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영하는 말한다.

베스트셀러와 베스트셀러가 아닌 소설의 차이는 그저 운일 뿐이라고, 인기리에 잘 나가는 자신의 소설과 도서관 서가에 꽂혀 먼지가 쌓여가는 소설 사이에 더 잘 쓰고, 못 쓰고의 차이가 없다고, 단지 당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당대 사람들의 선택을 당대의 시민 정신이라 치환해도 될까?

올해 들어 sbs 드라마 중 가장 시청률이 높았던 것은 sbs의 <야왕>이었다. 전체 드라마 중 가장 높은 것은 <백년의 유산>이다. 작년에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해를 품은 달>이었다.

<야왕>이나, <백년의 유산>, <해를 품은 달>에 2012,3년의 시민의 정서를 대변할 그 무엇이 있을까? 출충한 대본과 탁월한 연출력, 빼어난 연기가 있었을까?

김영하의 솔직한 고백이 다시 한번 적용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드라마를 볼 때만 해도 '괜찮은데' 하다가, 막상 시청률이 낮게 나오면 그걸 보는게 창피한 거라도 되는 것처럼 툴툴 털어대려고 난리다.

 

<내 연애의 모든 것>도 그랬다.

털어 먼지 안나오는 드라마 없듯이, 신하균의 초반 설정의 과도함, 국회의원이라기엔 너무 이쁜 이민정,정치를 말하는 건지, 연애를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는 내용에, 잔잔하기 이를데 없는 국회에서 연애하기 등, 양파 껍질 까듯이 까고 또 깔 것들이 투성이들이었다.

하지만, 16회, 여전한 정치 판세에서도 편가르기가 아닌 정책으로 다시 만나게 된 김수영(신하균)과 송준하(박희순)가 하나의 당을 꾸려가고, 초심이 중요하다는 김수영의 연설은 여전히 신선하고 뭉클한 희망을 느끼게 해준다. 그건 내가 그런 희망을 공감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랑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접두어처럼, 우리가 그것을 버리거나, 무시하거나 상관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야 하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냐는 그 메시지는 뜨끔할 정도였다.

바로 그것이다. <내 연애의 모든 것>이 위치한 지점이, 시청률이 낮다니까 지레 외면하고, 이렇다 저렇다 품평을 하면서, 쉽게 리모컨을 돌려 버리고, 이 드라마가 진득하게 하고자 했던 이야기들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허긴 요즘 이 드라마처럼 진득하게 무언가를 말하는 드라마들이 드물기도 하니까. 하지만, 아주 적은 사람들이 들어주어도, <내 연애의 모든 것>은 주인공 김수영이나, 노민영처럼 결코 자신이 할 바를 주저하거나, 목소리 낮추지 않고 뚝심있게 하고픈 말을 다해내고야 말았다.

 

 

 

종영을 향해 달려가는 <내 연애의 모든 것>을 보다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가 있다.

작가든, 배우든, 연출이든 너무나 즐겁게(?) 최선을 다해 작품에 임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16회를 보다보면 이 드라마가 마치 '대박'을 쳐서, 지금 연일 화제가 되는 드라마 같다. 화면의 때깔이나 구도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쪽대본의 흔적도 없다. 연기를 하는 배우들은 무에 그리 신이 나는지, 좋아 죽겠는 표정이다.

제작진도 사람인지라, 기자 간담회에서 모 배우가 말하듯이 논란이 되거나, 시청률이 나오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다고 한다. 그리고 시청자도 사람인지라 드라마를 보다 보면, 그 감정들이 전해지기도 한다. 시청률이 나오지 않자, 원래 하고자 했던 의도를 버리고, 이러면 잘 나올까, 저러면 잘 나올까 우왕좌왕 하는 모습이 전해질 때가 많다.

그런데 <내 연애의 모든 것>을 보다 보면 행복해 진다.

마치 이미 떨어진 시청률 따위! 라고 하듯이, 누군가를 낚기 위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우리와 함께 하는 단 한 사람을 위해서라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듯하다. 그러기에 그 어느 히트 드라마 못지 않게 화면도, 색감도, 줄거리도, 연기도 손색이 없다. 아니 즐겁게, 행복하게 하는 '엔돌핀'에 전염된다.

시청률 고공 행진을 하며 회마다 누군가를 핍박하고, 악다구니를 벌이고, 개연성없는 전개에 피곤해 하던 그 마음조차 '힐링'이 되게, <내 연애의 모든 것>에는 말이 되지 않는 것들이 없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도, 등장인물들도 연애도, 삶도 모두 합리적으로 풀어간다. 제대로 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한 뼘 더 나아가려고 하듯, 삶도 그렇게 조금 더 나아지게 노력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일찌감치 구제불능이었던 시청률이 <내 연애의 모든 것>을 숨겨진 명작으로 남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연애의 모든 것>이 공중파가 아니라, 케이블의 드라마였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모두의 구미를 맞춰야만 하는 공중파가 아니라, 누군가의 취향에 맞는 사람들이 찾아보게 만드는 케이블 드라마였다면 지금처럼 찬밥 취급은 안당했을까? 이런 신선한 이야기도 다루네? 하며 호청자들이 즐거이 시청하는 드라마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그랬다면 조금 더 좋은 평가를 받았을 텐데 아쉽기 까지 하다.

누군가 처음 시청률이 떨어졌을 때 제작진의 정치적 성향을 비난했던 것처럼 이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노민영으로 상징되는 진보 진영의 도덕적 우위에 정서적 본진을 형성한다. 하지만 그건, 현존의 누군가와 비슷하지만, 현존의 누군가를 꼭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겨레 신문 5월29일자 이원재씨의 칼럼처럼, 일종의 '사회적 상상력'이었던 것이다.

사회학자 프레트 폴락의 말처럼, 사회 변화는 미래와 과거와 밀고 당기는 가운데 일어나고, 거기에 진보란 미래의 이미지를 끌고가는 사회적 상상력이었을 때, <내 연애의 모든 것>이 말하고자 한 것은 그 사회적 상상력으로 품어 낸 미래의 진보 이미지였다.

하지만 몇 번의 국회의원 선거와 보궐선거, 그리고 대통령 선거를 치뤄내며 정치권에서 진보 세력이 사그라 들었듯이, 이제 스펙에 골몰하고, 내 살기에 바쁜 사람들은 미래를 함께 할 사회적 상상력으로의 '진보'에 냉소를 보낸다. 물론 거기에는 진보 진영 스스로의 패덕도 크다.

그저 그런 시기에 여전히 꿈에 부풀어 순진하게 다른 너와 내가 손을 잡는 방법, 심지어 사랑을 하는 상상을 했으니, <내 연애의 모든 것>의 참담한 결과는 자초한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꿋꿋하게 5% 내외를 넘나들며 이 드라마를 지켜 본 누군가들로 인해, <내 연애의 모든 것>의 순수한 상상력은 짓밟히지만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내 연애의 모든 것>의 5% 시청률은 소중하다. 폄하될 것이 아니다. 여전히 잔존한 우리 사회 희망의 싹같기도 하다.

 

(사진; 뉴스엔)

 

섣부르게 연애와 정치의 콜라보레이션이 어설펐다 어쨌다 논하지 않겠다.

그렇게 따지면, <야왕>은 복수와 정치의 콜라보레이션이 훌륭해서 시청률이 좋았는가. 그저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박수쳐 줄 때가 아니었다고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을 뿐이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외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흔들림없이 최선을 다해준 <내 연애의 모든 것> 제작지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짝짝짝짝짝!!!!

배우도, 제작진도 다음 작품에서 또 봐요~~~

by meditator 2013. 5. 30. 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