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우리의 현대사를 규정한 건 '전쟁'이었다. 같은 민족이 서로 적이 되어 죽이고도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은 우리 현대사의 생존 방식에 진한 자국을 남겼다. 그렇다면, 2018년 현재는 어떨까? 전국민이 금을 모아 2001년 예정보다 3년을 앞당겨 조기 졸업했다는 IMF, 그 '경제적 사건'은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사람들을 삶의 전쟁터로 몰아넣고 있다. 2018년 새해를 맞이하여 EBS가 특집으로 마련한 <인터뷰 대한민국>, 그 포문을 연 건 바로 1998년 IMF 생이다. (1월 20일 방영)




열받아서 오락실에 들어갔어
어머 이게 누구야 저 대머리 아저씨 
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아빠 
오늘의 뉴스 대낮부턴 오락실엔 
이시대의 아빠들이 많다는데 
혀끝을 쯧쯧 내차시는 엄마와 
내 눈치를 살피는 우리아빠 
늦은 밤중에 아빠의 한숨소리 
가슴이 아파 무거운 아빠의 얼굴 
                           - 최준영 작사,곡, 한스밴드, 오락실 중

굳이 사전적 의미를 덧붙이지 않아도 이제 우리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단어, '구조 조정'과 '정리 해고', 그 두 단어가 우리 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한 건 IMF 이후이다. 97년 1월부터 대기업 부도 사태로 시작된 외환 위기, 97년 11월 IMF에 지원을 요청한 우리 정부는 IMF의 정책에 따라 부실 기업 퇴출 및 은행 구조 조정 전면화를 시작하였다. 덕분에 국제 통화기금 차입금을 전액 상환하고 예정보다 빨리 IMF 체제를 조기 졸업했다지만, 그 과정에서 1997년에서 98년까지 문 닫은 기업만 4만개, 1999년 8월 기준 실업자 136만 4000 명, 6.25의 상흔을 고스란히 겪어낸 선인들 못지않은 생존의 고통을 21세기의 대한민국은 겪었다. 아니 겪고 있다. 

외환 위기 당시 IMF가 한국 등 아시아 국가에 일방적인 룰을 적용하고, 초긴축 정책을 취해 국민들이 필요보다 더 많은 고통을 받았다. 
                                  - 2010, 7, 스트로스 칸 당시 IMF 총재 

I'm Fired 나는 해고되었다
대전에 사는 63세의 정진철 씨 그가 페인트 일을 한 지도 어언 11년이 되었다. IMF 당시만 해도 충청도에서 가장 잘 나갔던 은행 충청 은행의 지점장이었던 그는 1998년 6월 1차 은행 퇴출 결과로 하루 아침에 실직자가 되었다. IMF 기간 중 유독 퇴출과 합병 등으로 '정리 해고'가 심했던 은행 구조 조정의 희생 당사자였다. 무너진 평생 직장의 꿈, 누군가는 이혼하고, 누군가는 자살하고, 20년이 지난 그 시절을 사람들은 애써 덮으려 한다. 살아남은 정진철 씨에게 닥친 IMF는 그 개인의 일이 아니었다. 장남 하나만 잘 되면 한 집안이 일어난다던 시절, 쫓겨난 장남에 충격받으신 어머님은 결국 쓰러지셨다. 사업도 해보고, 놀기도 하다, 겨우 지인의 소개로 페인트점에서 일한 지 십 여년 여전히 그의 품안엔 예전 신분증이 남아있다. 



98년 IMF 생들의 현재는?
그렇게 '구조 조정'과 '정리 해고'를 겪으며 거리로 몰린 아버지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자란 98년 생들, 2002년 올림픽 때는 5살, 2009년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신종 플루로 학교를 못가기도 했고, 2014년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세월호를 겪었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이 청년들의 현실은, 바로 역사 저편의 단어로 아스라이 사라지고 있는 IMF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늘엔 별이 참 많이 있구요, 난 그 별에서 제일 가깝게 살고요, 
햇살이 좋아 빨래도 잘 말라요, 그곳에서 난 꿈꾸네 
                                               - 장미 여관, 옥탑방 중


포항에서 상경해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채현진은 옥탑방에 산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운, 방음 제로의 자취방, 야경이 이쁘고, 다리가 튼튼해 진다는 500에 35, 그곳에 살기 위해 방학에도 귀향을 하지 않고, 무서운 밤길을 견디며 알바를 한다. 

'어디나 불편함은 있는 거잖아요. 서울에 방 한 칸 있다는 사실로도 만족해요,'

기숙사 신청은 어렵고, 기숙사 신축을 놓고 주민과 갈등하는 현실, 500, 1000, 3000, 보증금에 따라 달라지는 삶의 질, 같은 학교를 다니지만 누군가는 학교 주변을 몇 십 바퀴 돌아 500만원짜리를 겨우 얻는가 하면, 누군가는 부모님 돈으로 쉽게 학교 앞의 안락한 공간을 얻는, 극과 극의 삶의 조건, 

'대학 하나 다니려면 돈을 탈탈 털어서 바쳐야죠, 주거, 학비, 진로 다 얽혀서 어렵죠.'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는 정현진 씨는 이제 대학 1학년이지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피디가 되고 싶어 신방과에 진학했고, 디자인에 재능이 있어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문구 용품을 판매하고 있는 이 재주많은 청년, 하지만, 꿈꾸고 도전하는 삶대신 안정을 택했다. 그런 그녀의 선택에 결정적 역할을 한 건, 검찰청 실무관으로 있는 그녀의 어머니, 함께 직장을 다녔지만, IMF로 은행을 다니던 친구들이 명퇴를 하고 가정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본 어머니는 그녀에게 이른 선택을 권했다. 

실제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사람들의 56.6%가 선택한 이유, '안정된 일자리', 실제 어머니 이은희 씨가 다니는 직장에 신입 직원으로 들어온 사람들 중에는 연, 고대 출신도 빈번하다. 꿈꾸고 도전하는 삶 대신 선택한 안정이 행복하지 않으면?이란 질문에 정현진 씨는 '끊임없이 생계를 걱정하는 것보단 행복하지 않을까요?'라며 반문한다.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일까?
여기 또 다른 98년 생이 있다. 아니 있었다. 지금은 없지만, 한때 첫 월급을 받아 부모님 내복값이라며 10만원을 봉투에 넣어 내밀던 청춘이 있다. 2017년 1월 전주 아중 저수지에서 자살로 추정되는 홍수연 양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특성화고 3학년 LG 유플러스 콜센터 실습 중 이었던 홍 양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취업 100%를 달성하기 위해 학생들의 불업 위장 취업을 강요하는 마이스터고, 하지만 같이 들어갔던 홍수연 양의 열 몇 명 중 결국 남은 건 두 세 명, 현장 실습에 나갔던 학생 들 중 적응을 하지 못하면 돌아오는 건 혹독한 징계. 공장 노동자로 일하던 중 컨베어벨트에 끼어 팔이 부러지고 허리와 목을 다쳤던 아버지, IMF로 대량 해고가 게속 되던 시절, 결국 아버지는 이렇다할 직장을 얻지 못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을 걱정해서 취직해서 돈 벌다가 공부하고 싶으면 하겠다며 버티던 홍양은 결국 견뎌내지 못했다. 

콜센터, 이른바 고객 대응 노동자의 93%가 겪는 언어 폭력, 서비스업에서 요구되는 더 중요한 능력은 미소와 친절보다 말도 안되는 요구나 기분 나쁜 말에 '무뎌지기', 무뎌지지 못한 홍양은 자신을 던졌다. 비록 어려웠지만 소중했던 딸의 죽음은 부모의 삶마저 파괴했다. 눈물로 지새우던 어머니는 2011년 뇌출혈로 사망했고, 세상이 싫어진 아버지는 연고 하나 없는 섬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홍양만이 아니다. 2017년 11월 현장 실습생이지만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이민호 군은 제품 적재기에 목이 끼어 목숨을 잃었다. 2018년 하반기 조기 취업 형태의 현장 실습이 전면 폐지될 때까지 꽃다운 청춘들은 '실습'이라는 이름으로 과중한 노동에 시달렸다. 



다큐는 보여준다. IMF 체제를 졸업한 우리나라가 지난 20년간 얼마나 빛나는 경제적 신장을 이뤄냈는가를, 하지만, 또 다른 화면에서 보여진 건, 그 성장의 잔혹한 그림자들이다. <인터뷰 대한민국> 1부, <1998년 IMF생>을 통해 다큐는 말한다. 2018년의 대한민국, 이제 막 청춘에 첫 발을 내딛은 98년 청춘을 통해 바라본 현실은 아직 끝나지 않은 IMF의 상흔을 그대로 드러낸, 그래서 그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젊은 세대에게 짐지운 또 다른 전쟁터이다. 


by meditator 2018. 1. 27. 17:28

2000년 출간된 <가시고기>는 대번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백혈병에 걸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 헌신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는 그 후로 영화로, 만화로 만들어 지며 여전한 '아버지'의 자리를 확인시켰다. 소설 속 아버지는 아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부족한 돈을 위해 자신의 신장을 팔고자 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 검사를 하는 과정에서 그 자신이 말기암이라는 걸 알게된다. 그리고 어언 십여년, 2018년, 아내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위해 그 무엇하나 누린 적이 없었던 아버지, 그러나 가장으로서 가정을 지켜내지 못했던 아버지도 '암'에 걸리고 말았다. 아니 '암'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병원에서는 '암'이 아니란다. 2000년에 자식을 지키려 고군분투하다 암에 걸린 아버지와 2018년에 상상암에 걸린 아버지, 2018년의 아버지는 진짜 '암'이 아니니 괜찮은 걸까? 진짜 '암'과 상상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다 커버린 자식들이 떠나버리면 홀로 남아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아빠 가시고기처럼, 소설 속 아버지는 말기암의 판정을 받고서도 자신의 각막마저 아들의 치료를 위해 팔고자 했고, 끝까지 아들에게 아버지의 병을 알리지 않은 채 홀로 남아 죽음을 맞이한다. 2000년, 21세기의 서막이 열렸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순애보'적인 아버지의 사랑에 감흥했다. 이제는 아니다 했지만, imf를 경과하며 이 나라의 아버지들은 스러져 갔고, 가정은 해체되어 갔으며, 가장의 존재는 유명무실해 졌다 했지만, 여전히 아직도 '아버지'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시대였다. 하지만 <가시고기> 단 한 편으로 베스트 작가가 된 조창인 작가가 그 이후에도 여전히 '가족'을 화두로 한 작품을 출간했지만, 그의 다른 작품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듯,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는 서서히 아니 급격하게 지는 태양이었다. 아니, 아버지란 이름은 이제 지더라도 세상을 밝히려 애쓰는 태양이기는 커녕 우리 사회에서는 '기성 세대'가 되어가면서, '꼰대'가 되었고, '적폐'의 상징으로 젊은 세대의 걸림돌이 되었다. 



2018년, 초라한 아버지의 자리
바로 그런 시대에 <황금빛 내 인생>의 아버지 서태수(천호진 분)와 최재성(이 있다. 그들은 아버지이지만 무기력하다. 이제 40회에 들어선 드라마에서 그들은 '가장'이라지만, 도대체 가장다운 무언가를 한 일이 없다. 무역맨 출신의 그는 한때 잘 나가는 사업가였다. 딸 서지안의 친구 혁은 동아리 모임을 하는 서지안의 친구들을 위해 호탕하게 간식거리를 사주던 서지안의 능력있는 아버지를 기억한다. 하지만, 그렇게 능력있고 가정적이었던 아버지는 그의 사업 실패와 함께 사라졌다. 경제적으로 여유를 즐기며 맘껏 미대의 꿈에 부풀었던 딸 지안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일반고로 전학을 가야했듯 6식구는 단칸방 신세가 되었고, 거기에 업친데 덥친 격으로 어머니는 암에 걸리셔서 가족을 경제적으로 더욱 쪼달리게 했다. 평생 그의 그림자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왔던 아내와 가족들은 하루 아침에 닥친 경제적 위기에 힘들어 하며 가장인 그를 원망했다. 

큰 아들은 무능력한 아버지의 삶을 보며 결혼을 안한다 하고, 아내는 고생하는 자식을 보다못해 딸을 바꿔치기까지 한다. 대학 준비를 하는 줄 알았던 막내 아들은 알고보니 돈을 벌겠다고 하고, 이제 자신들이 뒤바뀐 걸 알게 된 딸들은 그 충격으로 아버지를, 가정을 외면하다. 비로 경제적 능력은 상실했지만 그럼에도 가장으로 어떻게든 가족들의 구심력이 되고자 했던 그는 이제야 비로소 처절하게 깨닫는다. '돈'이 아니고서는 이 사회에서 '아버지'의 자리는 보장받을 수 없음을, 돈이 없는 아버지는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님을, 그런데 그 '아버지'의 자격인 돈을 위해 한 평생을 달려왔고 노력했지만 그건 '신기루'처럼 날라갔다. 자신의 인생과 목표와 함께. 그리고 가족도 함께. 그는 살아있지만 이미 그 누구도 그를 살아있는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다. 어머니처럼 자신에게도 '암'의 증상이 나타난 날 그래서 서태수는 기꺼이 그걸 '하늘의 선물'이라 생각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린다'

그렇다면 돈이 있다면 다를까? 최재성은 남들이 보기엔 그 대단하다던 재벌가 해성의 부회장이다. 강원도 태백 탄광 지대 출신으로 그 비상한 머리 하나로 대기업 해성에 들어갔고, 회장 딸 노명희와의 사랑으로 해성가의 사위로 '입지전적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59세 그 남부러울 것 없는 그이지만, 그는 해성가의 꼭두각시이다. 불같이 사랑해서 결혼한 아내와는 사업상 혹은 가족 이야기라도 절차상 필요한 이야기 외에는 나누지 않은 지 오래됐다. 한 방을 쓴다지만, 냉기가 흐른다. 집안의 모든 대소사는 모두 해성가의 수장인 회장의 의중에 따라 결정된다. 그는 이제 환갑을 바라보지만 여전히 두 딸을 놓고 저울질 하는 장인 어른 덕택에 '간택'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아이들과 관련해서도 그의 의견은 아예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자신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집을 나간 큰 아들 도경처럼, 아이들에게 역시 아버지의 존재는 유명 무실하다. 그래서일까 대기업 부회장이나 된 그가 정신과 의사 앞에서 허탈하게 눈물을 흘린다. 



암이 아니면, 죽지 않으면 괜찮은 걸까? 
38회 엔딩, 서태수의 상상암은 무리수였을까? 아니 오히려 그간 가족간의 서사를 <가시고기>에서 보여지듯이 병력을 활용하여 '신파'적 설정으로 넘어갔던 기존의 가족 서사에 대한 작가 소현경의 야심참 도발이 아닐까? 여기서 원론적인 반문이 필요하다. 서태수는 암이 아니다. 심지어 상상에 의해 암이 걸렸다. 아이를 가지고 싶어하는 엄마가 상상으로 아이를 가지듯이, 서태수는 그렇게 '암'을 '고소원'하다 못해 '상상'으로 암에 걸리고 만다. 

그럼 암아니면 그래서 조만간 죽게 생기지 않으면 괜찮은 것일까? 바로 여기 작가의 질문이 있다. 아니 반문이 있다. 오죽 서태수에게 삶이 의미가 없었다면 그는 죽기를 소원했을까? 여기서 스스로 암에 걸렸다고 확신한 서태수에게 온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이 조만간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변화한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굴레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늙수그레했던 외모도 염색을 하며 변모시켰고, 하고 싶었던 기타도 다시 들었고, 무엇보다 가족이라는 짐을 벗어던졌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에 대해 돌아보고 용기를 낼 수 있는 아버지이다. 

그런 아버지의 변화에 자식들은 당황해 한다. 아버지 왜 그러시냐고, 아버지 아프시면 병원에 가셔야 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서태수는 그런 가족들에게 냉랭하다 못한 반발한다. 왜 너희들은 '가족'에서 벗어나 지 멋대로 하고 살면서, 여전히 아버지에겐 자신의 자리를 구차하게 지키라고 하냐고?

소현경 작가가 서태수, 최재성 이 시대의 아버지, 그러난 허울만 아버지일뿐, 이제는 그 예전의 '가부장'도, 심지어 '가장'도 아닌, 구차하고 무기력하게 늙어가는 남자들의 존재론을 묻는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어느새 이 시대에 걸림돌이 되어버린 '아버지' 세대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그 예전 아버지들처럼 혹은 여전히 가족극이 즐겨 쓰는 '화합'의 소재가 되는 육체적인 병이 아니라, 정신적 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가족이라는 집단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만을 배우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아야 했던, 하지만 그 조차도 여의치 않았던 우리의 아버지 세대, 그들은 이 시대 아버지는 증상만 다를 뿐 어쩌면 모두 서태수, 최재성처럼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38회 '상상암'은 웃픈 해프닝이 아니라, 가장 이 시대의 아버지를 잘 표현한 설정이다. 그 상황에 실소를 자아내는 우리들은 어쩌면 여전히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서태수의 자식들 중 한 사람일 지도 모른다. 

by meditator 2018. 1. 15. 14:28

2014년 10월에서 12월까지 방영되었던 11부작 ocn 드라마 <나쁜 녀석들>은 이른바 '나쁜 녀석들'이라 통칭해 질 수 있는 범죄자들을 내세워 '더 나쁜 녀석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응징한다는 '폭력적 카타르시스'를 내세워 화제가 되었다. 더구나, 딸을 잃고 미친 개가 된 형사 반장 오구탁 역의 김상중을 비롯하여, 2017년 흥행 배우가 된 조직 폭력배 역의 박웅철 역의 마동석, 청부 살해업자 정태수 역의 조동혁,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범 이정문 역의 박해진 등 이미 그 배우의 면면 만으로도 화제가 된 작품이기도 하였다. 거기에 <뱀파이어 검사>로 ocn 장르 드라마의 장을 연 한정훈 작가가 들고 온 새로운 시리즈였으니 장르물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이미 방영전부터 기대작이었던 작품이다. 


당시로서는 드문 11부작의 짧은 시리즈 동안 형사 오구탁을 비롯하여, 그가 내세운 범죄 소탕 작전의 개가 된 범죄자들, 박웅철, 정태수, 이정문 등이 '법'이라는 기성 제도의 틀을 넘어, 선사하는 폭력적 범죄의 단죄 방식은 칼과 칼이 만나는, 그리고 몸과 몸이 부딪치는 폭력적 카다르시스의 향연과, 그들을 팀으로 엮은 남구현 경찰청장과 오재원(김태훈 분) 특별 검사 사이에 과연 누가 진짜 '나쁜 놈'인가를 놓고 벌이는 '진실 찾기'게임이라는  두 개의 엔진으로 드라마의 흥미를 배가하였다. 


11부의 대미, 드라마는 오구탁 형사 딸, 그리고 남구만 경찰 청장 아들의 죽음,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한 레이스는 결국 정작 나쁜 녀석들을 향한 오구탁, 남구만, 그리고 또 다른 법의 세력 오재원의 사적 복수와, 그럼에도 '나쁜 짓만 하며 살던 놈들이 사람답게 살아보니 살 맛'을 느껴, 짐승의 길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그저 좀 더 나쁜 녀석들을 모아놓은 것같던 이들이 회를 거듭하면서 외부의 나쁜 녀석들을 정죄하는 한편, 각자의 개인적 악연으로 얽혀들었던 그 '관계의 딜레마를 애초에 그들을 모아놓았을 때 보상으로 딜했던 출옥 대신 '나쁜 녀석들' 스스로 끊어내는 것으로 드라마는 마무리된다. 

그리고 당연히 이제 서로의 악연의 사슬에서 벗어난 이들이, 그들 각자가 가진 '캐릭터' 본연의 맛을 가지로 좀 더 본격적으로 악의 세력 구축에 나설 것을 시즌 2로 시청자들은 기대하였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 그 자체가 무기가 되었던 박웅철이 같은 제작진의 또 다른 장르물 <38사기동대>에서 소심한 세무 공무원으로 등장하며 시즌 2의 가능성은 멀어졌다. 그리고 <나쁜 녀석들>이 방영된 2014년으로부터 3년이 흘러 2017년하고도 12월 <나쁜 녀석들>이란 수식어를 단 드라마가 찾아온다. 



나쁜 녀석들 시즌 1의 스핀 오프? 
그러나 새로이 등장한 <나쁜 녀석들>에는 오구탁 형사가 없다. 박웅철도, 정태수도, 이정문도 없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쁜 녀석들'이란다. <나쁜 녀석들>의 제작진은 시즌2의 부담을, 마치 시즌 1의 스핀 오프와 같은 형식으로 변주한다. 기존 시리즈를 이끌었던 주인공들 대신, 그 얼개와 서사의 방식을 그대로 뽑아내 38사기동대의 배경이 되었던 서원시로 옮겨온 것이다. 

시작은 <나쁜 녀석들>과 같았다. 서원시를 돈으로 장악하여 각종 이권을 행사하는 건 물론 자신의 이권에 방해가 되는 이들을 거침없이 제거하는 조영국 회장(김홍파 분)을 제거하기 위해 그와 악연이 있는 우제문(박중훈 분), 노진평(김무열 분) 검사와, 장성철 형사(양익준 분), 그들의 수하 신주명(박수영 분), 양필순(옥자연 분), 그리고 범죄자이거나, 범죄자였던 허일후(주진모 분), 한강주(지수 분)가 뭉친다. 

이들의 방식은 나쁜 놈을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시즌 1의 취지를 이어간다. 무엇보다 첫 회 주재필을 잡기 위해 '나쁜 녀석들'이 온몸으로 떼로 몰려드는 서원시의 부랑배들을 상대로 맞부닥치는 장면은 바로 이것이야말로 <나쁜 녀석들>의 폭력적 카타르시스라는 걸, 시즌의 핵심이라는 걸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죽음을 불사한 선과 악의 때론 선과 악의 정체조차 모호한 처절한 대결은 8회까지 매회 이 드라마의 특징으로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시즌1의 명확한 캐릭터들에 대한 그리움을 시즌1이 아쉬웠던 서사의 치밀함으로 대신한다. 이제 9회를 앞두고 중반을 넘어선 <나쁜 녀석들>은 알고보니 남구만, 오구탁, 오재원의 사적 연원이라는 스케일을 넘어, 부제 악의 도시처럼 서원시라는 한 도시를 둔 끝모를 악의 세력과 나쁜 녀석들의 치킨 게임으로 이어진다. 

한 회에 한 명씩이라는 말이 우스개가 아닐 정도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하면서 뜻을 모았던 '나쁜 녀석들'의 멤버들은 매회 한 두명씩 사라진다. 신주명 과장과 양필순이 그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하수인의 칼에 비명횡사를 했고, 장성철이 사선을 넘나든다. 



한 회의 한 명씩? 아군의 희생으로 드러나는 악의 실체
그렇게 우리의 나쁜 녀석들이 목숨을 던지며, 서원시 권력의 배후, 그 악의 주구는 조용국에서, 그 모든 것을 조정했던 구시대의 잔재였던 이명득으로 밝혀진다. 시즌 1에서 알고보니 나쁜 녀석들을 개로 내세월 범죄 소탕 작전을 벌이려 했던 배후가 남구만이었다는 식이다. 하지만 자기 자식에 대한 원한에서 시작되었던 시즌 1의 스케일을 넘어, 조용국의 지원을 받은 정치인이 서원시장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건 공안 검사 출신의 구시대 적폐의 노골적인 일종의 정치공작이었다는 검찰 개혁을 둘러싼 대리전이었다는 걸 중반에 들어선 <나쁜 녀석들; 악의 도시>는 드러낸다. 특히 5,6,7,8회에 걸쳐 진짜 적이 누구인가를 둘러싼 나쁜 녀석들 사이의 내분과 응징을 둘러싼 처절한 갈등, 서서히 드러난 이명득 검사장의 정체는 시즌 1이 가졌던 서사의 아쉬움을 넘어 선다. 

그런데 적폐 청산도 했는데 이제 겨우, 절반의 레이스를 넘었다. 조영국은 진실을 폭로하고 스스로 법의 심판을 받고, 이명득의 정체도 드러냈으며, 그 모든 걸 밝히기 위해 앞섰던 반준혁(김윤석 분) 검사가 새로운 지검장이 되며 검찰 개혁의 시동을 걸기 시작했는데 드라마는 이제 절반을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그 개혁에 함께 발맞춰 나가고자 특수 3부로 갔던 노진평 검사가 의문의 교통 사고를 당하며 목숨을 잃고 만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이명득 서원지검 검사장은 자신이 적폐인 것이 드러날 까봐 그 사실을 안 모든 인물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빨갱이'들을 없애고자 하는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기 위해 민선 시장이었던 서원 시장을 제거하는 한편, 개혁 세력인 새 정부의 비위를 맞추고자 조영국을 제물로 삼고자 하였다. 그의 노회한 변신 작전은 물거품이 되었다. 양의 탈을 뒤집어 쓴 늑대와 같은 이명득의 캐릭터는 '검찰 개혁'이 당면의 과제인 상징적이다. 그러나 여전히 드라마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드라마는 말한다. 구시대의 적폐 이명득을 제거했지만 새 시대는 쉽게 오지 않는다고. 자신과 함께 했던 형과 같던 수사관의 죽음으로 나쁜 녀석들의 일원이 되었던 젊은 검사 노진평을 뜻밖의 죽음으로 모는 시대는 여전히 어둠이 드러워져 있다. 그리고 악의 응징과 관련하여 각자의 이해 관계로 흩어졌던 나쁜 녀석들은 역시나 또 각자가 포기할 수 없는 신주명, 양필순, 노진평의 죽음, 그리고 사라진 주변인들을 찾아나서며 다시 한 자리에 모인다. 과연 이들이 헤쳐나가는 어둠에는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는 것인지, 드라마는 새 시대의 명암을 그려내며 여전히 우리가 정신차리고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한다. 


by meditator 2018. 1. 12. 22:32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낡은 시대가 물러갔다. 새로운 대통령이 뽑히고,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시대을 마중하기 위해 분주하다. 교육이라고 다를까. 입시 체제부터 변화를 위한 움직임이 분주하다. 그런데, 과연 교육에 필요한 것이 새로운 입시 체제일까? 지금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그간 꾸준히 교육과 관련된 다큐를 제작해 왔던 ebs다큐 프라임의 생각은 좀 다른 듯하다. 새해 첫 다큐로 ebs가 준비한 것이 바로 <번아웃 키즈>이기 때문이다. 지난 3,4일 그리고 8,9일에 걸쳐 4부작으로 방영된 이 다큐는 어쩌면 지금 우리 교육에 필요한 건 새로운 방향으로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서서 아이들을 안심시키고, 괜찮다 등을 두드리고, 그리고 그들이 맘껏 푸르를 수 있도록 여유를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큐의 제목 <번아웃 키즈>, 그 수식어인 번아웃(burn-out)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는 낯설지 않은 심리학 용어다. 그레이엄 그린의 1960년 작 소설인 <번아웃 케이스>에서 유래된 이 말을 독일 출신의 심리학자 허버트 프레이덴버거가 사용하며 등장했다. 타버리다, 소진되다라는 단어적 의미 그대로 '눈 앞의 목표를 향해 그것을 정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진해 가는 과정에서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가 소모되어 무기력증이나, 자기 혐오, 우울증에 빠지게 되는 증상이다. 서비스 직의 감정 노동자나, 위험하거나 전문성이 요구되는 직종, 교사, 의사 등 사회적으로 높은 도덕적 요구가 기대되는 직종, 업무상 스트레스가 많은 직종에서 걸리기 쉬운 증후군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회사의 도산이나 구조 조정, 가족의 죽음 등 과도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개인적 사회적 환경 역시 이 증후군의 배경이 된다. (다음 백과 중)

그런데, 이런 직업적이고 사회적인 원인으로 한 사람을 소진시켜 버리는 증상이 2018년 우리의 아이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그것도 특정 학령이 아니라, 다큐에서 보여지듯이 초등학생에서 부터, 고등학생. 심지어 이제 사회에 나가 그 자신이 아이들을 가르칠 선생님이 될 대학생들조차 이 증후군에서 자유롭지 않다. 도대체 우리 교육, 나아가 우리 사회가 '교육'이란 미명 하에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달리는 돼지와 함께 잠시 아이로 돌아간 아이들-<교실에 온 돼지>
한 선생님이 교실에 돼지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선생님은 말한다. '잘 길러서 크면 잡아먹자.' 18년전 오사카 고등학교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다. 1년간 아이들과 선생님이 돼지를 키운 이 과정은 tv 다큐로 방영되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츠마부키 사토시 주연의 <p짱은 내 친구>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 까지 했다. 바로 그 다큐와 영화의 상황이 안양 평촌의 한 초등학교에 벌어졌다. 

교실에 온 애완용이 아닌 흑돼지 한 마리, 선생님은 앞으로 100일 동안 아이들과 함께 돼지를 키우겠다고 한다. 도대체 왜 선생님은 당장 돼지 똥이며 냄새에 대한 민원이 빗발치는 이 돼지를 교실에서 키우자고 한 걸까? 그 답은 아이들에게서 찾아진다. 초등학교 5학년 공부를 못하는 게 불효라는 아이들, 교실 뒤편에 아이들이 쓴 글은 우리 사회 취준생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언어들로 도배되어 있다. '난 괜찮아, 난 할 수 있어', '하면 된다', 그러나 그 사이에, '난 괜찮아, 내가 한 말 중에 최고의 거짓말'이 있다. 벌써 대학 입시를 걱정하고, 미래에 볼모로 잡힌 아이들 그러나 정작 수업 시간 아이들의 눈은 비어있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 선생님이 도발한 결정은 그저 교실에 돼지 한 마리를 데리고 온 것, 그런데 첫 날 부터 아이들이 달라졌다. 5학년이 되었다고 말수가 적어지던 아이들이 '아이 본연의 호기심, 수다스러움, 발랄함'을 되찾았던 것이다. 그저 돼지 한 마리일 뿐인데? 그래서 이 2부작 다큐는 슬프다. 그저 초등학교 5학년, 이제 겨우 12살인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을 뺑뺑이 도느라, 벌써 입시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교실에 찾아온 돼지 한 마리로 12살 본연의 아이스러움을 되찾았다는 것이. 우리에서 꿀꿀거리기나 하고 더러운 줄 알았던 돼지가 운동장을 신나게 달리고, 알고보니 배변을 가리는 깔끔한, 그저 인간의 편의에 의해 더러워졌던 동물인 것처럼, 12살에 공부 기계가 된 아이들은 돼지와 함께 12살의 여름을 보내며 아이다운 밝음과 자신감, 책임감, 눈물을 찾았다. 이 세 달의 과정을 마친 아이들은 자아존중감 검사에서 6.26%의 상승세를 보였다. 고학년에 올라갈 수록 과도한 학습으로 자존감이 하락세를 보인다는 우리 교육, 겨우 돼지 한 마리가 혁혁한 성과를 보이는 이 교육 현장, 우리는 교육을 통해 무엇을 얻고 있는 것인가?라고 다큐는 묻는다. 

고 3도 사람이다 - <우리 여기 있어요> 
그래도 12살이면 그래도 낫다 싶다. 1, 2부 <교실에 온 돼지>에 이어 방영된 3부 <우리 여기 있어요>를 보면. 7.8, 6.5, 12.6, 7.7, 15.5? 이 숫자들은 이제 중간 고사를 3일 앞둔 고3학생들의 가방 무게다. 평균 6.5kg. 1.5 리터 생수병 4개 반이 우리나라 고3학생들의 가방 무게이다. 그런데 가방 무게에 놀랄 것도 없다. 구리 여고 이한울 외 3명의 학생들이 만든 영상 속 고 3학생들이 보여주는, 교우, 진로, 미래, 대학, 공부, 성적 등등에 대한 또래 학생들의 이야기는, 그저 부모님 이야기만으로 눈물샘이 터지는 대학 진학이란 목표를 향해 버티는 가방보다 훨씬 무거운 삶이다. 

고3인 아이들은 무기력함에 지배당한다. 자신들에게 10대란 미래를 저당잡힌 그저 견뎌야 할 인고의 시간이라 입을 모은다. 자소서라 쓰고, 대학에 맞춰 자기를 각색하는 자소설을 쓰며, 19년의 세월의 축적이 아닌 잘 하는 게 하나도 없는 자존감의 상실을 경험한다. 심지어, 경쟁만이 남은 교실에서 자신보다 못한 타인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자신들이 변태같다고 항변한다. 이제 곧 대학에 들어가 자신의 꿈을 펼쳐야 하는 아이들은 마치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살다보니 딱히 자신이 잘하는 게 없는 사람이 되었다 자조적으로 말한다. 아니 지난 19년의 세월, 잘 하는 걸 찾을 기회가 없었다 토로한다. 이게 입시 교육의 정점에 선 고 3의 현주소라 다큐는 말한다. 

고 3이 아니라면 다를까, 여수 여중 2학년, 매일 매일의 공부를 기록한 블로그를 통해 드러난 아이들의 상황, 공부를 하다 몸이 망가지면, 이렇게 까지라도 해서 열심히 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라 안심하는, '열심 증후군'에 빠진 위태로운 현실이다. 더 심각한 건, 이제 중 2밖에 안된 학생이 그런 어려움을 주변인들이 '넌 이것 밖에 안되는 얘야?'라 할까봐, 자신의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차마 들키고 싶지 않은 절대 고독, 다큐는 우리 청소년들의 '번아웃'을 그렇게 증명한다. 

준비되지 않은 채 교육 현장으로 간 선생님들 - <비긴 어게인> 
초등 교육에서 고등 교육으로 우리 교육이 자행하는 '번아웃의 현장'을 절절하게 그려나간 다큐는 4부에 이르러 뜬금없이 교대 학생들을 보여준다. 도대체 미래의 선생님들과 번아웃이 무슨 상관? 

갓 초등학교에 부임한 교사 조영우 선생님, 그러나 첫 날 부터 선생님은 교대를 다니면 전혀 배우지 않았던 현장의 상황에 부딪쳐 정신줄을 놓게 생겼다. 점심 시간이 되었지만 이미 지쳐버린 선생님은 음식을 넘기지 못할 정도다. 그저 신입이라서라는 핑계로는 막막해 보이는 선생님의 상황, 도대체 그의 지난 4년이 어땠길래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카메라의 시선을 옮겨 지켜본 교대 학생들의 생활은 빡빡하다. 선생님 혼자서 전과목을 책임져야 하는 초등 선생님의 특성때문에, 팔이 여럿 달린 힌두 여신이 그들을 상징하듯, 미래의 선생님들이 대학 동안 받는 수업은 빠듯하다. 이렇게 수업을 받는데 왜 현장에 가면 그렇게 당황하게 되는 걸까?

현재의 교대 수업은 초등 선생님의 기능적 교육 내용에 치우쳐 있다. 신군부에 의해 4년제가 된 교대, 그러나 4년제 사범대의 교육 과정을 벤치 마킹한 현재의 교대 교육 과정은 학생들에게는 현실과 너무 멀리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장에서 선생님이 맞닦뜨리게 되는 건, 20여명이 넘는 학생들만큼이나 다양한 상황, 그러나, 정작 아동 심리라던가 현실 교육 과정에 필요한 프로그램들은 교과 수업 전달에 밀려 겨우 명목상의 수업이 되고 만다. 미국의 경우 학기의 시작에서 부터 학년이 마칠 때까지 이루어지는 현장 실습은 겨우 한 달 정도의 형식적 과정으로 지나가버린다. 거기에 4학년만 되면 다시 '인강'을 들으며 교원 임용 교시 준비에 매달려야 하는 현실에서, 정작 '교사'로서의 제대로 된 준비는 논외가 되고 만다. 

그렇게 준비할 틈도 없이 교과 과정만을 기계적으로 익히고, 거기에 다시 달달 외우는 학습으로 임용 고시를 통과한 선생님들이 교육 현장에 선다. 당연히 학생들과 만날 상황이 아니다. 교사는 묻는다. 입시 교육에만 시달리다 자신을 잃어가는 아이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의 현실과 아랑곳없이 교과 과목만 배우고 현장에 선 선생님들. 과연 준비 없이 교육 현장에 투입된 선생님으로 인한 시행착오는 누구의 몫이 되는 것이냐고. 

동심을 잃은 채 입시 교육으로 내몰린 초등학생들, 그리고 그런 교육을 십 여년 받다 보니 자신을 잃다못해 무기력해져버린 고등학생들, 그리고 그저 교과 내용만 달달 외우는 임용 고시라는 통과 의례를 거쳐 교육 현장에 서게 되는 선생님들, 학생들은 '번아웃' 될 정도로 공부를 하지만, 정작 그 교육을 통해 그들은 '자신'을 잃는다. 과연, 현재 우리 교육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다큐는 묻는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라고. 


by meditator 2018. 1. 10. 19:09

새해에 들어서도 어김없이 <황금빛 내 인생>은 연일 시청률의 신기록을 세워가며 고공행진 중이다. 35회 토요일 자체 최고 시청률 37.6%를 갱신하더니, 일요일 역시 42.8%, 과연 이 주말 드라마 상승세는 어디까지 이어질까, 연말 시상식에서 남자 주인공 최도경 역의 박시후가 '고소원'하듯 50%가 가능할까가 관건이 될 정도로 <황금빛 내 인생>은 파죽지세다. 


그런데 <황금빛 내 인생>이 흥미로운 건 그저 시청률이 '따논 당상'인 kbs2 주말 드라마 중에서 '제법 더' 재미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kbs2 주말 드라마라고 하면 '가족'을 주제로 하는 '전통적 가족관'에 충실한 드라마들이 연이어 바톤 터치를 하는 자리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소현경 작가가 선보이는 <황금빛 내 인생>은 우리 사회의 '가족주의'이라는 패러다임에 도발적 문제 제기를 하면서도 대중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주목할 만하다. 



좋아는 하지만 사귀지는 않겠다! - 서지안 
무엇보다 그런 소현경 작가의 도발적 문제 제기의 중심에는 여주인공 서지안(신혜선 분)이 있다. 지난 연말 연말 시상식 등으로 특집극으로 대처했던 한 주 결망 동안 시청자들을 애닮게 했던 건 바로 낮밤으로 알바를 한 돈으로 미역국을 상을 차리고 목걸이를 준비한 최도경의 생일 이벤트의 결과이다. 과연 키스씬이 있을까? 라는 궁금증이 자연스레 들 정도로 남자 주인공이 저 정도로 물심양면 헌신적 모습을 보이면 십중팔구 여주인공은 감동을 하고 두 사람의 사랑 확인은 포옹과 키쓰로 자연스레 이어지는게 여느 드라마의 관행이다. 그런데 어쩐지 감동적인 스킨쉽 대신 주먹에 꼭 쥔 목걸리를 보이자, '그래 내가 너를 좋아한다'며 끝을 맺은 34회에 이어 이어진 새해 첫 방송 35회에서 서지안은 예상 외의 반응을 보인다. 


최도경을 좋아하지만 사귀지는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어머니의 거짓으로 인해 재벌 그룹 해성 가의 딸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서지안, 그녀는 짧았던 그 시간 동안, 그리고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 자살 기도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로 혹독한 경험을 치뤘다. 그 경험은 대기업 직원이 되어 남보란듯이 살고 싶었던 서지안의 인생 목표에 참혹한 반추의 시간이 되었다. 처음엔 돈을 보고 선뜻 자신의 친부모를 외면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한 회한이 고등학교 동창 혁을 따라 셰어 하우스에 들어와 고물을 모으고 선생 대신 목수 일을 하며 살아가는사람들을 만나고 혁의 목공방에서 일을 하며 자신이 이상으로 여겼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그런 고민의 결과는 여전히 최도경을 좋아하지만, 삶의 처지가 다른 최도경과의 연인 관계에 대한 거부로 나타난다. 그리고 36회 엔딩에서 보여지듯, 감히 자신의 아들을 만난다며 기세 등등하게 등장하여 다그치는 최도경의 모친이자 해성가의 안주인 노명희(나영희 분) 앞에서의 당당하게 '제가 싫어서요'라고 밝히는 태도로 귀결된다. 



물론 50부작의 긴 여정에서 앞으로 서지안과 최도경의 사랑이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저 재벌가의 아들과 서민 출신의 여성의 사랑과는 궤를 달리한다. 이미 서지안을 통해 각성한 최도경이 자신의 배경을 버리고 홀로 밑바닥에서 부터 자신을 찾는 도전에 도전하듯, 그들의 사랑에는 배경과 계급, 그리고 남보란 듯한 스펙으로 젊은이들의 꿈을 예단하는 우리 사회 고정 관념에 대한 작가의 도전이 있다. 그리고 그 도전은 사랑하지만 자신과 다른 삶을 살아갈 최도경을 거부하는, 이제 더는 세상이 원하는 그럴 듯한 성공의 삶에서 스스로를 기꺼이 방출시킨 서지안의 선택으로 드러난다. 

결혼을 했지만 아이는 거부한다 - 이수아
도발적인 선택과 도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서지안을 따라 자신의 재벌가를 버린 최도경의 선택으로 젊은이들다운 도전과 사랑으로 열렬한 지지를 얻고 있는 주인공 커플과 달리, 드라마의 처음부터 내내 쉬이 지지를 얻지 못하는 커플도 있다. 바로 서태수의 큰 아들 서지태(이태성 분)와 그의 아내 이수아(박주희 분)가 그 주인공들이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의 빚에 아직 독립하지 못한 동생들의 학자금까지 떠맡았던 맏아들 지태는 결혼을 거부한다. 심지어 오래도록 연인 관계였던 수아와 헤어지려고 까지 결심할 정도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 서태수의 설득으로 결혼을 한 태수-수아 커플, 결혼 계약서 1항에 아이는 낳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만 아이가 생겼다. 함께 병원에 가 초음파로 아이를 확인하고,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들은 지태는 마음이 달라진다. 기왕에 생긴 아이니 낳자고 한다. 그런데 그런 지태의 변화에 아내 수아는 반발한다. 심지어 그런 충동적인 결정을 하는 지태와 함께 살 수 없다며 이혼을 선언하고 집을 나가 버린다. 

전통적 가족 드라마에서 결혼과 아이는 지상 과제였다. 그러나 <황금빛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사랑을 하고 가까스로 결혼까지 한 이 커플에게 생긴 아이는 이제 커플 지옥문을 연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 시대 결혼도, 아이도 미루거나, 포기하는 젊은 세대들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낙태죄' 폐지가 담론이 되고 있다. 이 '낙태죄' 폐지를 앞장서는 사람들은 '출산할 권리 보다는 낙태할 권리를'을 주장한다. 바로 이런 일련의 주장, 그 흐름에 수아의 생각이 있다. 수아는 말한다. 캐나다에 이민을 갔다지만 어렵게 가게를 하는 오빠네에 겨우 빌붙어 사는 부모님, 그리고 출판사 무기 계약직으로 앞날을 보장받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 비록 정직원이라지만 맏아들이라는 부담이 큰 남편. 수아가 살아온 삶은 그녀에게 그저 이 세상에서 자기 한 몸 책임지며 사는 것만도 버거운 것이라 가르친다. 



이런 수아의 사고는 '저출산 고령 사회라는 디폴트 안에서 선택한 이 시대 젊은이들의 선택적 행복론'과 맞닿아져 있다. 아버지의 설득으로 결혼을 하고, 기왕에 생긴 아이니 낳으면 어찌 되지 않겠느냐 라던가, 차라리 아이를 키우기 위해 생활 수준을 낮춰 지방으로 내려가자는 지태의 방식은 전통적으로 '아이'를 부부의 중심, 혹은 가족의 중심으로 사고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런 지태의 생각에 수아는 반발한다. 수아의 사고에는 비록 자신을 책임지려 살아가려 하지만, 늘 생활고에 시다렸던 자신의 지난 시간과 자기 자식에게 그런 삶을 또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n포 세대'의 현실적 고민이 담겨있다. 자신의 아이라는 생명 존중 사상과 나의 실존과, 어쩌면 태어날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 대한 실존적 고민이 대치되는 지점이다. 소현경 작가는 어쩌면 이 드라마에서 가장 현실적인 지태 부부가 결혼과 출산 과정에서 겪는 문제를 통해 이 시대의 화두를 담아내고 있다. 그저 어떻게 '아이가 생겼는데?'라는 세간의 오지랖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시대적 고민이다. 

그렇게 <황금빛 내 인생>은 '서태수'의 가족을 중심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고민을 현실적으로 담아내고자 애쓴다. 또한 젊은 세대의 새로운 담론을 여주인공들의 생각과 행동을 통해 전 세대에게 화두로 제시한다. 시청률을 넘어선 이 드라마의 가치는 여기서 빛낸다. 



by meditator 2018. 1. 9. 13:58

지난 2016년 12월 31일 ebs 장학 퀴즈는 인공 지능 엑소 브레인과 상하반기 왕중왕 김현호, 이정민 학생과 수능 만점자 윤주일, 그리고 카이스트 학생 오현민 씨와의 대결을 특집으로 마련했다. 결과는 인공 지능 엑소 브레인이 2위와 160점이나 차이나는 압도적인 우승이었다. 이 대결의 참가자였으며 서울대에 진학한 김현호 학생에게 이날의 경험은 허망하고 수치스러운 기억으로 남는다. 김군은 말한다. 방송 전 예비로 시험을 볼때만 해도 엑소 브레인은 학생들보다 압도적으로 우수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전 준비 과정과 몇 시간의 녹화 과정에서 인공지능은 스스로 진화하여,학생들을 압도했다. 


이런 경험을 했기에 서울대 경영학과에 진학한 김현호씨에게 미래에 대한 고민은 깊을 수 밖에 없다. 경영학과 학생들이 다수 선택했던 회계사란 직업은 20년 안에 없어질 직업의 1순위이다. 동기들과 경영 하나로는 먹고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며 프로그래밍 학원이라도 다녀야 할까라며 고민을 하는 김씨와 동기들. 



도래할 4차 산업 혁명의 시대를 맞이하는 당사자인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도대체 4차 산업 혁명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인가 불투명하다는 고민과 함께 그럼에도 여전히 기존의 교육 과정이 요구하는 학과 중심의 공부를 제쳐둘 수 없기 때문에 혼란만 가중되고 있다. 스스로 소프르웨어를 개발해 내는 중2의 과학 영재 이준서군에게 부모들이 역사 성적에 대한 잔소리를 늘어놓을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인 것이다. 

4차 산업 혁명과 혼란에 빠진 학생과 학부모들
1월 7일 방영된 <sbs 스페셜 - I ROBOT - 내 아이가 살아갈 로봇 세상>은 바로 이런 변화하는 세상에서 혼란에 빠져 있는 교육과 학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시작은 도대체 4차 산업 혁명이 뭐길래? 로부터 시작될 수 밖에 없다. 

정보 통신 기술(ICT)의 융합으로 이루어지는 4차 산업 혁명은 인공 지능과 로봇기술, 생명 과학이 주도하는 변화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변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 것일까? 학부모들의 고민이 깊어지듯 일자리, 즉 먹고사니즘의 변화이다. 1,2차 산업 혁명으로 인간의 육체적 노동 부문을 기계가 대신해갔다. 그리고 3차 산업 혁명을 시작으로 이제 4차 산업 혁명은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신해 가기 시작한다. 

반도체 부품 업체의 인공 지능 로봇 소이어, 기존의 사람들 200명이 하던 일을 소이어의 도움으로 이제 3명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저 사람 수의 문제가 아니다. 알 지 못하는 분야의 일 조차도 하루 이틀 학습을 하면 인간을 대체할 정도의 학습 능력에, 점심 시간, 브레이크 타임은 물론 오버 타임까지도 가능한 24시간 풀 가동하는 소이어의 능력은 바로 미래 사회 인간의 자리를 대체할 로봇의 현주소다.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한 호텔에서는 안내, 청소, 요리 등 기존의 사람들 30여명이 할 일을 단 7명만이 필요한 로봇 호텔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인공 지능 로봇의 대두는 한국 사회에서는 '알파고의 충격'으로 집약된다. 인간의 지적 활동,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바둑', 그러나 프로 바둑 기사 중에서도 내로라하는 이세돌은 알파고와의 대결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40여년전 유망 직종이었던 전화 교환원이나 버스 안내양 등이 이제 사라지고, 문선공이란 직종은 그 이름조차 낯설어진 세상처럼, 이제 수십년 내에 우리 사회 직업들은 혁명적 변화를 겪게 될 것이라는 것이 관련 학자 들의 공통된 진단이고, 학생과 학부모들의 고민은 바로 이런 미래 사회의 예측 불가능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4차 산업 혁명, 새로운 가능성이 세상. 
대부분의 4차 산업 혁명 다큐들이 미래의 불가지론에 근거한 불안함과 혼돈을 강조한 반면, 1월 7일 SBS 다큐의 시선은 이와 좀 다른 지점을 포착한다.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는 이런 변화에 내던져진 인간의 현실을 기계와 인간의 달리기에 비유한다. 1,2, 3차 산업 혁명 역시 기존의 직업들을 사라지게 했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들은 더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로봇 공학자 오준호씨는 오늘날 사람들의 불안을 2차 산업 혁명으로 자동차가 보급되자, 인간과 자동차의 달리기를 예로 들며 좌절했던 그 시대의 얼토당토않은 경쟁을 예로 든다. 즉, 자동차가 등장했지만, 그 자동차로 인해 인간의 생활이 보다 편리해진 것이 압도적인 만큼, 소프트 웨어의 발전에 인간은 또한 적응할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그저 막연한 불안의 대상인 인공 지능, 다큐는, 그 불안의 실체에 과감하게 접근한다. 화제의 인공 지능 로봇 소피아, 로봇으로 최초 시민권을 획득하고 토크쇼에도 출연했던 이 오드리 햅번을 닮은 로봇을 인문학자 최진기씨가 만나, 정해진 메뉴얼없이 대화를 나눠본다. 그 결과는? 최진기씨는 소피아를 '동문서답의 마법사'라 여유롭게 정의내린다. 즉 그의 표현에 따르면 마네킹을 씌워놓은 인공지능 스피커같은 소피아는 프로그래밍된 용어가 들어있지 않은 대화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다큐의 실험에 대해 MIT에서 세계 최초 4족 보행 로봇을 만들어 낸 로봇 학자 김상진 교수는 확신을 더해준다. 그 최초의 4족 보행 로봇, 하지만, 정작 이 로봇에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계단, 문턱, 좁은 골목 등 인간에게는 사소하고도 자연스러운 장애물들이다.

즉, 소피아와 4족 보행 로봇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무시하고 있는 인간의 능력, 즉 적응력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인간이 세상의 주인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프로그램된 내용의 학습을 통해 인공 지능은 바둑을 이길 수는 있지만, 수세미를 쓰다, 밥풀을 긁어내는 등 다양한 적응이 필요한 접시 닦이를 인공 지능들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4차 산업 혁명의 시대에 교육은 바로 이런 인간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영역에서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오바마 대통령이 강조했다 해서, 우리 사회에 화제가 되었던 코딩 교육이 2018년부터 중학 과정에서 의무 과정이 되었다. 



코딩의 조기 교육? 무엇이 중한디? 
컴퓨터의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컴퓨터가 알아들을 수 있는 사고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는 코딩, 중학 과정에서 의무가 된 코딩은 34시간을 이수해야만 한다. 34시간은 중학교 전체 과정에서 1%에 불과한 시간, 현장에서 가르치는 김현석 선생은 1주일에 한 시간 가르치는 방식의 코딩 교육은 결국 또 한 과목의 국영수가 될 뿐이라 비관한다. 그러나 현장의 비관과 다르게 유치원에서 부터 코딩 교육은 붐을 이루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 

이런 결국 또 하나의 선행 학습이 되어가고 있는 코딩 교육 붐에 대해, 다큐는 방향을 정정한다. 그 선례로 등장한 건 바로 유투브에서 화제가 된 아빠의 샌드위치 코딩 교육. 동영상의 아빠는 샌드위치 만드는 법을 아이와 학습한다. 아이가 써준 메뉴얼에 따라 샌드위치를 만들어 보는 아빠, 그러나 아이의 어설픈 요리 메뉴얼은 식빵 모서리에 잼을 바르는 해프닝으로 번번히 실패한다. 



코딩의 코자도 꺼내지 않는 코딩 교육, 이것이야 말로, 바로 생활 속에서 실행하는 진짜배기 4차 산업 시대의 교육이라 데이스 홍 교수는 강조한다. 코딩의 관건은, 아니 4차 산업 혁명 시대의 교육의 관건은 문제 해결 능력, 그리고 체계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논리력, 그것이야말로 어떤 상황이 닥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이라고 다큐는 결론 내린다. 

우리 시대의 4차 산업 혁명은 화두이자, 동시에 딜레마다. 교육입국을 앞세워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던 그 세대의 학부모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새로운 시대의 교육에 먼저 한 발을 끼워 넣으려 애쓰고 있다. 이런 부모들의 초조함에는 인류로 봤을 때는 진화이지만, 개인으로 봤을 때는 각자도생이라는 진화와 발전의 냉엄한 현실 인식이 기조로 깔려있다.  비감했던 기존의 4차 산업 혁명 다큐와 달리 <sbs스페셜-I ROBOT - 내 아이가 살아갈 로봇 세상>는 인간을 낙관한다. 그러나 그 낙관은 잘 준비된 자의 몫이다. 하지만, 그런 우려와 초조함이 또 다른 국영수 과외 식의 닥달이어서는 안된다고 다큐는 단언한다. 가장 자연스러운 하지만 현실의 교육 제도가 가장 간과하고 있는 인간의 적응 능력을 키워줄 수 있는 교육만이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을 키워낸다며 고삐를 죄는 부모들의 시선을 돌린다. 

by meditator 2018. 1. 8. 16:23

'남은 달력 한 장/ 짐짓 무엇으로 살아왔냐고/ 되물어 보지만/ 돌아보는 시간엔/ 숙맥같은 그림자 하나만/ 덩그러니 서있고/  비워야 채워진다는 진실을/ 알고도 못함인지/ 모르고 못함인지/ 끝끝내 비워내지 못한 아둔함으로/ 채우려는 욕심만 열 두 보따리 움켜쥡니다......'

                                                        -오경택,<12월의 공허> 중,

한 해를 보내는 심정은 대부분 위의 시와 같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을 시간, 그 시간을 채워넣지 못한 아쉬움, 그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일까? 대부분 연말 tv프로그램은 각 방송사 별로 '내 논에 물주기식' 공치사 수상식으로 떠들썩하게 채워진다. 그 '화려한 쇼'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덧 재야의 종소리가 울리고, 스리슬쩍 새해가 치고 들어온다. 한 살 더 먹는 무안함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그 어수선한 연례 행사가 번잡스러운 사람들은 그래서 일찌감치 tv를 꺼버리고 만다. 그런데 다행히 그런 천편일률적인 연말 tv프로그램에 변화가 생겼다. 바로 2부작 드라마를 편성한 jtbc 덕분이다. 2017년 12월 31일 8시 40분부터 2부작으로 <한여름의 추억>이 방영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고전적 하루> 갈라콘서트로 차분하게 한 해를 마무리하도록 했다. 



사랑을 통해 한해를 반추하다. 
최강희 주연의 <한여름의 추억>은 2부작 드라마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원히 물기가 탱탱 넘치게 살아갈 것 같았지만 어느 틈에 서른 일곱이 되어버려, 더 이상 여자가 아닌 '휴먼'이 되어버린,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던(?) 라디오 작가였던 한여름의 '지난' 사랑 이야기를 드라마는 반추한다. 

드라마는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들이 그녀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청소년 시절 그녀가 첫사랑이었던 남자 최현진(최재웅 분)은 맛선 자리에서 그 '첫사랑'을 그저 '찢고 까불었던' 불쾌한 기억으로 거부한다. 지금의 애인과 언쟁 과정에서 그녀를 기억해 낸 대학 시절 그녀와 캠퍼스 커플이었던 김지운(이재원 분)은 그 시절 불같이 화를 내며 떽떽거리던 열정적이던 그녀가 싫었다. 지금 그녀와 프로그램을 같이 하는 피디 오제훈(태인호 분)은 솔직하고 당찬 그녀가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그녀와 3년이나 사귄 끝에 결혼을 결심했던 박해준(이준혁 분)은 결국 자신의 청혼을 자신의 욕심으로 거부했던 그녀로 인해 '결혼'에 대한 기피증이 생겼다. 

서른 일곱 한여름을 그녀가 소녀 시절부터 사랑해 왔던 네 명의 남자를 통해 설명한다. 첫 사랑 앞에서 내숭이 심했던 소녀, 대학 시절 자유분방하고 감정기복도 심하고, 자신의 감정에 거침이 없었던 20대, 그리고 사랑하지만 자신의 욕심때문에 불안정한 직업의 팝 칼럼니스트와의 결혼을 기꺼이 거부하던 서른 무렵의 여전히 자신만만했던 여성, 그리고 영원히 빛날 줄 알았건만 어느 틈에 빛을 잃은 채 스스로 한없이 초라하다고만 느끼는 서른 후반의 한여름. '사랑'이라고 쓰고, 그녀가 가장 애착을 가지고 맺어왔던 관계들을 통해, 그리고 그 관계들을 반추하는 한여름을 통해 '삶'을 되새긴다. 



흔히 '이불 킥'이란 용어가 가장 적확하게 못이룬 지난 날의 부족했던 사랑을 설명하듯, 한여름이, 그리고 그녀를 기억하는 남자들의 기억 속에서 지난 시간들은 미처 채워내지 못한 자신들의 '욕심, 욕망'들이다. 그러나, 그 채워지지 못한 욕망들은 1부의 마지막, 뜻하지 않게 한여름에게 닥쳐온 사고로 인해 빛깔을 달리하기 시작한다. 

'사실은 12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다/ 생각해 보라/ 12월이 없으면 새해가 없지 않은가/ 1년을 마감하고 새해가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천상병, <12월은 참말로 잔인한 달이다> 중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한 해를 보내는 공허함, 지난 사랑에 대한 회한, 우리의 마음 속에서 스며나오는 이 '아쉬운 감정'들은 결국 아직도 여전히 더 잘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의 다른 이름에 아니다. 하지만, 마치 12월 다음에 다음 해가 시작되지 않는다면?처럼 더 이상 이 세상에 한여름이 존재하지 않는 순간, 그녀와의 추억들은 다른 버전의 해석으로 기억된다. 드라마는 절묘하게 한여름의 지난 사랑을 통해 우리의 시간들을 설명한다. 

아쉬움, 회한? 그건 삶의 다른 이름 
솔직하지 못했던 소녀 여름은 첫사랑의 풋풋한 속내였으며, 그 질리도록 떽떽거리던 젊은 날의 한여름은 20의 솔직하고 열정적인 감정이었다. 여러 부담없는 변수 중의 하나였던 그녀가 남긴 마지막 솔직한 말은 이제 자신의 상처난 자존심에 철갑을 두룬 이제훈에게 던져진 진솔한 충고가 되었고. 그녀가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 전해진 뒤늦은 사과는 늦지 않게 박해준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이름 '한여름'은 중의적이다. 여주인공의 이름이자, 동시에, 12월 31일일에 만나는 반가운 '여름'의 열기라는 계절적 배경이다. 또한, 언니네 집으로 떠나는 한여름이 남긴 마지막 인삿말처럼, '찰라'와도 같은 시절, 찰라와도 같은 시간, 찰라와도 같은 관계의 기억들을 뜻한다. 세숫물도 온천수같다며 제발 에어콘을 사자고 조르던 김지운의 말이 무색하게 어느새 선선한 바람에 밀려가버리는 여름은, 이제는 기억으로만 남겨진 한여름의 생이다. 그리고 그 한여름을 통해, 우리는 2017년과 함께 가고 있는 각자의 지난 날을 반추해 본다. 

아쉬움으로 헛헛한 시간, 빛나고 싶었지만 초라했던기억들. 하지만, 그 초라함조차,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기에 가능했던 아쉬움이라는 것을 드라마가 충격적으로 알려주는 순간, 한 해를 보내는 회한의 시간은 한여름을 아프지만 아름답게 기억해 내는 그의 옛사랑들처럼, 충분히 반짝거렸던 기억들로 새롭게 해석된다. 덕분에 쓸쓸함 대신 여름과 같았던 2017년의 추억으로 한 해를 마감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다. 언제나 그렇듯 '최강희'였기에 20대와 30대, 심지어 빛을 잃었다던 서른 일곱에는 반짝였던 한여름을 설득했던, 2017년 겨울이 선사한 여름날의 온기같던 드라마, <한여름의 추억>이다. 부디, 2018년 12월 31일에도 이런 뜻깊은 선물을 또 받고 싶다. 
by meditator 2018. 1. 1. 15:21

올 겨울은 예년 겨울과 다르게 유난히 춥다. 그리고 눈도 많고. 날이 추워지면, 마음도 추워지고, 그래서일까? 올 겨울 뜨겁게, 혹은 잔잔하게 반응을 보이는 '연인'들의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 중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건, 바로 주말 드라마 <황금빛 내인생>이다. 주말 드라마의 아성 kbs2의 토일 8시 자리야 높은 시청률이 따놓은 당상이지만, <황금빛 내인생>은 40%를 거뜬히 넘어선 소현경 작가의 전작 <내딸 서영이>의 시청률 기록과의 경쟁 이상,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전 세대에 걸친 뜨거운 반응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그 뜨거운 반응의 중심에 이른바 '도지 커플', 최도경(박시후 분)-서지안(신혜선 분) 두 주인공이 있다. 



황금 수저를 포기한 황태자의 사과 
극 초반 어려운 가정 형편에 대기업의 인턴 사원으로 갖은 수모를 겪던 서지안이 어머니의 한 순간 거짓말로 그룹 해성의 잃어버린 딸이 되어 재벌가의 신데렐라가 되는 롤러코스터와 같은 신분 상승의 서사를 다루었다. 짧고 고단했던 서지안의 빛나는 순간은 그 이후 참혹한 현실과 함께 추락해 버린다. 그러나 사고 차량 주인과 가해 차량 운전사로, 이어서 싸가지 갑과 을, 그리고 오빠와 동생으로 악연인지 운명인지를 이어가던 해성 그룹의 외아들 최도경과 서지안은 그 과정을 통해 '사랑'에 눈뜨게 되지만, '부'가 곧 신분인 세상을 절감한 서지안은 굳게 마음을 걸어 잠근다. 

그리고 이제 중반을 넘어선 <황금빛 내 인생>은 황금빛 수저를 내팽개친 채, 사랑을 찾아, 그 사랑의 용기로 자신을 찾아나선 최도경의 역 계급 경험이 극의 중심을 이룬다. 서지안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인한 최도경, 그리고 서지안에 대한 자신의 사랑, 그 중심에 오로지 서지안만이 재벌 그룹의 후계자로 길들여져야 하는 자신의 수동적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깨달은 최도경은 사랑을 찾기 위해 '독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그의 '독립'을 일회적 반항이라 생각한 그룹의 창시자 할아버지는 그를 빈털털이 신세로 거리로 내쫓고 마는데, 그런 할아버지의 결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도경은 '알바'를 전전하며 '쉐어 하우스'에 거쳐를 마련하고 '독립'에의 의지를 불태운다. 

34회 마지막 장면, 밤낮으로 알바를 전저하던 최도경, 알고보니 그가 알바를 했던 이유가 바로 크리스마스 당일이 생일이었던 서지안의 생일 선물을 마련하기 위했던 것. 꾸벅꾸벅 졸아가며 미역국을 끓여 생일 상을 차리고, 포장도 없이 다친 손으로 움켜 쥔 목걸이에 결국 서지안은 마음을 열고만다. 하지만, 눈물겨운 생일 상과 선물 때문만이었을까? 그건 그간 최도경이 꾸준하게 서지안을 향해 보인 성의있는 사랑의 '대미'를 장식한 것일 뿐이다. 오히려 최도경은 서지안을 찾아나선 이래, 서지안을 만날 때마다 꾸준하게 '사과'를 해왔다. 

집에서 쫓겨나던 날 도움을 청하기 위해 최도경을 찾았던 서지안, 그런 서지안을 최도경은 냉정하게 잘랐다. 혹시나 서지안에게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그리고 자신에게 향하는 서지안의 마음을. 그러나, 그런 최도경의 차가운 태도로 인해 서지안은 홀로 집으로 들어가 거리로 내쫓겼다. 그 사실이 두고두고 마음이 아팠던 최도경은 서지안을 만날 때마다 사과를 한다. 심지어, 서지안을 찾아헤맨 아버지에 대한 선의로 전했던 소식에 서지안이 폭풍같은 분노를 퍼부으며 최도경의 알량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비아냥거릴 때조차 최도경은 그 모든 걸 자신으로 인한 서지안의 상처로 감수한다. 가진 자로써 자신의 영역이 흐트러질까 걱정했던 노파심, 재벌 후계자로서 자신의 지위라 흔들릴까 두려웠던 그 마음을 서지안의 분노를 통해 반성하며 최도경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한다. '사랑' 이란 이름의 계급적 반성이자, 후회이고, 그에 대한 진솔한 사과, 그것이 다른 계급의 처지를 몸서리치도록 절감한 서지안을 봄눈 녹듯 녹여간 최도경의 '사랑'이다. 

최도경과 서지안은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의 두 주인공이다. 재벌가의 황태자와 월세를 전전하는 집안의 비정규직조차 버거운 딸, 하지만 이 전형적인 서사를 소현경 작가는 2017년의 방식을 풀어간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삶의 모토로 삼았던 황태자 최도경은 자신의 그 신념이 사랑 앞에서 얼마나 자기 안위적인 계산이었던가를 통렬하게 깨닫는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유산으로서의 계급'대신 자기 자신으로서의 삶의 선택과, 그 온전한 최도경으로의 주체로서의 사랑으로 귀결된다.



비서를 존중한 보스의 사과 
다른 백마 탄 왕자도 있다. 꼴찌에서 시작하여 이제 당당하게 월화 드라마 1위를 거머쥔 <저글러스>의 남치원(최다니엘 분)이 그 주인공이다. 부사장의 특채로 yb 영상 사업팀의 상무로 등장한 그, 그리고 까칠한 그를 위해 공채 입사 5년, 그러나 전임 보스의 배신으로 기피 직원에서 겨우 자리를 얻은 좌윤이(백진희 분)가 그 사랑의 상대다. 

보스와 비서, 이 엄연한 직장 내의 서열이 분명한 관계로 만난 이들은, 하지만 뜻밖에도 좌윤이의 집 2층에 남치원이 세들어 오면서 직장 밖에서는 집주인과 세입자의 뒤바뀐 관계가 되어 드라마의 역학 관계를 튼다. 독불장군 모든 것을 자신이 혼자 해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던 남치원은 당연히 '비서'의 존재가 필요없다 생각하고, 그래서 좌윤이의 존재를 무시했지만,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가 본의아니게 그로 하여금 '비서'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하지만 사사건건 수동적 비서로서의 좌윤이를 미더워하지 않았던 남치원은 보스를 위해 충정을 다하던 '본투비 비서'로서 사명감을 지닌 좌윤이를 '여성으로서 곁을 허용한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등 색안경을 끼고 본다. 그러나 제 아무리 비서로서의 존재를 무쓸모라 여겨도 비서라는 직업을 '하인' 다루듯하든 다른 '전통적 보스'와 달리 좌윤이를 존중하던 그는, 집주인의 배려, 그리고 비서로서의 헌신성을 차츰차츰 알아가며 자신이 끼고 있던 색안경을 벗어버리게 된되고, 비서라는 직업의 정체성을 혼돈했던 자기 자신을 진솔하게 사과한다. 그리고 나아가 전직 보스에 대한 수모를 '보스 어워드'를 통해 갚으려 했던 좌윤이의 심중을 헤아려 함께 보스 어워드에 출전하기 까지 한다. 

<황금빛 내 인생>과 <저글러스>를 통해 등장한 남녀 관계는 '과도적'이다. 여전히 '사회적 계급'의 측면에서는 '백마탄 왕자'와 같은 존재와의 사랑이라는 '로망'을 구현하는 한편, 그 구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2017년에 대두된 '여성 존중'의 담론에 충실하다. 남자들은 여성들의 존재와 그들의 직업, 그리고 삶의 방식을 존중하며, 때로는 자신이 곡해했던 지점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한다. 그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다. <황금빛 내 인생>의 최도경은 자신의 동생이나 해성 그룹의 딸인 서지안 이전에 사원 서지안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녀가 디자인한 도안을 공모에 내는가 하면, 해성 그룹에서 쫓겨난 그녀의 경력 단절을 안타까워 직업을 알아봐준다. <저글러스>의 남치원이 비서로서의 좌윤이를 존중하고, 다른 상사들 앞에서, 혹은 다른 직원들 앞에서 수모를 겪는 좌윤이의 손을 잡아 보호하듯 에스코트하며, '자신의 비서'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 보이는 것도 같은 방식이다. 때로는 그들이 자신의 계급적 이기심에 불온한 행동을 하거나, 남성적 편견에 불쾌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그들 '왕자'들은 곧 반성하고, 기꺼이 '사과'한다. 거기엔 내가 남잔데, 혹은 내가 '상사'인데 하는 치졸한 자존심 따위는 없다. 

이런 일련의 남녀 관계는 이들 드라마에 앞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화제를 불러 모았던 <이번 생은 처음이라>의 남세희(이민기 분)- 윤지호(정소민 분)의 관계 설정과 일련의 맥을 같이 한다. 2017년에 가장 어울리는 백마 탄 왕자였던 집주인 남세희, 그는 오갈데 없는 88만원 세대 윤지호를 자신의 집에 세입자로 거둔다. 그리고 젊은 남녀에게 편견의 통과 의례를 요구하는 세상을 편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위장 결혼'에 돌입한 이 집주인 세입자 커플. 그 결혼의 과정에서 남세희가 윤지호 모친에게 약속한 건 그 무엇도 아닌 윤지호의 꿈에 방해가 되지 않는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남세희의 약속은 윤지호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계약 결혼을 파기하기를 요구할 때 두말하지 않고 그 파기에 대한 동의로 이어졌고, 결국 꿈을 이룬 윤지호와 그런 그녀를 기꺼이 서포트하는 남세희의 진정한 결혼으로 드라마는 '로맨틱'하게 마무리되었다.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커플, 우수지(이솜 분)-마상구(박병은 분) 역시 여성의 꿈에 기꺼이 조력하는 파트너쉽이 사랑의 요건이다. 

이렇게 2017년 겨울을 달군 이들 세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황금빛 내 인생>, <저글러스>는 2017년의 사랑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다. 사랑 이야기 속 남성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그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 캐릭터들이지만, 그들이 사랑을 구현하는 방식은 달라졌다. 더 이상 '남자'라서, 혹은 '가져서', 그게 매력인 시대는 지났다. 오히려, '남자'라서 몰라서, '가진 자'라서 무지해서 몰랐다 사과하고, 여성들의 입장에 서보고, 반성하고, 함께 하고자 노력하는 자만이 사랑을 쟁취한다. 그게 2017년 식 사랑이다. 


by meditator 2017. 12. 27. 14:04

2016년 주중 미니 시리즈 최고의 히트작은 두말할 나위없이 최고 시청률 38.8%를 달성한 <태양의 후예>이다. 그리고 불과 1년 이른바 공중파 미니 시리즈의 수치상 성적은 초라하다. 그나마 '면피'를 한 것이 자신의 죄를 벗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검사의 이야기를 다룬 <피고인>의 28.8%정도이다. 그 뒤를 이어 kbs2의 <김과장>의 18.4%가 있다. 하지만, 이 두 드라마를 제외하고는 공중파 미니 시리즈의 대부분이 10% 내외 혹은 10%에 못미치는 시청률 성적표를 받았다. 심지어, 공중파라는 말이 무색하게 <김과장>의 후속작으로 등장한 <맨홀; 이상한 나라의 필>은 1%대의 기록을 세웠고, 그 뒤를 mbc의 <로봇이 아니야>와 <20세기 소년소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역추격하는 이변을 기록했다. (닐슨 코리아 기준)


이렇게 공중파 미니 시리즈가 초라한 성적표를 받게된데에는 종편과 케이블 등으로 다각화된 채널 경쟁이 그 첫 번 째 원인으로 등장한다.  <아르곤>, <부암동복수자들>, <이번 생은 처음이라>, <슬기로운 감빵 생활> 등은 비록 다른 플랫폼으로 수치상으로 비교할 바가 못되지만, 그 화제성 면에서는 공중파 미니 시리즈를 제쳤다. 거기에, <나는 자연인이다>, <냉장고를 부탁해>, <뭉쳐야 뜬다> 등의 종편 예능 프로그램 역시 밤 10시에 미니 시리즈라는 '전통의 아성'을 깨뜨리는데 일조했다. 그렇게 주중 미니 시리즈가 위축되고 있는 사이, jtbc의 금토 드라마는 <힘센 여자 도봉순>에 이어, <품위있는 그녀>, <청춘시대2>를 성공시키며 금토 밤 11시대의 드라마를 안착시켰고, tvn 역시 공중파 보다 빠른 시간대인 9시 30분, 심지어 9시 10분에 주중 드라마를 편성함으로써 공격적인 태세를 구축했다. 거기에 <비밀의 숲> 등으로 화제를 일으켰던 토일 드라마를 가족 드라마로 개편하며 공중파 드라마에 대한 경쟁의 각을 가다듬었다. 그런 가운데 ocn은 독보적으로 <구해줘>, <보이스>, <터널> 등의 장르드라마로 자신만의 입지를 다졌다. 




'정의'의 시대, '정의'를 주역, 법조인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공중파라는 '고지'가 존재하는 않는 춘추전국의 시대가 된 2017년 드라마의 내용적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아직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이 엿보이지 않던 2016년의 드라마들은 '기억'과 '국가의 존재'를 논했다. 가장 인기있는 사랑 이야기였던 <태양의 후예>조차 재난 현장 속에서 피어난 인간애와, 그곳에서 국가의 가치를 읊조렸다. 국가의 '부재'로 상처입은 사람들에 대한 인본주의적 도리와 원칙이 등장했으며, 잊지 말아야 기억과, 상흔을 드러내고자 저마다 애썼다. 그리고, 촛불이 광장을 메우고, 사람들의 힘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자, 드라마도 그런 시대에 부응하고자 했다. 2017년의 드라마 중 다수가 '정의'를 이루어 내기 위한 사람들의 고군분투를 다루었고, 그 주인공으로 '정의'와 관련된 법조계나 언론계의 전문직들이 대두되었다. 

2017년의 법조계 인물들이 주인공이 된 작품의 첫 테이프를 끊은 건, 바로 죄인이 된 채 새해를 연 sbs의 <피고인>이다. 아내와 딸을 죽였다는 혐의로 감옥에 간 검사 박정우(지성 분), 심지어 그는 그날의 기억조차 불분명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상실된 기억을 이어가며 감옥에까지 이어진 악의 손길을 떨쳐내며, 재벌가의 차민호(엄기준 분)와 그를 둘러싼 정관계 커넥션을 대항하여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한국판 프리즌 브레이크라며 인기를 모았다. 그 뒤를 이어, 이보영이 형사에서 변호사 사무실 비서로 신출귀몰, 판사에서 변호사가 된 이동준 역의 이상윤과 함께, 법조계의 권력인 태백의 아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자신을 던진다. <파수꾼>에서 자신의 아이를 잃은 엄마 조수지 형사(이시영 분)는 자신의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검사가 된 장도한(김영광 분)과 손잡고 

<피고인>의 박정우도, <파수꾼>의 장도한 검사(김영광 분)나, 조수지 형사(이시영 분). 법조계로 부터 뻗어나간 구시대의 적폐를 들춰내기 위해 자신들을 던진다. 로맨스 드라마를 내걸었던 <수상한 파트너> 역시 결국 아버지의 죄라는 구원과 거기에 얽힌 검찰청장으로 대변되는 법조계의 커넥션 파헤치기로 귀결되었다. 신선한 여성 캐릭터로 화제를 모았던 <마녀의 법정> 역시 실종된 어머니를 둔 여성 검사 마이듬(정려원 분)의 종횡무진 활약은 결국 조갑수(전광렬 분)로 상징되는 구시대적 권력의 척결로 모아진다. 그 마지막 바턴을 이어받은 건, sbs의 <이판사판>으로 이번에는 오빠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법조인이 된 로스쿨 출신의 판사 이정주(박은빈 분)가 나선다. 

이렇게 공중파의 법조계 인물들은 검사, 혹은 판사 등 '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그 '특권적' 성격을 마다하고, 직분의 본래적 의미에서의 활동을 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개인적 해원을 풀어가는 식이다. 즉, 그들의 개인적 원한의 근원은 대부분 유신 시대로 상징되는 고문 기술자, 시국 사건 조작 등을 통해 성공의 발판을 마련한 적폐의 인물과, 이제는 권력의 중심이 된 그를 중심으로 한 검경, 정관계의 카르텔이 존재한다. 이렇게 드라마는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의 권력의 실체를 정의내리고, 그 숱한 사람들을 짓밟고 탄생한 구 시대의 권력의 아성을 '희생자'의 가족들을 통해 통렬하게 고발하고 무너뜨리고자 한다. 



'피해자'에 의한 적폐 청산이란 공식은 바로 우리 사회에 지배적인 법조계 엘리트에 대한 선입견을 드라마가 내재화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럼에도 결국은 '법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정의 구현의 적임자가 바로 '법조계'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들 주인공들이 2017년을 채워간다. 하지만 이런 피해자에 의한 가해자에 대한 구원의 해결은 '즉자적'인 태세이기도 하다. 이런 방식의 서사를 넘어서, 과연 적폐 청산을 넘어, 새로운 시대의 '인간형'에 대한 화두를 다룬 드라마가 있다. 바로, 2017년 정의의 시대를 대표할 <비밀의 숲>이 그 주인공이다. 

공중파 드라마에서 주인공이었던 피해자의 직계 비속 역시 <비밀의 숲>에서 나온다. 바로 장관이었던 아버지가 하루 아침에 몰락한 영은수(신혜선 분)가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아버지의 죄를 밝히기 위해 검사가 되고 물불을 안가리고 뛰어다니던 공중파 미니 시리즈의 주인공 롤 격인 이 인물을 13회에 가차없이 희생시켜 버린다. 대신, 그런 '원혼'의 피해자 대신 드라마를 채워가는 건, '직업적 사명감'을 가진 인물들이다. 뇌의 이상으로 수술을 해서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는 주인공 황시목(조승우 분)을 주인공으로, '경찰 존심이 있지, 난 타협안해요'하는 무대포 형사 한여진(배두나 분)에, 처세술의 달인으로 재벌가의 사위까지 되었지만, 끝내 자신의 한 몸을 던져 법조계의 정의를 실현하려고 했던 이창준(유제명 분)까지 그들의 실천, 그 동인이 되었던 건 오로지 직업적 사명감, 그 원칙 하나였다. 내 주변의 누가 당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사회가, 그리고 나의 일이 이러해야 한다는 원칙을 통해 일신의 안락과 나눠먹기 식, 우리가 남이가로 대변되는 구 시대의 이데올로기의 청산을 설파하며 이 시대의 '정의'의 화두를 설득해 냈다. 



법조인만 있냐? 기자도 있고, 보험 조사원도 있다. 
하지만 검사, 판사 등 법조계 인사들만 활약한 건 아니다. 어벤져스 팀을 이뤄, 구악의 카르텔에 도전한 기자들도 있다. 대한일보 특종 보도팀 스플래쉬 팀의 이석민(유준상 분)과 한국판 타블로이드지 애국신문의 기레기 한무영(남궁민 분)이 그 주인공이다. 그들은 권소라 검사와 함께, 구태원(문성근 분)으로 상징되는 구태 언론과 그들에 의해 조작된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뭉친다. 공중파에는 언론팀에 대응하는 건, 고 김주혁의 마지막 작품으로 기억될 tvn의 <아르곤>이다. 손석희가 연상되는 이 시대의 목소리 김백진(김주혁 분)과 아르곤 팀이 '미드 타운 붕괴 사고'라는 거대한 몸집을 드러내기 까지의 고군분투를 자기 고백적으로 그려내며, 이 시대 언론의 사명을 드라마로 말한다. 감질나게 짧았던 8부작 아르곤 팀의 활약은 김백진의 추천으로 정규직이 된 이연화와 김백진, 그리고 아르곤 팀의 다음 탐사 보도를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더 이상 김백진 앵커의 활약을 볼 기회를 잃었다. 독특하게도 <매드독>에서는 보험회사 조사팀장이었던 최강우(유지태 분)와, 형이 대형 비행기 참사의 범인이 된 김민준(우도환 분)이 뭉친다. 그들의 상대는 돈을 위해 사람들이 탄 비행기를 참사로 이끈 보험회사와 비행사,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조력한 권력자들이다. 


이렇게 2017년의 드라마는 검사와, 판사, 변호사 등의 법조인, 기자들, 그리고 형사, 보험조사원까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재난 사고로 상징되는 세월호 사건, 그리고 구 시대의 권력을 상징하는 정관계의 카르텔을 대항하여 싸우며 한 해를 채워갔다. 2016년 잊지 말자며, 국가란 무엇이냐며 묻던 그 '회의적 질문'은 보다 열정적이고 저돌적인 전투로 승화되었다. 

by meditator 2017. 12. 19. 20:59

<비밀은 없다>는 호불호가 갈렸다. 평단의 일부에서는 역시 이경미라 극찬을 했지만, 이 글을 쓰는 사람으로 말하면, <전체관람가- 아랫집>을 보고 난 정윤철 감독의 느낌에 가까웠다. 이른바 '괴랄하다(괴이하다)'로 표현되는 이경미 감독의 세계를 존중한다 해도, 한 사람이 만든 거라기엔 영화의 톤은 울퉁불퉁했고, 말하고자 하는 바의 정체는 모호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스 홍당무>의 양미숙 못지않게 연홍으로 고군분투한 손예진은 빛났다. 그 해의 여우주연상을 손예진에게 준다면, <덕혜옹주>보다 <비밀은 없다>의 연홍이 더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017년 춘사영화제는 <비밀은 없다>의 손예진에게 수상을 했다. 그렇게 이른바 이경미월드가 칭해지는 감독의 독보적인 세계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여배우의 캐릭터를 통해 빛을 발한다. 그리고 단편 영화 <아랫집>에서도 마찬가지다. 12년만에 돌아온 이영애가 분한 희지 역시 괴랄하다. 





히로인을 통해 빛나는 이경미월드 
사전에는 없는 이 신조어, '괴랄하다', 괴상하다와 지랄맞다가 합성되었다 추측되는 이 단어로 응축되는 이경미 감독 영화를 대변하는 이들은 주인공인 여배우들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장면이 연출되면 자신도 모르게 흐뭇하다 못해 흡족한 '아하하하하' 고성의 웃음이 삐져나오고 마는 감독의 취향때문일까? 물론 그 취향에 기반을 두었겠지만, 하지만, 그저 어떤 색채의 프리즘같은 취향이라는 정의 이전에, 이경미 감독이 포착한 지점은, '정상'의 세상에 '정상'처럼 살아갈 수 없는 인간들이다. 

양미숙의 짝사랑 수난사를 그린 <미스 홍당무> 속 여주인공은 비인기종목 러시아어 교사에, 안면 홍조에 거기다 비호감의 언어를 툭툭 내뱉는 '사랑스럽지않은' 여주인공이다.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의 '사랑'을 내세워, '사랑지상주의'의 시대에 역설을 도모한 이 작품은 그래서, 다수의 사랑으로 상처받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그리고,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또 어떤가, 전라도 출신의 여성으로 경상도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지역으로 시집와서, 현모양처연하며 정치인의 아내를 자처한 '딜레마'의 응집체이다. 딸을 잃고 무당 앞에서 접신을 하는 듯 자신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은 자신의 고향말을 묻고 타지역에서 이방인으로 묻어가야 했던 그 수난의 시절을 잘 보여준다. 거기에 자신이 희생을 하여 꾸린 가정이란 신기루마저 사라지고, 그 '아노미'의 상태를 '미친년'같은 연홍을 통해 이경미 감독은 적나라하게 연출해 낸다. 

그렇게, 사회가 제시하는 '그러해야 한다'라는 고정 관념 속에서 살아가지만 거기에 끝내 맞출 수 없는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몸짓을 포착하는데 이경미 감독은 탁월하다. 그래서 이경미 감독의 작품 속 여성들은 거개가 '제 정신이 아닌'듯하지만 그래서 공감이 가고, 그래서 마음을 울린다. 겨우 15분 여의 단편이지만, <아랫집>에서 이영애가 분한 희지 역시 다르지 않다. 11년만에 돌아온 tv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 속 신사임당 역 이영애는 이뻤지만 어쩐지 박물관의 박제된 인물을 본듯했다면, <아랫집> 속 희지가 된 이영애는 표정 하나 없는 무표정으로 일관하지만 훨씬 생동감있다. 그리고 그 생동감의 원천은 바로, 아파트 담배 연기에 하소연하지만, 그 이면에 상실의 노이로제로 어찌할 줄 모르는 위기의 여성 희지가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담배 연기 층간 갈등에서 아파트 공동체에 대한 화두까지
'미세 먼지'의 주제를 선택한 이경미 감독은 그 '미세먼지'를 아파트 담배 연기로 인한 층간 갈등으로 풀어가고자 한다. 말이 서로 다른 독립 세대지, 화장실과 하수구 등을 통해 서로가 연결된 공동체 아파트. 그 406호에 사는 희지는 아랫집 306호에서 올라오는 담배 연기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그리고 그 고통에 대한 화답으로 그녀는 매일 아침 청소기를 들고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고, 그걸로도 풀리지 않은 마음을 결국 편지에 담는다. 

영화는 담배 연기로 인한 층간 갈등을 주제로 삼았지만, 그 갈등의 주체가 되는 인물의 내면과, 그 인물이 부닥치는 또 다른 인물들을 통해 아파트란 공동체가 가지는 다양한 층간 갈등의 유형을 드러내고자 한다. 영화는 마치 '너구리잡기' 게임처럼 그 짧은 시간에, 희지라는 인물의 사실은 애닮은 상처와, 그 상처입은 인물이 마주한 세상의 잔인함, 그리고 그것의 역설까지 두루두루 섭렵하고자 애쓴다. 윗집에서 보내는 편지를 보내는 장면에서 그 평범한 장면에서도 ng가 날 편지지가 순조롭게 들어가지 않아 쩔쩔매는 그 씬에 ok컷을 외치듯, 그리고 정작 윗집에 담배 연기 고통을 호소하는 희지가 흡연자였다는 반전처럼 이경미 감독은 평범한 일상의 틈을 비집고 나오는 일탈의 기운을 곳곳에서 포착해 내고자 한다. 덕분에 영화는 '괴랄한' 아파트 공동체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가 하면, 동시에 더 '괴랄할 수 밖에 없는' 희지의 개인사에 대해 깊은 스펙트럼까지 더한다. 

앞서 이명세 감독이 데이트 폭력을 다룬 <그대 없이는 못살아>가 우연히 기차 역에서 마주친 두 남녀를 통해, 그들의 현재와 과거, 이상과 현실을 조명하며, 그것을 이미지화시켜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기에 '이미지'로 전달된 느낌은 분명하지만, '이성'으로 독해하기엔 난해한 실험적인 영화가 되었다. 그에 이어 이경미 감독 역시 아파트 공동체 사는 다층의 층간 갈등의 요인들을 설명하며, 그것들은 '이영애'가 분한 '희지'란 대표적 인물과 '개구리'를 통해 풀어냄으로써, 역시나 실험적인 묘사의 계보를 잇는다. 메이킹 영상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이해하려 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이경미 월드! 하지만 그 '영상'의 실험은 이미 '이명세' 감독 편에서 제시된 바 '머리'로 이해하는, '사실'로써 받아들이는 영화적 방식에 대한 질문의 연속이다. 아마도, 이명세 감독의 실험, 그리고 이경미 감독의 괴랄함은 이경미 감독이 그 어느 때보다도 편하게 작업했다는 소감에서도 느껴지듯이 '상업 영화'라는 궤도에서는 궤도 순항이 어려운 시도들이다.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빛이난 이명세 감독에 이어, 이경미 감독의 작업이, <전체 관람가>의 의의를 빛낸다. 



by meditator 2017. 12. 18. 1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