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암이었다. 드라마 속 해결의 만능키 말이다. kbs드라마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황금빛 내 인생>으로 정점을 찍었다. 여주인공의 아버지를 암이었다가 상상암이었다가, 아니었다가 다시 결국 암이라며 그 목숨을 거둘 때까지 드라마는 '암' 담보를 통해 시청률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로 항변하지만 '암'을 통해 시청자를 볼모로 삼았다는데 핑계를 댈 수 없다. 그렇게 상상암까지 동원해 버린 드라마, 더는 '암'만으로 시청자를 끌어들일 꺼리가 떨어지자 이번에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식'을 들고 나왔다.

 

 

문제는 그 '이식'이 한 드라마 만이 아니라는 거다. 간이식이 의학적으로 그리 흔한 사례가 아닌데, 공교롭게도 kbs의 드라마들 중 세 드라마가 '간이식'으로 극의 갈등을 점화시키고 있다. 바로 <황금빛 내 인생>의 시청률을 넘었다는 46.2%의 주말 드라마 <하나 뿐인 내 편>에 이어, kbs 주중 미니를 늪에서 구원해준 시청률 20%의 <왜 그래 풍상씨>, 그리고 지지부진하다 '간 이식'을 통해 화제성을 회복한 주중 일일 연속극 <비켜라 운명아>이다. 



간마저 주는 극진한 부정 
태생이 착하고 정이 많은 사람, 하지만 하늘은 그의 착함을 돌봐주지 않았다. 부모를 모르는 고아였으며 동생같은 동철의 죄를 대신 뒤집어 쓰고 다녀온 소년원 이후로 그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겨우 결혼을 하고 딸까지 얻어서 행복해지나 싶었는데 아픈 아내로 인해 살인범이 되어 오랜 감옥 생활을 했다. 여기가 드라마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종영을 10회 남겨둔 <하나뿐인 내편>은 세상에 법 없이도 살 것같은 착한 사람 강수일(최수종 분)의 시련기이다. 

애초에 감옥에 가게 된 계기도 이제 와 보니 살인 누명을 쓴 거였고, 그로 인해 드라마 내내 피해자 가족들에게 온갖 수모를 겪었다. 심지어 그 눈에 넣어도 아프지 딸은 이혼까지 당했다. 그런데 이제, 그를 그토록 괴롭혔던 피해자의 아들이 간경화 말기이고, 그에게 맞는 간이 바로 강수일의 간이다. 

 

 

<황금빛 내 인생>이 아버지의 암-상상암- 다시 암이라는 질병 서사를 통해 그 어떤 상황에서도 곡진한 부성애의 개연성을 설득하려고 했다면, <하나 뿐인 내 편>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간'을 떼어주고 생사의 기로에 선다. 이 두 드라마가 극단적인 질병을 통해 설득하고자 하는 건, 여전히 지금도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우리 사회의 '부정'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부정'의 대상들은 안타깝게도 상실된 가부장들이다.

<황금빛 내 인생>의 아버지는 한때는 사업으로 잘 나갔지만 보증으로 인해 모든 것을 날리고 가족들을 경제적 어려움에 빠뜨려 아내가 딸 바꿔치기를 하게 만들고 큰 딸이 그런 아내의 거짓에 기꺼이 놀아나게 만든 주범이었다. <하나뿐인 내 편>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강수일은 아버지였던 적이 없다. 딸이 아버지를 인지하기도 전에 감옥에 들어가 이제 성인이 된 딸 앞에 나타난 아버지. 그렇게 가부장의 자리를 상실한 아버지들은 뒤늦게 '아버지'의 자리를 회복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병에 걸리고, 자신의 간을 떼어주고 의식 불명이 된다. 죽음, 혹은 죽음에 버금하는 자기 희생을 통해서야만 회복될 수 있는 가부장, 실종된 가부장적 가족주의를 부활하려는 안간힘, 그는 여전히 kbs2의 주말 드라마의 투철한 주제 의식으로 다양한 변주를 통해 드러나고 <황금빛 내 인생>에 이어, <하나뿐인 내 편>까지 시청자들의 화답을 얻고 있다. 

 

 

변주된 가부장의 부활 
그런가 하면 가부장제의 아버지는 형의 모습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바로 <왜 그래 풍상씨>의 경우이다. <왜 그래 풍상씨>의 맏형 풍상씨 역시 <하나 뿐인 내 편> 속 강수일에 버금가는 질곡어린 인생이다. 간이식이 필요했지만 차마 자식들에게 말할 염치가 없어 돌아가신 아버지에 이어, 아버지가 다른 동생까지 만들며 집안에 문제만 일으킨 어머니를 그래도 어머니라 보듬으며 대신 가족들을 돌보려 애쓰며 누더기와도 같은 가족 관계을 책임지려 했던 맏형 풍상(유준상 분).

심지어 그 자신이 간 이식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서도 동생들 몸에 생길 흉터에서 부터 , 치료 비용 등등까지 지레 걱정을 껴안고 차마 말조차 꺼내지 못한다. 그런 형의 걱정과 달리, 간이식이 필요한 형, 오빠의 처지를 알게 된 동생들은 각자 친형제가 아니란 이유로, 혹은 그동안 받아왔던 가족내 차별 대우에 대한 설움 등등의 이유로 풍상에 대한 간 이식을 거부한다. 이른바 '막장 드라마'의 대가인 문영남 작가는 예의 내공으로 '간이식'을 둘러싼 콩가루 집안의 갈등을 절정으로 이끌고 있으며, 역설적으로 그 '간이식'를 통해 가족 화합이란 해피엔딩의 극적인 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바로 그 간, 내 간을 떼어준다는 건, 강수일처럼 타고나기를 착하다는 사람은 피 한 방울 안섞인 심지어 그간 자신을 가해자라며 온갖 수모를 준 가족의 일원에게도 주는 '극강의 선의'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왜 그래 풍상씨>에서 보듯 가족이라 하더라도 선뜻 내 간을 떼어주는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일까, <비켜라 운명아>로 가면 이 '간 이식'이 가족 간의 '딜'로 등장한다. 현강 그룹이라는 재벌 그룹, 그 가계에서 승계의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두 남자 양남진(박윤재 분)과 최시우(강태성 분), 그들은 이른바 첩의 자식과 본 혈통이라는 전통적 왜곡된 가족 구도 속에서 이복 형제가 된 그들은 극중 회사의 일을 두고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킨다. 물론 그 갈등은 언제나 우리 드라마가 그렇듯 정통성이 약한 첩의 자식 최시우와 그 어머니에 의해 조장된 해프닝이기 십상이다. 그러던 중 최시우가 급성 간경변으로 쓰러지고 간 이식이 필요한 위기라 발생한다. 이에 최시우의 엄마 최시우(김혜리 분)는 양남진의 전 여친과 자기 자신을 정략 결혼을 시키거나 남진의 회사 내 일을 빌미로 삼아, 간 이식을 종용, 심지어 협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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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지키려는 남자들, 문제를 일으키는 여자들 
간암에서, 간경변 등 다양한 병명, 하지만 해결책은 오로지 남자 주인공의, 혹은 남자 주인공에 대한 간 이식만이 가능하도록 구성된 <하나 뿐인 내편>, <왜 그래 풍상씨>, <비켜라 운명아>.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지점은 '간 이식'의 기로에 놓인 당사자들이 남자이며, 그들이 대부분 '가부장적 관계'의 복원, 혹은 승계자라는 지점이다. 상실된 가부장의 자리를 온갖 어려움을 뚫고서도 회복하려 했던 <하나 뿐인 내편>의 강수일, 역시나 형이지만 아버지를 대신해, 심지어 온갖 가족 내 트러블 메이커인 어머니까지 품어내며 가족을 이끌어 가려했던 <왜 그래 풍상씨>의 맏형 풍상, 그리고 뒤늦게 나타난 현강 그룹의 유일한 적통 손자 양남진까지. 

반면에 극중에서 여성들은 '문제'를 일으키거나 확산시키는 주범이다. <하나 뿐인 내편> 속 소양자(임예진 분), 나홍실(이혜숙 분), 오은영(차화연 분) 등 중견 연기자들의 캐릭터에서 부터 젊은 장다야(윤진이 분), 김미란(나혜미 분)까지 그 누구도 '긍정'적 역할의 캐릭터가 없다. 그들은 모두 극중에서 강수일의 고난에 등장한 지뢰들이다.  <왜 그래 풍상씨>라고 다를까, 무엇보다 이 가족이 이토록 콩가루 집안이 된 근원이 바로 엄마, 이름부터 노양심이다. 둘째의 대학 등록금을 나꿔채고, 딸을 술집에 팔아넘기는가 하면, 아들의 합의금을 가로채 재활의 기회를 놓치도록 만든다. <비켜라 운명아> 역시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임에도 첩이라는 열등감으로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키며 자신의 아들을 회장으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엄마 최수희 역시 이 드라마 속 주된 악역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여자들, 그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남자들, 심지어 그를 위해 동원된 극단적 설정 '간 이식', 물론 인생사 병을 피할 수는 없으니 극중 병이나 죽음이 등장할 수는 있다. 하지만 현재 세 드라마 속 '간 이식'은 개연성없는 극중 관계들을 어거지로 봉합시킬 수 있는 '치트키'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객관적으로 이런 관계들에서 '간 이식'이 가능할까. 어쩌면 '간 이식'이라는 깜짝쇼를 통해서만이 구원될 가족이라면 결국 논리타당한 설정으론 불가능하다는 걸, 2019년 대한민국에서 '가부장'의 귀환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라는 걸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가능한 설정을 통해 드라마는 역설적으로 파편으로 흩어진 가족과 관계를 봉합하며 '해피엔딩'의 팡파레를 울릴 것이다. 그리고 그 팡파레에 여전히 시청자들이 '막장'이라면서도 시청률로 화답하니 과연 '상상암', '간이식'에 이어 또 어떤 기상천외한 병명이 등장할 지 모를 일이다. 

by meditator 2019. 3. 4. 1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