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1/3에 해당하는 시간을 보내는 잠, 길지도 않은 인생에 머리를 바닥에 붙이고 자는 그 시간이 너무도 아깝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아마도 인생의 어떤 시기에서 이런 생각을 안해본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다큐에 나온 고 3 수험생은 계산한다. 하루에 한 시간, 그게 24일이 모이면 하루, 그 시간 동안 내가 자고, 내가 자는 시간 그 누군가가 깨어서 공부를 한다는게 두렵다고. 이른바 그 예전 시절 4당5락이라 말하던 '입시 괴담'의 2018년 버전이리라. 

그런데 입시만 끝나면 실컷 잠을 잘 수 있다던 '로망'은 이 시대에 불가능한 꿈이 되었다. oecd 회원국 중 수면 시간 우리나라는 평균 7시간 49분으로 꼴찌, 그런데 이 평균 수면 시간을 본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든 생각은 '세상에 7시간이나 잔다고?'가 아닐까? 직장인들 10명 중 8명이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 내일의 더 나은 삶을 위해 학교에서, 직장에서 잠을 포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평균 7시간조차 꿈의 수면시간 처럼 보이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게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이 이어지며 이제는 잠을 자는 시간조차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잠이 '사치'가 된 세상에서 막상 잠을 자려 해도 '숙면'을 취하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 된 것이다. <다시 쓰는 불면 일기>를 기획한 작가 최성우씨, 그는 늘 졸음에 시달린다. 하지만 해야할 일은 그를 '포근한 잠자리' 대신, 자판 위의 끄덕이는 졸음으로 대신하게 하고, 정작 잠을 자려 해도 잠이 쉽게 들지 않고, 잠을 자도 개운치 않다. 

잠보다 무서운 수면 장애 
이렇게 '잠'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직장인 오지용씨는 늘 졸립다. 운전 중에도 졸음과의 전쟁을 벌이는 그, 하루 7시간 정도 자는데도 그는 졸립다. 숙면을 취하기 위해 운동까지 하지만, 그의 '수면'과의 전쟁은 쉬이 나아지지 않는다.
늘 졸리기야 방송국 피디만한 사람이 있을까? 오학준 피디는 자타공인 잠보다. 하지만, 그의 일상은 미래를 위해 잠을 강탈해야 하는 처지, 겨우 밤을 새워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잠자는 시간이 아까워 자신이 즐겨하는 게임을 위해 잠을 양보한다. 그래서 일까, 그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우려할 정도로 현격한 기억력 감퇴에 시달린다. 
5번째 수능을 준비하고 있는 조하영씨는 겨우 잠자리에 들어서도 불면의 밤을 보낸다. 잠을 줄여 공부에 보탠 시간은 그녀에게 수능 성적으로 보상을 해왔었다. 그게 습관이 되어버린 이제, 잠은 그녀에게서 멀리멀리 달아났다. 




자신의 삶에서 '잠'을 빼앗아 자신의 꿈을 위해 썼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건 작건 수면 부족에서 부터, '수면 장애'에까지 잠과 관련된 각종 스트레스와 질환에  시달린다. 그래서일까 어느덧 대한민국에서 잠과 관련된 산업의 시장이 2조원에 육박하고 있다. 잠(sleep)과 경제(economics)의 합성어인 슬리포노믹스(sleeponomics)가 등장했다. 잠이 부족한 직장인들을 위한 수면 카페가 등장하고, 숙면을 위한 각종 상품이 불티나게 팔린다. 목침 하나 궤면 달콤한 낮잠에 빠져들던 옛사람들의 여유는 저리 가고, 침대는 과학에 이어, 베개의 과학까지 우리의 지갑을 열도록 만든다. 

이렇게 다큐는 부족한 잠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부터, 그 잠을 줄이도록 강요된 사회에서 결국 수면 장애까지 앓게 된 현대인들의 사정을 사례별로 다룬다. 그렇다면 이제 잠을 자고 싶어도 잘 수 없게된 현대인들에 대한 해법은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시대가 현대인들의 부족한 잠을 해결해 줄 수 없듯이, 다큐의 처방은 또 다른 '침대의 과학'으로 귀결된다. 

과학이 숙면을 인도하리라? 
다큐는 등장했던 사람들을 수면 검사실로 인도한다. 수면 다원 검사를 통해 다양한 수면의 내용을 들여다 본다. 너무도 잠을 잘자서 활동명조차도 슬리피가 된 가수 슬리피, 검사 결과 그는 잠을 잘 자는 게 아니었다. 심한 코콜이로 인한 수면 무호흡증, 그리고 부정맥, 그것들이 그를 자도 자도 또 잠을 자도록 만들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수면 장애를 보이던 출연자들은 대부분 검사 과정에서 잠에 빠져드는 시간이 길었다. 또한 수면 과정 중 깨어나는 각성도 빈번했다. 반면 하루 4시간만 자도 20시간을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다던 이른바 나폴레옹 수면법의 김쌍규 씨는 입면도 쉬웠으며, 수면 도중 깨는 각성도 없이 깔끔하게 수면의 사이클에 몰입했다. 

사람이 잠을 자는 과정은 총 4단계로 나뉘어 진다고 한다. 그 중 1, 2 단계는 주변의 소음에 무뎌지면서 잠에 빠져드는 단계, 대부분 수면 장애에서 잠이 드는데 힘이 들어 하는 사람들은 이 과정에 문제가 있다. 다음 3단계는 깊은 잠에 빠져드는 단계, 이 과정에서 몸과 뇌가 휴식을 취하며 손상된 세포가 복귀가 되고, 노폐물들을 배출하여 새로운 활동을 할 수 있는 몸의 상태를 이루는 단계이다. 이 단계가 순조롭게 되지 않았을 때 면역성이 저하되어 당뇨와 같은 성인병이나 각종 암, 감염 등에 취약해질 수 있다고 한다. 잠을 자는 도중 자꾸 깨는 경우, 이 3단계의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게 될 가능성이 크다. 


​​​​​​​
다큐는 김쌍규 씨와 같은 깔끔한 입면과 각성없는 잠의 이상적 상태를 위해 '과학'을 제시한다. 우선 슬리피나 직장인 오지용씨의 경우에서 처럼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수면을 방해하는 수면 무호흡증의 사례를 살펴보고, 작가 최성우 씨 사례의 이갈이 치료법도 소개한다. 더불어 암막 커튼과 가습기, 안락하고 적절한 침구들의 환경을 제시한다. 결국, 슬리포노믹스의 범주이다. 

과연 자본 2조원의 슬리포노믹스는 우리를 수면 장애에서 구할 수 있을까. 밤샘 작업이 필요한 방송국의 작업 환경, 다섯 번째 도전해야 하는 수능, 그리고 남보다 한 시간 더 자는 게 불안으로 이어지는 고3의 시간, 4시간 자면 개운하다는 사장님 앞에서 조금 더 자는게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처럼 고개를 수그려야 하는 회사 생활, 과연 이런 현실의 스트레스가 암막 커튼과 푸근한 잠자리가 구원해 줄 수 있을까? 혹 그 무엇도 해결해 줄 수 없는 현대인을 위한 당의정같은 플라시보 해법이 아니었을까. 

by meditator 2018. 9. 3. 16:14

지난 29일 소상공인들은 광화문 광장에 모여 '최저 임금 제도 개선 국민 촉구 대회'를 열었다. 소상공인 총궐기의 날로 정한 이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백여 업종, 지역별 소상공인 3만 여명(경찰 측 추산 1만 5000 명)들은 최근 결정된 최저 임금제 결정과 관련 소상공인들에게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며, 최저 임금 차등 적용 등 생존권 위기에 내몰린 소상공인들의 입장을 강력하게 밝히며 정부의 대책을 촉구했다. 

'소득 주도 성장'을 내세운 정부는 그에 맞춰 '최저 임금제'를 인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저 임금제'의 인상은 낮은 알바 시급 등에 의존하여 근근히 영업을 해온 자영업자들에게 타격을 주게 되었다고 소상공인들은 주장한다.  결국 이들이 '생존 보장'을 외치며 거리에 나서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올 한 해 폐업하는 자영업자는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전년보다 10% 뛰어 역대 최대치인 87.9%를 기록했다. 2년도 안돼 폐업하는 사례가 늘고, 10곳 중 4곳이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는 자영업자의 폐업 속출은 '최저 임금제'때문만일까? 지난 8월 30일 방영한 <다큐 시선- 당신의 음식값, 만족하십니까>는 최저 임금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소상공인의 딜레마를 설득한다. 




560만 자영업자들이 빠진 블랙홀
족발집을 6년 째 운영하는 석희철씨는 요즘 하루에도 12번 씩 가게를 접을까 고민한다. 그만이 아니다. 석씨 가게 주변에 2~30년 정도 자영업을 하던 분들도 입을 모아 '이런 경기는 없었다'라고 혀를 내두른다고 전한다. 작년부터 내리막길이던 가게 운뎡은 이제 반토막이 났다. 두 솥 가득 끓여대던 족발은 이제 겨우 한 솥, 그 마저도 최근엔 하루 2만원치기 장사, 아니 그보다도 못할 때도 있다. 최저 임금제를 떠나, 장사가 안되니 인건비가 감당이 안돼서 알바는 주말에만 쓴다. 불금, 불토가 없어진지 오래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면 돈이 된다던 자영업의 장점은 이제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몸을 움직여 돈을 벌던 기쁨을 누린 지가 언젠지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프렌차이즈는 좀 나을까? 
피자 브랜드를 운영하는 최은자씨와 함께 매장을 운영하던 남편은 매장을 아내에게 맡긴 채 다른 일을 찾아 나섰다. 대출까지 받아 운영비를 마련하는 상황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도대체 자영업자들을 블랙홀에 빠뜨린 원인은 무엇일까? 어느 한 가지가 아니다. 물론 소상공인들을 거리로 내몬 최저 임금제도 있다. 하지만, 나날이 치솟는 임대료, 올해와 같은 폭염에는 청전부지로 치솟는 채소값처럼 감당할 수 없는 자재 구입비, 그리고 프렌차이즈의 경우 가맹비, 거기에 최근 활성화되고 있는 배달 앱으로 인한 비용 들이 몸을 움직인 만큼 돈을 벌던 자영업자들의 이익을 찢어발겨 나누어 가져간다. 다큐는 우리가 음식값으로 지불하는 비용 속에 숨겨져 있는 '알수 없는 비용', 그 중에서도 최근 활성화되고 있는 배달 앱 시장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배달의 화려한 리바이벌, 배달앱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배달을 시작한 된 구한말이다. 상상이 되는가, 거리에 해장국과 설렁탕이 배달되는 풍경이. 그 설렁탕 그릇을 대체한 건, 짜장면의 철가방이다. 하지만, 테이크 아웃의 경제성이 등장하면서 '배달'은 주춤하는가 싶었다. 그랬는데, 최근 1인 가구의 확산과, 배달 앱의 활성화와 함께, '딜리버리', 배달 산업이 다시금 활성화되고 있다. 

어느 덧 한 해 15조원에 육박한 배달 앱 시장. 배달 앱을 띄우고 화면에 클릭 한번만 하면 내 집 앞까지 먹고 싶은 걸 배달해 주는 이 '편리한 신기술'이 소비자에게는 편리함을,  자영업자들에겐 더 많은 이득을 줄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 '신기술'의 앱은 소비자에게는 편리함을 줬을 지는 몰라도, 자영업자에게는 '비용의 파이' 그 지분을 더 쪼개버렸다. 

앱에 자신의 가게를 올리는데 필요한 수수료, 매달 나가는 회비, 거기에 요구되는 '박리'에, 배달로 인한 매출 감소는 자영업자들에게는 결국 '영업 이익의 감소라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배달로 인해 많이 팔게 되었는데 손해가 나다니. 거기엔 '배달앱'이라는 중간 마진 과정이 고스란히 자영업자의 부담으로 얹혀지는 시스템의 문제가 있다. 

최근 배달앱 활성화와 함께 부흥된 배달 시장은 예전의 배달 중심 시장과는 질을 달리한다. 중국집마다 고용된 철가방은 옛일이 되었다. 더 이상 배달원을 각 업소가 고용할 수 없는 고비용 인건비 시장에서 이젠 배달은 배달 전문업체의 일이 되었다. 즉 신종 직업군으로서 어플 노동자, 배달 라이더들이 등장한 것이다. 

10년째 프랜차이즈 치킨 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박세창씨. 프랜차이즈 업체에 내는 수수료가 15%이다. 인건비를 빼고 나면 마진이 거의 없다. 그런데 최근 배달앱이 활성화되면서 운영 비용이 추가되었다. 예전처럼 전단지를 돌려서 직접 가게에 주문을 하던 시절이 지나간 것이다. 

그런데 이 배달앱이 고약하다. 배달앱에 자신의 가게를 올리기 위해 경매비를 내고 입찰을 해야 한다. 인기 지역의 경우 50만원에 육박한다. 2011년에 본격화된 배달앱은 메이저 3사의 독과점 사업이 되었다. 그 중 가장 잘 나가는 1위 업체는 경쟁 입찰 방식을 취하고, 나머지 업체들도 수수료를 받는다. 결국 돈 놓고 돈 먹기가 되는 현상, 영세 사업자에게 그 비용은 언감생심이 되고, 정작 정보를 통해 편리함을 얻고자 했던 소비자에게는 왜곡된 정보를 전하기 십상이다. 무엇보다 소비자의 심리 상, 최초 로딩된 7개 업체 중 하나를 선택하기가 십상인 앱, 결국 더 많은 돈을 들여 홍보하거나, 이 시장에서도 방치되는 게 자영업자들의 숙명이 되었다. 

변화된 산업 구조, 뒤따르지 못하는 제도적 보호 
하지만, 너도 나도 배달앱을 켜는 세상에서 이 시장을 외면하는 건 쉽지 않다. 프랜차이즈 사업의 경우 애초에 계약 당시 설정된 마진율은 고정적이다. 그런데 배달앱 등 시장 상황이 변화하면서 운영 비용이 추가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김종진 한국 노동사회 연구원 부소장은 지난 30여년 간 우리 사회의 산업 구조가 IT 정보 기술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산업 구조의 중심이 서비스 산업으로 이동했다고 정리한다. 개인 사업자인 자영업자들이 산업 구조의 중심이 되었는데, 문제는 여전히 2차 산업 구조에 기반한 법제도는 근로 기준법, 최저 임금제, 산재 비용 등에서 이런 산업 구조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면서 최근의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짚었다. 즉, 자영업자들이 가장 활성화된 산업의 중심인데도 전혀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된 산업 구조 환경에서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영업자들만이 아니다. 바로 그들의 손발이 되어 배달을 하는 배달 앱 노동자들 역시 법의 사각 지대에 놓여있다. 

하루 종일 진수성찬을 배달해주다 오후 다섯시가 되어서 첫 끼를 때우는 이용훈씨. 그는 이제 4년차 배달 대행 라이더이다. 배달 대행업체 소속, 1.5km 미만의 배달지에는 건당 3000원에 배달을 대행해주는 노동자. 



​​​​​​​
그의 배달은 '위험'과의 동침이다. 같은 지역에서 배달을 하는 30여 명의 배달원들, 그들은 콜이 오면 그걸 잡아서 배달을 하는 시스템으로 인해 주행 중에도 늘 스마트폰을 켜고 콜을 잡아야 하는 위험을 감수한다. 위험은 그것만이 아니다. 40 분이내 배달을 마쳐야 하는 앱배달의 '덕목'은 당연히 교통 법규를 지킬 수 없게 만든다. '빠른 시간 안에 목표달성'이라는 대한민국의 신조가 가장 극적으로 실현되는 직종 배달 라이더, 그는 한 시간안에 7개의 콜을 수행해 내며 2.8000원을 번다.

평균 근속 6개월, 근로 계약서는 없다. 1년에 두 세번 사고가 나는게 일상화되는 위험한 작업 환경을 감수하고 산재 보험을 드는 배달 대행업체는 없다. 사고가 나면 업체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청약 철회', 배달 사고가 날 경우, 앱, 자영업자, 배달 대행업체로 나뉘어진 책임 소재는 종종 그 책임이 배달 라이더들에게 뒤집어 씌워진다. 

앱에 의한 배달은 통신 판매법에 의거한다. 하지만 결제는 전자 상거래 법에 속한다. 이런 식이다. 배달 앱의 등장, 그 수족이 되는 배달 대행업체와 배달 라이더들, 그리고 그로 인해 운영 비용의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플랫폼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자영업자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심화되고 있는 자영업자들의 손실 증가는 이런 변화된 산업 구조와 그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의 문제에 기인한 바가 크다. 이미 수직화된 산업 구조로 독과점 형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배달앱 사업체 들에 대한 경제적 법적 장치의 미흡한 가운데, 이미 기존 프랜차이즈 본사와의 불공정한 계약 관계에 놓인 자영업자들은 다시 한번 이 새로운 플랫폼 기반 사업에서 '을'이 되어 이익의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안그래도 저성장으로 인해 소비가 위축되는 상황에서 이익의 파이는 원자재, 가맹점비, 배달앱, 카드 수수료, 건물 임대료, 인건비 등으로 쪼개어 지니 자영업자들이 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자영업자 만이 아니다. 한때는 청소년들의 주된 알바였던 배달 라이더가 이젠 30대 가장들의 일터가 되어간다. 새로운 산업 구조에서 등장한 이 신종 노동자들은 하지만 여전히 '알바' 수준으로 법적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결국 사회, 산업은 변하는데, 자본은 그에 맞춰 발빠르게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데, 법과 제도는 그를 쫓아가지 못한 채 개인인 자영업자들과 배달 라이더들에게 책임을 온전히 지우고 있는 것이, 바로 광화문 광장으로 나선 소상공인들의 뒷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최저 임금제'를 어찌한다고 해서 폐업율을 줄이기는 쉽지 않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무인 주문기, 중국에서 활성화된 스맛폰 결제 시스템 등 온라인과 오프 라인이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산업 환경에 맞는 제도적, 법적 환경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때다.  

by meditator 2018. 9. 1. 16:16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서로가 서로를 돕고 있으며  서로가 서로의 부분을 , 부품을 생산하고 있다.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조립품 같은 것.
우리는 지구라는 거대한  공장에서 서로를 조립하고 있다
                                             -     김중혁, 메이드 인 공장

자본주의 사회는 '물화'의 세계이다. 모든 인간은 '사물'을 통해 관계맺고 살아간다. 자본주의 사회가 고도화되어가면서 그 '물화'의 체계가 변화되어지고 심화되어졌을 뿐, 여전히 우리 관계 맺음의 근간에는 '사물'이 있다. 하지만, 거기서 본질은 그 '사물'과 '사물'로 맺어지는 체계의 핵심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일찌기 맑스 선생은 이 '물화된 세계'인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의 소외'를 일갈했다. 지난 27일 방영된 ebs다큐 프라임 <내 운동화는 몇 명인가>는 가장 흔한 사물인 '운동화'를 통해, 그 속에 소외되어 있던  '인간의 세계'를 한껏 드러낸다. 





사물의 이야기, 곧 인간의 이야기 
'사물'을 통해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는 시도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일찌기 1986년 일본의 공장을 삽화가 안자이 미즈마루와 함께 견학하여 당시 일본의 산업을 생생하게 그려낸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뜨는 나라의 공장>이 그러했고, 2014년 한겨레 신문을 통해 써내려간 칼럼을 출간한 김중혁 작가의 < 메이드 인 공장> 역시 공장이란 공간을 통해 사람과 시대와 공간을 복기해내었다.

그리고 일상의 삶에서 철학적 메시지를 건져내는데 탁월한 알랭 드 보통은 <일의 기쁨과 슬픔>을 통해 '일', 즉 노동의 현장의 생생함을 삶의 철학으로 설파한 바 있다. 물건이 드나드는 항구에서 시작된 '화물선 관찰하기'로 부터 시작되는 그의 시선은, 이내 물류로, 그리고 그 물류의 흐름을 타고 퍼져나가는 통조림, 그리고 우리가 하찮게 지나치던 그 통조림의 라벨이며, 그리고 간과되기 쉬운 사무의 자잘한 업무들, 회계, 창업 등등, 말 그대로 '일'의 전반적인 영역에 세심한 관찰과 촌철살인의 혜안을 내보인 바 있다. 거친 바다에서 잡힌 펄떡이던 참치가 어떻게 '사람들의 손'을 통해 통조림 캔으로 변신하게 되는가, 그 과정에 채곡채곡 쌓인 '직업'의 여정은 새삼 그 결결이 쌓인 사람들의 행보에 전율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ebs  다큐 프라임 - 내 운동화는 몇 명인가>는 tv로 온 알랭 드 보통 판 <일의 기쁨과 슬픔>과도 같다. 우리가 매장에서 자신의 개성과 패션을 따라 선택하는 운동화 속에 담겨진 사람들, 그들의 일이 한 시간 여의 다큐를 통해 묵직하게 전달되어져 온다. 




내 운동화는 어떻게 내게로 왔을까
시작은 마치 남태평양의 참치 잡이처럼, 운동화의 원료가 생산(?)되는 말레이지아 열대 우림으로부터이다. 

마이딘 빈 안실, 67세, 255mm의 신발을 신는 그는 말레이시아 뚜아란  숲에서 운동화 밑창의 원재료인 고무를 채취한다. 18세가 영국 식민지가 된 이래 독립 이후까지 말레이지아의 주요 산업이 된 고무 채취 산업의 종사자이다. 허리에 모기향을 매고, 고무 나무에 칼집을 내서 고무액을 채취하는 작업을 1분에 다섯 그루, 그와 같은 일꾼들이 하루에 500그루 분량을 채취한다. kg당 만원을 받는 오로지 손으로만 해야 하는 작업, 70~80 링긴, 하루 20만원 정도의 벌이, 젊은 시절 한때는 도시에서의 삶을 꿈꾸기도 했지만 6명의 자녀와 12명의 손주를 키워낸 이 일이 혹시라도 고무 신발을 신은 관광객이라도 마주치면 반가움이 앞설 정도로 이젠 '자부심'이 되었다. 

마이딘이 채취한 고무는 모아져서 화학 약품으로 세척하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얇고 부드러운 고무로 만드는 과정은 195명의 말레이시아원주민이 주축이 된 사바의 가공 공장에서 이루어진다. 그 가운데 카트리나 빈티 와시(45)가 있다. 일찌기 중학교를 마치자 마자 인도네이사인 남편과 결혼한 후 좀 더 안정된 일자리를 찾아 사바 지역까지 온 그녀가 주로 하는 일은 35kg 단위로 만들어진 고무 블록을 포장하는 일,  대부분의 원주민이 그렇듯이 농사일과 공장 일을 병행하는 그녀와 남편의 맞벌이는 '자식 교육'에 집중되어 있다.  지금보다 더 성공한 '고무 공장 홍보' 일과 같은 사무직으로 전향을 꿈꾸는 그녀에게 '고무'는 풍족한 삶의 근원이다. 

다른 이의 삶과 얽혀있는 한 사람의 삶, 
말레이시아에서 채취되어 1차 가공된 고무는 멀리 슬로바키아까지 여행을 떠난다. 슬로바키아 파르티잔스케는 1930년대 후반 신발 공장이 생기며 형성된 도시, 그곳에 도착한 고무는 본격적으로 운동화로의 변신을 시작한다. 

요제프 샤레이와 얀 쿠노하는 10대 후반부터  이 공장에서만 48년, 40여년을 일했다. 퇴직을 했었지만 다시 공장으로 돌아온 두 사람, 여전히 기계의 소음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거대한 롤러로 고무를 펴서 신발에 맞춰 재단하고 운동화 갑피에 얹는 일. 1939년에 만들어진 공장 1년에 4백만 컬레를 생산하며 만 오천명의 노동자가 북적이던 시절도 있었다.  슬로바키아의 올림픽 영웅 요제프가 이 공장에서 만들어진 운동화를 신고 트랙을 내달리던 88년, 그 시절을 정점으로 더는 공장의 기계는, 공장의 공정은 새로워지지 않았다. 1990년대 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사양산업이 되어가는 운동화 산업. 퇴직했던 요제프나 얀이 다시 돌아와서 일해야 될 정도로 일손이 귀해진 공장, 이들은 자신들이 나이먹어가듯, 자신들의 시대가 이 낡은 공장과 함께 저물어 가는 걸 실감하며 슬퍼한다.
신발과 함께 경력 30년 그녀의 손에서 운동화 패션이 완성되는 갑피 제작에 종사하는 마리아 아담 초바(57)에게 역시 공장은 나의 집, 그녀의 인생이다.



가장 일상적인 운동화를 전해주는 가장 일상과 먼 삶을 사는 사람들 
저물어가도 여전히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운동화는 슬로바키아의 공장에서 탄생하여, 비로소 운동화로서 첫 여정을 떠난다. 슬로바키아에서 독일 함부르크로, 그리고 다시 항구에서 배를 타고 남중국해 싱가폴과 홍콩을 지나, 부산까지 9800컬레의 동료들과 함께 컨테이너 박스 안에 담겨 5주간의 여행에 몸을 싣는다. 

그 여정에는 이제 갓 신혼의 일등 항해사 35세의 한국인 권태수씨와, 12년 경력의 갑판원 36살 미얀마 인 묘 코 코우 씨가 함께 한다. 선실에서 화물을 관리하고 선체를 정비하는 일을 '사무'하는 항해사와, 직접 몸을 움직여 컨테이너를 고정하고 청소하는 갑판원의 '협업'을 통해, 그들이 모르는 컨테이너 속의 신발들은 안전하게 부산에 도착하여 거리를 누빌 수 있다. 

2016년 기준 우리나라는 1억 8000만 컬레의 신발을 수입했다. 말레이시아, 슬로바키아, 무심코 신은 내 컨버스 운동화 한 컬레가 그리 오래 여행의 산물이었다니, 그리고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였던 말레이시아의 고무 채취 인부와 가공 공장의 아줌마 노동자, 그리고 운동화가 평생의 열정이라는 슬로바키아의 노익장 노동자, 그리고 컨테이너 선의 한국인 항해사와 미얀마인 갑판원 등이 내가 신는 운동화 한 컬레에 담겨 있다. 아니 함부르크 항에서 컨테이너 선을 옮긴 부두 노역 노동자와, 함부르크까지 옮긴 트럭 운전수와, 말레이시아에서 바다 건너 슬로바키아까지 옮긴 선원들은 또 어떻고, 물류만이 아니다. 고무로부터 시작했지만, 운동화 갑피가 되는 천과 가죽의 원료로 부터 시작되면 또 얼마나 수많은 사람이 더해져야 하는 건지, 내게 운동화를 건넸던 그 가게의 아르바이트 생 또한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세상은, 세상 사람들은  내 운동화 한 컬레를 통해 서로 이어지고 있다. 운동화는 그저 운동화가 아니라, 그들의 '노동'이며 '열정'이요, 삶이다. 일찌기 어느 시인이 니가 뜨거워 본 적이 있느냐며 연탄재 함부로 발길질 하지 말라 하셨는데, 이젠 뜨거워졌던 연탄재 때문이 아니라, 운동화가, 그 운동화에 담긴 연탄만큼 활활 타올랐던 수많은 삶이 무거워 함부로 발길질을 못하지 않을까 싶다. 



by meditator 2018. 8. 29. 16:24

'듣기만 해도 볼 수 있어', 어린 시절 사고로 청력이 극대화된 강권주(이하나 분), 보통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능력은 20Hz~ 20KHz, 그에 반해 강권주는 22khz 정도라는 돌고래 급이다. 이는 120m 떨어진 곳에서 작은 공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다. 그 능력 덕분에 119신고 센터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현장의 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119 신고 요원에 불과했던 강권주가 풀어내기엔 역부족이었던 사건. 그래서 강권주는 그 '소리'를 증명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 '소리를 기반으로 하여 범죄 유형을 분석하는 '보이스 프로파일러'가 되어 돌아왔다.  '듣기만 해도 볼 수 있는', 거기에 그 들었던 소리를 기반으로 사건 현장의 미세한 단서마저 포착함은 물론, 피해자나 범인의 상황이나 심리 상태까지 축측할 수 있는 강권주 팀장을 필두로 하여 119 신고 체계를 업그레이드한  '골든 타임팀'이 꾸려진다. 




강력한 사이코패스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시즌
강권주와 골든 타임팀은 119 신고 센터를 중심으로 하여 포진한다. 그런 그들에게는 현장의 귀가 된 그들의 수족이 되어 현장으로 달려가 사건을 수습하고 범인을 체포할 '수족'의 파트너 쉽이 필수적이다.  <보이스 시즌1>에서 그 '수족'의 중심에 강권주 팀장의 아버지와 같은 사건에서 아내를 잃은 '미친 개' 괴물 형사 무진혁(장혁 분)이 있었다. 드라마는 초반 이하나가 분한 강권주는 그 목소리는 물론 보이스 프로파일러라는 설정조차 생경했으며 반면 그녀의 파트너 무진혁의 장혁은 일찌기 <추노(2010)>의 대길이 이래 익숙해도 너무 익숙했었다. 이런 부조화는 모태구(김재욱 분)라는 깔끔한 슈트를 입고 철공을 휘두르는 극단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사이코패스와 매회 잔혹하면서도 퍼즐이 기막혔던 범죄 사건들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보이스 시즌1>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다. 

그리고 겨울의 찬바람과 함께 그래서 더 에렸던 2017년 초 <보이스 시즌1>이 찌다못해 숨통을 죄이는 듯한 2018 여름, 시즌2로 찾아왔다, 그런데, 팀장 무진혁이 사라졌다. 매일 사건을 쫓아다니느라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남편을 위해 도시락을 들고 나왔다 참변을 당한 아내를 죽인 범인을 쫓아 미친 개처럼 동분서주했던 무진혁 형사가 시즌 1내내 병원에 있던 아들의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시즌 1을 이끌던 사건, 강권주 아버지와 무진혁 아내의 죽음을 범인 모태구와 그를 집요하게 추격하던 무진혁 팀장과 함께 털어지고, 모태구 못지 않은 강력한 사이코패스의 등장으로 시즌2의 서막을 연다. 

<보이스 시즌2>는 마치 <보이스>라는 시리즈의 특장점이 '잔혹 범죄'에 있기라도 한듯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 가운데 배 위에서 벌어지는 형사 나형준에 대한 사이코패스와 그 하수인의 살해 및 시신 일부를 절단하는 잔혹한 사건으로 연다. 그런데 이 현장에는 범인과 공모자, 그리고 피해자 외에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었다. 바로 시즌2에서 출동팀 팀장이 될 형사 도강우(이진욱 분)이다. 




시즌2의 통일성, 변주, 그리고 확장 
도강우가 그 현장에 있었다는 건, 시즌 2의 가장 큰 변수가 된다. 경찰대 출신 시즌 1의 무진혁 못지 않게 범인을 쫓는데 물불을 가리지 않는 또라이 형사, 하지만 파트너 형사의 죽음은 뜻밖에도 그에게 '동료 형사 살인범'이라는 '함정'을 만든다. '팀'의 존재를 거추장스러워하는 반사회적 인물이자, 살인범인지, 정의를 쫓는 형사인지 모호한 도강우의 존재는 오로지 사건 해결을 향해 거침없이 달리던 무진혁이란 시즌 1의 캐릭터를 새롭게 변주해 내며 시즌2의 볼 거리를 확장시킨다. 

또한 시즌 1의 모태구 사건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목소리'에 기반한 119 응급구조 팀, 골든 타임 팀을 확고부동하게 안착시킨 강권주 팀장은 이제 팀원들을 새로이 정비하며 활약을 펼치려고 할 즈음, 무진혁 팀장의 공석을 이어받은 장경학 팀장의 사망 사건으로 시즌 1에 이어 다시 한번 강권주 팀장 이하 팀원들에게 숙명의 적을 탄생시킨다. 

팀원을 잃은 골든 타임팀과 동료 형사를 잃은 도강우의 출동 팀장으로서의 합류, 그렇게 시즌2의 조합이 꾸려진 가운데, 자신이 사망한 시신의 일부를 '수집'하는가 하면, 배후의 조정자이자 공모자, 그리고 음모자로서 방제수(권율 분)를 6회 전면에 등장시키며 드라마는 본격적으로 대립 구도의 각을 세운다. 거기에 일찌기 도강우에 대해 '사이코패스'라는 의심을 품은 나형준의 형이자 풍산지청 강력계장, 그러나  그 역시 승진에서 누락된 의혹이 있는 적인지 아군인지 모를 나홍수(유승목 분)를 더하며 인물 구도를 확장시킨다. 


​​​​​​​

시즌 2의 관전 포인트? 
<보이스 시즌 1>이 그랬듯이 시즌 2 역시 골든 타임팀의 119 신고 체계에 기반한 긴급 출동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매회를 이끈다. 스스로 보호 능력이 없는 어린 아이를 상대로 한 아동학대 범죄는 시즌 2의 어린이 성폭행 범죄로, 최종 보스에 의해 조장되는 카피 캣 범죄는 시즌 2에서는 종범들의 급발진 사건 등으로 시즌의 연속성을 환기시킨다. 또한 시즌 1에서 무진혁 팀장에게 도시락을 들고 가다 살해당한 '은형동 형사 아내 살해 사건'은 시즌 2에서 역시나 강권주 팀장을 위해 오이 소배기를 싸들고 가다 보이스 피싱 범죄에 연루된 박중기 형사 아내의 사건으로 변주된다. 이렇게 마진원 작가에 의해 이어지는 시즌 1과 시즌2는 시즌의 연계성을 가지며 시즌을 이어보는 시청자들에게 흥미를 배기시킨다.

물론 그럼에도 시즌 1과 시즌 2의 가장 큰 관전 포인트는 여전히 은형동에서 풍산동으로 지역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그 지역을 배경으로 경찰을 쥐락펴락하며 무시무시하게 암약하는 사이코패스의 존재이다. 모태구보다 더한 괴물이 나올 수 있는가 싶었지만, 첫 회 자신이 훼손한 시신을 찍고, 그 일부를 기념품으로 챙기는 살인마의 등장은 이미 '모태구'를 잊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시즌의 일관성 외에 규정을 어기고 나홍수 과정의 정보를 해킹한 진서율 팀원의 과오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강권주와 그런 그녀를 엄호하는 도강우, 박중기 형사의 아내를 몸을 던져 구하는 도강우 등 팀을 무시하는 듯하지만 헌신적으로 사건에 임하는 도강우 팀장으로 인해 팀원들 사이의 결속력이 더해지는 한편, 향정신성 의약품을 복용하는 도강우, 과거 도강우의 기억 상실을 형에게 고백하는 나윤수, 그에 더해 보이스 피싱 조직 총책의 검거 과정에서 보인 죽음을 방조하는 듯한 행동에 화룡점정으로 강권주 팀장에세 배달된 나윤수 사건의 공모자라는 메시지는 도강우에 대한 '진실'을 혼돈에 빠뜨리며 <보이스 시즌2>의 흥미를 배가시킨다. 낯설었던 이진욱은 모호한 도강우라는 캐릭터 덕에 어느 틈에 극의 중심에 서있는다. 

시즌 1은 성운시라는 지역성의 특성을 강조했다. 월남하여 성운시에서 버스 사업을 시작으로 이제 성운시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재벌과 그의  사이코패스 아들이라는 설정을 통해  우리 사회 재벌 족벌 체제의 암울한 부분을 극대화시켰다. 그렇다면 이제 풍산시로 자리를 옮긴 <보이스2>는 의문의 존재 도강우와 이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방제수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남길 것인가. 범죄의 해결 이상 사건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또한 시즌 2의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by meditator 2018. 8. 27. 15:42

eidf 페스티벌 경쟁 부문에는 세계 각국에서 출품된 다양한 이야기들이 포진되어 있다. 그 중에서 <마지 도리스>와 <모리야마 씨>는 한 사람의 삶을 전면에 내세운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한 사람은 그저 일인이 아니다. 그 '개인'을 통해 '사회'와 '문화'를 바라본다. 우리가 아는 세상 너머에 여전히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향유하고 지키고자 하는, 혹은 즐기고자 하는 '문화'를 통해, 우리가 아는 세계의 지평은 넓혀져 간다. 




74살에도 건재한 순록지기이자, 예술가 마지 도리스 
어릴 적 읽었던 북유럽 동화책에서 '라플란드'는 하얀 자작나무가 자라고 오로라가 빛나는 신비한 북극의 땅이었다. 순록과 눈썰매가 있어야 그곳에 갈 수 있는. 동화 속에서 만난 그곳이 실존이라기 보다는 환타지였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스웨덴의 1/4을 차지하는 노르웨이와 핀란드와 국경을 마주한 이곳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가 쉽겠는가. 하물며 그곳에 일찌기 석기시대부터 순록을 키우며 살던 원주민 사미족이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 것이다. 

<마지 도리스>는 바로 그 라플란드의 원주민 사미족의 대표적 예술가이다. 1970년대부터 사미족의 전통적 공간인 라플란드의 정서가 담뿍 담긴 목공예, 그림 등으로, 연극으로 예술 활동을 해오던 마지,  2017년의 겨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하지만, 스웨덴 북부 파렌자르카에서 사는 그녀에겐 그녀의 예술 활동만큼이나 겨울을 맞이하여 그녀의 농장으로 내려온 순록을 키우는 일이 중요하다. 

그녀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거의 다섯 시간을 걸려 이끼를 씻고 분류하여 순록에게 먹이는 일이다. 혹시나 솔잎이 섞이면 배탈이라도 날까 섬세하게 비벼대는 손길의 분류, 하지만 나누고 씻고 나누어주는 일상이 매일 매일 오다시피한 한 걸음 떼는 것조차 온 힘을 다해야 하는 눈 속에서는 큰 일이 된다. 하지만 이 쉽지 않은 일을 마지는 지난 20여년간 해왔다. 그녀의 부모님이, 또 그 부모님이 해왔던 전통대로. 봄이 되어 순록이 산으로 떠나면 2주 동안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할 만큼, 순록은 그녀의 가장 최측근이 되었다. 순록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젊은 시절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마지. 

다큐는 찌글찌글한 주름으로 뒤덮인 얼굴이 무색하게 긴 장화와 두터운 옷을 입고, 묵묵히 지붕에 올라 삽으로 눈을 치우고, 눈 속을 뚜벅뚜벅 걸어 순록에게 먹이를 나누어 주는 마지의 일상을 통해 전통적 삶을 끈질기게 지켜내는 강인한 한 사람을 그려낸다. 오로지 눈과 순록과 광활한 북극의 하늘만이 채우는 그 곳에서 알바를 하러 온 아프가니스탄인의 물음처럼 '외로운' 일상을 이어나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엄숙'하다. 그리고 그 엄숙함의 행간을 채우는 건, 촉박한 전시회의 일정에 맞춘 예술 작업, 음악들. 순록의 형상을 한 목공들, 그리고 라플란드의 자연을 닮은 그림은 그 자체로 마지의 삶이다. 

일찌기 파리, 캐나다 전 세계를 돌며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자유롭게 살던 젊은 날, 그리고 기나 긴 칩거, 이제 다시 그녀는 라플란드의 언어와 전통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다. 탄광과 모피를 위해 침략당했던 땅, 갱도에서 신음했던 동포들의 역사를 호소하며 자신들의 전통과 언어의 공존을 호소한다. 74살의 나이에 순록을 돌보고 예술 활동을 이어가는 게 쉽지않다지만 다음 겨울 순록과의 해후를 기대하는 여전히 꿋꿋한 라플란드의 대표적 예술가, 마지의 일상을 통해 라플란드가 빛난다. 

내게 집은 보다 사적인 공간이며 의미있는 곳이며 
완벽하지 않은 곳이고 최신 유행을 따라가려 기를 쓰지 않아도 되는 곳이며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아등바등대지 않는 곳이다. 
집은 무엇보다 자신을 위한 공간이어야 한다. 
                                     -줄리 포인터 애담스, <와비사비 라이프> 



노이즈뮤직처럼 편안함은 상대적- 모리야마 씨가 만든 도시의 숲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제 더는 모리야마 씨에게 '집'은 의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을 허물었다. 그리고 그곳에 숲을 만들었다. 그리고 숲 사이에 하얀 블럭이 점점이 박혔다. 층고에 따라 확장된 정육면체, 그곳에 뚫린 창문, 창문에 펄럭이는 하얀 커튼, 그리고 하얀 건물과 파아란 하늘은 커튼을 이웃하여 혼연일체가 된다. 가장 직선적인 공간이 가장 자연친화적인 듯 느껴진다. 아마도 거기엔 '집' 대신 그저 나무 사이의 '공간(큐브)'이 있기 때문일 듯.

모리야마 씨의 집은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니시자와 류에가 지은 모리야마 하우스는 그렇게 동경에서 가장 유명한 현대 건축물이다. 하지만, 그 집은 만든 건 니시자와 류에이지만, 모리야마 하우스에 '문화적 향취'를 더한 건 바로 모리야마 자신이다. 마치 오래전 옛집의 마당처럼 나무 아래에 마련된 대야에 물을 받아 세수를 하고, 이 '공간과 저 공간을 옮겨다니며 대청 마루처럼 건물 창 밖으로 발을 늘어뜨리기도 하고, 창문에 거의 머리가 나오다시피 드러눕기도 하고, 하늘이 보이는 창가 소파에 다리를 걸치기도 하면서 가장 편한 자세로 그가 가장 사랑하는 '독서'를 하는 일상, 그리고 그만의 비밀 공간인 지하 음악실을 찾아 경청하는 음악이 된 소음들(노이즈 뮤직), 

이탈리아에서 온 감독 일라 베카와 루이즈 르모안은 일본의 대표적 노이즈 뮤지션인 오모토 요시히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의 전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이 독특한 인물이 궁금해져 그와 일주일을 보내고, 그 시간은 작품이 되었다. 창문 여닫는 소리, 별 거 아닌 잡음들이 모여 하나의 음악이 되듯, 모리야마 씨는 '편안함은 상대적'이라 한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그대로 그의 공간 속을 관통한다. 열 개의 큐브 중 그가 사용하는 네 개를 제외한 나머지 공간들은 대여되었고, 대여된 건 그저 직육면체의 하얀 벽과 창문들 뿐, 그 안의 공간은 소유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세계로 존중된다. 하지만, 그들은 나무 사이, 건물 사이 틈인듯, 마당인듯, 골목길인 듯한 공간에서 종종 만나 이방인과 조우하고,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고, 빛나는 불꽃을 태운다. 

감독이 찾아가기 일주일 전 세상을 떠났다는 모리야마 씨의 애완견, 그 애완견은 나무 아래에 잠들어 있다. 그곳을 지키는 작은 조각상, 그 조각상의 의미를 묻자, 모리야마 씨는 짧은 영어로 난감해 하며 설명한다. 예수와 같은 것이라고. 하지만 자신은 종교가 없으니, 그건 이 물병이랑 다르지 않다고. 모리야마 씨의 이 짧은 설명은, 마치 소음이 모여 음악이 된 노이즈 음악처럼, 그저 하얀 큐브에 불과한 공간이 나무 사이에 자리 잡아, 그곳에 사람이 깃들여 살며 따로 또 같이 삶의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집이 아닌 집이 된 공간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 곳에 깃들여 유유자적 음악과 책으로 공간을 채우는 최근 트렌드로 대두된  '빠름에서 느림으로', '홀로에서 함께로', 그리고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변화시키는 '와비사비'적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와비 사비 (Wabi-sabi, わび・さび)일본의 문화적 전통 미의식,미적관념의 하나이다. 투박하고 조용한 상태를 가리킨다.)






by meditator 2018. 8. 23. 20:57

 아버지에게 딸이란? 그런 속담이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이라고. 아들 딸 차별이 아니라, 아들보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단 말은 하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딸은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꺼질세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존재다. 그렇게 자신을 애지중지 키워준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하루 아침에 '사라진다면'? 아버지를 잃고 거리로 나선 소녀가 있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희망'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이집트 소녀 아말이다. 아말은 아버지의 바램대로 '희망'찬 삶을 살았을까?

2010년 튀니지에서 일어난 시위를 계기로 '아랍 민중들은 독재 정권에 대항하여 '민주화'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아랍의 봄'이라 명명된 이 민주화 운동은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 등으로 퍼져나갔다.  우리에게는 피라미드의 나라로만 막연하게 알려진 관광국, 하지만 국민의 40% 이상이 빈곤선 아래의 삶을 유지하는 빈부 격차가 심한 나라, 그곳에서는 이미 2008년 야권 지도자들과 노조를 중심으로 시민 불복종과 파업으로 시발된 민주화 시위가 시작되었다. 




아버지를 잃고 거리로 나선 소녀 
그리고 구타와 고문으로 사망한 청년 칼리드 사이드 사망 사건을 계기로 이집트 사람들은 무바라크 정권의 인권 유린 행위에 항거하여 전국적인 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평화적 시위를 주장하며 시위대는 행진을 했지만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제 막 십대에 들어선 소녀 아말의 아버지 역시 목숨을 잃었다. 경찰이었던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는 시위에서 진압하던 경찰들의 맞은 편에 섰다. 그리고 이제 소녀 아말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거리로 나선다. 

다큐는 혁명 당시 14살이던 아말을 그녀가 19살 성인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2011년부터 2016년까지 쫓는다. 14살의 소녀 아말은 사라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정부에 대한 분노로 승화시키며 거리로 나선다. 짧은 머리, 후드 차림의 소녀는 또래의 소년들과 함께 거리를 지킨다. 

그리고 그렇게 거리에 선 아말의 현재 사이에 간간이 아버지가 찍었던 어린 시절 아말의, 이제 막 앉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티없이 밝기만 했던 화목했던 가정의 딸 아말과 그 가족의 특별한 날 찍었던 홈 비디오를 끼워 넣으며, '민주화 운동'이 아말의 가정에, 아말에게 가져온 비극을 대비 시킨다. 


​​​​​​​

투사, 그리고 여자 
상대적으로 개방적이라 하지만 이슬람 국가인 이집트에서 '소녀'인 아말이 거리의 투사로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늦은 밤 함께 시위를 벌이던 동료들은 그녀에게 더 늦기 전에 집에 돌아가라 타이른다. 반발하는 아말, 나도 너희랑 똑같은 동지인데, 왜 나만 돌아가라고 하느냐고. 돌아오는 대답은 '너가 여자이니까.' 

그 동지의 대답은 아말은 좌절시킨다. 하지만, 또래로 보이는 남자들과 축구를 하며 밝게 웃으면서도, 때로는 그들이 자신을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지 않고, 아니 남자처럼 대했을 때, 역시 아말은 혼란스럽다. 그러면서도 늘 아말은 당당하게 자신은 여자이지만 너희와 똑같은 동지라 주장한다. 

14살, 15살, 16살, 거리의 투사로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아말에게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녀의 첫사랑이었던 동지는 2013년 군부 쿠데타 과정에서 아버지처럼 사라졌다. 아말은 진압하는 경찰들에게 머리채를 질질 끌려다녔다. 그리고 혼돈의 과정은 그녀의 팔목에 몇 개의 상흔을 남긴다. 

거리에서 그녀가 목격한 진실에 의거, 선거를 통한 덜 나쁜 사람을 뽑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선택적 정의에 분노하던 아말,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미성년자인 그녀에게는 선거권이 없다. 그저 편의적 선택을 하는 엄마와의 설전 뿐. 그리고 동지이자 새로운 연인이 된 친구는 그녀를 '여성'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려고 하는데. 

1981년부터 장기 집권했던 무바라크 대통령을 시민들의 힘으로 권좌에서 내몰 때만 해도 이집트에는 민주화의 서광이 비춰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14살 소녀 아말이 19살 성인의 문턱에 들어서기 까지, 이집트는 선거를 통해 집권했던 이슬람 형제단 소속의 무르시 대통령이 전국민적 지지를 얻지 못한 채 '종교독재'를 하다 결국 1년 여 만에 군부에게 감금당하고 만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압델 파타 엘 시시 장군,  2014년 시위도중 잡힌 사람들에게 무더기 사형 선고를 비롯하여, 자신을 비판한 앵커 추방 및 길거리에서 시민 인터뷰한 기자 체포 등의 언론 탄압 등으로 민주화 세력을 짓밟는 한편,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하여 2018년 현재까지 정권을 연장하고 있다. 아랍의 봄은 이게 끝이 안보이는 겨울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거리로 나섰던 소녀 아말은 어떻게 되었을까? 엄마와의 설전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았던 소녀는, 여자라 해서 뒤로 물러서지 않겠다던 당찬 소녀는 이제 히잡을 곱게 쓰고, 대학 시험 준비를 하는 소년가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래 거리로 나서 '공부'라는 것과 담쌓고 지냈던 시간, 약학을 공부하고 싶던 소녀는 대신, 판사인 엄마,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법학을 전공하고자 한다. 너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가던 그 경찰이 되는게 괜찮겠느냐는 친구의 질문, 그 질문은 아말에게 숙제로 남는다. 스스로 체제의 일부분이 되어 가는가, 아니면 그 체제의 내부에서 새로운 흐름이 될 것인가. 낙오자가 될 것인가. 실패한 혁명, 아버지와 연인, 사랑하는 이를 잃어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소녀는 이제 다시 출발점에 섰다. 

by meditator 2018. 8. 21. 17:56

구한말 의병의 이야기를 야심차게 다룬 <미스터 선샤인>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남자 주인공인 유진 초이(이병헌 분) 및 주요 인물 구동매(유연석 분)을 '국외자'로 설정하여 '논란의 중심'에 섰다. 아무리 어린 시절 조국의 은혜를 받지 못해 고국을 떠난 노비의 아들이나, 백정의 자식이라도 그들이 이제 '미국인'이 되어, 혹은 일본의 낭인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설정은 제 아무리 그들의 극적인 '자각'을 예정한다 했어도, 그들의 역사적 존재로 인해 쉽사리 두 남자 주인공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도록 했다. 그런데 바로 그 '국외자'였던, 그래서 늘 '경계'에 섰던, 아니 스스로 경계 밖의 존재라 자신을 규정했던 두 사람에게 스스로 경계를 넘어올 수 밖에 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국인 유진, 의병의 저격 대상이 되다. 

유진은 노비였다. 아비가 노비였고, 어미 또한 그러했다. 어미의 미색을 탐한 외부대신 이세훈과 그에게 잘 보이려던 희성의 조부가 억울한 누명을 씌워 유진이 보는 앞에서 아비를 멍석말이로 죽였다. 어미는 유진을 살리기 위해 희성의 어미를 겁박했고, 유진이 무사히 그 집에서 도망치는 걸 보고 우물에 몸을 던졌다. 추노꾼을 피해 어미의 유언에 따라 유진은 조국에서 가장 먼곳 미국행을 택했다. 낯선 미국 땅에서 조선의 어린 소년은 이방인의 놀림을 피하기 위해 총을 잡았고, 그 총이 그를 미국 시민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총'의 덕택에 그는 조국에 미국의 장교로 돌아오게 되었다. 당연히 그에게 자신을 버린 조국은 없다. 그는 이방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편의에 따라 그를 조선인으로도 미국인으로도 부른다. 경계에 선 유진, 하지만 그는 철썩같이 자신을 미국인이라 생각하려 한다. 


유진은 조선의 왕 앞에서도 미국인이었다. 유진이 자신의 부모를 죽인 외부대신 이세훈을 조선의 정부와 '협력'하여 제거하자, 그에 호감을 가진 고종은 '한국인'인 그를 조선의 '군사' 고문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하지만, 오로지 이세훈을 역모죄로 몰기 위해 '의병'과 '정부'와 협력했던 그에게 고종의 청은 '논외'의 문제였다. 어디까지나 그는 '미국인'이었고, 미 영사관 주둔 장교일 뿐이었다. 

그런 그의 '철옹성'에 돌을 던지기 시작한 건, '사랑'이었다. 남자의 양복을 입고, 총을 들고 담 위에서 만났던 고씨댁 영애 고애신(김태리 분)은 어느 틈에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자신과 같이 총을 들었던 그녀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신분의 여성이었다는 그 다름이었을까, 대나무처럼 위기의 상황에서 더 꼿꼿해지는 그녀의 품성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그런 꼿꼿함 뒤에 숨겨진 자신과 같은 냄새를 풍기는 '고독' 때문이었을까, 유진이 한글을 배워가고, 애신이 알파벳을 한 자 한 자 익혀가는 속도를 추월하여 두 사람의 마음은 깊어진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유진의 국적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외려 거리에서 총격을 벌이던 애신 대신 자신의 팔에 총상을 입어가면서 까지 대신 총을 들고 나서는 유진은 미국인 장교였기에 그녀를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미국인'이라는 존재가 그에게는 '애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좋은 '장치'였다. 

그러나, 도자기를 담은 나무 상자 안의 소년을 기꺼이 한 달 여의 기간 동안 배 아래 칸에 숨겨 함께 미국으로 동행했던 선교사 요셉의 죽음은 '미국'이란 울타리 안에 있던 유진을 흔든다. 그저 아버지같은 선교사인줄 알았던 요셉, 하지만 그는 고종의 밀서를 품에 안고 이완익이 보낸 자의 저격으로 죽음에 이른다. 미국인이었지만 조선을 위해 일하다 죽은 '아버지'같은 요셉, 유진은 그런 그의 죽음을 덮으려는 조선 정부 등의 처사에 반발한다. 그에게는 지금 요셉의 죽음을 덮으려는 조선 정부나, 그의 죽음을 사주한 이완익이나 차별성이 없다. 

요셉의 죽음을 파헤쳐가던 유진, 그 과정에서 그가 알게된 사실은 정문 휘하 '의병단'에게는 위기였다. 그들에게 유진이 파헤쳐들어가는 건 그저 사건이 아니라, 의병의 전모였으니까. 그러기에 '미국인'인, '이방인'인 유진은 의병에게는 위험한 인물이었고, '제거' 대상이 되고 만다. 이는 역으로, 유진에게는 이제 '이방인'이 될 지, '의병'의 동지가 되어야 할 지 결정의 순간이 다가오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건 앞서 군사 고문관이 되어달라는 고종의 청탁과는 결을 달리한 선택이다. 애신 앞에서 노비의 신분이었던 자신의 '전존재'를 밝히던 그 순간과도 다른 것이다. 드라마는 이제 본격적으로 미국인이었던 유진을 선택의 벼랑으로 몬다. 더구나 총을 들고 그를 저격하려 올 사람은 애신이다. 이제 더는 '미국인'이라는 존재가 그의 '안전 장치'가 될 수 없다. 




일본의 개, 구동매, 버림받다. 

조선에서 백정은 사람이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조차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없으며, 매질은 일상이었으며 백정의 여인인 게 들통나면 욕보이는 게 하등 이상하지 않을 존재, 그런 백정은 조선의 신민이 아니었다. 부모들이 조리돌림을 당하며 죽어가고 목숨을 잃을 뻔했던 동매를 애신이 자신의 가마로 구해주었다. 겨우 목숨만 보전한 채 조국을 떠난 동매를 품어준 건 일본이었다. 조선에서 매질과 놀림의 대상이었던 그의 칼은 일본에서 그를 출세하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기꺼이 일본인이 되었다. 기꺼이 그곳에서 짐승을 잡던 칼을 사람에게 겨누었고, 그게 동매를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행세'하게 해주었다. 그런 그가 '일본'을 등에 업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양반도 아니지만 그가 '행차'하면 사람들을 고개를 조아리며 뒷걸음질 친다. 그의 칼 앞에 일본인들조차 움찔한다. 그는 그렇게 '무신회' 한성지부장으로 호가호위했다. 

하지만 그의 위세는 '일본'이라는 그늘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서로 일본의 앞잡이이었지만, 그들의 뜻의 서로 달라진 순간, 같은 일본의 개였던 이완익과 동매는 '적'이 된다. 마치 사냥개가 사냥이 끝나자 '개고기'용으로 바뀌듯이, 덩치가 커져 손아귀가 잡히지 않은 낭인 동매는 이제 고애신의 조부 고사홍을 잡을 '개'일 뿐이었다. 살기 위해서 기꺼이 일본을 위해 칼을 잡은 동매, 이제 그는 자신의 주인이었던 일본이 그를 버리자 선택의 기로에 선다. 마치 매타작을 당하다 도망치던 개가 주인이 부르자 쪼르르 달려오는 어리석음을 되풀이 할 것인지, 그게 아니면 주인을 물 것인지, 거기엔 갖은 고문에도 차마 입에 올리지 못했던 애신의 조부, 아니 죽어도 될 목숨을 귀하다 살려준 애신이 있다. 


​​​​​​​


그렇게 이방인이던 유진과 동매는 경계인으로서 안온했던 존재의 위기에 봉착한다. 그리고 그건, <미스터 선샤인>이 그리고자 하는 '의병 항쟁'의 큰 흐름과 맞물린다. 이방인이었던, 그리고 노비이자, 백정, 조선의 신민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그들마저 조국을 구하기 위해 총을 드는 순간, '의병 항쟁'은 극적이 된다. 그러기 위해, 유진은 미국인임에도 조선을 위해 일하던 선교사 양아버지를 잃게 됐고,  동매는 그가 의탁하던 일본과 또 다른 일본의 앞잡이의 배신에 봉착하게 된다.  가장 그들이 믿던 것들을 잃는 순간, 그들은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직시하게 될 것이다. 




그간 드라마에서 강력한 열강의 시민이었던 유진과 명성황후 시해 사건 연루 논란이 까지 일었던 일본의 낭인인 동매는 '역사적으로 불편한 존재'였다. 그들의 극적인 자각을 위한 장치였음에도, 사실 그들의 존재는 <베르샤이유 장미>의 오스칼이나, <성균관 스캔들>의 이선준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아직도 국가대 국가의 경기에서 한일전은 '필승'해야만 하는 전국민적 관심사가 되듯, 역사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시절의 이야기는 미국인과 일본인의 그늘에서 호가호위하는 주인공들의 존재를 편안하게 즐길 수 없도록 만든다. 

무엇보다 이제 GDP 1조 5608달러 그 전해보다 떨어졌다는데 그 전에 11위, 지난 해 12위의 국제적 위상의 국가에서 구한말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침탈 속에서 무력하기만 했던, 그리고 그 무력했던 국가의 상황 속에서 일본의 앞잡이들이 판치는 상황을 지켜보는 건 편치 않은 것이다. '이완익'으로 대표되는 일본 앞잡이가 조선의 정부를 쥐락펴락하는 상황은 더더욱 불편하다. 하지만, 허구인 '이완익' 만큼이나, 사실 궁내부 대신 정문에서, 도공 황은산, 포수 장승구로 이어지는, 나아가 해외 지부까지 준비되는 의병의 상황 역시 '픽션'이다. 과연 구한말 우리는 그렇게 조직적으로, 신분 제도를 넘나들며 양반과 천민이 손을 잡고집요하게 저들의 침탈에 대비했었을까? 픽션의 한계, 픽션의 자율성을 어디까지 여유를 줄 수 있는가 그 문제이지만, 여전히 일본이라 하면 곤두세워지는 우리의 신경은 드라마를 편하게 볼 수 없도록 만든다. 아마도 이런 상황이라면 영국 드라마 <닥터 후>에서 영국 여왕을 괴물 외계인으로 표현한 설정은 불가능할 것이다. 

진짜 문제는 그런 구한말의 시대 상황에 대한 우리의 '무지'이다. 국사 시험에서 고종의 아버지 대원군의 이름에 모 배우의 이름을 쓸 정도는 아니라지만,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를 '드라마는 드라마일뿐'이라고 여유롭게 시청할 만큼 우리의 역사적 지식이 여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유롭지 않게 만들 정도로 현실의 국사 교육이 일천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들이 <미스터 선샤인>을 보고, 구한말 우리의 무기력함을 지배적으로 아이들이 인식할까 우려할 만큼, 아이들은 학교에서 겨우 일주일에 한번, 그것도 달달 외는 식으로 우리 역사는 배우는, 그렇다고 어른이라고 뭐가 다를까 싶은 우리의 '리얼'이 사실 더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 경계인에 서, 이제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된 주 이방인 주인공의 선택, 그 픽션의 울림이 커진다. 드라마를 통해 실감하는 역사이다. 


by meditator 2018. 8. 20. 16:05

지난 4월 16일 대통령 직속 교육 위원회는 2020년 대입 제도 개편과 관련하여 이 문제를 '공론화'로 해결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공론화 위원회'가 구성되고, 위원장에 전 김영란 대법관을 위촉했다. 또한 대입 제도 개편 특별 위원회와 공론화 위원회를 구성하고, 절차에 따라 공론화 과정을 거쳐 8월 3일 대입 제도 개편 공론화 위원회 결과를 발표하고, 7일  특위의 교육제도 개편 권고안을 결정했다. 네 달 여의 교육 공론화 과정, 이 과정은 무엇을 남겼을까? 8월 16일 <다큐 시선>이 이 '공론화'에 대해 알아본다.




평범한 시민들의 숙의를 통한 교육 개혁 공론화 
충북 제천에 사는 귀농 12년차 김은중(67) 씨는 옥수수를 모두 따서 팔 것과 보관해 놓을 것을 분류하는 등 분주한 하루를 보낸다. 여름날 하루가 한 달 같은 농부의 시간, 하지만 김은중 씨는 그 소중한 시간 중 2박3일을 교육 공론화 숙의 토론을 위해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날 그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 이미 자식들의 교육을 다 시킨 나이지만 국가 백년 대계 교육의 공론화 과정에 기꺼이 참여를 결정했다. 전화가 걸려올 당시 피씨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던 만학의 간호학도 김원희 씨(26) 역시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모두 전화 상담원에게 자신들처럼 교육에 무관심한 일반 시민도 그런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렇게 19세 이상 성, 연령, 지역 등 마치 우리 전국민의 분포도를 축약해 놓은 듯한 2000명이 1차 설문을 통해 뽑혔다. 그리고 그들 중 대입 전형에 대한 태도나 책임감 등을 인터뷰하여 최종 400 여명이 공론화의 주역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전국에서 뽑힌 우리 국민의 표본 집단을 통해 하고자 하는 공론화란 무엇일까? 전 대법관이었던 김영란 위원장은 이런 일반인들의 교육 공론화 과정을 재판에 빗댄다. 기업 소송, 하지만 판사는 기업의 전문가가 아니다. 하지만, 양쪽의 의견을 잘 들어보고, 그와 관련된 자료와 여러 전문가의 의견을 취합한 판사는 재판의 결정을 내린다. 그렇듯, 김영란 판사는 공론회 과정에 모인 일반인들에게 '교육 대계의 판사가 되어보심이 어떻겠느냐 권한다. 




공론화란?
그렇다면 이 일반인들이 모여 하는 공론화는 무엇일까? 지난 촛불 혁명 과정에서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그간의 '대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불신을 강하게 표명했다. 또한 촛불을 들며 국민이 직접 행동하고 바꿔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에 따라 정책 과정에서 시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직접 민주주의 적 방식'에 대한 긍정적 모색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 시작은 신고리 5.6호기 재가동 문제에서 국민의 뜻을 모아 결정을 내린 공론화 과정이다. 

'공론화'는 말 그대로 함께 모여 의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논의 과정을 통해 '합리적 해법'을 모색해 내는 것이다. 이른바 관심있는 이들 끼리 모여 하는 '공청회'와도 다르고,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막연한 자신의 의견을 전하는 '전화 여론 조사'와도 다르다. 국가 교육 특위에서 전문가와 각계 각층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여 4 가지 공론화 의제를 선정하는 것으로 공론화의 여정은 시작된다. 



이 의제들에 대해 각 지역별 국민 대토론회를 통해 알리고, 미래 세대 토론회를 통해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한다. 또한 tv 토론회는 보다 광범위한 국민들의 이해를 도모한다.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시민들로 구성된 공론화 위원회의 '숙의 과정'을 1, 2차 숙의 과정을 거친다. 

김원중, 김원희 씨는 공론화위원에 선정된 후 보다 내실있는 토론과 결정을 위해 마치 수험생처럼 보내준 자료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공부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e러닝의 진도가 꼼꼼히 체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체크 때문이 아니더라도 국가의 중요한 교육 정책에 대한 책임이 공론화 의원들을 '가열찬 학습'에 매진토록 한다. 그저 공부만이 아니다, 신문 기사도 보고, 전문가들의 의견이 어떤 것이 있는가 찾아보기도 한다. 박경희 씨(54)는 입시 교육을 거친 혹은 그 과정에 있는 자녀들과의 대화가 늘었다. 

그렇게 비록 짧은 2주의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통해 공론화의 의제들을 숙지한 전국의 위원들이 한 곳에 모인다.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지는 공론화 숙의 과정, 모인 시민들은  먹고 자는 시간 외에 토론, 또 토론을 하며 '숙의(깊이 생각하여 충분히 의논)하고 중지를 모은다. 평등하게 모인 이들은 그 누구에 의해서  '주도'되지 않는(비독재성), 숙의 과정을 거듭한다. 




그렇게 4개월 여의 장정, 드디어 8월 3일 공론화 숙의 과정의 결과가 발표되었다.'제시된 의제 1과 2가 각각 1,2위로 결과가 나타났고, 양자 간에 통계적 유의미한 차이는 없다할 만큼 절대 다수가 지지한 안은 없었다. ' 

수능 위주 전형 45% 선발이라는 결과에 대해 대학들은 특별한 입장을 내놓지 않은 반면, 여론은 엇갈렸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선거 과정에서 내놓은 '절대 평가 공약이 후퇴했다'는 반발이 이는 반면, 시민이 참여한 직접 민주주의 과정에 의의를 두어야 한다는 평가가 엇물렸다. 200억을 들인 개편안이라지만 결국 또 문제 풀이 수업의 되풀이라는 보잘 것없었다는 의견과 시민성과 전문성이 조화를 이루었다는 의견이 대립됐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결과보다, 애초에 국민들 의견과 상관없이 런치 세트 고르듯 사지선다 4가지 개편안을 제시한 것에서 부터 문제를 제기한다. 즉, 어떤 걸 공론화에 붙일 지에 대한 사전 공감대가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함과 동시에 과연, 대입 제도가 공론화라는 과정에 적합했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었다. 마치 서울 시가 미세 먼지 문제와 관련하여 3000 명의 공론화 과정을 거쳐 미세 먼지가 심한 기간에 대중 교통 무료라는 극약 처방을 내놓았지만 차가운 여론에 시달렸던 선례에 빗대어졌다. 

그렇다면 뽀족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 대입 제도 개선에 대한 공론화 과정은 실패한 것일까? 이미 서구에서는 몇 십년, 혹은 몇 백년의 시행 착오를 거쳐 자리잡은 직접 민주주의적 과정을 우리가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우리 사회에 '정치적 문화'로서는 생소한 공론화에 대한 보다 너그러운 이해가 있어야, 아직 설은 이 제도의 정착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다. 


​​​​​​​

첫 술에 배부르랴
하지만 사회 곳곳에서 이런 '공론화'를 통한 직접 민주주의적 과정은 끊임없이 시도되고, 나름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서울 광진구 중곡동에 자리잡은 병원, 오래되고 열악했으며 거기로 뛰쳐나오는 정신 질환자들을 수용했던 이 병원은 동네 주민들의 기피 대상이었다. 당연히 '이전'이 요구되던 상황, 지역 주민들은 섣부른 결정 대신 2009년부터 1년 여의 공론화 과정을 거쳐 이 낡고 오래된 병원을 재건축하여 지역의 랜드마크로 거듭나도록 했다.  끊임없이 회의를 거듭하고, 연구하고, 내 주장과 함께 타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려 애썼던 '20여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365일의 여정'은 이제 병원 내의 역사적 기록으로, 그리고 주민의 자부심으로 남겨졌다. 

성동구에 있는 도선 고등학교의 학생 자치 실험은 이제 타 학교의 탐방 대상이 될 정도다. 교표, 교복은 물론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가사를 짓고 직접 녹음까지 한 교가까지 학교 내 학생들의 많은 활동 들이 학생들의 결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심사숙고하고, 공론화 과정을 통하여 조금 느리더라도 맞춰가며 합의점을 찾아내는 이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이라 학교는 자랑한다. 

유럽 식의 참여적 의사 결정 방법에는 시나리오 워크숍, 합의 회의, 시민 배심원제, 공론 조사, 시민 회의, 원탁 회의 등 다양한 숙의 민주주의적 방식이 있다. 그 중에서 이제 우리는 '공론화'라는 과정을 경험했을 뿐.  공론화의 결과가 아쉽다지만, 막상 전국 토론회에서 그토록 저마다 전문가라 자부하던 시민들의 참여는 저조했다. 물론 전국 토론회 과정 자체가 학생, 학부모 당사자들의 참여 접근성에 대한 배려도 낮았던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비록 짧은 시간의 학습을 거쳐 공론화 과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교육 무관심자'에서 적극적인 주체자로 거듭났다. 결과를 차치한 공론화 과정에 참여한 개개인으로 보자면 이보다 더 성공적인 '직접 민주주의의 성과'는 없다. 이제 첫 걸음을 뗀 직접 민주주의 방식으로서의 '공론화', 그 무효성을 주장하기 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과정과 제도에 대한 고민을 먼저 할 때다. 




by meditator 2018. 8. 17. 20:03

2018년 광복절 ebs의 다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풍성했다. 그 문을 연 건 시간을 거슬러 1920년대의 중국 길림성 봉오동이다. 일제 하 독립군을 길러내는 독립군 기지하면, 이회영의 신흥 무관학교가 자리했던 서간도, 러시아 연해주의 최재형이 중심이 된 지역이 대표적으로 꼽아진다. 이에 ebs는 한,중, 일, 러 4개국 취재를 통해,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를 가능케 했던 봉오동 신한촌에 자리잡았던 봉오동 독립군 기지를 방송 최초로 공개한다. 또한, 이 독립군 기지를 만들고 유지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간도 제 1 거부라 불리웠던 최진동, 최운산, 최치홍 삼 형제의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소개한다. 






간도 최씨 삼형제의 바톤을 이어 받은 건,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동원 등 숨기고 싶은 일제의 만행을 평생에 걸쳐 집요하게 취재한 기록작가 하야시 에이다이의 일대기이다. (일본의 역사적 만행과 치부 드러낸 일본인, 그가 남긴 한마디 [TV리뷰] < EBS 광복절 특집다큐 > 하야시 에이다이의 끝나지 않은 기록, 김진수)

그리고 광복절 당일, ebs 광복절 특집은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3.1운동 100주년을 향한 거대한 여정 <역사의 빛 청년>, 그 첫 발을 <하와이 애국단을 찾아서>로 내딛는다. 1년 여의 여정을 이끈 이는 다름 아닌, 꽃할배로 돌아온 이순재 선생이다. 광복을 맞이하던 해 12살,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던 광경을 기억하던 아이는 이제 8순의 노인이 되어 역사의 빛이 되었던 청년들의 역사를 설파한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마련한 하와이 노동자들의 피땀어린 돈 
그렇게 이순재 선생과 함께 떠난 하와이, 그곳은 서핑과 아름다운 자연의 휴양지가 아니라, 사람 키보다 굵고 거친 사탕수수만이 빼곡이 차라던 고난의 역사가 서려진 땅이다. 1903년, 1월 13일 102명의 한국인이 처음 하와이 호눌룰루에 도착했다. 고국을 떠난지 한 달, 저 마다의 사연이야 있겠지만, 결국 저물어 가는 조선이 그 막막한 태평양을 넘어 자신의 신민을 이 낯선 이방의 땅으로 몰았다. 새벽 4시 반에서부터 꼬박 12시간, 그렇게 하루 70센트를 받으며 보낸 노동의 시간, 그리고 당연히 피부 색이 다른 이들에게 돌아온 편견, 차별, 그리고 고난, 그렇게 호눌룰루에 도착한 한국인들은 30 여곳 사탕수수 농장 등에서 일을 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먹고 살아가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버거웠을 것이 분명했을 사람들, 그런데 그 이역만리 타국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그 먼 곳으로까지 보내버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허리춤을 더 졸라맸다. '하와이 애국단', 이 바로 그들이다. 이순재 선생과 취재진은 1923년 결성되어 독립 운동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대표였던 임성우 선생, 현도명 선생 외에 훈장은 커녕 조명된 적이 없는 애국단의 나머지 단원들의 행적을 밝히고자 하와이로 떠났다. 

오하우섬 와이우아 올리브 거리 1907년에 세워진 교회가 있다. 하와이에 이민온 동포들은 39개의 교회를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그 중 올리브 연합 교회에 이민의 역사가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이순재 선생과 동갑인 김창완 노목사는 자식들이 팔고 떠난 집의 쓰레기 더미를 뒤져 이민의 기록을 모았다. 그리고 그 누렇게 낡은 기록들 속에, 숨겨진 역사, 비밀 단체였던 하와이 애국단의 은밀한 도모의 기록이 남겨져 있었다. 

그렇게 낡은 영수증과 종이 쪽지 갈피에서 찾아낸 기록에 증거를 더한 건, 한국 독립 운동사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이다. 상해의 임시 정부, 하지만 말이 '정부'지 독립을 위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처지를 김구 선생은 '거지 소굴'이라 표현한다. 쓰레기 통을 뒤져  배추 뿌리로 연명하는 처지, 김구 선생은 독립 운동은 커녕, 생존조차 위협받는 처지에 해외 동포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임성우 선생 등이 편지를 보낸다.  '생색낼 일을 하고 싶은데 자금이 필요하다면 주선하겠다'는 반가운 답신이었다. 그리고 도착한 하와이 동포들의 독립 자금, 여전히 행색은 거지꼴이었지만, 이 해외 동포의 자금은 생존에 급급했던 임시 정부의 전술적 변화, 그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일본의 만주 침략이 노골화되던 시기, 하와이로부터 온 1000 달러, 그 돈으로 임정은 우리 독립운동사의 쾌거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준비한다. 폭탄이 되고, 의거의 준비 자금이 된 이 1000 달러는 어떻게 마련된 돈이었을까?

당시 하와이 교포들의 생활은 먹고 살기도 빠듯한 생활이었다, 김창완 노목사가 찾아낸 대한 독립 의연금 영수증에 써있는 금액 10원, 그 돈은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의 한 달 월급 15달러의 반 이상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노목사는 감탄한다. '이 돈을 보내고 그 분들은 뭘 먹고 살았나'라고. 현도명 선생의 막내 딸은 기억한다. 어머님이 가족들도 좀 생각하라고 아버지한테 내던 짜증섞인 하소연을. 

하지만 그렇게 먹을 것조차 아껴가며 모은 돈을 고국으로 보낸 동포들의 이름이나 존재를 찾을 길이 없다. 현도명 선생의 막내 따님의 기억을 쫓아 찾아낸 한 분, 영호 아버지, 그 분을 다큐 제작진은 김예준씨라 추측해 본다. 


​​​​​​​

인색했던 아버지의 숨겨진 역사, 
혹시나 해서 찾아낸 김예준 씨의 아들 영호 씨, 하지만 아들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었다. 미군 기지 세탁소 일을 하셨던 김예준 씨, 엄격하고, 인색하기 이를 데 없었던 분, 침대 메트리스 밑에 돈을 모으셨지만 자식들은 어려서 부터 아르바이트를 하게 만들었던 분, 그래서 돌아가신 후 무덤조차 찾게 되지 않았던 냉정한 기억만 남긴 아버지. 

하지만 그렇게 자식에게 기억된 아버지는 사실 한인 애국단에서 독립 운동 자금을 관리하셨던 분이었다. 자식들을 어린 나이에 돈을 벌게 만들면서도 침대 메트리스 밑에 숨겨두었던 그 돈은 바다를 건너 임정의 독립 운동 자금이 되었다.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은 늙은 아들은 뒤늦게 아버지의 숨겨진 역사를 알고 헤매어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후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비록 늦은 소식이지만 자식들에게 전하며, 그저 인색한 아버지가 아닌 자랑스러운 독립 운동가 아버지를 기린다. 

그런데 왜 당시 하와이의 독립 운동가들은 빛바랜 추억으로만 기억되어야 할까? 거기엔 하와이까지도 미친 일본의 영향력이 있다. 영사관 직원이 밀정이 되어 살피어 단체 계보까지 만들던 상황에서 당연히 임정의 독립 자금 지원은 비밀 활동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다.

슬픈 독립 운동의 역사가 있다. 당시 하와이 사회에는 교육, 문화 운동에 주력하자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와, 무장 투쟁을 해야 한다는 박용만이 중심이 된 국민회의 갈등이 첨예화되었던 시절이었다. 그 중에서도 미국 내 독립 운동에서는 이승만의 영향력이 컸던 시절, 그러기에 국민회 계열의 한인 애국단 사람들은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더해 그분들의 활동이 해방 후에 알려지지 않은 데는 조국으로 돌아가 대통령이 된 이승만과, 그 수하들의 횡포도 있다. 심지어 해방 후 고국에 돌아가고 싶었던 이분들에게 비자조차 내주지 않을 정도의. 

1997년에서야 한인 애국단 임성우 선생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현도명 선생은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2018년에 찾아간 다큐를 통해서 겨우 김예준 선생님의 존재가 밝혀졌다. 그러나 여전히 한인 애국단 여덟 분 중 나머지 분들의 '존재'는 그림자에 쌓여있다. 

by meditator 2018. 8. 16. 16:02

73번째 광복절이다. 여느 해와 다르게 각 방송사 별로 풍성한 광복절 특집이 마련되었다. 그 중에서도 kbs는 공영방송답게 다양한 특집을 마련했다.  14일 <시사 기획창- 전쟁 범죄>는 1942년 이래 일본군 1105명의 783건 심문보고서를 바탕으로 위안소가 일본군에 의해 주도적으로 설치 운영되고, 위안부가 강제 모집된 실태를 밝힌다. 15일 광복절 기념식이 끝난 오전 11시에는 <특집 다큐 -독립 운동을 한 의사들>이 방영되며, 이어 이어 15일 오후 7시 30분 역시 <특집 다큐 -그곳에 여성이 있었다>에서는 여성 양반 부녀자층에서 유행했던 '내방가사'를 통해 여성 독립 운동가의 삶을 조명한다.

그 중에서 <독립 운동을 한 의사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입신양명'의 상징이었던 '의사(醫師)'가  되었지만 일본 제국주의라는 시대적 숙명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 '의사(義士)'된 선열들의 삶을 그려낸다. 




사천의 나창헌, 연변에 박서양, 몽골의 이태준, 하얼빈의 김중화, 북경 이자해, 장가구 김현국 등 1945년까지 '독립 운동'에 참여했던 '의사'들은 156명에 이른다. 그 중에서 포상을 받은 사람은 불과 67명, 아직 89명이 '포상'조차 받지 못한 상태다. kbs1의 <독립운동을 한 의사들>은 독립 운동의 숨은 주역,  '전문직 종사자 의사'로써 독립 운동에 참여한 그들을 '환기'시킨다. 

요즘도 sky하면 다들 한수 접어주는데, 일제 시대 경성 의전이나, 세브란스 의전이라면 어땠을까? 남한이 아니라, 남과 북을 합쳐, 심지어 연해주, 북간도까지 국내외, 해외에서 내로라 하는 수재들이 가던 곳이었을 곳이었으니 그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을까? 영화 <동주>에서도 간도에서 연세 의전 문학부에 가는 두 청년을 그곳 친지들이 얼마나 감개무량해 하며 축하해 주었던가. 하물며 여전히 당시에는 '신학문'이었던 '의술'을 공부하겠다고 간 청년들에게 거는 '입신 양명'의 기대는 얼마나 컸을까? 하지만 시대는 그들에게 그저 '환자'를 고치는 '의술'만을 편하게 펼치도록 만들지 않았다. 

몽골에서도 뜨거웠던 독립에의 의지, 이태준
청년 이태준은 1907년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했다. 그가 입학했던 1907년은 군대 해산이 있던 시기, 즉 나라의 운명이 바뀌어 가던 시기였다. 그리고 2년 뒤, 위태로운 나라의 운명에 전세계적으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자 안중근 의사가 하얼삔에서 '의거'를 일으키셨다. 그 격동의 시절 의대생인 이태준의 운명은 옥고의 후유증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 안창호 선생을 만나며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안창호 선생을 만나며 달라진 것이 아니라, 안창호 선생이 위태로운 국운에 고뇌하는 젊은 의학도를 알아보셨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의형제였던 세브란스 의전 1회 선배였던 김필순 선생을 소개하셨을 테고, 최남선이 만든 청년 학우회에 기꺼이 입회하게 하셨을 것이다. 

1907년 안창호의 발기로 비밀 결사조직으로 만들어진 신민회는 국권 회복운동을 벌이던 중 105인 사건을 계기로 조직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더는 국내에서는 활동하기 힘들게 된 신민회의 인사들이 대거 망명의 길을 택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교과서에 실려있지 않은 이태준의 이름을 만나게 된다. 이태준은 김필순과 함께 신민회 활동을 한 혐의를 받게 되고, 그 역시 '망명'의 길에 나서게 된 것이다. 

단동을 경과하여, 당시 신해 혁명을 통해 근대적 공화 정부를 세운 중국에서 가장 '혁명'의 열기가 뜨거웠던 남경으로 옮겨간 이태준 선생, 그곳에서 해외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취직하여 힘겨운 망명 생활을 보내셨다. 그리고 파리 강화 회의에 민족 대표 3인 중 한 분으로 파견되셨던 김규식 선생과 몽골에 '독립'에 대비할 '무관학교'를 만들기로 뜻을 모아 몽골로 향했다. 

장래가 촉망됐던 세브란스 의전 학생은 1914년 말도 설고, 땅도 설은 몽골의 후레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가 시도하고자 했던 무관학교는 자금과 현지 사정으로 무산되고 만다. 그래서 동의지국이라는 병원을 개업하여 마지막 몽골 왕이었던 복드 칸의 어의로 활약하며 공을 세운 외국인들에게 주는 에르테닌 오치르 훈장을 수여받는가 하면, 몽골 현지에 2차 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승전탑 앞에 이태준 기념 공원이 있을 정도로, '극락 세계의 여래불'같은 존재로 현지인들에게 '의술'을 펼쳤다. 

하지만, 그 낯선 몽골에서도 이태준 선생은 독립에의 의지를 꺽지 않으셨다.  의사를 하면서 번 돈으로 김규식 선생에세 2000원의 여비를 제공 하는 등, 독립 운동을 하는 인사들에게 숙소와 교통편, 자금원으로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또한 영화 <암살> 속 속사포 캐릭터의 본 인물로 추측되는 당신의 운전사였던 폭파 전문가 마자르를 소개하는 등 김원본 선생의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약하였다. 

한인 사회당의 비밀 당원이 되어, 당시 그 어려운 자금 사정을 위해 레닌이 희사했던 자금의 유입을 위해 애썼다. 1차로 12만불의 금괴를 2400km의 먼 거리를 안전하게 수송해낸 선생은, 다시 8만 루불을 김립 선생에게 전하고, 다시 4만 루불을 전하기 위해 준비를 하던 중 일제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몽골을 점령한 러시아 백위파들에게 발각되어 가솔들과 함께 살해당하고 만다. 그게 1921년 선생의 나이 불과 38세 때였다. 


​​​​​​​

블라보스톡에 번쩍, 상해에 번쩍, 곽병규 선생
그렇게 이태준 선생이 먼 몽골에서 유명을 달리하셨던 것과 달리, 곽병규 선생은 천수를 누리셨지만, 정작 선생의 독립 운동에 대해서는 그의 가족들에게 조차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평양 숭실중을 나와 이태준 선생에 이어 3회에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한 선생은 역시나 독립 운동의 물결에 몸을 맡겼다. 이태준 선생이 몽골로 떠났다면, 청년 곽병규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는 건 블라디보스톡이다. 

블라디보스톡에는 당시 만명 정도의 한인들이 모여 '신한촌'이라는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다. 이곳에 살던 한인들과 유학생들을 모아 조국에 '문화 공연'을 하러 오게 되었는데, 이 해삼위 음악단장이 바로 곽병규였다. 의사가 음악 단장? 

당시 이러한 '조국 방문 문화 행사'는 그저 '공연'이 아니었다. 고국에 살 수 없어 먼 이방의 땅에서 살아가는 동포 학생들의 공연은, 삼일 운동 이후 그 어떠한 정치적 행사를 불허한 일제 하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유일하게 함께 모일 수 있는 '집회'였다. 그래서 일제는 이 집회를 불을 켜고 감시했으며, 그런 감시의 눈길을 피해가며 해외 동포들과 고국의 국민들은 '공연'이라는 이름으로 만나 어우러져 눈물을 흘리고 '한 민족으로서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유선영 지음, <식민지 트라우마> 중에서)

곽병규 선생의 활약은 말 그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다. 1920년 상해, 대한 적십자사 의사로, 그리고 임정의 외부 활동이었던 간호부 양성소 교수였던 곽병규는 1927년 사리원에서 경산 병원과 유치원을 개업했고, 사리원 신간회 회장으로 그 사건으로 체포당한다. 그로 인해 활동에 제약을 받은 선생은 1930년대 서울로 근거지를 옮긴다. 의술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봉사라는 신념 덕분에 의사의 자녀들이라도 어렵게 살아야 했다고 아버지를 추억하는 딸, '불의의 악을 극복하고 전진하라'는 아버님의 숨겨졌던 유지는 뒤늦게 아버님의 활동을 알게 된 딸의 노력으로  2011년에야 비로소 국가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환자를 치료하던 손에 들려진 폭탄, 나창헌 
여기 또 한 명의 의사가 있다. 아니 의사이기보다 열사인 한 분 나창헌 선생이다.  경성의전에 2학년 24살에 에  3.1운동을 겪은 선생은 당일 1차 시위에 참여한 후 2차 시위를 준비하던 중 연행되고 만다. 미결수로 서대문 감옥에 갇혀 갖가지 심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입원하게 된 선생은, 감시의 눈길을 피해 탈출, 대동단에 가입하여 의친왕 이강 망명 작전에서 '경호'의 임무를 맡게 된다. 

하지만 정보를 미리 알게 된 일제에 의해 실패로 돌아간 작전, 선생은 포기하지 않고 제 2의 3.1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준비하고 1919년 11월 8일 종로 경찰서 앞에서 200 여 명의 동지 및 군중들과 '독립 만세'운동의 거사를 일으킨다. 일제는 선생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지만, 그런 일제를 피해 상해로 망명, 결석 재판은 나창헌 선생에게 3년 형을 구형했다. 비록 재판은 피했지만, 험란했던 망명 과정, 선생의 부인은 망명 과정에서 발톱이 몽땅 빠졌었다 고통의 기록을 남긴다. 

상해에서 독일 병원에서 의술을 다시 배운 선생은 세움 병원을 세워 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임정의 재정을 돕는 한편, 임시 정부 의정원에서 두루 요직을 맡으며 활약한다. 하지만 점점 더 독립의 가능성이 멀어져만 가고, 임정의 상황이 어려워지자 선생은 온건한 투쟁 방식 대신, 일제에 직접적 손실은 물론, 민족의 자긍심들 독려하기 위해 암살, 파괴 등 투쟁 방식의 변화를 꾀한다. 직접 폭탄을 제조하시는가 하면, 1926년 상해 일본 영사관 폭파 사건에 주모자로 참여한다. 하지만 그 사건은 더는 선생을 상해에 머무를 수 없게 만들고, 다시 중경으로 발길을 돌린 선생은 그곳에서 만현 의원을 개업하여 독립 운동을 돕던 도중 약관 40세의 나이에 위암에 걸려 순국하시고 만다. 

의사인 열사들의 운동은 '전문직 종사자'로서의 특수성을 가진다.  한 곳에서 병원을 개업한다는 직업적 한계를 의사들은 '자금 지원'과 '인적 교류의 통로, 혹은 교두보'로서의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한편, 블라디보스톡에서, 상해에서, 중경에서, 몽골에서 지역을 막론하고 독립의 기치를 드높였다. 의사라서 하는 운동이 아니라, 의사건 그 누구건 독립 앞에서는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세 분 선생의 행적은 기록한다. 하지만, 2011년에야 비로소 딸에 의해 알려진 곽병규 선생, 우리보다 몽골 사람들이 더 기억하는 이태준 선생, 그리고 1993년에야 유해가 발굴되어 환국하시고 57년만에 건국훈장을 받게 되신 나창헌 선생처럼, 그분들의 업적과 그에 대한 국가와 역사의 보답은 여전히 미비하다. 그런 미비한 기억을 광복절 특집 다큐를 통해 환기시킨다. 



by meditator 2018. 8. 15. 1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