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 첫 선을 보인 <가면>은 단 2회만에 1.7%나 시청률이 상승하며 순조롭게 수목드라마 대전에서 1위 자리를 굳혔다. 첫 회 드라마가 시작하자 마자 여주인공인 변지숙(수애 분)이 탄 차가 아기 사슴을 피해 벼랑으로 구르다 바다에 빠지려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 상황처럼 드라마 속 변지숙의 삶 역시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여 시청자들의 이목을 끈 것이다. 

그런데 <가면>이 드라마에 관심을 갖는 이른바 사람들 사이에서 관심을 끈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2013년 9월부터 kbs2에서 방영되어 화제를 모았던 <비밀>의 작가 최호철의 차기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작가 작품이라 그럴까? 단 2회에 불과하지만 <가면>은 어딘가 <비밀>같다. 하지만, 또 <비밀>을 함께 했던 유보라 작가나 이응복 피디의 부재때문일까? <비밀>같지는 않다. <비밀>인듯, <비밀>같지 않은 <가면>은 어땠을까?




<비밀> 인듯한 <가면>
무엇보다 비슷한 것은 어딘가 정상적이어 보이지 않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이다. 대기업 회장의 외아들, 하지만 그의 친모는 사연을 가진 채 죽었고, 아들은 그런 친모의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해 정신적 아노미 상태를 보인다. 브리핑 조차도 제대로 못해내는 기업을 물려받기엔 한없이 부족한 업무적 능력에, 관심조차도 그다지 없다. 약속이 있어도, 우연히 스쳐가는 여자를 친모로 오해해 쫓아가듯 충동적으로 벌이는 일들로 인해 주변 사람들의 신임을 받기 힘든 위치에 놓여있다. 거기에 아버지는 사업적으로 무관심하며 무능력한 아들을 미더워하지 않고, 어머니는 말만 어머니지 자신이 낳지 않은 후계 구도 1순위의 그가 제거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이런 불안정함이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의 죽음 앞에서 죽인 강유정(황정음 분)에 대한 집착으로 자연스레 이어져 독보적인 <비밀>의 조민혁(지성 분)이 되었다. 또한, 병적이리만큼 결벽증에 빠진 최민우(주지훈 분) 캐릭터 역시 쉽게 설득이 된다. 

그렇게 성과도 같은 집에 살며, 화려한 백화점을 집무실로 삼는 재벌가의 하지만 불행한 남자 주인공이라면, 그와 조우하게 될 여주인공은 가난한 집의 딸이다. 그것도 공교롭게도 무능력해서 딸에게 빚과, 그 빚을 받기 위해 사채업자들의 가학적인 독촉만을 남겨준 아버지이다. 하지만 '부친'의 경제적 그늘 속에서도 삶의 의지를 잃지 않던 여주인공은 뜻하지 않는 사건으로 그녀의 인생이 '롤러코스터'를 탄다. <비밀>에서는 그녀가 순정을 다바쳤던 안도훈(배수빈 분)이 일으킨 교통 사고요, <가면>에서는 그녀와 똑같은 얼굴을 지닌 '도플 갱어' 서은하의 의식 불명에 이은 역시나 '교통사고'이다. 이렇게 두 건의 교통사고는 똑같이 <비밀>의 강유정, 그리고 <가면>의 변지숙의 삶을 극적으로 몰아간다. 

그리고 이렇게 극와 극의 삶의 조건인 두 남녀 주인공 사이에, 또 한 남자가 있다. 가진 것 없이 태어났지만 삶의 상승을 향항 야망만은 그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는, <비밀>의 안도훈과 <가면>의 민석훈(연정훈 분)이 그들이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욕망을 끊임없이 합리화하고, 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 '합목적적' 야망형 인간형은, <비밀>과 <가면>의 두 주인공을 이끄는 사건의 또 다른 추동력이다. <비밀>의 조민혁을 집요한 복수의 화신으로 몰아간 것은 결국 따지고 보면 안도훈의 교통사고였고, 강유정을 비극적 운명으로 몰아넣은 것 역시 그것을 덮으려는 안도훈의 욕망이다. 마찬가지로 스치듯 지나갈 수 있는 <가면>의 최민우와 변지숙을 한 운명 속으로 몰아넣은 것은, 민석훈의 야망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야망에 불을 지피는 주인공과 애증의 관계에 놓인 여자들 <비밀>의 신세연(이다희 분)과 <가면>의 최미연(유인영 분)이 있다. 

부조리한 재벌가. 하지만 그 '부'를 욕심내는 야망의 남자, 운명적으로 거기에 얽혀 들게 된 가난하지만 순수한 여자, 그렇게 <비밀>과 <가면>이 가진 드라마의 얼개는 유사하게 짜여져 있다. 



<비밀>이 아닌듯한 <가면>
이렇게 따지고 보니 매우 흡사한 극의 얼개를 가지고 있지만, 단 2회에 불과함에도 <가면>이 <비밀>의 작가가 썼던 작품이라 쉽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작품의 분위기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안도훈의 교통 사고로 시작된 <비밀>은 사건의 진실을 밝혀가고자 하는 '스릴러'로 시작된다. 거기에 사랑하는 이를 죽인 강유정에 대한 조민혁의 집착에서 비롯된 치명적 멜로의 분위기로 이어진다. 그에 반해, <가면>은 오히려 이제 와 따지고 보니 <비밀> 역시 통속극의 얼개를 가지고 있었구나!란 뒤늦은 깨달음조차 줄 정도로, 통속극으로서의 분위기를 분명하게 드리운다. 거기에 뜬금없이 얹혀지는 최민우의 코믹 설정. 통속극으로서의 <가면>이 말 그대로 너무 통속적이고 진부하게 느껴진다는 제작진의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비밀>의 조민혁과는 조금 다른 차별성을 두어야 한다는 강박이었을까? 주말 드라마나 아침 드라마에서 종종 조우하던 재벌 집안의 이전투구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거기에 가난하지만 씩씩한 여주인공을 등장시키면서 역시나 어디선가 본듯한 전형적 구도를 벗어나지 않는데, 그런 '통속극'의 얼개를 비틀어, 뜬금없이 최민우가 '코믹'하게 등장하는 것이다. 그가 가진 정신적 불안이, 그리고 그와 변지숙의 만남이 '웃음'의 포인트로서 드라마에 방점을 찍는다. 

<가면>의 전작 <냄새를 보는 소녀>가 80%의 로코와 20%의 스릴러를 표방했듯이, 마치 <가면>은 통속극 80%에 코믹 20%를 표방한달까? 하지만 2회에 불과하지만 아쉬운 것은, 장르적 진부함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자연스럽게 조화되었다기 보다는 그저 '낯설게 하기'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sbs 수목 드라마의 목표가 이질적 장르의 조합이라도 되는 것처럼 <냄새를 보는 소녀>도, <가면>도 이질적인 두 장르를 조합하려 하지만, 두 장르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서 비롯된 소화라기 보다는, 그저 '섞어 넣음' 수준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후의 전개가 뻔히 예상되는 통속극의 얼개, 그리고 아직은 어색한 코믹한 설정들에도 불구하고 <가면>은 다음 회가 기다려진다. 그것은 아마도, 스릴러이건, 멜로이건, 혹은 통속극이건, 코믹이건, 두 작품을 이끌어 가는 남녀 주인공들의 매력적인 캐릭터에 기인한 바가 크다. 그리고, <비밀>이 조민혁에게 갖은 별명을 따라붙고, 조민혁-강유정 커플에 홀릭하는 시청자들을 양산했듯이, <가면> 역시 단 2회지만, 치명적이면서도 허당스런 최민우의 주지훈과, 삶에 애착을 놓지 않으면서도 당돌한 변지숙, 그리고 믿음직스러운며서도 야먕의 그림자가 짙은 민석훈, 그리고 집착하면서도 깨질 것 같은 최미연, 네 사람의 캐릭터와 연기의 질감만으로도 <가면>을 볼 기대가 생겨나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5. 5. 29. 10:02

친한 친구를 만나니 몹시 화가 나있다. 

함께 일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보신과 안위를 위해, 또 다른 함께 하는 사람을 쳐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목도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은 그 일을 교묘하게 합리화하기 까지 하면 자신의 입장에 반대하는 친구를 공격하기 까지 했단다.
분노한 친구를 그 사람이 혼이 쏙 빠지게 한번 들었다 놔야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라며 한바탕 할 궁리를 한다. 그런 친구에게 말했다. '얘야, 자기가 무얼 잘못한 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백날 이야기 해봐라, 어디 동네 개가 짖나 할 꺼다. 아니 오히려 내가 뭘 잘못했는데 하면서 길길이 날 뛸 수도 있어. 지가 깨닫지 못한 사람한테 한바탕 해봐야, 니 입만 아퍼'

14일 16부작으로 종영된 드라마 <비밀>을 보니, 친구에게 했던 이 말이 떠오른다. 유정이에게 결혼 신청을 할 생각에 설레이며 집을 나서던, 아니, 심지어 사랑하는 유정이가 자기 대신 감옥에 갈 때만 해도 검사 안도훈이 꿈꾸던 행복은 '정의로웠다'. 그리고 가진 것 없는 자기 부모와, 유정이의 희망을 걸고, 그 정의를 실현하려 했었다. 하지만, 이미 엄밀하게는 자신의 차로 친 것도 아닌, 피흘리는 지희를 버려둔 채 떠나는 그 순간부터 안도훈은 명예로운 검사직 대신에, 검사라는 직위가 이 사회에서 누리는 입신양명의 유혹에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죽어가는 지희를 눈감은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유정이의 가석방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또 한 발 더 나아가 유정이의 아버지를 죽게 방기하는 수준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직위를 유지하려 했던 그 검사직이 무위로 끝나는 순간, 안도훈은 가속 패달을 밟은 사람처럼, 이 사회 상층부의 그 무엇이 되기 위해 치달아 간다. 

16부작이 마무리되었을 때 어쩐지 한켠에서 속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바로 <비밀>이란 드라마 내내 오로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유정이를, 그리고 유정이의 아버지를, 해치고 죽음으로 몰아가며 모든 짓을 저질렀던 안도훈의 결말이, 유정이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조민혁의 처절한 복수로 마무리되지 않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계급 에스컬레이션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안도훈의 결말은 결국 감옥행이라는 걸 알면서도, 왠지 좀 더 처절한 복수의 결말로써의 그것이기를 바랐던 또 다른 시청자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욕구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굴에 점을 찍고 나타나 다른 사람이라 우겨도, 그의 복수가 통쾌하면 박수를 쳐주던 우리나라 드라마의 주된 '맥거핀'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우리는 드라마를 통해 대리 만족을 해왔으니까. 

하지만 드라마<비밀>은 그런 '복수'로 점철되었던 우리나라 드라마의 방식을 탈피한다. 대신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만드는 '참회'의 방식에서 해법을 구한다. 되돌아 보면, 이 드라마가 중반 이후 많이 던져진 질문이 바로 '너는 니가 무엇을 잃었는지 모르지?'가 아니었을까? k그룹 옥상에서 조민혁이 안도훈에게 이 말을 던졌을 때, 안도훈은 부정한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궤멸되어가기 시작한다. 그는 단지, 유정이를 포기했을 뿐이라고 자신의 성공에 걸림돌이 되는 여자와 그의 아버지를 제거했을 뿐이라고 치부했지만, 조민혁의 그 질문에는, 그 사실 뒤에 숨겨진,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넘긴 파우스트처럼,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순수한 시절'의 안도훈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게 피부에 와닿는 안도훈의 표정 역시 일그러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저 일그러진 표정을 악으로 버틸 수 있었던 안도훈도, 자신의 모친이 자신의 영달을 위해 자신의 혈육조차 지우려 했던 지점에 도달해서는 무너지고 만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참회를 한 건, 비단 안도훈만이 아니다. 이미 조민혁은, 그가 유정이가 자신을 죽인 여자라며 집요하게 괴롭히다, 뜻밖에 마주한 유정이의 순수함을 조우하며, 그리고 혹시나 자신이 그토록 스토커처럼 괴롭혔던 유정이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정에 맞딱뜨리게 되면서, 증오를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조민혁 식의 참회 과정을 겪어 왔다. 자기 자식 산이를 결국 품안의 자식에서 놓아주는 유정이 역시, 사랑하는 아버지를 홀로 두고 또 다른 사랑을 쫓았던, 안도훈의 부정을 눈감아주는 과정에 동참했던 자기 과거에 대한 그녀만의 참회이다. 

<비밀>의 작가는 지금까지 우리나라 드라마들이 해오던 말귀 못알아 먹는 얘들 실컷 때려주는 대신에,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게 만드는 방식을 택한다. 
결국 자기 자식조차 유기했던 안도훈은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감옥행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단말마의 저항을 포기한 채 미소를 띠며 재판에서 자신의 죄를 시인한다. 조민혁은 애초에 깜냥조차 되지 않았던 재벌 가문의 승계자 지위를 내려 놓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드라마 시작 즈음에 가장 첨예하게 우리 사회의 계급 구조의 대립각을 드러내던 <비밀>은  각자 자신의 분수에 맞는 행복을 찾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아마도 이 드라마의 해피엔딩에 이런 해결 방식도 있구나 감동을 받으면서도, 그래도 괜히 껄쩍지근한 한 구석이 남는 것은, 그런 실컷 때려주는 복수극을 기대했던 습관에 기인한 것이요, 또 한편으론, 유정이의 복수를 통해, 안도훈은 물론, 검사 등의 관료 엘리트 계층과, 재벌, 그리고 정치로 이어지는 커넥션의 전복을 꿈꾸어보던 일말의 기대를 접어야 하는데서 오는 아쉬움일 수도 있겠다. <비밀>의 비밀이 폭로되면서, 안도훈만이 아니라, k그룹이라는 거대한 그 무엇이 뒤틀리는 광경을 보고싶은 욕구 그것 말이다. 아니 어쩌면 하수인에 불과했던 안도훈이 아니라, 그 뒤에 음모의 시작으로 부도덕의 결정체 k그룹의 실체가 드러나는 보다 큰 구도로서의 드라마 <비밀>을 기대했던 야무진 기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친자 문제로 물러나는 검찰 총장의 후임으로, 여전히 땅뙈기를 몰래 거래하고, 자기 자식을 몰래 군대 안보내고 좋은 회사에 들여보내는 또 그저그런 사람이 후임이 되는 세상에 대한 비감이 괜히 비밀의 해피엔딩을 지레 김빠지게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민혁의 말대로, 생각보다 k그룹은 견고했다. 대신 자각한 조민혁이 있을 뿐이다. 마치 드라마는 어설픈 전복보다는, 자각한 이성적인 인간들이 꾸려가는 희망을 기대할 수 있는 사회를 선택한 듯하다. 

결국 <비밀>은 말한다.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by meditator 2013. 11. 15. 09:25

10월 17일자 <비밀> 안도훈(배수빈 분) 이 맘에 들지 않는 조민혁은(지성 분) 그를 만날 때마다 이기죽거린다. 더구나, 그가 자신의 k그룹에 변호사로 들어오자, 그 강도는 더욱 세진다. 조민혁은 안도훈의 아킬레스 건을 건드린다. 정의를 내세우던 니가 영혼을 구걸해 들어온 k그룹은 결국 내꺼라고. 하지만 안도훈도 호락호락지는 않다. 노는 시간조차 아껴 여기까지 올라온 나와 당신은 다르다. 당신은 아버지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이 결정적 차이다. 라고.


<비밀>이란 드라마에서 비밀이 시작된 계기는 교통사고이다. 하지만, 교통사고라는 외면적 계기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바로 안도훈의 사시 합격이었다. 이제는 금의환양만을 앞둔 그에게 교통사고는 청천벽력이다. 그리고 그 하늘이 무너지는 걸 봉합한 건, 사랑하는 이의 희생이었다. 
무능력한 아버지, 식당 일등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 갖은 알바를 전전하는 사랑하는 이, 그리고 무너져가는 동네 빵집을 지키는 그녀의 아버지. 이 모든 사람들의 희망은 안도훈의 입신양명에 달려있었다. 검사가 된 후에도 여전히 생선 몇 상자를 두고 싸움을 하는 그의 부모처럼, 좀처럼 나아지지 않던 그의 집안 환경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사람들이 그에게 바란 것은 그저 '부'만이 아니었다. 정의로운 검사가 되어 '없는'사람들 편에 서달라는 막연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검사가 된 안도훈에게 닥친 현실은 어떤가. 
사랑하는 유정(황정음 분)을 감옥으로 보내는 희생을 치르면서 쟁취한 검사직은, 그에게 '정의'보다는 '줄타기'를 가르쳤다. 그는 비록 뺑소니를 칠 만큼 부도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을 무마할 정도로 정의롭고 싶었지만, 그의 정의는 법원에서 길을 잃는다. 그가 정의로우면 정의로울 수록, 그에게 돌아오는 건 동료 검사들의 비웃움을 넘어 또 한번의 부도덕한 검사라는 낙인이다. 
그리고 그는 쉽게 '정의'를 버린다. 처음 사랑하던 사람을 희생시킨 것을 시작으로, 그는 쉽게 자신의 도덕적 영혼을 판다. 그런 그를 버티는 건, 도덕적 순수성이나 정의로운 세계관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고생해서 이 자리까지 왔는데 라는 자기 희생의 논리와 그에 대한 보상 심리 밖에 없다. 그러기에 더 좋은 '자리'를 위해서는 자기를 제외한 타인의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안도훈을 조민혁은 우습게 본다. 니가 그래봐야, 결국 니가 일하는 건 나를 위해서라고. 유정이를 희생시키기 위해 유정이의 아버지를 죽음으로까지 몰아가는 안도훈을 지켜보며, 그리고 자신의 애인을 죽인 사람이 유정이라 생각하여, 그녀에게 온갖 가혹행위를 일삼던 조민혁이 어느새, 집착적 스토커를 넘어 연민으로 다가가며, 시청자들은 그에게 빠져든다. '조토커, 조스패치'라는 그의 별명들은, 말이 스토커지, 사랑스러움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다. 물론 <비밀>이란 드라마에서 모든 불행의 시작은 안도훈이요, 그의 거침없는 변신과 배신은 분명 지탄의 대상이지만, 아버지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조민혁과 그를 배태한 k그룹이란 권력에 드라마를 보는 우리들은 쉽게 녹녹해진다. 
부도덕한 사고에도 불구하고 정의로우려고 했던 안도훈을 몰아부친 것도, 지금껏 유정이를 그리고 혹시나 사고가 들킬까 노심초사한 안도훈의 곁에 들러붙어 집착을 했던 힘도 결국은 조민혁, 그리고 그를 키운 재벌이라는 사실을 드라마를 보는 우리는 쉽게 잊는다. 그리고 어느새 조민혁과 유정이가 잘 되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을 쉽게 잊는 것처럼. 

하나의 변수가 더 있다. 바로 조민혁의 약혼자 신세연이다. 
4선 국회의원의 딸이자, 그 힘으로 이제는 호텔의 지분조차 획득한 정략 결혼 상대자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경으로, 조민혁이란 재벌과 결혼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녀가 운영하는 갤러리를 통해 k그룹의 비자금 형성에 적극 개입할 정도로, k그룹과의 커넥션은 긴밀하지만, 오히려 그녀를 방해하는 건, 조민혁을 어릴 적부터 의지하고 좋아했던 마음이다. 조민혁의 불성실한 약혼자로써의 태도에 분노하는 그녀가 쉽게 위로를 받는 건, 안도훈이지만, 그건 단지 그의 저돌적 태도때문만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재벌의 그늘에서 그의 힘에 기생하여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왔던, 둘의 태생적 동일성도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돈을 제외한 많은 것들을 가진 그들은 그저 가진 게 돈밖에 없는 누군가를 향해 쉽게 동맹군이 될 수 있다. 

그렇게 k그룹을 둘러싸고,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가, 이합집산을 할 동안, 유정이와 그의 아버지는, 그저 그들의 농간 속에서 가진 것을 다 잃고 갈대처럼 흔들리고 흔들릴 것이다. 



얼마전 모 그룹의 회장 형제가 자신의 경영권 확보를 위해 엄청난 회사의 자금을 잘못된 정보의 선물 거래등을 통해 날려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건 뒤에는 어이없게도 회장의 절대적 신임을 받은 일인이 있었다고 한다. 회사의 정상적 시스템을 통한 투자가 아니라, 일개인의 '신기'에 일임한 투기가,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재계 몇 위의, 가장 첨단의 기술을 다루는 기업에서 벌어졌다. 안도훈의 대사가 떠오르는 장면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버지 밖에 없던 무능력한 아들, 뉴스를 통해 마주한 가진 게 돈밖에 없던 아들의 말로이다.
그런가하면, 이제는 잠잠해지고 있는 검찰 총장의 혼외 자식 논란도 있다. 입 가진 사람들은 다 누구나, 말 안듣는 총장 찍어내기라는 풍설을 거들었다. 정의롭고 싶었으나, 그 자신이 비리 검사가 되어 쫓겨나는 안도훈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무수한 재벌가와 정치권의 결혼 인맥은 예를 들자니 입이 아플 정도이다. 심지어 그들은 정치의 계절이 지나가면 이혼과 소송도 불사한다. 

유정이의 희생, 그리고 안도훈의 배신, 조민혁의 집착이라는 인간사의 이야기에 몰두하게 만들며 야곰야곰, 가장 우리 사회의 정형화된 계급의 전형들이 드러나고 있다. 
조민혁은 가진 게 돈 밖에 없고, 신세연은 그녀가 얻어가진 지분을 통해 권능을 행사하고, 안도훈은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사실은 입신양명을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가진게 없는, 알량한 가진 것 조차 빼앗긴 유정이는 양심껏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며 자신을 농락한 자에게 빛을 갚느라 애쓴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드라마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어쩌면 이 드라마의 진짜 비밀은, 유정이가 희생했던 사건의 진실이 아니라, 회를 거듭할 수록 속속드러나는, 사회적 군상들의 적나라한 모습이 아닐까. 그래서 쉽게 유정이와 조민혁의 사랑을 응원할 수 만은 없다. 




by meditator 2013. 10. 18.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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