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석의 숨겨진 재산이었던 100억이 넘는 금괴와 돈이 드디어, 이차돈(강지환 분), 아니 이강석에게 돌아왔다. 하지만, 십여년 만에 만난 어머니는 그에게 잃었던 기억을, 그의 일가를 몰락시킨 장본인이 지세광(박상민 분)임을 숙지시켜준 채 세상을 떠났다. 죽은 박휘순(이차돈의 모) 앞에서 지세광은 자기 아버지의 원수 갚음은 이제 끝났다고 했지만, 돌아온 이강석의 복수는 이제 시작되었다.

 

 

지세광 카르텔에 대한 복수의 묘미

지세광은 이제 현직 부장 검사이다. 그리고 그를 눈감아 주었던 검사는 이제 검찰총장이 되었고, 은비령과의 스캔들을 덮어준 기자는 뉴스 앵커가 되었다. 한때 멀리했던 애인 은비령은 이제 상호신용금고 이사장을 넘볼 경제계의 주요 인사이다. 지세광을 중심으로 한 이들 네 사람의 제휴, 혹은 동맹은 고담시의 투페이스에 좌 캣우먼, 우 조커의 악의 완전체라도 되는 것처럼, 현재 대한민국 악의 근원을 제시한다. 그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검찰 총장의 권력과, 부장 검사의 법과, 안젤리나의 돈과 고호의 언론이 그 모든 것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간다. 몰려다니며 쏙닥거리는 그들의 모습은 그들의 위상과 어울리지 않게 우스꽝스럽지만 그런 모의의 결과는 한 사람의 목숨을 쥐락펴락 할 만큼 무시무시하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일어날 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것에서 지세광 카르텔의 무시무시함은 배가된다.

따라서, 이차돈, 아니 이제는 자신이 이강석임을 자각한 이차돈의 복수는 이차돈 개인, 혹은 그 처참하게 무너져 버린 일가에서 비롯된 사적 복수이지만,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대한민국의 현실을 이입시켜 마치 그의 복수 행위가 '홍길동'의 의적 행위라도 되는 양 통쾌함을 느낀다. 이차돈이 아버지의 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물품 창고 앞에서 눈이 빠져라 이강석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던 지세광 일행에게 한 방을 먹이는 과정은 <돈의 화신>을 줄곧 시청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처럼의 통쾌함을 느끼는 순간이라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물론, 잊지말아야 지점은 이차돈이 현대판 의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가진 것 없는 지세광의 아버지를 이용해 먹고 죽어가도록 놔둔데 대해 지세광이 그의 지식과 벌률적 권한을 이용해 이강석의 일가를 무너뜨렸듯이, 이제 다시 이차돈이 사고의 트라우마로 좋아진 머리를 이용한 지적 행위와 변호사라는 대한민국에서는 꽤나 통하는 직능을 통해 복수의 사슬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건 그가 복수를 통해 이 사회의 상징적 부패와 악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과 별개의 또 하나의 진실이다. 그리고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상징적 '악'들의 소거에서 법은 거들뿐, 사적 복수가 동인이 된다는 것은 여전히 '정의'와는 '먼' 대하민국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진실이다.

 

 

 

강지환 화이팅

강지환이라는 배우는 세간의 사람들에게 그닥 좋은 인식으로 받아들여진 사람이 아니였다. 이제 와 드라마로 만들어진 <7급 공무원>이라는 영화를 제외하고는 팬이 아니고서는 그의 필모가 뚜렷하게 기억될 작품도 없었을 뿐더러, 그의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되었던 것은 그의 출연작 기사이기 보다도, 그의 소속사 문제로 불거진 여러 사건, 사고 기사에서 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돈의 화신>이라는 작품에 캐스팅이 된 이후에도 그런 일련의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인해 주인공이 바뀌니 마네 하는 구설수의 주인공이기 까지 했으니, 드라마를 통해 조우하게 된 강지화이란 배우에게 굳이 따스한 눈길을 주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뻔한 얘기지만, '배우는 연기를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고 강지환은 <돈의 화신>이란 작품을 통해 자신의 존개 이유를 설득해 내고 있는 중이다.

<돈의 화신>이란 작품은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진중하게 자신의 캐릭터를 밀고가는 반면, 오로지 주인공만 상황에 따라 널을 띠며 캐릭터의 편차가 심하다. 어린 시절 부잣집 독불장군이던 이강석이 기억을 잃고 고아원의 천재로 자라나 신참 검사가 되어 나타났을 때, 이차돈은 어린 시절과 전혀 다르게 경박하기가 이를 데 없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얄팍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천박할 정도로 돈을 좋아하면서도, 어머니인 박희순의 석방을 위해 애쓰고, 선배 검사인 지세광 앞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순수함도 놓치지 말아야 했다. 그리고 검사직을 쫓겨나 돈을 위해 박희순을 찾다가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걸 알고 지세광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면서는 다시 이차돈의 캐릭터는 진지하다 못해 눈에 불꽃이라도 튈 정도가 되어야 하는 복수의 화신으로 변한다. 그리고 이제 소복을 입고 곱게 머리를 올리고 '조선의 국모다'를 외치던 코믹 캐릭에서 부터, 전기 감전을 맞으며 어머니를 그리는 절규까지 극과 극을 오고가는 무거움과 가벼움을 능수능란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이차돈 역에 강지환 말고는 대체제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제작진이 굳이 물의를 일으킨 강지환을 기다리면서 까지 이차돈 역을 맏겼을 때, 의문 부호는 강했지만 한 드라마에서 마치 손바닥 뒤집듯 변해가는 캐릭터를 그게 마치 원래 자신이었던 것처럼 연기하는 배우를 보면서, 그리고 그런 이차돈이란 캐릭터에 상당 부분 드라마의 색깔을 의지해 가는 <돈의 화신>이 지금까지는 꽤나 긍정적 성과를 얻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지환'이란 믿음이 생겨난다

by meditator 2013. 3. 18. 09:52

'국민 가족', '국민 아빠', 국민 할아버지'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종편 드라마임에도 10%를 상회하고, 공중파 드라마를 '제낀' <무자식 상팔자>가 대단원의 막을 내려간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잘 날 없다'는 속담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안호식 하아버지네 아들 삼형제와 그 가족들은 종영을 하루 앞둔 회차에서까지 아롱이 다롱이 저마다의 문제로 골머리를 썩는다. 그래도 보는 시청들은 '사는 게 다 저렇지, 저 정도면 행복한 거야' 하며 푸근한 미소로 그들을 바라본다. 하지만 막상 드라마가 끝나고 리모컨의 꺼짐 버튼을 누르는 순간, 마법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섬뜩하다. '아, 우리에겐 저런 가족이 없구나!'

 

김수현 작가에겐 '대가'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럽다. 전성기의 작가들조차 일주일에 두 번 방영되는 피 말리는 방송 스케줄에 눌려 등산복을 자주 입었다 벗었다 하는데도 일흔이 넘은 김수현 작가에게 '드라마가 산을 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드라마에 '출연' 하는 밥상의 반찬 하나하나 까지도 섬세하게 '팁'을 제시한다는 무시무시한 '전설'까지 전해질 정도로 김수현 작가의 작품의 완성도는 이른바 '수미일관'의 모범적인 예이다.

 

뿐만 아니라,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는 '트렌디'하다. 그저 인기를 끄는 젊은 배우들이 젊은이들의 삶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시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일찌기 70년대부터 시대를 앞서가는 혹은 그 시대에 꼭 짚고 넘어가야 할 - 이혼, 성공, 사랑, 그리고 이제는 동성애, 미혼모 문제까지- 담론들을 드라마를 통해 용기있게 제기하고 해결방향까지 제시하는 시의성을 담보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공중파의 많은 드라마들이 '재벌'과 그의 재산, 그리고 그에 얽힌 인간 관계와 사랑이라는 진부한 주제를 붙잡고 골머리를 썩고 있는데 반해, 김수현 작가는 '노익장'이라는 호의적 표현이 무색하게 당대성을 담보해 내는데 있어 그 어떤 젊은 작가보다도 '트렌디'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는 'OLD'하다. 그것은 김수현 작가 드라마에서 제기된 모든 사회적 문제들이 가족을 통해 해소되는 '가족 화해주의' 혹은 '가족 제일주의'로 회기되기 때문이다. <무자식 상팔자>에서 의지가지 갈 곳조차 없던 알바생 수미는 마치 '민며느리'처럼 안호식 할아버지네 가족의 일원으로 어우러져 들어간다. 심지어 그녀를 잘 본 누나는 그녀에게 방통대를 가라고 하고, 할아버지는 장학금을 하사하신다. 엄마는 도망가고, 외숙모한테 눈칫밥을 얻어먹던 고아나 다름없는 수미는 그녀 특유의 싹싹하고 밝은 성격으로 그녀에 대한 선입관을 눈 녹듯 논게 만들고 가족의 일원으로 당당히 입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게 뭐 나쁘냐고? 아름다운 가족애 아니냐고?

그런데 상상해 보자. 만약 수미가 싹싹하지도 밝지도 이쁘지도 않았다면? 그녀에게 그런 행운이 데굴데굴 굴러 왔을까? 언뜻 보면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속 사회 문제들은, 가족이란 속에서 용해되고 화해의 길을 걷곤 한다. 하지만 한편에서 보면, '잘난' 수미처럼 결국 '지 할 탓', ' 지 복 탓'이 되고 마는 것이다.

미혼모가 된 소영을 받아들이고 울타리가 되주는 가족이 없다면, 아니 애초에 소영이 대법원 판사까지 지낸 고학력의 미혼모가 아니라면? 대기업 이사까지 지낸 희명의 노년은 씁쓸하지만, 그가 아내에게 1억을 타내기 위해 넥타이까지 들먹이며 하는 자살 소동은 해프닝에 불과할 뿐이다. 퇴직금 남은 걸로 사업하다 들어먹고 진짜 한강 대교를 걷는 그 절박함은 안호식씨네 가족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거기에서는 무슨 문제가 생겨도 비밀이 없이 모두가 알 듯, 결국 '가족'들이 나서서 걱정해 주고 해결까지 해주니까. 그리곤 말한다. '뭐니뭐니 해도 가족이 최고야!'라고 . 그런데 어쩐다. 텔레비젼을 꺼진 우리 사회에는 그런 가족이 없다. 2년이 넘도록 '왕따'를 당해도 의논할 수 있는 가족이 없고, 혼자 아이를 낳아도 거둬줄 가족은 더더욱 없다. 1인 가구수는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고, 한 집에 살아도 가족들은 하루에 한 마디를 하기도 힘든데, 여전히 텔레비젼 드라마는 '가족'이 최고란다. 모든 문제는 '가족'이라면 풀 수 있단다.

 

얼마 전 우리 지식 사회에 '피로 사회' 신드롬이 불었었다. '피로사회'는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책 제목으로,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는 한 개인, 한 개인을 원자화시키고, 그 각자의 성과로만 한 인간을 판단함으로써, 사회적 피로가 누적되다 못해, 우울증과 공황 장애등이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얇은 팜플렛에 가까운 이 책자가 신드롬이 될 정도라는 건, 그만큼 그 내용이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젠 연예인들이 '공황 장애'를 앓고 있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 더는 수치나 낙인이 아닌, 공감의 대상의 대상이 될 정도로.

그래서일까? 최근 인기를 끌었던, 혹은 인기리에 방영되는, 영국 드라마 <셜록> 그리고, 그것을 미국판으로 옮긴 <엘리멘트리>를 보면, 주인공이 사회적 부적응자(소시오패스)이거나, 그로 인한 병리적 현상(약물 중독자)을 겪는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런 그를 옆에서 돕는 것은, 가족이 아니라 '동거인'이거나, '약물 중독 치유사'이다. 그건 비단 드라마 뿐만이 안다. 베스트 셀러 [빅픽쳐] 저자의 또 다른 책 [위험한 관계]를 보면 위험에 빠진 미혼모를 도와주는 것은, 사회적 시스템에 따른 아동 보호사요, 변호사지, 가족이 아니었다. 이렇게 저쪽의 드라마 혹은 문화에서는 개인에게 문제가 생기면 사회적 제도를 통해, 혹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도움을 주는데, 우리 나라 문화,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는 사회적으로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가족'을 붙잡고 늘어진다. 한때는 '엄마를 부탁'하더니, 이젠 그것도 모자라, '아빠'가 최고에, '가족'만이 최선이란다. 이혼율을 들먹일 것도 없이 우리 주변의 가족들은 급격하게 해체되어 가는데, 여전히 우리는, 우리 사회는 무슨 문제만 생기면 '가족'을 붙잡고 늘어진다. 자식들은 자식들대로 문닫고 컴퓨터 하느라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혹는 저마다 바뻐서 늦은 저녁까지 누구하나 돌아오지 않은 거실에 엄마 혼자 앉아서 '무자식 상팔자'를 보며 행복해 하는 풍경. 굳이 매주 연재되는 한겨레의 쓸쓸한 '가족' 시리즈를 들먹일 것도 없이 대한민국의 가족은 더 이상 사회의 방탄조끼가 아니다.

 

'가족' 나쁘지 않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가족이 우리 사회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원천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젠 사회적 시스템이 갖춰져서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 가야 하는데, 여전히 우리 텔레비젼은 '가족'을 붙잡고 오매불망이다. 문제는 존재치 않는 이상적 가족이 아니다. 그런 과거 회귀적 문제 해결 양식에 매료되는 사람들의 취향이, 투표 같은 사회적 행위에서의 '퇴행성'으로 이어지고, 사회적 발전의 퇴행까지 낳게 되니, 그게 문제라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3. 3. 17. 09:52

강수진, 김미화, 지드래곤, 그리고 차인표, 거의 일면식이 없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최고, 혹은 제법, 그리고 한때 이름을 날린 네 사람이 제주도에 모였다. 이 이질적인 조합의 사람들이 함께 하는 48시간 '땡큐'가 될 수 있을까?

 

낯선 곳에서 함께 하는 시간

동네에선 옆집 사람이랑도 인사 한 번 제대로 나누지 않던 사람도 집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면 괜히 말이 많아지는 경우가 있다. 낯선 산장에서 이름 모르는 이들이 얼콰하게 어울려 너니내니 하면서 형제처럼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바로 '여행'의 마력이리라.

15일자, <땡큐>는 발레를 시작하고 제대로 된 여행을 거의 해보지 못했다는, 신혼 여행조차 가본 적이 없었다며 아이처럼 설레여하는 현존하는 최고령의, 그리고 최고의 발레리나 강수진으로 문을 열었다. <땡큐>는 바로 이렇게 여행의 설레임에 들뜬, 새로운 이들을 만나는 긴장감에 달뜬 그 감정을 함께 공유하면서 시청자로 하여금 함께 여행을 떠나게 만든다.

<땡큐>란 프로그램이 함께 여행을 떠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좁은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지는 토크 프로그램이었다면, 아마도 첫 방부터 진부하다, 뻔하다는 평가가 나왔을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였다 해도, 물론 예능 프로에는 생소한 인물들이지만, 사람 사는게 거기서 거기인 이상 뭐 그닥 새로울 게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 것이기 십상이니까. '지드래곤'이 과거의 잘못을 자숙하며 그것을 통해 자신이 오만했었음을 뼈저리게 반성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과연 제주도 푸른 밤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나이많은 누님과 형을 위해 손을 떨며 요리를 한 다음이 아니었다면, 진실한 '공명'이 느껴질 수 있었을까? 하지만 '제주도'의 푸르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짙은 먹빛의 바다와, 한없이 펼쳐지는 하늘, 그리고 대화의 배경이 되는 거대한 아쿠아리움에, 오붓한 저녁 식사를 나눌 수 있는 외딴 집의 부엌들은 보는 사람조차 긴장의 끈을 늦추고, 여행지에서 정든 낯선 이의 사연에 귀 기울이듯 출연자의 토로에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열게 만든다.

 

 

 

 

 

주제가 있는 힐링

지금까지 파일럿 프로그램을 포함하여 3회를 거쳐 온 <땡큐>의 가장 큰 장점은 우선 식상하지 않은 출연자의 조합을 들 수 있겠다. 첫 회 이 시대 대표적인 멘토 '혜민스님'을 비롯하여, 두번 째, 사진작가 김중만과 만화가 이현세에, 이제 세번 째, 강수진에 지드래곤, 김미화까지, 그 한 사람만으로도 '힐링 캠프' 2회분은 충분히 뽑아낼 수 있는 출연진을 데리고 여행을 다니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기존 프로그램에서 볼 수 없는 신선함과 진지함을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땡큐>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저 중구난방 출연자들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공통 분모를 찾아내어, 하나의 주제로 프로그램을 끌고 간다. 아직 프로그램의 성격을 찾아가는 시기의 첫 회가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땡큐>의 지향점을 찾는 시간이었다면, 늙수그레한 이현세와 김중만을 위해서는 '아버지'라는 주제를 끌어와,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그리운 아버지와, 아버지가 되어가는 자신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풍부하고 깊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세번 째, 과연 강수진, 김미화, 지드래곤 이라는 이질적 조합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금증을 자아냈던 <땡큐>는 그 주제로 '당신의 인생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를 제시했다.

한때 개그우먼임에도 불구하고 시사 프로까지 진행하는 저력을 내보이던 하지만 단 한 번에 그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의 일터에서 밀려나 3년의 시간을 보낸 김미화, 타의에 의한 김미화와는 다르지만 역시 단 한번의 실수로 무대에서 떠나 있어야 했던 지드래곤, 현존하는 최고의 발레리나이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 오랜 시련의 시간을 거쳐야 했던 세 사람에게서 <땡큐>는 시련의 시간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 본 이야기를 꺼내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전혀 달랐던 세 사람이 그 이야기를 하게 되니, 활동 영역의 차이, 나이의 많고 적음의 유무와 상관없이 공감대를 나누며 서로의 이야기에 끌려 들었고, 더불여 시청자들도 그들의 사연에 귀기울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돋보인 것은 MC격인 차인표였다. 최고의 배우는 되지 못했을 지 몰라도, 차인표로서 성실하게 살아낸 그의 삶이, 종교가 다르든, 나이가 많던 적던, 그 누구를 만나도 대화가 되고, 어우러질 수 있는 넉넉한 품새를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땡큐>라는 프로그램을 여유롭게 이끌어 가도록 만든다. 뿐만 아니라, 15일 방송에서도 보여지듯이, 강수진이라는 발레리나를 만나기 위해 실제로 주변 지인에게 부탁해 발레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삶이 어떤가 알아보고, 강수진과 지드래곤의 책까지 읽어가며 만남을 준비해온 철저함이, <땡큐>라는 프로그램을 그저그런 토크쇼에서 출연자의 삶에 '공감'할 수 있는 '힐링' 프로그램으로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결정적 견인차 역할까지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3. 3. 16. 09:20

200억 이란 엄청난 제작비로 홍보를 했던 <아이리스2>는 제작비가 무색하게 드라마가 시작된 이후로 내리 시청률 하강 곡선을 탔다. 심지어 한 자리수에, 꼴찌까지 찍었다. 그러던 <아이리스2>가 남과 북의 갈등이 본격화 되면서, 또 사라졌던 남주인공 정유건(장혁 분)이 돌아오면서 조금씩 나아질 기미가 보인다.

 

핵- 현실적 긴장감

씁쓸한 개그지만 세계에서 가장 액션 영화를 찍기 좋은 곳은? 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대한민국이다. 그 이유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의 대치, 이 보다 더한 현실적 긴장감을 주는 스토리가 없으니까이다. 헐리웃 액션 영화들이 한 김 빠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동서 냉전의 해체였고, 그래서 요즘 헐리웃 액션 영화들은 하다못해 뉴욕 거리의 시위 군중까지 끌어다 악의 세력을 구축하고자 애를 쓰고, 그 중 단골로 등장하는 세력이 바로 '북한'이다. 그러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게 우리나라 제작자들일진대, 막상 영화나 드라마에서 남북의 대치란 소재는 너무나 현실적이라 그럴까, 언제나 '뜨거운 감자'이다.

영화 <베를린>은 정권 교체기의 북한 지배층의 이권 장악 과정에서 희생된 스파이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소해진 남북의 문화처럼, 극장을 찾은 사람들은 생경한 북한 말을 외국어처럼 알아듣기 힘들어 했고, 북한 권력층의 음모를 헐리웃 영화 속 음모보다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제작진 측에서는 이 정도만 던지면 당연히 '응' 하고 맞장구를 쳐올 것에서 '??' 하는 반응이 오니, 난감할 수 밖에.

<아이리스2>의 경우는 드라마 속 상황과 현실이 엇갈려 현실감을 살려주지 못한 케이스이다. 사실 어느 액션 영화든, 드라마든, 퍼즐 맞히듯 딱딱 들어맞는 스토리는 충분 조건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호강을 시원하게 해줄 액션 요건이 어느 정도 갖춰지면, 허술한 스토리는 욕하면서도 눈감고 넘어가주는 경우가 많으니. 그런데 <아이리스2>는 방영하자마자 허술한 스토리가 우선 도마에 올랐다. 그렇다고 액션 장면이 그렇게 나쁘지도 않은데 말이다.

그건 상당부분 <아이리스2> 속 남과 북의 상태가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에게 현실감있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리스2> 속 남과 북은 늘 대화를 하려고 하고 평화를 추구한다. 그런데 '아이리스'란 테러 집단으로 이해 남과 북의 평화협상은 늘 엇물리고 방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요즘 날마다 텔레비젼 뉴스를 통해 보는 남과 북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저쪽에서 '불바다' 그러면, 이쪽에서 '맞대응'하면서 장군멍군 위기감을 고조하고 있는데, 드라마는 한가롭게 평화 협정 어쩌고 하고 있으니, 그런데 거기에 음모 세력이라니, 남의 다리 긁는 거 같은 것이다. <아이리스2>의 북한 정부는 그렇다 치고, 남한 정부는 '햇볕 정책' 중이다. 그 정권 물러간 지가 언젠데. 그러니, 드라마에 현실감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던 <아이리스2>가 14일 방영분에서, 핵이 등장하니, 드라마가 달라졌다. 기본적 관계는 다르지 않지만, 북한쪽에서 자기쪽 참가자들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핵 미사일까지 발사 강행을 하려고 하고, 거기에 대해 남쪽 역시 숨겨진 핵을 들먹이며 '딜'을 하니, 날마다, '핵무기 개발'을 코에 걸고 남한을 협박하는 북한다웠달까? 버튼 하나에 대한민국의 상당수가 초토화될 수도 있는 현실적 긴장감이 되돌아 왔달까? 물론 씁쓸한 현실감이다.

 

 

 

 

돌아온 주인공

남자 주인공 정유건이 총에 맞아 기억을 잃고 아이리스의 '켄'이라는 암살자로 활동하는 동안, <아이리스2>는 여주인공 이다해의 시점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이다해를 옆에서 흠모하는 또 다른 아이리스 요원 서현우(윤두준 분)의 시점에서 전개되었다.

안그래도 초반에 남여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가 충분히 무르익지도 그로 인한 정서상 공감대도 이뤄지지 않았는데, 남자 주인공은 사라지고 뜬금없이 또 다른 사랑이 등장한 것이다. 장혁도 고전했는데, 윤두준이라니!

아이돌의 문제는 비단 그들의 준비되지 않은 어설픈 연기력만이 아니다. 아이돌이 왜 아이돌인가? 특정 팬덤을 기반으로 한 특정 연령층의 스타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저 텔레비젼을 시청하는 사람들 눈엔 아이돌 스타가 아니라, 처음 보는 신인 배우이기가 십상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배우가 남자 주인공을 대신해 어설프게 여주인공과 사랑 이야기를, nss내에서의 활약을 하는 걸 꾹 참고 지켜보는 시청자들이 어디 있겠는가? 바로 리모컨만 돌리면 조인성과, 주원이 대기하고 있는데.

그런 시청자의 반응이 수렴이 된 것인지, 아니면 스토리 상 그럴 때가 된 것인지, 이번 주 <아이리스2>는 드디어 장혁이 남자 주인공으로서 자기 역할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추노>에서도 그랬지만, 장혁이란 배우는 고난 속에 피어날 때 배우로서 진가를 발휘한다. 안타깝게도 <아이리스2>가 초반에 반응을 얻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배우로서 장혁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이유도 있다. 심지어, 그가 기억을 잃자, 주인공임에도 5분 정도의 존재감으로 빛을 잃기 까지 했다.

14일, 그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진 리에(유민 분)라면, 지난 주 지루한 수연과 현우의 이야기를 할 게 아니라, 리에와 유건의 이야기를 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좋은 드라마는 주인공을 잘 활용할 줄 아는 드라마이다. 이제서야 빛을 발하기 시작한 장혁의 연기를 보면서,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안타까워 하는 말이다.

by meditator 2013. 3. 15. 09:47

sbs의 드라마 <야왕>이 연일 상승세다. 물론 회에 따른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방영하기만 하면 1등은 '따논 당상'이라는 <마의>와 백중지세에 있는 드라마는 아마도 <야왕>이 처음일 것이다. '대물 야왕전'이라는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야왕은 2012년 오랜만에 복귀해 <옥탑방 왕세자>로서 작가의 저력을 확인시켜준 이희명 작가에 의해 새롭게 각색된 드라마로,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중심에 '악녀' 주다해가 있다.

 

 

대한민국 드라마의 성공 요소 제 1번, 확실한 악녀의 존재

kbs2 의 주말 드라마를 제외하고 인기를 좀 끌었다싶은 드라마치고 '악인 본색'을 확실하게 드러내지 않은 드라마가 거의 없다. 그나마 mbc의 낯을 살려주는 드라마 <백년의 유산>이 무엇인가? 여러 그럴싸한 장치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고부갈등이요, 거기서 '트러블 메이커'는 바로 지극히 비상식적이고 무지막지한 시어머니의 존재요, 그녀의 자기 아들 사랑아닌가 말이다. 작년 최고의 시청률 <해를 품은 달>은 물론, 하반기에 꽤 반응이 좋았던 <착한 남자>, 그리고 심지어 케이블 일일 드라마임에도 인기를 끌었던 <노란 복수초> 조차 말도 안되는 악행으로 치달린 악녀가 있다. 이렇게 대한민국에서 인기 좀 끌고 싶다 그러면 가장 손쉽게 쓸 수 있는 도구가 바로 '절대 악녀'이다. 오히려 인기가 좀 있었다 싶은 드라마 중에 그렇지 않은 드라마를 찾는 게 더 쉬울 만큼.

그 옛날 이야기 속 팥쥐 엄마나, 장화 새엄마처럼 드라마 속 여자들은 자신의 욕망에 도달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마치 남성은 상식적이며 이성적인데 비해, 여성은 감정적이며 충동적이라는 우리 사회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선입견에 충실히 따라, 드라마 속 여성들은 마치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하면 그곳이 어디든 뒹굴고 절규하는 아이처럼, 씩씩거리며 자신의 것을 향해 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드라마 속 남성들의 욕망이 소외받은 존재의 신분 상승을 통하 자기 실현이라든가, 가족의 원한을 갚기 위한 복수라는 이성적 수단인 반면에, 여성들의 욕망은 대부분 빼앗긴 사랑, 빼앗긴 가족 속의 존재 라는 비이성적이고 감성적인 판단에 근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야왕>의 주다해는 꽤 신선한 캐릭터이다. 주다해는 자신을 위해 헌신한 남자 하류를 버리고 성공을 위해 백산이라는 엘리베이터를 거침없이 올라타고, 외려 버려진 남자 '하류'가 그녀에 대한 복수를 하고자 버둥거리니, 이전 드라마의 남녀 관계가 역전이라도 된 듯하다. 하지만 18회까지 온 <야왕>의 주다해가 제법 그럴 듯한 욕망의 화신인가라고 질문을 던져 보면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오질 않는다. 그저 그녀는 욕망의 에스컬레이션을 위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범죄를 저지르는 '싸이코패스'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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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명 작가의 장기, 악녀 홀릭

그간 이희명 작가의 작품들을 훑어보면, 인기를 끌었던 작품들에는 대부분 '내로라하는' 악녀들이 있었다. 천사의 가면을 쓴 채 엄청난 질투심과 야심을 분출했던 토마토의 디자이너 '윤세라(김지영 분)', 악녀로 인기를 끌어 주연급으로까지 성장한 계기가 되었던 <미스터 Q>의 황주리(송윤아 분), 그리고 최근작으로는 <옥탑방 왕세자>의 홍세나(정유미 분)가 있다. 이들 악녀들은 주인공 못지 않은 '포스'를 내뿜으며 드라마를 지배해 간다. 오죽하면 <옥탑방 왕세자> 당시 '세나의 난'이라고 드라마 시청자들을 뿔나게 할 만큼 <옥탑방 왕세자>를 이끌었던 것이 바로 홍세나의 악행이었다.

악녀의 악행으로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건 매력적이다. 조금이라도 지루해 지는가 싶으면 바로 리모컨으로 손이 가는 시청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데 눈이 번쩍 뜨이는 악행만한 볼거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대부분의 악인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덮기 위해 또 악행을 저지를 수 밖에 없으니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발생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다 보니 정작 주인공들이 이야기의 외곽으로 밀려나가는 불상사가 벌어지게 된다.

그래서 마치 이번에는 그간 조연으로 밀려나 속시원하게 펼쳐보지 못한 악녀 이야기를 맘껏 해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이희명 작가가 이번에 택한 것은 악녀가 주인공인 <야왕>이다.

그런데 그간 악녀가 이야기를 지배했던 모든 한국 드라마가 그러하듯이 악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야왕>에서 조차 속시원한 악녀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려지는 것은 그저 수없이 되풀이되는 악행뿐이다. 아이가 죽어도, 그래도 한때 같이 살았던 남자가 죽어도 잠시 눈물을 흘리고 다시 또 사건을 벌이는 주다해를 보며, 그녀가 또 무슨 일을 어떻게 벌일까 궁금해지기는 해도, 굳이 대통령 영부인까지 넘보는 그녀의 욕망을 이해하게 되지는 않는다. 사건은 있되, 그 속에 사람은 없달까.

<야왕>이란 드라마가 끝나고 주다해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욕망의 화신으로 오래 자리 잡을까? 아니 오히려 그보다도 하루의 피로를 피튀기는 게임 한 판으로 날리듯, 주다해의 악행을 보며 던진 욕의 배설로 그저 끝나는 드라마이기가 쉽지 않을까. <해를 품은 달>이나 <착한 남자>를 이제 좋은 드라마로 기억하지 않듯이. 문제는 이런 드라마들이 인기를 끌면 끌수록 되풀이 되는 악행처럼, 그저 꼬리에 꼬리를 문 악행에 의존한 드라마들만 양산된다는 사실이다.

by meditator 2013. 3. 13. 11:31

지난 주 데뷔 후 예능 최초 출연 한석규에 이어, 이번 주 15년 만에 예능 출연 이병헌까지, <힐링 캠프>가 연일 게스트 초청 자체로 홈런을 날리고 있다. 동시간대 시청률과 무관하게 이런 '대박' 게스트들의 출연은 두고 두고 화젯거리를 낳으며 <힐링 캠프>의 존재 가치를 올려줄 것이다. 그 예전 <무르팍 도사>가 그런 것처럼.

그런데 대통령 후보들을 비롯한 정치인들로 시작하여, 물론 영화 홍보라는 거시적 목적이 있지만 오랜만에 예능 나들이를 하는 연예인들이 많은 토크쇼를 놔두고 굳이 <힐링 캠프>를 찾아드는 것은 왜일까? 심지어 대통령 선거 기간 공평성을 운운하며 모 정치인들은 힐링 캠프의 출연을 소망하기까지 했다. 까짓 다른 토크 프로에 나가면 될 것을.

그건 아마도 <힐링 캠프>가 언뜻 보기엔 시청자가 궁금해 하는 출연자의 속살을 드러내 보이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한석규 편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듯이 게스트 자신이 마음 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자신만의 레시피로 요리 가능한 프로이기 때문이다.

 

 

무르팍 도사 vs 힐링 캠프

1인 게스트를 데려다 놓고 그의 사정을 들어주는 토크 프로그램으로는 <힐링 캠프>뿐만 아니라 <무르팍 도사>가 있다. 한때는 <무르팍 도사>의 출연자가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강호동의 복귀와 함께 다시 돌아온 <무르팍 도사>는 해외 유명 연예인을 초청하는 등 화제성 있는 게스트 모시기에 애를 쓰고 있지만, 늘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 그리고 이른바 '대박'급 게스트들이 출연하는 곳은 <힐링 캠프>이기가 십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은 강호동의 복귀 이후, mc 자체에 의존성이 높은 <무르팍 도사>의 mc 강호동이 예전 만하지 못하다, 혹은 너무 예전과 똑같다 라는 평가는 받고 있는 것이 <무르팍 도사>의 큰 딜레마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게스트들 입장에서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르팍 도사>가 고민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찾는다 하지만 대뜸 큰 소리로 호통부터 치며 게스트를 혼비백산시켜 놓고, 그 와중에 게스트로 부터 이른바 '뜯어 먹을 거리'를 뺏어오는 방식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해명해야 할 무언가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방식을 통해 속 시원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일 기회를 노리려고 하겠지만 굳이 그러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게스트라면 장시간 강호동이란 '시베이라 호랑이'와 세 대결을 펼쳐야 하는 피곤함을 무릎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반면에 <힐링 캠프>는 제목부터가 힐링이다. 그런데 그 '힐링'의 주체 역시 게스트이다. 무르팍 도사의 '고민거리'와 힐링 캠프의 '힐링꺼리'는 게스트가 무언가를 해보고 싶어 하는 점에서 같다지만, 해명과 치유라는 서로 다른 과정을 거치게 되니, 게스트의 선택은 달라질 밖에. 더구나 무르팍 도사가 고민거리를 파고들면서 시청자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데 치중한다면, <힐링 캠프> 이경규의 돌직구는 출연자가 자기 이야기의 봇물을 터놓게 하는 계기가 된다. 무르팍 도사가 따지듯 이것은 이것이 아니냐 하는 동안, <힐링 캠프>는 한혜진이 맑은 눈을 가지고 게스트의 이야기를 공감해 주며, 이경규는 연륜에서 우러나온 응수를 해주고, 김제동의 그 특유의 해석을 곁들여 게스트 토크의 품격을 더해준다. 그 과정에서 같은 이야기라도 무르팍 도사에서는 마치 법정의 자기 변호 같던 것이, 힐링 캠프로 오면 한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로 변해가는 것이다.

이병헌 편에서 보듯이 <힐링 캠프> 측에서 준비한 질문은 그 옛날 '도너츠' 사건부터 '시계'까지 온갖 구설수들이 다 등장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더 센 것들이 등장할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 중 어느 것도 <무르팍 도사>처럼 강호동의 호통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하지 말아야 할 수위까지 이야기를 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 모든 이야기들이 세간이 잘못 알려진(?) 이병헌이란 사람의 온전한 제 모습을 그려내는 데 그저 필요한 도구일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알고보면 이병헌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를 보여주기 까지 할 것이다. 게스트들이 <힐링 캠프>를 찾아드는 매력은 그것이다. 최선을 다해 게스트들의 '힐링'에 복무하고자 하는 거!

 

 

 

힐링 캠프의 함정

이렇듯 그럴듯한 돌직구성 질문을 던지는 듯 하면서 게스트의 논리에 휘말려주는 <힐링 캠프>는 게스트를 한 사람으로 충분히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역으로 그것이 이 프로그램의 발목을 잡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병헌 편에서 보듯이 스스로 '재밌는 놈'이라고 자평한 이병헌은 위트가 넘치는 화술로 자신에게 씌워진 편견들을 하나씩 벗겨 나갔다. 중간중간 이경규나 한혜진이 슬쩍 다리를 걸어보기도 하지만, 그건 그냥 툭 돌부리에 걸려 깨금발을 한번씩 해보는 정도의 것으로, 기본적으로는 이병헌이 하고자 했던 말의 취지를 방해하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그의 설명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다보면, 한석규 편에서 드러나듯, 특히나 '거물급' 게스트들이 등장했을 경우, 시청자들이 궁금해 하는 사실 보다는 게스트의 입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실(?)'만이 강조되는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김래원 편에서 보여지듯이 그의 입장에서 말하는 첫사랑이 어느 한 편의 윤색된 진실로 전달되는 경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기본적으로 '힐링'이라는 목적을 가진 이 프로그램은 가학적으로 게스트를 몰아세울 수 없고, 애초에 그럴 의도를 가지지도 않는다.

그러기에 '이성민'이나 '김강우'나, '김성령' 처럼 시청자들에게 상대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게스트들이 등장했을 경우에는 그리고 '홍석천'처럼 솔직담백한 게스트들이 등장했을 때는 게스트도 힐링이 되고, 시청자들도 힐링이 되지만, 정치인이나, 예능감이 뛰어난 게스트들이 자신의 목적에 맞게 요리하고자 한다면, <힐링 캠프>는 얼마든지 그들의 홍보용 프로그램으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담백한 속내이든, 의도를 가진 '포장'이든 시청자들은 그것을 같은 무게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포장이 진실로 전달이 될 수도 있고, 포장에 질려버린 누군가는 진실조차도 위선이라 오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3. 3. 12. 09:52

한때는 아이돌을 드라마에 넣는 것이 큰 화젯거리였던 적도 있었지만 이젠 드라마에 아이돌 한 둘쯤 들어가는 건 예사인 시대가 되었다. 오히려 아이돌이 투입되지 않은 드라마가 그걸 가지고 기사화시킬 정도로 연기란 아이돌이 해야 할 수많은 선택 중 가장 용이한 선택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대세인 흐름과 달리 드라마 속 그들은 여전히 툭 불거진 채 드라마의 흐름을 깨는 경우가 빈번하다. 끼워넣기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대세는 되었지만 아이돌의 명망을 뛰어넘는 연기자는 막상 쉽게 조우하기가 쉽지 않다.

 

아이리스2의 시청률이 자꾸 떨어지는 이유는?

엄청난 제작비를 들였다고 대대적으로 홍보를 한 <아이리스2>가 안타깝게도 이번 주 드디어 시청률 한 자리대로 떨어졌다. kbs측은 떨어지는 <아이리스2>에게 꺽인 날개가 홍보라고 생각한 듯 지난 주 일요일 <다큐3일> 시간에 창사 특집이라며 <아이리스2>의 제작 과정을 보여 주었다.

다큐는 진실했으며 고생하는 배우들의 면면을 보자니 굳이 이범수의 시청률이 아니라 전 스태프들의 노력의 결과로 인정해주셨으면 좋겠다는 그 말이 아니라도 <아이리스2>를 보고 싶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 뭐하겠는가? 그 다큐를 보고 마음이 울려 <아이리스2>로 채널을 돌린 시청자 중 과연 몇 명이나 30분을 넘길 수 있었겠는가?

 

 

이번 주 수요일에 방영된 <아이리스2>는 시작과 동시에 비스트의 멤버, 그리고 <아이리스2>에서 서현우 요원 역을 맡은 윤두준의 사랑 놀이가 한동안 방영되었다. ppl이 분명해 보이는 제과점에 레스토랑에 심지어 놀이공원까지, 주인공인 정유건 역의 장혁도 해보지 못한 온갖 낭만적인 상황의 주인공이 바로 윤두준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윤두준 차례가 끝나자, 이번엔 엠블랙의 이준 차례였다. 뜬금없이 신입 요원들이랑 도복을 입고 힘겨루기를 했다. 뻔히 이준을 배려한 분량 챙기기였다.

그걸 보자니, 저절로 한탄이 새어 나왔다. 지금 <아이리스2>가 그렇게 여유있게 아이돌 챙겨줄 처지인가? 라고. <풀 하우스>에서 젊은 남자 가수를 데려다가 좋은 호응을 얻었던 표민수 피디에겐 여전히 아이돌 가수에 대한 환타지가 남아있기라도 하는 건지.

정유건이 기억을 잃은 채 켄이라는 아이리스의 킬러로 활동하는 상황임에도 여전히 극의 주도적 흐름은 nss요원들이 중심이 되어 끌고 간다. 이범수 쪽이나, 레이 쪽의 비중이나 파급력이 결정적이지도 않다. 그런데, 이렇게 남자 주인공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놓은 상황에서 nss를 이끄는 것이 바로 아이돌 출신의 배우들이요, 그 중에서도 정유건을 대신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윤두준이다.

지수연 역의 이다해는 사실상 nss 팀장이라고 하더라도 '오로지 정유건'에 대한 상실감과 그를 되찾기 위한 열정으로 인해 nss의 활동과 흐름을 달리 한다.

그러고 보니 상사와의 지휘 체계도 윤두준을 통해서요, 정유건이 없는 틈을 타서 '꿩 대신 닭이 되어보려는' 사랑 이야기도 윤두준이다. 즉, 엄밀하게 지금의 nss의 실질적 리더는 윤두준이어야 하는 건데, 아쉽게도 배우 윤두준에게 그런 존재감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이범수의 반전'이라며 화제를 만들려 해도 이야기는 뻔해 보이는데, 그걸 끌고가는 배우의 연기 조차도 설득력이 없으니 그걸 참아낼 진득한 시청자가 몇 명이나 있겠는가 말이다.

 

 

 

장미인애 사용 설명서

얼마 전 인터뷰를 한 <옥탑방 왕세자>의 신윤섭 피디는 '연기는 타고나는'면이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탑스타라고 하는 배우들도 여전히 '발'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데 '아이돌'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누군가를 평가하는 일이 공정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오랜 훈련도 없이 그 자리에서 그 배역을 하게 된 것은 그들이 '아이돌 출신'이기에 가능한 일이므로 연기를 하는 한에서 불가피하게 따라다닐 수 밖에 없는 이름표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그런 흐름이 대세가 되어간다면, 하지만 극중에 투입된 아이돌들이 함량 미달이라면 시청자들의 인내를 시험할 것이 아니라 제작진의 운영의 묘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2012년 말에 방영된 <보고싶다>는 그런 의미에서 모범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드라마에서 문제가 된 인물은 '아이돌'이 아니었다. 오히려 남자 주인공 박유천이 아이돌이었고, 그의 에이전시가 그와 함께 '끼워넣어' 팬들의 반대 서명 해프닝까지 불러 온 인물을 배우 장미인애 였다.

장미인애가 맡은 역할은 애초의 시놉시스 상 죽은 김형사의 딸로 한정우와 같은 집에서 지내며 한정우를 짝사랑하는 꽤나 비중있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장미인애는 그전에 출연했던 아침 드라마에서 연기력 부족으로 주인공이었지만 결국 비중까지 조연 이하로 줄어든 검증되지 않은 연기력의 배우였다.

그런데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막상 <보고싶다>가 방영되었을 때 장미인애의 연기력으로 인한 논란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설정상 비중있는 조연이었던 '김은주'는 마치 황금율이라도 되는 듯이, 한 회에 한 씬 이상을 등장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절대 그 씬을 이끄는 적이 없이. 장미인애 개인으로 보면 안타까웠을 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드라마도 살고 배우도 크게 욕먹지 않고 끝낸 현명한 처사였다고 본다.

 

 

<야왕>의 백도훈 역의 유노윤호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주다해와 결혼을 한 '백학' 그룹의 왕세자 백도훈은 <야왕>이란 드라마에서 꽤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역할이다. 하지만, 막상 드라마에서 백도훈은 언제나 극의 언저리에서 빙빙 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주 화요일 <야왕>에서 주다해의 비밀을 알게 된 백도훈이 절규를 하는데, 가장 비극적이어야 할 순간에 시청자들은 웃음을 삼켜야 했듯이, 백도훈 역의 유노윤호는 꽤 나아졌다고 하지만 이 사람을 아이돌 이상의 '배우'라 칭해주기에는 여전히 함량 미달인 것이다. 하지만 <야왕>이란 드라마에서 그의 존재감이 거의 없다보니, 이 드라마의 시청률에 해가 되지는 않고 있다.

물론, <보고싶다>의 김은주가, 그리고 <야왕>의 백도훈이 원래 시놉대로 잘 연기할 수 있는 배우들에게 돌아갔다면 우리는 더 좋은 드라마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가 '수출 산업'이 되고, '제작 환경'이 핑계가 되는 세상에서 이제는 '하지마라'가 아니라 그나마 '운영의 묘'라도 살려보라고 말하는 것이 '최선'이 되었다. <아이리스2>의 제작진 역시 '운영의 묘'를 더 늦기 전에, '운영의 묘'를 살리기 바란다.

by meditator 2013. 3. 8. 09:24

인터넷 용어 중에 '관심병자'라는 단어가 있다. 게시판에 튀는 사진이나 글을 자꾸 올리는 사람들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이다. 한 마디로 '주위의 이목을 끌기 위해 과도한 행동을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낸시랭'하면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대표적 관심병자로 여겨지는 사람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선거를 비롯해서 대중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이슈가 있을 때마다 그 장소에 특이한 옷차림으로- 고양이를 어깨에 거는 건 약과, 이젠 비키니까지- 나타나 옷차림 이상의 기가 막히는 행동을 해서 주목을 안할래야 안할 수 없게 만드니까.

 

낸시랭 본인은 자칭 행위 예술가라고 하지만, 남의 나라 여왕 즉위식에 나타나 여왕 코스프레를 하고, 선거에 대한 독려 행위라며 광화문 한복판에서 비키니를 입는 행동은 늘 본인의 의도랑 상관없이 대중적 이슈를 이용해 자신에 대한 관심을 끌려는 행위 이상으로 보여지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주장하는 바 전위적 예술 행위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없었으며, <라디오 스타>에도 나왔듯이 등장한 모든 사람들에게 호의적 평가가 뒤따르는 <인간 극장>의 출연조차 된장녀라는 숱한 악성 댓글로 프로그램 게시판이 도배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그런 낸시랭이 <라디오 스타>에 출연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어느 프로그램에 출연하거나 혼자서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온 사람처럼 이질적이다못해 채널을 돌리게 만들었던 낸시랭이 <라디오 스타>에서는 그저 '희한한 사람' 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2월 27일과 3월 6일의 라디오 스타는 <희한한 사람들>의 특집으로 네 명의 게스트를 불러 모았다. 유세윤과 함께 uv의 멤버로 활동하는 뮤지션 뮤지, 외국인으로 독특하게 욕을 잘 하는 개그맨으로 샘, 아이돌이지만 아이돌같지 않은 인피니트의 성규, 그리고 설명이 필요없는 낸시 랭.

물론 성규의 출연은 구색을 맞추기 위한 조합인 것처럼 나머지 세 사람에 비해 아이돌스럽지 않다는 성규의 '포스'는 나머지 세 사람에 비해 '멀쩡'했지만, 이 특집 자체로만 봤을 때, 두 손이 마구 오그라지다 못해 짙누르는 손톱 자국이 손바닥에 남도록 낸시랭의 '뱅의 해' 퍼포먼스나, '그때 그사람' 노래를 제외하고는 오히려 낸시랭의 존재감은 다른 두 사람 뮤지나 샘에 비해서는 밀리는 편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이젠 낸시랭이 해왔던 퍼포먼스나 말들이 뻔한 것이 될 만큼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것이 되었다는 것일 수도 있고, 나머지 두 사람이 더 눈에 띨 만큼 사실은 낸시랭이라는 사람의 '돌출'이 어찌 보면 그저 그런 것일 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제목이 아예 <희한한 사람들>인 것처럼 뮤지나 샘, 그리고 낸시랭과 같은 사람들이 오늘날 연예 미디어에서는 '깜짝 쇼'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 예전 서커스단 시절에 본 접시 돌리기나, 공중 그네 등의 본 공연에 앞서 얼굴이 이상하게 생긴 사람, 몸이 지나치게 뚱뚱한 사람을 내보이듯이 그저 관중들의 놀라움을 이용해 쇼에 집중을 시키던 그 방식 그대로인 것이다. 그 시절 똑같은 사람인데도 이상한 사람이 궁금해서 구경을 갔던 그 마음으로 사람들은 여전히 '희한한 연예인'을 구경하고 욕을 한다. 세상은 발전했다고 하지만 인간의 진화가 신석기 시대에 멈추었듯이 인간의 놀이 방식 역시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여전하다.

그러기에 그런 인물들의 등장은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을 정도로 놀라우면 놀라울 수록 '이용가치'가 있는 것이었고, 오늘날 게시판의 악성 댓글이 어쩌면 그들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낸시랭이 댓글이 크리에이티브 하지 않다고 불평을 늘어놓지만, 어쩌면 이제 대중들에게 낸시랭은 그 돌발 행위조차도 뻔한 사람이 되어간다는것이고 어쩌면 조만간 그 뻔한 돌출 행위조차도 주목받지 못할 때가 올 수도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이제는 조금 뻔해져가는 낸시랭이라는 존재의 <라디오 스타>의 출연은 비록 쇼 프로가 가지는 이벤트 성의 측면에서는 이미 좀 진부한 소재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낸시랭이라는 사람을 희한한 구경거리가 아닌 뱀띠해 퍼포먼스가 클럽에서의 춤과 다르지 않아보이지만 '제 멋에 겨워 어쩌지 못하는' 자칭 '행위 예술가'로 온전히 보아내는데는 순기능을 하게 된 듯하다. 그녀보다 더 기발하고 희한한 다른 두 사람으로 인해 그녀의 말들은 '희한함'을 넘어 그럴 수도 있다는 한 줄기 이해의 빛을 얻었고, 오그라들거나 오해를 샀던 의 행동들도 해명의 기회을 얻었다. 우리가 뮤지나 샘의 행보를 꼭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듯이, 낸시랭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저 그런 사람이 있다고 흔쾌히 인정하면 그만인 것이다.

유리벽 속의 구경거리가 숨쉬는 사람처럼 여겨졌던 시간이었다.

by meditator 2013. 3. 7. 11:49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컴퓨터, 핸드폰, 텔레비젼 없이 살기, 그리고 쓰레기 안만들기를 거쳐 드디어 <인간의 조건>이 자동차 없이 1주일을 살기로 했다. 김준현의 말대로 '~없이 살기'의 생활을 떠올렸을 때 누구나 한번쯤은 해볼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 그것이 바로 '자동차 없이 살기'이고 드디어 <인간의 조건>은 그 과제에 도전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인간의 조건>판 자동차 없이 1주일 살기는 만만치 않다.

 

느림의 미학? 아니 느림의 고행

'자동차 없이 1주일 살기' 미션 수행을 위해 제작진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평지에 있던 아지트를 마을 버스도 다니지 않는 부암동 산꼭대기로 옮겨 자동차가 없는 생활을 온전히 즐길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평지에서 부터 시작하여, 완만한, 조금 가파른, 심하게 가파른 4단계의 500여 m의 경사지를 올라가야 도착하는 새 아지트는 내려가는 것은 물론 올라가는 것은 거의 등산 수준이다. 어디 그뿐인가. 평지에 도착해서도 다시 버스를 타야 지하철을 탈 수 있는 외진 동네는 그간 자동차 없인 절대 이동하지 않았던 삶에 익숙한 6 멤버들에겐 동네 지도와 지하철 노선도가 있어도 온통 헤매게 만드는 미로 그 자체다.

'느림의 미학'이라며 여유를 부리며 주변을 둘러보며 길을 떠났던 멤버들이지만 온몸이 비라도 맞은 듯 흠뻑 젖어야 도착할 수 있는 길을 걸어 집에 돌아왔을 때는 다들 방전이라도 된 듯 지쳐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면서, 오로지 자가용이라는 이동 수단에만 의존하던 습관은, 버스 값은 얼마인지? 지하철은 어떻게 타야 하는지? 교통카드는 어떻게 사야 하는지까지 모든 것에서 어리버리하기만한 '서울 촌놈' 그 자체 였다.

더구나, 불규칙한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는 연예인이기에 12시 정도는 훌쩍 넘어서는 하루 일과는 일보다 '귀가'라는 고민에 안절부절하게 만들었고, 겨우 꼼수로 생각해낸 세그웨이나 전기 자전거의 수단들도 생각만큼 만사형통이 아니니, 그 어느때보다도 바쁜 스케줄을 소화해내고 있는 이들에게 자동차 없는 1주일은 버거운 과제일 수 밖에 없다.

 

 

함께 걷자 이 길을

하지만 벌써 세 번째 미션을 부여받은 멤버들은 불가능해 보였던 과제들을 수행해낸 그 저력으로 자동차없이 사는 일주일을 극복해 나가려고 한다.

모 케이블 방송에 출연하여 과도한 체중으로 인한 건강상의 적신호를 알게 된 김준현은 자동차 없이 살기의 1주일을 본격적인 '다이어트'의 실천 기간으로 삼기로 한다. 비록 힘들게 걷고 난 후 들이킨 한 대접의 물때문에 체중의 감소는 없었지만, 옷이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며 걷는 김준현의 모습을 보노라면, 그의 1주일은 정말 그를 '호올쭉' 하게 만들 거라는 확신을 준다. 그만이 아니다. 그간 장시간 차에 쭈그리고 앉은 자세 때문에 생긴 요통과 목의 협착으로 고생하는 김준호에게 의사가 내린 처방이 '많이 걷기'라니, 김준호의 자동차 없는 1주일은 '일도 하고, 병도 고치는' 일거양득의 시간이 될 것이다. '걷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는 책도 있듯이, 가파른 산비탈 위에 있는 집을 향해 오고가는 길은 고달프지만, 그 과정에서 분명한 것 하나는, 돈 들여 운동하지 않아도, 저절로 운동이 되니, 여섯 멤버 모두의 건강이 자연히 좋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뿔뿔이 매니저가 기다리는 자신의 차로 돌아가 혼자 꾸벅꾸벅 졸며 돌아오던 길을, 애써 다른 동료가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함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 걷는 과정에서 차를 타고서는 그저 스치듯 지나치던 거리의 집들이 새삼스레 다가오는 것은 물론이고. 늘상 그렇듯이, 환경을 생각하며 시작하는 '미션' 이지만, 언제나 그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돌아오는 것은 '보다 인간다운 삶'이다.

김준현은 말한다. 어느덧 연예인이라고 지레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가는 게 어색해 했는데, 막상 사람들 속에 섞여보니 생각만큼 서먹하지 않았다고, 연예인이라는 삶에 갇혀 늘 보는 사람만 보다가, 몇 년 만에야 나이가 드신 분도, 어린 학생도 접하게 되었다고.

이런 김준현의 말은 굳이 연예인이라는 특정 직업의 특성상 두드러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자동차라는 개인적 공간에 갇혀 '자폐적 삶'에 어느덧 익숙해져 버린, 그리고 그런 삶을 지향하는 현대 문명의 지향에 대해 생각해 볼 거리를 던져준다.

by meditator 2013. 3. 3. 02:31

3월1일 sbs 밤 11시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방영되었던 <땡큐>가 당당하게 정규 프로그램으로 입성하였다. 지난번 파일럿 프로그램을 함께 했던 혜민 스님이 자신의 학교가 있는 뉴욕으로 떠나고 남은 박찬호와 차인표가, 만화가 이현세 씨와 사진작가 김중만 씨와 함께 남해로 여행을 떠났다. 서로 다른 연령의, 서로 다른 일을 하는 이 네 사람을 모은 <땡큐>는 이들의 공통점을 '아버지'로 잡고, 자신들의 딸들과 시간을 보내는 아버지 박찬호와 차인표에서부터 시작하여, 아버지란 '의무'에서 벗어난 '힐링' 여행으로, 그리고 이 아버지들의 아버지에 대한 눈물어린 추억담까지, '아버지'를 주제로 한 시간여의 프로그램을 채워나갔다. 지난번 파일럿 프로그램이 이 시대의 '대표적 멘토' 혜민 스님과 함께 한 '힐링'이 주제였다면, 이제 정규 방송으로 돌아온 <땡큐>가 꺼내 든 것은 바로 이즈음 텔레비젼을 통해 부쩍 빈번하게 등장하는 '아버지'이다.

<땡큐> 만이 아니다. 요즘 대세인 예능으로 떠오르고 있는 <아빠, 어디가?> 는 제목 그대로 아버지들이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리얼 다큐로 꾸민 것이다. 그뿐인가? 가장 시청률이 높은 주말 드라마 <내딸 서영이>는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부성애를 그려내고 있다. 한때 부모들의 상징이자 대표격이던 '엄마'는 한물 간 주제가 되어버리고, 아버지가 대세인 것이다. 그런 흐름에 따르기라도 하듯, <아빠, 어디가?>에 밀려버린 <남자의 자격>도 아버지의 사연을 모집하고 나섰다. 왜 새삼 아버지를 찾게 되는 걸까?

 

 

불쌍한 중년의 아버지

얼마 전만 해도 아버지라고 하면 신문 칼럼에서 조차 자식의 공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늦게 들어오는 것이 장려되는 존재였었다. 그때의 아버지들은 그저 나가서 돈만 벌어오면 가족으로서의 임무가 완성되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돈'으로 권위가 완성되던 시대의 아버지는 그 '돈' 덕에 집안에서 독재자처럼 말 한 마디로 군림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jtbc의 주말 연속극 <무자식 상팔자>의 독재자같았던 할아버지 이순재가 할머니의 이혼 소동 끝에 할머니의 눈치를 보는 처지로 전락하고, 한때는 대기업의 중책을 맡던 둘째 아들(송승환 분)이 알뜰한 부인 덕에 돈 한 번 제대로 못쓰는 꽁생원으로 전락한 것이 그 증거이다. 즉 '돈'으로 연명하던 권위는 세월에 따라 무색해 지고, 불경기가 계속되는 대한민국에서, 그나마 '돈' 조차도 마음대로 벌어지지 않으니 거기에 의지해 권위를 행세하던 아버지들의 처지가 궁색해 질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방송 속에 등장하는 중년 이후의 아버지들은 부쩍 불쌍해 졌다. <내딸 서영이>의 아버지도 아내와 딸도 나 몰라라 도박에 빠진 아버지였나 싶었는데 알고보니 일찌기 젊은 시절부터 부모님과 가족을 위해 자신이 하고 싶던 공부까지도 포기했던 젊은 가장이었었다. 그런데 하고자 하는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그만 나쁜 길로 빠져들게 된 것이고, 하지만 그에겐 여전히 자신의 아들과 딸이 자기 자신과도 바꿀 수 있을 만큼 가장 소중한 대상이라는 것이다.

즉, 사회에서 찬바람을 맞은 아버지들이 결국 믿고 의지할 곳은 가족 밖에 없는 것이다. 산업화 시대에 자신의 일과 그로 인한 성과에 매진하던 아버지들이, 거기서 상실감을 얻었을 때 그를 다시 붙잡아 세울 수 있는 곳이 가족이요, 살아갈 의미를 얻는 것도 역시나 가족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쩍 약해진 아버지들은 눈물을 흘리고 참회하며 가족들의 비위를 맞추며 가족의 일원으로 복귀하려 애쓰고 있는 중이다.

 

 

달라진 젊은 아빠들

중년 이후의 아버지들이 '돌아온 탕자'와 같은 위치라면, 젊은 세대는 가치관부터 다르다. 권위와 훈육 보다는 공감을 중시하고, 가족을 삶의 중심에 놓는다. 더구나 맞벌이가 보통이 된 요즘, 육아에서 아빠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전에 아이들이 방과 후에, 혹은 주말에 무언가를 배우러 온 문화 센터 등에 아이를 기다리는 젊은 아빠의 모습이 낯설지 않고, 가족과 함께 현장 견학을 하는 적극적 부성애도 찾아보는게 어렵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즉, 아빠 육아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 예가 바로 <아빠, 어디가?>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아빠들이다.

젊은 세대의 아빠들은 늘어나는 육아 휴직에서 알 수 있듯이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뿐만 아니라, 이전 세대의 일방적인 지시 위주의 자녀 교육에서 벗어나, 엄마 못지 않게 자녀의 교육 전반에 참여하는 적극성, 심지어, 엄마 못지 않은 바짓바람의 극성을 보이는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최근 대세로 떠오르고 있는 '아버지 신드롬'은 꼼꼼하게 따져 보자면 세대를 두고 그 양상을 달리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런 달라진 세대의 모습을 방송 프로그램들은 발빠르게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즈음의 '아버지 신드롬'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내 딸 서영이>에서 내내 소 닭보듯 살던 부부가 이혼을 요구하며 가출한 아내로 인해 새삼 아내의 소중함을 깨닫고 아내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 리무진을 동원하여 사랑 고백을 하는 에피소드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전히 현실에서는 일밖에 모르는 아버지, 아니 일 밖에 모를 수 밖에 없는 아버지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텔레비젼 시청권을 가진 여성 시청자들을 위한 위로의 판타지인 측면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더 이상 텔레비젼 속의 아버지는 예전의 그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3. 3. 2. 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