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호랑이가 살점을 찢어 발기는 고통(호열자 虎裂刺)'이라 하여 '콜레라'라 국민적 재앙이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 '위생'이 국가적 화두가 된 이래, 어느틈에 다수의 '怪疾'들은 의료적 치료 대상으로 해명, 극복되었다. 하지만, 이런 각종 전염병들이 물러간 자리에, 국민 건강의 증진이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니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그 예전에 고통받던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질병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한 사회를 둘러싼 질병은 그 시대의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한병철은 그의 책 [피로사회]를 통해, 현대인은 우울증과 주의력 결핍과 과잉행동 장애, 경계성 성격 장애, 소진 증후군 등 각종 신경증적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면역학적 시대를 뛰어넘는 각종 질병들은 현대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스스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사회적으로 싸워야 할 주적이 희미해진 세상, 사람들은 이제 '자아'와 맞서 싸운다. '강제'와 '금지'가 횡행하던 규율 사회에서, 이제 '되어야 한다'라는 사회적 명령을 내재화한 사람들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자기 자신과 싸우다 병에 걸려 쓰러지고 만다. '자아를 극대화'하기 위해 싸우다 사람들은 지쳐 쓰러진다. 




자신과 싸우다 쓰러져 간 '성취 사회' 사람들을 위한 위로 
드라마 리뷰를 쓴다 해놓고 이 장황한 현대 사회 질병에 대한 담론이 웬말인가?
하지만 최근 범람하다시피 하고 있는 드라마 속 '정신병'적 증후군에 시달린 주인공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자기 자신과 싸우다 쓰러진 현대인들'의 자화상에 대한 기본적 전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과 싸우다 쓰러진 주인공의 극강 캐릭터가 나타났다. '지킬 앤 하이드'의 두 개의 인격은 웃음거리로 만들고 만 자그마치 7개의 인격이다. 20부작 <킬미 힐미>의 과정은, 차도현(지성 분)이라는 인물을 분열시킨 7개의 인격에 대한 유래와 치유의 과정을 다룬다. 

20부 커다란 곰 인형 '나나'라고 알려진 차도현의 또 다른 인격, 그 정체가 밝혀진다. 바로 그 커다란 곰 인형 뒤에 몸을 숨겼던 어린 시절 차도현, 지금의 오리진(황정음 분)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들어간 승진가, 그곳에서 지금의 차도현이 마주친 것은 그의 어린 인격으로는 견뎌낼 수 없었던 어른들이 만들어 낸 부조리한 현실이었다. 
할아버지는 기업을 살리지 위해 남의 자식을 키우는 며느리의 자식마저 내 손주라 속이며 며느리를 승진가로 데려온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자유롭게 살다 아내의 닥달에 못이겨 초등학교에 갈 아들을 데리고 마지못해 승진가로 돌아온 아버지는 아버지와 아내의 협잡에 분노하며 그 분노를 아내가 데리고 온 딸에게 푼다. 심지어 아버지는 자신의 사촌 동생이 아버지와 아내를 죽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조차도 암묵적으로 묵인한 채 승진 그룹을 넘겨 받고자 하였다. 
자신들의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부도덕한 행동을 하는 어른들, 그 어른들이 벌이는 사건의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얹힌다. 아버지는 아내가 데리고 온 진짜 차도현을 학대했고, 지금의 차도현은 그 어린 차도현을 학대하는 과정의 방관자이자, 또 다른 피해자였다. 어른들을 이겨내지 못한 아이들이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분열, 망각뿐이었다. 

그래서 차도현은 그 사건의 모든 것을 자신의 인격으로 감내한다. 그의 인격은 파멸한 것이 아니라, 그 시절 어린 자신으로서는 감내할 수 없었던 상황을 견뎌내기 위한 것이었으며, 자신의 유일한 친구였던 또 다른 어린 차도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억을 잃은 어린 차도현 대신, 그 기억을 나나를 통해 봉인했고, 그 어린 나나를 지키기 위해 '신세기'란 폭력적 자아를 탄생시켰다. 또한 승진가에 들어와 변한 아버지가 아닌 아들과 함께 배를 타고 낚시를 다니고 싶어하던 자유로웠던 아버지를 '페리박'으로 기억해 두었다. 뿐만 아니라, 어린 차도현이 유일하게 기대고 싶었던 돌아가신 아버지조차 '미스터 x'라는 존재로 저장해 두었다. 하지만 이런 자아 분열은 그런 자신을 용인하지 못해,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하는 '요섭'이란 부정적 존재를, 그리고 그에 대한 저항이자, 삶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집착을 '요나'를 통해 낳게 된 것이다. 이렇게 차도현이 어린 시절의 모든 고통을 분열된 7개의 인격을 통해 감내하는 동안, 또 다른 희생자 오리진은 그것을 '망각'하는 방식을 통해 고통을 지운다. 

잊거나 분열하거나, 차도현과 오리진이 받은 고통은 상징적이다. 어른들이 저질러 놓은 부조리한 세상, 바로 지금의 현재를 사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느끼는 기성 세대의 모습 그 자체이다.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짓밟는 것쯤이야 예사로 여겼던 어른들, 그들은 '승진 그룹'처럼 물질적 유산을 젊은 세대들에게 남겨 주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부조리함을 견디지 못해 분열한 젊은 세대를 낳는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물질적 부의 세상에서 자신들처럼, '성취'하고 또 '성취'하며 살라며 '끊임없이' 훈육해 왔다. 누군가의 아들로, 누군가의 딸로 고립되어, 자신의 '성취'를 위해 싸우는 개인들은, 그 속에서 느끼는 절망과 막막함을 내재화한 채, 차도현처럼 분열한다. '미치겠네', '돌겠네'가 일상어가 된 세상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성취를 향해 홀로 싸우다, 홀로 쓰러진다. 바로 그렇게 외상은 없어도 지치고 고통받는 고립된 '자아'들을 위한 '치유'의 과정이 <킬미힐미>였기에 이에 공감을 하는 젊은이들은 이 드라마에 환호한다. 그리고, 19, 20부 하나씩 사라져가는 인격들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그들이 그저, 병증이 아니라, 고통의 흔적이었음을, 또 다른 자아였음을 그 누구보다 공감하기에.



보편적 공감은 아니지만, '인생 드라마'가 된 짙은 공감
지성의 화려한 열연에 힘입어 화제가 되었던 <킬미 힐미>가 중장년층의 시선을 사로잡은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 발목을 잡혀 수목 드라마 2위의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으로 마무리된 것은 아쉬운 점이다. 
암만해도 '피로 사회 증후군의 드라마화에 있어 공감의 온도를 보편적으로 나누기엔 역시나 역부족인 측면이 있었던 듯 싶다. 하지만 되돌아 보면, <킬미힐미> 만큼 화제가 되었던 역시나 정신병적 증후군을 다루었던 <괜찮아 사랑이야>의 경우도 마지막 회 2회 정도를 제외하고는 내내 10% 미만의 시청률을 답보했던 것을 보면, 단지 이것이 드라마적 재미나 흥미로만 국한 할 수 없는 시청층의 인식론적 한계라고도 보여진다. 드라마에 공감하는 누군가는 '인생 드라마'라고 칭하며 눈물을 흘리며 칭송하는 반면에,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어떤 재미도 찾을 수 없어 멀뚱멀뚱하다 다른 드라마로 눈을 돌리는, 사회적 공감대의 양극화의 단면을 <킬미힐미>에서 다시 한번 찾을 수 있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킬미힐미>의 역성을 들 수 없는 아쉬움도 남는다. 
7개의 인격의 화려한 변주를 벌인 드라마였지만, 정작 20부의 스토리를 이끌고 가는데 있어, 주인공의 인격의 변주 말고는 이렇다할 극적인 스토리라인이 부족했다. 결국 어린 시절 승진가 지하실에서 벌어진 아동 학대 사건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끌고 가기에는 20는 좀 버거운 분량이 아니었나 싶은 것이다. 오히려, 16부, 아니 그 보다도 조금 더 타이트하게 드라마를 이끌어 갔다면 조금 더 여운있는 명작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에서, 최근 20부작 드라마의 한계를 다시금 짚어보게 한다. 

그러나 20부작의 무리수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약점 또한 있다. 일찌기 진수완 작가의 전작 '<해를 품은 달>에서 무시무시한 캐릭터로 각인되었던 김영애씨는 역시나 <해를 품은 달>의 대비마마 격인 승진 그룹의 대표로 등장했지만 이렇다할 호연의 기억은 없다. 어디 그뿐인가, 주인공 지성이 7개의 인격의 변주를 화려하게 보이는 동안,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은 단선적인 캐릭터로 뻔한 갈등만을 야기하다 퇴장하고 만다. 20부라는 장구한 시간에, 이렇다할 조연들의 변주가 없다보니, 드라마가 더 단조롭고 뻔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내 주인공들만 울고 웃다 끝나는 느낌이 들고, 안봐도 뻔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여러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것들을 아버지와, 자신의 친구, 그리고 자신을 이겨낼 수 있는 강한 자아로 분열했던 착한 아이 차도현의 이야기는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다. 그게 그저 드라마 속 한 인물이 아니라, 도무지 숨 쉴틈도 없이 공부하라며 닥달하는 어른들, 그리고 공부를 다했으니 사회적으로 무언가를 이루라며 다시 재촉하는 어른들, 그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에서 어떻게든 열심히 견뎌보라는 요즘 '아이들'의 자화상인거 같아 더욱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또 다른 자아들인 7개의 인격이 퇴장하는 장면 하나하나에 눈물이 난다. 그들이 아픔을 어떻게든 견뎌보려 했던 고통스러운 기억이었기에. 그리고 자기 자신을 맞서 견디지 못하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신세기의 협박처럼, 고통스러웠던 기억이지만 맞서 싸울 수 용기를 북독아 준 것 같아, 좋은 친구가 하나 생긴 듯 든든하다. 

무리한, 아니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그럼에도 기꺼이 그 무모함을 통해 동시대 사람들을 어루만지고자 했던 <킬미힐미>, 그 노력과 수고에 감사를 보낸다. 

by meditator 2015. 3. 13. 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