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결혼기념일을 지냈다. 어느덧 내가 싱글로 살아온 시간보다 누군가와 '부부'로 살아낸 시간이 길어졌다. 생각해 보면 '경이로운(?)' 일이다. 피를 나누지 않은 사람과 '동거'하며 함께 삶을 누려간다는 것이. 그런데 문제는(?) 수명이 길어진 시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만큼 또 살아가야 한다는 '부담'이 얹혀진다. 그래서 1990년대 등장하기 시작한 게 황혼 이혼이다. 자녀가 성장한 이후 부부가 각자의 삶을 찾기 위한 '이혼', 하지만 몇 십년 지속해온 결혼이라는 관계의 형태를 '파괴'하는 이 결정에는 많은 부담이 따랐다. 더구나, '가족'이라는 제도가 사회의 근간이 되어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래서 등장한 것이 '졸혼'. 2004년 일본의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의 책 <졸혼을 권함>에서 등장한 이 단어는 유행처럼 번져 2016,7년에는 한국 사회의 '트렌드'가 되었다. 


그 '트렌드'에 따라 여러 다큐가 '졸혼'에 대해 다뤘고, 연예인 등 유명인사가 당당하게 자신의 졸업을 고백하고, 예능으로 도입되어 '별거나 별거냐(2017)'등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제 2018년 5월 27일 <sbs스페셜>에서 다시 '졸혼'을 다룬다. 바로 <행복한 부부 생활을 위한 졸혼 연습>이다. 유행처럼 휩쓸고간 2017년이 지나서 뒷북일까? 하지만, <sbs스페셜>이 다루고 있는 '졸혼'은 작년 붐처럼 유행했던 '졸혼'과는 또 다른 변화가 감지된다. 



차광수 강수미 부부의 졸혼 연습 
<sbs스페셜>은 OECD 이혼율 1위의 현실을 수용하여 준비없이 맞이하는 '이혼' 현실에 대해 <이혼 연습- 이혼을 꿈꾸는 당신에게>를 통해 '가상 이혼 프로젝트'를 실시한 바 있다. 당시 배우 이재은 부부 등은 다큐에서 마련한 방식으로 이혼 생활을 미리 접해보고 서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제 2018년에 찾아온 <졸혼 연습>은 바로 이 <이혼 연습>의 방식을 그대로 차용한다. 하지만 위자료, 재산 분할 등의 현실적인 문제로 묵직해졌던 <이혼 연습>과 달리, 결혼이라는 제도의 외피를 완전히 벗어던지지 않은 '졸혼'답게, 결혼의 종료 연습은 한 편의 달콤쌉싸르한 로멘틱 코미디와도 같다. 

여기 남들에겐 한 쌍의 원앙으로 대접받는 부부가 있다. 바로 연기자 차광수 씨 부부다. 결혼 생활 23년차, 남편에게 10첩 반상을 차려 대접하는 아내, 1년에 한번씩 해외 여행을 데리고 가겠다는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는 남편, 이들은 남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젊은 시절 잘 나가던 거문고 연주자의 꿈도 접고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스스로 90점 짜리 아내라 평가해오던 강수미씨는 자신의 삶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남편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이제서라도 자신을 찾고 싶은 강수미 씨 남편에게 당당하게 '졸혼'을 청한다. 

자기의 삶을 되찾고 싶다는 확고부동한 의지를 가진 배우자의 졸혼 요구에 배신감과 허탈함에 빠진 것도 잠시, '자유'라는 또 다른 카드가 차광수씨에게 손을 내민다. 결국 차광수 씨는 독립된 인격체로서 서로를 인정하고, 각자의 삶은 인정하는 '졸혼' 계약서를 쓰고 '가출'한다.

다큐는 각자 홀로 살아보는 '졸혼' 연습의 혼란스러움과 시행 착오와 함께, 실제 '졸혼'의 커플을 등장시켜 시청자들에게 '졸혼'에 대한 생각의 폭을 넓힌다. 자신의 삶을 모색하던 아내가 찾은 사람은 임지수씨.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그녀는 하던 사업을 정리한 후, 평범한 아내의 삶 대신 산속으로 들어가 홀로 황무지를 아름다운 정원으로 일구어 냈다. 하지만 자유로운 그녀의 삶을 부러워하는 강수미씨에게 임지수 씨는 여전히 고운 외모와 달리, 노동으로 거칠어진 손을 보여준다. '졸혼'이라던가, '자신의 삶에 대한 로망'은 그렇게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천착과 책임이 뒤따른다는 증거이다. 임지수 씨의 손을 본 강수미 씨의 생각도 복잡해 진다. 막연히 남편의 시중을 들지 않아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졸혼', 그러나 생각보다 무료하다고 생각했던 남편이 없는 삶, 거기엔 홀로 살아갈 삶에 대한 책임이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졸혼도 쉽지 않다, 그렇다면 휴혼은 어떨까?
남편 역시 마찬가지다. 아내의 청소와 빨래에 대해 잔소리로 일관했던 남편, 그러나 막상 집을 나와 살아보니 그 별 거 아니라던 일상의 삶이 버겁다. 그 역시 '졸혼' 선배를 찾아나선다. 파주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 중인 이안수 씨, 그의 아내는 그와 떨어져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해왔으며 최근에는 정년 퇴직을 앞두고 자전거 여행에 이어 필리핀 어학 연수 중이란다. 평범한 직장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던 이안수 씨가 먼저 훌쩍 떠나면서 시작된 부부의 이별, 서로 각자의 삶을 인정하며 존중해 주는 삶은 더더욱 부부간의 정과 사랑을 돈독하게 해주었다고 자부한다. 

'졸혼'의 선배를 찾아본 차광수-강수미 부부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을 하던 강수미 씨는 평소 좋아하던 베이킹을 시도해 본다. 막상 만들어 본 첫 번째 작품, 그 빵을 먹으며 강수미 씨가 제일 먼저 떠올린 사람은 남편이다. 결국 부부는 '졸혼'대신 잠시의 휴혼을 마치고 다기 한 집에 살기로 한다. 따로 또 같이 삶은 새로운 문화적 충격이었지만, 아내 없는 일상을 차광수 씨는 상상할 수 없었다 토로한다. 하지만 잠시 떨어져 살았던 시간은 부부를 변화시킨다. 손도 까딱않던 남편은 이제 아내를 위해 차를 준비하고, 떨어진 시간 동안 소중한 서로의 존재가 일상의 시간마저 변화시킨다. 이에 부부는 준비되지 않은 졸혼 대신 부부가 서로를 마주볼 여유를 가질 수 있는 휴혼을 제안한다. 



다큐가 보여준 건, '졸혼' 조차도 사실상 여의치 않은 우리 사회 부부의 또 다른 대안이다. 이혼이 '위자료', '재산 분할'이라는 경제적 부담과 가정의 파탄이라는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면, 졸혼 역시 차광수 씨 부부에게서 잠시 스쳐지나갔지만, 독립적 생활에 대한 쉽지 않은 여건의 함정이 따른다. 차광수 씨나, 예능 <별거가 별거냐>에서 여유롭게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집을 나섰지만, 과연 배우자에게 여유롭게 어렵게 마련한 집을 양보할 수 있는 부부가 얼마나 될까?  또한 너무 오래 살아서 번거롭고 지겹지만 막상 결혼을 '졸업'할 용기 역시 쉽지 않다. 그러기에 2018년 <SBS스페셜>은 졸혼에서 다시 한 발 물러서 '휴혼'을 제의한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가정'을 벗어던지는 건 쉽지 않다. 


by meditator 2018. 5. 28. 15:00

GMO(유전자 변형 농산물)와 관련된 논란은 2008년 식용 GMO(콩, 옥수수)의 본격 수입이 시작된 이래 그 역사가 길며 쉬이 종결되지 않고 있다. 식량난으로부터 인류의 구원자라는 의견과 결국 인간과 자연 모두를 멸종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밥상이라는 양 자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해 오고 있다. 그런 가운데 2017년 기준 연간 228만 2천톤, 그 중 옥수수 123만 9천 톤, 대두 104만 3천 톤, 어느덧 우리는 세계 1위의 식용 GMO 수입국이 되었다. 




높아지고 있는 GMO 경고의 목소리 
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유전자 조작 농산물과 관련된 경고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있다. 지난 해 서울 환경 영화제에서 제레미 세이퍼트 가족의 GMO 가족 여행기 <GMO OMG>가 상영된 바 있다. 인류가 유전자 조작을 시작한 지 어언 20년, 우리의 식탁에서 '일상'이 되어가고 있는 GMO, 그 실상을 알기 위해 제레미 세이퍼트 감독은 아이들과 함께 긴 여정에 올랐다. 마트에 들러 원료의 성분을 묻고, 쓰레기통을 뒤지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미국의 실생활에 GMO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가족은 찾아나선다. 



GMO와 관련하여 몬산토를 대표로 하는 다국적 기업이 주장하는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세계적인 기아의 가장 유효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GMO 농산물의 생산성이 그렇게 좋을까? 놀랍게도 유기농 재배와 30 여년간 비교한 결과 그리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해충과 잡초에 강한 GMO 농작물이 해충과 잡초에 강한 내성을 키워 슈처 잡초가 등장했다. 결국 또 다른 농약을 살포해야만 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2007년 < KBS 환경 스페셜 위험한 연금술 유전자 조작 식품>을 통해서도 방영된 바 있다. 영화 속 가족이 발견한 쓰레기통 속 엄청난 음식들척럼 우리 사회 '기아 문제'는 절대적 식량의 부족이 아니라 생산되는 음식의 1/3이 버려지고 있는 불균등한 배분의 문제라고 반대론자들은 주장한다.

세계 3대 GMO콩 생산지인 아르헨티나 마을 차코에서는 그 재배 과정에서 대량 살포된 글리포세이트로 인해 주민들이 각종 암과 이상 질명에 시달렸고, 신생아의 30%가 기형아로 죽어갔다. 결국 WHO(세계 보건 기구)는 이를 2등A급 발암 물질로 지정했다. 이 글리포세이트는 GMO 다국적 기업인 몬산토사의 GMO 전용 농약 '라운드 업'의 주성분이다. 

하지만 농약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세계의 환경 단체들이 우려하는 건 바로 '유전자 조작' 그 자체이다. 일부에서 병해에 강한 농산물을 키워냈던 품종 개량에 비유하지만, 유전자 조작은 '냉해에 강한 딸기를 만들기 위해 심해에 살아 추위에 강한 넙치의 유전자를 이식하듯', 종의 경계를 넘어선 실험이며, 이 20여년의 역사 밖에 되지 않은 유전자 조작의 식품의 장기간의 섭취에 따른 안전성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는 점이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점이라는 것이다. 

연어의 경우 더 많은 알을 낳도록 하기 위해 성장 호르몬 분비를 제거하여 36배나 큰 슈퍼 연어를 탄생시켰지만, 이 슈퍼 연어는 기형어가 많이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이들 연어를 물에 풀어놓았을 경우 불과 5세대 만에 일반 물고기의 수를 초월했다. 그러나 이들 슈퍼 연어는 성체가 될 때까지 살아남는 겨우가 적어, 40세대만에 멸종되고 만다. 그러기에 환경 운동가인 류외향씨는 '식량이 아니라 생물 무기'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GMO식품이 상업화된지 20년, 콩, 옥수수 등의 유전자 변형 농산물과 함유 식품은 이미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환경과 건강, 식량 주권 및 무역 등 다방면에서 우리 사회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이에, 지난 19일 세계 몬산토 시민 반대의 날에 한살림 등 시민 단체들은 'GMO를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매년 5월 세째 주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는 이 집회는 올해로 6번째를 맞이한 세계 시민들의 뜻을 모은 행동이다. 또한 지난 3월 12일 한국 YWCA, 경실련 소비자 정의 센터 등 57개 소비자, 농민, 학부모 단체들은 청와대 앞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GMO 완전 표시제 국민 청원'을 시작했다. 불과 한달 사이 21만명의 사람들이 청원에 참여했다. 이 일련의 과정을 <뉴스 타파 목격자들>이 'GMO를 먹지 않을 권리'로 담아내고 있다. 

왜 GMO를 표시해야 하나? 
왜 GMO 표시에 학부모와 소비자 단체들은 나섰을까? 그 시작을 다큐는 NON GMO 급식을 하는 학교에서 찾는다. 경기 광명의 광명 북고등학교. 이 학교는 학교 급식에서 GMO 음식을 퇴출 시켰다. 우리밀 튀김 가루, NON GMO 기름인 유채유를 쓰고 있다. 아이들을 믿고 맡길 수 있다는 학부모들, 급식이 제일 맛있다는 학생들, 하지만 그렇다고 이 NON GMO 급식이 완전하지 않다. 왜냐하면 가공 식품에서의 GMO를 완벽하제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묵들의 제품이 만들어 지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GMO 농산물로 만들어 지는 기름에 대해 학교 급식은 무방비하다. 왜냐하면 이들 식품이 원재료의 GMO 여부를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표에서 보여지듯이 수입된 GMO 콩과 옥수수는 각기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의 형태로 분해되어 간장, 식용유, 전분 등의 원료로 씌여진다. 그리고 이런 재료들은 우리가 무심코 먹고 있는 각종 식품들, 심지어 아이들이 즐겨먹는 과자나, 믹스 커피 등에까지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17뇬 식품 의약품 안전처는 '고도의 정제 과정 등으로 유전자 변형 DNA 또는 유전자 변형 단백질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검사 불능인 당류, 유지류 등은 유전자 변형 식품임을 표시하지 아니할 수 있다'고 '고시하고 있다. .

이에 학부모, 농민을 비롯한 소비자 단체들은 이에 '내가 먹은 식품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즉 알권리와 먹을 권리로서 'GMO 완전 표시제'를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불과 한 달 만에 청와대 청원에서 21만 명의 동의를 얻는 과정에서 보여지듯이 대중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이에 국회의원 윤소하, 김현권 의원은 ' 유전자 변형 식품 표시 대상을 '제조 가공 후에 유전자 변형 DNA, 또는 유전자 변형 단백질이 남아있는 유전자 변형 식품 등에 한정한다는 조항을 삭제하고, 유전자 변형 물질을 원재료로 사용했을 경우에는 예외없이 식품에 이를 표시하도록 할 것'에 대한 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법안은 2016년 이래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정부의 방패막이 역할 GMO 협의체 
이런 학부모, 농민, 소비자들의 주장에 대해 정부, 그 중에서도 식품 의약품 안전처는 GMO 표시 제도 검토 협의회를 전문가 4명, 소비자 단체 8명, 식품 산업계 8명으로 구성하여 논의를 하고자 했다. 하지만, 협의과정의 내용의 비공개 등 운영 과정의 문제는 물론, 소비자를 대표해야 할 소비자 단체 대표의 대표성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CJ, 대상 등 식품 산업계 전원 반대와 소비자 대표 3인 마저 반대한 이 협의체의 결론은 안타깝게도 GMO 정책과 관련된 정부에 대한 비판의 방패막이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 식품 산업 협회는 GMO 성분 표시와 관련하여 과학적인 검증 방법이 없다거나, 시스템이 갖춰 지지 않았다는 식으로 발뺌을 하고 있지만, 정작 이와 관련한 홍보 영상까지 만들어 배포하는 등 앞뒤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외국의 사례는 어떨까? 미국을 제외한 유럽의 경우는 GMO 완전 표시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가까운 대만의 경우 GMO 완전 표시제는 물론, 학교 급식에서 GMO를 완전 퇴출 시켰다고 GMO 반대 행동은 밝히고 있다. 



GMO 완전 표시와 관련하여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그 중 가장 큰 불안감은 바로 '가격'의 문제다. 과연 GMO 관련 수입품을 사용하지 않으면 얼마나 가격이 오르게 될까. NON GMO 원료를 사용할 경우, 식품 산업 비용은 1.28~2.35%의 인상 분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월 식품비 지출 50만원을 기준으로 했을 때, 월 8250원에서 18000원 추가로 지출하게 되는 것이다. 식용유 1,8리터를 기준으로 했을 때 4000원의 가격이 5000원으로 인상될 것이다. 학교 급식의 경우 한 끼 3000으로 놓고, 끼니 당 111월 한 달 2220원의 비용이 더 들어간다. 이상의 사례로 미루어 봤을 때 GMO 완전 표시제 이후 시장에서 GMO 원재료가 퇴출된다 해도 '가격'의 문제는 그리 심각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을 <뉴스 타파>는 내놓고 있다. 

청와대는 국민 청원에 대해 GMO 표시 제도 검토 협의체 재구성을 할 것과 제도 개선 방안 마련에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다큐는 덧붙인다. '새로 구성할 위원들의 선정 방법과 시기'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고. 

그럼에도 여전히 GMO 전면 배제와 관련한 서민의 가격 부담은 피할 수 없는 문제로 남는다. 또한 '선택'의 문제가 되었을 때 빚어지는 '상대적 박탈감'의 문제도 피할 수 없다. 이와 더불어 황교익, 김봉구 씨등은 '신토불이'의 위험론을 제기하며 소비자의 알권리는 맞지만, 그 인식이 너무 이분화되어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단백질이 녹는 고온을 이용한 가공 식품에 사용되는 GMO 원료의 유해성은 생각보다 높지 않다는 주장도 덧붙인다. 또한 무엇보다 푸드 패디즘(FOOD FADDISM; 먹거리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과대평가 하는 것)의 과열을 우려하며, 당장이 아니라 GMO에 대한 인식의 제고와 '유전자 가위 기술'(기존 GMO 방식을 개선한 나쁜 유전자를 빼내는 기술) 등의 과학 발전의 긍정성은 GMO로 인한 악영향을 충분히 제고할 수 있을 것이란 주장도 한편에서는 여전하다. 그럼에도 '소비자의 알 권리, 내가 먹고자 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문제는 '삶의 질'과 관련하여 이 시대의 중요한 화두가 될 수 밖에 없다. 



by meditator 2018. 5. 27. 01:39

지난 2017년 6월 미국 대통령이 된 트럼프는 기후 협약에서 탈퇴를 해버렸다. 영화 속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교황과 당시 미 대통령이었던 오바마를 만나, 지구 온난화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정치적 실천'을 도모했지만, 미국인들은 대통령으로 트럼프를 선택했고, 대통령이 된 트럼프는 보란듯이 '지구 온난화' 문제를 묵살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미국 대선을 앞두고 '정의로운 실천'을 요구했던 이 영화는 휴지통으로 들어가야 하나? 아니 그러기에 외려 이 영화의 가치는,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절실해 진다. 우리가 어느 '화창한 날에 맞이할 대홍수'가 여전히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그의 대중성과 영향력에 기대어 
영화의 시작은 미국의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이다.(이하 레오)  영화는 일개 배우인 레오가 환경운동의 전문가라는 걸 비웃는 한 tv 영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런 비아냥에 대해 비록 레오가 학자들만큼 많이 알지는 못하고, 정치인들처럼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스무 살 때 고어 대통령을 만나 지구 온난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이래 꾸준히 이 문제에 대해 천착해 왔음을 보여준다. 아니 역설적으로 우리에게도 가장 친숙한 배우 레오이기에, 전문가가 아닌 한 개인이 가진 지국 온난화에 대한 여정이기에 <비포 더 플러드>는 더 설득력을 지닌다. 

영화는 그에게 아카데미 상 남우 주연상을 선사했던 영화<레버넌트>로 부터 시작된다. 혹한의 날씨에 야생을 견디며 삶을 일구어 나가는 인물을 그려내는 이 영화의 배경은 19세기 아메리카 대륙이다. 그에 걸맞는 영화 배경을 찾아 캐나다로 간 촬영진은 영화에 걸맞지 않게 눈이 다 녹아버린 상황에 고심한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2014년 유엔 환경대사가 된 레오, 그는 이후 2년 여의 여정으로 지구 온난화의 현장을 직접 찾아든다. 

지구 온난화라는 용어가 공상 과학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라 생각할 만큼 무지했던 젊은 레오, 지구의 에어컨인 북극, 하지만 급속도로 녹아가는 그곳에서 2040년만 되도 항해가 가능할 지도 모르는 증언들과 마주하며 소박했던 그의 생각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 지구의 날을 기점으로 지구 온난화를 알리는데 앞장서기 시작한다. 

타락한 행성, 수익의 유혹 
그런 그와 함께 찾아본 지구 온난화의 현장, 그 첫 지역은 그가 사는 미국의 플로지다 지역이다. '화창한 날의 홍수', 그 이상한 단어의 조합이 현실이 되고 있는 곳, 상승된 해수면은 플로지다의 취약 지역를 상시적으로 '홍수'로 몰아넣는다. 이를 위해 플로리다 시는 도로를 들어 올리고, 물을 빼는 전기 펌프를 작동시키는 중이라는데, 하지만 2011년 공화당의 주지사는 취임 이후 이 다급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기후 변화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한다. '로비'와 '산업'이 얽혀있는 지구 온난화의 현실, 97%의 과학자가 지구 온난화에 동의해도, 지구는 오히려 냉각되고 있다는 등, 전례없는 온난화는 거짓이라는 등 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는 현실, 과학 논쟁이 아니라 화석 연료 사업자와 기업체의 스폰을 받는 언론의 이간질에 대중이 '미혹'되는 현실은 결국 '지구 온난화'가 '환경'이 아니라 '정치'의 문제라는 걸 레오는, 다큐는 분명하게 짚는다. 



지구 온난화에 대한 문제 의식의 역사는 생각보다 깊다. 1958년 미국의 한 tv 과학 프로그램은 이미 당시에 과학계가 기후 변화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큐는 묻는다. 그 당시에 그런 지구에 닥친 문제점을 인지하고 실천을 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까 라고. 하지만 현실은 단기적인 화석 연료 수익의 유혹이 세상을 장악한다. 과학자들의 과학적 인식 대신 사회적 신용도가 높은 몇몇 유명 인사들이 스폰을 받고 방송을 통해 인간이 기후를 바꿀 수 없다는 등의 말을 흘린다. 의회도 장악되었다. 기후 온난화에 대한 법안은 번번히 저지된다. 이것이 미국의 현실이다. 

중국은 다를까? 지금까지는 미국이 세계 제 1의 오염국가였다. 하지만 이제 그 지위를 중국이 이어받았다. 중국에서 대기 오염은 가장 첨예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 시민들을 대거 거리의 시위로 불러들이는 건 바로 '대기'의 문제이다. 학자들은 전국 오염도를 데이터 베이스화 했고, 이런 '정보'는 곧 '시민'의 목소리로 이어졌다. 덕분에 정부의 녹색 성장 정책으로 추동했고,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풍력, 태양력 발전을 시도하고 있다.

다른 국가들은 어떨까? 세계 제 3위의 탄소 배출 국가 인도의 문제는 복잡하다. 하지만 인도인 중 7억 명이 전기와 불빛 없이 생활을 하고 있다. 단 30%의 가정만이 전기를 사용하고, 상당수의 국민들이 여전히 소똥 케이크를 활용하여 요리를 하고 있다. 인도의 국가적 과제는 개발과 빈민 구제이다. 온국민에게 전기를 공급하는 것이 목표요, 감당할 수 있는 전기 요금때문이라도 석탄 사용은 불가피하다. 

이런 인도의 에너지 담당 장관에서 레오는 태양 에너지를 권유한다. 장관은 반문한다. 그런 미국이 태양 에너지를 쓰지 그러냐고. 미국의 에너지 소비는 중국의 10배, 인도의 3.5배이다. 문제는 미국인의 생활 스타일이 전세계 국민의 로망이라는 것이다. 즉 세계인의 롤모델이 되어버린 미국이 달라지지 않고서는, 즉 미국식 생활 방식과 소비 습관이 달라지지 않고서는 '지구 온난화'에 대한 논의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고통받는 지구의 약한 고리들
하지만 이렇게 미국 등의 부유한 나라가 펑펑 써댄 화석 에너지로 인해 정작 고통을 받는 건 세계의 약한 고리인 약소국들이다. 방글라데시에서는 계절에 안맞는 폭우가 내려 갓 농사를 지은 농작물들이 썩어들어간다. 1년의 작황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태평양의 낙원 키리바시에서는 홍수로 사람들이 쓰는 식수로 쓰는 연못에 바닷물이 유입되고 있다. 조만간 팔라우 섬은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 해안의 생태계도 위협받고 있다. 세계 인구 중 10억 명의 사람들이 산호초 어장에서 먹고 살고 있다. 하지만 바닷물 내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산호초는 점점 죽어가고 있는 중이다. 미래의 바다는 어쩌면 지금의 바다가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산호초의 파괴는 그곳에 깃들여 살고 있는 사람들의 굶주림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열대 우림도 마찬가지다. 이산화탄소의 저장 창고인 열대 우림, 하지만 값싼 팜유의 생산을 위해 고의적으로 불을 놓아 열대 우림은 급속도로 파괴되고 있는 중이다. 팜유 산업의 팽창은 열대 우림의 80%를 파괴했고, 코뿔소, 코끼리, 오랑우탄 등의 동물은 '난민'이 되었다. 아니 이들 동물은 불로 죽어간 다수의 동물에 비하면 '운좋은 생존자'이다. <레버런트>의 눈쌓은 풍경을 위해 영하 제작진은 지구의 반바퀴를 돌아 아르헨티나까지 5000km의 여정을 달렸다. 눈을 본다는 게 기이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 12억년동안 지구는 안정적이었다. 지구인은 지구 온난화가 가져올 변화에 대해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재의 지구 온난화로 약 4도 정도의 상승이 예상되는 미래의 지구는 우리가 살아본 적이 없는 지구이다. 언론에서는 외려 지구가 냉각되어가고 있다고 떠들지만, 지구 온난화가 당장 폭염을 가져오는 건 아니다. 외려 일시적으로 유럽의 경우처럼 '한파'를 불러오기도 한다. 하지만 지구의 온도가 2도만 올라가도 산호초는 절멸될 것이다. 기후 변화의 티핑 포인트이다. 파리 기후 협약은 그래서 지구 온도 변화를 2도, 1.5도 내로 제한하기 노력할 것을 협상했다. 지구 밖에서 본 지구의 대기는 양파 껍질처럼 얇아 보인다고 한다. 이 얄팍한 껍질, 그만큼 취약하다는 의미이다. 



늦었다지만 아직은 포기할 수 없는 노력들 
이 양파껍질처럼 얄팍한 대기의 지구, 그 지구를 위협하고 있는 온난화에 대한 대비는 이미 늦은 걸까? 전기차로 이름을 날린 일론 머스크는 '기가 팩토리'를 통해 '배터리'를 생산하고 있다. 여기서 '배터리'는 개도국의 발전소를 대신할 수 있는 용량의 전기를 내장한 어마어마한 환경 발명품이다. 즉, 우리가 유선 전화에서 무선 전화로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듯, 기가 팩토리의 배터리가 상용화되면 더 이상 전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석탄을 태울 필요가 없게 된다. 현대 과학의 발전이 새로운 지구 온난화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 낸 것이다.

하지만 일론 머스크는 자기 개인의 노력으로 전세계에 기가 팩토리를 세울 수는 없다고 하소연한다. 결국 각국의, 세계 정치권의 자구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한 예로 '탄소세'의 도임이다. 대기 중 배출되는 탄소, 즉 그 탄소를 배출하는 모든 행위와 사업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는 '경제적 방식'이 요구된다. 이산화탄소에 세금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면, 불과 몇 십년전 '담배에 세금을?'하며 고개를 갸웃대던 상황을 연상해 보면 된다. 

계몽적 방식의 사회적 책임감 호소보다. '탄소세'와 같은 직접적인 경제적 방식이 급격해지는 위기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도 있다고 다큐는 주장한다. 하지만, 지구 온난화가 정부나, 정치권의 몫만은 아니다. 하다못해 우리가 소고기 대신 닭고기를 먹는 식사 습관만 바꿔도 온난화의 가속화를 막을 수 있다. 지구 상 생산되는 곡물의 70%가 소의 먹이이다. 또한 소가 배출하는 메탄은 강력한 온실 가스의 주범이다. 반면 닭은 그런 소가 지구 온난화에 끼치는 악영향에 1/10 정도의 영향력을 끼칠 뿐이다. 그래서일까 레오는 채식주의를 선언했다. 이는 결국 지구 온난화에 대한 우리의 실천은 우리의 생활 방식으로 이어짐을 뜻한다. 탄소세와 같은 세금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탄소에 대한 세금은 세금의 증가가 아니라, 지구 온난화로 인한 다른 피해를 줄여 '세금의 이동으로 홍보되어야 한다. 눈 앞의 이익이 아니라, 취향이 아니라, 거시적 차원의 변화가 우리의 알수 없는 미래로 부터 우리를 구할 수 있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대통령도 정치권도 대중의 생각이, 삶이 변화하면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의견을 바꿀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적 계몽의 설득력있고 유효한 수단으로 <비포 더 플러드>의 의의는 크다. 



by meditator 2018. 5. 22. 02:36

아이의 중학교 졸업식이었다. 선생님은 졸업장을 나누어 주면서 반에서 성적이 중간쯤 되는 학생에게 말씀하셨다. '사실 네가 최고야, 성실했고,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착했고, 늘 궃은 학급의 일에 솔선수범했지. 세상에 너같은 사람이 많아져야 하는데', 그 선생님의 찬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기억에 남은 이유는 그 말이 가진 역설 때문이었다. 아들이 다니던 중학교에서 반에서 10등 정도를 하면 대학에 가기 힘들었다. 제 아무리 최선을 다했얻도 우리 사회에서 대학에도 갈 수 없는 정도의 성적을 낸 학생에게 '성실'하다 말하지 않는다. 또한 그 학생이 보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착함이라던가, 마다하지 않은 궃은 일에 대해 칭찬하지 않는다. 오지랖이라던가, 심지어 '손해보는 짓'이라고 말한다. 결과로 평가하고, 이득을 잘 챙겨야 좋은 사람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어떤 사람이 착한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건지, 그래서 우리들은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렇게 우리가 잊어버리고 산 '사람 사는 법'에 대해 <나의 아저씨>는 깨우쳐 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우리가 묻어 버리고 사는 어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기에 <나의 아저씨>는 이 시대 최고의 환타지일 수도 있다. 


아마도 이 '리뷰'는 객관적이지 않을 것이다. 가끔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에 대해 흠씬 마음이 가버려, 콩깍지가 씌워져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아름다워 보이듯, 그런 드라마가 있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에 내 마음이 너무 깊이 들어가 모든 것이 고와 보인다. 아마도 드라마가 표현한 '아저씨' 세대의 공감 때문에도 그렇다. 그러기에 이 리뷰는 리뷰라기보다는 <나의 아저씨>에 대한 감탄사 같은 것이다. 



스포츠카를 타고 떠난 여행 대신 할머니의 장례식
동생 기훈(송새벽 분)과 함께 청소 용역업을 하던 형 상훈(박호산 분)은 동생과 어머니 몰래 수익금의 일부를 장판 밑에 숨긴다. 22녀간 다니던 회사에서 받지 말아야 할 돈을 받아 챙기는 바람에 짤린 그 답게 뒷주머니를 차려는가 했는데, 그 뒷주머니의 소용처가 <나의 아저씨>답다. 동생 기훈이 질색을 하던 말던, 회사를 짤리고 사업을 두 번이나 말아먹고 신용불량자가 되어버린 이 아저씨는 맨날 자신의 삶에 대해 먹고 싸기만 했다며 한탄을 한다. 그런 그가 자신의 삶에 '먹고 싼' 것이 아닌 기억을 만들기로 했다. 바로 그 '다른 기억'을 위해 몰래, 아니 사실은 어머니도 알고, 동생도 알게 모아둔 돈, 그 돈을 상훈은 삼형제가 멋들어진 라이방을 쓰고 검은 슈트를 입고, 멋진 스포츠카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 상훈의 꿈을 보면서, 그랬다. 아,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은 저 삼형제의 폼나는(?) 여행이겠구나. 하지만 드라마는 그런 알량한 예측을 집어 던졌다. 물론 삼형제는 검은 라이방을 썼고, 검은 슈트를 입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스위트룸도, 빨간 스포츠카도 없었다. 그들이 입은 건 상복이었고, 그들은 함께 지안이(아이유 분) 할머니를 모시는 납골당행 버스에 올라탔다. 상주라고는 이지안 혼자인 쓸쓸한 상가를 본 상훈은 그 동안 자신이 모은 돈을 털어 상가를 풍성하게 만든다. 동생 동훈이 회사에 짤리게 되자, 너만은 회사에 남아 어머니 돌아가시면 상가를 흥청이게 만들어야 하는데 라며 탄식했던 그의 '로망'을 지안이 할머니 상에서 실현한 것이다. 즐비한 화한, 그가 불러들인 이웃들, 그리고 할 수 있는 모든 격식을 차린 젯상과 절차들.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추모도 잠시, 상훈은 행복해 했다. 

스포츠카를 타고 떠난 바닷가 스위트룸 호텔 여행과 할머니의 장례식, 이 전혀 다른 선택, 바로 여기에 <나의 아저씨>란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함축되어 있다. 박동훈은 그런 사람이었다.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존재감이 없던 사람. 그래서 회사에서도 자신이 해오던 설계팀에서 밀려 안전진단팀으로 갔지만 그곳에서도 묵묵히 솔선수범하며 자신의 일을 해오던 사람. 형제 중에 가운데, 늘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형과 동생 사이에서 내색하지 않고 집안의 궂은 일 뒤치닥거리를 해오던 사람. 청렴했던 그가 자신의 앞으로 잘못배달되어 온 돈 봉투 앞에서 어머니가 말한 형의 분식집 비용으로 흔들려야 했던 그런 사람. 그래서 야망도 열의도 없어 보여 변호사가 된 아내에게 밀쳐지게 되버린 남편.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공기처럼 꼭 있어야 될 사람이지만, 그 소중함이 당연하게 여겨져 뒤로 밀쳐졌던 사람, <나의 아저씨>는 그런 박동훈을 뜻하지 않게 얽혀진 회사 내 정치와 아내의 불륜이란 사건을 통해 세상 밖으로 길어 올린다. 



가장 불쌍한 두 사람이 만들어 내는 행복의 방식 
그렇게 보잘 것없이 하지만 당연하게 흐르던 박동훈의 삶에 빚어진 파열음, 본의 아니게 얽혀진 그 사건으로 인해 박동훈은 졸졸 시냇물처럼 흐르는 그의 삶, 그 바닥을 친다. 그리고 그 바닥에서 만난 이지안, 그의 말처럼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애라 생각했던 그 아이가, 박동훈을 불쌍하다고 하자, 그의 서러움이 봇물 터지듯 터져온다. 도저히 위로 받을 수 없는 대상에게서 받는 위로의 공감과 서러움이 두 사람을 세상 밖에 던져진 사람의 '연대'로 묶는다. 그리고 그 세상 밖으로 던져진 두 사람의 공감과 연대는 그들처럼 세상 살기 너무 힘들다고, 하지만 세상에서 누구 하나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 힘들었던 드라마를 보는 모든 이들을 위로한다. 

본의 아니게 박동훈 아내 강윤희(이지아 분)와 도준영(김영민 분)의 불륜을 알고, 도준영과 얽히게 된 이지안은 자신에게 잘해준 박동훈을 구하기 위해 이지안이 할 수 있는 불법적 방식을 통해 그를 돕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 이지안의 방식은 외려 삼안e&c의 사내 정치와 엇물려 박동훈을, 그리고 그녀를 위기에 빠뜨린다. 

드라마는 삼안 e&c의 사내 정치, 그런 사내 정치를 둘러싼 왕전무와 도준영의 갈등, 도준영과 박동훈 아내의 불륜, 그런 불미스러운 사건에 자의 반 타의반으로 엮인 이지안, 그리고 그런 이지안을 옭죄이는 이광일(장기용 분) 등 우리 사회의 모든 부도덕한 잡음들을 드라마의 한 궤로 하면서, 그런 부도덕한 사건들을 헤치고 나가는 이지안의 저돌적이면서 맹목적인 사랑과, 그런 이지안의 자기 희생적인 헌신을 보다듬으며 결국 그녀를 부도덕한 웅덩이에게 건져내며, 그 자신도 회생한 박동훈의 미련스럽게 우직한 행보를 대비시킨다. 

그리고 그런 박동훈의, 그리고 박동훈의 주변 사람들의 선택을 통해, 사람의, 어른됨의 자리를 되집는다. 이제는 무색해 졌지만, 마흔, 중년의 나이를 '미혹'이라 했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역설적으로 쉽게 혹해지는 시절, 혹은 요즘 세상은 '키덜트'라 하여,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어른답지 않아도 됨을 허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 어느덧 누군가를 아니, 무엇보다 나를 책임져야 하는 나이에 속절없이 도달한 이들은 '이익'과 '셈'이 앞서는 세상 속에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할 지 혼란스럽다. 



반갑게 웃으며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하여 
바로 여전히 나이만 들었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잘 모르겠는 어른들을 위해, <나의 아저씨>는 이 시대의 격언을 남긴다. 자신이 애써 모은 돈을 탈탈 털어 몇 번 보지도 않은 이지안의 장례식에 쏟아붓고는 한없이 행복해 하는 박상훈처럼, 세상 젤 불쌍하고 추운 아이를 알아버린 바람에 그 아이를 책임지고자 애쓴 박동훈처럼, 그리고 비록 실수는 했지만 도망치지 않고 책임지려 했던 박동훈의 아내 강윤희처럼, 그리고 20년의 애증을 도망치지 않고 답했던 겸덕(박해준 분)처럼, 그리고 기꺼이 '우리 사람'이라며 이지안을 반기고 함께 했던 후계동 사람들처럼. 드라마는 사람답게 행복해지는 방식에 대해 진득하게 천착하며 나름의 답을 명쾌하게 제시한다. 

아내보다, 형제가 먼저여서 늘 아내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한 것 같던 사람, 하지만 그는 정작 아내의 불륜을 혼자 끝까지 삼키며 가정을 지키려 했다. 늘 하루 일과가 끝나면 동네 친구들과 모여서 술 마시는게 낙인 세상 별 하잘 것 없어 보였던 상훈, 기훈, 그리고 후계동 사람들, 그들은 세상 외로운 이지안이 다시 태어나고 싶은 좋은 곳의 인연들이 되었다. 사람을 안다는 것, 그 '인연'의 무게를 '행복'으로 답한다. 살아가며 만났던 인연들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도 반갑게 인사하며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손을 마주잡을 수 있는, 그 만큼만의 삶이 어쩌면 우리가 이 생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복이 아닐까. <나의 아저씨>가 시작할 때 가장 한심했던 사람들이, 드라마의 마지막 좋은 인연이 되어 우리의 삶을 환기시킨다. 혹시 당신 주변에 당신이 하잘 것없다 했던 좋은 인연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요?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당신의 삶, 주변의 삶부터 잘 챙기세요라며. 

드라마는 끝났지만 여전히 후계동 사람들은 오늘 저녁도 정희네에 모여 술 한 잔을 걸치며 그렇게 훈훈하게 살아갈 것이다. 대표가 된 박동훈도, 가끔은 이지안도, 그리고 어쩌면 이젠 추억이 된 겸덕도, 그리고 드라마를 본 우리도, 최소한 드라마의 여운이 흐려지기 전에 박동훈처럼 사람답게 행복해지는 삶에 대해 고민하고, 좋은 인연에 애쓸 것이다. 

by meditator 2018. 5. 18. 18:22

결혼을 하자 시어머님이 말씀하셨다. 그저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젊은 나는 그런 시어머니의 말씀을 콧등으로 넘기며 '아이를 낳자마다 맡기고 제 일을 찾을 거예요', 하지만 정작 아이를 낳자, 난 시어머니의 말씀대로 아이를 키웠다. 아이를 믿고 맡길 만한 분이, 곳이 없을 뿐더러, '엄마가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그 '지상 명제'를 이겨낼 만큼 '내 일'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아이도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다 보니, 지금 여기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내가 그런 고민을 했던 시절에서 강산이 몇 번이나 변했다. 그런데, 그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하도록 여전히 '엄마'들의 고민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더 '가중'되었다. 그러니 '화'가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다. 5월 13일 방영된, <sbs 스페셜 - 앵그리 맘>의 이야기다.


맘고리즘에 갇힌 엄마들 
알고리즘이란 문제 해결을 위한 절차, 단계, 혹은 그를 위한 프로그램을 뜻한다. 그런데, 이 알고리즘의 변형어인 '맘고리즘'은 문제 해결을 커녕, 거기에 빠져 들어가면 헤어나올 길이 없다. 바로 이 땅의 '엄마'들 이야기다. 



다큐의 시작은 sbs 시사 교양국의 한 여성 피디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피디는 sbs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여성? 아니다, 시사 교양국의 여성? 역시 아니다. 이 여성 피디가 독보적인 이유는, 피디인 여성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독보적이 되었다. 세상에, '아이 낳기를 권하는 세상'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게 신기원이 되었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정시 퇴근은 남의 나라 이야기, 야근과 밤샘을 밥 먹듯이 하는 이른바 '언론계의 명예직'이라 일컬어 지는 여성 피디가 아이까지 낳은 건, 용감무쌍함을 넘어선 행동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이 여성 피디만이 아니다. 이 시대 여성들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 그 자체가 '이른바 '무식하면 용감해지는' 것이다. 흔히 아이를 가진 엄마들이 힘들다 하면, 이미 출산을 경험한 선배들의 따끔한 조언이 있다. 그래도 뱃속에 있을 때가 편한 거라고. 뒤로 자빠질 듯한 태산같은 배와, 퉁퉁 부은 다리로 변비에, 메스꺼움 등등으로 밤잠을 설쳐도, 그 시절이 편했다는 건 아이를 낳는 순간 모든 엄마들이 절감하기 시작한다. 직장을 가졌던 엄마들이 온전히 떠맡아 하는 독박 육아, 제 아무리 부부가 나누어 지고 싶어도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남편, 그 와중에 자신의 일을 위해서는 친정 어머니, 시어머니, 돌보미 등등을 전전하는 수난이 시작된다. 그렇다고 잠시 직장을 쉬고 아이를 키우면? 돌아갈 직장의 자리가 보장되지 않는다. 그저 새 생명이 오시는 경이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아기와의 전쟁, 하지만 자신의 일을 하던 엄마들은, 그 버거운 전쟁에 '업친 데 덥친 격'의 미래를 떠안게 된다. 



2018년 육아를 하는 엄마들의 힘겨운 일생은 위의 그림 한 장으로 설명된다. 한번 엄마는 영원한 엄마일 수 밖에 도망갈 수도, 도망쳐서도 안되는 '엄마'의 일생은 출산→육아→직장→부모에게 돌봄 위탁→퇴사→경력단절→자녀 결혼→손자 출산→황혼 육아… 끝나지 않는 육아와의 전쟁이 된다. 50여 명의 부모들과의 인터뷰는 아이가 태어나면서 부터 시작하여 고비고비마다 '엄마'란 이유만으로 '소모'되고, '탈진'되는, 그리고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일에서 '방출'되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 시대 엄마들이 '화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누적시킨다. 

126조원의 저출산 대책 비용은 어디로? 
엄마들은 반문한다. 정부는 지난 12년 동안 저출산 대책으로 126조원을 쏟아 부었는데, 도대체 그 '돈'이 어디로 갔느냐고. 도대체 저출산 대책으로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썼기에 '엄마'들은 여전히 '맘고리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어야 하냐고. 차라리 허경영이 말했듯이 출산 장려금으로 3000 만원씩이라도 나눠 받았다면 억울하지나 않지. 

그래서 다큐는 찾아봤다. 지난 12년간의 저출산 중앙 예산과 지자체 예산을 샅샅이 살펴봤다. 저출산과 관련된 '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들, 하지만 정작 그들은 '저출산' 법안의 실질적 내용이 무엇이야 하는지 조차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저출산 홍보라는 것이 지자체 기관장들의 자기 홍보 영상이기 십상이다. 또 저출산 취지의 홍보 가요제라는데, 차마 그 영상을 마저 보기 힘들 정도로 낯뜨거운 '아이를 낳자'는 단순한 슬로건 개사 수준이었다. 그래도 시늉이라도 하면 다행이랄까. 현장에서 '저출산 대책 비용'은 생일 맞이 직원 청장과의 간담회, 오카리나 교실, 흡연 음주 예방 사업, 템플 스테이 여가 문화 지원 사업, 말 그대로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갖다 붙이면 저출산 대책으로 '비용'을 잡아 먹었다. 지자체 직원은 솔직히 토로한다. 중앙에서는 '저출산' 관련 예산을 집행하라 하고, 지자체에서는 당장 시행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 적당하게 취지를 '활용'할 수 밖에 없었다고. 결국 그 126억이 지난 12년간 이런 식으로 '공중 분해'되었던 것이다.

엄마들이 나섰다, 정치하는 엄마들
그래서 엄마들이 나섰다. 더는 '엄마'를 위하는 척을 하는 정치를 믿을 수 없다며 '엄마들의 목소리'를 직접 실천에 옮기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 시작은 전직 국회의원 장하나 씨이다. 국회의원 시절 아이를 출산했던 장하나 씨는 아이를 낳고도 그 사실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없었더, 그래서 결국 국회의원 직을 사퇴했던 자신의 뼈아픈 경험을 일간지에 칼럼으로 실었다. 그리고 이 칼럼에 공감했던 엄마들이 모였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니 하나같이 모두 자신들과 다르지 않았던 것을 깨달은 엄마들은 이제 더는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이 사회에서 밀쳐지지 않겠다는 각오를 했다. 그리고 그 '각오'의 실천으로 비영리 단체인 '정치하는 엄마들'을 만들었다. 



엄마들이 정치를 한다고? 그게 무슨 의미일까? 그 가능성을 다큐는 뉴질랜드 국회에서 찾아보았다. 아이를 낳고 국회에서 당당하게 수유를 하고, 아이를 안고 국회 연단에 서는 엄마 국회의원 프라임, 그게 현 뉴질랜드 국회의 모습이다. 어디 그뿐인가. 최연소 여성 수상으로 당선된 재신더 아더는 기쁘게 임신 소식을 알렸고, 자신이 아이의 출산과 함께 6개월간의 출산 휴가를 가지게 될 것이라 공표했다. 뉴질랜드라고 첨부터 그랬겠는가. 하지만 저출산이 사회적 문제로 심각해지자 사회가 바뀐 것이다. 국회의장이 솔선수범하여 동료 의원의 아이를 안고 의장석에 앉았고, 아이를 가진 엄마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당당하게 아이와 함께 등원했다. 

결국 다큐가 말한다. 우리 사회 질기디 질긴 '맘고리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사회'가 나서야 한다고. 그리고 우리가 지난 촛불 정국에 다같이 입을 모아 말했듯이,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여성, 그리고 '엄마'들의 문제에도 마찬가지라고. 그래서 '당사자'인 엄마들이 나섰다. 우리가 스스로 '정치'를 바꾸겠다고. 


by meditator 2018. 5. 14. 15:39

무엇을 가지거나 하고자 간절하게 바람, '욕망'의 사전적 정의다. 그런데 이 '간절함'에 대해 사회와 역사는 늘 '양 극단'의 입장을 취해 왔다. 그 중 하나는 심리적 쾌락주의자인 '홉스(Thomas Hobbes)'의 주장으로, 모든 인간의 자발적인 행동은 자기 쾌락과 자기 보존의 목적을 지향하며, 인간의 심리적 동인은 '쾌락에의 욕망'이며, 그 대상이 곧 인간에게는 '선'이라 정의한다. 그러기엔 그런 인간의 욕망에 대한 긍정을 기초로 모든 사회적, 정치적 체제가 형성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주장한다. 그에 반해,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는 불교에서처럼 인간의 욕망은 '굴레(bondage)'로 보았다. 그러기에 인간의 행복은 이 굴레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 통제하여 '체제 내적' 혹은 '사회 내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욕망'은 이 두 가지 의견 중 어느 입장을 취하고 있을까?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의 욕망에 대해. 


공교롭게도 시기적으로는 순차가 있지만, 네 명의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욕망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드라마들이 있다. 바로, 5월 12일 시작한 sbs의 <시크릿 마더>와 이제 6회차에 접어든 <미스트리스>가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비록 연배는 조금 다르지만 30대, 40대 우리 시대를 사는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욕망'을 드라마적 갈등의 계기로 삼는다. 과연, 이들 드라마가 다루고 있는 '여성의 욕망'은 '홉스'적일까? 아니면 '스피노자' 적일까? 이들을 통해 우리 시대가 바라보고 있는 여성, 그리고 욕망은 또 어떤 것일까? 



엄마들의 욕망; <시크릿 마더> 
sbs 주말극으로 첫 선을 보인 <시크릿 마더>, 그 시작은 '강남', 그곳에서 '아이'의 교육을 통해 자신의 열정을 풀어가는 네 명의 엄마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42세의 전직 의사인 김윤진(송윤아 분), 40세 강혜경(서영희 분), 42세 명화숙(김재화 분), 36세 송지애(오연아 분)가 그들이다. 같은 명문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를 둔 '강남'엄마인 이들의 하루 스케줄을 아이를 따라 움직이며, 아이들의 보다 좋은 교육 정보와 그 실천이 이들 네 엄마 모임의 근간을 이룬다. 

이렇게 네 명의 열혈 교육 맘을 앞세운 <시크릿 마더>를 보고 있자면, 2013년 방영된 kbs드라마 스페셜 연작 시리즈 <그녀들의 완벽한 하루>(4부작)이 연상된다. 당시는 초등학교가 아닌 명문 유치원을 배경으로 모여든 역시나 네 명의 교육 맘들의 '욕망'에 집중했던 이 드라마는 하지만, 가장 '명문'이라는 이 '유치원'에 모여든 '명문'이지 않은 엄마들의 비밀이 폭로되며, 아이를 통해 계층 상승의 대리전을 치루는 여성들의 '욕망'을 낱낱이 해부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첫 회 연방으로 4부작을 방영한 드라마는 같은 그룹이지만 성적에서 늘 뒤처지는 아이를 위해, 솔선수범하던 엄마 김윤진이, 더 나은 성적을 위해 '입시 대리모'라는 신종 직종의 여성을 들이는 것에서 부터 시작하여, 이혼, 별거, 그리고 과거까지, 그럴듯한 강남 엄마의 속살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포문'을 연다. 남 보기엔 '현모양처'이지만, 그들 각자의 속내로 들어가면, 아이를 위해 직장까지 그만두었지만 딸을 잃어버린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전직 정신과 의사에서부터, 지방대 출신이라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위장 이혼까지 감행하고, 남들의 이목때문에 별거 중인 남편을 출퇴근시키는 등, 차마 말할 수 없는 비밀들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 '각자의 문제'를 '아이의 교육'을 통해 해소하고, 자신을 증명해 내고자 한다. 결국 그들 각자의 욕망이 또 다른 '문제'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30대 여성들의 욕망; <미스트리스> 
<시크릿 마더>가 40대 여성의 욕망을 '엄마'라는 사회적 존재를 통해 풀어가고자 한다면, 미드 원작이 있는 <미스트리스>는 여성 그 '욕망'을 보다 직접적으로 건드린다. 30대 중반, 그 연배의 여성은 '무엇을 욕망하는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듯이, 드라마는 '그녀들의 욕망'을 전면에 드러내는데 꺼리낌이 없다. 그리고 드라마는 마치 30대 여성의 '욕망'에 있어 '관건'이 '성'이라는 듯이, 그녀들의 '성', 혹은 남녀 관계를 통해 문제를 풀어가고자 한다. 극의 중심에 놓여 있는 건 한가인이 분한 장세연이지만, 정작 <미스트리스>란 드라마의 '농염한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건, 김은수(신현빈 분), 한정원(최희서 분), 도화영(구재이 분)의 성적 욕망이다. 

'성적 욕망'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미혹'에 빠진다는 점에서는 장세연도 그리 다르지 않다. 2년전 바다에서 실종된 남편, 그러나 뜬금없이 걸려온 남편으로 연상되는 전화, 그런 혼란스러운 가운데 아이의 유치원 학부형으로 한상훈(이희준 분)이 접근해 오며 그녀를 흔든다. 30대 그녀들이 흔들리는 건, 남편의 유무, 결혼의 유무와 관련이 없다. 아이를 낳기 위한 섹스에 골몰하는 한정원 부부의 관계는 외려, 이 시대의 결혼이라는게 얼마나 위태로운 관계인가를 방증할 뿐이다. 선생님과의 불륜에 빠졌던 김은수나, 결혼한 전남친과의 묘한 비지니스적 관계에 흘러들어가는 도화영이라고 다르지 않다. 결혼이란 제도의 안에 있건, 바깥에 있건 그녀들은 우리 사회를 공고하게 지탱하고 있는 이 제도와 얽혀들며 그녀들의 욕망을 복잡하게 만든다. 




<시크릿 마더>나, <미스트리스>를 통해 전면에 내세운 여성들의 욕망은 극의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 즉, 욕망은 그녀들로 하여금 위태로운 갈등으로 그녀들을 유도하는 '유인제'의 역할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드라마는 욕망을 다루지만, 즉 언뜻 보면 '욕망'에 대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듯하지만, 그로 인한 '갈등'에 천착하여 드라마를 이끌어 간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통제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욕망'을 대상으로 한다. 또한 40대 여성은 '모성'의 존재이며, 30 여성이 '결혼'이라는 제도와 피치 못하게 엮인다는 점에서 '당대'적인 한계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또한 '강남'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더하여, 엄마가 된 여성들의 '아이를 통한 대리 성취욕' 역시 긍정적이진 않다. 그렇다고 <미스트리스> 속 여성들의 사회적 성취 역시 불온하거나 불안하다. 

또한, 이들 드라마는 이런 그녀들의 '욕망'이 한편에서 그녀들을 '갈등'으로 이끌어가는 유도제로 작동하는 동시에, 또한 시청자들을 손쉽게 흡인시키는 '도구'로도 작동한다.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미스트리스>는 극 초반 끊임없어 남녀의 정사 장면을 내세우며 시청자들을 끌어들이고자 한다. 하지만, 그렇게 '눈요기' 혹은 '선정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미스트리스>가 1%에도 못미치는 시청률로 고전하고 있는 점은, 이 시대의 시청자들이 내용성없는 눈요기에 냉정하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며, '내용성'없는 욕망의 전시 역시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시크릿 마더>나, <미스트리스>가 말하고자 하는 건 '다른 이야기'이다. 강남 엄마들의 지칠줄 모르는 교육열을 내세운 <시크릿 마더>는 김윤진의 집에 들인 입시 대리모를 통해, 김윤진의 숨겨진 과거와 트라우마를 드러내며 '미스터리'한 장르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펼친다. 매회 이렇다할 내용보다 여주인공들의 '욕망'에 집중했던 <미스트리스>도 이제 6회에 들어서며 보험조사원이었던 한상훈의 실체가 드러나고, 김은수, 한정원, 도화영 역시 미스터리한 사건의 중심에 놓여지며 극의 전개가 본격화 되었다. 결국 드러난 욕망을 통해, 그 속에 숨겨진 그녀들의 진짜 사연, 혹은 진솔한 '욕망'에 접근하고자 한다. 과연 이 욕망이라는 '통과 의례'를 통해 우리 시대 3,40대 여주인공이 도달할 곳은 어딘지, 그들 통해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이 시대 여성들의 속내는 무엇인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by meditator 2018. 5. 13. 18:52

sbs에도 단막극이 있었구나 싶다.4월 30일과 5월 1일에 걸쳐 방영된 <엑시트>에 대한 첫 소감이다. 지난 주 종영한 <키스 먼저 할까요?>와 다음 주 첫 선을 보일 <기름진 멜로> 사이의 한 주, 그게 sbs 특집극에 허용된 시간이다. 4회 4.6%, 단막극치고는 나쁘지 않다고 해야 하나, 아님 단막극의 한계라고 해야 할까. 허긴 그래도 고전하고 있는 mbc의 주중 미니 시리즈에 비하면 선방했다고 봐야 할까? 하지만 조촐한 시청률과 달리, <엑시트>는 그간 드라마에서 다루지 않았던, 아니 다루기 버거웠던 '가상 현실'을 소재로 하여 sf 장르물이라는 신선한 시도를 선보였다. 




당신....행복해지고 싶나요? 
4부작, (일반 드라마 분량으로 하면 2부작)의 드라마 <엑시트>를 연 건, 희망, 행복 등의 단어는 찾아볼 수 없는 청년 사채 일수꾼 도강수(최태준 분)의 나날이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가져오라는 가족 사진을 그는 가져갈 수 없었다. 아버지(우현 분)의 폭력에 못견딘 어머니(남기애 분)가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때리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사라지자 대신 강수를 때렸다. 그에게는 그 시절 '폭력'의 흔적이 흉터로 남겨져 있다. 술로 나날을 보내던 아버지가 자식을 제대로 키웠을 리 만무했다. 결국 강수는 사채 일수꾼이 되어 황태복 사장(박호산 분)의 수하로 살아간다. 그의 마음을 설레이게 했던 선영(전수진 분)은 황사장의 애인, 도대체 그의 삶에서 '행복'의 기미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암울한 삶'을 살던 그의 눈 앞에 '당신....행복해지고 싶나요?' 전단지가 붙어있다. 그 전단지를 들고 찾아가니, 그곳은 '가상 현실'의 과학을 이용하여 '행복'한 삶을 제공해준다는 연구소이다. 그러나 애증인지, 연민이지 그에겐 폭력의 기억으로 남았지만, 여전히 그의 옆에 있는 아버지, 심지어 이제는 건강마저 좋지 않아 그의 짐이 되는 아버지가 행복으로 가는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아버지'를 생각해서 돌아온 집에서 그를 맞이하는 건 등돌린 채 그가 사온 '족발'마저 외면하는 아버지이다. 결국 다시 '행복'을 찾아 연구소로 향한 그, 그런데 뜻밖에도 이번에는 '행복해 지기 위한 3억을 요구한다. 결국 모든 것이 '돈'으로 회귀하느냐며 발길을 돌린다. 



그렇게 <엑시트>는 '가상 현실'을 통한 행복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 가장 최악의 수를 풀어놓는다. 주사위의 그 어느 수가 나와도 늘 '행복'이랑은 거리가 먼 도강수의 삶, 경제적으로도, 가족도, 심지어 사랑도 그 어느 것하나 그에게 '행복'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어찌 보면 현실의 삶 대신 '가상 현실의 행복'을 취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 그렇게 선택에 의한 가상 현실의 개연성을 부풀리던 드라마는 뜬금없이 그 '행복'을 위한 자금 '3억'이 등장하며 의아함을 심어준다. 그리고 그 '의아함'은 과연, 지금 이 진행되는 드라마가 '드라마 속 현실'인지, 아니면, 드라마 속 도강수의 가상 현실'인지 모호한 경계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그 모호한 경계는 황태복의 돈을 빼돌린 채 도망치던 강수를 황태복에게 쫓기다, '제발 죽어버려'란 강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골목길에서 튀어나온 차에 황태복이 치이며, 강수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 '가상 현실의 행복'이 실감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며 멋들어진 양복에 근사한 사무실, 그보다 더 널찍한 집,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선영과 친절한 아버지, 그리고 한 눈에 그를 알아보는 30년만에 만난 어머니가 그에게 '행복'이란 이런 것이다를 실감케 해준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건가? 
그 '행복'을 선물한 건 아버지였다.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강수는 사경을 헤매고 평생 행복이라고는 느껴보지도 못한 채 삶을 마감할 지도 모를 강수가 불쌍했던 아버지가 강수를 그 연구소의 실험 대상으로 부탁한 것이다. 그리고 약물에 의한 '행복 회로'를 돌리기 시작한 강수는 이적의 노래 처럼 '말하는 대로', 행복해지는 삶을 만끽하게 된다. 

하지만 가상 현실의 행복에는 딜레마가 있었다. 불행하기만 했던 삶, 그래서 비록 연구실 실험대 위에 누워 맛보는 가상의 행복이지만, 그 선택이 개연성이 있었던 강수의 '행복 회로', 하지만 그 '행복'의 부작용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목격한 아버지는 연구소를 찾아가 읍소한다. 자신의 아들이 이렇게 죽어서는 안된다고. 그런 아버지의 읍소에 연구소 직원은, 실험에서 나올 수 있는 여부는 결국 '강수의 의지'만이 가능한 것이라 외면당한다. 

하지만 정작 진짜 딜레마는 행복을 만끽하던 가상 현실 속에서 등장한다. 순간 순간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 시달리던 강수, 차츰 지금 자신이 느끼는 행복을 의심하게 된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자신을 쫓던 황태복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걸 상기해낸 강수는, 그의 말 한 마디에 만남과 이별에 순응하는 선영의 태도에 '행복한 상태'를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맛보는 이 '행복'이 '인스턴트'임을 자각하게 절망하게 되는데. 

약물을 강화해도 여전히 흔들리는 강수에게 우재희(배해선 분) 박사가 선택한 강수는 '행복'을 멈추는 것, '행복한 상태'에서 깨어난 강수를 기다리는 것 황태복과 그 수하들의 추격과 죽어가는 아버지, 그리고 자신 따위는 아랑곳없는 선영이다. 결국 남은 건 강수의 선택, '개똥밭'보다도 못한 암울한 현실인가, 그게 아니면 언제라도 너의 곁에서 행복하다는 가족들이 있는 가상 현실의 행복인가. 



드라마는 애원하는 가족들을 남긴 채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가상 현실의 EXIT'을 나와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그리워하는 아버지를 찾는 강수의 꽉 닫힌 결말로 마무리된다. '가상 현실'이라는 sf적 설정을 차용했지만, 외려 보다 근원적이며 원론적인 '행복'에의 질문에 도달한다. 즉, 흔히 '행복'이라 하면 경제적이든, 관계에서든 모든 것이 충족되고 만족된 상태라는 사람들의 고정 관념에 드라마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아프고 힘들 망정 지금까지 당신이 살아온 역사, 당신이 부등켜 안고 있는 그 질곡의 삶이 주는 찐득한 그 감정이 진짜 행복은 아닐까 라고. 하지만 드라마가 도달한 명쾌한 결론에 시청자의 손이 선뜻 들어질까? 각자가 헤매이고 있는 현실이 아득할테니 말이다. 외려 불안정한 가상 현실의 행복이 아쉽지 않을까. 

드라마 속 인스턴트 적인 가상 현실이 주는 행복의 맛은 흡사 얼마 전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 속 가상 현실 오아시스를 연상케 한다. 그곳에서도 슬럼가의 희망없는 청년들은 가상현실의 오아시스에 탐닉했다. 영화가 '가상 현실'을 매개로 청년들의 진취적인 도전에의 용기를 북돋았다면, <엑시트>는 부자 간의 인정이라는 우리네 정서에 천착하여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귀결된다. 영화 속 가상 현실이, 극복되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유용한 장치였다면 드라마 속 가상 현실은 '부정되어야 할' 문제적 장치이다. 성큼 다가온 '과학의 미래'에 대한 '온도 차'가 분명하다.  

by meditator 2018. 5. 2. 13:14

4년전 차가운 바다에 꽃같은 젊은 죽음들을 목도했을 때, 그래서 차가운 겨울 거리로 촛불을 들고 나섰을 때, 세상 사람들은 다짐했을 것이다. 다시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억울한 죽음이 없게 하겠다고, 그런데, 세상은 달라지고 있다는데 여전히 아이를 잃은 부모들의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지난 해 이대 목동 병원 신생아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4 명의 아이들, 잠시 세상은 떠들썩했고, 의료진 7명이 과실치사 혐의로 입건되었다. 그로부터 131일,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은 여전히 4년전 차가운 바다에 아이를 잃은 부모들과 같은 말을 한다. 아이들의 죽음이 억울하다고, 세상은 이 아이들의 죽음에 무책임하다고. 


“제가 태어나서 죽은 사람을 처음 봤는데 그게 저희 아들이었어요.

살기 위해 들어간 병원에서 죽어서 나온 게 말이 되냐고요.”

-고 조하빈 父母


당시 거의 동시에 죽음을 맞이한 4명의 신생아들을 수사한 경찰은 이들의 죽음이 시트로박터 프룬디균 감염에 의한 패혈증으로 결론내렸다. 질병 관리본부 역학 조사팀은 지질 영양제 1개를 7개로 나누어 담는 과정에서 균에 오염이 되었고, 그 책임을 물어 지난 3월 30일 주치의와 수간호사가 구속되었다. 구속의 이유는 변질이 쉬운 지질 영양제를 나누어 주사하는 '관행'을 묵인하고, 제대로 된 감염 교육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이었다. 



'분주'의 관행을 낳은 열악한 의료 현실?, 과연 그럴까? 
이대 목동 병원은 지난 2010년 국제 의료 기관 평가 인증(JCI) 병원이다. 이 국제적 인증 기준에 따라 '환아 1명당 1병씩'이라는 지침 기준까지 변화시켰다. 그런데 현실은 한 병의 주사제를 여러 환아들에게 나누어 주사하는 이른바 '분주'가 관행적으로 이루어져 왔었다. 

“선한 의도가 가중된 의료인에 대해서 나쁜 결과만 가지고 

의사들을 중범죄자, 살인자 취급을 하게 된다면 

우리 의사들은 중환자 치료에서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최대집 / 대한의사협회 회장 당선인



이 관행에 의거한 의료 행위를 두고 '구속'이라는 강수를 둔 검, 경에 대해 대한 의사 협회 등의 의사들은 광화문에서 집회를 하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이들은 목동 병원 사태의 원인을 다르게 해석한다. 현행 건강 의료 보험 제도가 가진 구조적인 문제, 즉 낮은 의료 수가와 시스템이 목동 병원 사태와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즉 낮은 의료 수가와 열악한 의료 시스템이 낳은 구조적인 문제에 의료진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 협회의 주장이다. 또한 '분주' 과정에서 주사기나, 줄, 그 어떤 곳에서도 세균 감염의 가능성이 있기에, 주사제만을 놓고 세균 감염에 책임을 물 수 없다는 것이 의료진 측의 주장이다. 심지어 극단적으로 부담스런 미숙아를 치료하지 않겠다는 '몽니'조차 등장한다. 

과연 그럴까? 목동 신생아 사망이 과연 낮은 의료 수가로 인한 열악한 의료 시스템이 빚어낸 관행만의 문제일까? 그러나 유족들은 항변한다. 아이들의 죽음은 그저 '관행'의 결과가 아니라고. 그 진실에 4월 25일 <추적 60분>이 다가가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다큐가 조사한 건 방대한 의무 기록과 공개된 적이 없는 질병 관리 본부의 역학 조사서이다.  



여전히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관행과, 그 관행에 협잡하는 사회 
그런데, 다큐가 진실을 알아가기 위한 과정은 '험난'했다. 이른바 '우리'로 똘똘 뭉쳐진 '의료계'는 다큐가 조사하는 그날의 진실에 대해 한결같이 입을 다물었다. 마치 '내부고발자'라도 되는 양, 제작진을 피하는 동료 의사들, 유족과 죽은 신생아들 대신, 의료진의 입장에서만 구구절절 항변하는 병원이나 피해 의사 변호인을 비롯한 관계자들. 의사들의 증언을 참조할 수 없었던 제작진이 어렵사리 얻은 도움은 '의사'가 아니라, '의사' 출신의 의료계 소송을 전담하는 변호사였다. 

비록 전직 '의사'였지만 변호사는 의료 기록과 역학 조사서를 보고 한 눈에 당시의 상황이 '관행'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짚는다. 그리고 그런 변호사의 의심에 유족들의 증언이 더해진다. 당시 신생아에게서 심박수 증가 등의 이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사망에 이르기 5시간 전, 유족은 아이의 이상에 대해 의료진에 문의했지만, 신생아실에서 돌아온 답은 '면회 시간'이 끝났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사 출신의 변호사는 이미 당시의 신생아 상태가 '코드 블루'의 위급 상황이었으며, 그 상황에 의료진이 조금 더 신속하게 대처했더라면 어쩌면 아이들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조심스런 예측을 내놓는다. 

“로타 바이러스가 어떻게 보면 경고였을 수도 있죠. 

 감염관리가 엄청나게 지금 문제가 있다라는 걸 보여주는 징표잖아요.

그런데 그 기회를 또 무시를 한 거예요”

-사망한 신생아 부모


그렇다면 심박수 증가 등의 이상 증상이 나타난 그 시간으로 부터 5시간 여 '신생아 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가? 과연 아이들은 적절한 의료적 조치를 받았던 것일까? 이에 대해 다큐는 의문을 제기한다. 당시 신생아실 전담 의료진은 10여 명이 넘었지만, 무단으로 자리를 이탈한 의료진이 있는 가운데, 불과 다섯 명 정도의 의사, 그것도 전공의 1년차와 3년차의 의사들이 몇 십 명의 신생아들을 돌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부모들은 첫 면회시 자신들이 의료진의 말에 따라 병실을 나오지 않고, 윽박질러서라도 의료진을 닥달했더라면 아이들의 목숨을 살리지 않았을까 뒤늦은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문제는 오히려 당시의 상황 이전에 있었다. 아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건 지질 영양제의 분주라는 관행이었지만, 정작 주목해야 할 건, 미숙아들에게 지질 영양제를 주입해야 하는 그 '상황'이라고 다큐는 지적한다. 그리고 거기서 등장하는 건, 영유아 장염의 원인인 '로타 바이러스'이다. 대부분 경미한 증상에 그치지만 면역력이 떨어지는 신생아나, 미숙아들에게 치명적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로타 바이러스, 그런데 당시 신생아들 아기들 16명 중 13명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쌍둥이 중 한 명을 잃은 부모는 뒤늦게 자신의 아이가 '로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것을 다른 병원에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로타 바이러스로 인해 장염에 걸린 아이들이 설사로 인해 영양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을 때 공급되는 것이 지질 영양제이다. 목동 이대 병원 신생아 사망 사건을 두고, 일각에서는 '퍼펙트 사건'이라 한다고 한다. 즉, 더러운 가운, 치킨 등을 신생아실에서 시켜먹는 감염에 무지한 환경, 의료 수가를 핑계로 하나의 주사제를 나누어 공급하는 '분주'의 관행, 그리고 지질 영양제와 같은 변질되기 쉬운 주사제를 상온에 오랜 시간 방치해 두는 불철저한 의료 행위, 그리고 현장에서 이탈한 의료진과 부족한 일손으로 인한 코드 블루 상황에 대한 적절하지 못한 대처', 이 모든 것들이 아귀처럼 맞물려 4명의 신생아들에게 죽음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귀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원인을 초래한 당사자들은, 의사도, 간호사도, 병원도, 의료계도 그 누구도 이 사건에 대해, 법적인 건 물론, 도덕적인 책임조차 지려 하지 않는다. 이 사건만이 아니라 엑스레이 사진이 바뀌는 등 문제가 빈번했던 여전히 이대 목동 병원은 4년의 기한이 정해진 국제 의료 기관 평가 인증 병원이다. 의사는 책임 대신, 변호사를 통해 법적 책임을 피해갈 궁리만 한다. 의료계는 어떻게 우리 의사를! 이란 '특권'적 사고 방식에 사로 잡혀, 관행만을 핑계댄다. 아이들이 4 명이나 죽었지만,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단다. 심지어, 미숙아들은 잘 죽는다고, 세월호 부모들처럼 아이들 시체 장사를 한다고 '협잡'한다. 부모들은 말한다. 

“의사들이 정말 최선을 다했지만 죽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러면 의사들한테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죠. ‘최선을 다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의료 사고가 일어났을 때 유가족들은

그 원인에 대해서 찾아갈 수 있는 통로 자체가 없다는 거예요”

-사망한 신생아 부모


최선을 다했다면, 아이들이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러지는 않는다고. 오히려 '애쓰셨습니다. 고맙습니다' 했을 거라고. 하지만, 여전히 특권은 기세 등등하고, 책임은 멀다. 지각있는 의료계 인사들은 안타까워한다. '관행'이라는 편의를 제쳐두고, 우리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이대 목동 병원 사태의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또 다시 이와 같은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by meditator 2018. 4. 26. 16:09

우리 사회에서 '어른들의 사랑'이라 하면 어떤 것들이 떠오를까? 이른바 '막장'이란 단어로 축약되는 바람, 불륜, 복수 등등으로 이어지는 '치정'같은 것들이 아닐까. 그래서 '어른'들이 주요 시청층인 아침, 주말 드라마에는 이런 요소들이 들어가야 흥행이 이루어진다는 '선입견'이 작용하고, 대부분의 드라마들은 이 '공식'에 충실히 따라 시청률을 견인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어쩌면 우리 사회 '속물 어른'들에 대한 '편견'을 축적시키는데 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런 '편견', 혹은 '선입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4월 24일 종영한 <키스 먼저 할까요>이다. 선정적(?)인 제목과 달리 드라마는 '어른됨'의 '사랑'을 논한다. 그리고 '어른'이라도 , 아니 '어른'이라서 '성숙'되고 더 '아름다운' 사랑으로 마무리된다. 물론, 그래서일까 양파의 껍질을 벗기듯, '어른'의 '멜로'에 천착했던 드라마는 주중 1위의 독주를 안타깝게도 동시간대 1위를 타방송사에 내어주며 한 자리 수의 약소한 성취로 종영되었다. 하지만 시청률로만 다 평가할 수 없는 사랑의 '여운'은 <키스 먼저 할까요>을 이 봄, 오랜 여운이 남는 드라마로 이 드라마를 기억되게 할 것이다. 

'연민'인 줄 알았는데,
물론 <키스 먼저 할까요>의 시작도 '바람'인 듯 했다. 빌라의 아래 윗집에 사는 두 남녀, 손무한(감우성 분)과 안순진(김선아 분). 소개팅의 악연으로 시작하여, 고독사 해프닝으로 엮어진 이 남녀, 그런데 에필로그를 통해 이들의 오랜 인연, 그 사연이 풀어진다. 비행기 승무원이었던 안순진과 승객이었던 손무한은 기상 악화로 비행 난조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공감대로 만나지는 듯했다. 바람난 아내 때문에 가족과 이별을 하고 돌아오는 손무한과, 남편의 바람으로 역시나 상처를 입은 듯한 안순진은, 안순진의 자살 시도로 기억할 수 밖에 없는, 그리고 잊고 싶은 '인연의 실타래'로 엮이게 된 듯했다. 



하지만, 그 여느 '막장'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이들의 사연은 회를 거듭하면서 전혀 다른 각도의 이야기로 펼쳐진다. 그리고 그 '다른 각도의 이야기'에는 배유미 작가가 언제나 그래왔듯, 사회적인 해원이 가로놓여 있다. 배유미 작가는 그랬다. 2013년작 <스캔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에서도, 2015년 <애인있어요> 등에서도 결국 얽히고 섥힌 인간 관계, 남녀 관계, 그 궁극에 부도덕한 구악의 연원을 놓이게 했다. 하지만, 늘상 그랬듯이 배유미 작가는, 그 '악'을 궁극의 모순으로 자리하게 하지만, 그것에 천착하지 않는다. 그 '연원'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 '해결'에는 복잡한 인간사가 얽혀져, '인간'의 문제로 '치환'시켜내왔다. 

가해자와 피해자, 하지만 그들은 살아오는 과정 속에서 그 '관계'가 모호해지며, 그 '연원'의 해법을 복잡하게 하고, '인간적 딜레마'에 빠지도록 만든다. 마치 작가는 '인간사'가 그리 무 자르듯, 혹은 두부 썰듯 단호하게, 분명하게 설명될 수 없는 '복잡계'라고 늘 항변해 왔던 듯하다. 몇 차원의 함수보다도 복잡하고, 난해한 이 '얽힌 인연'의 '업보', 그래서 배유미 작가의 작품은 때론 '난해하고, '난감하며, 그 실타래를 풀다, 시청자들이 머리에 쥐가 날 정도의 딜레마에 빠지도록 만든다. 

<키스 먼저 할까요> 역시 다르지 않았다. 배우자에 대한 배신에서, 살고자 하는 욕구를 잃은 공감대에 대한 '연민'인 줄 알았던 사랑은, 손무한의 무조건적인 호혜, 그리고 그런 호혜를 오갈 데 없는 신세의 가장 적절한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안순진의 욕망이 화답하며, 대뜸 키스 먼저 하고 동거의 수순을 밟으며 위태로운 동상이몽의 멜로로 전개되는 듯했다. 

서로를 책임지는 '어른'들의 사랑 
하지만, 그 '멜로'의 색채는 드라마의 중반부에 들어서며 색채가 변하기 시작한다. 그저 자기 처럼 불쌍하고 안됐어서 안순진을 거둔 것인 줄 알았던 손무한의 '베품'은 알고보니, 시한부라는 설정이 등장하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안순진으로 하여금 생명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던, 그녀가 빚을 져서라도 포기할 수 없었던 딸 아이의 '의문사'가 있었다. 무책임했던 대기업의 분말로 된 어린이 식품, 바로 그 '돈'에 눈이 멀어 이미 외국에서는 판매가 금지된 제품의 유일한 희생자가 안순진의 딸이었으며, 그 대기업의 편에 서서, 아이들의 눈을 현혹시킨 광고를 만든 담당자가 바로 손무한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손무한의 사연이 밝혀지는 순간, 무조건적이며 이타적인 듯했던 손무한의 '사랑'은 결국 죽어가는 자의 속죄 의식으로 변모된다. 그리고 그 '속죄'의 내막을 안순진이 알게 되면서, '사랑'은 급격하게 '애증'으로 변해진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심지어 그 과정에서 지친 남편마저 외면했던 재판에 여전히 매달리는 안순진이, 바로 그 '공범'이었던 사람을 이미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 '딜레마'는 이미 그들의 '멜로'에 감정 이입했던 시청자들조차 당혹스럽게 만든다. 

따지고 보면 손무한이 무에 그리 죄될 게 있을까 싶기도 하다. 물건을 만든 당사자로 10 여년을 뻐튕기는 시간에, 겨우 아무 것도 모른 채 광고를 만들었다는 이유 만으로. 하지만, 작가는 바로 그런 손무한의 '좌절'을 통해, '도덕'의 범위를 묻는다. 그리고 기업만이 아니라, 그들의 공범자로 인해, 10 여년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안순진'과 같은 사람들은 지울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강변한다. 

그리고 손무한의 '속죄'로 시작된 사랑은 결국 '책임'을 상징한다. 내가 당사자가 아니니가 아니라, 나 역시도 떳떳하지 않았다는 손무한의 책임 의식은, 그 개인이 아니라,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 그 시대를 살아온 어른들 그 누구에게라도 해당되는 말이라고, 우리 모두가 지금의 사회를 만들어 낸 '공범'이라 작가는 손무한을 통해 말하고자 한다. 결국 동시대적 책임론이다. 

하지만 '인간사' 자로 잰듯, 혹은 더하기 빼기로만 이루어 지지 않으니, '사랑'해서는 안되고, '속죄'만 해야 하는 대상을 손무한은 사랑하게 되었고, 증오해야 하는 대상에 이미 안순진은 너무 의지를 하고 말았다. 이런 얽힌 관계를 드라마는 '젖는다'로 표현한다. 10년 전 딸의 무덤에서 통곡하던 안순진, 그리고 다시 6년전 아무도 없는 동물원에서 하염없이 울다 자신의 손목을 그은 안순진, 그리고 다시 6년의 세월이 흘러서도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안순진이, 포기할 수 없었던 안순진이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손무한에 젖어들어 그를 변화시켰다고. 



결국 시작은 포기할수 없었던 모성 안순진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이제 그만하라고, 잊으라고 하는 딸의 죽음을 포기할 수 없었던 안순진은 10여젼이 세월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아, 길거리에 나앉게 생기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사랑'은 손무한을 변화시켰고, 결국 그녀의 '해원'을 풀 동지를 얻게 했다. 

<키스 먼저 할까요>가 말하고자 하는 이 시대 '어른들의 사랑'은 '책임'이다. 어른들은 '키스'도 하고, '포옹'도 하고, '잠도 자는 어른들의 사랑을 한다. 하지만 육체적인 사랑만이 아니라, 그들은 '어른'이기에 자신들의 삶을, 그리고 자신과 함께 하는 이의 삶을 책임지고자 한다. 죽음 앞에 선 손무한이 그랬고, 애증의 고비를 넘은 안순진이 그랬다. 안순진으로 부터 비롯되어 변화한 손무한이, 인간적으로 안순진을 '사랑'의 관계로 거두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는 간접적이었더라도 그가 저지른 '사회적 범죄'의 책임을 다하고자 했다. 안순진도 마찬가지다. 증오해야 할 대상을 사랑해 버렸다는 자괴감에서 흔들렸던 그녀는 기꺼이 '적과의 동침'을 수용한다. 그리고, 지금 그녀 앞에 속죄하는 손무한을 변화시켰듯, 삶의 끈을 놓아버린 그를 자기 밖에 모르는 '은둔형 도토리'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참사람'으로 거듭나게 한다. 그저 시한부 앞에서 육체의 삶을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더 살더라도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든다.

그렇게 <키스 먼저 할까요>는 사적인 의도로 시작하여, 애증의 고비를 넘어, 용서와 화해, 그리고 책임의 용광로가 된 성숙한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에 도달한다. '어른'이 '어른답지' 못해 욕을 먹는 세상에서 에돌아 배유미 작가는 '어른됨'을 설파한다. 32부작, 시끌벅적한 사건 대신, 때론 난해하고, 곡해하기 어려웠던 두 남녀의 애증과 사랑을 그 눈빛만으로도 설득이 되는 감우성과 여전히 헌신적인 김선아라는 배우의 연기로 설득해 낸다.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만큼이나 운치있었던 연출과, 그 연출을 한껏 감성적으로 풀어낸 ost가 오랜 여운이 남는 어른들의 멜로를 완성한다. 모처럼 '어른스러운' 드라마였다.  

by meditator 2018. 4. 25. 05:36

매주 월요일, 제 자리로 돌아온 mbc스페셜은 세월호 4주기를 맞이하여 두 편의 특집을 마련하였다. 그 중 하나가 지난 월요일 방영한 끝나지 않은 세월호 학부모들의 이야기 <너를 보내고- 세월호 합창단의 노래>였다. 그리고 4월 23일, 아직 끝나지 않은 세월호 현장의 이야기를 또 한 편 다룬다. 바로 그 바다의 목숨을 건 목격자였던 세월호 잠수사들의 이야기, <로그북 세월호 잠수사들의 일기>이다. 


시간이 어찌 흘러가는지 밥을 먹어야 하는 건지 아니 먹어도 되는 건지 잠을 자도 되는 건지 모를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무조건 시신을, 아니 생사를 확인해야 했다. -잠수사일기중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사람들이 건물을 빠져나오기 위해 서둘러 아래로 내려가는 가운데 거슬러 건물을 올라가는 소방관의 모습이 담긴. 지난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세계 무역 센터(wtc) 건물에 비행기로 추정되는 두 대의 검은 물체가 곧장 날아와 부딪쳤다. 건물은 연달아 폭발했고, 무너져내렸다. 이 사건으로 납치된 여행기 승객과 건물에 있던 사람들 등 3500여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가운데에는 구조 활동 중에 순직한 343 명의 소방관과 23명의 경찰이 있었다. 1차 폭격이 있은 이후 발빠르게 불을 끄기 위해 1번 빌딩에 들어간, 그리고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2번 빌딩에 들어간 건물이 붕괴된다는 무전조차 제대로 받지 못해 소방관들의 피해는 더욱 커졌다고 한다. 하지만 국가 재난 사고에서 발빠르게 움직인 '공권력'으로 인해 미국 국민들은 '국가는 위기에서 절대 국민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확인했다. 

70일간의 로그북, 헌신의 시간 
재난의 현장에 제일 먼저 간 '공권력', 우리는 어땠을까? 4년 전 그날 바다에서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발빠르게 뛰어든 건 민간 잠수사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불성설'이다. 국가 재난의 현장에, 무기력했거나, 사건을 은폐하려는 공권력과, 사람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릎썼던 민간인들, '세월호'를 통해 국민들이 던진 질문, '이게 국가냐'라는 걸 현장에서 증명해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증명'의 기록은 지난 4년의 시간 동안 희미해졌다. 그들은 '논란'의 주인공이 되어 조용히 사라졌다. 

mbc스페셜은 그 '사라진 기억'을, 하지만 끝나지 않은 '기억'의 봉인을 푼다. 잠수사들이 잠수를 하고 나서 남긴 기록, 잠수일지. 일명 로그북, 잠수했던 날짜, 장소, 시간, 입수지점, 수심, 기온, 특기 사항을 적은 이 기록들, 하지만 잠수사들은 차마 그 기록들을 공개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다큐는 70여 일간 잠수사들의 로그북을 기초로 하여, 세월호 현장, 가장 처절한 목격자였던 잠수사들의 이야기를 복원한다. 

다섯 구의 시신을 인도하고 올라오니 감독관 “사람이 더 있드나” “더 확인해봐야 알겠습니다.” 수고했고 실종자 가족이 물속에 상황을 듣고 싶어 하니 가서 얘기해 줘라.” 저 편에 열 명쯤 되어 보이는 실종자 가족이 보인다. 그들에게 다가간다. 그들의 충혈 된 애타는 눈빛을 보니 내 눈시울도 젖어온다.
어찌 얘기를 해야 될는지 - 잠수사의 일기 중

2014년 4월 세월호 전원 구조가 오보라는 소식을 듣고 전광근씨는 장비를 챙겨 참사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미 천안함 인양에 참가했던 경험이 있던 그는 현장에서의 잠수가 용이치 않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 아이들의 아버지 황병주 씨, 해병대 출신의 한재명씨, 대학때부터 취미로 다이빙을 배운 백인탁 씨등 그저 자신의 '잠수 경험'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만으로 다수의 잠수사들이 현장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현장은 '구조'라고 말하기도 무색하게 체계도, 장비도 갖추어 지지 않은 상태였다. 많은 잠수사들이 '의욕'만 가진 채 서성이다 발길을 돌렸다. 사고 초기 잠수를 할 수 있었던 잠수사는 10명 정도 밖에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민간 잠수사들이 중심이 되어 유족들과 함께 수색 작업이 체계를 만들며 수색에 돌입하고. 잠수라는 작업은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위태로운 과정이다. 그래서 산업 현장 등에서 잠수사들은 하루 한번 잠수를 한다. 잠수를 하는 과정도 서서히 수압을 조절하며 내려갔다 조심스레 올라와 감압 탱크에 재빠르게 들어가야 하는 섬세한 과정이다. 그렇지 않으면 '잠수병'에 걸려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오늘 수습한 희생자의 얼굴과 눈동자, 차디찬 하얀 손과 발들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환영으로 비추어진다. " - 2014. 04. 26 잠수사 로그북 중

하지만 세월호 현장에서는 이 '원칙'을 지킬 수가 없었다. 참혹하게 뒤엉켜 있는 희생자들, 그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유족들, 그 현장의 목격자가 된 잠수부들은 하루 한번이라는 원칙이 무색하게 4번까지의 잠수를 감행했고, 수색이 어려운 세월호에서 하나의 시신이라도 더 올려오기 위해 보조 장치도 포기한 채 무리한 잠수를 감행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잠수부들의 열의와 헌신에 대해 세상의 평가는 냉정했다. 초기와 달리 점차 성과가 줄어들 수 밖에 없는 현장에 대해 불만이 터져 나왔고, 잠수부들의 헌신을 '돈'으로 비아냥거리는 시선마저 등장했다. 장기화된 수색,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료 잠수부가 사고로 목숨을 잃고, 7월 10일 미수습자 11명을 남겨놓은 가운데, 해경은 잠수부와 한 마디 의논도 없이 이들의 철수를 결정했다. 

여전히 그 '바다'에 잠겨있는 잠수부들 
그렇게 세월호 수색에 참가했던 민간 잠수부들은 '불명예'스럽게 세월호 현장에서 나왔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 유족들만이 아니라, 그들 역시 여전히 그 '바다'에 있다. 차마 부모들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세월호 현장, 그 현장에서 오로지 한 명의 시신이라도 더 가족 품으로 보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위험을 무릎쓰고 바다로 뛰어들었던 잠수부들, 하지만 그 '무리했던' 여정이 그 이후 그들에게 고스란히 고통으로 돌아왔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잠수사 일기 중

눈만 감으면 다시 그 바다에 있다고 했다. 차라리 눈 앞에 아이들이 보이면 괜찮다고 했다. 처음엔 아이들의 형체로, 그 다음에 '시신'의 냄새로 더듬어 수색을 했어야 했던 그 경험은, 이제 그들에게 암흑 속 막연한 공포의 기억으로 남았다. 불안 장애, 우울증, 수면 장애, 심지어 자살 충도에 시달리며, '세월호 이전의 나'를 잃어갔다. 누군가는 잠수사 일을 그만두었고, 늘상 화를 내는 등 성격이 변해 가족들을 걱정시킨다. 무리한 잠수로 신장병이 악화되어 투석을 하게 되었고, 세상의 차가운 시선에 '한국이 싫어' 외국을 전전하기도 한다. 결국 잠수사들 중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을 만난 정혜신 박사는 이들이 겪는 고통을 '죽음 각인'이라는 병명으로 답한다. 죽음이 일상화된 현장 속에 놓여졌던 이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그 경계 너머로 자신을 이끌게 된다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를 만나 그 말에 비로소 눈물을 터트리는 이들, 그들의 '트라우마'는 깊었다. 그리고 다큐가 말하고자 하는 건, 바로 국가 재난 사태에 '의인'으로 참가한 이들에 대한 '국가'의 부채이다. 

9.11 테러로 순직한 소방관들은 'FNDY 343 NEVER FORGET'이란 문구로 새겨져 기억된다. 2005년부터는 소방관을 비롯한 일반인들이 이들이 올라갔던 쌍둥이 빌딩과 같은 110층 높이의 계단을 오르는 행사를 하며 '추모'의 정신을 이어간다. 우리는 어떨까? 그날, 그 바다에서 '국가'를 대신했던 민간 잠수사들. 민주당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민간 잠수사들을 '세월호 희생자 특별법'의 대상자에 포함시킨다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국회에 발의했다. 하지만 한국당 의원들의 반대로 아직도 국회 계류 중이다. 세월호 4주기, 국가의 재난 현장에 발빠르게 달려왔던 잠수사는 말한다.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아마도 그곳에 가지 않을 거라고. 국가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놓은 이들 민간 잠수사들에게 '국가'가 답해야 할 차례라고 다큐는 말한다. 
by meditator 2018. 4. 24. 1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