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한일 합방 이후 9년, '국치'를 견뎌내지 못한 우리 민족이 들고일어난 3.1 운동, 유학생들의 2.9 독립 선언에 이어, 일부 선각자들의 비폭력 선언은 전민족적 저항 운동을 발화시켰고, 강대국들의 아전인수격인 민족 자결주의와 일제의 폭압적 진압으로 미완의 혁명이 된 3.1운동은 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독립 운동에의 열망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그런 열망의 결실로 국내외에 만들어진 7개 이상의 임시 정부가 세워졌고 1919년 9월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올해는 바로 이렇게 선열들이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용트림을 했던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 해를 기념하기 위해 여러 행사가 준비되는 가운데, 드라마 속 기억에 남는 독립운동가를 되살려 본다. 

 

   

  

<절정> 그리고 이육사가 된 눈이 맑은 아이 이원록 
과연 그 시절 독립운동을 했던 선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어쩌면 우리가 100주년이 되는 이 시기에 가장 기본적으로 되짚어봐야 할 질문이 아닐까. 기억의 저편 속에 사라져가는 인물이거나, 혹은 그 반대로 추앙받는 영웅이 아니라, 어쩌면 오늘 이시점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독립 운동가가 살아가신 그 궤적의 실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실감'에 가장 근접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2011년 8.15 특집극으로 방영된 2부작 <절정>이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 서릿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 //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절정」 전문


<절정>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육사 시인의 삶을 그려낸 작품이다. 마흔의 생애 동안 17번의 옥고를 치룬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육사, 이 분의 생애야 말로 우리가 일제 시대 지식인의 삶을 가장 알 수 있는 본보기가 아닐까. 

김동완이 이육사로 분한 드라마의 시작은 어린 육사로 부터이다. 퇴계 이황의 집안, 안동에서 할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우던 어린 시절의 육사를 드라마는 '눈이 맑은 아이'로 그린다. 

폼나게 살고 싶었던 아이, 부모님을 모시고 아메리카를 여행하고팠던 꿈에 부풀었던 아이, 형제들과는 어려서 부터 다르게 멋도 좀 알았던 아이, 무엇보다 눈이 맑아 세상을 투영하게 바라보려 했던 아이, 그래서, 할아버지는 그 아이의 삶이 고달플까봐 걱정했다. 

그 눈이 맑았던 아이는 자신이 바라본 세상을 시로 썼다. 드라마의 마지막 그토록 집요하게 육사를 쫓던 박이문 형사는 육사의 시에 마음을 허물고 육사를 설득한다. 자신에게 당신이 나르던 군자금의 배후를 알려주면 당신을, 당신의 시를 놓아주겠다고. 그러니 제발 살아나가서 시를 쓰라고. 당신의 시가 아깝다고. 그러자 육사는 초연하게 답한다. 내가 살아서 나가면 내가 시를 쓸 수 있을까 라고 .  이 육사의 한 마디가 바로 시인 이육사의 삶을 대변한다. 

이창동 감독이 만든 <시>라는 영화가 있다. 2015년까지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을 한 이 영화는 미자라는 늦깍이 시인 할머니의 이야기이다. 지방 소도시 손자와 함께 사는 미자라는 할머니는 우연히 동네 문화원에서 '시' 강좌를 듣게 되며 삶이 변한다. 지금까지는 상투적으로 살아왔던 시간, 시를 배우며 일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려하며 감수성을 북돋우려 했던 미자 할머니의 노력이 맞닦뜨린건 뜻밖에도 전혀 아름답지 않은 세상, 그리고 부조리한 자신의 삶, 결국 '시인'이 되어버린 할머니는 세상의 부조리, 자기 삶의 모순을 자신의 온 몸으로 감수해 내고야 만다. 

바로 이 이창동 감독 영화 속에서 정의된 시인, 그 시인의 모습이야말로 눈이 맑았던 아이 시인 이육사의 모습이 아닐까.  감옥에서도 칙칙한 수의가 싫었던 소년, 어머니는 그런 그에게 너는 일찌기 독립에 눈떴던 집안의 형제들과 달리 편안한 삶을 살기를 원했지만 소년 역시 형제들과 다른 길을 가지 못했다. 

 

  

시인이기에 비타협적 독립 운동가가 된 이육사 
한학을 배우던 집안을 넘어 영천과 대구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좀 더 너른 세상을 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던 젊은이 원록은 그곳에서 관동 대지진의 참상을 몸소 겪게 된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해야 하는 처지, 그런 위기의 순간 원록의 앞에 윤세주라는 또 다른 식민지 시대의 청년 운동가가 운명처럼 등장한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청포도> 이육사 


일찌기 3.1운동 만세 시위를 주동했으며 훗날 의열단원에 신간회를 거쳐 조선 의용대로 활약했던 독립투사 윤세주, 관동 대지진을 배경으로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식민지 청년의 만남이 이루어 졌다. 자신때문에 윤세주가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을 가졌던 이육사는 관동대지진 이후 무차별적 조선인 학살의 충격으로 고향에 칩거해 있던 중 자신을 찾아온 윤세주를 반기며 기꺼이 그를 따라 독립 운동의 길에 나설 것을 결심한다. 

하지만 그의 결심을 앞선 건 일제의 검속, 1926년 대구 은행 폭파 사건에 연류된 혐의로 3년 형을 받고 복역하며 17차례 징역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모진 고문의 시간을 견디며 3년 형을 살고 나온 청년 이원록, 하지만 일제의 고문과 감옥은 그의 의지를 꺽이게 만들기는 커녕, 외려 그의 의지를 강고하게 해 그를 북경으로 가도록 만든다. 

1932년 드라마에선 윤세주를 따라 갔다는 식으로 표현된 이육사가  선택한 건 조선 혁명 군사 정치학교.  간부 훈련반에 입교하여 훈련을 받은 그는 각종 훈련을 거쳐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한다. 신문사 일도 잠깐 곧 군사 학교 출신이라는 게 밝혀져 감옥으로 가게 된다. 

드라마는 고뇌하는 식민지 청년 원록으로 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그 청년은 관동 대지진과 의열단 윤세주를 만나며 눈맑은 청년에서 부터 세상에 눈을 감지 않으려 했던 고뇌의 지식인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그 고뇌는 펜 대신 총을 드는 선택으로 결단을 내렸던 청년, 자신의 이름 원록 대신 수인 번호 264번을 필명으로 선택했던 식민지 지식인의 비타협적 선택에 대해 드라마는 지긋이 천착하여 그려간다. 

그와 함께 가문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일양과의 혼인, 짧은 신혼 그리고 긴 이별, 거기에 잦은 징역으로 인한 어렵게 얻은 아들의 죽음과 그로 인한 아내의 고통 등, 가정사의 슬픔을 기꺼이 감내할 수 밖에 없는 독립 운동을 선택한 한 개인의 신산스러운 삶을 드라마는 애절하게 더한다. 

동시에 극중 노윤희로 등장한 최정희, 서진섭으로 등장한 서정주와 윤태주, 강문석 등 일제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서로 다른 선택을 극명하게 보여주며, 그들 가운데에서 고뇌하고 그럼에도 결국 일제와의 타협보다 끝내 다시 총을 든 이육사의 선택을 보여줌으로써  독립운동가들의 비타협적 삶의 가치를 제대로 설파해 넨다. 내고향 칠월, 청포도가 익어가던 시절의 문구를 아끼던 윤태주의 선택, 일제에 의해 희생된 아내에 대한 사랑을 독립의 실천으로 다했던 강문석의 또 다른 선택은 이육사의 헌신적 삶과 함께 오래도록 여운으로 남는다.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모든 산맥(山脈)들이 /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 차마 이 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어선 지고 /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 지금 눈 내리고 / 매화 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 이육사 

 

   

   

  

이육사는 살아생전 시집 한 편 펴내지 못한 시인이었다. 그가 북경의 감옥에서 죽고, 그의 아우가 그의 유고 작품들을 모아 펴낸 시집이 오늘 회자하는 이육사의 시가 되었다. 그가 회유하는 일경에게 말했듯 그의 삶은 오롯이 그의 시가 되어 오늘날 까지도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극 중 노윤희는 말한다. 자신은 태어나면서 부터 일본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았다고 지금 우리가 하는 이런 독립 운동들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른다고. 그래서 였던가, 극중 서진섭이었던 서정주는 해방을 맞이하며 일제가 그리 빨리 패망할 줄 몰랐다 했었다. 일제 36년 누군가에게는 나고 자랐던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더구나 이기기 보다는 17차례의 끊임없는 투옥에서 처럼 일제에 의해 끝도 없을 것같은 억압의 시간, 다시 일제에 잡혀 고문을 당하는 게 싫어서 윤태주 같은 사람들도 자결할 독약을 지니고 다녀야 했던 시절, 그 시간을 견디며 그럼에도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실천할 수 있었다는게 얼마나 힘겹고 엄청난 일인지, 그 삶의 무게를 <절정>은 애써 표현하려 노력한다. 

by meditator 2019. 2. 26. 1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