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저 여느 모녀의 이야기와는 다르다.  모녀가 살아왔던 삶의 궤적이자, 동시에 모녀가 살아왔던 세상의 이야기이고, 활동가였던 모녀가 gmo에 대항하여 싸워왔던 투쟁의 기록이다. 

 

 

gmo 세상, 그 기록의 시작 
그 시작은 아장아장 걷는 아기의 모습을 담은 홈비디오에서 시작된다. 엄마의 정원을 위태로운 걸음으로 누비는 아기, 갓 수확한 콩깍지의 콩을 맛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유독 먹을 것을 좋아하던 아기는 그렇게 '식료품점'이라는 뒤뜰 정원에서 엄마가 기른 맛난 재료들로 만든 풍성한 음식들을 먹으며 자라났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음식을 좋아하고 그래서 만들기를 좋아하던 아이는 음식을 만드는 블로그를 꾸리고 그 영상을 만들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그 재료가 문제였다. 엄마는 수천년 동안 우리의 농부들이 그래왔듯이 뒤뜰 정원에서 한 해 동안 키워낸 농산물의 씨앗을 저장하여 다음 해 농사를 지어왔다. 하지만 도시로 나온 딸이 만난 재료들은 어머니가 키웠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녀에게로 왔다. 그 수상한 식재료의 의문이 어머니가 보내주신 gmo 관련 서적에서 풀려나갔다. 

1956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사회 정의에 앞장섰으며 환경단체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딸이 태어난 이후에는 유기농 농사일을 하셨다. 하지만 여전히 엄마의 레이더는 세상을 향해 열려있었다. 그리고 그 열려진 레이더에서 발사한 날카로운 비판의 전파는 고스란히 딸에게 전달되었고, 그 어머니의 그 딸은 그걸 기록했다. 

1996년 캐나다에 처음으로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유전자 변형 생물)가 도입되었을 때부터 어머니는 반대을 하셨다. 그 이유는 뒤뜰에서 수확한 씨앗과 달리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씨앗이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gmo, 유전자 조작의 책임질 수 없는 결과 
그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딸인 오브 지룩스 감독은 우선 gmo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전문가 들을 찾아 나선다. 대표적인 gmo 농산물에는 옥수수, 콩 등 가공 식품의 70 % 이상을 차지하는 식물군들이다. 이들은 곤충과 잡초에 잘 견디는 제초제에 내성이 있거나, 살충 물질을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유전자를 변형시킨다. 즉 결국은 유전자를 변형한 이들 식물들로 인해 농사는 보다 용이해지고, 각종 병해로 부터 안전해지고, 많은 수확량을 낼 수 있다는 것이 gmo 농산물을 확산시키는 쪽의 입장이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건 바로 GMO의 다면 발현성 효과이다. 즉 우리의 과학 기술은 아직 GMO가 만들어 낼 수도 있는 예측 불가능한 결과에 대해 정확한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실험실에서야 콩에 돼지 유전자를 결합하든 어떻게 하든 얼마든지 새로운 그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그걸 먹이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반대자들은 주장한다. 이런 무리한 유전자의 변형이 심각하게는 우리 인간 생명체 고유의 유전적 특징을 변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장기적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은 발암 물질로 판명된 글리포세이트처럼. 따라서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낼 이 GMO에 대해 소비자들의 주장은 기본적이다. 자신들에게 GMO에 대한 선택권을 달라는 것이다. 즉 대부분 가공 식품의 재료가 되는 GMO, 자신들이 사는 물건들에 GMO가 들어있는지 알고 선택할 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GMO를 도입한 정부 등은 그런 '알 권리'가 대중들 사이에 외려 있지도 않은 공포를 조성한다며 GMO 사용 여부 공개를 반대해 왔다. 

GMO와 관련된 국제 기구의 53개 권고 사항 조차 제대로 지켜지고 있지 않은 미국과 캐나다가 GMO 표시제에 대해 완고한 반대의 입장을 고수한 반면, 2000년대 광우병 사태를 겪은 유럽은 그 여파로 분위기가 달랐다.  프랑스에서는 발바리안 농부들의 시위를 기점으로 gmo 표시제에 대한 대중적 공감대를 확산해 갔으며 그건 딸의 영상에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는다. 11살의 나이로 '아이들의 알권리'라는 단체를 만들어 자신들이 먹는 음식에 알 권리를 주장하는 사회 운동을 벌인 미국 소녀 레이첼이 어른이 될 때까지의 활동도 담겼다. 모유에서 검출된 글리포세이트(제초제의 한 종류)에 분노하여 EPA(미국 환경 보호청) 앞에서 시위하는 1만명의 엄마들도 취재했다. 오브 지룩스 감독의 <조작된 밥상>은  캐나다와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 벌어진 GMO 반대 운동의 10년을 꾸준히 담아낸다. 

오브 감독의 어머니처럼 해마다 자신이 기른 농산물 중에 씨앗을 저장하여 다음 해 농사를 짓던 농가들은 다국적 종자 기업과 그에 기반한 정책에 의거 대량 생산을 빌미로 gmo 씨앗을 '기술 사용 동의서' 등을 빌미 삼아 기르도록 강제된다. 이런 압박에 버티며 전래의 품종을 고수하려는 소규모 농가는 점점 발을 붙이기 힘들게 된다. 결국 수 마일에 걸친 옥수수 밭으로 상징되는 농촌 사회의 붕괴, 생물 다양성의 파괴만이 오늘날 대부분의 농촌의 모습이다.

오브 감독이 찾아나선 양봉 농가, 놀라운 것은  gmo 종자를 이용해 농사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키우던 벌이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며 수집한 꿀에서 gmo 성분이 발견된 것. 즉 유기농 농사를 짓는다 해도 주변 농장에서 gmo 작물을 키운다면 얼마든지 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벌의 활동을 통해 보여준다. 이런 오브 감독의 추측은 뜻밖에도 감독의 어머니에게서 '비극적' 결과로 도출된다. 평생 유기농 정원을 꾸려 그곳에서 난 건강한 식단만을 고집해오신 어머니, 하지만 그런 어머니의 뇌에서 암세포가 발견되었다. 감독은 안타까워한다. 어머니는 유기농을 고집하셨지만, 어머니의 주변 농장들로 부터 날아온 gmo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또한 암은 어머니가 유기농 농사를 시작하기 이전 2~30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발병의 원인을 가질 수도 있음을. 지룩스 감독 어머니의 비극은 결국 우리는 그 누구도 gmo의 영향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더구나 아이러니한 것은 이른바 '대량 생산'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종자라 선전해댔던 GMO 종자가 '자연의 위대한 저력'으로 인해 좌초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따로 제초제 등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 저비용의 장점을 강조했던 GMO.  이른바 유전자 조작을 통한 잡초 제거 프로그램은 유전자 조작조차 저항해내는 잡초와 병충해들로 인해 오히려 그 전 보다 더 강력하고 많은 비료 등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고비용'의 농산물이 되었음을 <조작된 밥상>은 보여준다. 

거기에 더해 gmo 농산물을 고집하는 측에서는 gmo 농산물이 다수의 인구를 기아로 부터 구해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세계 각국에서 지룩스 감독의 어머니처럼 뒤뜰 식품점을 통해 '먹거리'를 생산해 내는 '소농'이 세계적 생산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반전의 사실도 영화는 놓치지 않는다.

 

 

10년의 기록, 빛나는 성취는 아니지만 
영화 속 지룩스 감독은 영화가 진행되는 그 10년 동안 꾸준히 캐나다 정부와 통화를 시도한다. 그 내용은 캐나다 정부에서 공인한 GMO에 대해 과연 책임감있는 답변을 해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한 이래, 끝날 때까지 그 10년 동안 일관되게 캐나다 정부는 대답을 회피한다. 

캐나다만이 아니다. 2016년 미국의 버몬트 주에서는 미국내 최초로 GMO 라벨을 붙이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물론 이 과정은 쉽지 않았다. 시민들이 깨어가는 과정만큼이나 몬산토 등 거대 기업의 자본을 통한 로비는 치열하고 집요했다. 덕분에 우세하던 입장은 결국 거대 기업이 장악한 미디어의 광고 등을 통해 매번 현혹되고 몇 년에 걸친 시도 끝에 어렵사리 민주주의적 성취를 이뤄냈다. 그러나 어둠의 힘은 결국 이 결정을 뒤집고 만다. 

<조작된 밥상>이 귀결되는 곳은 민주주의에 대한 물음이다. 제인 구달은 결국 이런 gmo의 문제가 진정한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진다고 말한다. 즉 거대 기업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정책, 돈의 논리에 따라 결정되는 국민의 생명권이 전혀 미래 세대를 고려치 않는 현실을 과연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거대 기업의 이익을 대표하는 이들이 과연 우리의 대표자인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이다. 10년을 경과하며 64개국에서 GMO 표시제가 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버몬트 주의 결정이 뒤집혀 지듯이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아직 자신들이 먹는 먹거리의 실체를 알 수 없다.  

또한 문화의 인간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것을 생산하자는 GMO 농산물의 수확이 과연 '인간적'이냐고 묻는다. 저비용도 아니고, 몇 가지의 획일적 품종 생산으로 다품종의 풍성한 농사 체계를 망가뜨리고, 나아가 농촌 사회를 해체시키고, 유기농조차 여의치않은 '금권'의 제국이 되어버린 전세계의 GMO 생산 체제, 그곳에  '인간'이 낄 여지는 없다는 것을 발로 뛰는 '취재'를 통해 밝혀낸다. 

감독이 영화를 완성하기 전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지금의 딸처럼 커다란 안경을 쓰고 어린 딸들과 함께 유쾌하게 정원을 가꾸시던 싱그러운 젊음의 어머니, 그 어머니는 결국 암으로 사랑하던 자신의 정원을 떠났다. 그러나 어머니의 정원에서 키운 노란 완두콩으로 엄마의 레시피에 따라 만들어진 스프를 통해 어머니의 존재는 되살아나고, 어머니와 딸은 이어진다. 누구든 음식에 대해 알 권리가 있으며 이를 위해 기꺼이 싸워야 한다던 어머니 잘리 지로, 그녀의 유지는 아직 미완의 투쟁이지만 중단없는 여정이었던 10년의 기록을 통해 '모전 여전'을 증명해 낸다. 그렇게 조작된 밥상은 어머니와 딸의 중단없는 싸움의 기록이자, 전세계 GMO 반대 투쟁의 기록이다. 지난한 싸움은 이렇게 같은 곳을 바라본 모녀로 부터 시작되었다. 



by meditator 2018. 11. 3. 06:23

'시작은 미미했으나 그 끝은 창대했다'는 문구야 말로 11월 1일 막을 내린 <손 The guest>에 가장 어울리는 상찬이 아닐까. 1회, 1.575%로 시작하여 16회, 자체 최고 시청률 4.073%로 마무리지었다. 4%의 수치로만 보자면 이젠 케이블도 10%, 15%를 오르내리는 시절에 높다고 말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르 드라마 위주의 ocn, 그 중에서도 새로이 편성된 주중 수목 밤 11시에, 도저히 무서워서 못보겠다는 사람들이 나왔던 엑소시즘에 대한 이야기를 호기롭게 풀어내어 도달한 성취로 보자면 장르물의 '도깨비' 급이라 하면 좀 과장일까. 하지만 시청률이 무색하게, 매 회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등장인물, 혹은 등장 인물과 관련된 단어가 검색어에 오르내리는 건 여사가 된 '화제성'으로 보자면 꼭 과장은 아닌 듯하다. 당연하다는 듯이 벌써 시즌 2에 대한 기대감이 오르내리는 <손 the guest>, 이 드라마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호러, 그 화려한 서막 
<손 the guest>의 성취를 논하기 위해 우선 이 드라마와 나란히 호러 장르에 도전장을 낸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겠다. 올 여름 호기롭게 '호러'에 도전한 드라마들이 있었다. kbs2는 월화, 수목 야심차게 호러 장르물을 편성했다. 10월 2일 종영한 <러블리 호러블리>와 10월 31일 종영한 <오늘의 탐정>이 그 주인공들이다. 하지만 두 드라마 모두 낮은 시청률로 조용히 막을 내렸다. 시청률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들 두 드라마가 보여준 건 무엇보다 아직 kbs2가 장르물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즉 이는 역설적으로 <손 the guest>가 보여준 축적된 장르물의 성과를 말해준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할 때 김홍선 감독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일찌기 2007년 <도시 괴담 데쟈뷰 시즌2>를 시작으로 <조선 추리 활극 정약용(2009)>, <야차(2010)>, <무사 백동수(2011)>, <히어로(2012)>, <라이어 게임(2014)>, <피리부는 사나이(2016)>, <보이스 1(2017)>에서 이제 2018년 <손 the guest>까지 작품이 곧 우리 장르물의 역사가 된 김홍선 감독, 그가 그간 꾸준히 쌓아온 장르물의 성과가 <손 the guest>를 통해 화려하게 빛을 발한다. 

김홍선이라는 장르 
이미 < 도시 괴담 데쟈뷰>, <조선 추리 활극 정약용>, <히어로> 등을 통해 호러적 영역에 대해 꾸준한 시도를 해오던 김 감독은, 그가 연출했던 장르물의 축적된 성과를 <손 the guest>를 통해 유감없이 발휘했다.  하지만 이 찬사는 어쩌면 <손 the guest>에만 쓰기에는 무색할 지도 모른다.

 

 

이미 <무사 백동수>를 통해 거친 남성적 액션, <라이어 게임>을 통해서 리얼리티가 된 게임의 세계, 그리고 <피리부는 사나이>에서는 도심 테러와 그에 대응한 위기 협상, <보이스1>에서는 112 센터를 중심으로 한 소리 추격 스릴러처럼 어찌 보면 <손 the guest>의 엑소시즘은 새로운 도전이지만, 늘 장르물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던 김홍선 감독이기에 당연한 것이 되었다.  늘 그의 애청자들은 <라이어 게임>에서도 제발 시즌2를, 그리고 <보이스 1>에서도 당연히 <보이스 2>를 '고소원'했지만, 김감독은 그런 애청자들의 간청을 즈려밟고 좀 더 신선하고 흥미진진한 장르물의 세계로 시청자들을 인도했고, 그 결과물로 이제 우리는 <손 the guest>를 만나게 되었다.  즉 <손 the guest>는 새로운 장르이지만, 김홍선이라는 장르의 여정 속에서 만난 한 작품이며, 앞으로 더 무시무시한 그 무엇으로 인도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바로 <손 the guest>의 성취 그 제 1요인이다.  이런 김홍선 감독의 내공을 입봉작으로 장르물을 주체하지 못한 <러블리 호러블리>나, 역시나 장르물에는 신인이나 다름없는 <오늘의 탐정>이 어찌 넘볼 수나 있었겠는가. 

그런 김홍선 감독이 있었기에, <안투라지(2016)>의 서재원 작가가 역전 만루 홈런을 날릴 수 있었고, 김동욱이, 김재욱이, 그리고 정은채가 자신의 몸에 맞는 캐릭터를 통해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즉, <손 the guest>는 서재원 작가를 비롯하여, 배우 김동욱, 김재욱, 정은채를 재발견하게 해준 작품이다.  아쉬운 점은 있지만 그래도 엑소시즘에 대한 알찬 구성과 전개를 통해 전작의 오명을 거뜬히 삼키며 차기작에 대한 기대를 부풀리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원티드>를 통해 장르물 작가로의 기대주가 되었던 <오늘의 탐정>의 한지완 작가의 부진과 비교된다. 

 

 

배우들, 그리고 
마찬가지로 <신과 함께>를 통해 저렇게 연기 잘 하는 배우를 왜 그동안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없었는가 라는 평이 대부분이었던 김동욱에게 제대로 찾아와준 기회, 그리고 이미 <보이스 1>를 통해 압도적인 존재감이 빛을 발했던 김재욱의  앙상블, 거기에 초반 연기력의 논란이 무색하게 '길영이 형'이란 애칭으로 사랑받았던 정은채까지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고 빛난 배우들의 호연, 그리고 그런 주인공들에 못지않게 그들에게 기꺼이 기립 박수를 보내고 싶었던 매회 혼신의 열연을 선보인 박일도에 빙의됐던 출연자들의 콜라보레이션이 <손 the guest>를 화려하게 피어오르도록 했다. 

감독, 배우, 하지만 <손 the guest>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장르 드라마를 장르 드라마답게 만드는데 주된 충분 조건이 된 음악과 음향과, 조명, 미술까지, 아니 어쩌면 출연자들보다 더 장르물다웠던 이들 기술 음향 팀의 열일이 엑소시즘 드라마의 성공을 이끌어 냈다. 우리의 전통 신앙인 샤머니즘과 외래의 엑소시즘의 결합을 굿판의 꾕과리와 결합된 ost를 통해 긴장감을 더했고, 붉은 색과 푸른색 등 보색의 절묘한 조합을 통해 장르물의 색감을 화려하게 재탄생시켰다. 즉 드라마가 종합 예술이지만 장르물의 경우 각 영역의 호흡이 무엇보다 중요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손 the guest>의 성취는 바로 이런 축적된 성과와 제 역량을 한껏 발휘한 각 영역의 성공적 결합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점이다. 

 

 

엑소시즘과 샤머니즘, 그 난제의 절묘한 해석 
시작은 바다로 간, 아니 바다로 부터 온 '손'이었다. 박일도라는 이름을 가진 귀신, 그에 빙의되어 한 세습무 집안이 풍비박산나고 만다. 그로부터 20년 그 사건으로 어머니와 할머니를 잃고, 아버지 마저 집을 나가 떠돌게 되어버린 윤화평(김동욱 분)은 박일도를 찾아 떠돌고, 역시나 박일도로 인해 가족이 몰살당하고 사제가 된 최윤(김재욱 분), 역시나 엄마를 잃고 형사가 된 강길영(정은채 분)와 만나게 되는데. 이렇게 손 박일도로 부터 비롯된 샤머니즘은 구마 사제의 등장을 통해 엑소시즘과 접신하고, 거기에 형사와의 협업으로 수사물의 형식을 더하며 극적인 긴장감을 이끌어 낸다. 

드라마는 최윤을 걱정한 윤화평이 박수 무당 육광에게 부적을 써서 최윤의 바지 주머니에 끼워 넣고, 마지막 회 구마 의식 과정에서 전달된 십자가가 영매가 된 윤화평의 목에 걸려있듯이 전통의 샤머니즘과 외래의 엑소시즘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간다. 빙의된 박일도를 쫓기 위해서는 엑소시즘의 구마 의식이 필요하지만, 박일도, 그로 비롯된 얼키설키 악연의 계보는 '전설의 고향' 속 한 장면과도 같다. 즉 외국 영화를 통해 익숙하지만 그럼에도 장르물의 소재로는 낯선 엑소시즘을 드라마는 전래의 샤머니즘적 요소와 설화와 같은 박일도 집안과 주변 인물을 통해 설득해 낸다. 

또한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사회에서 소외된 왕따 직장인, 계약직 사원 등을 통해 '악의 사회적 근원'을 파헤쳤으며, 나아가 양신부(안내상 분), 박홍주(김혜은 분)를 통해 '빙의'를 넘어선 '사회적 악'의 존재를 설파했다. 박일도로 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박일도를 불러들일 수 밖에 없는 사회를 통해 2018년의 시대적 공기를 담뿍 담아낸다. 

 

 

그렇게 낯선 엑소시즘 장르를 전통과 사회적 메시지를 통해 오늘에 맞게 재탄생시킨 <손 the guest>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역시나 16작의 호흡은 너무 길었던 것일까? 마치 양신부가 할아버지를 납치(?)하여 요양원에 이르는 과정, 그리고 요양원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을 '현혹'하여 빙의자들의 피의 카니발을 벌이는 장면은 마치 할로윈 특집이나, <새벽의 저주>나, <워킹 데드>의 한 장면을 보는 듯이 서사적 연결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또한 결국 최후 드러난 박일도의 존재와, 그의 그간 행적을 마지막 회에서 줄줄이 설명할 수 밖에 없는 구성의 아쉬운 점도 상찬 속의 티일 수 밖에 없다. 거기에 반전을 위한 카드 때문이었을까, 스스로 십자가를 부정하고, 성경을 부정했으며 악의 오른 팔이 되어 그토록 많은 이들을 제물로 삼았던 신부의 '자유'에 대한 개연성은 어쩐지 고개가 갸웃해 진다. 

하지만 그 갸웃해지는 혹은 아쉬워 절레절레했던 서사와 구성 상의 단점들이, 물 속에서도 서로의 목숨을 걸고 살리기 위해 손을 잡아 애원의 구마를 하고, 그를 구하기 위해 손을 놓고 스스로 자신을 죽여가는 배우들의 열연의 감동 속에 허물어져 버린다. 아쉬운 점을 접은 채 <손 the guest>와 함께 한 모든 이들에게 영광의 박수로 보내며 마무리짓고 싶게 드라마는 시청자를 설득해 냈다. 

by meditator 2018. 11. 2. 14:00

미디어 콘텐츠 산업의 발전은 그 '정점'에 놓인 '스타'로 인해 더욱 빛을 발한다. 1937년부터 만들어 지기 시작한 <스타 탄생>은 거듭된 리메이크 작을 통해 '그들의 영광과 그림자'를 반추한다. 1954년, 1976년, 그리고 드디어 2018년 명멸하는 한 쌍의 스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스타로써의 삶은 마치 축약된 인생과도 같다. 제 아무리 발버둥쳐도 인생이 '생로병사'의 그래프를 벗어나지 못하듯이, '스타'의 길 역시 길고 짧은 차이일 뿐 그 궤적을 벗어나지 못한다. 대중들은 '스타'를 상품으로 '소비'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로운 상품에 눈을 빼앗긴다. 정점에서 벗어난 길에 놓여진 스타는 그것이 그로 부터 비롯되었던지, 아니면 대중의 변덕이었던지 고스란히 자신의 몫으로 짊어진 채 나머지 길을 하산해야 한다. 

엇갈린 영광의 여정
1937년작 윌리엄 웰만 감독이 당대 최고 배우였던 자넷 제이슨, 프레데릭 마치와 함께 만든 <스타 탄생>이래 영화는 그 정점의 고갯마루를 달리 오르내리게 된 '비극의 연인'을 한 이야기 속에 담는다. 

 

 

한 편의 뮤지컬과도 같았던 1954년작 <스타 탄생>은 당대 최고의 뮤지컬 배우였던 주디 갈란드의 노래와 춤으로 충만한, 말 그대로 당대 최고 뮤지션의 빛나는 무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지금도 기억되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에버 그린' 등으로 추억되는 1976년작에서도 이어진다. 그리고 2018년 역시나 최고의 뮤지션인 레이디 가가가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  화려하면서도 센세이셔널한 아이디어와 분장, 패션으로 늘 화제의 중심이 되었던 레이디 가가가 그녀를 가렸던 메이크업을 지운 채 외모에 자신이 없는 무명 가수 엘리를 연기한다. 

하지만 '탄생'되어지는 스타의 맞은 편엔 그녀를 '스타'로 만들며 져가는 또 다른 '스타'가 있다.  1대의 프레데릭 마치에 이어, 제임스 메이슨은 배우로, 그리고 70년대의 컨트리 스타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그 뒤를 이어 2018년 <스타 이즈 본>으로 감독 데뷔한 브래들리 쿠퍼의 잭슨 메인이 몰락해 가는 팝스타를 열연한다. 

열화와 같은 관중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무대를 장식한 톱가수 잭슨, 하지만 공연이 끝나자 마자 그를 '허기'를 채우듯 '술'을 찾아 거리를 헤맨다. 그러다 급하게 들어간 조그만 바, 그곳에서는 남장 여자들이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런데 그곳에 유일한 여성이 한 명 무대에 올라 '장미빛 인생'을 부르고 잭슨은 그녀의 노래에 빠져든다.

그리고 함께 한 시간, 잭슨은 재능이 넘치는 엘리로 인해 마모되어 가던 열정이 되살아 나고 , 그리고 무대가 아닌 곳에서도 스타로 소비되는 잭슨에 대해 엘리는 연민을 가지며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 엘리에게 자신과 함께 무대에 서줄 것을 청하는 잭슨, 엘리는 그런 잭슨의 청이 그저 스타의 농담처럼 여겼지만 결국 집요한 잭슨으로 인해 무대에 올라 그와 함께 노래를 부르며 '스타 탄생'을 알린다. 

 

 

짧은 영광, 긴 그림자 
일취월장 잭슨과 함께 한 엘리에서, 이제 팝가수로 자신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휘날리기 시작하는 엘리, 하지만 그런 엘리의 곁에서 잭슨은 허물어져 간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온 오디오의 소리에 매료되어 그 속에 머리를 집어 넣었던 것이 그만 치명적인 장애가 되어 청력의 이상을 느낀지 오래, 의사는 그에게 큰 소리를 멀리 하고 보조 장치를 장착할 것을 처방하지만, 섬세한 음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잭슨은 이를 거부한다. 환청처럼 그를 괴롭히는 이명을 벗어나기 위해 그가 의지한 건 술, 아니 비단 신체적 장애만이 아니다. 

자신을 낳고 죽은 엄마, 일찌기 술주정뱅이였던 무능력한 아버지, 심지어 자신의 자살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삶의 방관자였던 아버지,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음악적 인생을 접은 형, 그리고 그 어느 곳에서도 '잭슨'이라는 인간보다 스타로 소모되어져야 하는 일상 들이 그를 어느덧 술이 없으면 단 한 순간도 버틸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엘리의 등장은 잠시 그를 맑게 만들었지만, 허물어져 가는 그를 '사랑'이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앞서의 <스타 탄생>, 그리고 2018년작 <스타 이즈 본>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 영화는 당대 최고의 여성 아티스트를 내세우며 한 무명의 여성 가수가 재능의 힘으로 정상의 자리에 등극하는 과정을 그러낸다. 그에 덧붙여 배우 브래들리 쿠퍼가 연출한 2018년작은 몰락하는 팝스타 잭슨 메인에 또 다른 방점이 찍힌다. 

 

 

29살 이후 '태업'이라며 금주를 실천하고 있지만, 쉽게 나아지지 않았던 초창기 시절 약물 중독과 우울증으로 자살 시도까지 했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듯, 허물어져 내리는 잭슨 메인의 '자아 상실'의 과정이 절절하게 그려진다. 잭슨은 무대에 서면 수만 관중이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스타이고, 홀로 거리의 술집에 들어서는 것조차 쉽지 않은 '개인'의 삶을 저당잡힌 인기인이다. 대중들은 그의 음악을 사랑하지만 무너져 가는 그에 대해서는 냉정하다. 

지난 일요일 sbs를 통해 방영된 <아이돌이 사는 세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무대를 내려온 '별'들을 기다리는 건 개인으로서의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삶일 뿐이다. 자신을 만났음에도, 아니 만난 이후로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져 간 잭슨에 대해, 그리고 결국은 엘리에게 부담만이 된 자신을 견딜 수 없어 최악의 선택을 한 잭슨으로 인해 엘리는 고통받는다. 그런 엘리를 찾아온 잭슨의 형은 덤덤하게 말한다. 잭슨이 가고 없는데도 잭슨을 추모하는 음악이 거리에 울려퍼질 때 화가 났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 그렇게라도 기억될 잭슨이라니 헛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지만 잭슨 개인으로 보자면 그의 삶은 사는 내내 그를 괴롭혔던 아버지, 그리고 부담이 되었던 형, 그리고 애증이었던 엘리 그 누구도 아닌 잭슨의 책임이라 위로한다. 결국 관객은 스스로 되묻게 된다. 음악으로만 남은 잭슨의 인생을. 

사실 브래들리 쿠퍼와 레이디 가가가 보여준 이른바 '케미'와 별개로, 두 사람이 연민처럼 시작한 사랑은 끄덕여졌지만, 끝끝내 처절하게 무너져 내리는 잭슨에 대한 엘리의 사랑은 곡진했지만 헐거웠다. 외려 <스타 이즈 본>이 보여준 건, 영광의 자리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채 좌초한 잭슨이라는 스타와, 무명 가수에서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파고를 넘어서 스타로 거듭나는 엘리라는 캐릭터가 보여준 '인간'의 모습이다.  

by meditator 2018. 10. 31. 20:36

남북 정상은 9월 평양 공동 선언을 통해 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를 빠른 시일에 개소하고 이를 위해 면회소 시설을 조속히 복구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이산 가족 상봉의 정례화, 그 물꼬가 터졌다. 그에 앞서 8월 20일에서 26일에는 2015년 10월로 부터 무려 2년 10개월만에 이산 가족 상봉이 이루어 졌다. 양국 정상의 상시적 이산 가족 상봉에 대한 '선언', 그에 앞서 모처럼의 이산 가족 상봉 행사, 이렇게 모처럼 남북 이산 가족의 오랜 해원이 정치적 해빙에 발 맞추어 풀려나갈 조짐이 보이고 있다. 이런 즈음에 ebs 다큐 시선은 왜 우리가 더 늦기 전에 이산 가족 상봉을 서둘러야 하는 가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 들어간다. 바로 2%의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상봉 가족들의 또 다른 아픔을 통해서다. 

 

 

조속한 이산 가족 상봉이 필요한 이유는? 
교동도, 강화도 북서부에 있는 섬, 이곳은 북으로부터 불과 2~3km 떨어진 섬이다. 갓난아기의 엄마는 시체들이 즐비한 북을 도망해 수심이 낮은 때 배도 없이 이 섬 저 섬을 건너 이곳으로 왔다. 배를 타면 10이면 북에 닿는 곳이다. 그 '조금' 떨어진 이곳으로 '잠깐' 피신해온 것이 70년의 세월이 되었다. 가족과 함께 피란온 소년은 고향집에 숨겨둔 놋그릇을 가져오겠다며 다니러 간 어머니와 누님을 그때이후로 보지 못했다. 그렇게 가족들과 헤어진,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동도에 남겨져 있다. 고향이 그리워 '북'으로 창을 내고 그곳으로 머리를 두고 잠이 들어도 영 꿈에서 조차 만나지 못하는 어머니, 그 어머니가 그리워 다 큰 아들은 여전히 술만 마시면 어머니를 부르며 그 일곱 살 아이처럼 뒹군다. 하지만, 이제 낼 모레 팔십을 바라보는 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향이 바라보이는 망향대에 올라서는 일.

 

 
 

 

이렇게 잠깐인 줄 알았던 세월이 70여년이 흐르는 동안 이산 가족 1세대들은 많이 세상을 떠났다. 이번 이산가족 상봉자로 정해졌던 사람들은 93명, 하지만 그중 4명이 고령의 나이로 고향의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7월말 기준 생존해 있는 이산 가족들은 5만 6000여 명., 그런데 생존해 있는 이산 가족들 중 85% 이상이 70대가 넘는 고령들이시다. 현재 한 회에 90~100 명에 이르는 이산가족 상봉 인원수, 이 인원대로 한다면 600회 가까이 이산 가족 상봉이 이루어져야 남은 생존자들이 가족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 '시간'을 고령의 생존자들이 견딜 수 있을까? 그러기에 이분들이 생존해 계시는 동안 고향의 가족들을 만날 수 있도록 '조속히' 이산 가족 상봉이 이루어져야 한다. 



2%의 기적, 그 휴유증
보통 이산 가족 상봉을 2%의 기적이라 한다. 신청한 사람들 중 2%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상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기적'을 이룬 사람들은 여한이 없을까? 하지만 막상 다시 찾아본 상봉 가족들에게는 뜻밖에 휴유증이 심각했다. 

누님은 원산 방직 공장에 돈을 벌러 떠났다. 그리고는 삼팔선이 막혔다. 칠월 칠석이 생일이던 누님, 늘 어머님은 살아만 있으라 정한수를 떠놓고 비셨다. 그 누님이 돈 벌러 떠나던 때 황보우영 씬(69)는 어머니 등에 업힌 갓난쟁이였다. 당연히 어머니의 기억을 통해서만 전해진 누님. 그런 누님을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통해 만났다. 기억도 없던 누님, 하지만 그렇게 누님을 만나고 돌아와 황보우영씨는 살이 몇 kg이나 빠졌다. 찰라와 같은 만남의 아쉬움이, 다시 볼 수 없다는 그리움이, 누님에 대한 걱정과 함께 황보우영 씨를 우울증에 빠져들도록 했다. 

 

 

그해 스무 살의 새신부였던 이순규 할머니(87), 겨우 7개월 남짓의 결혼 생활, 남편은 몇 달간만이라던 말이 무색하게 돌아오지 않았다. 이순규 할머니의 뱃속엔 당시 3개월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고, 아이는 기특하게도 7살 무렵 왜 아버지는 오시지 않냐는 질문 한번을 끝으로 아버지를 묻지 않은 채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제사도 지냈다. 한 켤레의 구두로만 남은 남편과 아버지의 추억, 그런데 기적처럼 북쪽의 아버지 오인세 씨의 생존이 전해졌다. 그리고 며칠 간의 만남, 돌아온 아들은 헤어나올 길 없는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는다. 한번도 보지 않았던 아버지, 그 아버지를 자신만의 생각으로 그렸던 아들은 막상 눈 앞에서 만난 쪼그라든 노인인 아버지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40년간 그리워했던 마음은 '홧병'처럼 돌아왔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기적의 시간을 가진 이산 가족 상봉자들, 하지만 그 결과는 '기적'처럼 행복하지 않았다. 안부조차 제대로 물을 수 없는 '행사'의 시간들, 그 시간을 꿈처럼 겪어낸 가족들은 대비하지 못한 만남의 휴유증을 앓는다. 불면증, 무력감, 건강 악화, 우울증 등 상봉 후 후유증을 앓는 가족들이 24%에 달한다. 상봉 후 기쁘지 않다는 답을 한 가족들도 39%에 달한다. 그 이유는 자신은 그래도 남한에서 편하게 사는데 고생하며 사는 것같은 모습에, 안부조차 제대로 물을 수 없었던 짧은 만남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생이별의 아픔이 상봉 가족들을 다시 고통 속에 빠뜨린다. 

이에 대해 전문가는 그저 '이벤트성 행사'를 넘어 사전에 상실감 등 휴유증에 대한 교육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교육만으로 다시 생이별의 아픔을 감내할 수 있을까? 결국 답은 하나다. '정치적 목적'으로 치뤄졌던 이산 가족 상봉, 이제 1세대 상봉자들이 거의 세상을 떠나는 현실에서 더는 미루지 않고 '인도적' 차원에서의 이산 가족 상봉이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며칠의 만남이 아니라, 보고싶으면 언제라도 만날 수 있는, 따뜻한 밥 한 끼를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그런 상설적인 만남이 시급하다. 그러기에 이산 가족 상봉 정례화는 더 늦기 전에 구체화되어야 한다. 

by meditator 2018. 10. 26. 18:38

피곤하다,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하다. 늘 눕고만 싶다'. 아마도 이런 증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 증상은 심해진다. 마흔 줄에 들면, 상습적인 고질병이다. 그러면 생각하게 된다. '나도 늙었구나',하고, 정말 그럴까? 

원래는 진짜 (체력이) 좋았어요
몸에 근력도 많은 편이고 해서 (체력이) 좋은 편이었는데 
40대 들어가면서 부터 계속 안좋다고 하더라구요. 
                               -생존 체력 도전자 임창묵 씨 아내 인터뷰 중


피로 사회의 원인은? 
다큐의 주인공들은 '만성 피로'에 시달리는 마흔 줄의 남성과 여성들이다. 단숨에 지하철 노선도를 외워제끼던 마흔 중반의 강성범씨, 당연히 이젠 이호선만 외우는 것도 벅차다. 잊어버려서가 아니라 숨이 딸린다. 그의 일상은 스케줄이 없으면 '침대', 모닝 커피도 아내가 대령할 정도로 웬만해선 일어나지 않는다. 딸 둘의 아빠 임청묵씨, 이제는 부쩍 자라 활동성이 많아진 아이들과 놀아주는게 여간 곤욕이 아니다. 결국 조금 놀아주다 리모컨을 쥐어주고, 소파에서 숙면을 취해버리는게 그의 일상이 된 이른바 '1회용 체력'이다.

내년이면 마흔, 프리랜서 통번역 전문가이자 대학 강사인 서지연씨 하루 네 시간의 출퇴근은 물론, 서울, 경기를 종횡무진하던 거칠 것없는 강철 체력의 소유자라던 별명이 무색하게 이젠 열일을 제치고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버린다. 학창 시절 선생님 등에 업혀 겨우 등산을 한 이래 산을 가본 적이 없으며, 윗몸 일으키기 같은 건 꿈도 꿀수 없는 이른바 '모태 저질 체력'의 김보라씨, 이제 겨우 마흔이지만 앉을 자리를 위해 지하철을 보내고 아이들과 함께한 현장 학습에서 돌아오면 앓기가 일수이다. 

 

 

이들 네 사람의 공통점은 조금만 움직여도 힘이 들고 지치며 늘 피곤에 시달린다는 것. 불혹의 나이 마흔이 이들을 이들의 체력을 '방전' 시켰을까? 다큐는 이들에게 '국민 체력 테스트'를 시켜보았다. 

 

 
그 결과 네 명 모두 3등급에도 들지 못하는 등급 외 판정, 결국 그들의 '피로'는 '나이'가 아니라 '체력'의 문제였다. '나이'가 들어서 '체력'이 약해진 걸까? 흔히 방송에도 등장하는 '신체 나이'처럼 '나이'와 '체력'은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다큐 후반에 등장한 올해 60의 의사 선생님은 역시 몇 년 전만 해도 '헬스' 등을 했지만 여전히 '피로'에 시달렸다고 한다. 하지만 운동법을 변화시켜 '기초 체력'을 키우는 운동을 통해 이젠 나이 운운이 무색하게 '피로'를 느낄 새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운동 
다큐가 주목하는 건, 바로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운동'이다. 오늘날 사회에서 '자존감' 등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데, 바로 이 개인의 정신 건강도 '체력'이 따라줘야 한다고 다큐는 말한다. 즉, 자신의 일상 생활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체력이 뒷받침 되어야 삶의 자존도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버텨야 하는 삶, 버티는 힘이 나오는 건 정신력이 아니라, 체력이라 다큐는 강조한다. 

아기 엄마들한테는 아기를 잘 돌볼 수 있는 체력이 먼저 필요하죠. 
무거운 무게를 들고 강하게 펀치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허리가 아프지 않게 아이를 안을 수 있는 체력.
직장인이라면 회의에서 버티고 야근에서 견딜 수 있는 체력.
수험생이라면 공부를 하기 위해 책상에서 버틸 수 있는 체력.
절실한 것들은 다를 거예요. 
그런 절실한 것들을 실행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밑바닥의 체력들,
그걸 '생존 체력'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
                             -생존 체력 운동 이주라 트레이너 인터뷰 중 


다큐에서 실제 김보라 씨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전업 주부이지만 그 일상이 버거웠다. 아이들과 외출이라도 하고 나갔다 들어오면 방전된 체력으로 아이들에게 '폭발'하기가 십상이었고, 건조기에서 꺼내온 빨래는 몇 푼의 용돈으로 아이들 몫이 되었다. 그렇게 일상을 버틸 수 없는 체력은 그녀의 성격조차 신경질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런 김보라씨에게 생존 체력을 키워주기 위해 등장한 트레이너 이주라씨, 하지만 그녀도 처음부터 생존체력 지도자가 된 건 아니었다, 외국 생활 중 견디기 힘든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무조건 걷기 시작했다던 그녀는 '운동'이 정신은 물론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 아래 '생존 체력' 전도사가 되었다. 

 

 

그런 이주라 씨의 지도 아래, 네 명의 출연자들은 각자 체력 조건에 맞춰 생존 체력 운동을 시작한다. 운동이 즐거워야 하는 거라며 운동 가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라던 개그맨 강성범씨에게는 제대로 된 자세로 단 한번이라도 해내는 푸쉬업, 일회용 체력의 임창묵 씨는 두 팔 벌려 지탱하여 엎드렸다 일어서 박수치기를 반복하는 버피 운동, 같은 버피 운동이라도 서지연씨는 강도와 자세를 완화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거 자체가 생소한 김보라씨에게는 바른 자세의 스퀏의 시도부터,  하루 단 10분에서 15분의 운동을 한 달간 꾸준히 시도하고, 그걸 영상으로 기록하도록 하였다. 

겨우 10분 남짓의 운동, 과연 정말 생존 체력은 변화했을까? 약속한 운동을 지키기 위해 공연의 틈틈이, 일상의 틈새에,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예의 익숙한 '으~'하는 신음 소리로 알 수 있게된 하루 일과의 시작으로, 그리고 과연 엄마가 하며 딸들도 동참한 한 달간의 체력 운동은 놀랍게도 출연자들을 변화시켰다. 그저 10분 정도 운동을 했을 뿐인데 서지연 씨는 4kg이나 살이 빠졌다. 임성묵 씨는 소파에 '프렌들리'한 대신 두 딸과 열심히 놀 수 있게 되었다. 김보라 씨는 이사 온 지 몇 년 동안 가볼 생각이 없던 아파트 뒷 산을 올랐다. 

하루 10분의 운동, 기초 체력을 끌어올리는 몸의 코어 근육을 살려내는 '스퀏, 팔굽혀 펴기, 플랭크, 버피 운동'등으로 나이를 핑례로 했던 '피로'가 사라졌다. 결국 문제는 '체력'이었던 것이다. 건강한 신체가 건강한 삶을 돌려줬다. 

체력을 기우자는 이 다큐는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중요하다. 운동이 범람하는 거 같지만, '운동'과는 담을 쌓은 사회. 일찌기 학창 시절부터 그저 학습 과정의 형식적 요건으로 따라가는 운동도 어느덧 입시 위주의 교육 과정에서 '영어' 등 다른 과목에게 시간을 빼앗기기 십상이거나, 체육 시간이라 해도 공부에 지친 신체를 단련시켜 주기 보다 특히 여학생들의 경우 양지바른 곳에 앉아 햇빛이나 쬐는 시간이 되기 십상인 사회.

무엇보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체력'이라는 말과 무관한 삶의 스케줄을 짜도록 강제하는 사회 속에서 마흔 줄만 들어도 체력이 방전되고 마는 사회가 되었다. 나이가 들어 운동을 한다면 헬스 클럽이나 수영장을 가야 하는 거라 생각해거 그게 귀찮아서 운동을 못하게 되는 사회에서 운동은 더더욱 일부 운동 마니아 들의 몫이 되곤 했을 뿐이고. 그러기에 이 기본의 체력을 강조한 다큐가 의미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기자가 고관절에 좋다는 스퀏 몇 번을 해보았다. 그랬더니 이 기사를 쓰는 지금 허리가 짱짱한 거 같은 건 그저 플라시보 효과만은 아닐 것이다. 아, 중요한 건 시간이나 회차가 아니라, 바른 운동 자세이다. 한번이라도. 




by meditator 2018. 10. 23. 16:05

<웰컴 삼바>는 앎에 대한 영화다. 앎이라니 새삼스럽다고. 하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난민 문제가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과연 우리는 그들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알고자 하는가에 질문, 그 기저에 있는 물음을 담고 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희노애락을 가진 '인간'일 뿐이라고 그리고 영화는 답한다. 

 

 

난민 문제를 접한 아들 녀석이 답답해 한다. 이 문제에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과연, 이데올로기적 자신의 편을 넘어 진지하게 '그들'의 존재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라고.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그렇듯, 난민 문제 역시 문제의 대상이 된 '그들'에 대한 앎 이전에, 나의, 우리의 이데올로기가 앞서가버린 사안이 됐다. 그래서 '이해'의 실마리조차 놓쳐버린 상황, 이 즈음에 <웰컴 삼바>는 그 '이해'의 실타래를 풀기 위한 적절한 도움닫이가 될 듯하다. 

호모 사피엔스, 그 본연의 '난민성' 
인간은 척색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사람과에 속하는 생물로 그 중에서도 200여 종에 이르는 영장목의 한 종인 호모 사피엔스 한 종에서 유래되었다. 대략 1만~ 160만년전 지구에 빙하가 출몰했던 홍적세, 평균 1300㎤의 뇌용적, 거의 수직인 이마 모양, 목근육이 붙은 면적이 비교적 작은 후두부, 작은 크기의 턱과 이빨, 주걱 모양의 작은 송곳니, 튀어나온 턱끝, 완전한 직립 자세와 보행 자세에 적응한 사지 등을 특징으로 한 유일한 동종의 동물이다. 

그런데 이 '호모 사피엔스'는 '난민'이다. 시작은 아프리카였지만, 그의 발길은 '지구'라는 땅덩이를 헤집고 다녔다. 가는 곳곳에서 동류의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 등의 같은 영장목은 물론, 아메리카의 버팔로, 모리셔스의 도도새 등을 멸종으로 이끌며 지구별의 주인으로 거듭났다. 과연 호모 사피엔스의 거칠것없는 ''역마살'이 없었더라면 지금 인류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카누와 같은 나무배에 의지하여 인도양을 넘는 호모 사피엔스의 '도전 정신'은 그 시절에는 신대륙의 정복이 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에 이르러 대서양의 '보트 피플', 그리고 난민으로 이어진다. 같은 행위, 다른 결과, 거기엔 '근대의 산물'인 이른바 '국민 국가'가 존재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신봉하는 이 '국가'라는 경계 역시 사실은 '역사'의 산물일 뿐이다. 천년의 역사를 가졌던 로마가 남하하는 게르만 족에게 역사의 자리를 내어주듯이 오늘날 우리가 신봉하는 국가, 국가의 경계라는 것이 결코 고정불변의 가치나 영역이 아니라는 전제를 통해 우리는 '난민 호모 사피엔스'의 종적 개념에 한 발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난민 삼바 
'난민'의 시작은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종교적, 혹은 지역 분쟁, 오랜 가뭄 등의 자연 재해, 하지만 위에서 구구절절 말한 것처럼 '인류의 역사'는 곧 '유동성'의 역사이다. 그 흐름에 따라 사람들은 늘 자신이 보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떠난다. <웰컴 삼바>도 그랬다. 삼바(오마르 사이 분)의 꿈은 자신의 나라 세네갈 호숫가에 집을 지어 평안하게 사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평안'을 위해 그는 지금 이국 프랑스에서 '난민'의 신세로 단속을 피해 10년의 세월을 살아왔다. 아직 집을 짓기엔 이르다. 여전히 고향에는 그에게 돈을 보내라는 독촉 전화를 하는 가족이 있다. 우리가 사는 여느 삶과 다르지 않다. 그게 세네갈에서 프랑스로 옮겨져 왔을 뿐이다. 

하지만 미처 집을 지을 돈을 마련하기도 전에, 아니 프랑스 영주권을 받기도 전에 아뿔사 그만 '단속'에 걸렸다. 10년이나 프랑스에 있었고, 셰프로 일했던 경력이 무색하게 그는 '추방' 위기에 놓인다. 더구나 10년이나 있었지만 삼촌 외에는 일가를 이루지 않았다는 것이 그에게 불리한 조건이 되었다. 억울하지만 이방인인 그에겐 항변의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내려진 결정뿐. 다니던 직장도 잃고, 프랑스인인척 하지만 그래서 더 주목을 받는, 다시 '리셋'된 그의 일상. 

어렵사리 난민 수용소를 나온 삼바는 각종 프랑스의 이방인들이 몰리는 일자리로 나선다. 건설 용역, 유리창 닦이, 쓰레기 분리, 백화점 야간 경비  등 그가 전전하는 일자리, 즉 삼바와 같은 이방의 난민들로 채운 일자리는 '프랑스' 산업의 가장 취약하고 열악한 부분. 삼바의 일자리 전전을 통해 뜻밖에도 우리는 선진 국가 프랑스를 지탱하고 있는 인적 자원이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오늘날 서울 변두리와 경기도 지역의 영세 산업 단지를 채우고 있는 인력들이 누군인가와 같은 맥락의 질문이다. 과연 그들이 없는 프랑스가,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제대로 굴러갈까? 

어색한 정장과 손에 쥐어든 잡지, 그리고 불안한 눈빛, 하지만 그 불안정한 삶에서 그럼에도 일관된 건 삼바라는 사람의 진정성이다. 난민 수용소 동료의 연인에게 흔들린 그 잠시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북아프리카 출신의 국적을 브라질이라 속이는 동료에게 이질감을 느끼며, 고지식하게 일자리를 찾고 쫓기며 여전히 고향의 어머니에게 걱정마시라하고, 그에게 호감을 느낀 앨리스(샤를로뜨 갱스부르 분)의 '번아웃'을 따스하게 위로하는 삼바는 '난민'이라는 이름표를 떼어내고 나면 우리 이웃의 괜찮은 남자이다. 

 

 

<웰컴 삼바>의 백미는 '난민'과, 그들을 상담하는 난민 수용소의 상담원들이 함께 파티를 벌이며 어우러지는 장면이다. 이방인, 타자와,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봉사자라는 격도 잠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춤을 추고 웃고 떠들며 점차 한 무리의 사람으로 어우러진다. 거기엔 세네갈인도, 프랑스 인도 없다. 그저 밥 말리를 좋아하고, 춤을 사랑하고 그 순간 서로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 이방인과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겠다던 앨리스의 동료 상담자 마누도, 삼바에 대한 호감을 가졌지만 '난민'이라는 선에 혼돈스러워 했던 앨리스도 '사랑'의 이해 앞에 스스로 선을 거뜬히 넘어선다. 

결국 평생을 프랑스인이 되고자 조심했던 삼바의 삼촌은 세네갈로 돌아간다. 그가 원하던 호숫가의 집을 지을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삼바는 앨리스의 도움(?)으로 프랑스에서 살 길을 얻는다. 결론은 쉬이 낼 수 없다. 교착 상태에 빠진 우리의 난민 문제처럼. 살고자 하는 곳을 향한 인간의 엑소더스를 과연 근대의 국민 국가라는 틀이 제어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인간류 본연의 dna를 말이다. 하지만, 국가라는 금이 그어진 세상은 소란스럽다.  같은 dna를 가진 인간에게 이방인이라는 이유만으 '편견'의 색안경은 씌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웰컴 삼바>는 좋은 길잡이다. 



by meditator 2018. 10. 20. 17:53

'직필'(直筆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적음)은 늘 위태롭다. 유래를 따질 것도 없이, '동호직필(권력 앞에 아부하거나 비굴하지 않고 원칙에 따라 소신대로 자기에게 주어진 직무를 수행한다)이라는 고사성어로부터 조선의 역사 구비구비에서 '직필'로 간언했던 선비들은 그 붓에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고래의 직필의 역사는 오늘날 기자 정신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언론 역사는 곧 정의로운 직필로 인해 거리로 내몰려야 했던 고달픈 저항의 역사였으며, 해외라고 다를 것이 없다. 사우디 정책와 왕실에 대해 거침없는 비판의 날을 세웠던 언론인 자말 카슈크지, '아랍 세계에 필요한 건 언론과 표현의 자유'라는 호소를 담은 칼럼을 끝으로 사우디 왕실이 보낸 암살조에 의해 살해 및 신체 절단, 사체 훼손이라는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다. 2018년에도 여전히 계속되는 '직필'의 탄압, 펜으로 만들어낸 힘은 강고하지만, 그 펜을 쥔 인간은 한없이 무력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마블의 상상력을 통해 '히어로'로 승화된다. 

 

 

정의로운 기자 에디 브룩
영화는 외계 생명체 심비오트가 인간 숙주와 결합하며, 인간 따위는 거침없이 먹어치우며 지구를 넘보는 '빌런'이, 선인 인간의 정체성과 결합하며 그 경계선의 빌런 히어로로 거듭나는 걸 홍보의 촛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여기서 '선'의 주체로서 프리랜서 기자인 에디 브룩(톰 하디 분)을 내세운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에디 브룩에게는 '전과(?)'가 있다. 1986년, 88년 코믹스에 그 등장을 연 에디 브룩은 그때나 지금이나 열혈 기자였다. 근데 문제가 좀 있는. 그의 문제라는 건. 보도해야 할 기사라고 여겨지는 사건에 있어 브레이크가 잘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코믹스 시절 에디 브룩도 마찬가지다. 데일리 글로브 지 기자였던 에디 브룩은, 그렇다 바로 스파이더 맨의 피터 파커가 일하던 그곳이다. 그 데일리 글로브 지에서 범죄자에 대한 특집 기사를 썼는데 그만 그 과정에서 잘못된 인물을 선정하여 그 이유로 퇴사를 하게 된다. 

<스파이더맨3>에서 퇴사한 에디 브룩은 자신이 실패한 기사를 성공시킨 피터 파커에게 앙심을 품고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심비오트를 받아들여 '베놈'이 되어 '빌런'의 캐릭터에 충실한다. 

 

 

하지만, <베놈>은 <스파이던 맨>에서 찌질했던 기자 에디 브룩을 '정의'의 사도로 리뉴얼한다. 역시나 데일리 글로브에서 쫓겨난 걸로 설정되지만 그건 <스파이더 맨>과는 다른 뉘앙스로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의 보도 태도로 둔화된다. 그런 그의 '정의로운 성향'은  현재 기사를 다뤄주고 있는 언론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문의 생체 실험을 하는 혐의가 있는 거대 기업 라이프 파운데이션에 대한 의문을 쉬이 접지 못한다. 그러다 라이프 파운데이션의 변호사로 고용된 연인 앤 웨잉(미쉘 윌리암스 분)의 노트북에서 석연치않은 자료를 발견하고 '기자 정신'에 입각하여 보도하지만 그와 연인의 실직와 이별로 그의 정의로움은 마감된다.

역시나 <스파이더 맨3>에서 대상 인물에 대한 잘못된 설정에 이어, 연인의 노트북 내용을 도용한 '도덕적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 있지만, <스파이더 맨3>에 비하면 애교로 그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식으로 캐릭터적 설정의 완화로 표현된다. 하지만 물불을 가리지 않으면 뭐하나 바위에 부딪친 계란처럼 에디와 에디의 그녀는 무참히 깨진다. 

그로부터 6개월, 라이프 파운데이션의 압박으로 에디 브룩은 그 어느 곳에서도 더 이상 기사를 쓸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여전히 연인을 잊지 못하지만 그녀에게는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 그러던 차, 라이프 파운데이션이 노숙자들을 마구잡이 생체 실험으로 그 생명을 앗아가는 걸 목도하고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도라 스커스(제니 슬레이트 분) 박사가 이전에 에디를 찾아온다. 이젠 더 이상 '정의롭지'않겠다던 호언장담이 무색하게 에디는 스커스 박사와 함께 라이프 파운데이션 실험실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외계에서 온 심비오트의 숙주가 되고 만다. 

기자의 정의가 실현되는 길은 숙주?
대부분의 숙주가 심비오트에게 먹혀버리고 마는 것과 달리, 에디의 몸에 기생한 심비오트는 그의 몸을 매우 만족한다. 살아있는 것들을 마구 먹어치우려고 하는 이 외계의 빌런은 심지어 에디와 '합체'하며 변화되기 시작한다. 아마도 무난한 재미의 히어로물로 찾아온 <베놈>에서 안타까운 지점이 있다면 바로 이 외계 심비오트가 에디를 숙주로 삼아 선과 악의 경계에 서게 된 이 지점이 아닐까. 

 

 

물론 영화는 전반부에 정의로운 기자 에디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풀었고, 거기에 더해 혹자의 평처럼 '버디'무비처럼 정의로운 에디와 막강 빌런 외계 심비오트의 결합을 티격태격 액션씬으로 표현해 냈지만, 에디의 몸를 숙주로 삼은 외계 심비오트가 자신의 동료를 배신하고 지구 별을 지키기로 변심하기 까지의 세계관의 변화라를 극적인 포인트에서 어쩐지 행간이 넓다. 그저 빌딩 꼭대기에서 바라본 지구 별의 아름다움으로 퉁치기엔. 

결국 에디 브룩의 거침없는 정의, 자신의 밥그릇과 연인의 밥줄까지 걷어찰 정도의 그 호기로운 정의가 식인 외계 심비오트마저 변화시킨 동력이 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펜으로 실현하려 했던 에디의 정의 그 좌절의 과정이기도 하다. 들통나면 이별은 당연한 연인의 노트북 정보마저 포기못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라이프 파운데이션 실험실에 결국 잠입한 에디의 기자 정신은 그러나 결국 외계 심비오트와 결합이라는 '히어로'적 방식이 아니고서는 해결이 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아이러니한  '승화'인 것이다. 즉 성체와도 같던 거대 기업 라이프 파운데이션은 역시 에디 브룩이라는 기자의 펜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걸 어쩌면 영화는 말해주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여전히 지구촌 어딘가에서 '정의'라는 이름으로 기사를 쓴 기자가 살해당하고 있는 현실처럼. 그래서 빌런이자 히어로인 베놈의 활약은 통쾌했지만 뒷맛은 어쩐지 쌉싸름하다. 

by meditator 2018. 10. 19. 16:05

살인적인 무더위를 피해(?) 호러물들이 떼를 지어 찾아왔다. 심지어 kbs2tv는 월화수목을 다 호러물 시리즈로 편성했다. ocn 역시 수목 밤 11시에 <보이스>의 연출 김홍선 감독의 호러물 <손 the guest>를 편성했다. 야심찬 시도, 하지만 받아든 성적표는 시원찮다. 앞서 종영한 <러블리 호러블리>가 6%에서 1%까지 러블리와 호러블한 시청률을 오갔는가 하면, <오늘의 탐정>은 3,4%의 산뜻했던 출발과 달리 좀처럼 2%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손 the guest(이하 손더게스트)> 역시 '박일도'가 누구일까란 화제성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은 2,3%대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지부진한 '호러' 장르물, 장르의 한계일까? 만듬새의 부실일까?

 

 

인간이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속성에 기대어 만들어진 장르가 '호러'다. 주인공 캐릭터가 맞닥뜨린 공포와 그걸 지켜보는 긴장감이라는 이율배반적 감정을 절묘하게 구성함으로써 시청자의 자극을 극대화시킨다.(네이버 지식 백과) 그래서 대부분 호러물이 납럅 특집물로서 편성되는 이유가 무더위에 지친 시청자들에게 공포를 공감각적으로 대리 만족시킴으로써 잠시나마 더위를 식히게 해주려는 배려(?)에서 이다. 

초자연적인 존재와 그에 맞선 인간들 
호러물의 핵심 내러티브는 크게 귀신이나 늑대인간, 뱀파이어 등 신비스럽고 초자연적인 영역을 다루는 것과 연쇄 살인마나 살인 짐승과 관련 실존했을 법한 이야기에 기댄 두 가지로 나뉜다. 늦여름 찾아온 <러블리 호러블리>, <오늘의 탐정>, <손더게스트> 세 작품은 모두 이 핵심적 내러티브의 두 가지 면을 절충하여 현대적 관점에서 '호러'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한다. 

우선 <손더게스트>의 경우, 11회에서 비로서 드러난 박일도의 정체에서 보여지듯이 박일도는 '실존 인물'이다. 일제 하 지방의 유지였던 한 집안, 그 집안에서 태어난 기괴한 살인마, 박일도로 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하지만 실존인물이었다던 박일도는 집안의 식솔은 물론 사촌 여동생, 자신의 처와 아들까지 무참히 살해하고, 스스로 '인간'의 굴레를 끊고 큰 귀신이 되고자 스스로 눈을 찌르고 바다로 뛰어들어 영계의 존재로 질적 승화된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포섭'하여 박일도에 빙의되어 살인을 빈발하는 인간들을 발생시킨다. 시작은 '살인 사건'이며, 인물은 '실존'이지만, 그들로 인해 벌어지는 현상들은 '초현실'적이다. 그에 맞서 현직 형사 강길영(정은채 분)과 구마 사제 최윤(김재욱 분), 그리고 한때는 빙의된 희생자였다가 이젠 영매가 된 윤화평(김동욱 분)의 합동 작전을 필연적이다. 

<오늘의 탐정> 역시 시작은 유치원 원아 실종 사건이다. 하지만 그 배후에 등장하는 빨간 옷을 입은 의문의 여인, 알고보니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식물 인간이 된 살아있지만 죽은 '생령', 선우혜(이지아 분)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뒤쫓다 죽음에 이르게 된 탐정 이다일(최다이엘 분) 역시 귀신이었다가, 다시 생령이 되어 그녀를 뒤쫓는다. 역시나 <오늘의 탐정> 역시 벌어지는 사건은 이지아가 자신의 하수인이 된 인간들을 시켜 벌인 갖가지 사건들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 초인간적인 힘을 가진 생령이 있고, 이를 수사하기 위해 또 다른 생령과 인간들이 연합 작전을 펼친다. 

<러블리 호러블리>의 시작은 귀신의 목소리를 듣는 작가 오을순(송지효 분)으로 부터 시작된다. 자신도 모르게 들리는 노랫소리에 이끌려 씌여진 대본, 그런데 그 대본의 내용이 고스란히 스타 유필립(박시후 분)에게 사건 사고로 벌어지며 두 사람이 엮이게 된다. 그리고 등장하는 두 명의 귀신, 10년전 한 호텔의 레지던스 화재 사건에서 죽어간 유필립의 전 여친 김라연(황선희 분)과 엄마 김옥희(장영남 분)이 이제 귀신이 되어 운명적으로 엮인 오을순과 유필립 주변을 배회하며 사건을 벌이고, 그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얽혀들어간다. 시작은 '귀신'이지만, 거기에 인간의 욕망이 얽히며 살인과 음모, 각종 사고가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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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부작, '호러의 긴장감'으로 이끌기엔 
이들 세 작품 중 이미 장르물에서 잔뼈가 굵은 김홍선 피디의 작품답게, 거기에 이미 오랫동안 각종 장르물에 매진해왔던 ocn의 내공이 더해져  <손더게스트>가 화제성에서 앞선다. 전래의 귀신을 '손'이라 했던 그 이질적 존재에 대한 네이밍과 바다로부터 온 귀신의 절묘한 캐릭터 구축과 악령과 그에 대응하는 구마 의식의 긴장감이 매회 '화제'를 불러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10회를 넘어서면서까지 <손더 게스트>를 이끈 건 과연 박일도가 누구인가? 누구에게 빙의되어 있는가가 가장 큰 궁금증이며, 작품은 각회의 빙의된 인물에서, 배후의 그 누군가로, 거기서 더 나아가 주인공인 윤화평의 가족, 그리고 이제 윤화평에게 까지 의심에 의심을 성공적으로 이어가며 작품의 흥미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 치고 올라가지 못하고 있는 시청률은 '공포'를 주메뉴로 즐기는 시청자층의 한계로 볼 수 있다. <손더게스트>는 재밌지만 도저히 밤 11시에는 볼 자신이 없다는 애청자층들이 있듯이. 무서움 자체가 작품의 한계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더해 고민해 봐야 할 지점은 16부작의 호흡이다. 과연 끊임없이 공포와 그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긴장감으로 끌고 가야 하는 '호러' 장르의 특성상 16부 자체가 무리가 아닌가 하는 지점이다. 차라리 8부나, 10부, 혹은 12부의 보다 짧은 호흡이었다면 좀 더 폭발적인 에너지와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지 않았을까. '미니 시리즈'와 '호러'라는 장르의 조합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바로 이 호흡이라는 면에서 <오늘의 탐정>은 더욱 안타깝다. 구성면에서 따라가자면 생령으로 인해 귀신이 된 탐정, 그가 귀신을 보는 정여울(박은빈 분)과 영매인 길채원(이주영 분)등과의 연합 작전, 하지만 역부족을 느낀 이다일이 악령과의 악수, 그리고 알고보니 생령이었다는 전개는 나름 논리적이지만, 호흡이 딸린다. 이지아가 분한 선우혜의 악령은 매혹적이고  파괴적이지만,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도돌이표같은 느낌이다.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가고,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자신들을 죽이려 해서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 했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충격적이지만, 군중 참사을 도발할 만큼의 악령인가에 대해서는 힘이 딸린다. <선암여고 탐정단>, <원티드>에 이은 <오늘의 탐정>까지 장르물에서 한지완 작가의 능력은 걸출하지만 매번 16 미니 시리즈의 호흡이 작가의 장점마저 상쇄하고 만다. 

<러블리 호러블리>의 경우 역시 안타깝다. 드라마 극본 공모작인 이 작품이 과연 16부를 위한 대본이었는가가 의심스러울 만큼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애초에 작가 자신이 설정했던 두 사람의 운명이라던가, 두 주인공의 캐릭터, 심지어 애초 귀신의 등장 이유까지 그 모든 것이 방향을 잃고 만다. 마지막 회 천둥 번개가 쳐도 사랑을 하겠다는 두 주인공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남자 주인공을 사랑해서 귀신으로 나타났던 귀신의 집착이 무색하게 엄마 귀신의 과도한 욕심이 부른 참사란 생각 밖에 들지 않게 만든다. 무엇보다 연출의 호러 장르에 대한 일천한 이해와 불친절한 편집, 심지어 거기에 코믹까지 곁들인 옥상옥의 과욕이 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호러'물로서의 정체성은 물론, 복합 장르로서 로코물로서의 공감성조차 갉아먹고 만다. 

 

 

물론 공포 영화를 찾아 극장에 가는 관객이 정해져 있듯, '호러물'이라는 장르에 대한 접근성 자체가 떨어지는 편이다. 그런 접근성의 한계를 '미니 시리즈'의 이름으로 찾아온 드라마들은 '수사물'이라든가, '로맨틱 코미디'라는 복합 장르의 이종 교합으로 돌파하고자 한다. 상대적으로 <손더게스트>의 화제성에서도 보여지듯이 '호러'는 호러다울 때 가장 흡인력이 있다. 조미료를 잔뜩 끼얹은 들 본래의 메뉴가 가진 맛이 없다면 시청자들은 이미 간파한다. 그런 면에서 오랫동안 스테디 셀러였던 <전설의 고향>의 지긋한 교훈을 되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 기억하다시피 <전설의 고향>은 단막극이었다. 16부작으로 호러의 긴장감이 끊겨 버리며 자충수에 빠지기 보다 '호러'에 맞는 형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럼에도 늦은 여름 찾아온 세 작품, <손더 게스트>, <오늘의 탐정>, <러블리 호러블리>로 인해 장르물의 애청자는 행복했다. 부디 내년 여름 땀을 쫘악 식혀줄 보다 품질 좋은 호러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아니, 그러고 보니 ocn의 <프리스트>가 대기하고 있다. 이래저래 호러 장르물 애청자들에겐 올 한 해는 풍성한 잔칫상이다. 


by meditator 2018. 10. 18. 17:00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이하 곰돌이 푸)>의 영화 후기, '가족이 함께 봤다. 같은 영화를 봤는데, 재미있었다는 공통평 더하기 각자의 감동 포인트와 받아들이는 깊이가 따로 있었다 ', 란 장고님의 후기가 아마도 이 영화에 대한 가장 적확한 후기일 것이다. 이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 언제나 아이들이 함께 한 영화관이 그렇듯 시끌벅적하고 영화 상영 도중 화장실 다녀오는 아이에서 부터 아이들의 재잘거림까지 어수선한 분위기와 함께 였다. 곰돌이 푸를 만나서 반가워 까르르 웃어대는 아이들과 함께, 한때 곰돌이 푸를 봤던 이젠 다 자란 아들과, 그 곰돌이 푸를 보던 아이들 곁에서 아이들보다 더 그 세계에 빠져들었던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온 지금의 부모들과 함께 '추억'을, '감동'을 공유했다. 

 

 

추억의 곰돌이 푸, 힐링의 전도사 
<짱구>는 야하다고 못보게 하던 엄마가 그래도 그나마 우량 만화라 보게 하던 게 곰돌이 푸였다고 한다. 그랬던 시절의 곰돌이 푸는 이제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라는 '베스트 셀러'로 새삼 인기를 끌고 있다. 영화 속에서도 그렇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느림보 곰돌이가 바쁘게 살아가는 속에서 자신을 자꾸 놓치고 사는 것같은 젊은이들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과 함께 '힐링 지도사'가 되어 복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어린 시절 힐끔거리며 아이들과 함께 곰돌이 푸를 시청하던 부모 세대에게 '곰돌이 푸'는 어떤 의미였을까? 아마도 곰돌이 푸보다는 어른이 되어버린 로빈, '책임감으로 사는 어른'의 이야기가 마음을 건드리지 않았을까?

추억의 만화를 실사로 구현한 디즈니의 라이브 액션 작품인 <곰돌이 푸>는 이전의 <미녀와 야수>보다는 외려 영국, 프랑스 합작 작품인 <패딩턴> 시리즈와 더 동질성을 느끼게 한다. 도시로 온 곰돌이 인형 패딩턴이 도시적 삶에 길들여진, 그래서 가족간의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 한 가정에 들어와 본의 아니게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도록 하여 결국은 가정을 다시 '평화롭게' 만들어 준다는 해프닝의 구조에 있어 동일하다. 또한 이는 지금처럼 거대 스튜디오 디즈니 이전 초창기 디즈니 이래 줄곧 구현하고자 해온 '스위트 홈'의 신화의 연장 선상에 놓여있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매우 '디즈니'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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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어버린 소년, 로빈의 책임감 
그 '스위트 홈'의 신화을 재현하기 위해 <곰돌이 푸>는 이젠 어른이 되어 버린 로빈을 내세운다. 헌드레드 에이커 숲에서 봉제 인형 곰돌이 푸와 피그렛, 티거, 이요리, 올빼미, 토끼 등과 함께 '소꿉놀이'를 하던 로빈. 하지만 소년의 '동화'는 '성장'과 함께 멈춰버린다. 

성장의 계기가 된 건 우선 그를 시류에 따라 기숙학교로 보내버린 부모들이지만, 그곳에서도 여전히 곰돌이 푸를 끄적거리던 소년에게 '동화'의 세계는 유효했다. 그런 그에게 닥친 가장인 아버지의 죽음. 친척 할머니의 '이젠 네가 이 집안의 가장이야'라는 말 한 마디는 급격히 소년을 '철'들게 만들어 버린다. 어줍잖게 어른의 세계를 엿본 우리의 청소년들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자신들을 내모는 것처럼.

에블린을 만나 사랑에 빠진 것도 잠시 전쟁터에 참전하고, 다시 돌아와 그 시대의 여느 남자처럼 가방 회사 '윈슬로'를 다니게 된다. 영화 <모던 타임즈>의 또 다른 버전처럼 돌아가는 직장, 하지만 일벌처럼 열심히 일하지만 직장 내 책임자의 자리를 맡은 로빈에게는 자신의 수하에 있는 직원들의 자리를 건 '경비 절감'을 앞세운 경영 합리화의 위기가 닥친다.  동료들의 밥줄을 쥔 그가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고심하는 시간은 곧 그의 가족에게는 '소외'의 시간이 된다. 그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돈을 잘 벌어 좋은 기숙학교에 아이를 보내면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라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힌 아빠 때문에 아내도, 아이도 지쳐가게 된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 친구들을 잃어버렸다고 찾아온 어린 시절의 친구 곰돌이 푸도 나타나는데.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어른 로빈을 다시 동화의 세계로 내모는 게 또 다른 '책임'이다. 곰돌이 푸는 로빈을 채근한다. 네가, 헌드레드 에이커 숲에서 우리와 함께 하던 시절의 로빈이 언제나 우리들의 해결사였다고. 이젠 그런건 없다고 외치던 로빈이 그 시절 괴물 헤팔럼을 무서워 하던 친구들을 위해 갖가지 묘수를 짜내던 그시절 부터 '로빈'은 든든한 친구였다고. 그러고 보면 <곰돌이 푸>은 재밌게 보던 시절부터 늘 로빈은 당연히 '해결사'였다. 너무도 봉제 인형 친구들의 호들갑을 처리해 주는게 당연했는데, 봉제 인형 친구들을 위해 헤팔럼 용 함정이나 파주던 '책임'은 이제 어른이 된 소년에게는 헤팔럼이 아닌 동료들의 목을 쳐야 할 위기로 변해버린 것이다. 

 

 

'책임감'의 변화 
영화 속 '로빈'은 일관되게 '책임'감이 있다. 어린 시절 로빈은 봉제 인형 친구들에게, 그리고 어른이 된 로빈은 가족과 회사에, 물론 그 방식의 문제다. 어린 시절 함정 정도 파주던 그 식으로 맞서기엔 세상이 너무 강팍해 진 것이다. 또한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물려준 자식을 책임지는 방식은 아빠의 사랑을 바라는 딸에겐 시대 착오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물론 영화 속 우리의 로빈은 더 늦기 전에 다시 곰돌이 푸를 만나, 곰돌이 푸와 함께 놀던 그 시절,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하'던 시절의 교훈으로 현명하게 늦지 않게 행복을 찾는다. 

로빈의 방식은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책임의 방식을 변화시킨 것이다. 회사 일에 충실한 것이 곧 가정을 지키는 것이라 여겼던 지난 시대의 사고 방식을 어린 시절의 친구들와의 '회동'을 통해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에 대한 책임으로 전환한다. 또한 고용주에 대한 책임을 동료에 대한 책임으로 '회사'에 대한 소속감의 질적 전환을 이룬다. 

영화 속 로빈의 변화는 역사적 배경을 더하며 풍성해 진다. 전후 급격한 산업의 발전과,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산업의 위기, 변화를 로빈이 다니는 '윈슬로'라는 가방 회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19세기 중엽 처음 등장했던 귀족들 전용의 여행용 가방을 '여행'의 대중화에 걸맞게 '루이비통'이 대중화 시킨 그 '콘텐츠의 혁신'을 영화 속 윈슬로에 도입한 로빈의 묘수로 절묘하게 흡인해 낸다. 거의 옷장 수준의 가방이었던 귀족들의 여행 가방이 루이 비통에 의해 기차 화물칸에 적재되기 쉬운 대중들의 가방으로 탄생된 그 순간을, 윈슬로의 경영 합리화를 돌파할 묘수로 배치시킨 것이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펼쳐친 해변 휴가를 받아 윈슬로의 가방을 들고 해변으로 놀러온 직원들,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 행복'하다는 곰돌이 푸의 인생 철학이 시대의 트렌드로 변화되는 순간을 영화는 절묘하게 포착해 낸다. 

즉, 이전의 세대 아버지들이 그저 나가서 돈을 잘 벌어 오는 것이 '아버지'로서의 책임감을 다한 것이었다면, 윈슬로의 가방을 들고 여행을 다니게 되는 시대에 아버지의 책임감은 영화 속 로빈의 딸이 바라던 아버지의 상처럼, '가족'과 함께 일상의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책임'이다. 물론 윈슬로의 적자 경영을 타파한 신의 한 수라는 경영적 능력은 놓치지 말아야 할 아빠의 능력이다. 

그렇게 영화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행복'을 논하면서, 결국은 변화하는 시대, 변화하는 아버지의 자리, 아버지의 책임을 말한다. 다행히도 일찌기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과 놀던 그 시절부터 책임감있던 소년은 늦지 않게 다시 찾아온 친구들 덕에 강박처럼 자신을 휘몰아 쳤던 그의 아버지 세대가 짖누르던 맹목적 책임으로부터 한결 짐을 덜었다. 어른에게는 어른의 자리가 있다. 하지만 그 자리의 내용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아버지의 시대 기숙 학교에 보내는 것이 책임을 다한 것이었다면, 이제 로빈이 그의 딸과 옛친구인 곰돌이 친구들과 살아가야 할 시대의 책임은 '함께 행복하기'이다. 그리고 그건 2018년 이 시대에 우리 어른들이 <곰돌이 푸>를 보고 감동받듯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 

by meditator 2018. 10. 16. 16:53

강남이 배밭이었던 시절부터 살아왔던 토박이 어르신들은 도깨비 같은 세상이라 혀를 내두른다. 25평이 15억, 16억을 호가하는 세상이다. 7개월만에 2억이 올랐단다. 3.3 ㎡가 1억이랬다가 그게 시세 조작이랬다가. 신기루가 따로 없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데 그 누군가는 '아파트'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앉아서 하루가 다르게 '불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 임금 몇 천 원에 한 사람의 일자리가 오락가락 하는 세상에. sbs 스페셜은 저 요지경 신기루의 복판 강남을 들여다 본다. 

 

 

여전한 꿈의 땅? 
다큐를 연 건 2018년 머슬 마니아 대회. 건강한 육체가 새로운 트렌드로 대두되며 '머슬 마니가'가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이 즈음, 2018 대회에서 심사위원을 맡고 있는 작년 머슬퀸 이연화 씨를 주목한다. 머슬퀸, 하지만 그녀의 이력은 화려하다. 패션 디렉터, 의상 디자이너이자 거기에 머슬 퀸까지. 이른바 이 시대 젊은이들이 말하는 '자기 관리'이 표본이다. 그런 그녀가 강남에 산다. 늘 새로운 트렌드에 목말라 하는 그녀에게 강남은 딱 어울리는 곳이다. 

어디 이연화씨 뿐일까. 군 제대 후 고향인 강남에서 홀홀단신 상경하여 8~9년 만에 부동산 사업 등을 하며 강남에 집을 마련한 진수현 씨, 사무실에서 집으로 가는 대치동의 길을 걷는 그 순간, 자신의 집 옥탑에서 홀로 바비큐 파티를 벌이는 그 순간, '강남'을 만끽하는 그 순간 그는 가장 행복하다. 그에게 강남은 '미래'이다. 

하지만 '미래'와 '트렌드'가 늘 보장되는 건 아니다. 배우 지망생인 이한나 씨는 그 '미래'를 위해 현재를 담보로 잡혔다. 비싼 학원비를 감당하기 위해 알바를 하는 그녀가 머무는 곳은 강남의 한 고시원, 그녀 역시 하루의 시작과 끝이 강남이고, 그곳은 그녀에게 기회의 땅이지만 현실은 고달프다. 

 

 

지난 11년간 이곳에 머무르며 한국에 대한 글을 써왔던 영국의 칼럼니스트 팀 알퍼는 한국의 엘리트들이 모여드는 곳이라 강남을 정의한다. 아로마 오일을 파는 한 회사는 비싼 임대료와 수익도 나지 않는 강남의 매장을 포기할 수 없다한다. 왜냐하면 이곳은 부과 고급스러움의 상징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강남 불패의 부동산 신화를 이루는 그 저변에 저렇게 '미래'를 담보로 잡히며 꿈을 찾아 모여드는 사람들의 로망이 기저를 이룰까? 다큐는 강남에 모여든 사람들의 꿈을 말하지만, 그 꿈의 실체를 짚지는 않는다. 그들의 성공과, 성공의 댓가로 얻은 강남의 부동산을 '로망'으로 제시하지만, 그 부작용과 그림자는 짚지 않는다. 기껏해야 이한나 씨의 기약할 길 없는 고시원 정도가 다큐가 보여준 한계이다. 과연 그럴까? 강남에서 열렬하게 꿈을 향해 살면 누구나 이연화가 되고, 진수현이 될까? 그들이 이룬 꿈은 실체가 있는 것일까? 여전히 강남은 트렌디한 1번지일까? 무엇보다 그 트렌디의 실체는?  이연화씨가 트렌디해서 좋다던 그 '아는 언니' 역시 고급스러움을 놓칠 수 없어 울며 겨자먹기로 강남에 매장을 유지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무엇보다 저 강남에 모여든 사람들이 정말 한국 사회의 엘리트들이기는 한 건가? 마치 불을 향해 모여든 나방을 부각하면서, 그 불의 실체를 말하지 않듯, 다큐는 강남에 모여든 '막연한 꿈'만을 조명한다.  모름지기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던 그 옛 속담에서 한 치도 나가지 못한 인식이다. 

 

 

강남, 그 불평등의 역사 
그렇게 강남에 모여든 사람들의 로망을 통해 왜 강남인가를 짚어보려하던 다큐는 강남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이 맑아 청담동, 서울로 가던 나룻터가 있던 동네, 당시 서울은 뚝섬 건너 4대문안이었다. 1963년 강동구의 한 구역으로 서울레 편입되었고. 1975년 강남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곳. 

1979년 혜은이의 노래 <제 3 한강교>의 유행과 함께 강남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다. 경부 고속 도로와 연결된 제 3한강교처럼, 강남은 북한의 위협을 내세운 정권의 의도적인 배려(?)와 특혜로  각종 정부 기관들이 이전하고, 도시 기반 시설이 자리잡으며 1963년에서 1970년 사이에 이미 땅값 차이에서 강북을 훨씬 넘어서기 시작했다. 

거기에 1976년 강북의 명문고들이 이전하고, 노량진의 학원가들이 대치동으로 옮겨가면서 대치동 인근에만 학원 1200여개, 명실상부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물론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다. 9년전 교육을 위해 강남으로 이사온 하린이는 이미 어릴 적부터 스펙이 차곡차곡 적립된 친구들 사이에서 적응하지 못한 채 한 시간 걸리는 강북의 대안 학교로 옮겼다. 강남에서 30년 동안 가게를 운영했던 박순이마저 이제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다고 토로할 만큼 거침없이 오르는 강남의 임대료는 곳곳에 비어있는 상가에서 보여지듯이 강남 상권의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미 폐업률이 창업률을 앞지는 지는 오래되었다. 지난 20년간 대치동에서 떡집을 운영해오는 손영주씨는 말한다. 그 신화의 강남 사람들, 사실 거대한 집 한 채 만이 그들이 가진 자부심의 전부라고. 하지만, 그런 영주씨도 강남에 한번 살아보는 게 여전한 로망이다. 

 

 

길지 않은 강남의 역사는 새롭지 않다. 옛날에 그랬지 라는 식처럼 강남에 대한 다큐에서 매번 등장했던 회고담이다. 거기에 덧붙인 꿈을 찾아 모여든 사람들? 과연 이런 강남살이의 분석이 작금의 '도깨비같은 강남 집값'의 실체를 밝히는 것일까? 그저 '강남'이 떠들썩하자 구색맞춰 만든 건 아닐까?

다큐에서 가장 솔깃했던 부분은 바로  그곳에 사는 그 '엘리트 층'들이다. 정권이 바껴도 여전히 고위 공직자 33%, 국회의원의 29%가 사는 곳, 부동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자기가 사는 곳의 집값에 합리적 정책을 펼칠 수 있을까? 어느 보수 신문이 청와대 경제통에게 거칠 것없는 강남 아파트 값을 두고 우선 당신의 집부터 옮겨 보라는 어깃장이 차라리 속시원해 보이는 시절. 비정상을 넘은 지 한참되는 강남 불패의 신화에 대한 다큐의 접근은 철지난 가요의 도돌이표처럼 평이하다 못해 안이했다. 

by meditator 2018. 10. 15. 1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