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아직도 사극에 있어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이병훈 김영현 콤비의 <대장금>, 그 기적이 가능했던 건 당시 삶의 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웰빙', 그 중에서도 '먹거리 웰빙'으로 촛점이 맞추어지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병훈 감독의 사극은 곧 '트렌드'였다. 동양 의학에 대한 관심이 <허준>으로 북돋아졌고, 수의의 인술 성공담 역시 21세기의 기술 혁명과 함께 였다. 남성의 대상이 아닌 여성의 독자적 삶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도 역시나 이병훈 감독의 작품들이었다. 특히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절묘하게 사극 속 시대에 조응해 내는데 있어 독보적이었다. 당연히 이병훈 감독과 함께 한 김영현, 최완규, 김이영 작가들이 바로 그러한 이병훈 감독의 사극을 구체적으로 구현해 낸 장본인들이다. 김영현 작가는 박상연 작가와 손을 잡고 <뿌리 깊은 나무>, <육룡이 나르샤> 등으로 정치 사극이 대표가 되었고, <동이>, 이산>, <마의>를 함께 한 김이영 작가 역시 <화정>으로 그 필력을 이어갔다.
2월 11일부터 sbs를 통해 방영된 <해치>는 바로 이러한 이병훈 사단의 사극 기조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현실로 부터 역사를 길어낸다. 즉 2019년의 과제, 사법부 개혁으로 부터 시작된 적폐 청산을 드라마의 화두로 삼은 것이다.
숙종 연간 정치 투쟁의 결과는?
숙종 연간, 우리는 사극을 통해 장희빈과 인현 왕후의 궁중 비사를 되풀이 학습하여 왔다. 하지만, 이건 두 여인의 집안 싸움이 아니라, 장희빈과 인현 왕후를 앞세운 서인과 남인의 붕당 정치의 처절한 정치 투쟁이었고, 그건 또 다른 측면에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이제 본격적으로 세를 굳히기에 들어간 서인, 그 중에서도 노론을 견제하기 위한 숙종의 당쟁 정치였다.
조선의 건국을 주도하며 기득권층으로 성장한 '훈구파'와 달리, 영남 등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던 '사림파'는 조선 중종 이후 조광조 등을 필두로 정계에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당연히 이미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기존의 정치 세력에 대해 '개혁'을 주장하는 이들은 '조광조'의 난 등 각종 사화 등을 겪는다. 하지만 그런 희생을 통해 조선 중앙 정치계에 자리잡게 된다. 그 과정에서 다시 사림파는 각 집단의 학연, 지연, 그리고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인해 동인과 서인, 다시 남인과 북인, 그리고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가 가며 조선 중기 정치적 세력, 그리고 파쟁의 주인공이 되었다.
일찌기 정도전의 이상, 플라톤의 철인 정치처럼 유학자들에 의해 이상적으로 구성된 의정부 등에 의해 왕권이 조정되고 견제받는 정치적 대의제로 구상된 조선은 곧 그 정치사가 왕권과 신권, 그리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신권 사이의 갈등의 역사가 되고 만다.
숙종의 시대, 우리가 알고 있던 여인의 치마 품에 휩싸였던 유약한 왕이 아니라, 일찌기 왕권 강화에 대한 야심을 가지고 있던 숙종은 이 문제를 인현왕후를 폐비로 만들며 당시 정계의 주축이었던 서인을 축출, 즉 노론과 소론의 힘을 약화시키며 당시 상대적으로 소외된 남인을 등용하며 전세를 역전시키고자 하였지만, 우리가 역사적 결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희빈의 폐출, 인현왕후의 복권으로 그의 정치적 모험은 서인, 그 중에서도 노론의 강화로 마무리되었다.
<해치>가 그려내 적폐 청산, 사법 개혁
드라마 <해치>는 바로 이런 숙종기 후반, 서인 그 중에서도 체제를 구축한 노론과, 이제 그들이 왕권 계승까지 좌지우지하는 상황을 통해 오늘의 '적폐'를 떠올리게 한다. 더구나 오늘날 사법부에 비견되는 당시의 사헌부, 관리를 감찰해야 하는 임무를 지닌 이 기관은 하지만 애초의 설립 의도와 다르게 노론의 시녀가 된 처지로 드라마는 그려낸다.
노론에 의해 다음 왕좌의 주인으로 예정된 밀풍군, 하지만 밀풍군은 훗날 왕이 될 것이라는 권력에 취해 자신의 감정조차 조절못해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파렴치한이다. 비록 장희빈의 아들이지만 엄연히 훗날의 경종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밀풍군의 등장은 역사적 사실과는 동떨어진 결과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치>는 역사적 상상력으로 밀풍군을 통해 왕가의 적통마저 뭉갤 수 있는 당시 노론의 위세를 그려내고자 한다.
이렇게 권력과 그 권력의 하수인이 된 공공의 기관들, 그리고 그걸 등에 업고 광폭하게 날뛰는 후계자, 이렇게 비관적 시절에 그 상황을 우직하게 돌파하는 사헌부, 이미 노론의 하수인이 된 조직 속에서도 조선의 궁궐을 지키는 해치처럼 자신의 원래 직무에 충실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그 스스로 노론임에도 가문과 거리를 두면서 밀풍군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정석(이필모 분)과 그를 신뢰하며 따르는 다모 여지(고아라 분)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그런 사헌부의 세력들과 가난한 노론 집안의 자제로 오늘날로 치면 만년 고시생인 훗날의 그 유명한 암행어사 박문수(권율 분)와 천민 출신의 어머니로 인해 왕족이지만 언제나 뒷전인 연잉군이 합세한다.
해프닝처럼 엮인 이들이 밀풍군이라는 공통의 이해로 뭉치고, 한정석이 제기한 밀풍군의 비리에 연잉군이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제물로 삼아 증인으로 나서며, <해치>속 '사법 개혁'의 싹은 움트기 시작한다.
왕자 연잉군이 스스로 제주 유배까지 자청하며 밀풍군의 살해 사건을 만천하에 드러내며 폭군으로 예약된 밀풍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했지만, 권력은 녹록치 않다. 민진헌(이경영 분)으로 대표되는 노론은 기꺼이 그들이 선택했던 밀풍군을 버리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선택에 이의를 제기한 한정석을 '뇌물'의 함정으로 밀어넣는다. 즉, 한 말 물러선 듯 하지만 감히 자신들의 권력에 더 이상의 도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노론은 연잉군에 대한 '가짜 뉴스'를 유포하며 권력의 위세를 휘두른다. 적폐 청산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하지만 연잉군을 위시하여 여지, 박문수, 뜻을 함께 한 사람들이 만났다. 어쩌면 이제 시작일 뿐이다.
<해치> 속 영조는 우리가 알고 있든 자신의 아들을 죽인 그 영조를 떠올리기 힘들다. 천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하지만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불우한 젊은이일 뿐이다. 그리고 거기에 노론의 시대지만, 여전히 정의를 향해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역사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지만, 결국 그 이야기가 향하는 곳은 현재, 우리의 시대다. 우리의 시대를 이야기하기 위해 그 시대가, 젊은 영조가 선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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