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n의 장르물 <작은 신의 아이들>이 3.926%, 자체 최고 시청률로 종영했다. (닐슨 코리아 유료 플랫폼 기준) 수치 상으로만 보면 그간 ocn 장르물들 사이에서도 그다지 높은 시청률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첫 회 2.54%로 시작했던 것에 비하면 호조를 보인 결과물이다. 시청률의 순조로웠던 상승세는 물론, <작은 신의 아이들>이 시도했던 신선했던 과학과 무속의 콜라보는 어쩐지 이 한 시리즈로 끝내기엔 아쉽단 생각이 든다. 


<작은 신의 아이들>은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그 중심에 '신',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사이비 종교 집단'이 놓여져 있다. 20년 전 세상을 경악하게 만들었던 한 종말론자들의 집단 자살극, 그 '원죄'의 현장으로 부터 실타래를 풀어간 드라마는 그 '집단 자살극'을 유도한, 아니 정확하게는 '집단 자살'이라는 미명 하에 자신들의 범죄의 탈출구를 만든 '종교'를 이용한 세력에 대한 '징죄'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각도에서는 그런 '종교'의 '혹세무민' 과정에서 가족을 잃은 이들의 '해원'의 과정이기도 하다. 



혹세무민, 그 뿌리깊은 연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까지 간청했던 선산까지 팔아먹으며 일확천금을 꿈꾸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런 그가 우연히 망한 예배당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주인없는 교회는 그에게 '목사님'이라는 날개를 달아주었고, 어느 틈에 그는 그 자신이 신이 되어 가고 있었다. 

오갈 곳없는 고아들과, 아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 세상이 외면한 처지를 거두었던 왕목사(장광 분), 그는 2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들의 '어버이'연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곁에 그의 온갖 비리를 함께 하며 성장한 백도규 회장(이효정 분)이 있었다. 20년 전에도 그들의 '왕국'은 건실했다. 하지만, 그 '왕국'의 실체를 깨닫게 된 신도들이 투서를 세상 밖으로 내보낼 때까지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투서'의 목적지가 잘못되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용'이 되고 싶었던 남자, 국한주(이재용 분) 검사, 세상은 그를 가난한 이들의 청원을 들어주는 의로운 사람이라 했지만, 그에게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입신양명'의 희생양일 뿐이었다. 천인 교회의 투서를 받은 국한주는 억울하게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신도들을 구제하는 대신, 왕목사를 찾아가 '딜'을 한다. 그리고 왕목사와 국한주, 그들의 '협잡'의 결과는 20년전 참혹한 집단 자살극이었다. 

<작은 신의 아이들> 속 왕목사, 백도규, 국한주, 그리고 그들의 하수인이었던 김단의 아빠, 김호기(안길강 분)의 모습은 특정 교파, 특정인이 아니라,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만들어 낸 '괴물 아버지'들의 상징이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그 가난한 환경을 딛고 '성공'을 하고, '부'을 추구했던 그들은, 그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기꺼이 자기 자신,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 '타인'을 제물로 삼았다. 그 결과 그들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내로라 하는 입지전적 인물이 되었있었지만, 그 성공의 역사는 희생자의 핏빛으로 얼룩져 있다. 



작은 신의 아이들, 그 묵직했던 해원 
이렇게 성공의 신화, 그러나 괴물이 된 아버지들의 세대에 의해 가족을 잃은 아이들이 있다. 왕목사가 그러모아 신약 개발의 실험 마루타가 되었던 아이들, 하지만 왕목사의 한 마디 말에, 그리고 그 반대였던 백도규와 김집사의 잔혹했던 학대에 길들여 졌던 아이들, 그들 중 누군가는 공범자로 살아남아 오른팔이 되었고, 누군가는 용병처럼 희생되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겨우 도망쳐 살아남아 그 기억을 잃었다. 

그렇게 왕목사가 스스로 신인 연 했던 천인 교회의 고아들은, 이제 그 실체를 파헤치다 동생이 희생된 또 다른 희생자 천재인(강지환 분)과 동료 형사인 김단(김옥분 분)으로, 그의 적인 검사 주하민(심희섭 분)으로 조우하게 된다. 

이렇게 20년전 집단 학살극의 해원을 풀어가기 위해 <작은 신의 아이들>이 차용한 캐릭터는, 대한민국 10대 미제 사건 중 3을 해결한 아이큐 167에 모든 것을 '과학적 지식'을 설명하고자 하는 '과학주의자' 천재인과, 그와 정반대의 무당의 손녀로 그녀에게 나타난 무속의 끼를 피하기 위해 천인 교회 복지원으로 갔던 김단이다. 이 정반대의 캐릭터는 드라마 초반 연쇄 살인마 한상구(김동영 분)의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의 의혹과 불신, 불협화음을 넘어, 가족을 잃었다는 동지애로 뭉쳐, 서로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진 파트너로 16부의 여정을 통해 도달했다. 

그리고 바로 이들이 성취한 동지애에 기반한 불협화음같으면서도 적재적소에서 기가 막히게 어우러지는 과학과 무속의 콜라보가 1회성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쉽다는 것이다. <작은 신의 아이들>은 마치 <엑스맨; 더 퍼스트 클래스>처럼 두 형사 천재인과 김단이 서로를 동지로써 수용하는 과정의 전사를 다룬다. 과학으로 실증되지 않는 현상을 믿지 못하는 형사 천재인이 동료로써, 그리고 무속인으로써 김단을 수용하고, 함께 하는 과정이며, 두 사람 모두가 동생을 잃고, 아버지를 잃는 개인의 트라우마를 딛고 경찰로서의 자신의 책무와 무속적 능력을 받아들이는 자기 확신의 과정이기도 하다. 



캐릭터로서의 '과학'과 '무속'의 만남을 기대하며 
16회, 빌딩의 옥상으로 상대편 대통령 후보의 위협이 되는 노조원들을 모아 20년 전과 같은 집단 투신극을 재연하려는 왕목사와 그의 열혈 광신도들,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천재인과 김단이 현장으로 간다. 그 과정에서 천재인은 비품 창고에 있던 재료를 끌어모아 임시방편의 폭발물을 만들고, 그 폭발물을 터트리며 빌딩 옥상으로 진입한 김단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예의 무속적 기시감으로 왕목사의 실체를 파헤치며 그의 허를 찌른다. 

엄밀하게 천재인의 캐릭터는 아주 새로운 캐릭터는 아니다. 과학을 신봉하고,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여 사건을 해결하려 드는 캐릭터의 장르물 주인공은 이전에도 있어왔다. 하지만, 대부분 그런 과학 신봉주의자와 호흡을 맞춘 상대방은 '감성'이라던가, '공감력'을 무기로 들고 왔던 것과 달리, <작은 신의 아이들>은 발군의 연기력을 선보인 김옥빈의 '접신'이라는 신선한 콘텐츠를 들고 나오며, 기존 캐릭터들과의 변별력을 확실하게 했다. 그러기에, 각자의 전사를 해결하고 비로소 자신의 능력치와 서로에 대한 믿음을 확보한 이들의 캐릭터를 한 시리즈로 마무리하는 것이 아쉽게 여겨진다. 

또한 동지인지, 연민인지, 혹은 가끔은 남여 관계인지 모를 천재인과 김단, 두 사람의 허허실실 파트너 쉽과 긴장 관계를 이룬 어린 시절 친구인지, 첫사랑인지, 생명의 은인인지 모를 검사 주아민의 묘한 모성 본능을 자아내는 캐릭터는 비록 마지막 엔딩에서 흐뭇하게 함께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었지만, 여운이 길다. 아니 남녀 관계만이 아니라, 검사로서 형사 천재인에 필적했던 그의 지략 역시 아깝다. 이들 세 사람의 삼각 관계인지, 동지인지, 애증인지 모를 모호한 긴장 관계 역시, 그 다음의 여정이 기다려진다. 

<작은 신의 아이들>은 그 제목에 걸맞게 아이들을 희생시켰던 사이비 종교 집단, 아니 종교를 명목으로 입신양명에 몰두했던 '아버지' 세대에 대한 징죄, 그리고 사라진 이들에 대한 복원이라는 그 애초의 주제에 충실하게 마무리되었다. 하늘의 대리인으로 또 다시 사람들을 희생시키며 나라의 패권마저 넘보던 이들은 '심판'되었다. 그리고 20년전 희생된 31명의 희생자들은 그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았다. 그들과 함께, 자신들의 트라우마에서 주인공들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트라우마'의 해원이 아닌, 그들 각자의 장기를 가진, 천재인의 과학과 김단의 무속, 맛보기가 아닌 그들의 본격적인 활약이 기대된다. 무엇보다 장르물에서 어렵사리 복원된 '무속'의 매력적 활동이 좀 더 펼쳐졌으면 한다. 

by meditator 2018. 4. 23. 15:20

어쩌면 오늘 당신이 들른 가게에서 따로 돈을 받지 않고 물건을 비닐 봉투에 넣어주자, 괜히 기분이 좋아졌을 지도 모른다. 공짜로 챙긴 비닐 봉투라고. 지난 2013년에 편의점에서 비닐 봉투를 놓고 실랑이하다 아르바이트 생을 폭행하는 일까지 벌어졌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선 '비닐' 인심이 후하다. 마트에서 비닐 봉투를 사용하지 않고, 비닐 포장 유료가 시행됐지만, 그게 얼마나 눈가리고 아웅인지는 아일랜드의 20배, 핀란드의 100배에 달하는 1년에 211억장의 비닐 봉투를 쓰는 우리 나라의 현실에 그대로 드러난다. 2015년 기준 연간 일인당 420개의 비닐을 사용하는 나라, 하지만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비닐의 여정에 대해 우리는 무지했다. 


지난 해 7월 중국이 갑작스레 폐비닐과 종이 쓰레기 수입 중단을 발표하고, 그 여파로 비닐 수거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에 파장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저 분리수거라도 제대로 해서 버리면 내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무한정 버렸던 비닐, 그 비닐의 여정을 다룬 한 편의 다큐가 있다. 그 다큐가 다룬 비닐의 여정은 나비의 날개짓처럼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고, 버려왔던 비닐의 국가간 커넥션의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 속살은 결국 중국 정부로 하여금 세계의 폐비닐과 종이 쓰레기 수입 금지라는 거대한 토네이도를 몰고왔다. 



플라스틱 비닐의 여정, 그 종착지 중국
우리나라에서 <플라스틱 차이나>로 번역된 왕구량 감독의 다큐 원제는 <소료 왕국(塑料王國)>이다. 여기서 소료는 중국어로 플라스틱을 뜻한다. 우리가 물건을 사고 쉽게 포장재로 사용하고 있는 비닐은 그 원료가 플라스틱이다. 석유로 부터 만들어지는 플라스틱은 가공 여부에 따라 여러가지로 만들어 진다. 그 중 비닐로 만들어 지는 건 열에 강한 고분자 화합물인 폴리에틸렌이다. 폴리 에틸렌은 땅에 매립해도 잘 썩지 않고, 소각할 경우 인체에 해로운 성분인 다이옥신이 발생한다. 재활용율도 26%에 불과하며, 처리 비용도 많이 든다. 

영화는 컨테이너가 적재된 배의 항해로 부터 시작된다. 여러 나라 들간의 수입과 수출, 그 물류의 상징인 컨테이너, 그 중 하나가 항구에서 내려져 중국 산둥성의 작은 마을로 향한다. 그곳에서 만난 건, 거대한 산, 페플라스틱, 비닐로 이루어진 첩첩의 산이다. 그리고 그곳에 컨네이너 안에 들어있던 폐비닐이 산 하나를 더한다. 

중국은 세계 폐플라스틱 비닐의 56%를 수입하는 쓰레기 수입 국가였다. 2016년에만 중국은 730만톤(31억 달러)의 쓰레기를 수입했다. 영국의 폐지 55%, 플라스틱 25%, 미국의 전체 쓰레기 중 78%는 중국으로 갔다. 그리고 이런 중국의 폐기물 수입이 지난 30년간 중국의 '고도 성장'을 뒷받침해왔다. 중국은 이런 고체 폐기물을 수입하여 부족한 자원으로 활용했다. 미국에서 수입된 캔은 의류와 기계 제작용 금속이 되었고, 폐지는 포장재로 재활용되었다. 



영화는 바로 이런 쓰레기 수입 국가 중국의 현실을 그대로 지켜본다. 수입된 쓰레기가 도착한 산둥성의 쓰레기 산, 그곳은 쓰촨성에서 농사를 짓던 열 한 살 소녀 '이제'네의 집이다. 이제네 아버지는 그 쓰레기 수입 업자의 일용직 노동자로 하루 일당 7500원을 받으며 이제네 가족을 책임진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고용된 건 아버지이지만, 아버지도, 엄마도, 그리고 이제 갓 열 살 남짓한 이제도, 이제의 동생도 모두 그 쓰레기 더미 속에서 맨 손으로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관절염으로 힘든 농사일을 견디기 힘든 아버지가 선택한 쓰레기 재활용 업장의 일은, 아버지에겐 그저 농사일보다 조금 덜 몸이 고된 일로 여겨질 뿐이다. 병원 폐기물에서 부터, 온갖 오물이 범벅이 된 플라스틱 비닐 쓰레기 더미는 이제네 가족의 터전이다. 그곳에서 이제네의 새 생명이 태어나고, 겨우 일당 7500원에, 때마다 술을 먹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하느라 아이들 학교조차 보낼 혀편이 안되는 이제네 아이들은 보물창고 같은 쓰레기 더미에서 놀 거리를 찾고, 때론 배울 거리마저 찾으며 살아간다. 마치 농부가 자연에서 그 삶을 일궈내듯, 이제네 가족은 쓰레기 더미에서 가족의 삶을 일궈낸다. 그리고 그건 갑과 을의 처지라지만, 이제네 아빠를 고용한 사장 역시 마찬가지다. 

플라스틱 비닐의 터전에서 삶을 일구어 가는 사람들
보통의 사람들처럼 쓰레기 더미를 삶의 터전으로 알고, 그곳에서 삶을 꾸려가고 아이들을 낳고, 키우고, 미래를 기약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 이들은 그들의 터전인 그 플라스틱 비닐 산이 가진 '함정'에 무지하다. '갑'인 사장은 해가 갈수록 시름시름 앓지만, 혹시라도 가장인 자신이 아파서 가족을 돌보지 못할까봐 병원에 갈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제네 아버지의 고민은 하잘 것없는 월급으로 아이들 학교는 커녕, 고향조차 갈 수 없는 가난한 처지이지, 그들이 먹고 자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태울 때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뒤덮어 버리고, 물고기가 배를 드러내고 죽어가는 폐비닐더미가 아니다. 

영화는 담담하게 비닐 더미가 밭이 되고, 논이 되기라도 하듯, 그곳에서 삶을 일구어 가는 이제네와 수입업자인 사장네 가족의 일상을 들여다 본다. 어떻게 하면 그곳에서 돈을 만들고, 그 돈으로 가족의 안녕과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까 라는 소박한 소망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그 폐비닐 자체가 자신들의 삶을 보장하는 '환금성 작물'일 뿐, 그곳이 자신들의, 자기 자식들의 삶을, 미래를 갉아먹을 늪과 같은 대상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 

바로 그런 모습이 지난 30년간 환경에 무지했던 중국, 그리고 그 무지한 국민들을 이용하여 쓰레기 산업으로 성장을 이룩해 온 중국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런 왕구량 감독의 주제 의식은 영화의 개봉과 함께 중국 사회를 강타했고, 그 결과 중국은 2017년 세계 무역 기구에 '고체 폐기물 수입 금지 조치'를 시행하겠다고 통보했다. 



여전히 관성적인 우리의 플라스틱 비닐 과소비에 대한 경각심을
시간과 장소를 바꿀 뿐, 쉬이 사라지지 않는 플라스틱 비닐, 그 쓰레기를 용광로처럼 집어 삼키던 중국이 더는 그 역할을 하지 않겠다 선언하자, 그건 곧 세계의 문제가 되었다. 쓰레기를 외주했던 서구 및 우리나라에 '비상등'이 켜진 것이다. 이런 중국의 조처에 영국은 25개년 계획을 통해 쓰레기 감소 계획을 세우고, 유럽 연합은 2018년까지 비닐 봉투의 80%를 감소하고자 한다. 즉, 자원 구조에 대한 근본적 제고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이 세계 최대의 쓰레기 수입 국가였다는 충격적 오명도 잠시, 그 쓰레기 대란은 고스란히 우리 사회를 강타했다. 중국이 '소화'해 주지 않는 쓰레기는 각 지자체에서 소화 불량이 되어, 비닐 수거 거부로 나타났다. 난항 끝에 다시 재개된 비닐 분리 수거, 그저 가져가지 않던 비닐을 다시 가져갔으니 이젠 한숨을 쉴 뿐이다. 마트에서 비닐봉투를 주지 않는다지만, 코너마다 즐비하게 마련되어 있는 비닐 포장재 롤은 여전하다. 

<플라스틱 차이나>에 대한 감상은 쓰레기로 고도 성장을 이룬 중국의 이면에 대한 혀를 차는 것이서는 안된다. 여전히 우리가 '과소비'하고 있는 플라스틱 비닐 사용에 대한 경각심의 계기가 되어야 하며, 우리의 자원 재활용에 대한 구조적 고민을 해야 하는 근본적 질문이 되어야 한다.
by meditator 2018. 4. 20. 05:21

군부 독재 시절, 하루 아침에 금쪽같은 아이들을 차디찬 감옥으로 빼앗긴 부모들은 아이들을 대신하여 거리에 섰었다. 1974년 민청학년 사건을 계기로 모인 부모들은 1986년 미 문화원 방화 사건을 계리로 '민가협'을 결성하고 우리 사회 양심수 문제에 앞장서 왔다. 그렇게 우리의 민주화 역사는, 민주화에 앞장선 자식들을 둔 부모들을 아이들과 함께 그 대열에 서게 만든 역사였다. 그런데, 세월은 흐르고 강산이 몇 번이나 변했는데, 이제 또 부모들은 거리로 나선다. 심지어 차가운 거리에서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르는 이 부모들의 아이들은 돌아올 수 없다. 다큐를 연 건, 징하게도 추웠던 지난 겨울, 안산에서 고공 농성을 이어가는 노동자들을 방문하여 응원의 노래를 부르는 416합창단으로 부터 시작된다. 2014년 4월 16일, 그로부터 4년 아이들은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부모들은 그 '참척'의 고통을 '연대'로 승화시킨다. 대한민국은 발전을 거듭해 왔다지만, 여전히 그 '역사'는 자식들을 제물로 삼았고, 부모들은 '세상의 정의'를 묻기 위해 여전히 거리로 나선다. 2018년에도. 




4년이나 지났다. 혹자는 그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배도 어렵사리 땅 위로 올라왔고. 2014년 그 날 이래, 늘 '세월호'를 따라다니는 건, 이제 그만하면 됐지 않느냐라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 <mbc스페셜>은 당사자 부모들을 만나러 간다.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절대로 잊지 않을게 
꼭 기억할게 다 기억할게 
아무도 외롭지 않게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절대로 잊지 않을게 
꼭 기억할게 다 기억할게 
아무도 외롭지 않게 
일 년이 가도 십 년이 가도 
아니 더 많은 세월 흘러도 
보고픈 얼굴들 그리운 이름들 
우리 가슴에 새겨놓을게    -<잊지않을게> 중에서 

그 날의 부모들,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르다 
안산의 성당 한 켠에 마련된 컨테이너 박스, 모처럼 그곳에 모인 부모들 사이에 활기가 넘친다. 세상은 이제 그만 보내주라는 시간, 세월호 학부모들과 시민 단원들이 입을 모아 만든 416 합창단에 새로운 학부모 단원 두 분이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서로 앞집뒷집 하며 소개를 하며 쑥쓰러운듯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단원들, 

엄마는 말한다. 숨을 쉬기 위해 이곳에 오는 것이라고. 그 날 이후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엄마는 도저히 맞물려 들어갈 수 없었다고 토로한다. 함께 웃을 수도, 그렇다고 다른 표정을 지으면 티를 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집 밖으로 한 걸음 나오기가 무서운 엄마에게, 일주일에 한번 만나는 이곳은 '숨통'이다. 벌써 4년, 세상은 이제 그만 놓아주라는데 엄마는 한 달에 두번 들르는 강원도 산골 산사에서 아이의 사진을 부등켜 안고 한번만 너를 안아봤으면 좋겠다고 울음을 토해 놓는다. 아이를 생각해서 시를 지어준 시인이 눈이 오면 아이가 오는 것이라 했다고, 아빠는 노래를 부르다 말고 눈이 오는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아이를 맞는다. 옴팍 쇠어버린 흰 머리로 매일 오후 4시 19분이면 자신이 하는 세월호 방송을 통해 묵념의 시간을 놓치지 않는 아버지도 있다. 세상은 무뎌가지만, 부모들은 여전히 그 날, 그 바다에 있다. 

처음부터 노래를 부르려고 한 건 아니었다. 세월호 500일 각지에서 보내주신 성원에 조금이나도 답을 해볼까 시작했던 노래다. 합창단이라고 해서 정식의 합창단과 같은 형식과 절차를 밟지 않는다. 함께 노래를 부르지만 가창력이나, 파트에 어울리는 톤이 합창단의 요건이 아니다. 그저 함께 마음을 모을 수 있다면, 이곳에서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그뿐이다. 하지만, 그 '마음'으로 뭉친 부모들은 이제 어디라도 간다. 고공 농성의 현장에도, 쌍용 자동차 현장에도, 그리고 각종 세월호와 관련된 집회에. 노란 파카를 입은 부모들은 그 어디라도, 어떤 영하의 혹한이라도  두렵지 않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 다> 중에서 


아버지는 안산의 합동 분향소에 딱 한번 갔었다. 그곳에 있는 304명의 아이들의 이름을 다 불러주었었다. 그리곤 다짐했다. 그 날의 진실을 밝히고 다시 너희들을 만나러 오겠다고. 하지만 그로부터 4년, 세상은 이제 그만 놓아주라는 시간, 엄마는 말한다. 밝혀진 건 없다고. 심지어 새 정부가 들어서니, 정부가 알아서 할테니 라며 부모들이 나서는 걸 저어하는 사람들조차 생겼다고. 정부의 처분만을 바라는 '희망 고문'의 시간, 하지만 부모들은 말한다. 세월호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이루어진 건 없다고. 이제서야 그날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무엇을 했는지가 드러나는 시간, 지치고 힘들지만 포기할 수 없는 부모들의 심정은 그들이 4주기 추모곡으로 선정한 <너를 보내고>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구름낀 하늘은 왠지
네가 살고 있는 나라일 것 같아서
창문들마저도 닫지 못하고
하루종일 서성이며 있었지
삶의 작은 문턱조차 쉽사리
넘지 못했던 너에게 나는
무슨말이 하고 파서 였을까
먼산 언저리마다 너를 남기고
돌아서는 내게 시간은 그만
놓아주라는데
난 왜 너 닮은 목소리마저
가슴에 품고도 같이가자 하지 못했나

다큐가 보여주는 건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 숨을 쉬는 부모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전히 아이들만 떠올리면 눈물이 차오는 부모들, 그 모습에서 여전히 우리 사회가 배를 바다 위로 올렸지만, 세월호와 관련하여 그 날의 진실은 물론, 피해 관련자들에 대한 어떤 치유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외려 피해자인 사람들이 스스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뭉쳐 거리로 나서고, 스스로 함께 다독이며 추스리는 상황, 그건 여전히 우리가 사회적 재난에 대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되돌아 보면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이 없다는 것을 다큐는 절감하게 한다. 벌써 4년이라지만. 4년 아니라, 40년이 걸려도 아버지가 다시 아이들의 이름을 당당히 부를 수 있을 때까지, 부모님들의 노래가 더 이상 눈물로 적셔지지 않을 때까지, 세월호의 진실 규명은 멈춰져서는 안된다는 지긋한 목소리, 4월 16일 mbc스페셜이다. 


by meditator 2018. 4. 17. 15:09

4월 15일 <sbs스페셜>은 '먹튀 논란'에 시달리는 이소연에 대한 다큐를 방영했다. 이미 2008년 이래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던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과 관련된 논란을 비로소 다룬 것이다. 하지만 다큐를 보면 안다. '비로소'가 아니라, '이제야'라는 것을. 이소연이란 개인이 최초의 우주인이 되고, 결국 한국 사회에서 '먹튀'로 '논란의 대상'이 된것은 바로 우리 사회, 아니 우리의 정권들이 해왔던 전시 행정의 또 하나의 실패 사례이자, 그 오욕을 고스란히 한 개인에게 전가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그 복기를 논란의 당사자 이소연으로 부터 시작한다. 




먹튀가 된 우주인 
논란이 시작된 건 2014년부터였다. 이소연이 그녀를 우주로 보낸 주무부처였던 한국 항공 우주 연구원(항우연)을 퇴사하면서 먹튀 논란이 시작되었다. 언론들은 이 사안을 '먹튀'라는 선정적 단어를 넣어 기사화하였고, 온갖 그와 관련된 확인되지 않은 구설수를 기사로 옮겼다. 마치 우리가 최근에도 흔히 보듯 연예인의 가십 기사처럼 말이다. 그 기사들의 논조가 이구동성으로 읊는 건 바로 이소연이 260억을 들인 국가적 이벤트의 주인공으로 그 혜택을 고스란히 받은 후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은 채 미국으로 날라버렸다는 것이다. 

그녀를 둘러싼 이 논란을 해명하기 위해 현재 미국에 머물고 있는 이소연을 찾아가 그녀의 일상을 지켜본다. 현재 '백수'로 자신을 소개한 그녀, 논란의 가지가 되었던 남편은 그녀가 한국 최초의 우주인인 줄도 몰랐다는, 심지어 영주권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는 이방인 이소연을 통해, 다큐가 말하고자 하는 건 260억짜리 이벤트성 항공 우주 사업이다. 

2006년 항공 우주 사업을 시작한다는 뉴스는 센세이션했다. 당연히 36206명이라는 많은 호응이 뒤따랐다. 최종 후보로 선출된 고산씨가 석연치 않은 과정으로 탈락하고 함께 선출된 이소연씨가 대신 그 책임을 맡았고, 2008년 4월 10일 간의 우주 체험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귀환은 곧, 그녀를 우주로 보낸 사업이 '우주 관광'이며 '혈세 낭비'가 아니었느냐는 국민적 논란으로 이어진다. 

이에 대해 이소연은 2018년에야 답한다. 그녀는 항우연이 만들어 낸 우주인 배출 사업의 상품이었다고. 2008년에 시작된 논란에 대해 2018년에야 답할 수 있는 이 상황은 무엇일까? 그 답엔 바뀐 정권, 그리고 정권에 따라 요동치는 우리의 과학 기술 사업이 있다. 우주에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명박 대통령과 교신까지 했던 이소연, 현실은 주무 부서가 과학 기술부에서 교육과학 기술부로 바뀌는 정권의 변화, 그래서 우주 정거장에서 새 부서의 이름으로 패치를 바꾸어야 했던 웃픈 상황이었다. 

4월 8일에서 19일까지 러시아 소유즈-TMA12호를 타고 우주에 있던 이소연은 꿈에도 후속 사업이 없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돌아온 그녀를 맞이한 건 후속 사업따윈 없는 단기 이벤트성 사업으로서의 그녀의 우주 여행이었다. 그리고 바뀐 정권, 변화된 시류는 전국민적 호응에 힘입어 뽑힌 그녀에게 260억 세금으로 호화 우주 여행을 하고 돌아온 사람이 아니냐는 비ㄴㅏㄴ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녀는 교육 과학 기술부에 이러저러한 제안을 했지만 변화된 시류는 그런 그녀의 제안에 차갑게 반응했다. 그럼에도 이미 러시아의 기술력에 의존하여 제한된 조건에서 한 우주 여행이었음에도 나사가 '실패'라고 규정했던 위험했던 불시착 과정으로 힘들었던 몸을 채 추스리기도 전에 자신이 했던 실험 결과를 분석하기 위한, 우주 과학을 위한 예산을 따기 위해 이리저리 동분서주했다고 이소연은 밝힌다. 당시 악화된 여론을 개선시키기 위한 항우연의 다양한 홍보성 자리와 함께. 

2년간의 복무 기간을 마친 이소연은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미국에서 MBA를 공부했다. 전공과 상관없는 분야를 공부하는 그녀는 또 한번 논란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자신이 했던 우주 실험, 우주 사업에 대한 예산을 따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녀로서는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심정은 다시 바뀐 정권에서 실종된 '우주 사업' 속에서 전혀 해명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2018년에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정권이 바뀌고, 이소연은 이제야 말문을 연다. 고국에서 계속되는 논란에 대해, 그녀는 말한다. 차라리 화재까지 났던 사고였던 그 도착 과정에서 자신이 죽어버렸다면 명예로운 우주인으로 오래 기억되지 않았을까라며 눈물짓는다. 

전문가는 말한다. 분명 이소연이 참가한 사업은 당시 국민들이 불만을 표했던 260억짜리 이벤트 성 우주 여행이 맞다고. 그렇다고 해서 그 당사자인 이소연이 그 비싼 이벤트의 대가를 치루는 것은 부당하다 덧붙인다. 이소연의 러시아 우주 사업 참가의 방식은 우리가 처음이 아니었다. 일본도 우리처럼 '이벤트 성'으로 우주 사업을 시작했다.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어가는 사업인 만큼 전국민적 합의가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시선을 끌어모으는 이벤트 성 사업은 비난받을 만한 사안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그런 '이벤트 성' 사업으로 시작하여 일본이 우주 정거장을 개설하고 그곳에 자국의 우주인을 보내기까지의 지속적인 우주 사업을 하는 동안, 우리는 정권의 입맛대로 우주 사업을 '실종'시키고, 그 당사자였던 우주인의 경험조차도 수용하지 못했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과연 이소연은 먹튀일까? 그녀는 2년간의 항우연 복무 기간을 마치고, 실망하는 마음으로 고국을 떠났지만, 최초의 우주인으로서의 사명감을 잊은 적 없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 국민들이 실종된 실종된 한국의 우주 사업에 대해 실망했던 것처럼, 이소연 그녀 역시 '책임'으로 복무한 그 시간에 대한 '치유'가 필요한 시간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공인'이라 낙인 찍힌 사람들에게 '아량'이 없다. 다큐는 그 '아량'없는 세상에 이소연을 설득하기 위해 애쓴다. 개인이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 정권과, 그들이 벌인 '냄비'같은 정책의 문제라 본질을 짚고자 한다. 

아량이 없는 고국에 여전한 책임감으로 답하고자 노력했던 이소연. 한국에서는 단 한 명의 우주인이었지만, 넓은 세상으로 나오니 500여 명의 우주인 중에 한 명이 된 그녀는, 이제 좀 더 넓은 세상에서 다시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국가의 시책이 아닌, 기업이 우주 여행을 하는 시대, 기꺼이 자신의 경험을 나누기 위해 백수 이소연은 분주하다. 그리고 어쩌면 최초의 우주인, 그녀의 활용법은 이제 비로소 시작일 지도 모르겠다. 

by meditator 2018. 4. 16. 16:13

<수요 미식회>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획기적이었다. '음식'이 질펀하게 한 상 차려지지 않은 '먹방'이라니. 먹방, 인터넷의 bj 들이 시청자들을 상대로 음식을 먹는 걸 보여주며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이 이토록 무궁무진하게 발전해 나갈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bj들의 먹방은 곧 케이블을 비롯한, 공중파 프로그램 먹방의 홍수로 이어졌다. 오로지 '먹는 것'에 집중했던 먹방 프로그램의 홍수 가운데에서 <수요 미식회>의 등장은 신선했다. 물론 '먹방'은 등장한다.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은 프로그램의 대상이 된 음식점에 자신들의 돈을 내고 사먹고, 그 장면이 등장한다. 하지만 <수요 미식회>의 본질은 시각적 자극이 배제되거나, 극도로 제한된 먹망의 승화에 있다. 극중 출연한 홍신애의 기꺼이 자신의 몸을 사례로 든 고기 부위에 대한 상상에서 부터, 마치 한 편의 하이쿠와도 같은 이현우의 은유 가득한 맛의 평가, 황교익의 풍성한 평론의 잔치까지, 말로 풍성해진 식탁을 한 상 차려받는 느낌이 보여주는 먹방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기를 끌었다. 



지난 3월 7일 새로이 선보인 히스토리 채널의 <말술클럽>과 3월 31일부터 ebs를 통해 방송되고 있는 파일럿 프로그램 <상상식탁>은 바로 이런 <수요 미식회>의 맥락을 계승하여 특화, 발전시킨 프로그램들이다. 

방송을 시작한 지 3년 말로 풍성하게 차려진 <수요 미식회>가 3년 여를 거치며 그 말의 깊이가 옅어졌다. 여전히 게스트들의 맛집 순례는 맛깔스럽지만, 회를 거듭할 수록 출연진들의 멘트에서는 그들의 내공보다는 작가들의 고군분투가 더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뜻밖에도 <알쓸신잡>에 등장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그들의 경험에서 우러난 내공 깊은 '탐식'의 경륜과 지식들은 <수요 미식회>에서 한 발에서 더 나아간 '인문학'과 '먹방'의 콜라보, 그 가능성을 분명하게 해주었다. 

전통주만큼이나 풍성한 인문학 술 이야기
<말술 클럽>은 말 그대로 '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술'하면 빠질 수 없는 애주가들에서 부터 '술칼럼니스트'들까지 한데 모여 술에 관한 질펀한 한 상 차림이다. 그런데 여기에 '히스토리'채널의 특색이 가미된다. 그저 술이 아니라, '전통주'이다. 2000 여개에 달한다는 우리나라의 전통주, 한번 맛을 보면 '세상에 이런 맛이!'라고 하지만, 정작 '광고'도, '홍보'도 없으면, 대통령 만찬주로 등장이나 해야 저런 술이 있어? 라며 검색어 순위에 오르는 '전통의 명가'들을 탐미하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술'을 매개로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전통'이라는 색채가 더해지며 '한국'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로 전개된다. 일본의 식민 지배로 인해 일본식의 주조 방법이 아니라면 마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듯, '청주'라는 본래의 갈래를 상실한 채 '약주', 혹은 '맑은 술'이란 애매모호한 장르로 둔갑한 우리의 청주, 그 연원에서 부터, 막걸리로 시작하여 주막과 돈이 무거웠던 시절, 서울 근교의 주막에서 돈을 맡기고 받은 영수증 하나로 매 주막에서의 지불은 물론, 마지막 지방 주막에서 돈을 거슬러 받을 수 있는 '주막 네트워크'에 이르기까지, 전통주라는 주제 하나로 뻗어져나가는, 심지어 수능 국어 영역의 '국선생전'의 묘미까지 이어지는 '한국사 탐험'의 영역은 무궁무진하다. 물론 거기에 뜯고 맛보는 전통주의 미식 연찬회는 기본이다. 

주당 장진 감독, 박건형에, 주류계의 알파고라는 호칭에 딱 맞는 '전통주' 전문가 명욱의 해박함과, 이미 그의 <메이드 인 공장> 등을 통해 사물에 대한 재기발랄한 혹은 애정어린 천착을 선보인바 있던 김중혁 작가의 박학함 등이 어우러져 애정어린 '전통주 탐험기'가 완성된다. 



음식으로 부터 비롯된 비교사 탐험 
<말술 클럽>이 '전통주'를 매개로 한 계통적 한국사의 탐험이라면, ebs에서 선보인 <상상식탁>은 횡적인 비교사의 프로그램이다. 이제 2회를 방영한 이 프로그램이 선택한 주제는 사랑, 정치, 전쟁 등 개념정 명제들이다. 

정치의 편에서 정상 만찬에 등장하여 화제가 된 '독도 새우'로 부터 2차 대전을 앞두고 방문한 영국의 조지 6세에게 대접했다는 미국의 길거리 음식 '핫도그', 비빔밥, 초콜릿 칩 쿠키가 정치, 그 중심에서 세계를 변화시킨 음식으로 등장하여 새로운 '지식'의 장을 연다. 전쟁의 편을 연 건 육포이다. '전쟁'하면 싸우는 것만 생각하지만, 정작 '전쟁'에서 관건이 되는 건  '병사들이 먹고 싸울 수 있는 식량', 바로 그 '식량 배급' 문제에 있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택한 몽골의 육포는 곧 그들의 세계 정복을 가능케 한 신의 한수라고 <상상 식탁>은 정의 내린다. 또한 전쟁이라는 과정 속에 또 하나의 변수가 된 전쟁의 식량으로서 영국의 '피시엔 칩스'를 조명한다. 1,2차 대전 자국이 전쟁터가 된 영국 국민들이 '배급 물품'에서 제외된 '생선'과 '감자'로 '기아'를 버텨냈다는 것으로 '음식'은 곧 역사의 산 증인이 되는 것이다. 

이미 <외부자들>을 통해 전문적 영역 mc로서 김구라의 대안으로 등장한 남희석이 '인문학'의 mc로서 도전장을 내밀며, 자칫 황교익으로 '과점'화될 우려가 제기된 음식의 평론계에서 새로인 등장한 유지상 음식 전문 기자, 건축이 직업이지만 음식 비평이 그의 특기가 된 이용재 비평가가 합류하여 음식 평론의 새 바람을 불러 일으킨다. 거기에 팟 게스트<지대넓얇>의 이독실이 공대생 특유의 장기를 살려 데워먹는 전투 식량을 실험해본다 하는 식으로 인문학의 활기를 불어 넣는다. 또한 사랑을 주제로 한 편에 박상희 심리 카운슬러, 정치 편에 전여욱 전 의원, 전쟁 편에 군사전문가 양욱 등 각 분야의 전문가가 출연하여, 인문학적 전문성을 더한다. 

물론 과연 이 프로그램들이 전통주의 홍보를 넘어, 혹은 이미 한편에서는 상식이 되어가는 인문학적 지식의 '편집'을 넘어서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물음표의 여지가 남는다. 하지만, '먹방'이라는 가장 익숙한 주제를 '인문학'이라는 트렌트, 혹은 갈증, 발전의 영역으로 가지를 뻗어나가 시도하고자 하는 건 반가운 일이다. 전통주래 봤자라거나, 음식의 역사라 봐야 하면서 발견하게되는 '인간들의 삶'은 먹고사니즘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부디 이러한 시도들이 활발하게, 다각도로 진행되어, tv의 질을 높이는데 일조하길 바란다. 

by meditator 2018. 4. 15. 17:04

어쩌면 그들도 한때는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고, 여유롭게 직장 생활을 하며,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앞에서 방긋 속없이 웃음을 띠던 때도 있었으리라. 그저 그 '존재' 만으로 '누나'와 '누나'가 아닌 여성들에게 '기쁨'이 되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세월은 흘러 그들의 몸에 흐르는 남성 호르몬 테르토스테르몬은 존재를 '오욕'으로 물들게 하는 상징이 되었다. 한때는 '산업 역군'으로 대접받고, '아버지'라 인정받던 시대는 흘러, 이제 '숨만 쉬어도' '위협적인' 존재로 '치부'되는 시대에 머물게 되었다. '주역'이 '민폐'가 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주역인지도, 민폐인지도 모르고 세상의 무기징역수처럼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다. 


존재만으로도 부담스러운 아저씨
그런데  '존재' 자체가 민폐가 된 시절에 그런 부담을 무릎쓰고 '아저씨'에 대해 이야기하는 드라마들이 있다. 바로 제목부터 아저씨인 tvn의 <나의 아저씨>와 sbs의 <키스 먼저 할까요>다. 
<나의 아저씨>의 박동훈(이선균 분)과 <키스할까요>의 손무한(감우성 분), 그들은 외모부터 '남성적 매력'과는 담을 쌓았다. 희끗희끗해진 머리에, 심지어 코밑 수염조차 흰 가닥이 잡히는 그런 추레한 외양이다. 외양만 그런가, 번듯한 대기업에 잘 나가던 카피라이터에, 최고 실력의 건축사였던 적도 있었지만, 이젠 스스로는 광고를 만들지 않은 채 아날로그한 소품에 집착한 잔소리꾼에, 한직인 구조기술사로 조직의 그늘을 자처하며 버티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키스할까요>의 손무한은 췌장암 말기에 살아갈 날조차 얼마 남지 않았다. 



늙수그레한 박동훈과 손무한, 남성이라기 보다는, 아저씨란 중성적 단어가 더 어울리는 이 연배의 남자들은 공히 그 세대 남자들의 표상과도 같다. 한때는 공부 좀 한다 하여 대학을 잘 갔을 터이고, 그래서 남들 보란듯한 '기업'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꽃이 붉어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던가, 한때는 대학에 입학했다고 빵빠레를 울리던 그 시절도, 혹은 연인의 가슴을 설레하던 그 훈훈했더 매력의 시기도, 그리고 열렬한 사회인으로서의 열정도 이젠 그들에겐 역사가 되고, 그들은 '징역'을 살듯 현실을 견뎌내고 있다. 

하지만, 현실을 견뎌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들이 '보신'의 차원으로 자신을 남겨두었던 '조직'이 이제 그들의 목덜미를 잡는다. 대학 후배가 대표 이사 자리에 오르고, 설계팀에서 밀려 그런 후배의 승승장구를 보며 잘 나가는 변호사인 아내는 대놓고 무사안일(?) 한 박동훈에 대해 환멸을 표시하지만, 그래도 박동훈은 그저 '별일 없이 산다'했다. 하지만 그가 '내력'의 증거로 삼아 달리기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뽑은 이지안(아이유 분)과 돈봉투로 인해 얽히고 전혀 엮이고 싶지 않은 사내 정치의 중심으로, 그리고 아내의 불륜에 휘말려 들어가며 그의 삶은 본의 아니게 격전지가 되고 만다. 

트렌디의 상징으로 귀걸이를 하며, 지구 위의 우주인이라며 스스로 자부심이 우주를 향해 치솟을 때까지만 해도, 활자화 된 그 책이 책상 서랍 안에 자물쇠를 잠가 숨겨놓아야 할 오욕의 상징일 줄 몰랐다. 하지만 6년 전 비행기에서 만난 한 여성, 아니 10년이란 세월을 직조하며 얽혀든 안순진(김선아 분)와의 '악연'은 그로 하여금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온전히 부정하도록 만든다. 

박동훈과 손무한, 두 사람은 우리 시대 '아저씨'들의 성공적인 삶이었을 것이다. 대학을 나오고, 잘 나가는 직장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는 중산층 남자들의 그러그러한 삶의 모습들이다. 그런데, <나의 아저씨>와 <키스 먼저 할까요> 두 드라마는 우리 시대 성공적인 아저씨의 삶, 그 성공이라 썼지만 신기루처럼 날아가버린 '산업 사회의 성공담'을 해체해 버린다. 

조직의 일원으로, 조직에서 시키는 대로 자신의 맡은 바 책무를 다하면 자신의 성공은 물론,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도 번듯하게 살아낼 수 있었을 것 같던 삶, 그러나 '조직'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아 버리듯, 별일 없이 살고 싶었던 박동훈을 변방으로, 변방으로 밀어버린다. 심지어, 사내 정치의 젯밥으로 써버리고, 불륜을 핑계로 희생양을 만들고자 한다. 그의 버팀목이 될 아내도, 부하 직원들도 막상 벼랑 끝에 선 그에겐 등을 돌린다. 

카피라이터로서 그의 성공담의 사례가 된 광고는 그가 저지른 사회적 부도덕의 상징이 되었고, 그 부도덕한 상흔은 그의 몸조차 좀먹어 들어갔다. 광고주는 그에게 협잡의 손길을 내밀었고, 그래서 그는 더 이상 광고쟁이로 살아갈 수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도피라고는 스스로 직접 광고의 피를 묻히지 않는 소극적 저항정도. 



아저씨를 통해 던진 산업사회 대한민국에 대한 질문, 그리고 회자정리 
결국 이들의 실패는, 자본주의의 고도 성장의 논리로 달려온 한국 사회에 대한 질문이 된다. 조직의 일원으로 그 논리를 내재화하여 버텨온 이들이, 성공의 정점에 이를 나이에, 스스로 반문하고, 회의하며, 조직에서 버림받거나, 조직으로부터 스스로 분리하는 이 과정은, 결국 '조직'맨으로 살아왔던 우리 시대 '아저씨'들의 '업보'다. 또한 무너진 중산층의 현실에 대한 조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의 아저씨>와 <키스 먼저 할까요>는 그저 아저씨들의 한풀이에 머물지 않는다. 드라마는 그들의 '회자정리'에 주목한다. 그 시작은 중반부를 돌아선 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의 손무한이 앞선다. 그저 중년의 사랑 이야기인 줄 알았던 손무한과 안순진의 사랑 이야기는, 기꺼이 그 '업'을 품에 안은 손무한의 순애보로 전개된다. 손무한은 말한다. 6년전 만났던 안순진의 눈물이, 매번 만날 때마다 울고 있던 그녀가 손무한을 적셔서, 나비의 날개짓처럼 손무한을 변화시켰다고. 자기 잘난 맛에 살던 카피라이터 손무한은 그의 전재산을 결혼이란 과정을 통해 대기업과의 재판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다 잃은 안순진에게 의탁하고, 그녀의 재판에 유일한 증인으로 서고자 하는 것으로 자신의 업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박상무에게 잘못전달된 돈봉투를 보고, 어머니가 말한 형의 사업 자금때문에 잠시 흔들렸던 대가로 혹독한 회사 내 검증을 치웠던 박동훈은, 여전히 아내와의 불륜으로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은 도준영(김영민 분)의 도발에 응전한다. 비록 그 시작은 비겁한 통화 목록 조회에서 부터이지만, 그는 더 이상 '변두리'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응전은 이제 시작이다. 

그렇게 손무한과 박동훈이라는 아저씨의 회자정리가 된 드라마가 새삼스럽게 우리 사회 아저씨에 대한 미화라 불편할 건 없을 듯하다. 그들은 주역이었지만, 그들 또한 '희생양'이었으니, 그러기에 이지안과 박동훈이 동지가 되고, 손무한과 피해자 안순진은 손을 잡을 수 있다. 아저씨는 불편하지만, 그들 역시 이 사회의 무기수로서 그들의 존재는 갸륵하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는 희생양이었지만 조력자였던 그들의 '책임'에 대해, '도덕'에 대해 천착하고 있으니 조금 더 귀를 기울여 볼만하겠다. 부정할 수 없는 한 시대의 표상의 회자정리에 시간을 허락해 줄만도 하지 않은가. 

외려 안타까운 건, 아저씨란 이름으로 복기되는 중산층이란 한정성이다. 이제 우리 드라마에서 봉제공장 재단사였던 <바보같은 사랑>의 전상우를, <유나의 거리> 속 창만이 깃들어 살던 다세대 주택의 아저씨들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나의 아저씨> 속 이제는 한량이 되어버린 놈팽이 아저씨들도 알고보니 한때는 대학 나와 번듯한 직장에서 한 자리씩 했다던 그 알량한 설정의 계급적 한계야 말로 어쩌면 정말 안타까워해야 할 지점이 아닐까. 

by meditator 2018. 4. 13. 14:30

매주 월요일 밤 11시면 입맛이 씁쓸했다. 왜 우리는 월요일 밤부터 '예능'을 보아야 할까?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도 온통 '예능'뿐이다. 도대체 왜 월요일부터? 라는 힐난에, 월요병엔 예능이라는 답이 돌아오면 할 말이 없지만, 드라마와 예능의 범람에 한숨이 쉬어질 뿐이다. 그런데 그런 월요일의 가벼움을 타개해 줄 묘책이 등장했다. 오랫동안 이리저리 치이던 <mbc스페셜>이 돌아왔다. 그렇다. 이게 원래, <mbc 스페셜>의 자리였다. 한 주의 시작, 세상사 좀 진지하게 바라보며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진심어린 시선들이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돌아온 <mbc스페셜>, 4월 9일 방영분에는 다수의 '이재용'들이 등장했다. 




대한민국 vip 이재용 
우리가 아는 이재용은 그 사람이다. 맞다. 삼성전자 부회장, 얼마전 1년 만에 은근한 미소를 숨기지 못한 채 교도소 문을 나서던 그 사람이다. 그가 감옥에서 즐겨 보았다던 드라마 속 재벌가의 자제는 결국 자기 삶의 모토였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기 위해, 족벌 경영 체제를 일소하고, 그 자신은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재벌가를 나왔다. 하지만, '재산이나 지분, 자리 욕심이 없다'던, 그가 받은 혜택을 사회와 나눌 수 있는 참된 기업인이 되겠다'던 부회장님은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스물 일곱 삼성전자 평사원으로 출발한 그, 그는 아버지로부터 단돈 60억(?)억을 증여받았다. 물론 이 돈에 대해서는 증여세 16억원의 증여세를 당당하게 냈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워렌 버핏도 울고갈 이재용의 귀신같은 투자 전략은 단 2년만에 에스원과 삼성 엔지니어링 주식을 사고 팔아 수익률 1300% 563억원을 남겼다. 심지어 그의 투자 전략을 따르지 못한 세법까지 개정시키며 투자에 투자를 거듭하여 증식된 그의 자산은 2018년 기준 9조원에 이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그 사람'이 아닌 이재용들도 있다. 학창 시절 벌을 받기 위해 복도에 서있으면 선생님들이 지나가며 '아니 왜 회장님이 여기 서계세요?'라 놀렸던 이름, '보험 관리사'로 명함에 이재용을 새겨넣으면 한번이라도 더 봐주던 이름, 그 이름들을 가진 또 다른 이재용들이 있다. <mbc스페셜>은 이 땅에 살아가는 '평범한(?) 이재용을 통해 무사히 감옥 밖으로 탈출에 성공한 '이재용'을 '논박'한다.  

그들에게는 '아버지'가 거저 준 60억은 없었다. 대신 16살부터 식당 알바부터 시작해서 안해본 일이 없이 도달한 이십대 중반의 청춘이 있었다. 음악적 재능은 있었지만, 음악적 재능을 버텨줄 집안이 없어서, 일찌감치 포기해야 할 꿈이 있었다. 



이재용들로 이재용을 논박하다. 
다큐는 우리가 '이혁'으로 알고 있는 전 '노라조의 멤버'였던 이재용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자신이 이재용이었기에, 지난 촛불로 광장을 뜨겁게 만들었던데 기꺼이 일조한 이재용에 유독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었다던 그는, 그가 지켜본 이재용 재판 과정을 노래로 만들었다. '시발남아'(時發男娥)'

다 까고 말해 넌
이미 다 알고 있잖아
처음과는 다른 말로
또 소설을 쳐 써대지
주어진 시간 정확한
사실만을 모두 얘기해
소설은 그만 쳐 쓰고
뉴스를 얘기해 우리가 원하는
너 제일 잘 알잖아 뭘 잘못한 건 지

그리고 그 자신도 '돈'을 벌기 위해 활동했던 '노라조'에서 나와 조금은 배고플지도 하고자 했던 음악의 길에 섰다. 자신의 길에 선 또 다른 이재용도 있다. 서른 중반, 포크레인 시험장에 선 그는 아직 이 기계가 서툴다. 이번까지하면 열 번째 직업, 이재용이란 이름을 새겨넣은 보험 외판원에서 부터, 자동차 영업 등등 아이 둘의 아버지가 되어서도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한 채 여전히 또 새로운 길에 선 그는 이 일이 마지막 선택이기를 바래본다.  스물 다섯이라고 다를까. 16살부터 온갖 안해본 일이 없이 돈을 모으던 이재용은 스물 중반 '돈'이 아닌 자신이 하고픈 걸 하기 위해 공연 예술을 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현실은 유치원 아이들을 상대로 한 계약직, 꿈은 그의 통장을, 그의 삶을 위태롭게 한다. 결국 한 달 뒤, 그와 그의 동료는 대구의 근거지를 떠난 안성에서 일당이 아까워 고향가는 돈도 아끼며 살아가고 있다. 

이 땅을 살아가는 그 '이재용'이 아닌 '이재용'들에겐 삶의 고비고비마다 '돈'이 발목을 잡는다. 역사학도가 되고 싶지만, 가족을 설득시킬 자신이 없다. 좋아하는 연극을 하며 살고 싶지만, 현실은 하루 종일 음식점 주방과 홀을 왔다갔다 하는 알바에, 밤 공연이 끝난 뒤 홀로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건축 설계사 시험 준비다. 음악적 재능이 있던 이재용은 선생님의 도움으로 겨우 음대에 갔지만, 학과 친구들이 음악적 재능을 펼칠 준비를 하는 동안 일찌감치 선생님의 길을 걸었다. 


이재용 부회장이 그의 길지 않은 생애동안 자신의 재산 축적으로 전력질주하며 전 사회의 지탄을 받는 것과 달리, 음악 선생님 이재용은 인기쟁이다. 그가 만든 합창반에는 '특권'이 없다. 심지어 노래 실력 보다 노래를 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다. 파트도 자기 선택이다. 그가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음대에 진학했듯이, 선생님이 된 이재용은 그 시절 선생님처럼 가정 형편때문에 꿈을 접으려는 아이들의 꿈 도우미를 자청한다. 
다큐는 이재용 부회장과 평범한 이재용의 삶을 교차한다. 이재용 부회장이 60억을 받아 대번에 재계 순위에 오르는 동안, 평범한 이재용들은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하고, '없는 형편'에도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저 교차하여 보여줬을 뿐인데, 다시금 이재용 부회장이 우리 사회에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가를 절실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똑같은 이름의 대한민국 국민인데, 누군가는 평범한 이재용이 말하듯, '금수저'라는 이유만으로, 죄를 짓고도 감옥 밖을 유유자적하게 나오는 이 대한민국은 같은 이름이라 해서 같은 국민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이재용이 '삼성'이라는 왕국에서 자신의 부를 축적해 가는 동안, 이제 60이된 한때 삼성 중공업의 노동자였던 이재용은 여전히 직장으로 돌아갈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삼성은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이제 이재용 부회장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무노조'의 정책을 이어오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말하는 '그가 받은 혜택을 사회와 나누는' 그 말에 '노조'의 자리는 없다. 

노조만이 아니다. 삼성반도체 직업병으로 뇌종양을 앓아 시력, 언어능력, 운동 능력을 잃은 채 여전히 휠체어를 타고 시위에 참가하는 전직 노동자도 있다. 삼성이니까 당연히 산재를 인정해 줄꺼라는 희망은 무참히 짓밟혔다. 동료들은 세상을 떠났다. 재판을 이어가는 한혜경씨에게 삼성은 10억을 주며 회유했다. 그러나 한혜경씨는 말한다. 차마 죽어간 사람들이 떠올라 그 돈을 받을 수 없다고. 강남역 8번 출구 앞 초라한 비닐 천막, 그곳엔 한혜경씨처럼 삼성에서 직업병을 얻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이제 3월 그들이 거리로 나선지 900일이 됐다. 


평범한 이재용들과 60억으로 외아들이란 이유만으로 삼성의 왕좌를 차지한 이재용, 그 비유를 통해 다큐는 묻는다. 여전히 유전무죄의 대한민국, 과연 이재용은 죄가 없는 것이냐고. 그리고 그가 전 정권, 그 배후, 그리고 심지어 그 딸을 위해 퍼부은 돈들과, 산재조차 인정되지 않은 재판때문에 거기로 선 노동자들을 대비하며, 이재용, 그리고 삼성의 길을 묻는다. 물론 이재용에 촛점을 맞춘 다큐에서 '삼성'이라는 구조에 대한 조명은 아쉽다. 하지만, 이재용으로 상징되는 삼성과 평범한 사람들의 대비는 그 어느 때보다 극명했다. 그렇게 비로소 <mbc스페셜>이 본연의 자리로 돌아왔다. 


by meditator 2018. 4. 10. 15:43

군주의 시대 군주에 대한 거짓말은 '역모'로 취급되어 '대역죄'로 다스려졌다고 역사학자 전우용은 증언한다. 그렇다면 나라의 주인이 군주에서 국민으로 바뀐 민주주의 사회, 국민에 대한 '거짓'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기군망상죄', 즉 대역죄가 아닐까? 그런데, 우리의 현대사 70년, 안타깝게도 그 역사는 권력이 국민들을 기만한 역사였다. 우리의 권력들은 끊임없이 '거짓'을 일삼으며 자신들의 권력을 지탱해 왔다.

그런데 왜 지금 '거짓'에 주목해야 하는 걸까? 4월 1일 <sbs스페셜- 권력과 거짓말(부제; 피노키오의 나라)>는 새로운 권력의 시대, 그럼에도 여전히 쉬이 '처단'되기 힘든 권력의 거짓말을 짚고 넘어감으로써 현재 진행중인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안갯속에 가려져 있던 세월호의 진실, 그 빙산의 일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구명 조끼를 학생들이 입었다던데 발견하기 힘듭니까'라며 뒤늦게 나타나 늘어놓았던 그 '거짓말'의 진실말이다. '저는 정상적으로 보고 받고 체크하고 있었다'던 그 4년 전의 거짓말, 국민들은 묻고 또 물었었다. 수백 명의 국민들이 사지에 내몰린 그 시각, 대통령은 무엇을 하고 있었냐고. 하지만 대통령은 손바닥으로 하늘를 가리듯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았었다. 대통령뿐이랴, 그의 조력자라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나라와 국민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거짓말의 퍼레이드를 벌었다. 그리고 그 날의 진실은 4년이 지난 이제야 드러나기 시작한다. '침실에 있었다고......'

진실의 기회, 그러나 거짓의 향연이 된 국회 청문회
왜 4년이 지난 지금에야 우리는 진실의 장막을 겨우 벗겨내기 시작할 수 있는 것일까? 다큐는 말한다. 기회는 있었다고. 바로 국회 청문회다. 국회 청문회는 국민의 앞에 진실을 말해야 하는 기회이다. 국회에 선 증인은 선서한다. '양심에 따라 숨김이나 보탬이 없이 진실만을 말할 것을. 그리고 이것을 어겼을 때는 위증의 죄를 지겠다'고. 그러나 심지어 원세훈 전 국정원장처럼 이 '선서'부터 거부하는 증인이 등장한다.

국민 앞에 선 당시 사건의 관계자들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모릅니다', 기억이 없습니다'를 되풀이 했다. 김장수 장관도, 김기춘 비서실장도, 우병우 민정수석도, 조윤선 장관도, 조여옥 대위도, 이영선 비서도, 이임순 교수도. 누구라 가릴 것 없이. 국민을 바보 등신으로 아느냐 국회의원들이 일갈하고 분노해도, 그것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피가 거꾸로 솟아도. 그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심지어 우병우는 46일이나 잠적했다, 국민들이 현상금을 걸자, 마지못해 참석했다. 그러고는 '별 신경을 안썼단다'며 '아는 게 없다'고 했다.





국민 앞에 선 그들, 하지만 그들은 60일간의 진실 게임 동안, 오로지 자신의 안전과 형량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짓말을 일삼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들의 거짓말은 '통'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1심에서 위증에 대해 유죄를 받았지만 2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우병우 전 민정 수석은 위증죄가 공소 자체가 기각되었다. 이임순 순천향대 교수 역시 우병우와 마찬가지다. 이영선 비서 역시 집행 유예다. 진실과 정의에 대한 열망은 뜨거웠지만, 정작 그들이 한 거짓의 대가는 치뤄지지 않았다.

국회 증감법은 '선서한 증인 또는 감정인이 허위의 진술이나 감정에 대해 위증을 한 때에는 1년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을 명기하고 있다. 그런데 왜 저들은 '법' 앞에서 거짓의 대가를 치루지 않고 미꾸라지처럼 피해갔을까?

'사실에 반하지만 그 이야기를 할 때는 기억이 없다'는 식의 모르쇠 전략, 애초에 상황을 애매하게 증언하거나, 무능함을 자인하는 진술 방식은, 그 자체로 그들의 '위증죄'를 어렵게 한다고 법 관련 전문가들은 안타까워 한다. 우병우 민정 수석이 청와대의 검찰 수사 압력에 대해 증거를 들이대자 마지 못해 인정을 하면서도 의례적이란 관례를 통해 피해가는 식이다.

거기에 국회 청문회 자체가 한시적 특위라는 태생적 존재론의 한계가 발목을 잡는다. 우병우의 경우, 그가 협박을 한 사실이 윤대진 광주 지검 검사의 진술로 밝혀졌지만 이미 그때는 청문회가 끝난 이후였다. 청문회에서의 위증에 대한 고발은 재적 위원 1/3 이상 연서를 해야 가능한데, 이미 끝난 국회 청문회는 '위증죄 고발'의 효력이 없어진다. 즉 한시적 기구로서의 청문회는 시간이 지나버리면 고발 주체가 될 수 없다.

결국 미국이나 영국보다도 높은 형략을 내세운 국회 청문회 위증죄, 그러나 현실은 '엄포'만 논 것이 되어 버린다. 출석에서 부터, 선서, 증명할 수 있는 죄명, 그리고 시한까지, 국회 청문회를 통한 위증죄의 처벌은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다.

거짓의 역사, 70년- 우리가 용서한 거짓말 
그런데 우리 국민에게 정치인들의 거짓말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아니 우리의 지난 70년 정치사는 곧 국민을 대표하는 리더들의 '거짓의 역사'였다 . 한강 다리가 끊기지 않았다며 북진을 하고 있다던 이승만 대통령은 피난민을 눈 앞에 두고 다리를 끊어버리고 자기 혼자 살겠다고 내빼버렸다. 그리곤 자신의 거짓을 덮기 위해, 다리가 끊겨 도망치지 못한 피난민들을 '부역자'로 '빨갱이'로 몰아 처단했다. 박정희의 거짓말은 그의 정권 연장의 슬로건이 되었다. 민정 이양을 하겠다더니, 총선을 하겠다더니, 더는 집권을 하지 않겠다더니, 다시는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더니, 총탄에 목숨을 잃을 때까지 그는 거짓말을 되풀이 했다. 광주학살의 주모자로 대통령이 된 전두환이나 노태우라고 다를까.




그리고 이들의 거짓말은 안타깝게도 이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연장하도록 허용한, 우리가 용서한 거짓말이 되었다. 즉 지난 70년, 우리의 현대사는 바로 우리가 용서한 정치인들의 거짓말의 역사였다. 바로 이 지점을 다큐는 짚는다. 왜, 우리는 정치인들의 거짓말에 관대한 거일까?

전 정치인 전여옥 씨는 그 '용서'의 관습을 우리의 고속 성장에서 찾는다. 즉 과정과 수단이 잘못되어도, 목표를 달성하면 용서가 되었던 고속 성장의 시대, 정치인들의 거짓말 쯤이야 눈 질끈 감고 용서해 주었던 국민들의 전반적 정서가 오늘날 두 대통령의 감독 행을 결과했다.

물론 인간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인간 개인으론 하루에 10번, 많게는 200회 까지 거짓말을 한다. 이렇게 보면 거짓말은 '인간의 속성'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하지만, 다큐는 주장한다. 그저 인간의 거짓말과 정치인의 거짓말은 다르다고.





거짓을 용서하는 관행에서 부터 
미국의 경우, 클린턴 전 대통령이 탄핵을 받은 이유는 그의 성스캔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국회 에서 위증을 한, 그 거짓말이 그를 대통령직의 위기로 몰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은 국회, 즉 국민 앞에서의 거짓말을 국가 전복, 반란에 준거한 죄로 여긴다. 반면 일반인들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관용적이다. 그러나, 부패 범죄, 직권 남용과 관련한 거짓말에 대해서는 '관용' 대시 '기소'로 다스린다. 특히 '살림의 여왕'이라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마사 스튜어트의 사례에서 보여지듯 조사 과정에서 정의의 실현을 방해하면 기존 형량에 4년을 더하는 등 단호한 처벌이 행해진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오히려 반대다. 모르쇠로 일관했던 이영선 비서관에 대해 1심에서 위증을 인정했던 법원은 2심에서 집행 유예를 선고했다. 그의 거짓말을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충성심'으로, 즉 '상사의 지시에 의한 불가피한 이유'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법조인 생활을 오래했기'에, '국가 성장에 이바지했기에' 라는 식으로 그들의 거짓말에 '면죄부'를 준다. 이에 '노회찬 의원'은 반발한다. '오랫동안 노동을 해왔기에 법적으로 처벌을 완화해 준 적이 있냐? '고

다큐는 우리 현대사 비극의 시작을 '그들의 거짓말'로 부터라 본다. 부정 부패가 반복된 역사, 그 베이스가 되는 건 바로 권력자의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력의 거짓말'에 대한 문제 제기는 곧,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그러해 왔던 시스템과 문화에 대한 질문이 된다. 과연 우리는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사회와 격리시켰던 적이 있는가? 심지어 유죄를 받아도 정치적 탄압이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주장하는 사회, 거짓말과 한 배를 탄 권력, 처벌받지 않는 권력, 이제 우리가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가고자 한다면, 바로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도 권력을 유지해 갈 수 있는 관행에 대한 분명한 '징죄' 시스템을 만드는 것에서 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라 방향을 제시한다. 어쩌면 당연한, 하지만 누구나 그러려니 했던 그 '관행'에 대한 문제 제기, 바로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그 '기초'와 시스템에 대한 제언이다.

by meditator 2018. 4. 2. 15:49

올해로 제주 4.3 사건이 70주년이 되었다. 다행히도 새 정부 들어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조명이 좀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건 물론, 그 어느 때보다도 전국민적 관심을 받는 희생자 추념식이 될 예정이어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신 영령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70주년이 될 듯하다. 


그런데 이렇게 활발하게 조명을 받는 제주 4.3 사건, 그러나 이 비극의 역사는 오래도록 우리의 역사 속 행간에 드러나지지 못한 채 숨죽여 왔었다. 그저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상흔도 마음대로 드러내지 못한 희생자와 그 가족들, 그들의 아픔에 대해 우리의 역사는 외면해 왔었다. 방송이라고 다를까. <알쓸신잡>을 통한 유시민 작가의 회고, 그리고 최근 70주년 기념식 사회를 맡은 이효리가 자신의 예능 <효리네 민박>에서 언급을 통해 새삼스레 '조명'받고 있지만, 재야 언론을 제외하고 예능은 물론, 다큐에서 조차 제주 4.3은 접해보기 힘든 '희귀한' 이야기였다. 

1978년 아직은 서슬이 퍼랬던 유신 시대 현기영 작가는 자신의 작품 <순이 삼촌>을 통해 4.3 사건의 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문화 영역에서의 4.3에 대한 말문을 텄다. 89년대에 들어서서 <제주 민중 항쟁>, <잠들지 않은 남도> 등의 출판 연구 분야에서의 4.3에 대한 조명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고, 제주의 지역 신문인 '제주 일보'가 4.3에 대한 증언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군사 정권이 종식된 1990년대 들어 유족 들을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진상 규명에 대한 움짐임이 시작되었다. 1993년 '제주 4.3 특별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99년 제주 4.3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4.3 특별법 제정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그해 12월 2일 국회의원 102인의 발의로 '제주 4.3사건 특별법'이 제출되었다. 



바로 이렇게 제주 4.3 특별법이 제정되는 등 우리 사회에서 4.3이 행간 속에서 역사로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1999년 9월 12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첫 회로 제주 4.3 사건을 다루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방영된 100부작 다큐멘터리였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6.25, 독재 정권 시기까지 역사의 행간에 숨겨져 있는 역사적 사건을 '복기'해낸 프로그램으로 실미도 사건 등을 다루며 일요일 밤 11시 30분이라는 불리한 시간대임에도 '인기 프로그램'이 되었다. 이렇게 '금기의 시대'를 다룬 프로그램이었던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그 첫 방송으로 제주 4.3 사건을 다룬다는 건 그만큼 이 사건이 한국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방송에서 본격적으로 4.3 사건을 다룬 첫 번째 기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선구자'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방송을 통해 4.3을 이야기하는 건 쉽지 않았다. 

비극의 역사 속 숨겨진 진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 봉기가 시작되었다. '탄압 중지, 단독 선거, 단독 정부 반대, 통일 정부 수립'을 내세운 이들은 12개 경찰 지서와 우익 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다. 이 과정에서 15명이 사살되었다.'

이것이 1999년까지 세간에 알려진 4.3사건이었다. 다큐는 바로 이 사실에 대한 검증부터 들어가기 시작한다. 4.3 사건이 일어나기 전 친일 경찰이었던 조병옥의 비호를 받은 서북 청년단의 무차별적 테러가 이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라 짚는다.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의 발포 사건으로 민간인 6명이 사망하고 이는 제주도민의 민심을 악화시켰고, 이는 총팡업에서 95%가 넘는 참여율로 이어졌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 대해 미군정은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를 외지인으로 교체하고, 서북 청년단을 파견하여 무차별적 테러, 구금, 고문으로 이어진 체포 작전이 벌어졌다. 


이렇게 '경찰이 사람 때려죽이는 게 보통'이었던 당시의 상황은 도민의 감정을 격화시켰고 이를 절대 지지 세력으로 믿은 체포 작전으로 위기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 봉기를 감행하기에 이르렀다고 결론내린다. 또한  당시 미군정이 주장하듯 이 '무장 봉기'가 남로당 중앙당의 계획적인 봉기였다는 사실에 다큐는 이의를 제기한다. 무엇보다 당시 미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잘 알고 있는 중앙당이 그런 무모한 지시를 내릴 리 없다는 것이다.
 
'사상' 보다는 매 맞지 않기 위해 가입했던 사람들이 대다수였던 남로당 제주도당이 무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진압 작전에 대응한 불가피한 무장 봉기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무장 봉기의 실상 조차도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의 실상이라는게 5~60명 정도의 작은 부대 단위, 당 자체는 커녕 계통의 조직체가 없었을 것으로 간주되는, 그들 대부분이 죽창이 주요 무기였으며, 소총은 겨우 한 두 자루가 있을 정도, 공격을 해서 겨우 한 사람 정도를 사살할 정도의 전투 능력을 가진 이들의 무장 봉기란 실상 그리 '가공할만한' 정도가 아니었다고 다큐는 밝힌다. 

다큐는 72시간 내 전투 중지, 점차적 무장 해지, 주모자들의 신변 보장이라는 파격적인 내용의 4.28 평화 협상을 무력화시켜 버린 5.1 오라리 방화 사건을 주목한다. 무장 폭도에 의한 방화로 회담을 결렬시켰던 이 사건, 하지만 생존해 있는 오라리 주민들은 당시 폭도의 만행을 증언했던 주민들이 오라리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대동청년단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런 이유에 힘을 실은 건 이미 불이 꺼져 가는 상황인데도 경찰이 와서 주민들을 쏴죽였다는 사실이다. 미 군정의 딘 소장이 제주를 극비로 방문한 이후, 귀순 작전을 펼치며 협상을 주도했던 김익렬 장군이 해임되고 초토화 작전이 본격화 된다. 

대리전의 리허설로써의 4.3
다큐가 줄기차게 질문하고 있는 건 바로 이런 민족적 비극의 책임 소재가 어디에 있는가이다. 그리고 다큐가 가리키고 있는 대상은 바로 미국. 후에 공개된 미군정 보고서는 당시 경찰이 지나치게 폭력적이었다는 사실을 미군정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즉, 미국은 이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것이다. 왜? 그건 바로 제주 도민의 70%가 좌익, 혹은 그 동조자라는 미국의 냉전주의적 시각에서 부터 비롯된다. 

5.10 선거를 앞둔 미 군정은 자신들이 주도한 단독 선거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남한 내 반공 정권에 대한 조바심을 숨기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도 내에서 번지고 있는 반정부적 움직임에 미 군정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씨를 말려버리는 초토화 작전을 사전에 구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후의 미군정 문건은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군 정찰기가 제주도 상공을 수시로 정찰했으며, 함대가 제주도를 봉쇄하고 있었으며, 통신 부대의 촬영은 지극히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편집'시켰다고 다큐는 밝힌다. 

특히 5.10 총선 과정에서 전국의 200여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치뤄졌는데, 제주도에서는 소요 사태로 인해 3대의 선거구 중 2개가 투표 미달로 대표적인 단독 선거 거부 지역이 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토벌이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주민들을 해안선 5km 밖으로 소개하고 제주도를 횡단하여 병력을 배치한 후, 한라산을 기점으로 해안까지 빗질하든 소탕해 가는 과정에서, 농사일 등으로 떠나지 못한 주민들은 즉결 처형되었고, 이미 산으로 피신한 청년들 대신, 가족을 죽이는 '대살'이 횡행했던 토벌, 사망 군인에 대한 보복으로 소개된 주민들에 대한 집단 학살, 전쟁이 터진 후에는 예비 검속이란 명분으로 또 사살, 암매장, 제주 도민 중 3만 여명이 목숨을 잃는 '집단 학살극'이 벌어졌다고 다큐는 증언한다. 



미군정은 이승만 정부가 수립된 이후 자신들은 직접적 책임은 없다고 발뺌을 하지만 이후 밝혀진 보고서에서는 49년 6월 30일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한국군과 경찰이 미군의 통제 하에 있었다는 비밀 협약이 밝혀진다. 또한 보고서는 공산주의와의 냉전 과정에서 '한국군을 훈련시키는 목적이 미군을 대신해 피를 흘리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대리전'의 한국 전쟁, 그리고 그 대리전의 '리허설'로써, 본보기로써 '좌익, 혹은 그 '동조자'에 대한 무차별 초토화 작전을 방조한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것을 다큐는 강조한다. 

그렇다고 이승만 정부는 이런 책임에서 피해갈 수 있을까? 일제 하 경찰들을 그대로 이어받는 한편, 서북 청년단을 경찰로 흡수시킨 이승만 정부는 단독 선거, 이후 단독 정부 수립으로 불안정했던 정권을 지켜내기 위해, '공산주의를 심하게 탄압하면 할 수록 미국의 지원을 받기 용이하다는' 정권 이해의 차원에서 이런 '민족적 비극'에 앞장 서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발각되지 않기 위해 동굴로 피신했지만,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얼마되지 않은 참혹한 시련, 발각되지 않기 위해 우는 아기의 입을 막다 죽이고, 만삭의 산모가 배를 드러낸 채 총살 당하고, 두 아들은 사살, 나머지 세 아들은 실종, 그 과정에서 죽어간 3만 여명의 주민들.  제주 도민 전체의 한으로 남겨진 역사, 그 누구라도,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이든, 혹은 공산주의자라도 그렇게 인간이 정당한 법질서의 영역 밖에서 '집단적으로 무차별적으로 학살'되어서는 안된다는 참혹한 교훈을 1999년 제주 4.3 특별법이 첫 삽을 뜨던 그해, 첫 회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프로그램의 정체성으로서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밝힌다. 




by meditator 2018. 3. 29. 04:41

<미생>의 김원석 감독과 <또 오해영>의 박해영 작가의 만남으로 화제가 되었던 <나의 아저씨>, 하지만 드라마를 열기도 전에 남자 주인공이 '아저씨'인 이선균과, 여자 주인공이 젊은 세대 아이유라는 점에서 <도깨비>에 이어 또 한번 아저씨-젊은 여자 커플의 등장이 아니나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설상가상 첫 회 여주인공 이지안(아이유 분)에게 사채를 받으러 온 이광일(장기용 분)의 무차별 폭행에 이어, 그런 이광일의 폭행에 대응한 이지안의 '너 나 좋아하지?'란 대응이 '왜곡된 성의식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논란을 불지피며 일부에서는 이 작품에 대한 '보이콧' 움직임까지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2회를 마친 <나의 아저씨>는 이런 세간의 '아저씨'와 젊은 여성에 대한 편견에 오히려 반문을 하는 듯하다. 극중 이지안은 나꿔챈 뇌물 5000만원을 다시 휴지통을 통해 돌려놓음으로써 회사에서 쫓겨나게 생긴 박동훈(이선균 분)을 구해준다. 물론 애초에 이지안은 그 돈을 챙겨 자신의 사채 빛을 갚으려 했지만, 결국 다시 돌려놓는다. 의도야 어찌되었건 박동훈의 은인이 된 셈이다. 그런 이지안의 처사에 대해 영문을 몰라하는 박동훈, 그에 대해 그의 형 박상훈(박호산 분)과 동생 박기훈(송새벽 분)은 쉽게 이지안이 박동훈을 좋아해서라 단정한다. '얼래리 꼴래리'라며 놀리는 것까지 덧붙여. 



고정 관념을 뒤짚은 아저씨와 나 
바로 이 지점, 우리 사회가 '아저씨'와 이지안 또래의 젊은 여자에 대해 '상정'할 수 있는 관계다. 이지안이 돈봉투를 가져갔다는 의심을 가진 박동훈이 지안을 따라 지하철을 타고 그녀에게 내릴 것을 종용하다 옆 좌석의 승객에게 내밀려 지하철에 패대기쳐지는 장면 역시,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이 잇닿을 수 없는 세대에 대한 고정 관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불편한 성적 관계'가 아니고서는 서로 관계할 수 없는 이 두 세대, 그저 두 세대의 남녀가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이 많은 아저씨'와 '젊은 여자'의 불평등한 관계에 대한 불평이 새어져 나오는 현실, 이게 바로 우리 사회에서 이 두 세대가 가지고 있는 간극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지만, 2회를 마친 드라마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쉽게 생각했던 '아저씨'와 '젊은 여자'가 아닌 것이다. <도깨비>처럼 흔히 이 관계를 다룬 드라마에서 등장하던 '키다리 아저씨'따윈 없다. 키다리는 커녕, 회사 내 권력 투쟁에서 그저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잘못된 뇌물 봉투를 배달받아, 장기판의 '졸'처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일개 '사원' 박동훈이 있다. 생긴거 부터 억울하게 생겼다는 그는, 정말 억울하게도 그 순간, 딸의 결혼식장에서 축의금을 동생과 함께 빼돌리던 형, 그 형에게 집값을 융자 받아 분식집이라도 내주자는 어머니의 간청을 떠올려, 평소답지 않게 주저했다. 그 '한순간의 주저'함이 그 봉투를 이지안에게 빼앗기는 빌미가 되었고, 회사내 권력 투쟁의 '말'로 한껏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신세가 되었다. 심지어 거기엔 자신의 아내와 불륜을 하느라 그를 밀어내고 싶은 대표의 사심까지 보태졌으니, '키다리 아저씨'는 커녕, 목구멍이 포도청 신세다. 기껏 그가 선심을 써서 산 '연시'조차 이지안에게 건네지지 못한 채.

반면, 우리가 흔히 고정관념으로 생각해 왔던, 그 '아저씨'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이지안은 '밟혀도 밟혀지지 않는 억새'와도 같다. 아마도 이광필의 폭력적 장면을 과하게 설정한 건, 그 상황에서도 포기는 커녕 반격을 가할 수 있는 이지안의 그 억새같은 내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했던 이광필'과의 장면만이 아니라도 '생존' 그 자체인 이지안의 삶은 1,2회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겨울 박동훈의 눈을 시리게 한 양말도 신지않은 발은 아랑곳없이, 그녀는 회사에서 한 움큼 가져온 커피를 몇 개씩 타서 마시며 도시를 버텨낸다. 요양원에서 밀린 입원비 대신 기꺼이 할머니를 침대 채 끌고 나오는 객기도, 주방 설겆이를 하며 비닐 봉지에 싸온 음식물로 연명하는 끼니의 궁상스러움도, 그녀의 일상이다. 그렇게 설명된 그녀의 일상에서 박동훈이 받은 뇌물 봉투 정도 슬쩍 해서 자신의 빛을 갚는 것 쯤이야 그녀에겐 그 일상의 연장처럼 여겨질 만큼. 그녀는 이 도시에서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릴라'같은 존재다. 그런 그녀 앞에 박동훈은 새장 속의 새와도 같이 보잘 것없다. 



도시 게릴라 이지안과 새장 속의 새 박동훈 
이지안은 5000만원으로 빚을 갚는 '편한' 길 대신 봉투를 돌려주며 외려 박동훈의 '키다리 아저씨'가 되었다. 박동훈이 사는 밥 한 끼 따위, 5000 만원에 댈 것도 아니다. 그를 그저 장기판의 말로만 써먹는 이 사회에서, 이지안은 최소한 지금까지는 '구원자'다. 물론, 대표와의 딜에 대한 결과는 미지수지만. 바로 이 전복된 '아저씨'와 '나'의 관계가 <나의 아저씨>가 도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담론'이다. 어설픈 아저씨와 '나'에 대한 로망은 사절이다. 그리고 흔히 생각하는 '키다리 아저씨'는 없다. 나이만 먹었지, 장기판의 말로 회사에서, 가정에서 굴려지는 박동훈은 그저 나이만 먹었지, 세상사 내공으로 보면 이지안의 뒤꿈치 정도이다. 

이런 역설적인 세대의 만남,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을'이다. 제 아무리 '생존'을 위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도 죽일 것'같은 이지안도, 생긴거 부터 억울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박동훈도, 나이가 많건, 적건, 혹은 세상 경험이 많건, 적건, 그들은 이 사회로부터 '억울'한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연대'는 기껏해야 '불륜'의 눈길이나 받는 공감 제로의 관계들이다. <나의 아저씨>는 바로 이 공감 제로 관계의 공감과 연대를 위해 첫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 첫 발은 어설픈 '아저씨스런 호혜'가 아니라, '나'에 방점이 찍혀 있다. 물론 아직 알 수 없다. 나가 아저씨를 이용해 먹을 건지, 동지가 될 건지, 의지가 될 건지. 그러나 중요한 건 무한 경쟁, 이전 투구의 사회의 '게릴라'같은 이지안으로 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왜 굳이 아저씨와 나냐고 발길을 걸면 할 말이 없다. 각자 도생이 아니라, 세대를 넘어 공감과 화해를 해보자는 손길에 한번쯤은 손을 잡고 귀를 기울여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무엇보다 그 '연대'의 시작이 '나'라는 지점에서 우리는 긍정적으로 이 '아저씨'와 '나'의 향후를 지켜볼 만 하지 싶다. 
by meditator 2018. 3. 23. 1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