빛 내인생>은 40%를 거뜬히 넘어선 소현경 작가의 전작 <내딸 서영이>의 시청률 기록과의 경쟁 이상,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전 세대에 걸친 뜨거운 반응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그 뜨거운 반응의 중심에 이른바 '도지 커플', 최도경(박시후 분)-서지안(신혜선 분) 두 주인공이 있다. 



황금 수저를 포기한 황태자의 사과 
극 초반 어려운 가정 형편에 대기업의 인턴 사원으로 갖은 수모를 겪던 서지안이 어머니의 한 순간 거짓말로 그룹 해성의 잃어버린 딸이 되어 재벌가의 신데렐라가 되는 롤러코스터와 같은 신분 상승의 서사를 다루었다. 짧고 고단했던 서지안의 빛나는 순간은 그 이후 참혹한 현실과 함께 추락해 버린다. 그러나 사고 차량 주인과 가해 차량 운전사로, 이어서 싸가지 갑과 을, 그리고 오빠와 동생으로 악연인지 운명인지를 이어가던 해성 그룹의 외아들 최도경과 서지안은 그 과정을 통해 '사랑'에 눈뜨게 되지만, '부'가 곧 신분인 세상을 절감한 서지안은 굳게 마음을 걸어 잠근다. 

그리고 이제 중반을 넘어선 <황금빛 내 인생>은 황금빛 수저를 내팽개친 채, 사랑을 찾아, 그 사랑의 용기로 자신을 찾아나선 최도경의 역 계급 경험이 극의 중심을 이룬다. 서지안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인한 최도경, 그리고 서지안에 대한 자신의 사랑, 그 중심에 오로지 서지안만이 재벌 그룹의 후계자로 길들여져야 하는 자신의 수동적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깨달은 최도경은 사랑을 찾기 위해 '독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그의 '독립'을 일회적 반항이라 생각한 그룹의 창시자 할아버지는 그를 빈털털이 신세로 거리로 내쫓고 마는데, 그런 할아버지의 결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도경은 '알바'를 전전하며 '쉐어 하우스'에 거쳐를 마련하고 '독립'에의 의지를 불태운다. 

34회 마지막 장면, 밤낮으로 알바를 전저하던 최도경, 알고보니 그가 알바를 했던 이유가 바로 크리스마스 당일이 생일이었던 서지안의 생일 선물을 마련하기 위했던 것. 꾸벅꾸벅 졸아가며 미역국을 끓여 생일 상을 차리고, 포장도 없이 다친 손으로 움켜 쥔 목걸이에 결국 서지안은 마음을 열고만다. 하지만, 눈물겨운 생일 상과 선물 때문만이었을까? 그건 그간 최도경이 꾸준하게 서지안을 향해 보인 성의있는 사랑의 '대미'를 장식한 것일 뿐이다. 오히려 최도경은 서지안을 찾아나선 이래, 서지안을 만날 때마다 꾸준하게 '사과'를 해왔다. 

집에서 쫓겨나던 날 도움을 청하기 위해 최도경을 찾았던 서지안, 그런 서지안을 최도경은 냉정하게 잘랐다. 혹시나 서지안에게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그리고 자신에게 향하는 서지안의 마음을. 그러나, 그런 최도경의 차가운 태도로 인해 서지안은 홀로 집으로 들어가 거리로 내쫓겼다. 그 사실이 두고두고 마음이 아팠던 최도경은 서지안을 만날 때마다 사과를 한다. 심지어, 서지안을 찾아헤맨 아버지에 대한 선의로 전했던 소식에 서지안이 폭풍같은 분노를 퍼부으며 최도경의 알량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비아냥거릴 때조차 최도경은 그 모든 걸 자신으로 인한 서지안의 상처로 감수한다. 가진 자로써 자신의 영역이 흐트러질까 걱정했던 노파심, 재벌 후계자로서 자신의 지위라 흔들릴까 두려웠던 그 마음을 서지안의 분노를 통해 반성하며 최도경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한다. '사랑' 이란 이름의 계급적 반성이자, 후회이고, 그에 대한 진솔한 사과, 그것이 다른 계급의 처지를 몸서리치도록 절감한 서지안을 봄눈 녹듯 녹여간 최도경의 '사랑'이다. 

최도경과 서지안은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의 두 주인공이다. 재벌가의 황태자와 월세를 전전하는 집안의 비정규직조차 버거운 딸, 하지만 이 전형적인 서사를 소현경 작가는 2017년의 방식을 풀어간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삶의 모토로 삼았던 황태자 최도경은 자신의 그 신념이 사랑 앞에서 얼마나 자기 안위적인 계산이었던가를 통렬하게 깨닫는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유산으로서의 계급'대신 자기 자신으로서의 삶의 선택과, 그 온전한 최도경으로의 주체로서의 사랑으로 귀결된다.



비서를 존중한 보스의 사과 
다른 백마 탄 왕자도 있다. 꼴찌에서 시작하여 이제 당당하게 월화 드라마 1위를 거머쥔 <저글러스>의 남치원(최다니엘 분)이 그 주인공이다. 부사장의 특채로 yb 영상 사업팀의 상무로 등장한 그, 그리고 까칠한 그를 위해 공채 입사 5년, 그러나 전임 보스의 배신으로 기피 직원에서 겨우 자리를 얻은 좌윤이(백진희 분)가 그 사랑의 상대다. 

보스와 비서, 이 엄연한 직장 내의 서열이 분명한 관계로 만난 이들은, 하지만 뜻밖에도 좌윤이의 집 2층에 남치원이 세들어 오면서 직장 밖에서는 집주인과 세입자의 뒤바뀐 관계가 되어 드라마의 역학 관계를 튼다. 독불장군 모든 것을 자신이 혼자 해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던 남치원은 당연히 '비서'의 존재가 필요없다 생각하고, 그래서 좌윤이의 존재를 무시했지만,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가 본의아니게 그로 하여금 '비서'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하지만 사사건건 수동적 비서로서의 좌윤이를 미더워하지 않았던 남치원은 보스를 위해 충정을 다하던 '본투비 비서'로서 사명감을 지닌 좌윤이를 '여성으로서 곁을 허용한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등 색안경을 끼고 본다. 그러나 제 아무리 비서로서의 존재를 무쓸모라 여겨도 비서라는 직업을 '하인' 다루듯하든 다른 '전통적 보스'와 달리 좌윤이를 존중하던 그는, 집주인의 배려, 그리고 비서로서의 헌신성을 차츰차츰 알아가며 자신이 끼고 있던 색안경을 벗어버리게 된되고, 비서라는 직업의 정체성을 혼돈했던 자기 자신을 진솔하게 사과한다. 그리고 나아가 전직 보스에 대한 수모를 '보스 어워드'를 통해 갚으려 했던 좌윤이의 심중을 헤아려 함께 보스 어워드에 출전하기 까지 한다. 

<황금빛 내 인생>과 <저글러스>를 통해 등장한 남녀 관계는 '과도적'이다. 여전히 '사회적 계급'의 측면에서는 '백마탄 왕자'와 같은 존재와의 사랑이라는 '로망'을 구현하는 한편, 그 구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2017년에 대두된 '여성 존중'의 담론에 충실하다. 남자들은 여성들의 존재와 그들의 직업, 그리고 삶의 방식을 존중하며, 때로는 자신이 곡해했던 지점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한다. 그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다. <황금빛 내 인생>의 최도경은 자신의 동생이나 해성 그룹의 딸인 서지안 이전에 사원 서지안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녀가 디자인한 도안을 공모에 내는가 하면, 해성 그룹에서 쫓겨난 그녀의 경력 단절을 안타까워 직업을 알아봐준다. <저글러스>의 남치원이 비서로서의 좌윤이를 존중하고, 다른 상사들 앞에서, 혹은 다른 직원들 앞에서 수모를 겪는 좌윤이의 손을 잡아 보호하듯 에스코트하며, '자신의 비서'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 보이는 것도 같은 방식이다. 때로는 그들이 자신의 계급적 이기심에 불온한 행동을 하거나, 남성적 편견에 불쾌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그들 '왕자'들은 곧 반성하고, 기꺼이 '사과'한다. 거기엔 내가 남잔데, 혹은 내가 '상사'인데 하는 치졸한 자존심 따위는 없다. 

이런 일련의 남녀 관계는 이들 드라마에 앞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화제를 불러 모았던 <이번 생은 처음이라>의 남세희(이민기 분)- 윤지호(정소민 분)의 관계 설정과 일련의 맥을 같이 한다. 2017년에 가장 어울리는 백마 탄 왕자였던 집주인 남세희, 그는 오갈데 없는 88만원 세대 윤지호를 자신의 집에 세입자로 거둔다. 그리고 젊은 남녀에게 편견의 통과 의례를 요구하는 세상을 편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위장 결혼'에 돌입한 이 집주인 세입자 커플. 그 결혼의 과정에서 남세희가 윤지호 모친에게 약속한 건 그 무엇도 아닌 윤지호의 꿈에 방해가 되지 않는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남세희의 약속은 윤지호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계약 결혼을 파기하기를 요구할 때 두말하지 않고 그 파기에 대한 동의로 이어졌고, 결국 꿈을 이룬 윤지호와 그런 그녀를 기꺼이 서포트하는 남세희의 진정한 결혼으로 드라마는 '로맨틱'하게 마무리되었다.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커플, 우수지(이솜 분)-마상구(박병은 분) 역시 여성의 꿈에 기꺼이 조력하는 파트너쉽이 사랑의 요건이다. 

이렇게 2017년 겨울을 달군 이들 세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황금빛 내 인생>, <저글러스>는 2017년의 사랑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다. 사랑 이야기 속 남성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그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 캐릭터들이지만, 그들이 사랑을 구현하는 방식은 달라졌다. 더 이상 '남자'라서, 혹은 '가져서', 그게 매력인 시대는 지났다. 오히려, '남자'라서 몰라서, '가진 자'라서 무지해서 몰랐다 사과하고, 여성들의 입장에 서보고, 반성하고, 함께 하고자 노력하는 자만이 사랑을 쟁취한다. 그게 2017년 식 사랑이다. 


by meditator 2017. 12. 27. 14:04

미셜 푸코는 신자유주의가 개인을 '기업가적 주체'로 만들어 버린다 경고했다. 즉, 노동자로써 서로 결집하고 자본에 대항하여 싸우는 세력의 일부가 아니라, 개별화된 개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단련하는 자기 계발의 주체가 되어 '자본주의 경쟁' 전선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회에서 각자의 부와 성공은 온전히 개인의 몫, 책임으로 전가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런 개인에게 돌려진 책임은 사회적으로 '자기 계발 열풍'을 조성했으며, 교육에 있어서 무한 경쟁을 대두시켰다. 지난 12월 18,19일 양일간에 걸쳐 방영된 <ebs다큐 프라임 - 미래人교육 2부작>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 6개국 학부모의 현실을 짚는다. 




98점 짜리 부모
그 시작을 연 건 안산에서 부부 치과를 운영하고 있는 표영수-양은진 씨 부부다. 변화하는 세상에 대응할 최소한의 힘을 키워주고 싶다는 이들 부부의 소망은 '아빠 학교'로 귀결된다. 아빠가 병원에서 퇴근한 후 열리는 이 '학교'의 선생님은 아빠, 학생은 이들 부부의 연년생 두 아들이다. 말로는 최소한의 힘이라고는 했지만, 아빠가 치과를 운영하는 건물을 물려주겠다는 야무진 상품이 걸린 최과 의사가 되는 두 형제의 레이스이다. 그러기 위해서 아빠가 배웠던 80년대 학습지 위주의 수학 문제 풀이 교육 방식과 단어 외우기 부터 시작하는 영어 교육 방식. 경쟁 상대가 되어버린 형제 학습의 결과는 부모의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해 눈물짓는 형의 슬픔으로 귀결된다. 

우리나라에 아빠 학교가 있다면 싱가포르에는 엄마 학교가 있다. '은수저'로 태어난 자신들은 노력을 통해 성취할 수 밖에 없다는 부부의 절실한 현실 인식은 결과에 따라 인문계 진학이 갈려지는 싱가포르 초등 졸업 시험(psle)을 향한 총력전으로 귀결되고, 회초리까지 등장한다. 
유럽이라고 다를까? 독일 바이에른 주, 교육 심리학자인 엄마 한나가 코치가 되어 축구장을 누빈다. 프로 축구 선수가 꿈인 아들의 독려를 위해서이다. 하지만, 정작 엄마가 바라는 건 의사인 할머니, 비행사인 사촌을 롤모델로 아들이 성공적으로 김나지움에 진학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학업 성적은 물론,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등 레슨의 과외 활동까지 아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챙기려 한다. 
몽고 울란바토르의 엑시글랭의 부모는 부모 세대가 누리지 못한 것들을 자식에게 누리도록 하기 위해 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의사를 만들기 위해 '맹모삼천지교'를 실천하는 건 물론, 걸음마를 떼면서 부터 평균 3개 정도의 학원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인도의 교육열도 만만치 않다. 케랄라 주의 장거리 열차 운전수인 아버지는 한 달에 한번 정도 집에 들리지만 그때마다 딸과의 수학 수업을 하느라 부녀간의 정은 커녕 언성만 높아지기 일쑤이다. 11살 짜리 딸의 교육을 위해 대학 도시 명문 학교로 전학까지 시킨 부부는 아빠는 학습, 엉마는 양치부터 숙제까지 리모컨으로 조정하듯 딸의 일상을 책임진다. 

한국을 비롯한 이들 세계 각국의 부모들은 자신들이 98점 짜리 부모라 생각한다. 왜 98점일까? 아이의 미래를 위한 자신들의 계획, 그리고 그에 따른 아이의 '관리', 그것이 성공적인 아이의 대학 입학, 원하는 직업으로의 성취로 이어졌을 때 나머지 2점이 채워지기 때문이다. 이들 부모는 엄마 아빠처럼 성공적인 어른이 되기 위해서, 혹은 엄마 아빠가 미처 가지지 못한 것들을 위해 아이의 미래를 담보로 삼는다. 그리고 놀고 싶은 혹은 쉬고 싶은 아이들에게 단호하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라고 선언하고, 아이들은 그런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자책하거나 슬퍼한다. 

실험 결과는 흥미롭다. 작은 s자로 이루어진 큰 대문자 H, 그 문자를 본 이들 부모들은 대부분 작은 s에 주목한다. 즉, 눈 앞의 작은 것들이 이들의 시선과 관심을 빼앗는다. 그런가 하면, 똑같은 3분을 측정하는 실험에서도 이들 부모들의 특징은 드러난다. 부모의 시간은 아이의 시간보다 빨리 흐른다. 똑같은 1년이라도, 아이의 1년이 부모들에게 압박감으로 다가온다. 



이런 교육이 미래에도 유효할까?
그런데 여기에는 유보된 질문이 있다. '이런 공부, 이런 성취, 이런 직업이 미래에도 유효할까? 안산의 표영수 씨 부부도, 독일의 엄마 한나도, 몽골 엑시글랭의 부모도 아이에게 바라는 건 '의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다큐의 시작, 2017년에 중학생, 2037년에 33살이 된 주인공이 사는 시대에 의사는 '인공 지능'이 대체한다. '의사'가 필요없을 지도 모를, 상당수의 전문직이 사라질 위기의  4차 산업 혁명의 시대가 도래하는데, 여전히 의사가 되라며 아이의 시간을, 아이의 삶을 통치하고 관리하는 부모들 이게 과연 현명할까?

이른바 학부모의 치맛바람은 교육의 탄생과 함께 대두된 문제이다. 하다못해 서당 시절에도 치맛바람은 있었으니. 그래서 그에 대한 비판과 비난도 교육의 역사만큼이나 유장하다. 이미 경쟁 우선주의의 교육 시장에서, 아이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부모들의 일방적인 교육 방식은 '인권적' 차원에서 지적받아 왔던 바 크다. 하지만, 비인권적이라 해도, 그렇게 닥달해서 좋은 상급학교를 보내고, 입신양명을 하면, 그래도 다 '남는 장사'가 아니겠냐는 것이 우리 사회의 지금까지 인식이었다. 그러기에 아이들이 못견디겠다 아우성을 치고, 스스로 목숨을 거두어도 여전히 '교육 열풍'은 잠재워지기는 커녕, 해를 넘길 수록 그 경쟁의 도를 더하게 되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2부작 다큐는 바로 그런 '남는 장사'에 의문을 제기한다. 지금 당신들이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시작하는 그 '교육'이, 그런 '자식을 관리하는 방식'이 외려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아이의 앞길을 망치는 것이라면? 하고 문제를 제기한다. 



도대체 4차 산업 혁명이 무엇이길래 지금까지의 교육 방식이 의미가 없다는 것일까? 아마 그건, 무엇이길래가 아니라, 무엇이 될 지 모르길래라는 것이 정확한 답이 될 것이다. 즉, '디지털 혁명에 기초하여 물리적 공간, 디지털적 공간, 생물학적 공간의 경계가 희석되는 기술 융합의 시대'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모른다는 것이다. 전문직의 상당수가 없어진다고 하는데, 어떤 직업이 없어지고, 어떻게 변화할 지 감조차 정확하게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변화하는 세상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실패'하는 것이다. 대양에 흔들리는 부표처럼, 미래라는 부표를 따라, 불안한 파도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적응력, 바로 그것이 다큐가 말하고자 하는 바 미래人이다. 미래학자 토마스 프레이는 4차 산업 혁명 시대의 인재에게 요구되는 건 회복 탄력성, 창의성, 소통력, 비판적 사고, 협업 능력, 복합적 문제 해결 능력, 유연성이라 정의내린다. 과연 앞서 등장한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학습 중에 이런 내용이 들어있을까? 지금처럼 경쟁 위주의, 너 하나 살아남으면 장땡인 시험을 통한 성취지향적 교육 시스템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이라 다큐는 말한다.  실패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삶의 혼란을 적극적으로 헤쳐나갈 인재가 필요로 되는 시점에서 부모에 의해 수동적으로 키워진 인재는 적응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즉, 경쟁주의에 매몰된 부모들에게 다큐는 말한다. 당신들의 교육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by meditator 2017. 12. 21. 14:48

2016년 주중 미니 시리즈 최고의 히트작은 두말할 나위없이 최고 시청률 38.8%를 달성한 <태양의 후예>이다. 그리고 불과 1년 이른바 공중파 미니 시리즈의 수치상 성적은 초라하다. 그나마 '면피'를 한 것이 자신의 죄를 벗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검사의 이야기를 다룬 <피고인>의 28.8%정도이다. 그 뒤를 이어 kbs2의 <김과장>의 18.4%가 있다. 하지만, 이 두 드라마를 제외하고는 공중파 미니 시리즈의 대부분이 10% 내외 혹은 10%에 못미치는 시청률 성적표를 받았다. 심지어, 공중파라는 말이 무색하게 <김과장>의 후속작으로 등장한 <맨홀; 이상한 나라의 필>은 1%대의 기록을 세웠고, 그 뒤를 mbc의 <로봇이 아니야>와 <20세기 소년소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역추격하는 이변을 기록했다. (닐슨 코리아 기준)


이렇게 공중파 미니 시리즈가 초라한 성적표를 받게된데에는 종편과 케이블 등으로 다각화된 채널 경쟁이 그 첫 번 째 원인으로 등장한다.  <아르곤>, <부암동복수자들>, <이번 생은 처음이라>, <슬기로운 감빵 생활> 등은 비록 다른 플랫폼으로 수치상으로 비교할 바가 못되지만, 그 화제성 면에서는 공중파 미니 시리즈를 제쳤다. 거기에, <나는 자연인이다>, <냉장고를 부탁해>, <뭉쳐야 뜬다> 등의 종편 예능 프로그램 역시 밤 10시에 미니 시리즈라는 '전통의 아성'을 깨뜨리는데 일조했다. 그렇게 주중 미니 시리즈가 위축되고 있는 사이, jtbc의 금토 드라마는 <힘센 여자 도봉순>에 이어, <품위있는 그녀>, <청춘시대2>를 성공시키며 금토 밤 11시대의 드라마를 안착시켰고, tvn 역시 공중파 보다 빠른 시간대인 9시 30분, 심지어 9시 10분에 주중 드라마를 편성함으로써 공격적인 태세를 구축했다. 거기에 <비밀의 숲> 등으로 화제를 일으켰던 토일 드라마를 가족 드라마로 개편하며 공중파 드라마에 대한 경쟁의 각을 가다듬었다. 그런 가운데 ocn은 독보적으로 <구해줘>, <보이스>, <터널> 등의 장르드라마로 자신만의 입지를 다졌다. 




'정의'의 시대, '정의'를 주역, 법조인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공중파라는 '고지'가 존재하는 않는 춘추전국의 시대가 된 2017년 드라마의 내용적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아직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이 엿보이지 않던 2016년의 드라마들은 '기억'과 '국가의 존재'를 논했다. 가장 인기있는 사랑 이야기였던 <태양의 후예>조차 재난 현장 속에서 피어난 인간애와, 그곳에서 국가의 가치를 읊조렸다. 국가의 '부재'로 상처입은 사람들에 대한 인본주의적 도리와 원칙이 등장했으며, 잊지 말아야 기억과, 상흔을 드러내고자 저마다 애썼다. 그리고, 촛불이 광장을 메우고, 사람들의 힘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자, 드라마도 그런 시대에 부응하고자 했다. 2017년의 드라마 중 다수가 '정의'를 이루어 내기 위한 사람들의 고군분투를 다루었고, 그 주인공으로 '정의'와 관련된 법조계나 언론계의 전문직들이 대두되었다. 

2017년의 법조계 인물들이 주인공이 된 작품의 첫 테이프를 끊은 건, 바로 죄인이 된 채 새해를 연 sbs의 <피고인>이다. 아내와 딸을 죽였다는 혐의로 감옥에 간 검사 박정우(지성 분), 심지어 그는 그날의 기억조차 불분명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상실된 기억을 이어가며 감옥에까지 이어진 악의 손길을 떨쳐내며, 재벌가의 차민호(엄기준 분)와 그를 둘러싼 정관계 커넥션을 대항하여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한국판 프리즌 브레이크라며 인기를 모았다. 그 뒤를 이어, 이보영이 형사에서 변호사 사무실 비서로 신출귀몰, 판사에서 변호사가 된 이동준 역의 이상윤과 함께, 법조계의 권력인 태백의 아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자신을 던진다. <파수꾼>에서 자신의 아이를 잃은 엄마 조수지 형사(이시영 분)는 자신의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검사가 된 장도한(김영광 분)과 손잡고 

<피고인>의 박정우도, <파수꾼>의 장도한 검사(김영광 분)나, 조수지 형사(이시영 분). 법조계로 부터 뻗어나간 구시대의 적폐를 들춰내기 위해 자신들을 던진다. 로맨스 드라마를 내걸었던 <수상한 파트너> 역시 결국 아버지의 죄라는 구원과 거기에 얽힌 검찰청장으로 대변되는 법조계의 커넥션 파헤치기로 귀결되었다. 신선한 여성 캐릭터로 화제를 모았던 <마녀의 법정> 역시 실종된 어머니를 둔 여성 검사 마이듬(정려원 분)의 종횡무진 활약은 결국 조갑수(전광렬 분)로 상징되는 구시대적 권력의 척결로 모아진다. 그 마지막 바턴을 이어받은 건, sbs의 <이판사판>으로 이번에는 오빠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법조인이 된 로스쿨 출신의 판사 이정주(박은빈 분)가 나선다. 

이렇게 공중파의 법조계 인물들은 검사, 혹은 판사 등 '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그 '특권적' 성격을 마다하고, 직분의 본래적 의미에서의 활동을 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개인적 해원을 풀어가는 식이다. 즉, 그들의 개인적 원한의 근원은 대부분 유신 시대로 상징되는 고문 기술자, 시국 사건 조작 등을 통해 성공의 발판을 마련한 적폐의 인물과, 이제는 권력의 중심이 된 그를 중심으로 한 검경, 정관계의 카르텔이 존재한다. 이렇게 드라마는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의 권력의 실체를 정의내리고, 그 숱한 사람들을 짓밟고 탄생한 구 시대의 권력의 아성을 '희생자'의 가족들을 통해 통렬하게 고발하고 무너뜨리고자 한다. 



'피해자'에 의한 적폐 청산이란 공식은 바로 우리 사회에 지배적인 법조계 엘리트에 대한 선입견을 드라마가 내재화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럼에도 결국은 '법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정의 구현의 적임자가 바로 '법조계'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들 주인공들이 2017년을 채워간다. 하지만 이런 피해자에 의한 가해자에 대한 구원의 해결은 '즉자적'인 태세이기도 하다. 이런 방식의 서사를 넘어서, 과연 적폐 청산을 넘어, 새로운 시대의 '인간형'에 대한 화두를 다룬 드라마가 있다. 바로, 2017년 정의의 시대를 대표할 <비밀의 숲>이 그 주인공이다. 

공중파 드라마에서 주인공이었던 피해자의 직계 비속 역시 <비밀의 숲>에서 나온다. 바로 장관이었던 아버지가 하루 아침에 몰락한 영은수(신혜선 분)가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아버지의 죄를 밝히기 위해 검사가 되고 물불을 안가리고 뛰어다니던 공중파 미니 시리즈의 주인공 롤 격인 이 인물을 13회에 가차없이 희생시켜 버린다. 대신, 그런 '원혼'의 피해자 대신 드라마를 채워가는 건, '직업적 사명감'을 가진 인물들이다. 뇌의 이상으로 수술을 해서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는 주인공 황시목(조승우 분)을 주인공으로, '경찰 존심이 있지, 난 타협안해요'하는 무대포 형사 한여진(배두나 분)에, 처세술의 달인으로 재벌가의 사위까지 되었지만, 끝내 자신의 한 몸을 던져 법조계의 정의를 실현하려고 했던 이창준(유제명 분)까지 그들의 실천, 그 동인이 되었던 건 오로지 직업적 사명감, 그 원칙 하나였다. 내 주변의 누가 당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사회가, 그리고 나의 일이 이러해야 한다는 원칙을 통해 일신의 안락과 나눠먹기 식, 우리가 남이가로 대변되는 구 시대의 이데올로기의 청산을 설파하며 이 시대의 '정의'의 화두를 설득해 냈다. 



법조인만 있냐? 기자도 있고, 보험 조사원도 있다. 
하지만 검사, 판사 등 법조계 인사들만 활약한 건 아니다. 어벤져스 팀을 이뤄, 구악의 카르텔에 도전한 기자들도 있다. 대한일보 특종 보도팀 스플래쉬 팀의 이석민(유준상 분)과 한국판 타블로이드지 애국신문의 기레기 한무영(남궁민 분)이 그 주인공이다. 그들은 권소라 검사와 함께, 구태원(문성근 분)으로 상징되는 구태 언론과 그들에 의해 조작된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뭉친다. 공중파에는 언론팀에 대응하는 건, 고 김주혁의 마지막 작품으로 기억될 tvn의 <아르곤>이다. 손석희가 연상되는 이 시대의 목소리 김백진(김주혁 분)과 아르곤 팀이 '미드 타운 붕괴 사고'라는 거대한 몸집을 드러내기 까지의 고군분투를 자기 고백적으로 그려내며, 이 시대 언론의 사명을 드라마로 말한다. 감질나게 짧았던 8부작 아르곤 팀의 활약은 김백진의 추천으로 정규직이 된 이연화와 김백진, 그리고 아르곤 팀의 다음 탐사 보도를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더 이상 김백진 앵커의 활약을 볼 기회를 잃었다. 독특하게도 <매드독>에서는 보험회사 조사팀장이었던 최강우(유지태 분)와, 형이 대형 비행기 참사의 범인이 된 김민준(우도환 분)이 뭉친다. 그들의 상대는 돈을 위해 사람들이 탄 비행기를 참사로 이끈 보험회사와 비행사,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조력한 권력자들이다. 


이렇게 2017년의 드라마는 검사와, 판사, 변호사 등의 법조인, 기자들, 그리고 형사, 보험조사원까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재난 사고로 상징되는 세월호 사건, 그리고 구 시대의 권력을 상징하는 정관계의 카르텔을 대항하여 싸우며 한 해를 채워갔다. 2016년 잊지 말자며, 국가란 무엇이냐며 묻던 그 '회의적 질문'은 보다 열정적이고 저돌적인 전투로 승화되었다. 

by meditator 2017. 12. 19. 20:59

<비밀은 없다>는 호불호가 갈렸다. 평단의 일부에서는 역시 이경미라 극찬을 했지만, 이 글을 쓰는 사람으로 말하면, <전체관람가- 아랫집>을 보고 난 정윤철 감독의 느낌에 가까웠다. 이른바 '괴랄하다(괴이하다)'로 표현되는 이경미 감독의 세계를 존중한다 해도, 한 사람이 만든 거라기엔 영화의 톤은 울퉁불퉁했고, 말하고자 하는 바의 정체는 모호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스 홍당무>의 양미숙 못지않게 연홍으로 고군분투한 손예진은 빛났다. 그 해의 여우주연상을 손예진에게 준다면, <덕혜옹주>보다 <비밀은 없다>의 연홍이 더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017년 춘사영화제는 <비밀은 없다>의 손예진에게 수상을 했다. 그렇게 이른바 이경미월드가 칭해지는 감독의 독보적인 세계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여배우의 캐릭터를 통해 빛을 발한다. 그리고 단편 영화 <아랫집>에서도 마찬가지다. 12년만에 돌아온 이영애가 분한 희지 역시 괴랄하다. 





히로인을 통해 빛나는 이경미월드 
사전에는 없는 이 신조어, '괴랄하다', 괴상하다와 지랄맞다가 합성되었다 추측되는 이 단어로 응축되는 이경미 감독 영화를 대변하는 이들은 주인공인 여배우들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장면이 연출되면 자신도 모르게 흐뭇하다 못해 흡족한 '아하하하하' 고성의 웃음이 삐져나오고 마는 감독의 취향때문일까? 물론 그 취향에 기반을 두었겠지만, 하지만, 그저 어떤 색채의 프리즘같은 취향이라는 정의 이전에, 이경미 감독이 포착한 지점은, '정상'의 세상에 '정상'처럼 살아갈 수 없는 인간들이다. 

양미숙의 짝사랑 수난사를 그린 <미스 홍당무> 속 여주인공은 비인기종목 러시아어 교사에, 안면 홍조에 거기다 비호감의 언어를 툭툭 내뱉는 '사랑스럽지않은' 여주인공이다.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의 '사랑'을 내세워, '사랑지상주의'의 시대에 역설을 도모한 이 작품은 그래서, 다수의 사랑으로 상처받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그리고,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또 어떤가, 전라도 출신의 여성으로 경상도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지역으로 시집와서, 현모양처연하며 정치인의 아내를 자처한 '딜레마'의 응집체이다. 딸을 잃고 무당 앞에서 접신을 하는 듯 자신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은 자신의 고향말을 묻고 타지역에서 이방인으로 묻어가야 했던 그 수난의 시절을 잘 보여준다. 거기에 자신이 희생을 하여 꾸린 가정이란 신기루마저 사라지고, 그 '아노미'의 상태를 '미친년'같은 연홍을 통해 이경미 감독은 적나라하게 연출해 낸다. 

그렇게, 사회가 제시하는 '그러해야 한다'라는 고정 관념 속에서 살아가지만 거기에 끝내 맞출 수 없는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몸짓을 포착하는데 이경미 감독은 탁월하다. 그래서 이경미 감독의 작품 속 여성들은 거개가 '제 정신이 아닌'듯하지만 그래서 공감이 가고, 그래서 마음을 울린다. 겨우 15분 여의 단편이지만, <아랫집>에서 이영애가 분한 희지 역시 다르지 않다. 11년만에 돌아온 tv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 속 신사임당 역 이영애는 이뻤지만 어쩐지 박물관의 박제된 인물을 본듯했다면, <아랫집> 속 희지가 된 이영애는 표정 하나 없는 무표정으로 일관하지만 훨씬 생동감있다. 그리고 그 생동감의 원천은 바로, 아파트 담배 연기에 하소연하지만, 그 이면에 상실의 노이로제로 어찌할 줄 모르는 위기의 여성 희지가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담배 연기 층간 갈등에서 아파트 공동체에 대한 화두까지
'미세 먼지'의 주제를 선택한 이경미 감독은 그 '미세먼지'를 아파트 담배 연기로 인한 층간 갈등으로 풀어가고자 한다. 말이 서로 다른 독립 세대지, 화장실과 하수구 등을 통해 서로가 연결된 공동체 아파트. 그 406호에 사는 희지는 아랫집 306호에서 올라오는 담배 연기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그리고 그 고통에 대한 화답으로 그녀는 매일 아침 청소기를 들고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고, 그걸로도 풀리지 않은 마음을 결국 편지에 담는다. 

영화는 담배 연기로 인한 층간 갈등을 주제로 삼았지만, 그 갈등의 주체가 되는 인물의 내면과, 그 인물이 부닥치는 또 다른 인물들을 통해 아파트란 공동체가 가지는 다양한 층간 갈등의 유형을 드러내고자 한다. 영화는 마치 '너구리잡기' 게임처럼 그 짧은 시간에, 희지라는 인물의 사실은 애닮은 상처와, 그 상처입은 인물이 마주한 세상의 잔인함, 그리고 그것의 역설까지 두루두루 섭렵하고자 애쓴다. 윗집에서 보내는 편지를 보내는 장면에서 그 평범한 장면에서도 ng가 날 편지지가 순조롭게 들어가지 않아 쩔쩔매는 그 씬에 ok컷을 외치듯, 그리고 정작 윗집에 담배 연기 고통을 호소하는 희지가 흡연자였다는 반전처럼 이경미 감독은 평범한 일상의 틈을 비집고 나오는 일탈의 기운을 곳곳에서 포착해 내고자 한다. 덕분에 영화는 '괴랄한' 아파트 공동체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가 하면, 동시에 더 '괴랄할 수 밖에 없는' 희지의 개인사에 대해 깊은 스펙트럼까지 더한다. 

앞서 이명세 감독이 데이트 폭력을 다룬 <그대 없이는 못살아>가 우연히 기차 역에서 마주친 두 남녀를 통해, 그들의 현재와 과거, 이상과 현실을 조명하며, 그것을 이미지화시켜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기에 '이미지'로 전달된 느낌은 분명하지만, '이성'으로 독해하기엔 난해한 실험적인 영화가 되었다. 그에 이어 이경미 감독 역시 아파트 공동체 사는 다층의 층간 갈등의 요인들을 설명하며, 그것들은 '이영애'가 분한 '희지'란 대표적 인물과 '개구리'를 통해 풀어냄으로써, 역시나 실험적인 묘사의 계보를 잇는다. 메이킹 영상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이해하려 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이경미 월드! 하지만 그 '영상'의 실험은 이미 '이명세' 감독 편에서 제시된 바 '머리'로 이해하는, '사실'로써 받아들이는 영화적 방식에 대한 질문의 연속이다. 아마도, 이명세 감독의 실험, 그리고 이경미 감독의 괴랄함은 이경미 감독이 그 어느 때보다도 편하게 작업했다는 소감에서도 느껴지듯이 '상업 영화'라는 궤도에서는 궤도 순항이 어려운 시도들이다.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빛이난 이명세 감독에 이어, 이경미 감독의 작업이, <전체 관람가>의 의의를 빛낸다. 



by meditator 2017. 12. 18. 14:53

이제 딱 중반을 지난 tvn의 수목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 생활>에 대해 일각에서 볼멘 소리가 나온다. 어떻게 된게 감옥에 다 억울한 사람만 있는 거냐고? 우리 사회에서 감옥이란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가는 곳인데, 막상 감독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 김제혁의 주변 인물들 중 상당수가 억울하다. 늘 해맑은 웃음을 짓던 목공반의 신재하는 보험이 들지 않은 사주의 차를 몰다 교통사고를 내고, 합의금이 없어 감옥에 온 처지이며, 말끝마다 입바른 소리를 해대는 고박사는 지방대 출신으로 회사의 비리를 짊어지고 대신 형을 사는 중이고, 악마 유대위는 알고보니 더 악마같은 내무반 병장의 상습적 구타로 인한 군대 내 폭력 사건의 희생양이었다. 회를 거듭하며 감빵 생활 동료들의 사연이 풀어질 수록, 감빵에 오지 않아도 될 사람들의 수도 늘어난다. 과연, 감빵의 미화일까? 


물론 비율로 따지고 보면 전체 제소자 중 억울한 사람들의 비율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의 사연이 풀어지며 그들의 억울함이 도드라져 '미화'냐라는 볼멘 소리까지 등장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악마 유대위의 사건도, 고박사의 사건도 실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기초로 하여 재구성된 사연들로 결국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건 '법'이라는 그물의 성김이요, 인간이 주재하는 재판의 '자의성'이다. 심지어, 8회, 신재하의 가석방 에피소드에서 보여지듯, 10분의 시간만 투자하면 한 사람의 재소자에게 사회의 빛을 줄 수 있는 사안이 얼마든지 업무상 편의에 의해 지연되거나 파기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 사회의 조직의 명암'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공교롭게도 '미화'가 아니냐는 <슬기로운 감빵 생활>이 교도소 내 재소자의 현실을 '인간적'으로 다루고 있는 상황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세 번째 살인>이 개봉했다. '인간'이 만든 법, 그리고 그 '법'을 운용하는 인간들, 그리고 성긴 그 그물 속에서,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각자도생의 길을 모색할 듯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 속 주인공은 '세번 째 살인'의 주인공이 되고만다. 

보이는 것 - 자의적 심판의 도구; 법 
영화를 여는 건 살인을 저지른 미스미(야쿠쇼 쇼지 분)가 아니다. 그를 변호하기 위해, 아니 그에게 내려질 살인죄라는 형량을 감하기 위해 동원된 성취 지향적 변호사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하루 분)이다. 죄의 여부가 아니라 '승소'를 위해 싸우는 시게모리는 미스미의 사건을 어떻게든 사형을 면하게 하기 위해 다시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미스미가 탄 택시 블랙 박스를 조사하며 그간 계획된 범죄였던 사건의 판도를 변화시키려 하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의 통장에 입금된 돈으로 '청부 살해'의 형태로 범죄를 변형시키고자 한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즈언조차 헷갈리는 미스미는 순순히 응하고, 검사는 그렇게 승소를 향해 달려가는 시게모리에게 죄인이 자신의 죄를 마주할 기회조차 놓치게 만든다며 비난한다. 

하지만 그런 비난을 뒤로하고 사건을 자신의 입맛에 맞추어 조사를 해가던 중, 그의 눈에 피해자의 딸 사키에(히로세 스즈 분)가 들어온다. 다리를 절룩이며 그 절룩이는 다리의 이유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고 전해지는 소녀, 그런데 뜻밖에도 그 소녀가 빈번하게 미스미의 집을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애초 목적한 바를 따르다 본의 아니게 미스미란 인물과 그 주변의 인물들을 지켜보며 마음 속에 의문을 키워가게 된다. 

그리고 재판을 앞두고 찾아온 사키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그녀의 비밀을 재판정에서 드러내고자 하는데, 그런 사키에의 증언은 그녀에겐 치명적이지만 시게모리가 의도했던 바 미스미에겐 사형을 면하게 되는 가장 유리한 방법인 만큼 당연히 시게모리 팀은 그 증언을 채택하고자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미스미의 반전, 기소된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내 자신의 죄를 시인했던 그가 입장을 바꾼 것이다. 황급하게 찾아온 시게모리에게 '자신을 믿느냐'며 강렬한, 혹은 간곡한 입장을 전하는 미스미, 그의 의사에 따라 시게모리 역시 지금까지 진행된 미스미의 살해를 뒤엎고자 하는데......



배심원 참여 재판으로 진행된 재판 과정, 미스미의 번복에 대해 재판부는 당황한다. 함께 모인 판사, 검사부, 그리고 변호사들. 원칙대로라면 재판을 엎고 다시 처음부터 진행해야 하지만, 그 원칙에 대해 판사가 재판의 편의성을 내세워 제동을 건다. 그리고 오가는 서로의 눈빛, 그 순간 그들은 법의 판결을 내리는 사람도, 심판을 하는 사람도, 변호를 하는 사람도 아닌, 재판이라는 과정의 공범자들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재판은 돌발적인 미스미의 반론을 무시한 채, 예상대로의 결론에 도달한다. 

보이지 않는 것- 인간은 사회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가?
미스미는 30년을 감옥에서 살다나온 사람이다. 자신을 찾아온 시게모리에게 그는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했을 사람이라 말한다. 공교롭게도 30년전 미스미에게 은혜로운 판결을 내려 사형을 면하게 했던 시게모리의 아버지는 이제와 자신의 판결을 후회한다. 그때 차라리 사형을 내렸다면 오늘날 그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시게모리의 아버지가 사형에서 미스미를 구해주었던 30년전 사건 때도 미스미는 두 사람을 죽이고 도망치지 않은 채 자신의 죄를 수긍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가난 때문에 고생만 하다 가셨다는 미스미, 그는 그가 살던 지역의 가난한 이들을 괴롭히던 조폭 두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이제 다시 사키에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사키에를 어린 시절부터 괴롭혀 왔던(?) 그래서 그녀의 절룩이는 다리의 원인을 제공했던 그녀의 부친을 살해했거나, 살해의 죄를 뒤짚어 썼다. 오히려, 현재의 그가 보인 '보이지 않는 행보'를 통해, 그의 30년전 살인까지 의심되기 시작한다. 그 없이 홀로 자라 여급이 된 딸에게는 죽어 마땅한 아버지이지만, 정작 딸이라 판사에게 엽서까지 보낸 사키에를 딸로 여긴 듯한 미스미, 자신이 키운 카나리아를 죽이거나 풀어주는 그 미묘한 경게에서, 관객은 시게모리처럼 의심과 믿음의 경계에서 혼돈을 느낀다. 

아마도 우리 영화라면 어땠을까? 끝내 자신에게 진실을 말해달라는 시게모리에게 화사한 역광과 함께 입을 다물어 버리는 미스미 대신, 그의 곡진한 사연과 함께, 헌신적 대리 부성애를 풀어내지 않았을까?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주목한 건, 미스미의 사연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를 보고 나오면 더 모호해지는 미스미의 진실, 그리고 사건의 진상처럼, 애초 어쩌면 30년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한 사람의 진실 따위는 아랑곳없이, 아니 애초에 '진실이 해명되는 곳이 아닌' 법정, 그리고 그 법정으로 상징되는 인간 사회를 드러낸다. 



그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유달리 다른 일본 감독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호응이 좋았던 감독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려낸 풍경화같은 배경과, 그 속의 따스한 인간애를 그렸던 <바닷마을 다이어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태풍이 지나가고> 등의 작품들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인간들 사이의 이야기를 보다 거시적으로 확장하자, 그의 작품이 말하는 바가 비판적으로 변했다

마치 그의 전작들과 <세번 째 살인>의 간격은, 신영복 선생이 <더불어 숲>에서 말한 후지산과 키 작은 풀이란 뜻의 아사쿠사(淺草)로 대비된 일본 사회가 연상된다. 즉, 키작은 풀들이 사는 나라, 작은 주택과 낡은 가구들을 아끼며 검소하고 겸손한 삶의 방식을 취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나라,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나라를 상징하는 후지산은 정작 풀 한 포기 거둘 수 없는 쉬이 그 모습을 허락치 않는 군림하는 거대한 설산이라는 것이다. 즉, 조직화된 거대한 체계 속에서 숨죽여 온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단지 일본이라는 사회가 아니라 근대화라는 과정 속에 숨겨진 이 사회와 인간의 아이러니를 일찌기 신영복 선생은 짚으셨다. 

미스미와 사키에 사이의 숨겨진 사연은 어쩌면 그의 전작 속 훈훈한 인간애의 그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사건'이 되고, '법'이라는 사회적 제도 속에 편입되는 순간, '인간'은 상실되고, 인간적 구원은 요원해지며 심지어 법과 그 법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살인'의 공모자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영화는 증언한다. 영화는 '구원'과 '심판'을 논하지만, 그건 종교적인 언어가 아니라, 인간들이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구체적인 삶의 과정으로서 '구원'과 '심판'을 묻고 회의한다. 


by meditator 2017. 12. 15. 15:51

후일담' 문학이란 장르가 있다. 한 세대 인물들이 공통으로 겪은 모종의 사회적 사건 등을 되새김하는 일종의 '반추' 장르이다. 아직도 종종 등장하는 '홀로코스트' 문학과 문화 콘텐츠가 그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최근으로는 2000년대 '운동권 후일담' 문학의 범람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리고 이제 또 우리는 '후일담'의 한 조류를 만나게 된다. 바로 '세월호' 이야기다. 


2014년 4월 16일로부터 몇 해가 흘렀다. 전국민이 촛불을 들고, 정권이 무너졌다. 그리고 드디어 물 속에 잠긴 세월호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정부는 지난 12일 내년 봄의 추가 수색 비용까지 지불하며 세월호 그 실체에 대한 조사를 계속할 의지를 보였다. 세월호 선체 영구 보존 논의까지 수면 위로 올라온 시점, 하지만 그런 정상적인 조사와 수사가 진행되는 만큼 대중들의 뇌리에서 세월호가 흐릿해져가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런 상황에 그동안 '노란 리본'을 내걸고, '잊지말자'를 외치던 '문화'의 영역에선 무엇을 해야 할까? 



세월호 그 후 
그 첫 응답은 지난 12월 9일 jtbc <전체 관람가>에 등장한 독립영화계의 대표적 인물인 오멸 감독을 통해서 였다. 그의 작품 <파미르>를 통해서 돌아오지 않는 친구의 자전거를 타고 친구가 가고싶어 했던 파미르로 홀로 떠난 이제는 청년이 된 친구의 여정을 담았다. 세상은 무뎌지고 잊어가지만, 정작 그곳에 함께 있었던 당사자들, 부모들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시간들, 그 남은 이들의 '시간'에 대해 영화는 답한다. '간다고, 가지만 종종 오겠다고', 즉 '살아가겠지만 잊지 않겠노라'고 말한다. 이제서야 수면 위로 올라온 세월호처럼 아직은 2014년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지만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오멸 감독은 용감하게 소리내어 말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선 이도 있었다. 2015년 뜬금없이 홈쇼핑에서 귤과 함께 앨범을 판매하며 돌아온 루시드 폴의 정규 7집 속 노래들은 '세월호'의 아이들과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잠언'과도 같은 음악들이었다. 

친구들은 지금쯤/어디에 있을까/ 축 처진 어깨를 하고/교실에 있을까
따뜻한 집으로/ 나 대신 돌아가줘/ 돌아가는 길에/ 하늘만 한 번 봐줘
손 흔드는 내가 보이니 /웃고 있는 내가 보이니
나는 영원의 날개를 달고/ 노란 나비가 되었어
다시 봄이 오기 전/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꽃들이 피던 날/ 난 지고 있었지만 
꽃은 지고 사라져도 /나는 아직 있어



재난 현장에 다시 선 주인공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10일 종영한 ocn 드라마 <블랙>의 이야기는 돌고 돌아 무진이라는 가상의 도시에 타임 마트라는 건물 붕괴 사고와 그 사고 현장의 아이들,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난 당시 미성년자 성접대를 받는 부도덕한 집권 세력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가상의 도시, 가상의 사건이지만 누구라도 이 드라마를 통해 '끝나지 않는 세월호'의 이야기를 그려내고자 하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또 한 편의 '재난' 드라마가 등장한다. 바로 11일 시작된 jtbc의 <그냥 사랑하는 사이>이다. 

드라마는 '스페이스 s몰'의 붕괴 사고로 시작된다. 동생 연수의 촬영 현장에 동생을 보살피기 위해 억지로 끌려갔다가 잠시 남자 친구와 만나기 위해 자리를 비웠던 문수(원진아 분), 동생은 그 사고로 죽고, 문수도 겨우 구조된 후 문수네 가정은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가고, 엄마는 동생을 잊지 않기 위해 술로 살며 동네에서 어거지로 분란을 일으키며 욕을 먹으며 산다. 그런 어머니와 아버지의 접착제 노릇을 하며 하루 하루 자기 안의 자책과 슬픔을 꾹꾹 누르며 문수는 씩씩하게 살아간다. 

문수와 함께 건물 더미에 갇혔던 강두(이준호 분)의 처지는 '더 나빠질 게 없는' 처지이다. 기술자였던 아버지는 사고와 함께 돌아가셨다. 3개월만에 깨어났지만 무능력한 엄마는 식당을 하다 날리고 덜컥 병에 걸려 돌아가셨다. 어린 나이에 신용 불량자가 된 그는 나이트 클럽 해결사에 막노동으로 번 돈을 의대 다니는 여동생에게 보내며 진통제를 떨어넣으며 하루하루를 견딘다. 

붕괴 사고로 죽은 48명 외에 한 사람의 희생자가 더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바로 잘못된 건물 설계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거둔 설계사의 아들 서주원(이기우 분), 자신의 아버지를 믿었던 그는 건물 붕괴 사고가 아버지의 설계 잘못이 아니라 사업주 청유 건설의 잘못이라 믿는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건 잃어버린 사랑과 아버지의 오명 뿐이다. 

드라마는 이 세 명을 다시 현장에 불러 세운다. 청유 건설이 그 자리에 세우겠다는 '바이오 타운', 그 설계를 서주원은 기꺼이 맡았다. 그리고 그의 사무소에서 건축 모델러를 하던 문수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서주원의 말에 힘을 얻어 세상으로 나온다. 자신이 일하던 나이트 클럽 마담 빽으로 현장 야간 경비원으로 들어가 추모비를 부수며 그 사건을 잊어간느 세상에 울분을 토하던 강두 역시 제대로된 설계의 시공사의 입맛에 맞춰 바꿔 과거의 사건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서주원의 청을 받아들인다. 각자 자신이 짊어진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주인공들은 '과거'의 현장에서 상처를 마주하고,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뭉친다. 

'괴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 캔디같은 여주인공 문수 , 밑바닥을 전전하며 비극적 낭만주의의 전형같던 남자 주인공 강두, 그리고 엘리베이터조차 못타는 여주인공을 기꺼이 스타웃하고 그녀가 세상과 마주하도록 배려하는 전형적인 키다리 아저씨 서주원 등, 이 전형적인 삼각, 거기에 재벌가의 정유진까지 사각 관계는 '멜로 드라마'의 전형적 관계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스테이스 몰 붕괴라는 재난 사고의 '트라우마'를 얹으며 드라마는 현실에 발을 들이며, <눈길>로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하는데 빛을 발한 유보라 작가는 '재난 후일담 장르'를 완성한다. 
by meditator 2017. 12. 13. 16:30

18부작이었던 <블랙>, 18회 드디어 4%의 고지를 넘기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4.181 % 닐슨 코리아 유료 플랫폼 기준) 또한 거의 내내 동시간대 1위를 수성하며 화제성과 시청률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송승헌이라는 새로운 '인생' 캐릭터를 부여하며, 그간 오로지 잘 생긴 배우로만 '소비'되던 이 중견 배우의 지평을 열어보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성과를 차치하고 애초에 16부작에서 18부작으로 늘어났던 <블랙>의 완결성에 놓고서는 물음표를 제기할 수 밖에 없다. 444, 이름도 형체도 없이 오로지 번호로만 불리워지는 본투비 저승사자 블랙(송승헌 분)의 이승 세계 블로버스터급 모험담을 그린 이 드라마는, 그와 엮인 '죽음'을 보는 강하람(고아라 분)와의 에피소드를 통해 '시대성'을 담보하려 했지만 작가도 모르고, 그래서 시청자의 고개는 더욱 갸웃해질 수 밖에 없는 '과유불급'의 서사로 완성도에 오점을 남겼다. 




꼬리에 꼬리를 분 진범, 과유불급
장황했던 서사를 통해 결국 18회에야 드러나는 최종 보스 사고 당시 무진 시장 최근호가 드러냈다. 우병식- 오만호, 오만수 부자 - 김형석 의원 - 최근호로 이어진, 이 배후는 무진 타임 마트의 부실 공사 수주와 그 과정에서 미성년자 성접대, 더구나 붕괴 당일 최 시장의 성접대로 이어진 지배 엘리트의 부도덕 시스템을 밝히고자 한다. 

그런데, 여전히 오리무중인 세월호 당시 박 전 대통령의 행보를 연상시킨 이 최종 보스 최근호의 는 현직 대통령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시간에 쫓긴 드라마는 그 어마어마한 최종 보스의 존재감을 드러낼 시간이 없었다. 아니 설사 그가 대통령이었다 해도, 이미 우병식으로부터 이어진 꼬리에 꼬리를 문 보스 밝히기의 행렬은 새 보스가 드러난다 해도 시청자를 깜짝쇼에 빠뜨릴 동력을 잃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애초에 이 드라마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끈 계기는 송승헌이 분한 블랙, 저승사자 444의 캐릭터 때문이었다. 인간의 영혼을 수거하는, 그래서 늘 '인간 따위'라며 인간을 낮잡아 보던 이 오만한 본투비 저승 사자 블랙이 자신의 띨띨한 파트너 재수똥(제수동, 박두식 분)을 놓치면서 인간 세상에 내려오면서 벌이는 해프닝이 신선한 소재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 신선한 캐릭터 블랙, 하지만 그가 인간 세상에 오면서 잠시 머물기 위해 빌린 한무강이, 알고 보니 그의 동생이자, 알고보니 자신의 심장이 이식된 존재였다는 딜레마가 오만한 저승사자를 '운명적 사건'에 빠뜨린다. 거기에 어린 시절부터 준이 오빠를 스토커처럼 좋아했던 소녀 하람과 김선영이었던 자신을 숨긴채 살아가는 윤수완(이엘 분)이 엮여지게 되고. 

그런데 이 엮여지는 세 사람은 각자 자신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블랙은 자신의 심장과 자신의 몸이 서로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블랙의 숨은 사연, 그리고 어릴 적 성폭행을 숨긴 채 한무강의 약혼녀가 된 윤수완, 그리고 불의에 죽은 아버지의 사연을 품은 강하람까지. 그리고 이들의 사연은 20년전 무진에서 벌어진 타임 마트 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데. 

이렇게 인물 소개에서도 벌써 사연이 구구절절한 <블랙>이 풀어지기 시작한 것은 무진 폐공장에서 벌어진 클라라와 김선영의 대치, 그리고 백골 시체로 발견된 클라라의 발견에서 부터이다. 그런데 회차를 거듭하며, 과거의 사건이 벌어지며, 이 현장에 있었던 인물이 늘어난다. 클라라와 김선영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 자리에 김준(한무찬)과 동생 한무강이 있었고, 거기에 다시 왕영춘(우현 분)이 등장하고, 그를 쫓는 강하람의 아버지 강수혁과 다시 스토리가 전개되며 김형석이 등장한다. 그리고 쫓기다 사고를 당한 김준의 의붓 어머니이자 한무강의 엄마까지 등장하게 되고. 거기에 알고보니 그 자리에 강하람까지 있었다는데. 

결국 이 세 사람이 엮이게 된 이 결정적 사건이 회를 거듭하며 등장 인물들이 늘어난다. 시청자들이 예상한 프레임을 벗어나, 회를 거듭하면서 우병식의 배후로 뜬금없이 김형석이 등장하고, 최근호가 등장하듯, 사건 현장의 인물들이 늘어난다. 과연 이게 반전일까? 우병식인줄 알았더니 오만호 부자가 있었다까지는 시청자들의 예상할 수 있는 범주이다. 스릴러의 묘미라면, 시청자들이 한껏 두뇌를 부풀려 상상할 수 있는 그 범주 내에서 사건이 해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정해진 플레이어 외의 인물이 링 안으로 들어오면서 게임의 주도권을 잡아버린다면, 과연 시청자들의 기분은 어떨까? 아마도 최란 작가는 쓰면서 '이건 몰랐지?'라면 통쾌할 순간, 시청자들은 '이게 뭐지?'라며 '멘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최란 작가의 자충수, 시대의 비극을 소재주의로 만들다. 
<블랙>이 그랬다. 블랙의 몸에 들어간 한무강의 사연, 그리고 그와 엮어진 김선영이자 윤수완의 비극적 사건, 그리고 강하람의 고통스런 과거를 무진 타임 마트라는 시대적 사건과 엮어갈 때까지만 해도 이 드라마는 흥미진진했다. 최란 작가의 큰 그림에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그 흥미진진함이, 알고보니 진범은 따로 있었대라는 식이 되가면서 회를 거듭해가며 주인공을 시련에 빠뜨리며 드라마의 동인은 주저앉아 버린다.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시대적 비극은 회를 거듭하며 무한 루프처럼 되풀이 되는 진범은 따로 있지의 게임 플레이에 '소재주의'로 전락하고 만다. 

무엇보다, 인간의 몸에 들어왔지만 여전히 '인간 따위'라고 본투비 저승사자의 마인드를 놓지 못하는 블랙이 어서 빨리 자신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죽음을 보는 강하람과 엮이며 벌이는 에피소드들이, 어느 순간엔가 두 사람의 사연 덕분에 짖눌려진다. 저승사자는 매번 킬러에게 밀리고,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며 인간의 운명에 개입한 강하람은 사고를 일으키기만 하는 '민폐'의 주인공이 되어버린다. 거대한 배후 세력의 압도적인 존재를 밝히기 위해, 사건에 뛰어든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재물이 되거나, 희생되고 만다. 그나마 저승사자라서, 죽음을 봐서 주인공 두 사람만이 목숨을 건진 수준이다. 




그 과정에서 저승 사자의 룰과, 죽음을 보는 하람의 능력의 설정들은 회를 거듭할 수록 무색해 진다. 죽은 자를 보는 하람의 설정은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 되어갔고, 무로 돌아갔다는 블랙이 죽은 강하람의 영혼을 마중 나오는 엔딩에 이르면 그저 아름다운 러브 라인을 위한 애교라 눈을 질끈 감게 된다. 

그런데 익숙하다. 안타깝게도 최란 작가의 이 방식이 낯설지가 않다. 2014년 sbs 월화 드라마였던 <신의 선물- 14일(이하 신의 선물)> 의 궤적이 비슷했었다. 조승우의 첫 드라마 출연작이었던 <신의 선물>은 14일의 타임 슬립이라는 신선한 소재로 주목받았다. 거기에 흥신소를 운영하며 '법과 정의와는 담쌓은 초절정 양아치' 기동찬 캐릭터는 블랙 444 못지 않은 시청자들의 환호를 받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강하람처럼 잃은 딸을 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모정 김수현(이보영 분)이 논란을 일으킬 정도로 민폐 여주가 되었고, <블랙>처럼 뒤얽히고 얽혀 여주인공에게 총을 들게 만들듯이, 돌고 돌아 사회악도 밝히지만, 주인공도 가해자로 만들어 버리는 묘한 서사로 완성도의 아쉬움을 남긴 드라마로 회자되고 말았다.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과, 뜻밖의 가해자인 설정은 주인공을 극적으로 몰고간다는 점에서 맞지만, 뉘앙스가 다르다. 반전에 반전을 꾀하다 자충수가 되고만 <신의 선물>의 비극을 안타깝게도 <블랙>이 다시 되풀이 하고 만다. 그럼에도 여전히 <신의 선물>과 <블랙>의 설정은 빛난다. '소재주의'가 돼버렸지만, 개인의 비극과 시대적 아픔을 엮어내려는 시도는 묻히기에 안타깝다. 그리고 조승우에 이어, 송승헌의 캐릭터 역시 배우들에겐 '인생 캐릭터'이다. 어쩌면, 이런 장황한 반전의 자충수는 16부작, 혹은 18부작이라는 드라마 경영학의 폐해일 수도. 차라리 8부작의 드라마도 시도되고 있는 이즈음, 최란 작가의 다음 작품은 깔끔하고 선명한 플롯이 돋보일 수 있게 욕심을 좀 버린 회차로 돌아오길. 


by meditator 2017. 12. 11. 16: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