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ntv에서 11부작으로 방영되어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 매니아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마더>가 tvn 수목 드라마로 찾아왔다. 그러나 전작이었던 <슬기로운 감빵 생활>의 마지막 회 11.195%가 무색하게 첫 선을 보인 <마더>는 2.952%의 아쉬운 성적을 거두었다.(닐슨 코리아 케이블 플랫폼 시청률 기준) 그도 그럴 것이 첫 회부터 학대당하는 아이에, 한 술 더 떠서 그 아이를 납치(?) 하는 선생님이라니, 여전히 '가정'의 신화가 공고한 대한민국에서 제 아무리 일본의 화제 드라마였다 해도 첫 회 <마더>가 보여준 설정들은 딱 불편하기 좋을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그 '불편함'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어쩌면 <마더>의 주제 의식은 바로 그 말 걸기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황금빛 내 인생>에서 가장 인기없는 두 사람을 들자면 바로 서지안의 불행을 자초한 엄마 양미정(김혜옥 분)과 최근 아이를 낙태하겠다고 해서 논란의 중심이 된 며느리 이수아(박주희 분)다. 두 사람은 역시나 우리 사회가 신봉하고 있는 '모성의 신화'라는 측면에서 너무 나갔거나, 튕겨져 나간 인물들이다. 양미정의 이기적인 선택이야 입을 모아 비난하지만, 이수아의 선택을 놓고 '낙태법' 통과와 관련하여, 이수아의 선택을 지지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분노한다. 이 또한 소현경 작가의 노련한 말 걸기의 방식이라 보여진다. 이 두 편의 작품들이 여전히 '모성'이 당연시 되는, 그리고 그런 당연시 되는 모성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하는 시대에 던진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혜나,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 
<마더>의 주인공 혜나, 5살이 될 때부터 혼자 거리를 헤매던 이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 교실의 같은 반 아이들에게 '쓰레기' 취급을 당한다. 하지만 '쓰레기' 취급은 비단 같은 반 급우들에게만 당하는 건 아니다. 그녀를 보호해줘야 할 엄마 자영(고성희 분)에게도 그녀는 '처치 곤란'이다. 어린 나이에 혜나를 어찌어찌해서 낳았지만 엄마로서 보호해주는 대신 여행 가방에, 쓰레기 봉투에 아이를 넣어버리는 엄마, 자신이 낳은 딸보다, 설악(손석구 분)이라는 남자가 떠날까 더 애닮아 하는 엄마에게 딸 혜나는 '짐'이며, '혹'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빈번하게 사회면에 오르내리는 세 아이 화재 사건을 비롯한 아이들의 방치, 학대, 그로 인한 사망 사건들의 기저에는 드라마 <마더>가 그려내고 있는 모성의 딜레마가 있다. 엄마는 책임지지 못할 아이를 낳아서 방치하거나, 아니면 일찌감치 아이들의 곁에서 떠나버렸다. 그리고 남겨진 아이는 '모성'의 보호에서 방기된 채 무책임한 부성과 결탁한 의제 모성의 학대에 무기력하게 방치되어 희생자가 되곤 한다. <마더>를 비롯한 이런 일련의 사회적 사건들은 바로 우리가 신봉해 마지않는 '모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한다. 과연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모성이란 존재하는가? 드라마 속 혜나는 묻는다. 왜 아이들은 엄마가 필요하냐고. 이는 한 아이의 성장을 왜 가족, 그 중에서도 엄마가 책임져야 하냐고 묻는 것이다. 

혜나는 어쩌면 애초에 '낙태'되어야 했을 아이일 지도 모른다. 이런 '워딩'은 그 자체로 '논란'이 된다. 살아있는 생명을 어떻게? 라면 울분에 찬 반문이 돌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대상을 바꿔 <황금빛 내 인생>의 수아가 임신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어떨까? 태어나서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아이와, 아직 뱃속에 있는 아이는 다를까? 
아이의 생명권의 영역을 어디까지 하느냐에 대한 논란의 제기가 아니다. <황금빛 내 인생>의 이수아는 일관되게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삶이 자신은 겨우, 하지만 아이까지는 책임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 수아가 주장하는 책임의 극단적인 문제적 형태가 바로 <마더>의 혜나 엄마이다. 그리고 빈번하게 사회 면에 오르내리는 사회면의 사건들이다. 책임지지 못할 '모성'이라면 차라리 애초에 태어나지 않는 게 낫지 않았을까라고 우리 조차도 '인지상정'으로 귀결되게 되는. 



모성 신화의 현대사, 그러나 
우리의 현대사는 '모성 신화'의 서사를 품는다. 6.25 이후 등장한 수많은 문학작품들 속에서 '어미'는 전란의 속에서 내 자식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 '모성'은 강인했고, 끈질기게 '혈연'의 끈을 놓지 않고 우리의 현대사를 '생존'시켰다. 황석영, 박완서, 최일남, 박경리 등 우리가 기억하는 작가의 명작 속 주인공을 살려낸 건 대부분 상실된 아버지 대신 어머니였다. 드라마와 영화 등의 콘텐츠라고 다를까. 일찌기 70년대 펄벅의 <대지> 속 여주인공이 농삿일을 하다 아이를 낳고, 다시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 그 자리에서 탯줄을 입으로 끊고 일을 마저 하는 그 '불사신'같은 모성의 신화는 버전만 달리했을 뿐, 우리가 마주친 대부분의 문학과 문화 콘텐츠에서 유효하게 전승되어 왔다. 

하지만, 불편한 <마더>와 <황금빛 내 인생>은 과연 그럴까 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왜 '엄마'에게 본투비 모성을 짊어지워야 하냐고 묻는 것일 지도 모른다. <황금빛 내 인생>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건 며느리 이수아만이 아니다. 아니 이수아는 아직 선택을 하지 않았다. 반면 시어머니인 양미정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는 딸 지안을 마치 뻐꾸기의 '탁란'처럼 해성가에 들여보내고자 한다. 엄마 양미정은 자기 아이의 행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현대사 속 모성과 똑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그 '수단'의 방법성에 작가 소현경은 발을 건다. 

하지만, 그 이전에 드라마 속 양미정의 모성, 그 근거를 살펴보아야 한다. 지금 <황금빛 내 인생>에서는 양미정의 남편인 서태수의 상상암으로 인한 해프닝이 한참 화제가 되고 있다. 왜 한 집안의 가장인 서태수는 죽고 싶은 마음이 넘쳐 상상으로 암이 다 걸렸을까? 물론 드라마는 주로 자식들과의 갈등을 촛점으로 잡고 있지만, 그 기저에는 바로 남편을 '돈버는 기계'로만 대접했던 아내 양미정이 있다. 돈 못벌어오는 남편을 지난 10년간 가장으로 존중해 주지 않았던 아내. 바로, 이 지점에서 양미정 모성의 근거가 드러난다. '돈'으로 지탱가능했던 모성, 그런데 그 '돈'이 사라지자 '모성'은 극단적 선택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드라마는 '돈'만 있으면 가능했던 물신주의적 모성의 이면을 그린다. 그리고 반문한다. 여전히 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성에 기대어야 하는 사회냐고.  

이는 양미정 개인의 도덕적 문제이지만, 동시에 한 사회에서 한 가정이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키우기 위한 전제 조건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돈을 버는 가장이 무너지면 '가정' 자체도 무너지는 사회, 하물며 남편도 없이 혼자 딸을 키우는 젊은 엄마에게 '모성'은 어떤 것일까? 그에 대해 이수아의 선택이 '낙태'이며, 혜나 엄마 자영은 출산을 선택했되, 버거운 모성의 결과가 학대와 방치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물론 <황금빛 내 인생> 속 수아에게는 정직원인 남편이 있기에 그녀의 선택이 극단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낳지 않으려 애쓰는 현실은 바로 이런 양육의 딜레마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며, 작가는 그런 현실을 담아내고자 했다. 

결국, 우리 사회에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낙태' 논란은 역설적으로 '모성 보호'로 귀결된다. 한 엄마가 마음놓고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사회인가의 문제 제기이다. 여전히 6.25 동란 와중에서도 내 아이를 지켜낸 모성 신화가 전통으로 자리 잡은 사회, 그러나 현실은 '돈'이 자식을 키우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한 엄마가 자신으로 스스로 설 수 있는 사회, 그리고 너끈히 아이마저도 품을 수 있도록 만드는 사회, 그게 아니라면, 낳아서 학대하고 방치하느니, 차라리 책임질 수 없는 생명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하는 절명의 요구이다. 더구나 이제 더는 아이를 낳아 놓으면 아이는 제 먹을 것을 지고 나와 스스로 자라나는 사회가 아니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데 몇 억이 드는가가 통계로 나오는 사회, 있는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차이가 어릴 적 교육으로 부터 학력과 신분으로 고착된 사회 속에서 과연, 이 시대 엄마들에게 여전히 '모성'이라는 진화학에서조차 고개를 갸우뚱하는 불투명한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건 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 '무리수'가 된 '모성'의 현실을 <마더>와 <황금빛 내인생>이 역설적으로 풀어나간다. 

by meditator 2018. 1. 25. 17:00

매해 건강과 관련한 새로운 담론을 제시하여 왔던 sbs스페셜이 1월 뽑아든 카드는 바로 '칼로리'다. 지난 1월 14일과 21일에 걸쳐 <sbs스페셜>은 2부작 <칼로리亂>, 1부 <열량대첩>과, 2부 <요요피디의 난중일기>를 연이어 방영했다. 그간 채식이라던가, 혹은 고지방식이라던가 주제가 명확했던 건강관련 다큐들에 비해, 2부작 <sbs스페셜>은 본 사람들로 하여금 칼로리가 문제인 건 맞는데, 정확하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가 혼돈스럽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똑같은 실험에 참가한 영국과 한국의 두 사람에게서 전혀 다른 결과가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칼로리亂>이 말하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




칼로리 절대주의 세상에 이의를!
이 시대에 뷔페를 다녀온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마도 배부르게 잘 먹었다 라는 기분좋은 포만감보다는, 눈을 현혹했던 수많은 음식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평소 자신이 먹던 양에 비해 과식했다는 자괴감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자괴감의 근저에는 '칼로리(kcal) 과잉'이 있다. 마치 정확한 수학 공식처럼 우리들은 우리가 먹는 음식이 산출해 내는 열량, 즉 칼로리에 대한 우리들의 '맹신'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그 먹은 음식들이 일정한 열량을 산출해 내고, 그 산출해 낸 에너지들이 다 소비돼지 않으면 우리 몸 속에 축적되어 '살'이 되고, '비만'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믿고 있는 칼로리에 대한 '도그마'이다. 

그런데 바로 이 당연한 칼로리 공식에 다큐는 의문을 제기한다. 칼로리는 물 1g을 1도 올리는데 필요한 열량이다. 물 1그램을 1도라 하니 연상되는 것이 있다. 바로 증기 기관, 그렇다. 열을 유래하는 라틴어 calor가 칼로리의 어원이듯, 증기 기관의 물을 끓이듯이 인간의 몸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사유한 데서 출발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신봉하는 칼로리 론이다. 그렇다면 문제 제기도 여기서부터다. 과연 증기 기관과 인간은 같은 것일까? 

칼로리 공식에 따르면 오늘날 인간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의 열량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다고 한다. 1g당 4kcal의 열량을 내는 탄수화물과 1g당 9kcal의 열량을 내는 지방이, 그 중에서도 '지방'이 살이 찌는 주범이라 여겨졌었다. 그런데, 지난 해 '붐'을 이뤘던 고지방 다이어트는 이런 기존의 선입견을 깨면서 우리가 신봉하던 칼로리의 상식에 의의를 제기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다큐는 그간 우리가 '기준'으로 삼았던 칼로리 그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칼로리론에 따르면 성인 남성은 하루에 2200에서 2600칼로리, 여성의 경우 1800~2100 칼로리를 섭취해야 한다. 그 이상을 섭취하면 '비만'이 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과연 그럴까? 

자신의 몸을 실험 대상으로 삼은 사람이 있다. 영국에 사는 샘은 3년 전 자신을 몸을 실험 대상으로 하루 5000 칼로리씩을 21일 간 먹었다. 그 결과는? 칼로리 계산 법대로라면 6kg이 늘었어야 하는데, 1.3kg이 는 반면 허리 둘레는 오히려 3cm감소했다. 



그런가 하면 7년전비기스트 루저 미국의 다이어트 프로그램에서 108kg을 감량하며 우승을 거머쥔 주인공 대니 케이힐, 그는 격심한 요요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그 프로그램 이후 식단은 극도의 절제되었으며 일상 중 상당 부분을 운동에 할애하고 있지만, 그의 몸은 그 프로그램에 나갈 당시와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하여 인지도를 높인 정호영 셰프 역시 극도의 절제식을 하지만 살은 쉽사리 빠지지 않는다. 단식과 스피닝 등 강도높은 운동을 통해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던 여성도 역시나 요요 증상으로 몸이 불었다. 

하루 먹는 건 600kcal인데, 3000kcal 운동량의 체조 선수는 어떨까? 칼로리 산술대로라면 분명 이 운동 선수는 12kg가 빠져야 하는데 겨우 1kg가 빠졌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39.9kg 너무 말라서 살이 찌고 싶어서 운동도 하고, 하루 5끼를 먹는다는 여성에게는 여전히 늘지 않는 몸무게가 고민이다. 

칼로리, 더 이상 신봉할 이론이 아니다. 
제기한 의문을 증명하기 위해 피디가 직접 나섰다. 3년전 영국에서 샘이 했던 실험을 젊은 시절부터 120kg에서 80kg을 오가며 요요에 시달렸던 피디가 직접 자신의 몸을 실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칼로리론에 의거하여 절제된 식습관을 유지하려 하지만 여전히 한 달 사이에 10kg을 오가는 몸무게, 그가 성인 남성 권장 칼로리 도시락을 지방 중심의 2주간, 그리고 1주간의 워시아웃 이후 다시 2주간의 탄수화물 중심 도시락으로 섭취하며 자신의 몸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다. 

영국의 사례에서 샘은 하루 5000kg 식사를 할 때 고지방식의 경우 몸무게가 1.3kg이 늘어난 반면, 고탄수화물 식의 경우 7.1kg이 늘었다. 몸무게보다 더 심각한 건, 고지방식의 경우 허리 둘레가 준 반면, 고탄수화물식의 경우 허리 둘레가 늘고 피로감이 급격하게 증가되었다는 사실이다. 샘의 사례만 보면, 고지방식의 다이어트가 맞는가 싶은데, 정작 2부 <요요피디의 난중 일기>의 주인공 이영훈 피디의 사례의 결과는 또 다르다. 성인 남성 권장 칼로리에 의거하여 식사를 한 그는 고지방식의 경우에도, 고 탄수화물 식의 경우에도 모두 몸무게가 줄었다. 고지방식의 경우 4.3kg준 반면, 고탄수화물 식의 경우 2.62kg 줄었다는 게 차이라면 차일까. 

하지만 다큐가 주목하는 건 몇 kg 차이의 몸무게가 아니다. 바로 렙틴, 그렐린 등 식욕과 관련된 호르몬의 움직임이다. 요요 피디 이영훈 피디의 경우 탄수화물 식단이나 고지방 식단 모두 몸무게는 감량되었지만, 고지방 식단을 하는 동안 공복감을 느끼지 않는 등의 원인을 바로 이 식욕 호르몬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영훈 피디는 자신에게 맞는 다이어트식을 더 이상 공복감과의 전쟁이 필요하지 않는 고지방 식으로 결론을 낸다. 

대부분 강력한 운동과 극단의 다이어트를 통해 단기간에 몸무게를 감량한 사람들이 결국 요요 현상을 일으키며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이유를 다큐는 바로 이 호르몬 체계의 혼란에서 찾는다.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참가 후 절제된 식사와 지속된 운동에도 불구하고 다시 늘어나는 체중은 흡수된 음식물을 흡수하는 체계가 망가지면서 발생하는 기초 대사율 저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밝힌다. 다큐에 출연한 전문가는 오히려 운동으로 소모되는 칼로리는 생각보다 많지 않으며, 외려 운동은 배고픔을 촉진시킨다는 충격적 사실을 밝힌다. 결국 우리가 신봉하는 칼로리론은 개인의 사례에 가면 전혀 다른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양 전문가는 지금까지 알고 있는 칼로리 도출의 방식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흔히 편의점에서 발견하는 칼로리가 적혀있는 음식들, 그러나 실제 실험한 음식의 칼로리는 표시된 칼로리와 차이가 났다. 당연히 조리 방식에 따른 차이도 크다. 뉴욕대의 영양학자인 매리언 네슬은 '누구에게도 열량을 계산하라 조언하지 않아요, 그건 불가능하니까요'라 단언한다. 또한 전문가는 직접, 간접 등 칼로리 측정 방식에 편차가 최대 45%가 나는 상황에서 칼로리 소모량 역시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못을 박는다. 



결국 다큐가 장황한 사례들의 예증을 통해 에돌아 도달하고자 하는 건, 오늘날 우리가 매 끼니 수치를 계산하는 칼로리와, 칼로리 연소 방식의 운동에 의한 다이어트 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이다. 똑같은 100kcal라도 초콜릿 케익과 닭가슴살은 다르다고 <칼로리의 거짓말>의 저자 조나단 베일리는 말한다. 살을 빼기위해서는 충분히 먹으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그 충분히 먹는 것에는 좋은 칼로리라는 전제 조건이 있다고 덧붙인다. 

<좋은 칼로리 나쁜 칼로리>의 저자 게리 토브스는 현대 사회의 문제인 비만은 칼로리의 문제가 아니라 호르몬의 문제라 주장한다. 그에게 비만은 호르몬 조절 장애다. 섭취하는 연료를 에너지로 태울 것과 저장하는 체계의 문제라는 것이다. 똑같은 고지방식과 고탄수화물식을 했음에도 샘이 이영훈 피디에 비해 훨씬 더 몸 상태가 안좋아진 것은 바로 샘이 섭취했던 탄수화물이 주로 패스트 푸드에 의거한 나쁜 칼로리들이었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쌍둥이 형제라도 다른 환경에서 좋은 칼로리와 나쁜 칼로리로 식사를 하면 유전적 소인이 같더라도 다른 체형을 가진 결과를 낳듯, 칼로리 얼마를 먹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양질의 식사를 체계적으로 먹는가가 건강을 좌우하게 된다는 것이 2018년 1월, <sbs스페셜>이 내민 산만하고 어수선한 그러나 신선한 화두다. 
by meditator 2018. 1. 23. 21:35

아쉽게도 주제가 상을 <위대한 쇼맨>에게 양보했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장편 에니메이션상>을 수상하며 디즈니와 픽사는 2016년 <인사이드 아웃>, 2017년 <주토피아>에 이어 연 3년 성공적으로 골든 글로브를 거머쥐었다.


그런데 어쩐지 아쉽게도 느껴진다. 내 머릿속, 아니 내 마음의 세계 탐구라는 신비함 그 이상, 치유와 힐링이 되었던 <인사이드 아웃>이나, 최근에서야 우리 나라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여성의 사회적 자존의 문제를 비롯하여 성과 인종 평등의 문제를 발빠르게 다루었던 <주토피아>에 비해, 한바탕 축제와도 같았던 <코코>는 '가족주의'의 전통이 유구한 가장 디즈니스러운 픽사의 작품인 듯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울라프의 활약을 다룬 단편 에니메이션이 끝나고, 멕시코 버전의 디즈니 로고송이 등장하면서 펼쳐지는 <코코>의 세계는 그저 '가족'의 화합이라는 주제로만 한정하기에는 이야기할 꺼리가 만다. 특히 최근 우리나라에서 거뜬히 1000만을 넘은 <신과 함께>와 함께, 흥행세를 이어가는 <코코>는 비록 '한국'과 '멕시코'로 지역적 배경은 다르지만, '죽은 자의 세계'를 통해 '산 자의 삶'의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죽은 자의 세계에서 길어올린 산 자들의 이야기
<코코>와 <신과 함께>는 공교롭게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죽은 자들의 이야기다. 아이를 구하려다 죽은 소방관 김자홍(차태현 분)은 당연히 저승차사들을 환생시켜줄 의인이라 여겨진 7번의 저승 재판에서 매번 브레이크가 걸린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건, 바로 아픈 어머니와 동생을 버리고, 심지어 직계 비속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될 범죄를 저지르다 도망갔던 사실이다. 그리하여 '의인'은 커녕 당장 지옥으로 떨어지게 생겼다. <코코>에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죽은 사람은 물론 주인공이 아니다. 죽은 자들의 날에 뜻하지 않게 그 세상에 들어가게 된 미구엘이 위기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헥터'라는 보잘 것없는 해골이 그 실질적 주인공이다. 

두 영화는 모두, 그들이 '살아있을 때' 저질렀던 어떤 행위가 지금 죽은 그들의 위기로 작동한다. 그로 인해 김자홍은 지옥으로 떨어지게 생겼고, 헥터는 죽은 자의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 동양의 지옥도와, 영원히 절멸, 물론 그 두 처벌 사이에는 엄청난 고통의 간극이 있지만, 막상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느껴지는 심리적 중압감에서는 사실 별 차이가 없다. 어쩌면 영원히 잊혀진다는 게 더 마음아프게 다가올 수도 있다. 



김자홍과 헥터, 그들은 젊어 죽었다. 자신의 꿈을 이루지도 못한 채 억울하게. 그런데 더 억울한 건 죽은 그들의 영혼조차 위기에 빠진다. 죽은 두 사람에게 내려지는 벌의 핵심은 결국, '가족'을 버린 것이다. 자신들이 지켜고 보호했어야 할 가족을 각자의 이기심으로 버렸다는 '오해(?)가 그들을 죽음 이후의 위기에 몰아넣는다. 물론, 영화는 절정의 위기를 극복하며 두 사람이 받게 될 그런 처벌이 오해였음을 풀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사실은 그들이 이승에서 드러났던 그런 결과적 행동들이, 미처 본의를 풀어내지 못한 '한(恨)'이었음을 영화는 풀어낸다. 그리고 그 '한'에는 여전히 그들이 '가족'을 배신하지 않았음을, 혹은 '가족'이란 것으로 상징되는 '관계'에 대해 스스로 외면하지 않았음을 그려내려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죽은 이후에나마 비로소 그들이 그토록 그리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며 관객들의 누선을 자극하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21세기의 가족주의란?
그런데 여기서 한발 더 들어가 결국은 눈물을 터트리게 만드는 감동의 가족 상봉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그 '가족'의 장애물들을 살펴보자. 

<신과 함께> 김자홍 모자의 비극은 결국 장애인 어머니와 두 아들의 가난이다. 그들은 가난했고, 나라가 구제해주지 못한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김자홍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이승의 두 모자의 삶을 건져냈다. 미처 어머니에게 드릴 밥통도, 이제야 비로소 자신을 솔직하게 밝히는 진심어린 편지도 전할 기회도 없이 그의 생명을 거둔 저승은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재판을 하네 어쩠네 하지만, 결국 그 재판의 결과가 '어머니의 용서'일 수 밖에 없는 건 김자홍의 오롯한 희생적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식은 '가족'의 굴레를 씌웠지만 결국 이 사회에서 '먹고사니즘'에 희생된 한 개인에 대한 영화적 제의이다. 사실 불교의 저승관을 수용한 영화라지만, 원래 불교에서 이승에서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 가장 큰 보상이 되는 '극락 왕생'대신 '환생'이라는 보상을 한 영화의 결말은 그래서 지극히 '현세적'이다. 

가족의 구성원이지만, 사라질 위기에 놓인 헥터는 어떨까? 거기엔 할아버지가 음악이 좋다며 집을 나간 이후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음악을 버리고 '신발'을 택한 마마 이멜다의 또 다른 희생이 있다. 그녀는 자신에게 남겨진 딸과 함께 살기 위하여 신발 장인의 길을 택한다. 그리고 그건 그 집안의 전통이 되어 대를 이어 미구엘에게 까지 가족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이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 가내 수공업의 원시적 자본주의 방식이지만, 미구엘의 가족들이 택한 삶의 방식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이다. 

가족을 버리고 떠난 할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는 그래서 미구엘의 가족에게서 미구엘이 하고자 하는 '음악'이란 그저 자신은 물론 가족조차 먹여살릴 수 없는 무책임한 행동이며, 이 시대의 정신에 위배되는 결정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화는 단지 미구엘 가족의 '신발 사업'에 대해 예술지상주의로 맞서지 않는다. 미구엘이 선택한 음악이란게 가족들이 오해한 헥터처럼 엔터 산업이라는 또 다른 자본주의에의 함몰일 수 있음을 짚어낸다. 그런 미구엘 가족이 선택한 자본주의적 전통에 대해 영화는 영화 속 스타로 나오는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에 대한 이면의 실체, 그리고 헥터의 선택을 통해, 그리고 미구엘과 가족의 화해를 통해, '자본'에 맹목적인 삶에 대한 여유로 귀착한다. 신발 사업 대신 음악이라거나, 가족 대신 개인이라거나, 자본 대신, 예술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지는 새로운 관계의 신화를 '멕시코 죽은 자들의 축제'를 배경으로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과 함께>에서 그저 한 개인으로서의 '의인'이었던 김자홍은 7번의 재판을 통해 '가족'이란 관계 속에서 그의 삶의 정당성을 부여받고, 구원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코코> 속 가족의 이단아 미구엘은 헥터를 통해 가족 속에 숨은 '음악적 전통'을 확인받고, 죽은 자들의 축제를 경과하며 가족들에게 승인받으며 또 다른 새로운 가족 관계의 서막을 연다. 21세기에 '가족'은 참으로 진부한 '코드'이지만, 여전히 변주되면 전세계에서 울려퍼진 디즈니의 로고처럼, 과연 지난 시절의 코드로만 치부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화두를 던진다. 

두 영화들은 여전히 사회 속에서 원자화된 개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코드를 '가족'으로부터 열어가고자 한다.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그 트라우마로 버거운 개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처럼 가족이란 무게를 짊어진 개인들이 있다. 그리고 개인과 가족을 보다듬어 주지 못하는 자본주의 사회 각자도생의 삶이 있다. 이 전체와 가족, 그리고 개인의 도그마와 그 소통의 신화에 대한 진부하고도 지난한 모색이, 가장 극적인 방식, 그래서 어쩌면 현세에세는 불가능한 '죽음의 제례'를 통해 화해하고 치유하고자 하는 시도가, <신과 함께>와 <코코>의 흥행으로 이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by meditator 2018. 1. 18. 16:25

계절을 잘못 찾아온 작품들이 있다. 분명 같은 겨울이지만, 작년 크리스마스와 새해는 다르다. 그런데 그 시절이 무색하게 새해 극장가에서 만나는 작품들은 생뚱맞게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친다. 바로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와 <코코>가 그 주인공이다. 뒤늦게 찾아온 이들 '크리스마스' 영화, 하지만 시절을 놓친 크리스마스 대신 각자 다른 매력으로 관객에게 어필한다. 그 중에서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는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진부한 옛날 이야기같은 <크리스마스 캐럴>에 찰스 디킨스라는 작가의 인생이라는 신선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초등 6학년 2학기 국어 나 교과서에 실려있다. 아니 교과서에 실리기 이전부터 '동화'의 세계에 입문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통과 의례'처럼 한번쯤은 읽어보았던 작품이다. 구두쇠의 대명사는 그 이름도 어려운 스쿠루지였으며, 우리 명절 동지에 찾아오는 팥죽을 무서워하는 역질 귀신은 낯설어도 크리스마스 이브 구두쇠 스쿠루지를 찾아온 그의 옛 동료 귀신은 친숙했다. '자린고비'보다 '스쿠루지'가 더 익숙한 게 사실이었다. 



익숙한 <크리스마스 캐럴>, 거기에 투영된 찰스 디킨스의 삶 
하지만 <크리스마스 캐럴>이 익숙하다 해서 그 작품의 저자인 찰스 디킨스가 익숙한 건 아니다. 어린 시절 흥부 놀부만큼이나, 개과천선의 대명사로 익숙한 스쿠루지를 탄생시킨 찰스 디킨스가 그와는 전혀 다른 <올리버 트위스트>나, <위대한 유산>, <두 도시 이야기>의 작가라는 걸 연관 시켜 기억하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당연히 작가의 생애는 더더욱. 바로 그 지점에서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는 익숙하지만 새로운 작품이다. 우리에겐 너무도 익숙한 <크리스마스 캐럴>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우리에겐 낯선 인물인 찰스 디킨스의 삶을 거기에 투영시키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작가가 글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승화시키는 것이야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그것의 작품화 역시 생소하진 않지만, 굴곡진 어린 시절을 겪은 찰스 디킨스가 희대의 명작 크리스마스 캐럴을 써가면서 그의 비밀 서재가 마치 스쿠루지를 찾아온 말리처럼 작중 인물들과의 모의 장소? 심지어 그들에 의한 찰스 디킨스의 '심리 치료 연극 무대'로 변모하며 그 과정에서 한 편의 작품이 탄생하고, 작가 자신의 치유가 이루어지는 영화적 상상력은 스크린에 펼쳐진 찰스 디킨스, 그 예술가의 생애가 된다. 

영화는 찰스 디킨스라는 인물로 부터 시작된다. <올리버 트위스트> 등으로 일약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된 그는 그 유명세로 미국에서도 환대를 받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그의 부에 맞게 끊임없이 더 많은 공사비를 부르는 그의 저택 등 그에게 손을 내미는 가계 경제와 <올리버 트위스트> 이후 부진했던 그에게 얹힌 새로운 작품에의 요구. 하지만 서재에 앉은 그는 단 한 줄도 새로운 작품에 대한 진척을 보지 못한다. 그러다 우연히 듣게 된 새로 온 하녀의 아일랜드의 옛날 이야기, 거기서 부터 힌트를 얻어 그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를 착안해 낸다. 

여기서 영화는 이제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해진 '크리스마스'에 대한 새로운 시사점을 제시한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를 쓰겠다고 자신과 이전 작품을 출간했던 출판사에 공표한 찰스 디킨스, 하지만 출판사 관계자들은 부정적이다. 이역만리의 대한민국까지 흥청거리며 축제를 즐기던 크리스마스, 그러나 정작 19세기의 크리스마스는 그저 종교 행사일 뿐이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크리스마스 캐롤>의 첫 번째 반전이 있다. 

자신이 쓸, 아니 그 어떤 작품보다 쓰고 싶은 새 작품에 대한 열의로 가득찬 찰스 디킨스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꺼려하는 출판사와의 계약 대신 빛까지 얻어가며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출간하려 한다. 당연히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이니까 크리스마스 시즌 전에 출간이 되어야 하는 상황, 하지만 아직 시작된 안된 작품의 일정은 너무도 빠듯하다. 그때부터 자신의 서재에 틀어박혀 주인공의 이름부터 시작하여 원맨쇼에 가까운 '산고'를 펼치는 찰스 디킨스의 고난이 시작된다. 



찰스 디킨스, 자신의 작품 속 주인공 스쿠루지와 갈등하다. 
영화의 배경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올리버 트위스트(2005)>, 팀버튼 감독의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의 이야기(2007)>의 배경과 같은 19세기 영국이다. 한 편에서 영국 제국주의의 자본과 문화를 향유하는 '신사' 계급들이 클럽 등 그들만의 세계를 누리고 있는 한편에서, 이제는 폐허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 잔재가 상흔처럼 남아있는 잔혹한 소년 노동의 역사가 항존하는 시대이다. 그리고 바로 이 극과 극의 세계에 바로 주인공 찰스 디킨스가 있다. 

베스트 셀러가 된 작품으로 인해 프랑스 풍의 최신 인테리어로 공사 중인 그의 집으로 상징되는 갓 신사가 된 그의 현실은 하지만, 그 한 편에서 새로운 작품에 대한 불투명한 미래, 그리고 축적되지 않은 부로 인해 '신기루'처럼 흔들린다. 하지만 어쩌면 그 위태로운 현실보다 더 불안한 건, '신사'연하지만, 아직도 어린 시절 파산한 아버지로 인해 구두약 공장에서 죽은 쥐와 폭력적인 강제를 견디며 버텨야 했던 소년 노동의 트라우마이다. 그로 인해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권선징악의 교훈을 주는 작품을 쓰고 싶었던 찰스 디킨스는 새 작품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출간 날짜의 촉박에 시달리게 된다. 

자신에게 돈을 대어주지만 대신 엄청난 고리대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뜯어내는 변호사를 모티브로 한 인물의 이름을 어렵사리 호명한 순간 그의 등 뒤에 나타난 소설의 주인공 '스쿠루지', 그리고 너그러운 그의 친구, 실제 아픈 아이를 아낌없이 사랑하는 여동생 내외, 그리고 우연히 마주친 인색한 부호의 장례식 등,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그가 조우한 인물과 상황을 빚어내어 <크리스마스 캐럴>을 써내려가는 과정은 그 자체가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의 한 관전 포인트가 된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흔히 작가들이 자신이 작품을 쓰는 순간 작품 속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그 '창작의 비밀'이 이 영화의 주된 그리고 '매력적인' 갈등 요소로 작동한다. 찰스 디킨스는 쓰려고 하지만, 정작 작품 속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이 그의 엔딩을 방해한다. 아니 그 자신이 세 아이, 조만간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나이에도 여전히 평행선을 긋는 그와 그의 아버지의 불화가, 아니 좀 더 솔직하게는 하루 아침에 '신사'였던 아버지가 범죄자가 되어버린, 그래서 평온한 가정의 맏아들이었던 그가 소년 노동자가 되었던 그 '신분 하락'의 트라우마가 스쿠루지라는 인물에 대한 입체적 서술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구두쇠라는 찰스 디킨스라는 예단과 그런 작가의 예단을 냉소하는 소설 속 주인공 스쿠루지의 갈등은, 곧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을 직시하지 못하는, 그래서 그 아픔을 소화해내지 못하는 찰스의 한계로 귀결된다. 

물론 영화는 흔한 가족 영화의 공식, 성장 영화의 공식을 그대로 따라간다. 불화했던 아버지와 아들은 화해하고 훈훈한 가족의 크리스마스 파티를 함께하며, 거기엔 자신의 트라우마를 성숙하게 극복해낸 아들이 있다. 당연히 그 화해와 극복에는 작가 찰스 디킨스의 성공적인 작품 <크리스마스 캐럴>이 있다. 

덧붙여, 찰스 디킨스란 작가의 영업 비밀을 다룬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의 배경에는 인터넷과 미디어가 주된 문화 컨텐츠가 된 21세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글자 문화의 현장이다. 단 한편의 소설이 베스트 셀러가 되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작가, 희귀 신상 신발도 아니고, 아이돌 그룹 팬미팅도 아닌 작가의 새 소설을 사기 위해 장사진을 이룬 사람들, 그리고 그 작품으로 인해 그저 하나의 종교 행사였던 크리스마스를 전 세계인의 축제로 변모시킨 위대한 예술의 '간증'이다. 물론 그 간증의 일등 공신은 원맨쇼에 가까운 연기를 보인 찰스 디킨스 역의 댄 스티븐스이다. 

by meditator 2018. 1. 16. 17:29

2000년 출간된 <가시고기>는 대번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백혈병에 걸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 헌신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는 그 후로 영화로, 만화로 만들어 지며 여전한 '아버지'의 자리를 확인시켰다. 소설 속 아버지는 아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부족한 돈을 위해 자신의 신장을 팔고자 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 검사를 하는 과정에서 그 자신이 말기암이라는 걸 알게된다. 그리고 어언 십여년, 2018년, 아내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위해 그 무엇하나 누린 적이 없었던 아버지, 그러나 가장으로서 가정을 지켜내지 못했던 아버지도 '암'에 걸리고 말았다. 아니 '암'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병원에서는 '암'이 아니란다. 2000년에 자식을 지키려 고군분투하다 암에 걸린 아버지와 2018년에 상상암에 걸린 아버지, 2018년의 아버지는 진짜 '암'이 아니니 괜찮은 걸까? 진짜 '암'과 상상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다 커버린 자식들이 떠나버리면 홀로 남아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아빠 가시고기처럼, 소설 속 아버지는 말기암의 판정을 받고서도 자신의 각막마저 아들의 치료를 위해 팔고자 했고, 끝까지 아들에게 아버지의 병을 알리지 않은 채 홀로 남아 죽음을 맞이한다. 2000년, 21세기의 서막이 열렸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순애보'적인 아버지의 사랑에 감흥했다. 이제는 아니다 했지만, imf를 경과하며 이 나라의 아버지들은 스러져 갔고, 가정은 해체되어 갔으며, 가장의 존재는 유명무실해 졌다 했지만, 여전히 아직도 '아버지'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시대였다. 하지만 <가시고기> 단 한 편으로 베스트 작가가 된 조창인 작가가 그 이후에도 여전히 '가족'을 화두로 한 작품을 출간했지만, 그의 다른 작품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듯,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는 서서히 아니 급격하게 지는 태양이었다. 아니, 아버지란 이름은 이제 지더라도 세상을 밝히려 애쓰는 태양이기는 커녕 우리 사회에서는 '기성 세대'가 되어가면서, '꼰대'가 되었고, '적폐'의 상징으로 젊은 세대의 걸림돌이 되었다. 



2018년, 초라한 아버지의 자리
바로 그런 시대에 <황금빛 내 인생>의 아버지 서태수(천호진 분)와 최재성(이 있다. 그들은 아버지이지만 무기력하다. 이제 40회에 들어선 드라마에서 그들은 '가장'이라지만, 도대체 가장다운 무언가를 한 일이 없다. 무역맨 출신의 그는 한때 잘 나가는 사업가였다. 딸 서지안의 친구 혁은 동아리 모임을 하는 서지안의 친구들을 위해 호탕하게 간식거리를 사주던 서지안의 능력있는 아버지를 기억한다. 하지만, 그렇게 능력있고 가정적이었던 아버지는 그의 사업 실패와 함께 사라졌다. 경제적으로 여유를 즐기며 맘껏 미대의 꿈에 부풀었던 딸 지안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일반고로 전학을 가야했듯 6식구는 단칸방 신세가 되었고, 거기에 업친데 덥친 격으로 어머니는 암에 걸리셔서 가족을 경제적으로 더욱 쪼달리게 했다. 평생 그의 그림자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왔던 아내와 가족들은 하루 아침에 닥친 경제적 위기에 힘들어 하며 가장인 그를 원망했다. 

큰 아들은 무능력한 아버지의 삶을 보며 결혼을 안한다 하고, 아내는 고생하는 자식을 보다못해 딸을 바꿔치기까지 한다. 대학 준비를 하는 줄 알았던 막내 아들은 알고보니 돈을 벌겠다고 하고, 이제 자신들이 뒤바뀐 걸 알게 된 딸들은 그 충격으로 아버지를, 가정을 외면하다. 비로 경제적 능력은 상실했지만 그럼에도 가장으로 어떻게든 가족들의 구심력이 되고자 했던 그는 이제야 비로소 처절하게 깨닫는다. '돈'이 아니고서는 이 사회에서 '아버지'의 자리는 보장받을 수 없음을, 돈이 없는 아버지는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님을, 그런데 그 '아버지'의 자격인 돈을 위해 한 평생을 달려왔고 노력했지만 그건 '신기루'처럼 날라갔다. 자신의 인생과 목표와 함께. 그리고 가족도 함께. 그는 살아있지만 이미 그 누구도 그를 살아있는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다. 어머니처럼 자신에게도 '암'의 증상이 나타난 날 그래서 서태수는 기꺼이 그걸 '하늘의 선물'이라 생각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린다'

그렇다면 돈이 있다면 다를까? 최재성은 남들이 보기엔 그 대단하다던 재벌가 해성의 부회장이다. 강원도 태백 탄광 지대 출신으로 그 비상한 머리 하나로 대기업 해성에 들어갔고, 회장 딸 노명희와의 사랑으로 해성가의 사위로 '입지전적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59세 그 남부러울 것 없는 그이지만, 그는 해성가의 꼭두각시이다. 불같이 사랑해서 결혼한 아내와는 사업상 혹은 가족 이야기라도 절차상 필요한 이야기 외에는 나누지 않은 지 오래됐다. 한 방을 쓴다지만, 냉기가 흐른다. 집안의 모든 대소사는 모두 해성가의 수장인 회장의 의중에 따라 결정된다. 그는 이제 환갑을 바라보지만 여전히 두 딸을 놓고 저울질 하는 장인 어른 덕택에 '간택'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아이들과 관련해서도 그의 의견은 아예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자신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집을 나간 큰 아들 도경처럼, 아이들에게 역시 아버지의 존재는 유명 무실하다. 그래서일까 대기업 부회장이나 된 그가 정신과 의사 앞에서 허탈하게 눈물을 흘린다. 



암이 아니면, 죽지 않으면 괜찮은 걸까? 
38회 엔딩, 서태수의 상상암은 무리수였을까? 아니 오히려 그간 가족간의 서사를 <가시고기>에서 보여지듯이 병력을 활용하여 '신파'적 설정으로 넘어갔던 기존의 가족 서사에 대한 작가 소현경의 야심참 도발이 아닐까? 여기서 원론적인 반문이 필요하다. 서태수는 암이 아니다. 심지어 상상에 의해 암이 걸렸다. 아이를 가지고 싶어하는 엄마가 상상으로 아이를 가지듯이, 서태수는 그렇게 '암'을 '고소원'하다 못해 '상상'으로 암에 걸리고 만다. 

그럼 암아니면 그래서 조만간 죽게 생기지 않으면 괜찮은 것일까? 바로 여기 작가의 질문이 있다. 아니 반문이 있다. 오죽 서태수에게 삶이 의미가 없었다면 그는 죽기를 소원했을까? 여기서 스스로 암에 걸렸다고 확신한 서태수에게 온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이 조만간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변화한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굴레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늙수그레했던 외모도 염색을 하며 변모시켰고, 하고 싶었던 기타도 다시 들었고, 무엇보다 가족이라는 짐을 벗어던졌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에 대해 돌아보고 용기를 낼 수 있는 아버지이다. 

그런 아버지의 변화에 자식들은 당황해 한다. 아버지 왜 그러시냐고, 아버지 아프시면 병원에 가셔야 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서태수는 그런 가족들에게 냉랭하다 못한 반발한다. 왜 너희들은 '가족'에서 벗어나 지 멋대로 하고 살면서, 여전히 아버지에겐 자신의 자리를 구차하게 지키라고 하냐고?

소현경 작가가 서태수, 최재성 이 시대의 아버지, 그러난 허울만 아버지일뿐, 이제는 그 예전의 '가부장'도, 심지어 '가장'도 아닌, 구차하고 무기력하게 늙어가는 남자들의 존재론을 묻는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어느새 이 시대에 걸림돌이 되어버린 '아버지' 세대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그 예전 아버지들처럼 혹은 여전히 가족극이 즐겨 쓰는 '화합'의 소재가 되는 육체적인 병이 아니라, 정신적 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가족이라는 집단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만을 배우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아야 했던, 하지만 그 조차도 여의치 않았던 우리의 아버지 세대, 그들은 이 시대 아버지는 증상만 다를 뿐 어쩌면 모두 서태수, 최재성처럼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38회 '상상암'은 웃픈 해프닝이 아니라, 가장 이 시대의 아버지를 잘 표현한 설정이다. 그 상황에 실소를 자아내는 우리들은 어쩌면 여전히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서태수의 자식들 중 한 사람일 지도 모른다. 

by meditator 2018. 1. 15. 14:28

2014년 10월에서 12월까지 방영되었던 11부작 ocn 드라마 <나쁜 녀석들>은 이른바 '나쁜 녀석들'이라 통칭해 질 수 있는 범죄자들을 내세워 '더 나쁜 녀석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응징한다는 '폭력적 카타르시스'를 내세워 화제가 되었다. 더구나, 딸을 잃고 미친 개가 된 형사 반장 오구탁 역의 김상중을 비롯하여, 2017년 흥행 배우가 된 조직 폭력배 역의 박웅철 역의 마동석, 청부 살해업자 정태수 역의 조동혁,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범 이정문 역의 박해진 등 이미 그 배우의 면면 만으로도 화제가 된 작품이기도 하였다. 거기에 <뱀파이어 검사>로 ocn 장르 드라마의 장을 연 한정훈 작가가 들고 온 새로운 시리즈였으니 장르물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이미 방영전부터 기대작이었던 작품이다. 


당시로서는 드문 11부작의 짧은 시리즈 동안 형사 오구탁을 비롯하여, 그가 내세운 범죄 소탕 작전의 개가 된 범죄자들, 박웅철, 정태수, 이정문 등이 '법'이라는 기성 제도의 틀을 넘어, 선사하는 폭력적 범죄의 단죄 방식은 칼과 칼이 만나는, 그리고 몸과 몸이 부딪치는 폭력적 카다르시스의 향연과, 그들을 팀으로 엮은 남구현 경찰청장과 오재원(김태훈 분) 특별 검사 사이에 과연 누가 진짜 '나쁜 놈'인가를 놓고 벌이는 '진실 찾기'게임이라는  두 개의 엔진으로 드라마의 흥미를 배가하였다. 


11부의 대미, 드라마는 오구탁 형사 딸, 그리고 남구만 경찰 청장 아들의 죽음,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한 레이스는 결국 정작 나쁜 녀석들을 향한 오구탁, 남구만, 그리고 또 다른 법의 세력 오재원의 사적 복수와, 그럼에도 '나쁜 짓만 하며 살던 놈들이 사람답게 살아보니 살 맛'을 느껴, 짐승의 길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그저 좀 더 나쁜 녀석들을 모아놓은 것같던 이들이 회를 거듭하면서 외부의 나쁜 녀석들을 정죄하는 한편, 각자의 개인적 악연으로 얽혀들었던 그 '관계의 딜레마를 애초에 그들을 모아놓았을 때 보상으로 딜했던 출옥 대신 '나쁜 녀석들' 스스로 끊어내는 것으로 드라마는 마무리된다. 

그리고 당연히 이제 서로의 악연의 사슬에서 벗어난 이들이, 그들 각자가 가진 '캐릭터' 본연의 맛을 가지로 좀 더 본격적으로 악의 세력 구축에 나설 것을 시즌 2로 시청자들은 기대하였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 그 자체가 무기가 되었던 박웅철이 같은 제작진의 또 다른 장르물 <38사기동대>에서 소심한 세무 공무원으로 등장하며 시즌 2의 가능성은 멀어졌다. 그리고 <나쁜 녀석들>이 방영된 2014년으로부터 3년이 흘러 2017년하고도 12월 <나쁜 녀석들>이란 수식어를 단 드라마가 찾아온다. 



나쁜 녀석들 시즌 1의 스핀 오프? 
그러나 새로이 등장한 <나쁜 녀석들>에는 오구탁 형사가 없다. 박웅철도, 정태수도, 이정문도 없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쁜 녀석들'이란다. <나쁜 녀석들>의 제작진은 시즌2의 부담을, 마치 시즌 1의 스핀 오프와 같은 형식으로 변주한다. 기존 시리즈를 이끌었던 주인공들 대신, 그 얼개와 서사의 방식을 그대로 뽑아내 38사기동대의 배경이 되었던 서원시로 옮겨온 것이다. 

시작은 <나쁜 녀석들>과 같았다. 서원시를 돈으로 장악하여 각종 이권을 행사하는 건 물론 자신의 이권에 방해가 되는 이들을 거침없이 제거하는 조영국 회장(김홍파 분)을 제거하기 위해 그와 악연이 있는 우제문(박중훈 분), 노진평(김무열 분) 검사와, 장성철 형사(양익준 분), 그들의 수하 신주명(박수영 분), 양필순(옥자연 분), 그리고 범죄자이거나, 범죄자였던 허일후(주진모 분), 한강주(지수 분)가 뭉친다. 

이들의 방식은 나쁜 놈을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시즌 1의 취지를 이어간다. 무엇보다 첫 회 주재필을 잡기 위해 '나쁜 녀석들'이 온몸으로 떼로 몰려드는 서원시의 부랑배들을 상대로 맞부닥치는 장면은 바로 이것이야말로 <나쁜 녀석들>의 폭력적 카타르시스라는 걸, 시즌의 핵심이라는 걸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죽음을 불사한 선과 악의 때론 선과 악의 정체조차 모호한 처절한 대결은 8회까지 매회 이 드라마의 특징으로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시즌1의 명확한 캐릭터들에 대한 그리움을 시즌1이 아쉬웠던 서사의 치밀함으로 대신한다. 이제 9회를 앞두고 중반을 넘어선 <나쁜 녀석들>은 알고보니 남구만, 오구탁, 오재원의 사적 연원이라는 스케일을 넘어, 부제 악의 도시처럼 서원시라는 한 도시를 둔 끝모를 악의 세력과 나쁜 녀석들의 치킨 게임으로 이어진다. 

한 회에 한 명씩이라는 말이 우스개가 아닐 정도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하면서 뜻을 모았던 '나쁜 녀석들'의 멤버들은 매회 한 두명씩 사라진다. 신주명 과장과 양필순이 그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하수인의 칼에 비명횡사를 했고, 장성철이 사선을 넘나든다. 



한 회의 한 명씩? 아군의 희생으로 드러나는 악의 실체
그렇게 우리의 나쁜 녀석들이 목숨을 던지며, 서원시 권력의 배후, 그 악의 주구는 조용국에서, 그 모든 것을 조정했던 구시대의 잔재였던 이명득으로 밝혀진다. 시즌 1에서 알고보니 나쁜 녀석들을 개로 내세월 범죄 소탕 작전을 벌이려 했던 배후가 남구만이었다는 식이다. 하지만 자기 자식에 대한 원한에서 시작되었던 시즌 1의 스케일을 넘어, 조용국의 지원을 받은 정치인이 서원시장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건 공안 검사 출신의 구시대 적폐의 노골적인 일종의 정치공작이었다는 검찰 개혁을 둘러싼 대리전이었다는 걸 중반에 들어선 <나쁜 녀석들; 악의 도시>는 드러낸다. 특히 5,6,7,8회에 걸쳐 진짜 적이 누구인가를 둘러싼 나쁜 녀석들 사이의 내분과 응징을 둘러싼 처절한 갈등, 서서히 드러난 이명득 검사장의 정체는 시즌 1이 가졌던 서사의 아쉬움을 넘어 선다. 

그런데 적폐 청산도 했는데 이제 겨우, 절반의 레이스를 넘었다. 조영국은 진실을 폭로하고 스스로 법의 심판을 받고, 이명득의 정체도 드러냈으며, 그 모든 걸 밝히기 위해 앞섰던 반준혁(김윤석 분) 검사가 새로운 지검장이 되며 검찰 개혁의 시동을 걸기 시작했는데 드라마는 이제 절반을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그 개혁에 함께 발맞춰 나가고자 특수 3부로 갔던 노진평 검사가 의문의 교통 사고를 당하며 목숨을 잃고 만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이명득 서원지검 검사장은 자신이 적폐인 것이 드러날 까봐 그 사실을 안 모든 인물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빨갱이'들을 없애고자 하는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기 위해 민선 시장이었던 서원 시장을 제거하는 한편, 개혁 세력인 새 정부의 비위를 맞추고자 조영국을 제물로 삼고자 하였다. 그의 노회한 변신 작전은 물거품이 되었다. 양의 탈을 뒤집어 쓴 늑대와 같은 이명득의 캐릭터는 '검찰 개혁'이 당면의 과제인 상징적이다. 그러나 여전히 드라마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드라마는 말한다. 구시대의 적폐 이명득을 제거했지만 새 시대는 쉽게 오지 않는다고. 자신과 함께 했던 형과 같던 수사관의 죽음으로 나쁜 녀석들의 일원이 되었던 젊은 검사 노진평을 뜻밖의 죽음으로 모는 시대는 여전히 어둠이 드러워져 있다. 그리고 악의 응징과 관련하여 각자의 이해 관계로 흩어졌던 나쁜 녀석들은 역시나 또 각자가 포기할 수 없는 신주명, 양필순, 노진평의 죽음, 그리고 사라진 주변인들을 찾아나서며 다시 한 자리에 모인다. 과연 이들이 헤쳐나가는 어둠에는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는 것인지, 드라마는 새 시대의 명암을 그려내며 여전히 우리가 정신차리고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한다. 


by meditator 2018. 1. 12. 22:32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낡은 시대가 물러갔다. 새로운 대통령이 뽑히고,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시대을 마중하기 위해 분주하다. 교육이라고 다를까. 입시 체제부터 변화를 위한 움직임이 분주하다. 그런데, 과연 교육에 필요한 것이 새로운 입시 체제일까? 지금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그간 꾸준히 교육과 관련된 다큐를 제작해 왔던 ebs다큐 프라임의 생각은 좀 다른 듯하다. 새해 첫 다큐로 ebs가 준비한 것이 바로 <번아웃 키즈>이기 때문이다. 지난 3,4일 그리고 8,9일에 걸쳐 4부작으로 방영된 이 다큐는 어쩌면 지금 우리 교육에 필요한 건 새로운 방향으로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서서 아이들을 안심시키고, 괜찮다 등을 두드리고, 그리고 그들이 맘껏 푸르를 수 있도록 여유를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큐의 제목 <번아웃 키즈>, 그 수식어인 번아웃(burn-out)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는 낯설지 않은 심리학 용어다. 그레이엄 그린의 1960년 작 소설인 <번아웃 케이스>에서 유래된 이 말을 독일 출신의 심리학자 허버트 프레이덴버거가 사용하며 등장했다. 타버리다, 소진되다라는 단어적 의미 그대로 '눈 앞의 목표를 향해 그것을 정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진해 가는 과정에서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가 소모되어 무기력증이나, 자기 혐오, 우울증에 빠지게 되는 증상이다. 서비스 직의 감정 노동자나, 위험하거나 전문성이 요구되는 직종, 교사, 의사 등 사회적으로 높은 도덕적 요구가 기대되는 직종, 업무상 스트레스가 많은 직종에서 걸리기 쉬운 증후군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회사의 도산이나 구조 조정, 가족의 죽음 등 과도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개인적 사회적 환경 역시 이 증후군의 배경이 된다. (다음 백과 중)

그런데, 이런 직업적이고 사회적인 원인으로 한 사람을 소진시켜 버리는 증상이 2018년 우리의 아이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그것도 특정 학령이 아니라, 다큐에서 보여지듯이 초등학생에서 부터, 고등학생. 심지어 이제 사회에 나가 그 자신이 아이들을 가르칠 선생님이 될 대학생들조차 이 증후군에서 자유롭지 않다. 도대체 우리 교육, 나아가 우리 사회가 '교육'이란 미명 하에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달리는 돼지와 함께 잠시 아이로 돌아간 아이들-<교실에 온 돼지>
한 선생님이 교실에 돼지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선생님은 말한다. '잘 길러서 크면 잡아먹자.' 18년전 오사카 고등학교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다. 1년간 아이들과 선생님이 돼지를 키운 이 과정은 tv 다큐로 방영되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츠마부키 사토시 주연의 <p짱은 내 친구>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 까지 했다. 바로 그 다큐와 영화의 상황이 안양 평촌의 한 초등학교에 벌어졌다. 

교실에 온 애완용이 아닌 흑돼지 한 마리, 선생님은 앞으로 100일 동안 아이들과 함께 돼지를 키우겠다고 한다. 도대체 왜 선생님은 당장 돼지 똥이며 냄새에 대한 민원이 빗발치는 이 돼지를 교실에서 키우자고 한 걸까? 그 답은 아이들에게서 찾아진다. 초등학교 5학년 공부를 못하는 게 불효라는 아이들, 교실 뒤편에 아이들이 쓴 글은 우리 사회 취준생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언어들로 도배되어 있다. '난 괜찮아, 난 할 수 있어', '하면 된다', 그러나 그 사이에, '난 괜찮아, 내가 한 말 중에 최고의 거짓말'이 있다. 벌써 대학 입시를 걱정하고, 미래에 볼모로 잡힌 아이들 그러나 정작 수업 시간 아이들의 눈은 비어있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 선생님이 도발한 결정은 그저 교실에 돼지 한 마리를 데리고 온 것, 그런데 첫 날 부터 아이들이 달라졌다. 5학년이 되었다고 말수가 적어지던 아이들이 '아이 본연의 호기심, 수다스러움, 발랄함'을 되찾았던 것이다. 그저 돼지 한 마리일 뿐인데? 그래서 이 2부작 다큐는 슬프다. 그저 초등학교 5학년, 이제 겨우 12살인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을 뺑뺑이 도느라, 벌써 입시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교실에 찾아온 돼지 한 마리로 12살 본연의 아이스러움을 되찾았다는 것이. 우리에서 꿀꿀거리기나 하고 더러운 줄 알았던 돼지가 운동장을 신나게 달리고, 알고보니 배변을 가리는 깔끔한, 그저 인간의 편의에 의해 더러워졌던 동물인 것처럼, 12살에 공부 기계가 된 아이들은 돼지와 함께 12살의 여름을 보내며 아이다운 밝음과 자신감, 책임감, 눈물을 찾았다. 이 세 달의 과정을 마친 아이들은 자아존중감 검사에서 6.26%의 상승세를 보였다. 고학년에 올라갈 수록 과도한 학습으로 자존감이 하락세를 보인다는 우리 교육, 겨우 돼지 한 마리가 혁혁한 성과를 보이는 이 교육 현장, 우리는 교육을 통해 무엇을 얻고 있는 것인가?라고 다큐는 묻는다. 

고 3도 사람이다 - <우리 여기 있어요> 
그래도 12살이면 그래도 낫다 싶다. 1, 2부 <교실에 온 돼지>에 이어 방영된 3부 <우리 여기 있어요>를 보면. 7.8, 6.5, 12.6, 7.7, 15.5? 이 숫자들은 이제 중간 고사를 3일 앞둔 고3학생들의 가방 무게다. 평균 6.5kg. 1.5 리터 생수병 4개 반이 우리나라 고3학생들의 가방 무게이다. 그런데 가방 무게에 놀랄 것도 없다. 구리 여고 이한울 외 3명의 학생들이 만든 영상 속 고 3학생들이 보여주는, 교우, 진로, 미래, 대학, 공부, 성적 등등에 대한 또래 학생들의 이야기는, 그저 부모님 이야기만으로 눈물샘이 터지는 대학 진학이란 목표를 향해 버티는 가방보다 훨씬 무거운 삶이다. 

고3인 아이들은 무기력함에 지배당한다. 자신들에게 10대란 미래를 저당잡힌 그저 견뎌야 할 인고의 시간이라 입을 모은다. 자소서라 쓰고, 대학에 맞춰 자기를 각색하는 자소설을 쓰며, 19년의 세월의 축적이 아닌 잘 하는 게 하나도 없는 자존감의 상실을 경험한다. 심지어, 경쟁만이 남은 교실에서 자신보다 못한 타인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자신들이 변태같다고 항변한다. 이제 곧 대학에 들어가 자신의 꿈을 펼쳐야 하는 아이들은 마치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살다보니 딱히 자신이 잘하는 게 없는 사람이 되었다 자조적으로 말한다. 아니 지난 19년의 세월, 잘 하는 걸 찾을 기회가 없었다 토로한다. 이게 입시 교육의 정점에 선 고 3의 현주소라 다큐는 말한다. 

고 3이 아니라면 다를까, 여수 여중 2학년, 매일 매일의 공부를 기록한 블로그를 통해 드러난 아이들의 상황, 공부를 하다 몸이 망가지면, 이렇게 까지라도 해서 열심히 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라 안심하는, '열심 증후군'에 빠진 위태로운 현실이다. 더 심각한 건, 이제 중 2밖에 안된 학생이 그런 어려움을 주변인들이 '넌 이것 밖에 안되는 얘야?'라 할까봐, 자신의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차마 들키고 싶지 않은 절대 고독, 다큐는 우리 청소년들의 '번아웃'을 그렇게 증명한다. 

준비되지 않은 채 교육 현장으로 간 선생님들 - <비긴 어게인> 
초등 교육에서 고등 교육으로 우리 교육이 자행하는 '번아웃의 현장'을 절절하게 그려나간 다큐는 4부에 이르러 뜬금없이 교대 학생들을 보여준다. 도대체 미래의 선생님들과 번아웃이 무슨 상관? 

갓 초등학교에 부임한 교사 조영우 선생님, 그러나 첫 날 부터 선생님은 교대를 다니면 전혀 배우지 않았던 현장의 상황에 부딪쳐 정신줄을 놓게 생겼다. 점심 시간이 되었지만 이미 지쳐버린 선생님은 음식을 넘기지 못할 정도다. 그저 신입이라서라는 핑계로는 막막해 보이는 선생님의 상황, 도대체 그의 지난 4년이 어땠길래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카메라의 시선을 옮겨 지켜본 교대 학생들의 생활은 빡빡하다. 선생님 혼자서 전과목을 책임져야 하는 초등 선생님의 특성때문에, 팔이 여럿 달린 힌두 여신이 그들을 상징하듯, 미래의 선생님들이 대학 동안 받는 수업은 빠듯하다. 이렇게 수업을 받는데 왜 현장에 가면 그렇게 당황하게 되는 걸까?

현재의 교대 수업은 초등 선생님의 기능적 교육 내용에 치우쳐 있다. 신군부에 의해 4년제가 된 교대, 그러나 4년제 사범대의 교육 과정을 벤치 마킹한 현재의 교대 교육 과정은 학생들에게는 현실과 너무 멀리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장에서 선생님이 맞닦뜨리게 되는 건, 20여명이 넘는 학생들만큼이나 다양한 상황, 그러나, 정작 아동 심리라던가 현실 교육 과정에 필요한 프로그램들은 교과 수업 전달에 밀려 겨우 명목상의 수업이 되고 만다. 미국의 경우 학기의 시작에서 부터 학년이 마칠 때까지 이루어지는 현장 실습은 겨우 한 달 정도의 형식적 과정으로 지나가버린다. 거기에 4학년만 되면 다시 '인강'을 들으며 교원 임용 교시 준비에 매달려야 하는 현실에서, 정작 '교사'로서의 제대로 된 준비는 논외가 되고 만다. 

그렇게 준비할 틈도 없이 교과 과정만을 기계적으로 익히고, 거기에 다시 달달 외우는 학습으로 임용 고시를 통과한 선생님들이 교육 현장에 선다. 당연히 학생들과 만날 상황이 아니다. 교사는 묻는다. 입시 교육에만 시달리다 자신을 잃어가는 아이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의 현실과 아랑곳없이 교과 과목만 배우고 현장에 선 선생님들. 과연 준비 없이 교육 현장에 투입된 선생님으로 인한 시행착오는 누구의 몫이 되는 것이냐고. 

동심을 잃은 채 입시 교육으로 내몰린 초등학생들, 그리고 그런 교육을 십 여년 받다 보니 자신을 잃다못해 무기력해져버린 고등학생들, 그리고 그저 교과 내용만 달달 외우는 임용 고시라는 통과 의례를 거쳐 교육 현장에 서게 되는 선생님들, 학생들은 '번아웃' 될 정도로 공부를 하지만, 정작 그 교육을 통해 그들은 '자신'을 잃는다. 과연, 현재 우리 교육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다큐는 묻는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라고. 


by meditator 2018. 1. 10. 19:09

새해에 들어서도 어김없이 <황금빛 내 인생>은 연일 시청률의 신기록을 세워가며 고공행진 중이다. 35회 토요일 자체 최고 시청률 37.6%를 갱신하더니, 일요일 역시 42.8%, 과연 이 주말 드라마 상승세는 어디까지 이어질까, 연말 시상식에서 남자 주인공 최도경 역의 박시후가 '고소원'하듯 50%가 가능할까가 관건이 될 정도로 <황금빛 내 인생>은 파죽지세다. 


그런데 <황금빛 내 인생>이 흥미로운 건 그저 시청률이 '따논 당상'인 kbs2 주말 드라마 중에서 '제법 더' 재미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kbs2 주말 드라마라고 하면 '가족'을 주제로 하는 '전통적 가족관'에 충실한 드라마들이 연이어 바톤 터치를 하는 자리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소현경 작가가 선보이는 <황금빛 내 인생>은 우리 사회의 '가족주의'이라는 패러다임에 도발적 문제 제기를 하면서도 대중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주목할 만하다. 



좋아는 하지만 사귀지는 않겠다! - 서지안 
무엇보다 그런 소현경 작가의 도발적 문제 제기의 중심에는 여주인공 서지안(신혜선 분)이 있다. 지난 연말 연말 시상식 등으로 특집극으로 대처했던 한 주 결망 동안 시청자들을 애닮게 했던 건 바로 낮밤으로 알바를 한 돈으로 미역국을 상을 차리고 목걸이를 준비한 최도경의 생일 이벤트의 결과이다. 과연 키스씬이 있을까? 라는 궁금증이 자연스레 들 정도로 남자 주인공이 저 정도로 물심양면 헌신적 모습을 보이면 십중팔구 여주인공은 감동을 하고 두 사람의 사랑 확인은 포옹과 키쓰로 자연스레 이어지는게 여느 드라마의 관행이다. 그런데 어쩐지 감동적인 스킨쉽 대신 주먹에 꼭 쥔 목걸리를 보이자, '그래 내가 너를 좋아한다'며 끝을 맺은 34회에 이어 이어진 새해 첫 방송 35회에서 서지안은 예상 외의 반응을 보인다. 


최도경을 좋아하지만 사귀지는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어머니의 거짓으로 인해 재벌 그룹 해성 가의 딸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서지안, 그녀는 짧았던 그 시간 동안, 그리고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 자살 기도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로 혹독한 경험을 치뤘다. 그 경험은 대기업 직원이 되어 남보란듯이 살고 싶었던 서지안의 인생 목표에 참혹한 반추의 시간이 되었다. 처음엔 돈을 보고 선뜻 자신의 친부모를 외면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한 회한이 고등학교 동창 혁을 따라 셰어 하우스에 들어와 고물을 모으고 선생 대신 목수 일을 하며 살아가는사람들을 만나고 혁의 목공방에서 일을 하며 자신이 이상으로 여겼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그런 고민의 결과는 여전히 최도경을 좋아하지만, 삶의 처지가 다른 최도경과의 연인 관계에 대한 거부로 나타난다. 그리고 36회 엔딩에서 보여지듯, 감히 자신의 아들을 만난다며 기세 등등하게 등장하여 다그치는 최도경의 모친이자 해성가의 안주인 노명희(나영희 분) 앞에서의 당당하게 '제가 싫어서요'라고 밝히는 태도로 귀결된다. 



물론 50부작의 긴 여정에서 앞으로 서지안과 최도경의 사랑이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저 재벌가의 아들과 서민 출신의 여성의 사랑과는 궤를 달리한다. 이미 서지안을 통해 각성한 최도경이 자신의 배경을 버리고 홀로 밑바닥에서 부터 자신을 찾는 도전에 도전하듯, 그들의 사랑에는 배경과 계급, 그리고 남보란 듯한 스펙으로 젊은이들의 꿈을 예단하는 우리 사회 고정 관념에 대한 작가의 도전이 있다. 그리고 그 도전은 사랑하지만 자신과 다른 삶을 살아갈 최도경을 거부하는, 이제 더는 세상이 원하는 그럴 듯한 성공의 삶에서 스스로를 기꺼이 방출시킨 서지안의 선택으로 드러난다. 

결혼을 했지만 아이는 거부한다 - 이수아
도발적인 선택과 도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서지안을 따라 자신의 재벌가를 버린 최도경의 선택으로 젊은이들다운 도전과 사랑으로 열렬한 지지를 얻고 있는 주인공 커플과 달리, 드라마의 처음부터 내내 쉬이 지지를 얻지 못하는 커플도 있다. 바로 서태수의 큰 아들 서지태(이태성 분)와 그의 아내 이수아(박주희 분)가 그 주인공들이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의 빚에 아직 독립하지 못한 동생들의 학자금까지 떠맡았던 맏아들 지태는 결혼을 거부한다. 심지어 오래도록 연인 관계였던 수아와 헤어지려고 까지 결심할 정도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 서태수의 설득으로 결혼을 한 태수-수아 커플, 결혼 계약서 1항에 아이는 낳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만 아이가 생겼다. 함께 병원에 가 초음파로 아이를 확인하고,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들은 지태는 마음이 달라진다. 기왕에 생긴 아이니 낳자고 한다. 그런데 그런 지태의 변화에 아내 수아는 반발한다. 심지어 그런 충동적인 결정을 하는 지태와 함께 살 수 없다며 이혼을 선언하고 집을 나가 버린다. 

전통적 가족 드라마에서 결혼과 아이는 지상 과제였다. 그러나 <황금빛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사랑을 하고 가까스로 결혼까지 한 이 커플에게 생긴 아이는 이제 커플 지옥문을 연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 시대 결혼도, 아이도 미루거나, 포기하는 젊은 세대들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낙태죄' 폐지가 담론이 되고 있다. 이 '낙태죄' 폐지를 앞장서는 사람들은 '출산할 권리 보다는 낙태할 권리를'을 주장한다. 바로 이런 일련의 주장, 그 흐름에 수아의 생각이 있다. 수아는 말한다. 캐나다에 이민을 갔다지만 어렵게 가게를 하는 오빠네에 겨우 빌붙어 사는 부모님, 그리고 출판사 무기 계약직으로 앞날을 보장받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 비록 정직원이라지만 맏아들이라는 부담이 큰 남편. 수아가 살아온 삶은 그녀에게 그저 이 세상에서 자기 한 몸 책임지며 사는 것만도 버거운 것이라 가르친다. 



이런 수아의 사고는 '저출산 고령 사회라는 디폴트 안에서 선택한 이 시대 젊은이들의 선택적 행복론'과 맞닿아져 있다. 아버지의 설득으로 결혼을 하고, 기왕에 생긴 아이니 낳으면 어찌 되지 않겠느냐 라던가, 차라리 아이를 키우기 위해 생활 수준을 낮춰 지방으로 내려가자는 지태의 방식은 전통적으로 '아이'를 부부의 중심, 혹은 가족의 중심으로 사고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런 지태의 생각에 수아는 반발한다. 수아의 사고에는 비록 자신을 책임지려 살아가려 하지만, 늘 생활고에 시다렸던 자신의 지난 시간과 자기 자식에게 그런 삶을 또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n포 세대'의 현실적 고민이 담겨있다. 자신의 아이라는 생명 존중 사상과 나의 실존과, 어쩌면 태어날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 대한 실존적 고민이 대치되는 지점이다. 소현경 작가는 어쩌면 이 드라마에서 가장 현실적인 지태 부부가 결혼과 출산 과정에서 겪는 문제를 통해 이 시대의 화두를 담아내고 있다. 그저 어떻게 '아이가 생겼는데?'라는 세간의 오지랖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시대적 고민이다. 

그렇게 <황금빛 내 인생>은 '서태수'의 가족을 중심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고민을 현실적으로 담아내고자 애쓴다. 또한 젊은 세대의 새로운 담론을 여주인공들의 생각과 행동을 통해 전 세대에게 화두로 제시한다. 시청률을 넘어선 이 드라마의 가치는 여기서 빛낸다. 



by meditator 2018. 1. 9. 13:58

지난 2016년 12월 31일 ebs 장학 퀴즈는 인공 지능 엑소 브레인과 상하반기 왕중왕 김현호, 이정민 학생과 수능 만점자 윤주일, 그리고 카이스트 학생 오현민 씨와의 대결을 특집으로 마련했다. 결과는 인공 지능 엑소 브레인이 2위와 160점이나 차이나는 압도적인 우승이었다. 이 대결의 참가자였으며 서울대에 진학한 김현호 학생에게 이날의 경험은 허망하고 수치스러운 기억으로 남는다. 김군은 말한다. 방송 전 예비로 시험을 볼때만 해도 엑소 브레인은 학생들보다 압도적으로 우수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전 준비 과정과 몇 시간의 녹화 과정에서 인공지능은 스스로 진화하여,학생들을 압도했다. 


이런 경험을 했기에 서울대 경영학과에 진학한 김현호씨에게 미래에 대한 고민은 깊을 수 밖에 없다. 경영학과 학생들이 다수 선택했던 회계사란 직업은 20년 안에 없어질 직업의 1순위이다. 동기들과 경영 하나로는 먹고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며 프로그래밍 학원이라도 다녀야 할까라며 고민을 하는 김씨와 동기들. 



도래할 4차 산업 혁명의 시대를 맞이하는 당사자인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도대체 4차 산업 혁명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인가 불투명하다는 고민과 함께 그럼에도 여전히 기존의 교육 과정이 요구하는 학과 중심의 공부를 제쳐둘 수 없기 때문에 혼란만 가중되고 있다. 스스로 소프르웨어를 개발해 내는 중2의 과학 영재 이준서군에게 부모들이 역사 성적에 대한 잔소리를 늘어놓을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인 것이다. 

4차 산업 혁명과 혼란에 빠진 학생과 학부모들
1월 7일 방영된 <sbs 스페셜 - I ROBOT - 내 아이가 살아갈 로봇 세상>은 바로 이런 변화하는 세상에서 혼란에 빠져 있는 교육과 학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시작은 도대체 4차 산업 혁명이 뭐길래? 로부터 시작될 수 밖에 없다. 

정보 통신 기술(ICT)의 융합으로 이루어지는 4차 산업 혁명은 인공 지능과 로봇기술, 생명 과학이 주도하는 변화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변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 것일까? 학부모들의 고민이 깊어지듯 일자리, 즉 먹고사니즘의 변화이다. 1,2차 산업 혁명으로 인간의 육체적 노동 부문을 기계가 대신해갔다. 그리고 3차 산업 혁명을 시작으로 이제 4차 산업 혁명은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신해 가기 시작한다. 

반도체 부품 업체의 인공 지능 로봇 소이어, 기존의 사람들 200명이 하던 일을 소이어의 도움으로 이제 3명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저 사람 수의 문제가 아니다. 알 지 못하는 분야의 일 조차도 하루 이틀 학습을 하면 인간을 대체할 정도의 학습 능력에, 점심 시간, 브레이크 타임은 물론 오버 타임까지도 가능한 24시간 풀 가동하는 소이어의 능력은 바로 미래 사회 인간의 자리를 대체할 로봇의 현주소다.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한 호텔에서는 안내, 청소, 요리 등 기존의 사람들 30여명이 할 일을 단 7명만이 필요한 로봇 호텔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인공 지능 로봇의 대두는 한국 사회에서는 '알파고의 충격'으로 집약된다. 인간의 지적 활동,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바둑', 그러나 프로 바둑 기사 중에서도 내로라하는 이세돌은 알파고와의 대결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40여년전 유망 직종이었던 전화 교환원이나 버스 안내양 등이 이제 사라지고, 문선공이란 직종은 그 이름조차 낯설어진 세상처럼, 이제 수십년 내에 우리 사회 직업들은 혁명적 변화를 겪게 될 것이라는 것이 관련 학자 들의 공통된 진단이고, 학생과 학부모들의 고민은 바로 이런 미래 사회의 예측 불가능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4차 산업 혁명, 새로운 가능성이 세상. 
대부분의 4차 산업 혁명 다큐들이 미래의 불가지론에 근거한 불안함과 혼돈을 강조한 반면, 1월 7일 SBS 다큐의 시선은 이와 좀 다른 지점을 포착한다.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는 이런 변화에 내던져진 인간의 현실을 기계와 인간의 달리기에 비유한다. 1,2, 3차 산업 혁명 역시 기존의 직업들을 사라지게 했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들은 더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로봇 공학자 오준호씨는 오늘날 사람들의 불안을 2차 산업 혁명으로 자동차가 보급되자, 인간과 자동차의 달리기를 예로 들며 좌절했던 그 시대의 얼토당토않은 경쟁을 예로 든다. 즉, 자동차가 등장했지만, 그 자동차로 인해 인간의 생활이 보다 편리해진 것이 압도적인 만큼, 소프트 웨어의 발전에 인간은 또한 적응할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그저 막연한 불안의 대상인 인공 지능, 다큐는, 그 불안의 실체에 과감하게 접근한다. 화제의 인공 지능 로봇 소피아, 로봇으로 최초 시민권을 획득하고 토크쇼에도 출연했던 이 오드리 햅번을 닮은 로봇을 인문학자 최진기씨가 만나, 정해진 메뉴얼없이 대화를 나눠본다. 그 결과는? 최진기씨는 소피아를 '동문서답의 마법사'라 여유롭게 정의내린다. 즉 그의 표현에 따르면 마네킹을 씌워놓은 인공지능 스피커같은 소피아는 프로그래밍된 용어가 들어있지 않은 대화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다큐의 실험에 대해 MIT에서 세계 최초 4족 보행 로봇을 만들어 낸 로봇 학자 김상진 교수는 확신을 더해준다. 그 최초의 4족 보행 로봇, 하지만, 정작 이 로봇에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계단, 문턱, 좁은 골목 등 인간에게는 사소하고도 자연스러운 장애물들이다.

즉, 소피아와 4족 보행 로봇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무시하고 있는 인간의 능력, 즉 적응력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인간이 세상의 주인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프로그램된 내용의 학습을 통해 인공 지능은 바둑을 이길 수는 있지만, 수세미를 쓰다, 밥풀을 긁어내는 등 다양한 적응이 필요한 접시 닦이를 인공 지능들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4차 산업 혁명의 시대에 교육은 바로 이런 인간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영역에서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오바마 대통령이 강조했다 해서, 우리 사회에 화제가 되었던 코딩 교육이 2018년부터 중학 과정에서 의무 과정이 되었다. 



코딩의 조기 교육? 무엇이 중한디? 
컴퓨터의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컴퓨터가 알아들을 수 있는 사고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는 코딩, 중학 과정에서 의무가 된 코딩은 34시간을 이수해야만 한다. 34시간은 중학교 전체 과정에서 1%에 불과한 시간, 현장에서 가르치는 김현석 선생은 1주일에 한 시간 가르치는 방식의 코딩 교육은 결국 또 한 과목의 국영수가 될 뿐이라 비관한다. 그러나 현장의 비관과 다르게 유치원에서 부터 코딩 교육은 붐을 이루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 

이런 결국 또 하나의 선행 학습이 되어가고 있는 코딩 교육 붐에 대해, 다큐는 방향을 정정한다. 그 선례로 등장한 건 바로 유투브에서 화제가 된 아빠의 샌드위치 코딩 교육. 동영상의 아빠는 샌드위치 만드는 법을 아이와 학습한다. 아이가 써준 메뉴얼에 따라 샌드위치를 만들어 보는 아빠, 그러나 아이의 어설픈 요리 메뉴얼은 식빵 모서리에 잼을 바르는 해프닝으로 번번히 실패한다. 



코딩의 코자도 꺼내지 않는 코딩 교육, 이것이야 말로, 바로 생활 속에서 실행하는 진짜배기 4차 산업 시대의 교육이라 데이스 홍 교수는 강조한다. 코딩의 관건은, 아니 4차 산업 혁명 시대의 교육의 관건은 문제 해결 능력, 그리고 체계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논리력, 그것이야말로 어떤 상황이 닥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이라고 다큐는 결론 내린다. 

우리 시대의 4차 산업 혁명은 화두이자, 동시에 딜레마다. 교육입국을 앞세워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던 그 세대의 학부모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새로운 시대의 교육에 먼저 한 발을 끼워 넣으려 애쓰고 있다. 이런 부모들의 초조함에는 인류로 봤을 때는 진화이지만, 개인으로 봤을 때는 각자도생이라는 진화와 발전의 냉엄한 현실 인식이 기조로 깔려있다.  비감했던 기존의 4차 산업 혁명 다큐와 달리 <sbs스페셜-I ROBOT - 내 아이가 살아갈 로봇 세상>는 인간을 낙관한다. 그러나 그 낙관은 잘 준비된 자의 몫이다. 하지만, 그런 우려와 초조함이 또 다른 국영수 과외 식의 닥달이어서는 안된다고 다큐는 단언한다. 가장 자연스러운 하지만 현실의 교육 제도가 가장 간과하고 있는 인간의 적응 능력을 키워줄 수 있는 교육만이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을 키워낸다며 고삐를 죄는 부모들의 시선을 돌린다. 

by meditator 2018. 1. 8. 16:23
영화의 시작과 함께 소방관 김자홍이 '예정대로 무사히 사망한다'. 아직 자신의 죽음을 채 받아들이지도 못한 김자홍(차태현 분) 앞에 여자 아이를 구하고 죽음을 맞이한 그가 '의인'이라며 호들갑을 떨며 저승사자 트리오 해원맥(주지훈 분), 덕춘(김향기 분),  그리고 강림(하정우 분)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 저승사자와 함께, 김자홍은 그의 사후 49일 동안 7번의 재판을 받게 된다. 



화려한 cg와 함께, 두 명의 판관, 그리고 각 지옥의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개성있는 수장들로 이루어진 7번의 지옥,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의인이었던 김자홍의 뜻밖의 사연, 그리고 예상 밖의 복병처럼 등장한 악귀로 인해, 관객들은 자연스레 의인 김자홍의 순조로운 재판 성공 여부에 촉각이 곤두서게 된다. 더구나 덕춘의 호들갑이 불안하듯 모든 것이 무사통과일 것이라던 7지옥은 그 어느 것 하나 순조롭게 넘어서는 것이 없으니, 이 영화를 보고 나온 누군가의 말처럼 '착하게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의인 김자홍으로 분한 차태현이 그 친숙한 유명세로 이 대중적 영화의 바람을 잡지만 본격적으로 지옥의 수난사가 시작된 영화의 주인공은 어느 틈에 악귀로 등장한 김자홍의 동생 수홍(김동욱 분)의 의문사에 대한 석연찮은 사연이다. 그리고, 죽은 뒤 의인이 된 형 김자홍과 의문사로 죽어 악귀가 되어 의인이 된 형의 앞길을 막아서는 동생 수홍의 굴곡진 사연은 궁극에 그들의 지지리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슬픈 사연으로 절정을 이루더니, 악연인 줄 알았더니 그리움이었던 그 형제애의 대단원은 '어머니의 갸륵한 모정'으로 마침표를 찍게 된다. 

덕분에 관객들은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서 아름답고 감동적인 한 가족애의 현장을 목도하고, 일곱 지옥을 무사히(?) 통과한 자홍에 안도하고, 저승사자들에 의해 의인이 될 수홍에 안심하며, 비록 두 아들을 보냈지만, 그들과 못다한 회포를 꿈속에서나마 푼 어머니에 미련을 덜어내고, 마음 편하게 극장 문을 나선다. 그 어떤 액션 블록버스터 못지 않게 흥미진진했던 49일간의 지옥도 롤러코스터의 재미를 덤으로 느끼며. 



불교의 지옥도를 배경으로 한 한 편의 씻김굿 
<신과 함께>는 마치 씻김굿과도 같다. 영화는 불교에서 전해지고 있는 저승과 7 지옥도를 내용으로 삼고 있지만, 그 7지옥을 거쳐 환생에 이르는 자홍의 통과 의례는 우리 무속 신앙의 씻김굿과도 같다. 죽은 자가 이승에서의 한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해 이승을 헤매일까 저어하여 죽은 이의 영혼을 순조롭게 저승으로 인도하기 위해 진행되는 의식이 바로 우리 전통 신앙의 씻김굿이다. 그리고 <신과 함께>는 저승의 7지옥이라는 매개를 통해, 결국은 환생조차 거부했던 김자홍이 살아냈던 이승의 고달픈 삶을, 그리고 억울하게 죽어간 동생 수홍의 한을 풀어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 형제와 그 어머니의 고달픈 삶을 목도하고 공감한 관객들의 마음을 위무한다. 

따지고 보자. 해피엔딩인 것같지만, 사실 이승에서 두 형제의 삶은 비극이다. 가난때문에 어린 시절 병든 어머니와 철없는 동생에게 몹쓸 짓을 하려다 집을 떠난 김자홍의 삶은 내내 고달프다 못해 버거웠다. 소방관이라는 직업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을 그가, 그 낮의 직업이 끝난 밤에도 쉬지 못하고 돈을 벌기 위해 온갖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의인'이란 덕춘의 추켜세움에 '돈'때문이라 답했던 김자홍의 돈은, 그의 죄책감과 의무감의 동의어다. 그런 그가 이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누릉지가 잘 만들어지는 밥솥을 사, 편지까지 써놓고는 이승을 하직했다. 저승사자에 의해 덜컥 저승으로 인도되었지만, 예전 <전설의 고향> 버전이라면 억울해서 이승을 떠돌만한 사연이다. 

동생 수홍은 한 술 더 뜬다. 홀로 된 어머니, 심지어 그토록 기다리던 형마저 차가운 주검으로 돌아온 형편에, 이제 일주일만 더 있으면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보살필 수 있다 생각하던 그가, 그가 배려해준 관심사병 후임에 의해 '비명횡사'를 하게 되었다. 악귀가 되어 떠돌지 않는 게 이상할 상황이다. 심지어 둘 다 우리 무속계에서 가장 나쁘다 싶은 '몽달귀(총각이 죽어서 된다는 귀신)'들이다. 

그들은 착했지만, 가난했던 이들 형제의 삶은 고달팠고, 결국 현실의 세상은 그들의 가난도, 착함도 보상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그리웠던 어머니의 상봉을 앞두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 억울한 이 형제들의 사연을 <신과 함께>는 역설적으로 풀어간다. 자홍의 고단했던 삶은 의인으로 죽은 그가 뜻밖에도 마주치게 된 지옥의 재판으로, 그리고 의문사로 죽어간 수홍의 억울함은 악귀가 된 그의 변신으로 풀어낸다. 하지만, 그 역설적인 과정은 오히려 어린 시절 집을 뛰쳐나온 이래 함께 해서 다하지 못한 큰 아들의 책임감을 완수하기 위해 불철주야 살아왔던 자홍의 고달픈 인생과, 그런 형의 빈자리를 고시 공부까지 하며 채워가려 했던 착한 동생 수홍의 너그러운 삶을 절묘하게 설명해 내고, 저승이라는 공간을 통해 구원한다. 아니 관객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았다고 느끼도록 만든다. 




자본의 카스트 제도를 살아내는 사람들을 위한 위무 
결국 집을 나간 큰 아들은 주검으로 돌아왔고, 하나 남은 작은 아들마저 꿈을 이루지도 못한 채 말도 못하는 늙은 어머니만 남았지만, 7지옥의 재판을 무사히 마치고 환생을 하게 된 자홍과, 악귀가 아닌 의인으로의 재판을 받게될 수홍으로 인해 그들의 안타까운 삶이 구원받는 듯, 그리고 어쩌면 그들만큼이나 고달프게 살아가는, 하지만 착하게 살아간다고 믿는 관객들의 삶조차 구원받는 듯 느껴지는 것이다. 이거야 말로 스크린에서 펼쳐진 씻김굿 아니겠는가.

카스트 제도의 국가 인도, 층위를 이루는 계급들은 날 때 부터 정해져 있고, '자본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물론 예전과 같은 대우는 아니지만 카스트를 통해 세습된 부가 교육과 부의 세습으로 이어져 또 다른 고착화가 사회적 계급으로 형성되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타고난 신분적 층위가 없는 우리 사회에서 '불가촉천민'이란 이유만으로 여러가지 사회적 제약이 있는 인도인들의 삶이란 이해되기 힘들다. 그러나 그 이해되지 않는 카스트의 배경에는 현세의 보상을 넘어선 종교적 내세관의 무한한 세계가 있다. 그 세계가 바로 현실의 고통을 수긍하고 다음 생의 구원을 약속한다. 장황하게 남의 나라의 신분제에 대해 서두를 연 것은 <신과 함께>를 보고 나온 후 든 소감이 바로 힌두교의 장대한 종교적 세계를 기반으로 한 카스트 제도를 경험한 듯했기 때문이다. 

이제 더는 한 개인, 가족의 가난이나 불행이 개인의 노력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보상받지 못하는 또 다른 계급 사회 대한민국, 그곳에서 어린 시절 자홍의 가족들은 흡사 불가촉천민과도 다르지 않다. 그런 현실을 뼈저리게 자각한 어린 자홍은 극단적 선택을 하려 했었다. 하지만 '착한' 자홍은 차마 실행할 수 없었고, 착한 동생 수홍은 그런 형의 선택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어머니는 마음에 품었다. 그러나 그 어린 시절이 한 장면은 이 가족의 다음 삶을 내내 규정한다. 그리고 정도는 다르지만 돈이 계급이 된 대한민국을 자신의 노력으로 지탱해 나가는 개인들, 가족들이 느끼는 정서는 아마도 자홍이네 가족과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착한 이들의 삶은 '착하면 손해본다'는 우리네 속언에 뿌리깊게 피해의식으로 자리잡고 있고, 자본주의가 고도화될 수록 그 의식은 깊어진다. 

그런 현실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현세에서 손해보지 않고 살아가려 하지만 결국은 착해서 이도저도 아니라는 피해의식이 지배적인 이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을 '위무'하는 건 결국 현실이 아닌 세계다. 마치 인도 카스트 제도 하의 불가촉천민이 다음 생을 기원하며 현실의 고통을 견뎌내듯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현실적 고통의 극한을 겪은 가족을 주인공으로 삼고, 그들의 '구원'을 '환생'이라는 또 다른 현세를 선물하는 방식으로 세속적으로 풀어낸 <신과 함께>는 이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씻김굿'의 형식이다. 

by meditator 2018. 1. 3. 1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