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개봉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새롭지 않았다.  이미  2018년 소니 픽처스가 개봉한 에니메이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스페인 히스패닉 혼혈 소년 마일스 모랄레스를 주인공으로 '스파이더햄',  '스파이더 느와르' 등등 평행 세계의 '스파이더맨'들을 소환해 지구를 비롯한 '멀티버스'의 위기를 구한 바 있다. 

당시만 해도 신선했던 설정, 하지만 '멀티버스' 속 히어로의 활약은 곧 <스파이더 맨; 노 웨이 홈>,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에 이르면 비록 원작의 설정이 그러하다 하더라도 어쩐지 히어로물의 생명 연장을 위한 '멀티버스'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기에 올해 아카데미상에서 유력한 여우주연상 후보로 거론된다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라는 장황한 제목을 가진 영화가 '멀티버스'를 배경으로 한다 했을 때 기대치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난 후 생각이 달라졌다. 여전히 서사적 콘텐츠로서 '멀티버스'의 가능성과 확장성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를 통해 확인했다. 그리고그것이 가능한 건 무엇보다 '모성'과 '가족'이라는 영화 자체가 가진 서사적 설득력으로부터 비롯된다. 

영화의 시작은 영수증 더미 앞에서 한숨을 쉬고 있는 중년의 여인, 양자경, 아니 에블린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 세대에게는 <예스 마담> 시리즈로, 그리고 <와호장룡>으로 익숙한 배우, 하지만 어느덧 그녀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서 시어머니 역할을 맡는 나이가 되었다. 그런 양자경이 이제는 미국으로 이민가 세탁소를 운영하며 찌들어 사는 여성이 되어 등장한다. 

위기의 세탁소, 위기의 에블린
하지만 왜 양자경이겠는가. 이 영화를 제작한 이들은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다시 한번 그들이 액션씬에 있어 일가견이 있음을 증명한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와 <어벤져스> 시리즈의 루소 형제(앤서니& 조)이다. 그들은 미국살이 수십년에도 여전히 미국말이 서툴러 세탁소마저 압류 위기를 맞이한 에블린이란 인물을 매개로, 그녀의 평행우주 속 또 다른 에블린들을 소환하여 양자경이란 배우가 가진 무공의 연기력을 아낌없이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모처런 <예스 마담>이나 <와호장룡> 시절의 그녀를 보는 듯 예리한 그녀의 손매와 날렵한 발품새를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반갑다.

또한 역시나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한 <스위스 아미맨>을 통해 황당하고 기발한 상상력을 보여주었던 다니엘 관과 다니엘 쉐이너트 감독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에서도 마이너하면서도 독특한, 하지만 결국은 따스한 감성의 코미디를 현실적인 중국인 이민 가정사를 배경으로 풀어낸다.  

 

 

영화는 제목의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각각 세 파트 이야기를 이끈다.  우선 everything을 통해 에블린이란 인물이 가진 모든 것, 하지만 그리하여 그녀가 그 나이가 되도록 가지지 못한 것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에블린은 고국에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릎쓰고 에드워드(키 호이 콴 분)을 따라 이역만리 미국으로 온다. 영화 속 '멀티버스'의 혼돈 속에 자신의 과거 속으로 들어간 에블린의 기억을 통해 소환되듯, 그저 '사랑'만 믿고 온 미국에서의 생활은 낡고 먼지 투성이인 세탁소의 문을 열 때만 해도 '이 세탁기가 모두 우리꺼야'하면서 기뻐하던 부부는 이제 '이혼 신청서'를 들이밀어도 시선조차 마주치기 힘든 부부가 되었다. 

오랫동안 그녀를 외면했던 아버지는 이제 늙고 병들어 그녀에게로 왔다. 그런 아버지에게 그녀는 번듯한 자신의 삶을 보여주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다. 새해를 맞이하며 벌이는 파티에서 아버지를 환영하고 싶지만 여의치 않다. 무엇보다 그녀의 단 하나뿐인 딸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그리고 동성의 연인을 할아버지 앞에서 '아주 친한 친구'라고 소개하는 에블린에게 '절연'은 선포한다. 

언어가 능숙한 딸이 도와주기로 한 세무소 행, 당연히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런데 남편이 이상하다. 그녀와 대화를 하고 싶어 이혼 서류를 들이밀어야 할 만큼 소심한 남편이 그녀에게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인다.  중년이 되어도 <구니스>와 <인디애나 존스; 미궁의 사원> 속 그 미소년의 얼굴을 지닌 키 호이 콴이 분한 에드워드가 펄펄 난다. 그리고 자신을 소개한다. 멀티버스 속 에블린의 남편 에드워드라고. 그리고 이제 에블린에게 '붕괴된 멀티버스'를 구할 임무를 부여한다. 

everywhere, 당장 오늘 안에 세금영수증을 제대로 정리해 내야하는데, 멀티버스에서 온 에드워드는 에블린을 자꾸 세무소 속 청소 정리실 안 이상한 세계로 끌어들인다.

 

 

왜 에블린이어야 할까? 
왜 에블린이어야 할까? 이게 바로 이 영화적 서사의 이른바 '킥'이다.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떠나온 꿈의 세상, 하지만 에블린은 이제 파산 위기에, 번아웃 위기에 놓인 중년 여성일 뿐이다. 반면, 또 다른 멀티버스 속 에블린들은 전혀 다르다. ,<쿵푸 팬더>처럼 좋은 스승을 만나 쿵푸의 대가가 되어 있기도 하고, 에드워드를 따라가지 않는 대신 당대의 스타가 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에블린을 찾아온 다른 세상의 에드워드는 말한다. 다른 멀티버스 속 에블린들이 그렇게 '잘 나가는'는 이유가 바로 여기 에블린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해서라고. 마치 시이소 게임이라도 되는 듯이, 에블린의 불행한 삶이,  다른 에브린들의 행복이 되었단다. 

그런데 문제는 에블린을 찾아온 에드워드 세상에 '조부투파카'가 웜홀 같은 걸 만들어 모든 멀티버스를 다 빨아들이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조부투파카를 막을 사람은 바로 에블린 밖에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 조부투파카는 '왜곡되어버린 딸'  조이(스테파니 수 분)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민 세대 가족이 가지는 세대 간 소통과 세계관의 문제를 멀티버스와 악의 신이라는 설정으로 풀어낸다. 괴물이 되어 모든 것 집어삼키려는 딸, 그런데 딸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엄마에게 다신 보지 말자며 떠나려는 딸에게 엄마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 마디를 내뱉고 만다. '너 살쪘다'고. 이보다 더 모녀 관계의 애증을 대변할 대사가 있을까? 

아버지 앞에 여전히 인정받고 싶은 딸, 그래서 아직도 그날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랑하는 이를 선택한 자신의 결정에 대해 마음 속 깊은 곳에 '그림자'로 드리우고 있는 여성, '세탁기가 모두 우리 꺼야'라던 희망이 무색하게 가압류될 처지의 오래된 세탁소 카운터를 지키며 늙어가는 엄마는 자신의 모든 '열정'을 딸에게 퍼붓고 딸은 그 엄마의 열정을 감당하지 못해 '왜곡'되어 버리고 마는 질곡의 모며 관계, 결국 에블린 인생을 짖누르는 문제들이 고스란히 멀티버스 속 '사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에블린은 어떤 선택을 할까? 영화는 독특한, 하지만 아름다운 두 장면을 통해 어수선한 멀티버스 소동을 감동으로 이끈다. 기괴한 소시지 손가락을 지닌 멀티버스 속 세무소 직원(제이미 리 커티스 분)과 만난 에블린, 하지만 그들은 덜렁거리는 소시지가 무색하게 기꺼이 사랑을 나눈다. '이 아니면 잇몸'이듯이,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손가락이 소시지인게 무슨 문제겠냐는 영화는, 그래서 산 정상 위에 움직일 수 없는 돌멩이가 되어 버린 조이, 혹은 조부투파키와 에블린에게로 이끈다.

과연, 움직일 수 없는 돌멩이가 되어버린 엄마는 어떤 선택을 할까? 그 선택의 지렛대는 세상 무능한 남편이라는 에드워드가 세탁물 보따리에 달아놓은 장난감 눈알이다. 삶의 붕괴, 그리고 가족의 붕괴를 막는 무기는 사실 아주 사소하지만 근본적인 것들이다. 그걸 알아보는 행운이 늘 도래하는 건 아니니 '멀티버스'가 붕괴 위험에 빠졌던 것이다. 다행히도 용감한 엄마 에블린은 더 늦기 전에 그걸 알아보는 '미덕'을 지녔다. 알고보니 그녀는 모든 걸 가지고 있었다. 






by meditator 2022. 10. 15. 15:04

ebs다큐 프라임은 10월 10일부터 3부작으로 <게임에 진심인 편>을 방송한다. 그 중 1부, <내 장례식에 틀어줘>는 제목 그대로 한 노인의 장례식으로 시작된다. 성당에서 진행된 경건한 장례식, 고인을 추모하며 그가 남긴 영상을 튼다. 그런데 눈물을 훔치던 경건한 분위기가 무색하게 고인이 열렬하게(?) 게임을 즐기는 모습이 보여진다. 살아생전 고인이 가장 즐겨했던, 혹은 행복한 순간, 결국 참석한 사람들은 그의 행복한 모습에 함께 웃음을 짓는다. 

 

 
게임이란?
<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은 50여년동안 일보에 대해 글을 써온 미국 출신 평론가의 글 모음집이다. 일본에 대해 분석한 그의 글들 중 특히 주목을 끄는 건 일본 사람들이 즐겨하는 '파친코'에 대한 분석이다. 온통 시끄럽고 번쩍거리는 기계에 진심으로 매달려 파친코를 즐기는 사람들, 그는 그런 사람들의 '몰아'의 경지를 흡사 종교적 몰입이나 명상의 순간에 견준다. '제한적이고 동원된 삶을 살고 있음에도 안전과 확실성에 대한 보장이 없던 자아가 이제 소외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면서 자아로부터 구원'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성가시고 불만에 찬 자아는 잠시 파친코 기계에 매달린 소외의 시간을 통해 정화된다는 것이다. 이 심오한 '오락'에 대한 분석, 하지만 그 '심오한 분석'은 이제 ebs 다큐프라임의 <게임의 진심인 편>으로 이어진다. 

다큐는 게임을 '뉴노멀'이라 단정짓는다. 한국인 10명 중 7명이 게임을 한다고 한다. 10대의 93%야 그렇다 치고, 40대의 80.4%가 게임을 즐긴다고 한다. 아이템 구매율은 50대가 20대를 넘어섰단다. 허긴, 지하철에서 핸드폰에 열중하는 어르신들을 보면 거의 반 정도의 비율이 '고스톱' 게임 삼매경이다. 한때는 지인은 핸드폰 게임에 빠져 눈이 나빠졌다고 토로하기 했다. 그저 아이들이나 하는 거라 치부했던 게임인데 '뉴노멀'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어느새 우리 일상 속 일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다. 

다큐는 그런 현실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게임에 대해 무지하다고 질타한다. 중독이나 시간 낭비, 현실 도피이거나, 산업이나 신생 스포츠 장르로 치부하며 게임에 대해 제대로 알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1부, <내 장례식에서 틀어줘>는 대표적인 게임케스터 전용준 씨가 '게임의 신'으로 등장, 8년차 게임 개발자이면서도 '겜알못(게임을 알지 못하는 자)'인 서태훈을 게임 속으로 끌어들인다. 1994년 최초의 mmorpg 게임 '바람의 나라'로 부터 시작하여 프린세스 메이커, 리그 오브 레전드 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했던 게임 속 캐릭터가 되도록 만들어 '퀘스트(온라인 게임에서 이용자가 수행해야 하는 임무.)'를 해결해가며 '게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가간다. 

사람들이 게임을 가장 많이 하는 시간은? 하루의 일과를 마친 저녁 8시부터 10시 즈음이란다. 사람들이 즐겨하는 10개 게임의 시간을 더하면 인류가 지구에서 산 시간의 7배나 된단다. 즉 이제 게임은 '취미'를 넘어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기에 다큐는 게임을 이해하는 건 곧 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된다고 한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그러기 위해 다큐가 제시한 게임의 기본 철학을 위해 요한 호이징하가 소환된다. 게임에 진심인 인간, 그 근저에는 호모 루덴스, 즉 놀이를 즐기는 인간의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놀이가 아니다. 바람의 나라와 리니지의 개발자 송재경은 게임에는 '숨겨진 원리'가 있다고 말한다. 오랜 시간 사람들이 열광하는 스포츠 축구가 굳이 잘 쓸 수 있는 손이 아닌 발재간만으로 경기를 운영하듯, 게임은 현실에는 없는, 그런데 활동을 제한하는 '장애물'같은 규칙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이 장애물을 감수한다.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방식임에도 그 '불필요한 장애물을 극복하려고 자발적으로 노력한다. 바로 이런 제약을 극복하는 과정을 즐기는 모습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다큐는 짚는다. 

게임의 역사만큼 그 시간동안 명멸한 게임들이 많다. 스타크래프트가 열리는 곳이면 인산인해를 이루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저 그 시절을 추억하는 이들이 즐기는 게임으로 남았다. 게임의 생로병사, 그걸 '관장'하는 건, 결국 '플레이어', 프린세스메이커의 개발저 아카이 타카미는 그걸 '캐치볼'이라 정의한다. 플레이어의 능동적 개입, 개발자와 플레이어의 상호작용 과정(interaction), 더 나아가, 개발자가 만들어 놓은 플레이 룰 아래서 플레이어가 자발적으로 게임을 펼쳐가는 과정은 결국 플레이어에 의해 게임이 실질적으로 창조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게임 세계 내에 나를 '위치'시키고 그곳에서 플레이를 하고 보상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돌아오는 '피드백', 그런 행위 자체가 주는 즐거움, 그리고 마치 다른 존재가 된 듯 몰입의 과정에서 느끼는 '희열'로 게임을 설명할 수 있다고 다큐는 말한다. 

그런데 하고많은 것들 중에 왜 사람들은 게임을 하며 재미를 느끼는 것일까? '재미 이론'을 주장하는 미국의 게임 개발자 라프 코스터는 인간의 두뇌는 새로운 패턴 학습을 즐긴다고 말한다. 점프를 하고 공간을 뛰어넘고 목적지에 도달해내는 과정에서 기쁨과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자꾸 죽어도 또 살아날 수 있는 , 게임이라는 특별한 공감 안에서 사람들은 '난이도'와 '숙련도'를 뛰어넘으며 노련하게 적을 사냥하고, 적을 무찌르며 기쁨을 느낀다. 또한 이제 이 과정은 '개인'만의 만족을 넘어 집단적인 상호작용으로 업그레이드되어 성취감을 질적으로 업그레이드시킨다. 

그러기에 다큐는 정의한다. 게임이란 가장 인간적인 활동이라고, 그러기에 사람들은 굳이 할 필요가 없는데도, 애써 더 재미있게 게임을 하기 위해 기꺼이 게임 속 '난관'에 자신을 내던진다. 그리하여, 이제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변했다. 사람들은 현실보다 더욱 인간적인 활동, 게임'을 통해 자신의 인간적인 본능을 맘껏 발산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시뮬레이션'된다. 안전하게 '인간 사회'를 경험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설사 실패를 한다해도, 몇 번이나 죽어도, 다시 몇 번이나 살아날 수 있듯이 '안전한 실패'를 누린다. 가장 인간적인, 하지만 무한 반복될 수있는 삶의 시뮬레이션, 굳이 이걸 마다할 이들이 있을까. 

by meditator 2022. 10. 11. 22:24

<텐트 밖은 유럽>이 9월 28일 9회차 8박 9일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하여 이탈리아 로마에서 마무리된 여정, <바퀴달린 집>의 강궁 피디가 요즘 인기를 끄는 캠핑의 장소를 '유럽'으로 바꿔놓았다.

 

 

말이 8박 9일이지, 시청자들이야 출연진의 여정에 따라 유유히 물 흐르듯 프로그램을 즐기면 그만이지만 출연자들은 인터라켄으로 부터 시작하여 그린델발트,  푸르카패스, 가르다, 피렌체, 토스카나, 로마에 이르기까지  1,484km의 긴 여정동안 날마다 텐트를 치고 짐을 풀고 싸고를 반복했다.

일찌기 철학자 들뢰즈는 특정한 삶의 가치와 사고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바꾸어 가며 사는 '노마드적 존재'에 대해 논한 바 있다. 굳이 철학자의 이론을 들먹일 것도 없이 아프리카 초원에서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고, 산맥을 넘어서 대륙을 건넌 인류의 궤적은 그대로 '노마디즘' 그 자체이다. 머물 수 없음, 혹은 머물지 않음, 오늘날 많은 이들이 '캠핑'이란 '놀이'에 천착하는 건 그런 인간의 류적 본성을 확인하는 행위일지도. 그러기에 매일 매일 짐을 싸고 풀며 유럽의 종주한 <텐트 밖은 유럽>의 고달픈 여정이야말로참으로 '인간적'이다. 

 

 

토스카나를 걷다
피렌체에서 토스카나로 가는 여정, 일행은 차로 우선 캠핑장을 향했다. 하지만 이국의 정취가 물씬 풍겨나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밀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서있는 풍경을 그냥 지나치기는 아쉬웠다. 잠시 내려 광활한 언덕을 바라보며 걷던 일행, 결국 토스카나 캠핑장에서 다음 날 차 대신 걷기를 택하기로 결정한다. 

마치 사막을 걷듯, 끝없이 펼쳐진 토스카나 평원 위를 걸어가기 시작한 다음 날, 무릎이 좋지 않은 윤균상이 무릎 보호대까지 차며 시작한 길이지만 녹록치 않다. 무엇보다 스위스에 도착한 이래 계속 일행을 시달리게 했던 유럽이 한낮 더위, 마치 우리의 늦여름 날씨처럼 그늘만 들어서면 시원하다지만 그늘마저 만나기 쉽지 않은 여정을 온전히 두 발로 걸어내야 하는 길이 만만치 않다. 

차를 타고 지나치기에는 아까운 풍경, 하지만 막상 걷고 보니 타는 듯한 땡볕에 가도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 하지만 그걸 두 발로 걸어내야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 그 또한 우리 삶의 모습과 참 닮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도록 만든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걸로는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는, 그래서 그 과정의 고통과 아픔을 다 감내해야만 그 뒤에 얻게 되는 삶의 결과들처럼 말이다. 온 얼굴에 수건을 싸매고 걸어내야 하는 행군, 처음엔 활기차던 이들이 하루 온종일을 걷고 보니 점점 말수가 줄어든다. 그래도 하루를 마치며 진선규는 말한다. 아마도 유럽에 다시 온다 해도, 다시 이 길을 걷게 되기는 쉽지 않을 거라며, 그래서 다시는 올 수 없는 시간이라고. 

 

 

여행도, 삶도 선택이다 
마지막 캠프 로마를 향해 떠나는 날, 일행은 아침부터 분주하다. 사다리 타기로 도시락을 싸고 떠난 길, 차를 타고 가다, 보이는 언덕 위의 도시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이들이 유해진이 싼 김밥을 먹겠다고 들른 곳은 '오르비에토', 광장 중앙에 고풍스런 성당이 자리잡은 중세 도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유명한 도시이다. 아기자기한 골목들 사이에 자리잡은 소품 가게, 거리의 상점들, 그곳을 관광객들이 누빈다. 

성벽을 돌고 돌아 올라가는 길, 벌써 도시가 풍기는 분위기가 남다르다. 하지만 일행은 아랑곳없이 도시락 먹을 곳을 찾느라 분주하다. 고원 위에 자리잡은 오르비에토에서 도시 아래가 내려다 보이는 풍경을 뒤로하고, 도시락 먹기 좋은 장소를 찾은 일행은 맛있게, 그리고 아쉽게 유해진이 싼 김밥을 나눈다. 도시락을 먹고 나니 더운 유럽 날씨에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 생각이 간절한, 하지만 유럽에는 '아아'가 없다. 김치에 물탄 거를 예를 들며 '에스프레소'의 원조로서 자부심을 애써 이해하려하며 일행은 커피집을 찾아 도시를 거닌다. 아기자기한 골목과 상점이 볼만하니 거기를 기웃대기도 하고, 그러다 광장에 자리잡은 거대한 성당을 마주하게 된다. 

오르비에토 성당은 13세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건물 내부와 외부 곳곳에 중세 시대에 유명한 예술가들의 작품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런 성당을 일행은 커피집을 찾으로 이리저리 헤매던 중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까지 가서 좋은 곳을 더 볼 생각을 안하고, 도시락 먹을 곳이나 찾으러 다니다니?

하지만 어디 오르비에토 뿐인가, 심지어 피렌체는 차장 밖으로 그 유명한 베키오 다리를 '주마간산' 식으로 보고 지나쳤다. 여정의 마지막 날 찾은 로마, 오르비에토에 들러 점심을 먹고 캠핑장에 도착해 밥도 해놓고 이러다 보니 로마를 구경할 여유가 많지 않다. 해지기 전에 캠핑장으로 돌아가려니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다. 

아니 로마까지 가서 그러구 여행을 마무리짓나, 그렇다면 피렌체는? 아니 이들의 여정 곳곳에 알고보면 참 볼 것이 많았다. 스위스는 곳곳이 풍경이 예술이었고, 이탈리아는 발걸음 닿는 곳곳마다 유적지들이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다 보려 한다면 8박 9일 아니라 80박 90일이라도 부족하지 않을까 싶다. 

프로그램은 그 발걸음 닿는 곳곳이 다 유명 여행지인 곳들을 섭렵하지 않는다. 유명한 곳이지만 그 모든 걸 다 주워넣는 대신, 오르비에토처럼 우연히 만난 기쁨의 순간으로 남겨둔다. 유명하다고 해서 모든 곳을 다 가보는 대신 캠핑 본연의 취지에 집중한다. 물론 사이프로스 나무 사이를 기꺼이 걷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스위스의 호수에 몸을 담그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유명한 곳을 보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8박 9일의 여정을 함께 보고 있노라면 그 어떤 여행보다 스위스와 이탈리아라는 공간에 흠뻑 젖어드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 요즘 회자되는 유툽 동영상 중에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 교수의 대학 졸업식 축사가 있다. 남다른 이력을 자랑하는 그답게 그의 축사도 독특하다. 80년의 인생을 날로 치면 3만 일, 그 중 얼마나 기억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은퇴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 듯한 병원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 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전한다.

그의 말 속 인생의 정해진 듯한 여정은 마치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남들이 다 보고 간 그곳을 다시 따라가는 여행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의 말처럼 인생은 '변덕스러운 우연'이 모질게 구는 것이다.  답정너처럼 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답정너에 매달려 삶을 소모하는 대신, 인생의 여정 끝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쉬움 없이 만나려면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해야 한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건 <텐트 밖 유럽> 속 유해진, 진선규, 박지환, 윤균상 네 사람이 여행하듯 하면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눈 앞의 봐야 할 것에 연연하는 대신,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러 가다 만나게 되는 오래된, 아름다운 성당처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온전한 경험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말이다. 

<바퀴달린 집>도 특별하지 않았다. 캠핑카를 타고 머물고, 지인들이 찾아와 함께 밥을 해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슴슴한 하루의 시간 속에 사람사는 지혜가 찾아졌었다. <텐트 밖은 유럽>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것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몸담은 호수와 땀 흘리며 걸은 길과 골목 사이에서 만난 풍경들, 그리고 그곳을 온전히 느끼는 일행들의 시간 속에서 여행의 묘미와, 인생의 맛을 느끼게 해준다. 

by meditator 2022. 10. 1. 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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