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아이러니의 예술(이하 이창동)>이 EIDF2022 '클로즈업 아이콘' 편으로 방영되었다. '한 시대의 혹은 사회의 아이콘이 된 거장들을 마치 카메라로 클로즈업하듯 들여다보며, 이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고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주목하는' 클로즈업 아이콘, 알랭 마자르 감독은 이창동 감독의 최신작 <버닝>에서 시작하여 <시>, <밀양>, <오아시스>, <박하 사탕>, <초록 물고기>까지 그의 작품을 공간과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또한 거기서 더 나아가 영화 감독 이전 문학을 하던 이창동과 문학을 하기도 이전 어린 이창동의 시간을 주유하며 우리가 아는 이창동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최근 자신의 작품들을 리마스터링 하고 있다는 이창동 감독, 그와 함께 그의 지난 작품들을 복기하니 말 그대로 감회가 새롭다. 윤정희 배우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로 등장하는 2010년 작 <시>, 사춘기에 접어 든 손자와 함께 고단한 삶을 버텨가는 할머니는 '시'를 쓰고 싶어한다. 시창작 교실 선생님은 '일상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시라 정의하시고, 하지만 할머니가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으려 애쓸수록 할머니의 손에 잡히는 건 '부조리한 삶'이다. 손주의 부도덕한 행위와 마주하게 된 할머니, 결국 할머니는 자신의 온몸을 던져 '시'를 완성한다. 

시를 쓰려다 '현실'의 암흑을 발견하고 자신을 던져 '진정성'을 구하려 했던  할머니의 모습에 문득 세월호 이후 분노하며 거리에 섰던  평범한 이웃들이 떠올랐다. 그렇듯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우리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화두를 담아낸다. 시를 쓰는 할머니를 통해 감독은 고통스럽고 부도덕한 현실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물었다.  2010년에 감독이 우리 사회에 던진 던진 질문에 2017년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화답했다.  영화 <시>뿐만이 아니다. <초록 물고기>에서 <버닝>까지 그대로 우리의 지나온 시간이자, 삶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그가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한 건 그런 시대 정신의 대변인으로써의 그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현대사의 대변인 이창동 
기자가 처음 이창동 감독을, 아니 이창동이란 사람을 알게 된 건 '문학 전집'을 통해서이다. 70년대 대표 작가들을 모아놓은 전집에서 이제는 기억조차 아련한 소설가 이창동의 작품을 만났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내내 감독이었지만 그의 영화는 '소설'처럼 읽힌다.  감독 이창동의 작품은 '문학작품'처럼 분명한 '플롯'과 '전개'를 가지고 관객에게 '열독'을 권한다. <밀양> 속 하늘도, 햇빛도 그 자체가 하나의 문장 속 지문처럼 읽혔다. 하루끼와 윌리엄 포크너의 만남같다는 <버닝>속 종수와 M을 감독의 설명이 그래서 대번에 이해되기도 한다. 

다큐는 이창동 감독과 함께 관객들을  작품의 배경이 된 그곳으로 다시 여행하게 만든다. 아이들이 다리 아래서 무심하게 놀고, 그 다리 아래 강물을 따라 내려오는 여학생의 시신, 느닷없이 보여진 범죄라는 감독의 설명을 배경으로 다시 한번 소환된 <시>속 소도시, <버닝> 속 답답하던 그 후암동 빌라, 빽빽하기도 하고, 비밀스럽기도 한 밀양이라는 특별한 하지만,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있는 세속적인 지방 소도시, 코끼리가 등장하는 환타지의 공간이 된 오래된 임대 아파트, 그때만 해도 참 시골스러웠던 <초록 물고기>의 배경 일산과 '암흑가'의 정의가 된 영등포 까지 우리 현대사의 '현장'을 '답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간은 감독 이창동의 시간이지만, 그의 작품과 함께 시대를 읽고 고뇌했던 관객의 시간이기도 하다. 

 

 

'나 돌아갈래'라고 외치던 그 철교 위의 '영호', 그의 삶을 통해 우리는 1980년대를 '시인'했다. <초록물고기>를 통해 '자본주의화'되어온 사회의 그림자를 체감했다. 이창동 감독은 <밀양>을 빌어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밀양>이라는 작품 주제가 된 '용서'는 시내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일본 제국주의, 6.25 전쟁, 군사 독재의 고통을 겪어낸 우리 현대사, 그 고통을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가라는 화두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이 처럼 작품 속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 던져진 개인을 통해 우리 현대사가 짊어진 숙제를 직시한다. 

또한 다큐를 통해, 감독이기 이전 개인 이창동의 역사를 더듬어 간다. 최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화제가 되었지만, 이미 2002년 감독은 <오아시스>를 통해 '도전이자 실험'을 시도했다. 집 밖을 나가지 못하는 1급 뇌성마비 장애인인 여주인공, 영하 20도에 반팔을 입고 갓 출소한 종수라는 한 눈에 보기에도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은 남주인공을 만나 '소통'하고 '사랑'한다는 설정은 '화제'를 넘어 사회적 쟁의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사회적 담론을 넘어 다큐는 우리가 몰랐던 뇌성마비 누나를 둔, 그래서 그 누나를 지키려 애썼던 가난하고 말수적은 소년을 찾아낸다. 그의 고향 대구, 그리고 다니던 초등학교를 주유하며 장애인이었지만 똑똑하고 용감했던 한공주의 '의연함'의 근원을 헤아리게 된다. 그리고 그건 이창동의 개인사이지만, 그와 같은 또래의 가난하고 의지할 곳없이 그래서 잡초처럼 세상과 싸우며 시대를 헤쳐온 이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명장'이라는 수식어를 넘어 현대사의 '산증인'이자, '증언자'로서 이창동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또한 다큐는 그의 작품을 빛냈던 배우들을 소환한다. 어떤 여배우가 이 캐릭터를 맡을 수 있을까 '숙제'였다던 <오아시스>의 한공주, 하지만 문소리를 감독이 기대했던 이상의 한공주의 모습을 보여줘서 감탄했다는 감독의 후일담에 문소리의 소회가 얹힌다. 아이를 잃고, 신에 의탁하고 다시 신과 싸우는 버거운 임무에 도전하는 <밀양> 역의 시내를 맡은 전도연에게는 배우 스스로 느끼며 발현할 수 있도록 애썼다는 '설득'의 디렉션을 제시한다. 

이렇듯 이창동 감독의 작품은 작품 자체로도 뛰어나기도 하지만, <초록 물고기>의 한석규, <박하 사탕>의 설경구처럼 캐릭터로 우리에게 각인된 스타의 등용문이기도 하다. 다큐는 그런 그의 작품들을 통해 그 캐릭터로 기억된 배우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는 귀중한 시간이 된다. 

다큐 <이창동>은 그래서 묘한 경험이 된다. 감독의 작품이 곧 '내가 살아온 시간', '우리가 살아온 시간'을 복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초록 물고기>로부터 <버닝>까지, 새삼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왔나 돌아보게 된다.  

by meditator 2022. 8. 30. 14:53

우리 사회에서 '대학'은 '필수적'인 교육 과정처럼 여겨진다. 그 '코스'에서 여성이나 남성의 차별은 거의 없다. 외려 '대학'이 인생 최대의 관문처럼 여겨져서 문제가 될 정도이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라는 직업은 어떨까? 모두에게는 아니겠지만 나름 선망하는 '트렌디'한 직업군이 아닐까? 만약에 결혼한 아내가 대학에 가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면 어떨까? 부부가 모두 직업을 가지는 것이 더는 이상하지 않을 뿐더러, 당연해지는 세상이다. 그런데 동시대에 살면서 '대학'에 가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이혼'을 해야 하는 여성의 삶은 어떨까? 자피르 나자피 감독의 <메이크업 아티스트>이다. 

 

 ⓒ EBS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고픈 주부
미나 살레히는 지금 일생일대의 변곡점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이란 고원 지대에서 농장과 가축을 기르며 제법 넉넉한 형편인 골 모하마드와 결혼하여 아장아장 걷는 아들을 둔 주부이다. 

그녀는 작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번 학기 등록금까지 냈음에도 그녀는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다. 집안의 반대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친척이 하던 미용실에서 일하던 그녀는 처음엔 영화 배우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오디션에서 만난 감독의 반응은 냉랭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들어왔다. 그 일을 배웠다. 어려서 부터 화장하는 걸 좋아하던 그녀의 적성에 딱 맞았다. 돈도 좀 벌었다. 본격적으로 그 일을 하고 싶었는데 남편이 청혼했다. 양을 팔아 화장품을 사주겠다던 남편, 대학에도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결혼 후 남편의 태도가 달라졌다. 

영화는 미나 살레히와 골 모하마드가 사는 이란 고원 지대를 배경으로 대학에 가기 위한 한 여인의 고군분투기를 담는다. 결혼 전에는 대학에 가라고 했던 남편은 이제 '이혼'을 하고 가라고 말한다. 아이의 양육권도 당연히 포기해야 하는 처지이다. 세상에 대학에 가고 싶다는데 이혼도 해야 하고, 아이도 키울 수가 없다. 부족의 전통이란다. 

 

 ⓒ EBS

 

아들이나 잘 키워 
남편과 시댁은 그 이유로 큰 집을 든다. 형님이 공부한다고 대학을 가고 아주버님은 중독자가 되었다고 한다. '엄청 건방져졌어'라는 게 그 형님에 대한 집안의 평이다. '차 한 잔 가져와'로 시작한 남편의 말은 '여자는 아무데나 갈 수 없다'며 우유도 짜고, 카펫도 뜨고, 빨래도 하고, 애나 키우라고 말한다. 여전히 미나는 손빨래를 한다. 심지어 미나가 양떼를 잘 돌보지 못해 10마리나 도망갔다며 그 금액을 들먹인다. 

미나는 분노한다. 자신을 속였다는 것이다. 분명 대학에 보내주겠다며 청혼을 하고서는 이제 와서 안된다는 게 말이 되냐고 다그치지만 남편은 '전통'을 들먹인다. 외려 하루 종일 대학이랑 화장 생각만 한다며 우리 어머닌 가정부가 아니라고 따진다. 그렇다고 꺽일 미나가 아니다. ' 하지만 아직은 겨우 소심하게 양말을 벗어 빨라는 남편에게 스스로 좀 빨라고 하는 식이다.

내가 정작 어머니 밑에서 가정부 일을 하고 있잖아요.


혹시나 싶어 시어머니께 하소연을 해보지만 씨알도 안먹힌다. 연신 양털로 실을 뽑아내고 카펫을 짜며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신다. 아내가 됐으니 대학은 안된다는 것이다. 화장은 무슨 화장이냐며, 구리 그릇에 물을 채워 거울 처럼 썼다며 옛날 일을 들먹인다. 

아내를 구스르기 위해 대학과 화장만 포기하면 옷이든 차든, 심지어 자신의 인생도 주겠다고 너스레를 떠는 남편, 의사나 선생님도 아니고 화장을 배우러 대학에 가고 싶다는 게 말이 되냐는 식이다. 그러면 '새 아내'를 구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 EBS

 

대학에 가면 새 아내를 들이겠다는 남편, 미나는 친한 친구를 찾는다. '니가 할래?', 니가 가라 하와이도 아니고, 대학에 가는 자기 대신 남편의 새 아내가 되어 달란다. 하지만 미나의 속내는 복잡하다. 남편의 새 아내를 직접 골라주고 싶은 것이다. 결국 그녀가 대학에 간다는 건, 남편과 시어머니의 확고한 태도로 볼때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그녀는 그럼에도 대학에 가고 싶다. 그런데 아이가 걸린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자구지책이 아이를 잘 키워줄 여자를 스스로 고르겠다는 것이다. 

심지어 결혼 전 남편에게는 집안 끼리 정한 약혼자가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를 선택했고,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이전의 정혼자와 그녀는 사이가 좋지 않다. 그러기에 자신이 떠나고 홀로 남은 아이를 혹시나 그녀가 구박을 할까봐 걱정스럽다. 그러니 직접 얌전하고 고부고분한 그래서 자신의 아이도 잘 키워줄 남편의 새 아내를 직접 고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친구가 소개해준 그녀의 친척을 직접 가서 만나기 까지 한다. 

남편의 새 아내는 우리 아이를 잘 돌봐줄 수 있는 사람으로 내가 직접 고를 거예요.


그런데 남편은 또 그녀가 고른 여자가 아이를 못낳을 거 같다고 싫단다. 자신은 농장도 있고, 양떼 등 물려받을 유산이 많으니 아들을 더 낳아야 한다고 당당히 말한다. 대를 이를 자식이 필요하단다. 그런데 남편과 함께 양떼를 몰던 이들은 한 술 더 뜬다. 아내가 둘이라는 남자, 넷 이라는 남자, 심지어 본처와 후처가 자매보다 낫단다. 

끝나지 않는 평행선, 미나와 남편은 어떻게든 상황을 풀어보려 결혼 서약을 했던 우물에도 가보고, 미나는 남편의 맘을 돌리기 위해 양떼를 몰러 함께 길을 나서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을 사랑한 게 아니라 자신의 재산이 좋았던 게 아니냐며 미나를 의심하기까지하는 남편은 급기야 제작진이 나서 말려야 할 정도로 분노를 폭발하고야 만다. 웃지못할 남편의 새 아내 찾기 프로젝트는 미나가 언덕으로 향하는 길을 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녀가 원하는 대학을 가게 될까?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될 수 있을까?

형수나 미나 모두 '대학''을 선망하고 전문 직업인을 소망하듯이 여타 이슬람권 국가에 비해 그래도 이란은 여성 고등교육 진학률과 취업률이 높은 편이라고 한다. 9세가 되면 외출할 때 반드시 히잡(머리싸개)을 착용해야 하는 이슬람 율법에 따른 복장 규정처럼 여성의 능력에 대한 현실적 이해 부족으로 대외활동 비중이 높은 직종에 여성이 종사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 낮다.  다큐에서 남편이 당당하게 대를 이을 자식이 필요하기에 새 아내를 들여야 한다고 말한다던가, 서너 명의 아내를 두는 걸 자연스레 이야기하듯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 여전히 일부 농촌지역에서 '명예살인'이 존재한다는 보고도 있는 게 현실이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 대학에 가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남편의 새 아내를 직접 찾아나선 주부 미나의 쉽지 않은 여정을 통해 다큐는 이란 여성의 현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by meditator 2022. 8. 28. 14:33

1989년 중국 베이징 시 중심부에 자리한 천안문 광장, 이곳에서 학생들은 '민주화의 여신상'을 앞세우며 5월부터 '단식 투쟁' 등을 벌여왔다. '학생 운동의 정당성을 인정하며 대화를 시작하라'는 것이 학생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범법행위로 규정하며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워 최류탄과 실탄을 발포하며 강제 진압하였다. 1989년 6월 4일에 벌어진 천안문 (텐안먼) 사태이다. 정치적 사건으로만 기억되는 '텐안먼 사태'를 당시 16살의 꿈많은 소녀였던 론자 유 감독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한다. 왜 당시 젊은이들은 광장으로 몰려갔을까? 도대체 어떤 시대의 분위기가 그들을 '저항'과 열정'으로 가득차도록 만들었을까? 

 

 

1986년 상해 출신의 소군(여명 분)과 이요(장만옥 분)는 꿈을 이루기 위해 홍콩으로 건너간다. 그 후로 10년 만남과 헤어짐을 되풀이 한 두 연인의 러브 스토리 <첨밀밀>에는 '당신을 내게 물었죠,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냐고,'라는 로맨틱한 대사의 등려군의 노래 '월량대표아적심'이 흐른다. 등려군의 노래가 전대륙에 인기를 끌던 시절이 중국 대륙의 1980년대 중반이었다.  빈곤과 암흑, 그리고 단절의 시대가 지나가고 새롭게 들어선 정부는 경제 개혁을 앞세웠다. 적극적인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도입과 함께, 문화 역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발빠르게 흡수되었다. 다큐는 텐안먼 사태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 문화적 흐름을 주도했던 젊은 예술가들을 주목한다. 

젊은이들의 열정과 저항 
우선 그 첫 번째 인물은 자신의 붉은 사원증을 치켜든 조각 등 '반항과 유머'로 시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조각가 왕커핑이다. 그는 당시를 회고한다. '혁명가'만 울려퍼지던 시절에 '등려군'의 노래는 빛과도 같았다고. 그 빛을 따라 모인 젊은이들은 카세트를 틀고, 거기서 흘려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댄스 금지, 파티 금지', 당연히 경찰이 출동, 카세트를 뺏고, 안 뺏기려는 해프닝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문화적 갈증에 목말라 했지만 토양은 척박했다. 이렇다할 갤러리조차 없었다. 그나마 1년에 한 번 정도 가능한 전시는 여러 차례 검열을 받아야 가능했다. 결국 뜻이 맞는 몇몇이 모여 작품을 공유하는 정도였다. 왕커핑과 친구들은 당시 시대적 분위기에 고무되어 '도전적인 결정'을 내렸다. 중국 미술관 주변 울타리에 자신들의 작품을 '무단'으로 전시하기로 한 것이다. 함께 할 그룹의 명칭도 정했다. 작고 멀리 있지만 자기만의 빛을 내는 '스타', 이들은 1979년 9월 27일부터 전시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시 셋째 날 경찰이 막아섰다. 압수된 작품은 찾을 길이 없었다. 10월 1일 '정치 민주, 예술 자유', 팻말을 든 젊은이들로 인산인해가 되었다. 결국 중국 전시관에 '스타'의 전시가 허용되었다. 이번에는 전시를 보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들은 사회적 규범 대신 자유로움을 추구했고, '예술'을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아 표현 수단으로 삼았다.

유일한 여성 작가였던 리솽도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젊은이들의 예술을 정부는 '정신 오염'이라 여겼다. 모든 개인주의적 표현은 '단속 대상'이 되었다. 프랑스인 애인을 둔 리솽은 이른바 '풍기 문란'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스타'를 '반사회적 조직'으로 만들려는 고문이 이어졌다. 하지만 친구들을 떠올린 리솽은 '아는 바 없습니다'며 그 시간을 견뎠다. 남친과 헤어지라는 종용을 거부하고 온전히 3년 형을 살았다. 

학교에서는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방과 후에는 코카콜라를 마셨다 .
           - 론자 유


'애국'대신, '나'와 '예술'의 자유
카세트를 틀고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청춘들, 그런 분위기에 힘입어 '록'이 등장했다. 이제는 중국 록의 대부라 칭해지는 '추이젠(최건)'이 그 대표적인 가수이다. '나는 내 꿈과 자유를 그대와 나누고 싶다.'는 그는 '애국주의 '대신, '나'의 이야기를 노래했다. 

 

 

이런 열정적인 젊은이들의 흐름에 발맞추어 '아방가르드'한 프로젝트가 기획되었다. 이제는 '티벳 유랑족'이 된 원프린의 '만리장성 대축제'가 그것이다. 직업을 자유롭게 고를 수 있는 첫 세대였던 그는 직장이나, 호구제, 월급 등에 통 관심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일을 벌였다. 1988년 한 다큐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권위주의 체제의 상징이라 여겨지던 만리장성에서  '우드스톡이 따로없네'란 평을 얻은 이벤트를 벌였다. 

행위 예술이든 공연이든 그 누구라도 와서 마음껏 즐기라는 초대장에 젊은 예술가들이 응했다. 만리장성에 하얀 천을 드리우는 전위 예술, 롹 공연 등 그동안 억눌렸던 자유와 표현 의지가 한껏 분출되었다.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고 발전을 해갈수록 젊은인들은 생각의 자유를 갈망했고, 변화가 도래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젊은 예술가들의 전국적인 전시회 시도에 '강제 취소'로 대응한 중국 정부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길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런 가운데 텐안먼 사태의 전초전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젊은이들의 열기를 마냥 억누를 수 없었던 정부는 1989년 '예술 작품으로 정부에 반기를 들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중국 현대 예술전을 중국 예술관에서 허용했다. 이에 186명의 전위 예술가들이 '유턴 금지'라는 상징을 내세우며 퍼포먼스를 벌였고 그 중에는 샤오루가 있었다. 

졸업생 중에 유일한 설치 미술가였던 차오루는 연결되지 않은 전화 한 통으로 절망한 두 남녀를 '전화 부스'에 갇힌 듯한 모습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쉬웠다. 샤오루의 작품이 중국 현대 미술전에 전시되었고 설 전 날 전시회에서 그녀는 자신의 전시 작품에 두 발의 총을 쏘는 도발적 퍼포먼스를 벌였다. 경찰차가 도착하고 전시회는 폐쇄되었다. 

 

 

'샤오루가 쏜 2발의 총성이 혁명의 시작이었다', 아방가르드 기획자 원프린은 정의한다. 2달 뒤 1989년 봄 중앙 미술학원 학생들은 거대한 '민주 여신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여신상을 앞세우고 학생들은 텐안먼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조사라 씨는 <재외 중국 아방가르드 작가의 문화 정체성과 디아스포라 이미지>에서 '중국 현대미술을 이끌고 있는 대부분 작가들은 1950년대 태어났으며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겪었으며 1980년대 중국의 문호개방 정책과 맞물려 ‘85 신조운동’과 1989년 차이나/아방가르드 전 등 중국 현대미술의 아방가르드 흐름 에 참여한 이력을 지녔다.'고 말한다. 왕커핑과 리솽 등도 고국을 떠나야만 했다. 1990년대 부터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중국 현대 예술은 바로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잉태된 것이다. 론자 유 감독은 <그날이 오면>을 통해 저항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중국의 젊은 예술가들을 소환한다. 








 

 

by meditator 2022. 8. 26. 17:41

우리가 마주친 현실이 녹록치 않을 지라도/ 불안과 좌절이 우리를 짖누를 지라도/ 이 역시 우리 삶의 일부라는 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차곡차곡 담아냈습니다


제 19회 EBS 국제 다큐영화제,  EIDF 2022가 시작되었다. Pitch your dream, 다큐의 푸른 꿈을 찾아서 라는 슬로건으로 막을 연 영화제는 올해도 ebs 방송과 에무 시네마 등 전세계 유일의 온, 오프라인 페스티벌을 열었다. 

 

 

EIDF2022는 총 24개국 63개의 작품이 페스티벌 초이스, 컨템포러리 다큐 파노라마, 커넥티드, 클로즈업 아이콘, 단편 화첩 등 10개의 섹션을 통해 출품되었다. 8월 22일 <사라지는 유목민>을 시작으로 EBS에서는 낮과 밤 시간을 통해 방영되고, 상영관에서 직접 다양한 다큐 작품과 만날 수 있다. 또한 언제나 그렇듯 EBS가 마련한 'D - BOX''다운로드'를 통해 언제든 자유로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지난 2년간 팬데믹의 영향으로 EIDF는 관객에게 제한된 방식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기지개를 켜고, 그간 말하기 조심스러웠던 꿈과 낭만을 다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위와 같은 취지로 시작된 영화제, 올해 개막작으로 상영된 작품은 8년 여의 제작 기간이 소요된 진화칭 감독의 <다크 레드 포레스트 Dark Red Forest>이다. 


 

티벳 고원의 비구니들 
다큐가 시작되면 카메라의 시선은 2017년 겨울 4000 M 높이의 티벳 고원으로 향한다. 이곳에 자리한 야칭스 수도원, 그곳에는 만 명이상의 비구니들이 정진하고 있다. 

그런데, 막상 보이는 것은 겨울 벌판을 가득 메운 겨우 한 사람이 앉을 수 있을까 싶은 나무판자로 지어진 작은 임시 거처들이다. 바람이나 피할 수 있을까 싶은 이 작은 박스에서 야칭스 수도원 비구니들은 가장 추운 겨울의 100일 동안 '동안거'를 한다. 눈이 와 쌓일 정도가 돼도 이들의 '동안거'를 멈출 수는 없다. 추운 건 집뿐이 아니다. 야칭스 수도원 마당에서 진행되는 불경 공부 시간, 비닐 한 장만이 추위를 막는다. 

'수행의 목적은 여러분 의식의 강에 존재하는 증오와 탐욕을 멸하는 것입니다.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는 바로 마음으로 부터 얻어질 수 있습니다. 전생에 지은 '업보'는 우리 삶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


만 명의 비구니들이 모인 시간 앳된 어린 승려가 똑부러지게 불법을 읊는다. 티벳에서는 비구니가 되는 걸 숭고하게 생각한다. 이곳의 승려들은 대부분 이처럼 앳된 어린 시절에 이곳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곳에서 평생을 보낸다. 

 

 

하지만 스승님을 맞이한 등이 굽은 노년의 비구니는 겸허하게 말한다. '제가 너무 더뎌 걱정입니다. 탐욕과 증오, 무지가 어디서 왔는지 조차 모르겠습니다. 어디로 가야할 지도요.'  한참 멋을 낼 나이의 젊은 비구니는 '반짝이는 불빛에 제 영혼이 빠져나갈 듯했습니다. 겨우 기도로 다시 제 영혼을 붙잡았습니다'라고 참회한다. 기도와 명상만이 아니다. 매년 6개월 동안 불경을 공부하고 시험을 치루고, 앞치마처럼 두른 포대가 구멍이 날 정도로 '오체투지'를 하는 강행군의 생활이 이어진다. 하지만 수행의 길은 멀다. 

파르라니 깍은 머리에 파랑, 노랑의 띠를 두른 비구니들이 말간 하늘 아래 나풀나풀 춤을 춘다. 그렇게 춤사위가 잦아든 광장에 나신의 육체가 놓여있다. '육탈'을 한 수행자들이다. '업보'의 고뇌에서 벗어난 이들, 그들의 육체를 기다리고 있는 건 티벳의 독수리들이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독수리 무리가 육체만 남은 수행자들을 덮칠 때, 그  한 켠에서 삶의 그림자를 짊어진 생존의 수행자들이 '독경'을 한다. 그저 '업보'가 잠시 머물던 곳, 육체는 그렇게 자신의 '업'을 다한다. 죽음의 순간은 이들에게 '업'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영광의 순간'이다. 

 

 

그렇게 극한의 수행으로 이어진 비구니들의 삶, 하지만 종교적 경건함과는 별개로 그들의 문화적 환경은 낙후되어 있다. 그들의 건강은 소변에 뜬 부유물의 모양과 빛깔로 점쳐진다. 처방은 티벳의 전통약이거나 불에 달군 쇠막대로 '지압'을 해주는 식이다. 길흉화복의 행방은 '점'에 달렸다. 죽은 자의 안식을 묻자, 예전에 불곰 한 마리를 죽여 산신에게 노여움을 탔을 것이라는 답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였을까, 이 지역에 들어온 사회주의 정부는 더는 이런 비구니의 존재를 허용치 않는다. 2017년, 그리고 2018년 겨율울 지나 이어진 다큐, 그런 가운데 중국 정부는 다음 해 여름까지 비구니들이 야칭스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링거를 맞으면서도 수행을 마다하지 않던 비구니들, 그럼에도 '스승님'은 그들에게 수행에 진심을 다하라 말씀하신다. 눈과 정신과 마음을 다해서, 코 위에 개미가 지나간다해도 한 눈 팔지 말고, 단, 정부 관계자가 중단을 요철할 때를 제외하고라고. 그 말씀의 정부가 이들에게 수행의 중단을 요구했다. 

수행의 진심을 묻던 비구니들이 이제 스승님께 호소한다. '떠나온 지 오래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모릅니다.' 이런 이들을 스승님은 안타까워하신다. 속세의 경험이 없는 이들이 자칫 세찬 강에 뿌려진 양의 배설물처럼 될까봐.

2019년 여름 거의 모든 비구니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동안거동안 그들이 머물던 판잣집은 해체하니 한 사람이 짊어질 분량의 짐일 뿐이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진화칭 감독이 찾아간 고원, '동안거'의 그 움막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여전히 그 짙은 붉은 수도복을 입고 머리를 민 비구니들이 소를 몰고, 새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반야, 초월적 지혜'가 무엇이죠? 스승님이 물었다. '그게.......' 젊은 비구니는 답을 하지 못했다. 불성을 지닌 존재는 무엇인가요? 다시 스승님이 물었다. '자신입니다', '그 자신은 어떤 겁니까?' '자아와 자신은 같나요?', 비구니는 복잡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그리고 시험을 못봤다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다. 

 

 



그녀였었다. 그렇게 수행의 즉답을 하지도 못하고, 불경 시험도 못치던 그녀가, 여전히 붉은 수도복을 입고 그곳에 있었다. 

'삶이 예측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석가모니도 병을 앓고, 노화하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제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자 고원의 새들이 보였습니다. 그들 역시 굶주리고 매에게 잡아먹힐까 불안에 떨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비로소 만물을 연민의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세의 삶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지요.'


평생 이곳에서만 살아왔던 그녀가 이곳을 떠나라 하자 죽음을 생각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스승님은 말렸다. 정부의 명령을 따르라 했다. 야칭스를 떠난 그녀, 동안거의 움막이 이제 집이 되었다. 그녀는 말한다. 평생 짙은 붉은 색 법복을 입은 채 수행자로서의 삶을 다할 거라고. 오랜 수행에도 닿을 수 없었던 마음의 진심을 모든 것을 다 잃은 후에야 얻을 수 있었다. 그곳에 여전히 '다크 레드 포레스트'가 있는 이유이다. 




by meditator 2022. 8. 23. 22:50

고단한 한 주, 혹은 하루를 보낸 시간, 저마다 자신만의 '힐링 스팟'을 찾게 될 것이다. 기자의 경우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조금 느긋한 드라마'를 찾게 된다. 편안한 관계, 나도 모르게 레시피를 찾아보게 된 맛있는 음식들, 야곰야곰 어느새 10부작을 완주하게 된 드라마 <녹풍당의 사계절>이다. .

일본의 명문 숙박업 가문이 있었다. 그 가문의 후계자인 쌍둥이 두 손주, 이란성 쌍둥이인 이들은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가문의 기대에 부응하여 불철주야 공부와 사업에 매진하려 했던 야코우(후지이 류세이 분)와 달리, 동생이던 스이는 어릴 적부터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고, 직원으로 일하던 료칸에서는 예의 그 사람좋음으로 인해 직원 관리에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결국 어려운 사정만 봐주다 돈문제를 일으키게 된 스이에게 야코우는 대놓고 나가라고 면박을 주고 만다. 

그저 사람좋기만 하던 스이, 야코우는 그런 식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문의 유지를 받들겠다는 사명 하나로 '열일'하던 야코우는 '료칸'을 잘 나가는 호텔 사업으로 이어갔다. 그렇다면 료칸에서조차 쫓겨난 스이는 어떻게 됐을까? 

 

 

녹풍당의 네 남자 
료칸 사업을 하던 할아버지는 은퇴 후 '차'에 빠지셨고 고풍스런 '녹풍당'이란 찻집을 운영하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은 녹풍당, 야코우는 문을 닫는게 맞다고 했지만, 스이는 할아버지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곳을 그렇게 사라지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개업하게 된 '녹풍당', '스이다운' 그곳에는 세상에 상처를 받고, 휴식을 취하고픈 이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녹풍당의 사계절>은 시미즈 유우의 원작 만화를 드라마화 한 작품이다. 앞서 할아버지의 '다도'를 이어받은 스이,  바리스타 구레(사에키 다이치 분), 요리를 담당하는 토키타카(히야마 쇼노 분), 디저트 담당 츠바키(오오니시 류세이 분)까지 '먹거리'의 다양한 분야를 담당하는 네 명의 남성들이 녹풍당을 이끈다. 

드라마의 우선 볼거리는 차, 커피, 요리, 디저트에 이르는 '산해진미'이다. 실제 기자가 드라마 속 오무라이스를 덮은 계란이 하도 '고와' 보여서, 드라마에서 하듯이 계란물을 후라이팬에 풀어 젓가락으로 살짝 주름을 만들어 보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 것처럼 우선 보기에도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보는 이의 '시각적 만족'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런 먹거리를 매개로 한 '힐링'이 제공된다. 직장 일에 치인 한 여성이 녹풍당에 앉아 일을 하려고 하다, 녹풍당의 달달한 케잌과 음식을 먹다 그만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에피소드처럼 드라마는 '먹거리'를 매개로한 '힐링'을 주요한 소재로 삼는다. <심야 식당>,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의 계보를 잇는 또 한편의 미식 힐링 드라마이다. 

 

 


그리고 그 '힐링'이 가능한 전제가 되는 건 녹풍당을 이끌어 가는 네 명의 주인공들이다. 료칸에서 직원의 어려운 사정을 봐주다 쫓겨난 스이답게 할아버지의 찻집에 불과했던 녹풍당에 저마다 사연이 있는 또 다른 세 명을 불러들인다. 

스이의 중학교 동창이기도 한 토키타카는 어렸을 적에 '천재 도공'이란 화제의 인물이었지만, 어린 천재 도공을 '가십'을 삼은 언론으로 인해  유일한 보호자였던 작은 아버지와 생이별을 하고 이제 '도자기를 빚은 일'대신 녹풍당의 요리 담당이 되었다.  아직 어린 츠바키 역시 혹독한 도제 수업에서 인정받지 못한 실력을 녹풍당에서 마음껏 펼치고 있다. 

늘 활기찬 구레, 아침마다 조깅을 하는 구레는 벤치에서 밤을 샌 듯한 소년에게 자신과 함께 '동호회'를 하자며 끌어들인다. 그런데 늘 웃통을 벗어제치며 근육 만들기에 열심인 구레의 동호회라는 게  소년의 또래인 듯한 무리들과 함께 '오리배'를 타는 것이다. 그는 그 소년들과 열심히 만든 근육으로 목이 터져라 오리배를 한바탕 탄다.

구레와 함께 오리배를 열심히 몰던 소년, 하지만 다음 날도 그 소년은 벤치 신세였다. 그런 소년을 구레를 녹풍당으로 데려와 따뜻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준다. 그리고 그 에스프레소에 담긴 자신의 사연을 들려준다. 복잡한 가정사로 인해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소년, 그런데 그 소년만큼, 아니 그 소년보다도 훨씬 더 복잡한 가정사를 지녔던 일본과 이탈리아 인의 혼혈이었던 구레는 이탈리아 뒷골목을 전전했다고 한다. 동네 불량배들에게 실컷 두들겨 맞고 쓰레기통 옆에 쓰러져 있던 구레를 데려온 나이든 바리스타는 구레에게 한 잔의 에스프레소를 건넸고, 구레는 그 에스프레소 한 잔의 감동을 잊지 못해 바리스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구해준 은인처럼 동네에서 '전전'하는 소년들을 모아 오리배를 타는 동호회를 만들기에 이른 것이다. 

사실 '다이내믹'한 우리의 드라마를 보다 제 아무리 인기 만화 원작이고, 일본 아이돌들이 주연을 등장한 드라마라 해도 <녹풍당의 사계절> 같은 일본 드라마를 보면 심심하다. 녹찻물에 밥 말아먹는 '오차츠케'처럼 말이다. '갈등'은 있지만, 마치 '기승전결'에서 '전'에 해당하는 '클라이막스'가 빠져있는 것처럼 이른바 '착한 '드라마이다. 그런데 가끔 혹독한 하루를 지내고 마음을 쉬고 플 때 그 '심심한 드라마'가 오차츠케처럼 위로가 된다. 산해진미의 뷔페를 먹다못해 시달리고 돌아와 출출함을 달래고자 찬 밥 한 덩이 물에 말아 김치 얹어 먹으며 한 숨을 푹 내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무턱대고 사람을 믿고 봐주다 가문의 료칸에서도 쫓겨난 착한 청년이 어려운 사연이 있는 이들을 불러 모아 4인 4색의 까페를 만들고 그곳에서 저마다의 장기를 발휘해 '아름답고 맛있는 음식'을 만든다는 '환타지적 설정' 자체가 흥미롭다. 착함이 여전히 삶의 기둥이 될 수 있는 서사가 그 자체로 위로가 된다. 

4명의 청년들, 거기서 쉬이 연상될 수 있는 '동성애적인 코드'를 드라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다 큰 어른들이지만 '가족'이 필요한 이들이고, 녹풍당은 갈 곳없던 그들에게 가족이 되어준 곳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이름과 성을 가졌지만, 어울려 '가족'처럼 살아간다. 내가 좋아하는 일과,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공간, <녹풍당의 사계절>은 삶도, 사랑도 고달픈 이 시대 젊은이들이 선택한 새로운 환타지의 공간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녹풍당에 찾아와 달콤하고 맛난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 저마다의 시름을 잊어가는 것처럼, 그걸 보는 한 시간여의 시간 동안 세상의 고달픔을 잊게 된다. 

by meditator 2022. 8. 22. 20:03

이제 우리 사회에서 부부가 '이혼'을 하는 경우, 가사 노동에 종사한 아내의 '역할'에 대해 당당하게 '법적'인 지분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가사 노동'에 대해 과연 우리 사회는 진정 정당한 '가치'를 인정하고 있을까? 이 질문은 외람되게도 '독립 운동'의 그늘에서 헌신적으로 뒷바라지의 역할을 자처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존재론으로 이어진다. 

 

 

광복절 77주년이다. 각 방송국마다 77주년을 기려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 가운데 kbs1을 통해 방영된 <광복절 특집 다큐 아내의 이름>이 눈에 띈다. 현재 '독립 운동가'로 서훈을 받은 선열들은 2만 여명에 이른다. 그렇다면 이 중 '여성'들은 얼마나 될까? 2%도 안되는 채 200여 명이 안된다고 한다.

이런 안타까운 결과는 유교적이고 봉건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어 '활동'하기가 어려웠던 시대적 환경이 무엇보다 컸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이라고 해서 '독립'에의 '의지'가 없었을까? 단지 '드러나지' 않았을 뿐, 2만 여 명에 이르는 독립 운동 선열들이 활동하는 그 '그늘'에서 늘 '여성'들은 치열하게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회영, 신채호, 이상령은 알아도, 박자혜, 이은숙, 김우락이란 이름은 생소하다. 그간 여성 독립 운동가들의 활약상을 발굴해온 kbs가 광복절을 맞이하여 네 분의 여성 독립 운동가들, 그분들의 '이름'을 되찾아 주고자 한다. 

 

 

3.1운동에 앞장섰던 간호사, 신채호를 뒷바라지 
1895년에 양주에서 태어난 박자혜 여사는 어린 나이에 '궁녀'가 되었다. 몇몇 궁녀들과 함께 의술을 배울 기회를 얻은 여사는 이례적으로 일본인이 대부분이던 조선총독부 의원의 간호사가 되었다.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고  일제의 무력 진압으로 인한 사상자를 목도한 박자혜 여사는 조선총독부 병원에서 일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독립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 결심에 따라 간호사들의 조직 '간우회'를 결성하는데 앞장서고 유인물 배포하는 한편, 만세 행렬에 적극 참여한다. 결국 '과격하고 언변이 능하며 총독부 의원, 간호사 등을 대상으로 독립 만세를 고창한' 혐의로 체포되고 만다. 풀려난 박자혜 여사는 베이징으로 망명했고 이곳에서 한 독립운동가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녀의 나이 24세, 그녀의 남편은 39세의 신채호였다. 

하지만, 생활고는 이 부부를 떼어놓는다. 둘째 아이를 가진 박자혜는 고국으로 돌아와 조산원을 열었지만 신채호의 아내라는 이유로 '냉방에서 주린 창자를 쥐고 두 아이가 울고 있'는 가난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나석주 열사의 길잡이 노릇을 기꺼이 해냈다. 또한 뤼순 감옥에서 갇히게 된 남편의 옥바라지를 8년 동안 감내했다. 하지만 결국 36년 신채호 선생이 돌아가시고 '모든 희망이 끊어졌다'고 애통해하던 박자혜 여사는 뒤를 이어 44년 가난과 독립운동으로 얻은 지병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신다. 1990년에서야 정부는 '건국훈장 유족장'을 그녀에게 '추서했다. 

 

 

삯바느질로 모은 돈도 독립운동 자금으로 
서울 명동의 금싸라기 땅은 원래 이회영 집안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회영 일가의 6형제는 '병합'이 되자 그해 12월 망명길에 오른다. 1908년 19살의 나이로 22살의 나이차가 나는 이회영 선생과 혼인을 한 이은숙 여사 역시 한겨울 압록강을 건너 40여일만에 중국 지린성 류허현에 이르렀다. 이회영 선생 등이 이곳에 한일 자치기구 '경학사'를 만들고, 무장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 무관학교'를 세우는 과정에서 이은숙 여사와 동료 여성들은 이들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말이 뒷바라지이지 당시 '독립 기지'의 가장 큰 고충은 '넉넉치 못한 재정'이었다. '죽울 쑤었을 대는 상을 가지고 나가지 못할 정도로 얼굴이 화끈히 달아올랐다'던 이은숙 여사는 서로 군정서 대원들의 옷을 직접 만들어 입혔고 먹였다. 하지만 청산리 전투 이후 베이징으로 옮긴 이은숙 여사네 집은 10 명에서 40여 명가지 독립 운동가들의 집결처가 되었다. 그들을 먹히고 입히느라 결국 어린 두 딸을 빈민 구제원에 맡겨야 하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1925년 임신한 몸으로 홀로 귀국하게 되었지만 삯바느질로 모은 돈마저 '하늘같이 섬기던' 남편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부쳤다. 이은숙 여사가 당시의 삶을 회고한 <서간도 시종기>는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19명이 서훈을 받은 이회영 일가, 여사는 1979년 90세에 이르러서야 '독립운동가'로 '추서'되었다. 



'내가 안하면 누가 하겠어요!'
이은숙 여사들처럼 드러난 '공적'인 독립운동의 이면에 그것이 가능하도록 만든 여성들의 '물심양면' 뒷바라지 안살림이 있었다. 그렇다면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은 여성들은 누구였을까? 그 중에 장정화 여사를 빼놓을 수 없다. 

1890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장정화 여사는 대한제국 대신을 지낸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과 불과 11살의 나이로 혼인을 한다. 그런데 1919년 갑자기 시아버지와 남편이 사라진다. 장정화 여사는 신문 기사를 보고서야 그분들이 '망명'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스무 살으리 겁없던 장정화 여사는 남편을 찾아 베이징으로 향한다. 

'이 길은 모진 풍파로부터 도피도 아니며, 안주도 아니다. 또 다른 비바람을, 이번에는 스스로 맞기 위해 떠나는 길이다. '


장정화 여사는 당시의 심정을 회고록 <장강일기>에서 소상히 밝힌다. 베이징으로 건너간 여사는 이동녕, 엄항섭 선생 등과 한 집에 살며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았다. 하지만 당장 독립 운동가들의 '호구지책'이 심각해지가 여사는 프랑스 조례 밖을 나올 수 없는 남성 독립운동가들 대신 스스로 고국과 중국을 6차례에 걸쳐 오가며 독립자금 등을 조달했다. 임시정부와 함께 중국 내륙을 거쳐 충칭에 이르른 여사는 1040년 한국 여성동맹, 43년 대한 애국부인회 등을 재건했고 광복 이후 귀국했다. 남편 김의한이 6.25 때 납북당하고, 여사는 1982년에서야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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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후반에도 거침없는 '독립'의 행보
임정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선생 역시 낙동강이 보이는 경북 안동의 유지였다. 99칸 대저택을 처분하여 '망명'한 선생, 19살에 혼인하여 어느덧 50대 후반에 이른 아내 김후락 여사도 함께였다. 여사는 1911년 베이지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해도교가사>로 남겼고 이 역시 주요한 독립운동사료이다. 

신흥무관학교 교장이 된 이상룡 선생, 김후락 여사는 안살림을 맡는 한편, 부인회를 조직 결의를 다지는 등 독립 운동의 내조에 힘썼다. 김후락 여사는 2019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었다. 또한 김여사의 며느리 이중숙 여사, 손주 며느리 허은 여사 3대 모두 독립 유공자가 된 '유공자 3대'의 집안이다. 

빨라야 197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독립 유공자로 '인정'받게 된 여성들, 그녀들이 없었다면 과연 그 혹독한 독립운동의 생활고를 버텨냈을까? 남자들이 '일경'의 감시로 옴짝달싹할 수 없을 때 기꺼이 압록강을 건너 고국의 독립자금을 나르던 여성들이 없었다면 과연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임시정부'가 가능했을까?

다큐는 이에 주목한다. 전문가들은 여성들의 뒷바라지를 여전히 '평범한 여성'들의 일로 보는 시각이 이 분들의 독립 유공자 '추서'가 늦게 된 이유라고 짚는다. 또한 여전히 부족한 여성운동사에 대한 연구도 아쉬움을 더한다. 누구의 아내, 혹은 '안살림'을 맡은 '여성'이 아니라, 그분들의 '이름' 그대로 불리워질 때, 비로소 우리 독립운동사가 '온전한 역사'가 될 것이라고 다큐는 '방점'을 찍는다. 




by meditator 2022. 8. 16. 00:02

11부 마지막 장면, 우영우의 친엄마 태수미(진경 분)가 있는 태산을 찾아간 권민우(주종혁 분)는 말한다. '착한 척 위선이나 떠는 한바다, 그 밑에서 나약해 지고 싶지 않다'고, 여기 권민우 변호사의 말에는 두 가지 논리가 들어있다.

착한 건 위선, 그리고 착하게 살면 나약해 지는 것, '권모술수'라는 별명에서도 보여지듯이 거대 로펌 한바다의 1년 계약직인 권민우는 우영우에 대한 편견이 가장 없는 사람이라는 세간의 우스개가 있다. 왜냐하면 권민우는 우영우의 자폐조차 권민우와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만드는 '아이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였기에, 이제 태산을 찾아와 말한다. 자신이 아는 진실이 힘이고, 무기가 되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로만 권모술수가 아니라, '본격' 권모술수의 길에 나선 것이다. 

그런 권민우에게 태수미는 우영우(박은빈 분)가 한바다를 떠나도록 하라는 '딜'을 한다. 당장 12회에 그 일을 실행에 옮긴 권민우, 시청자들은 그의 '권모술수'로 인해 고통받을, 그래서 한바다에서 쫓겨날 지도 모를 우영우가 걱정된다. 여느 드라마들이라면 '빌런', 권민우가 드라마적 갈등 요소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이런 갈등에 대해 조금 다른 접근을 한다 바로 '양쯔강 돌고래'에 대한 질문이다. 

 

 

변호사는 어떤 사람일까? 
12회차에서는 미르 생명의 여직원 정리 해고 사건을 다룬다. 우영우는 해고된 여직원들이 아니라, 미르 생명의 입장에서 변호를 맡게 된다. 극중 보여지듯이 한 직장을 함께 다니는 부부 직원들 중 아내에게 회사는 부당하게 '정리 해고'를 종용한다. 21세기에 '시어머니', '눈치'니 , 남편의 앞길이니 하면서 말이다. 결국 100명이 넘는 여사원들이 회사를 떠나게 되고, 이 과정에 승복하지 않은 2명의 여직원이 재판에 나선다. 

재판 과정에서 우영우는 혼란을 느낀다. 글로만 드러난 '사실'과는 다르게 , 재판의 과정 속에 숨겨진 '진실'에 대해서. 겉으로는 남자 직원을 역차별한 것같지만, 사실은 여직원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을 말이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정명석(강기영 분) 변호사를 찾는다. 

그런데 정명석 변호사가 언성을 높인다. 화를 내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그의 얼굴은 우영우가 보기에는 영락없이 화를 내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영우는 '변호사'라는 직업의 정체성을 물었다. 

정명석은 옳고 그름은 '판사'가 판단할 몫이며 변호사는 의뢰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에 집중하라고 강력하게 충고한다. 정명석의 말에 따르면 '변호사'라는 직업적 성격상 '가치 판단'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우영우는 변호사법 1조 1항을 말한다.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

 

희망 퇴직 권고는 난임 치료에 집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었을까요? 


우영우는 두 눈을 질끈 감고 '한바다' 변호사로써, 강제 퇴직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며 자신들에게 수임을 맡긴 미르 생명의 편에 서서 최선을 다하려 한다. 재판은 결국 원고의 손을 들어준다. 인사부장의 다이어리 속 메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명문화된 법 조항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런데 재판에서 이긴 한바다 변호사들과 미르 생명의 인사부장의 표정이 씁쓸하다. 심지어 인사부장은 다음은 자리 차례라며 착잡해 한다. 반면, '졌잘싸'라며 패소한 여직원들과 '시끄러운 여자' 류재숙 변호사는 얼싸안고 서로를 독려한다. 

 

 

정명석과 류재숙, 당신은 누구입니까? 
미르 생명에 대한 한바다의 법률 자문 사실을 알게 된 우영우는 언제나 그랬듯이 뿌르르 정명석 변호사 방으로 달려간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정명석 변호사는 '어미 고래'와 같다. 우영우 김밥을 하며 영우를 키운 아버지가 집에 있지만, 사회에 나온 영우를 음으로 양으로 보살피는 건 정명석 변호사의 몫이다. 처음 영우에 대한 편견을 가졌지만, 가장 먼저 영우에게 정중히 사과한 이래, 정명석 변호사는 언제나 영우에게 기회를 줬다. 심지어 권민우가 '차별'이라고 할 정도로. 

그렇게 '어미 고래'같은 정명석이기에 그의 말대로 우영우는 '의뢰인의 입장'에 서서 최선을 다하려 한다. 그런데 정명석과 우영우, 그들이 속한 대형로펌 '한바다'의 의뢰인은 '미르 생명' 같은 곳들이 많다. 수임료가 비싼 한바다와 같은 곳에는 '돈이 많은 사람들'이 온다. 

12회 내내 정명석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이는 재벌 2세였다. 감옥행이어야 할 그를 '구해주다시피'한 정명석과 또 다른 변호사, 그들은 아버지를 잔인하게 죽인 장재진을 '변호'했다. 의뢰인의 입장에 서서 최대한의 감형을 했지만 감옥에서 출소한 그는 형량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다른 변호사를 찔러 상해를 입힌다. 당연히 정명석 변호사는 자신도 '린치'를 당할까 두려움에 떤다. 

해프닝처럼 등장한 이 사건은 대형 로펌 변호사의 '숙명'을 그린다. 의뢰인이 어떤 사람이어도 그의 '편'에 서야 하는. 반면, 변호사의 '사'자가 검사, 판사의 '事' 와는 다른' 士' 라며 변호사법 1조 1항을 우선하는 류재숙 변호사는 다른 길을 걷는다. 

어미 고래같던 정명석 변호사는 난임 치료 사실을 법정에서 쓰지 않으면 안되냐는 우영우의 청을 묵살한다. 반면, 류재숙 변호사는 권민우가 우영우의 이름으로 보낸 한바다의 법률자문 의뢰서를 재판에서 사용하지 않는다. 그때문에 졌을 수도 있지만, 류재숙은 '졌잘싸'를 밝은 얼굴로 외친다. '패소 전문 변호사'란 류재숙 변호사, 그런 그녀를 우영우는 '멸종 위기'의 양쯔강 돌고래라 한다. 

늘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며 업무에 쫓기고, 의뢰인이라는 무뢰한에게 쫓기고, 이제 피까지 토하고 마는 정명석, 그런 그와 대비되어 '채소를 덜 잘 가꾼다'는 초라한 사무실, 하지만 넉넉한 인심의 류재숙이 대비된다. 드라마에서는 양 극단의 인물을 ㅖ로 들었지만, 결국 정명석과 류재숙의 삶은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과연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까? 우영우의 표현에 따르면 어떤 고래의 삶을 선택할까?  극중 안도현의 연탄 한 장을 읊는 류재숙, 자신을 태워 사랑을 이룬 삶은 아름답지만 쉽지 않다. 유인식 피디의 전작 <낭만 닥터>가 떠오른다.  류재숙을 유심히 보는 우영우, 어쩌면 그녀에게 닥친 위기를 영우는 뜻밖의 선택으로 돌파하지 않을까? 제주 바다에 풀어놓은 수족관 돌고래처럼.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 연탄 한 장, 안도연

by meditator 2022. 8. 5. 17:23

왕은 '북벌'을 계획했다. 백성들이 당한 수모를 좌시할 수 없다는 그의 결심을 중신들, 그 중에서도 좌상 조태학(유성주 분)이 막아선다. 그들의 전횡을 알기에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왕은 출병을 서두르지만, 출병령을 가지고 가던 군사는 비명횡사했다. 수상한 꽃가루를 넣은 음식을 먹은 왕은 하룻밤 사이에 종창이 부풀어 올랐다. 극중 주인공 유세엽(김민재 분)이 종창을 치료하려했으나 오히려 피가 멈추지 않아 죽게 된다.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첫 회의 내용이다. 이 내용은 '북벌'을 계획하다 서른 아홉의 나이로 극중 내용처럼 종기 치료를 받다 과다출혈로 사망한 '효종'사의 역사적 사실과 상당 부분 흡사하다. 형 소현세자와 함께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대신 왕위에 오른 임금이다. 이덕일이 지은 <조선왕 독살 사건>은 효종의 죽음을 '독살'로 의심했고 드라마는 그런 '역사적 상상력'에 기반한다. 드라마는 이렇게 뒤숭숭한 '호란' 이후의 조선 사회라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마음의 병까지도 고치는 '심의' (心醫) 유세풍이라는 인물을 탄생시킨다. 


하지만 아직 유세풍이기 이전에 유세엽인 주인공은 왕을 치료한 자신의 '조선판 메스'가 변색된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왕을 죽였다는 사실에 자지러진다. 일찌기 문과 급제를 했지만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 유후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과에 나서 장원을 따냈으며 친구였던 세자의 급체를 해결하여 왕으로부터 '신침'이라 칭송을 받았었다. 하지만 어의와 결탁한 조태학의 세력은 그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아들을 구하 왕의 독살을 밝히려 동분서주하던 아버지 유후명조차 피습당하고 만다. 다행히 친구였던 새 왕은 유세엽의 목숨만은 구해주었다. 하지만 '한양'에서 잘 나가던 내의원 수재는 이제 성문 밖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때를 기다리라 
동가숙서가숙하던 유세엽과 그의 집안 머습 만복을 계수의원 계지한이 '빛'을 핑계로 잡아앉힌다. 하지만 계수의원에 있으면 뭘하나, 침만 쥐면 그의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손은 벌벌 떨리는 것을. 그런 그에게 '돈만 밝히는 스승인지, 빚쟁인지 헷갈리는' 계지한은 말한다. '때를 기다리라고.'

일찌기 간질병 궁녀의 치맛자락을 잘라 목숨을 구할 정도로 '의원'으로서의 사명감에 투철했던 유세엽이었다. 하지만 가문은 무너지고, 신침이라던 그가 침도 놓지 못하게 되자 세상을 버리려 했다. 목숨을 구하고 계지한이 빚을 핑계로 그를 다시 '의원'노릇을 하게 만들었지만 여전히 '의지 상실'이었다. 그런데 벼랑 위의 그를 구하며 살아서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이를 구하라 했던 그녀 서은우(김향기 분), 그 초롱초롱하던 눈빛의 그녀가 그의 앞에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존재'가 되어 나타났다. 자꾸 죽으려는 그녀를 어떻게 해서든지 살리고픈 그의 '열망'이 '침'이 아니도 환자를 고치는 '심의' 탄생의 서막이 된다. 

드라마는 망한 가문의 전직 내의원, 굴러들어온 계수의원 반푼이 유세엽이 '심의' 유세풍으로 거듭나기 위해 두 여인의 삶을 계기로 삶는다. 

그 첫 번째 여인은 바로 벼랑 끝의 유세엽을 삶으로 인도한 서은우, 하지만 그녀는 결혼 당일 신랑의 죽음으로 시어머니로 부터 죽음을 강요당하고 있는 청상과부이다. 또 한 사람은 계수의원의 매병(치매) 할망이다. 

유세엽은 서은우에게 자신을 '동일시'한다. 시어머니는 가문의 부흥을 위해 열녀문을 하사받기 위해 그녀가 죽기를 원한다. 친정은 '출가외인'이라는 법도를 들어 그녀를 품을 수 없다. 그 누구도 그녀의 삶을 바라지 않는 세상에 자꾸만 죽으려는 서은우에게 임금을 죽이고, 아버지도 죽인 거나 다름없는 이제는 능력을 상실한 의원 유세엽 본인의 모습이 '투영'된다. 

또 일찌기 어머니를 여의고 문과 급제를 했던 그가 의원으로 마음을 돌렸듯이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품어주듯이 매병 할망은 그를 '풍이'라 부르며 보다듬는다. 비록 그런 그녀의 맹목적인 모성이 '매병'으로 인한 착각이요, 정작 풍이는 따로 있지만, 매병 할망을 통해 비로소 유세엽은 계수의원을 자신의 '안식처'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제 유세엽 대신 할망이 잃어버린 아들 '풍이'가 되어 유세풍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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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 대신 마음을 돌보다 
드라마에서 유세엽이 유세풍이 되도록 매개가 된 두 여인은 '죽어야 하는 여인, 잊혀져야 하는 여인, 버림받은 여인들'이었다. 유교 중에서도 가장 '근본주의적' 성격이 강한 성리학을 사회적 윤리관으로 수용한 조선, 중기 이후 '남존여비'의 체계가 확고히 되고, 그런 가운데 남편이 죽은 양반가의 여성에게는 이른바 간접적 '명예 살인'으로 '자결'이 강요되곤 했다. 그 '대가'로 수여되는 '열녀문'은 가문의 영광이자, 드라마에서 보여지듯이 남은 자손들에게 '입신양명'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그렇게 대의와 명분을 위해 여성의 목숨을 희생양으로 삼는 조선이 청에 침략을 당했다. 청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때 소현 세자, 봉림대군과 같은 왕족 뿐만 아니라 수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 중에는 '여성'들도 있었다. 계수의원의 할망이 바로 그 포로로 잡혀간 여성이었다. 고향이, 자식이 그리워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할망, 하지만 고향 집의 아들은 그런 그녀를 외면했다. '어머니는 이리 오래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돌아온 포로 여성들, '환향녀', 하지만 그들은 돌아온 고향에서 버림받고, 몰매를 맞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가족에게 버림받은 채 '매병'을 앓는 할망을 유세엽이 아들과의 '해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한시도 풀어놓지 않던, 아들을 위해 그녀가 시시때때로 챙겼던 물건들의 보따리를 아들 앞에 풀어놓음으로써 할망은 묵은 짐을 내려놓는다. 

서은우와 할망, 이 두 여인을 돌보면서 유세엽은 침이 아니라도 의원으로 자신이 할 일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유세엽은 할망이 자신을 부르던 '풍이'를 자신의 이름으로 택한다. 

이름은 그저 이름일뿐입니다. 


가문이 존재를 대신하는 조선 시대에 그는 이제 자신의 가문 대신 서은우와 할망같은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을 보살피겠다는 자기 선언을 한 것이다. 심의로서 '유세풍'은  '입신양명'했던 '신침' 내의원 유세엽이란 존재를 버리고, 사회가 외면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이렇게 그가 택한 길은 결국 궁극에 가서 그를 제물로 삼고, 그의 아비를 죽음으로 내몬 선대 왕 독살 사건으로 이어질 것이다. 북벌의 뜻을 꿈꾼 왕을 죽음으로까지 내몬 권문 세가, 그들과의 '심의' 유세풍의 대결은 어떻게 풀어질까? 퓨전 사극이라지만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의 포부가 결코 가볍지 않다. 

by meditator 2022. 8. 3. 17:28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격리가 풀리자 각종 업종들이 기지개를 켠다. 이제 다시 한번 코로나 이전의 활황을 누려볼까? 그런데 웬걸, 일할 사람이 없다. 일할 사람이 없어 기계를 놀리고, 영업 시간을 줄이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도대체 일을 해야 할 젊은이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최근 MZ 세대의 새로운 직업관과 구인난을 겪는 산업 현장의 현실에 대해 7월 25일 자  <시사 기획 창>이 분석한다. 

인력난에 시달리는 건 특정 '업종'의 문제가 아니다. 커다란 창으로 바깥 풍경이 보이는 안락해 보이는 사무실, 그런데 드문드문 빈자리가 있다. 온라인 광고를 제작하는 디지털 마케팅 업체, 업무 시간에 음악을 들어도 좋다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강조하지만 여전히 몇 십 명의 인원을 충원하기가 난망이다. 경기도 김포의 치과에서는 기숙사를 구해준다고 해도 단 한 건의 문의조차 없다. 시급 12만원을 주겠다는 햄버거 가게 역시 지원은 커녕 다니던 직원 절반이 그만둬 사장은 울상이다. 유흥의 메카 강남이라고 다르지 않다. 손님을 벨을 연신 누르지만 서빙할 직원이 없다. 사장은 한쪽에서 지난 번 그만 둔 직원의 동정을 묻고 있다. 

 

 

답답한 조직보다 차라리 배달이 낫다 
강남 유흥가에서 사장이 찾던 직원은 지금 배달 일을 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플랫폼 사업'이 활성화되고, 그 중에서도 '배달 앱'등이 활성화되면서 다수의 MZ세대들이 이른바 '국민 부업' '배달업'에 뛰어들었다. 탄탄한 회사의 물류 담당 직원이었던 전성배 씨는 회사를 그만둔다 했을 때 주변에서 미쳤다며 말렸다. 잠시 '알바'삼아 하려고 했지만 업무 지시도 없는 훨씬 '심플'한 업무 내가 원하는 시간, 원하는 만큼 일을 할 수 있는 이 일에 현재 만족하고 있다고 한다. 

MZ 세대, 1980년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Z세대를 아우르는 표현이다. 15세에서 40세까지 1700만 명 정도로 국내 인구 분포 상 34% 정도를 차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이들의 '퇴사'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을까?  회사로 보면 대리, 과장 급의 사람들인 이들은 우리 사회의 실무 인력을 담당하고 있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중 30~60%가 2년 미만의 퇴직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들의 직업적 변동성은 우리 사회 전반의 심각한 구인구직난으로 이어진다. MZ 세대에게 언제쯤 퇴사를 결심했냐고 물었다. 평균 10개울 즈음이라는 답이 나온다. 언제든 퇴사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그렇다는 답이 49.5%로 과반에 달한다. 매우 그렇다도 22%에 달했다. MZ세대에게 퇴사는 '자유'이자, '해방'이요, '새로운 시작'이다. 불안이나 백수라는 부정적인 생각은 3%에 불과했다 이들은 자신의 생각과 가치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 퇴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세대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대퇴사시대(the Great Regression) 라는 말이 유행한다. SNS를 중심으로 회자되는 '퇴사 영상'이 이젠 우리나라에서도 유행이다. 

 

 

달라진 세대, 뒤처진 조직과 사회 
그런데 이런 젊은 세대들의 변화된 태도에 대해 사회적 인식은 엇갈린다. 회사 측 입장에서는 주 52시간 제도로 인해 젊은 세대들이 평생 아파트조차 못사는 처지가 되었다고 제도적 한계를 지적한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그런 분석에 고개를 젓는다. 외려 쉬는 날에도 특근을 해야 하는 근무 환경에 화가 났다고 말한다. 회사는 자녀들 학자금에 장례부조를 자랑하지만, 결혼도 할까말까한 젊은 세대에서 미래 자녀의 학자금은 공염불처럼 들린다. 존중과 존대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존댓말로 자신의 휴대폰 액정 닦이를 사오라고 하는 식의 시스템에 젊은 세대는 반발한다. 

19살에 엔지니어로 입사한 허태준 씨는 '퇴사'를 했다. 잔업을 하고 돌아오면 8시, 그저 씻고 자기만 하며 살아가는 일상이었다고 한다. 잔업이 없는 수요일만 기다리는 처지가 된 자신의 현실에 환멸을 느껴가던 즈음, 지하철 청년 노동자들의 죽음이 연이었다. 자신과 다르지 않는 일을 하던 젊은이들이라 여겨졌다. 허태준 씨의 생각처럼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제조업은 오래 일하면 '몸이 상한다'고 하는 현실이다. 또한 달라졌다고 하지만 근무 조건이나 환경에서 인정이나, 보람, 성취를 MZ세대가 느끼기 힘든 게 현실이다. 

MZ세대는 일자리 선택 기준에 있어 그 이전 세대와 달라지고 있다. 물론 여전히 선택 기준에 소득 기준이 1위임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비율도 달라진다. 그보다 개인의 발전 가능성이라던가, 업무량, 출퇴근 거리가 중요하게 대두된다. 나를 발전시킬 수 있고, 내가 발전할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하는 게 이제 MZ 세대 직업적 선택에는 중요한 화두다. 

다큐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아 '퇴사'를 한 젊은이들과 인터뷰를 한다. 타이어 회사에서 사보를 만들던 김유경 씨는 '시키는 거나 하라'는 상사의 지시에 퇴사를 결심했다고 한다. 안정적인 은행을 다녔지만 군대보다 더 보수적인 분위기, 서로 뒷담화를 하는 조직 내 문화에 강이삭 씨 역시 사표를 내던졌다. 홍석남 씨의 경우 대기업에 다녔지만 여기에 계속 다니면 10년 , 20년 뒤 자기 발전이 없겠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천지은 씨의 경우 우스개로 '모든 걸 다해서' MD라는 직책을 맡았었다. 말 그대로 모든 제조 과정에 간여하지만, 정작 결정권이 없는 현실에 좌절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생을 덜해봐서 그래', 어른들은 말한다. 창업을 한 강이삭 씨는 인정한다. 하지만 회사가 원하는 루틴대로 살아가는 대신  자신이 원해서 선택한 삶이 주는 스트레스를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한다. 한계가 정해지지 않은 삶, 자신이 이루어 갈 수 있는 그 '무한대'의 가능성에 자신을 내맡기겠다는 것이다. 

달라진 사고 방식의 MZ 세대, 이들의 달라진 직업관의 결과가 바로 코로나 이후 '구인난'이라고 다큐는 분석한다. 2003년 '벼랑 끝에 선 청년들'이라는 다큐에서만 해도 젊은이들은 회사 고를 때가 아니라며 사원이라는 이름 아래 정착하고 싶다고 눈물을 흘렸었다. 격세지감, 이제 젊은이들은 '퇴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월급'이라는 마약에 취해 주저앉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안맞겠다 생각하면 한 달도 못참'는다는 세대, 이들을 우리 사회 제도 속에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이들이 추구하는 사고 방식에 맞춰 조직과 사회가 변해야 한다고 다큐는 결론내린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거북이 걸음이다. 구직 급여는 자발적 퇴사나 한 달 15일만 일을 해도 제공되지 않는다. 고용자 입장에서는 채용지원금보다 고용유지를 위한 실질적 혜택이 있어야 한다고 아쉬움을 피력한다. 회사원에만 한정된 대출 제도처럼 달라진 세대에 뒤처진 사회 제도이다. 






by meditator 2022. 8. 1.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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