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미식회>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획기적이었다. '음식'이 질펀하게 한 상 차려지지 않은 '먹방'이라니. 먹방, 인터넷의 bj 들이 시청자들을 상대로 음식을 먹는 걸 보여주며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이 이토록 무궁무진하게 발전해 나갈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bj들의 먹방은 곧 케이블을 비롯한, 공중파 프로그램 먹방의 홍수로 이어졌다. 오로지 '먹는 것'에 집중했던 먹방 프로그램의 홍수 가운데에서 <수요 미식회>의 등장은 신선했다. 물론 '먹방'은 등장한다.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은 프로그램의 대상이 된 음식점에 자신들의 돈을 내고 사먹고, 그 장면이 등장한다. 하지만 <수요 미식회>의 본질은 시각적 자극이 배제되거나, 극도로 제한된 먹망의 승화에 있다. 극중 출연한 홍신애의 기꺼이 자신의 몸을 사례로 든 고기 부위에 대한 상상에서 부터, 마치 한 편의 하이쿠와도 같은 이현우의 은유 가득한 맛의 평가, 황교익의 풍성한 평론의 잔치까지, 말로 풍성해진 식탁을 한 상 차려받는 느낌이 보여주는 먹방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기를 끌었다. 



지난 3월 7일 새로이 선보인 히스토리 채널의 <말술클럽>과 3월 31일부터 ebs를 통해 방송되고 있는 파일럿 프로그램 <상상식탁>은 바로 이런 <수요 미식회>의 맥락을 계승하여 특화, 발전시킨 프로그램들이다. 

방송을 시작한 지 3년 말로 풍성하게 차려진 <수요 미식회>가 3년 여를 거치며 그 말의 깊이가 옅어졌다. 여전히 게스트들의 맛집 순례는 맛깔스럽지만, 회를 거듭할 수록 출연진들의 멘트에서는 그들의 내공보다는 작가들의 고군분투가 더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뜻밖에도 <알쓸신잡>에 등장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그들의 경험에서 우러난 내공 깊은 '탐식'의 경륜과 지식들은 <수요 미식회>에서 한 발에서 더 나아간 '인문학'과 '먹방'의 콜라보, 그 가능성을 분명하게 해주었다. 

전통주만큼이나 풍성한 인문학 술 이야기
<말술 클럽>은 말 그대로 '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술'하면 빠질 수 없는 애주가들에서 부터 '술칼럼니스트'들까지 한데 모여 술에 관한 질펀한 한 상 차림이다. 그런데 여기에 '히스토리'채널의 특색이 가미된다. 그저 술이 아니라, '전통주'이다. 2000 여개에 달한다는 우리나라의 전통주, 한번 맛을 보면 '세상에 이런 맛이!'라고 하지만, 정작 '광고'도, '홍보'도 없으면, 대통령 만찬주로 등장이나 해야 저런 술이 있어? 라며 검색어 순위에 오르는 '전통의 명가'들을 탐미하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술'을 매개로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전통'이라는 색채가 더해지며 '한국'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로 전개된다. 일본의 식민 지배로 인해 일본식의 주조 방법이 아니라면 마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듯, '청주'라는 본래의 갈래를 상실한 채 '약주', 혹은 '맑은 술'이란 애매모호한 장르로 둔갑한 우리의 청주, 그 연원에서 부터, 막걸리로 시작하여 주막과 돈이 무거웠던 시절, 서울 근교의 주막에서 돈을 맡기고 받은 영수증 하나로 매 주막에서의 지불은 물론, 마지막 지방 주막에서 돈을 거슬러 받을 수 있는 '주막 네트워크'에 이르기까지, 전통주라는 주제 하나로 뻗어져나가는, 심지어 수능 국어 영역의 '국선생전'의 묘미까지 이어지는 '한국사 탐험'의 영역은 무궁무진하다. 물론 거기에 뜯고 맛보는 전통주의 미식 연찬회는 기본이다. 

주당 장진 감독, 박건형에, 주류계의 알파고라는 호칭에 딱 맞는 '전통주' 전문가 명욱의 해박함과, 이미 그의 <메이드 인 공장> 등을 통해 사물에 대한 재기발랄한 혹은 애정어린 천착을 선보인바 있던 김중혁 작가의 박학함 등이 어우러져 애정어린 '전통주 탐험기'가 완성된다. 



음식으로 부터 비롯된 비교사 탐험 
<말술 클럽>이 '전통주'를 매개로 한 계통적 한국사의 탐험이라면, ebs에서 선보인 <상상식탁>은 횡적인 비교사의 프로그램이다. 이제 2회를 방영한 이 프로그램이 선택한 주제는 사랑, 정치, 전쟁 등 개념정 명제들이다. 

정치의 편에서 정상 만찬에 등장하여 화제가 된 '독도 새우'로 부터 2차 대전을 앞두고 방문한 영국의 조지 6세에게 대접했다는 미국의 길거리 음식 '핫도그', 비빔밥, 초콜릿 칩 쿠키가 정치, 그 중심에서 세계를 변화시킨 음식으로 등장하여 새로운 '지식'의 장을 연다. 전쟁의 편을 연 건 육포이다. '전쟁'하면 싸우는 것만 생각하지만, 정작 '전쟁'에서 관건이 되는 건  '병사들이 먹고 싸울 수 있는 식량', 바로 그 '식량 배급' 문제에 있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택한 몽골의 육포는 곧 그들의 세계 정복을 가능케 한 신의 한수라고 <상상 식탁>은 정의 내린다. 또한 전쟁이라는 과정 속에 또 하나의 변수가 된 전쟁의 식량으로서 영국의 '피시엔 칩스'를 조명한다. 1,2차 대전 자국이 전쟁터가 된 영국 국민들이 '배급 물품'에서 제외된 '생선'과 '감자'로 '기아'를 버텨냈다는 것으로 '음식'은 곧 역사의 산 증인이 되는 것이다. 

이미 <외부자들>을 통해 전문적 영역 mc로서 김구라의 대안으로 등장한 남희석이 '인문학'의 mc로서 도전장을 내밀며, 자칫 황교익으로 '과점'화될 우려가 제기된 음식의 평론계에서 새로인 등장한 유지상 음식 전문 기자, 건축이 직업이지만 음식 비평이 그의 특기가 된 이용재 비평가가 합류하여 음식 평론의 새 바람을 불러 일으킨다. 거기에 팟 게스트<지대넓얇>의 이독실이 공대생 특유의 장기를 살려 데워먹는 전투 식량을 실험해본다 하는 식으로 인문학의 활기를 불어 넣는다. 또한 사랑을 주제로 한 편에 박상희 심리 카운슬러, 정치 편에 전여욱 전 의원, 전쟁 편에 군사전문가 양욱 등 각 분야의 전문가가 출연하여, 인문학적 전문성을 더한다. 

물론 과연 이 프로그램들이 전통주의 홍보를 넘어, 혹은 이미 한편에서는 상식이 되어가는 인문학적 지식의 '편집'을 넘어서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물음표의 여지가 남는다. 하지만, '먹방'이라는 가장 익숙한 주제를 '인문학'이라는 트렌트, 혹은 갈증, 발전의 영역으로 가지를 뻗어나가 시도하고자 하는 건 반가운 일이다. 전통주래 봤자라거나, 음식의 역사라 봐야 하면서 발견하게되는 '인간들의 삶'은 먹고사니즘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부디 이러한 시도들이 활발하게, 다각도로 진행되어, tv의 질을 높이는데 일조하길 바란다. 

by meditator 2018. 4. 15. 17:04

어쩌면 그들도 한때는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고, 여유롭게 직장 생활을 하며,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앞에서 방긋 속없이 웃음을 띠던 때도 있었으리라. 그저 그 '존재' 만으로 '누나'와 '누나'가 아닌 여성들에게 '기쁨'이 되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세월은 흘러 그들의 몸에 흐르는 남성 호르몬 테르토스테르몬은 존재를 '오욕'으로 물들게 하는 상징이 되었다. 한때는 '산업 역군'으로 대접받고, '아버지'라 인정받던 시대는 흘러, 이제 '숨만 쉬어도' '위협적인' 존재로 '치부'되는 시대에 머물게 되었다. '주역'이 '민폐'가 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주역인지도, 민폐인지도 모르고 세상의 무기징역수처럼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다. 


존재만으로도 부담스러운 아저씨
그런데  '존재' 자체가 민폐가 된 시절에 그런 부담을 무릎쓰고 '아저씨'에 대해 이야기하는 드라마들이 있다. 바로 제목부터 아저씨인 tvn의 <나의 아저씨>와 sbs의 <키스 먼저 할까요>다. 
<나의 아저씨>의 박동훈(이선균 분)과 <키스할까요>의 손무한(감우성 분), 그들은 외모부터 '남성적 매력'과는 담을 쌓았다. 희끗희끗해진 머리에, 심지어 코밑 수염조차 흰 가닥이 잡히는 그런 추레한 외양이다. 외양만 그런가, 번듯한 대기업에 잘 나가던 카피라이터에, 최고 실력의 건축사였던 적도 있었지만, 이젠 스스로는 광고를 만들지 않은 채 아날로그한 소품에 집착한 잔소리꾼에, 한직인 구조기술사로 조직의 그늘을 자처하며 버티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키스할까요>의 손무한은 췌장암 말기에 살아갈 날조차 얼마 남지 않았다. 



늙수그레한 박동훈과 손무한, 남성이라기 보다는, 아저씨란 중성적 단어가 더 어울리는 이 연배의 남자들은 공히 그 세대 남자들의 표상과도 같다. 한때는 공부 좀 한다 하여 대학을 잘 갔을 터이고, 그래서 남들 보란듯한 '기업'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꽃이 붉어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던가, 한때는 대학에 입학했다고 빵빠레를 울리던 그 시절도, 혹은 연인의 가슴을 설레하던 그 훈훈했더 매력의 시기도, 그리고 열렬한 사회인으로서의 열정도 이젠 그들에겐 역사가 되고, 그들은 '징역'을 살듯 현실을 견뎌내고 있다. 

하지만, 현실을 견뎌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들이 '보신'의 차원으로 자신을 남겨두었던 '조직'이 이제 그들의 목덜미를 잡는다. 대학 후배가 대표 이사 자리에 오르고, 설계팀에서 밀려 그런 후배의 승승장구를 보며 잘 나가는 변호사인 아내는 대놓고 무사안일(?) 한 박동훈에 대해 환멸을 표시하지만, 그래도 박동훈은 그저 '별일 없이 산다'했다. 하지만 그가 '내력'의 증거로 삼아 달리기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뽑은 이지안(아이유 분)과 돈봉투로 인해 얽히고 전혀 엮이고 싶지 않은 사내 정치의 중심으로, 그리고 아내의 불륜에 휘말려 들어가며 그의 삶은 본의 아니게 격전지가 되고 만다. 

트렌디의 상징으로 귀걸이를 하며, 지구 위의 우주인이라며 스스로 자부심이 우주를 향해 치솟을 때까지만 해도, 활자화 된 그 책이 책상 서랍 안에 자물쇠를 잠가 숨겨놓아야 할 오욕의 상징일 줄 몰랐다. 하지만 6년 전 비행기에서 만난 한 여성, 아니 10년이란 세월을 직조하며 얽혀든 안순진(김선아 분)와의 '악연'은 그로 하여금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온전히 부정하도록 만든다. 

박동훈과 손무한, 두 사람은 우리 시대 '아저씨'들의 성공적인 삶이었을 것이다. 대학을 나오고, 잘 나가는 직장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는 중산층 남자들의 그러그러한 삶의 모습들이다. 그런데, <나의 아저씨>와 <키스 먼저 할까요> 두 드라마는 우리 시대 성공적인 아저씨의 삶, 그 성공이라 썼지만 신기루처럼 날아가버린 '산업 사회의 성공담'을 해체해 버린다. 

조직의 일원으로, 조직에서 시키는 대로 자신의 맡은 바 책무를 다하면 자신의 성공은 물론,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도 번듯하게 살아낼 수 있었을 것 같던 삶, 그러나 '조직'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아 버리듯, 별일 없이 살고 싶었던 박동훈을 변방으로, 변방으로 밀어버린다. 심지어, 사내 정치의 젯밥으로 써버리고, 불륜을 핑계로 희생양을 만들고자 한다. 그의 버팀목이 될 아내도, 부하 직원들도 막상 벼랑 끝에 선 그에겐 등을 돌린다. 

카피라이터로서 그의 성공담의 사례가 된 광고는 그가 저지른 사회적 부도덕의 상징이 되었고, 그 부도덕한 상흔은 그의 몸조차 좀먹어 들어갔다. 광고주는 그에게 협잡의 손길을 내밀었고, 그래서 그는 더 이상 광고쟁이로 살아갈 수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도피라고는 스스로 직접 광고의 피를 묻히지 않는 소극적 저항정도. 



아저씨를 통해 던진 산업사회 대한민국에 대한 질문, 그리고 회자정리 
결국 이들의 실패는, 자본주의의 고도 성장의 논리로 달려온 한국 사회에 대한 질문이 된다. 조직의 일원으로 그 논리를 내재화하여 버텨온 이들이, 성공의 정점에 이를 나이에, 스스로 반문하고, 회의하며, 조직에서 버림받거나, 조직으로부터 스스로 분리하는 이 과정은, 결국 '조직'맨으로 살아왔던 우리 시대 '아저씨'들의 '업보'다. 또한 무너진 중산층의 현실에 대한 조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의 아저씨>와 <키스 먼저 할까요>는 그저 아저씨들의 한풀이에 머물지 않는다. 드라마는 그들의 '회자정리'에 주목한다. 그 시작은 중반부를 돌아선 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의 손무한이 앞선다. 그저 중년의 사랑 이야기인 줄 알았던 손무한과 안순진의 사랑 이야기는, 기꺼이 그 '업'을 품에 안은 손무한의 순애보로 전개된다. 손무한은 말한다. 6년전 만났던 안순진의 눈물이, 매번 만날 때마다 울고 있던 그녀가 손무한을 적셔서, 나비의 날개짓처럼 손무한을 변화시켰다고. 자기 잘난 맛에 살던 카피라이터 손무한은 그의 전재산을 결혼이란 과정을 통해 대기업과의 재판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다 잃은 안순진에게 의탁하고, 그녀의 재판에 유일한 증인으로 서고자 하는 것으로 자신의 업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박상무에게 잘못전달된 돈봉투를 보고, 어머니가 말한 형의 사업 자금때문에 잠시 흔들렸던 대가로 혹독한 회사 내 검증을 치웠던 박동훈은, 여전히 아내와의 불륜으로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은 도준영(김영민 분)의 도발에 응전한다. 비록 그 시작은 비겁한 통화 목록 조회에서 부터이지만, 그는 더 이상 '변두리'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응전은 이제 시작이다. 

그렇게 손무한과 박동훈이라는 아저씨의 회자정리가 된 드라마가 새삼스럽게 우리 사회 아저씨에 대한 미화라 불편할 건 없을 듯하다. 그들은 주역이었지만, 그들 또한 '희생양'이었으니, 그러기에 이지안과 박동훈이 동지가 되고, 손무한과 피해자 안순진은 손을 잡을 수 있다. 아저씨는 불편하지만, 그들 역시 이 사회의 무기수로서 그들의 존재는 갸륵하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는 희생양이었지만 조력자였던 그들의 '책임'에 대해, '도덕'에 대해 천착하고 있으니 조금 더 귀를 기울여 볼만하겠다. 부정할 수 없는 한 시대의 표상의 회자정리에 시간을 허락해 줄만도 하지 않은가. 

외려 안타까운 건, 아저씨란 이름으로 복기되는 중산층이란 한정성이다. 이제 우리 드라마에서 봉제공장 재단사였던 <바보같은 사랑>의 전상우를, <유나의 거리> 속 창만이 깃들어 살던 다세대 주택의 아저씨들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나의 아저씨> 속 이제는 한량이 되어버린 놈팽이 아저씨들도 알고보니 한때는 대학 나와 번듯한 직장에서 한 자리씩 했다던 그 알량한 설정의 계급적 한계야 말로 어쩌면 정말 안타까워해야 할 지점이 아닐까. 

by meditator 2018. 4. 13. 14:30

매주 월요일 밤 11시면 입맛이 씁쓸했다. 왜 우리는 월요일 밤부터 '예능'을 보아야 할까?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도 온통 '예능'뿐이다. 도대체 왜 월요일부터? 라는 힐난에, 월요병엔 예능이라는 답이 돌아오면 할 말이 없지만, 드라마와 예능의 범람에 한숨이 쉬어질 뿐이다. 그런데 그런 월요일의 가벼움을 타개해 줄 묘책이 등장했다. 오랫동안 이리저리 치이던 <mbc스페셜>이 돌아왔다. 그렇다. 이게 원래, <mbc 스페셜>의 자리였다. 한 주의 시작, 세상사 좀 진지하게 바라보며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진심어린 시선들이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돌아온 <mbc스페셜>, 4월 9일 방영분에는 다수의 '이재용'들이 등장했다. 




대한민국 vip 이재용 
우리가 아는 이재용은 그 사람이다. 맞다. 삼성전자 부회장, 얼마전 1년 만에 은근한 미소를 숨기지 못한 채 교도소 문을 나서던 그 사람이다. 그가 감옥에서 즐겨 보았다던 드라마 속 재벌가의 자제는 결국 자기 삶의 모토였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기 위해, 족벌 경영 체제를 일소하고, 그 자신은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재벌가를 나왔다. 하지만, '재산이나 지분, 자리 욕심이 없다'던, 그가 받은 혜택을 사회와 나눌 수 있는 참된 기업인이 되겠다'던 부회장님은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스물 일곱 삼성전자 평사원으로 출발한 그, 그는 아버지로부터 단돈 60억(?)억을 증여받았다. 물론 이 돈에 대해서는 증여세 16억원의 증여세를 당당하게 냈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워렌 버핏도 울고갈 이재용의 귀신같은 투자 전략은 단 2년만에 에스원과 삼성 엔지니어링 주식을 사고 팔아 수익률 1300% 563억원을 남겼다. 심지어 그의 투자 전략을 따르지 못한 세법까지 개정시키며 투자에 투자를 거듭하여 증식된 그의 자산은 2018년 기준 9조원에 이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그 사람'이 아닌 이재용들도 있다. 학창 시절 벌을 받기 위해 복도에 서있으면 선생님들이 지나가며 '아니 왜 회장님이 여기 서계세요?'라 놀렸던 이름, '보험 관리사'로 명함에 이재용을 새겨넣으면 한번이라도 더 봐주던 이름, 그 이름들을 가진 또 다른 이재용들이 있다. <mbc스페셜>은 이 땅에 살아가는 '평범한(?) 이재용을 통해 무사히 감옥 밖으로 탈출에 성공한 '이재용'을 '논박'한다.  

그들에게는 '아버지'가 거저 준 60억은 없었다. 대신 16살부터 식당 알바부터 시작해서 안해본 일이 없이 도달한 이십대 중반의 청춘이 있었다. 음악적 재능은 있었지만, 음악적 재능을 버텨줄 집안이 없어서, 일찌감치 포기해야 할 꿈이 있었다. 



이재용들로 이재용을 논박하다. 
다큐는 우리가 '이혁'으로 알고 있는 전 '노라조의 멤버'였던 이재용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자신이 이재용이었기에, 지난 촛불로 광장을 뜨겁게 만들었던데 기꺼이 일조한 이재용에 유독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었다던 그는, 그가 지켜본 이재용 재판 과정을 노래로 만들었다. '시발남아'(時發男娥)'

다 까고 말해 넌
이미 다 알고 있잖아
처음과는 다른 말로
또 소설을 쳐 써대지
주어진 시간 정확한
사실만을 모두 얘기해
소설은 그만 쳐 쓰고
뉴스를 얘기해 우리가 원하는
너 제일 잘 알잖아 뭘 잘못한 건 지

그리고 그 자신도 '돈'을 벌기 위해 활동했던 '노라조'에서 나와 조금은 배고플지도 하고자 했던 음악의 길에 섰다. 자신의 길에 선 또 다른 이재용도 있다. 서른 중반, 포크레인 시험장에 선 그는 아직 이 기계가 서툴다. 이번까지하면 열 번째 직업, 이재용이란 이름을 새겨넣은 보험 외판원에서 부터, 자동차 영업 등등 아이 둘의 아버지가 되어서도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한 채 여전히 또 새로운 길에 선 그는 이 일이 마지막 선택이기를 바래본다.  스물 다섯이라고 다를까. 16살부터 온갖 안해본 일이 없이 돈을 모으던 이재용은 스물 중반 '돈'이 아닌 자신이 하고픈 걸 하기 위해 공연 예술을 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현실은 유치원 아이들을 상대로 한 계약직, 꿈은 그의 통장을, 그의 삶을 위태롭게 한다. 결국 한 달 뒤, 그와 그의 동료는 대구의 근거지를 떠난 안성에서 일당이 아까워 고향가는 돈도 아끼며 살아가고 있다. 

이 땅을 살아가는 그 '이재용'이 아닌 '이재용'들에겐 삶의 고비고비마다 '돈'이 발목을 잡는다. 역사학도가 되고 싶지만, 가족을 설득시킬 자신이 없다. 좋아하는 연극을 하며 살고 싶지만, 현실은 하루 종일 음식점 주방과 홀을 왔다갔다 하는 알바에, 밤 공연이 끝난 뒤 홀로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건축 설계사 시험 준비다. 음악적 재능이 있던 이재용은 선생님의 도움으로 겨우 음대에 갔지만, 학과 친구들이 음악적 재능을 펼칠 준비를 하는 동안 일찌감치 선생님의 길을 걸었다. 


이재용 부회장이 그의 길지 않은 생애동안 자신의 재산 축적으로 전력질주하며 전 사회의 지탄을 받는 것과 달리, 음악 선생님 이재용은 인기쟁이다. 그가 만든 합창반에는 '특권'이 없다. 심지어 노래 실력 보다 노래를 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다. 파트도 자기 선택이다. 그가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음대에 진학했듯이, 선생님이 된 이재용은 그 시절 선생님처럼 가정 형편때문에 꿈을 접으려는 아이들의 꿈 도우미를 자청한다. 
다큐는 이재용 부회장과 평범한 이재용의 삶을 교차한다. 이재용 부회장이 60억을 받아 대번에 재계 순위에 오르는 동안, 평범한 이재용들은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하고, '없는 형편'에도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저 교차하여 보여줬을 뿐인데, 다시금 이재용 부회장이 우리 사회에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가를 절실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똑같은 이름의 대한민국 국민인데, 누군가는 평범한 이재용이 말하듯, '금수저'라는 이유만으로, 죄를 짓고도 감옥 밖을 유유자적하게 나오는 이 대한민국은 같은 이름이라 해서 같은 국민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이재용이 '삼성'이라는 왕국에서 자신의 부를 축적해 가는 동안, 이제 60이된 한때 삼성 중공업의 노동자였던 이재용은 여전히 직장으로 돌아갈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삼성은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이제 이재용 부회장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무노조'의 정책을 이어오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말하는 '그가 받은 혜택을 사회와 나누는' 그 말에 '노조'의 자리는 없다. 

노조만이 아니다. 삼성반도체 직업병으로 뇌종양을 앓아 시력, 언어능력, 운동 능력을 잃은 채 여전히 휠체어를 타고 시위에 참가하는 전직 노동자도 있다. 삼성이니까 당연히 산재를 인정해 줄꺼라는 희망은 무참히 짓밟혔다. 동료들은 세상을 떠났다. 재판을 이어가는 한혜경씨에게 삼성은 10억을 주며 회유했다. 그러나 한혜경씨는 말한다. 차마 죽어간 사람들이 떠올라 그 돈을 받을 수 없다고. 강남역 8번 출구 앞 초라한 비닐 천막, 그곳엔 한혜경씨처럼 삼성에서 직업병을 얻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이제 3월 그들이 거리로 나선지 900일이 됐다. 


평범한 이재용들과 60억으로 외아들이란 이유만으로 삼성의 왕좌를 차지한 이재용, 그 비유를 통해 다큐는 묻는다. 여전히 유전무죄의 대한민국, 과연 이재용은 죄가 없는 것이냐고. 그리고 그가 전 정권, 그 배후, 그리고 심지어 그 딸을 위해 퍼부은 돈들과, 산재조차 인정되지 않은 재판때문에 거기로 선 노동자들을 대비하며, 이재용, 그리고 삼성의 길을 묻는다. 물론 이재용에 촛점을 맞춘 다큐에서 '삼성'이라는 구조에 대한 조명은 아쉽다. 하지만, 이재용으로 상징되는 삼성과 평범한 사람들의 대비는 그 어느 때보다 극명했다. 그렇게 비로소 <mbc스페셜>이 본연의 자리로 돌아왔다. 


by meditator 2018. 4. 10. 15:43

프랑스 영화를 본다는 건 어떤 것일까? 2015년에 개봉한 <프랑스 영화처럼>이란 영화가 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리뷰를 한 관객들 중 여러 명이 결국엔 다음과 같은 자충수에 도달하고 만다. 그래서 도대체 '프랑스 영화'란 것이 무엇이냐고? 미적인 화면, 모호한 줄거리, 거기서 난해한 수학 공식보다 더 어렵게 찾아야 하는 철학적 명제? 아마, 1895년 이래 가장 일찌기 뤼미에르 형제 이래 영화라는 문화적 장르를 구축한 프랑스 영화를 한 마디로 정의내린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일 듯 싶다. 하지만, 적어도 2018년에 '프랑스'의 영화를 본다는 건, 지금, 우리가 여기서 경험해 보지 못한 '다른' 이야기를 만난다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 그 확실한 '다른' 이야기를 선보인 작품이 지난 4월 5일 개봉했다. 바로 브루노 뒤몽 감독의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이하 슬랙 베이)>이다.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보는 바와 같이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이다. 하지만, 이 제목에 낚여서 혹은 이 제목에서 연상되는 '스릴러'의 장르에 대한 궁금함으로 이 영화를 접한다면 아마도 십중팔구 난감할 듯하다. 영화가 열리면서 벌어진 살인 사건, 혹은 연쇄 실종 사건에 집중하고 싶지만, 정작 영화는 한 눈을 너무 많이 판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브루노 뒤몽 감독의 장기와도 같은 것이다. 



살인 사건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 사건이 브루노 감독의 작품에서는 처음이 아니다. 이미 2014년 <릴퀸퀸>이란 선례가 있다. <릴 퀸퀸>에서도 <슬랙 베이>에서 처럼 연쇄 살인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 사건을 두 형사가 추격한다. 단지 차이라면 1910년의 바닷가 마을, 그리고 현재 어느 시골 마을, 하지만 그곳에서는 똑같이 의문의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두 명의 형사가 그 사건을 조사한다. 그런데, <릴 퀸퀸>에서나, <슬랙 베이>에서나, 살인 사건을 조사하려 하지만, 형사의 시선 안에 드는 건, 그리고 영화가 주목하는 건 '사건'이 아니다. 외려 사건은 곁등으로 제쳐지며, 영화 속 등장하는 인물 군상들을 통해, '사건' 보다 더 '심각한 상징적 현실'과 관객들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제목이 아닌 원제 <Ma loute>이다. loute는 속어로 loulou, 젊은 처녀라는 뜻이다. 하지만 <슬랙 베이> 속 뱃사공 네 큰 아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이중적 의미는 영화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프랑스의 아름다운 해안을 지닌 바닷가 마을, 그곳은 척박한 자연 환경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어부들의 마을인 동시에, 1910년 한참 부를 누리는 프랑스 중상층들의 여름 휴가지이다. 그곳 바닷가 절경이 보이는 언덕 위에는 매년 그곳에서 여름을 지내는 앙드레(파브리스 루치니 분)의 저택이 있다. 여름을 보내기 위해 찾은 앙드레와 그의 아내 이사벨, 그리고 그의 두 딸과 조카가 그곳에서 지내고 있다. 아직 활동적인 아이들은 연쇄 살인이 벌어진 상황에서도 마을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니고, 그러다 한때는 마을에서 가장 유능한 어부였지만, 이제는 바닷가를 건네주는 나룻배 뱃사공으로 20센트씩을 받으며 살아가는 가난한 어부와 그의 아들 마루트를 만나게 된다. 

한 눈에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앙드레의 조카 빌리와 어부의 아들 마루트, 영화는 '살인 사건'은 차치하고, 이 '소나기'처럼 사랑에 빠져버린 두 청춘과 두 사람의 가족들의 이야기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결국은 '비극'이 되어버린, 되어버릴 수 밖에 없는 두 청춘 남녀의 사랑의 '아이러니함'이야말로 바로 브루노 뒤몽 감독이 주목하는 바이다. 



마루트 혹은 나의 그녀, 빌리, 그들의 엇갈린 만남 
마루트와 빌리의 사랑은 <소나기>의 소년과 소녀만큼이나 어우러지지 않는다. 우선 자신을 찾아온 형사들에게 한껏 무슨 무슨 양식을 읊조리며 자신들의 여름 별장의 고급스러움을 거들먹거리지만, 결국 시멘트를 쳐바른 구조물에 불과한 저택에 사는 전통있다는(?) 부르조아 가문의 빌리와, 썰물이 빠진 바닷가를 단 돈 20센트에 손님을 날라주는 제 아무리 정성들여 써봐도 꼬질꼬질한 선원 모자를 쓴 마루트의 환경은 이질적이다. 

엄마 오드(앙드레의 누나, 줄리엣 비노쉬 분)에게서 야단을 맞고 뛰쳐나와 마루트와 함께 바다로 나갔다 죽을 뻔한 빌리를 구해준 마루트네에게 오드와 앙드레 가족이 감사를 표명하지만, 정작 빌리가 마루트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자 대번에 어처구니없다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 생명의 은인이라며 빌리의 친구라며 마루트를 식사에 초대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거친 말 한 마디에 가족들은 대놓고 조롱한다. 

운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마을 사람들의 생업의 터 앞에서 잔뜩 겉멋을 부린 채 외식을 즐기는 앙드레 부부가 날리는 진심이라고 1도 없는 허세 가득한 삶의 찬가는 바로, 이들 '시멘트 덧칠하듯 '돈'으로 떡칠한 졸부, 그러나 자신들은 전통깊은 가문이라는 '부르조아지'의 실상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그들의 가식과 허세와 자비는 오로지 자신들의 안위가 유지될 때뿐, 빌리의 사랑 고백처럼 그곳에 금이라도 갈 양이면 언제든 태세 전환을 하며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돌변하며, 성모상 앞의 오드의 장광설 하소연처럼 오로지 자신들 중심의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살인 사건으로 시작하여, 정작 두 형사의 범죄 수사보다, 빌리의 가족들은 주의깊게 살펴보기 시작하는 영화는, '고어'한 살인 사건의 전모보다도 어쩌면 외양에서부터 기괴한 앙드레네 가족을 샅샅이 관찰하는 데 더 집중한다. 

앙드레 가족의 외양은 이른바 '정상적'이지 않다. 두 팔을 휘적이며 하지만 자신의 몸을 제대로 못가누는 앙드레와, 자전거 하나 제대로 타기 힘든 그의 처남이자, 매제인 크리스티앙의 신체도 정상적이지 않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두 집안의 갈등을 초래한 주인공, 빌리의 비정상 역시 만만치 않다. 마루트가 한 눈에 반해버린 빌리, 그러나 형사들은 그녀(?)의 정체성에 헷갈려한다. 빌리라는 남자 아이의 이름, 짧은 머리의 소년의 복식으로 나타나는 싶던 빌리는 마루트 앞에서는 가발까지 쓴 천상 소녀의 모습이다. 당연히 이 곱디 고운, 심지어 계급적 선입견없이 자신에게 빠져든 상류 계급의 소녀에게 마루트 역시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그녀를 안아, 그 몸을 확인할 때까지. 

그리고 이들의 '비정상적'인 신체는 그들의 위선적 도덕의 상징이자 결과이다. 영화는 <릴 퀸퀸>이 살인 사건을 매개로 여전히 프랑스에서 지속되는 종교적 갈등, 그리고 거기서 드러나는 여전히 보수적이고 완고한 사람들의 아이러니함을 다루었듯이, 역시나 살인 사건을 매개로 아니 어쩌면 불가피했을 살인이라는 생존 행위,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부르조아 계급의 '부도덕'을 '블랙 코미디'의 형식으로 신랄하게 꼬집는다. 

영화의 포스터에서도 등장하듯, 신의 계시에 의해 공중 부양을 하듯, '그들'은 허공에 둥둥 떠있다. 그들의 세상은 시멘트로 덧칠했지만 우아한 양식의 저택이며, 갖은 미사여구를 붙이지만 사실은 속물들의 세상이고, 심지어 그들의 기괴한 신체는 그들이 지난 날 행했던 도덕적 파탄의 증거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아한 척, 심지어 신의 계시라 칭송하지만 현실에 발 붙이지 않은 채 바람처럼 바닷가 마을을 부유하다 바람처럼 떠날 것이다. 



빈부 격차가 심했던 1910년 프랑스, 그곳 슬랙베이에선 
그리고 그런 그들의 맞은 편에 그들을 오로지 먹고사니즘의 대상으로 여기는 '마루트'네가 있다. 영화는 살인 사건을 논외로 제쳤지만, 본 관객들은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벌인 '사건'에 대한 개운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한다. 부도덕과 범죄?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10년대이다. 

산업 혁명이 일어나고, 우리가 배운 서양사에서 서구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고 전해진다. 그렇지만, 그 산업적 발전이 곧 모든 이들의 부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영화 속 전통있는 부르조아 가문이라는 앙드레네 가문 같은 집안은 여름 휴가를 한적하고 아름다운 해변에서 하녀를 두며 지낼 정도가 되었겠지만, 마루트네와 같은 하층민들에겐 여전히 먹고 사는 것이 요원한 과제인 시기였다. 19세기 중반 까지도 서구인의 수명이 45세에서 50세 정도였다. 아일랜드에서 감자 파동으로 인해 1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 19세기 중반이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여전히 잘 산다고 하는 유럽은 '기근'과 싸웠다. 그리고 <슬랙 베이> 속 마루트 네의 범죄는 바로 이런 '기근' 속에서 한때는 잘 나갔지만 이제는 20센트(지금으로 250원)를 받으며 손님을 실어나르며 살아가는 가난한 가족의 현실이다. 우리에게는 이젠 그저 '고어'할 뿐이지만, 당시에는 어쩌면 '선택 여지가 없는 현실'이었던. 

<소나기>처럼 만났던 부르조아 가문의 빌리와 가난한 어부네 마루트의 풋사랑은, 정작 마루트 네의 숨겨진 비밀 때문이 아니라, 빌리의 숨겨진 진실 때문에 파탄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핏물이 든 옷을 입고 묻어달라던 소녀처럼, 배반당했다고 분노했던 마루트의 순정은 빌리를 구한다. 바람처럼 빌리네는 바닷가 마을을 떠돌아 떠날 것이고, 마루트는 남겨질 것이다. 해프닝이 된 사건, 사건보다 더한 부르조아 가문의 부도덕, 그것이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이 도달한 결론이다. 
by meditator 2018. 4. 9. 16:09

대낮에 잘 차려입고 손 꼭 잡고 등산하는 중년의 남녀들이 있다면 십중팔구 '바람'이라는 속설이 있다. 이런 '어불성설'이 난무하는 만큼 이미 우리 사회에서 '바람', 혹은 '불륜'은 사실 보편적이다. 멀리 갈 꺼 뭐 있겠는가? '바람'과 '불륜'이 없다면 대부분의 아침 드라마가 소재 고갈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 '보편적'인 현상은 말 그대로 '윤리'를 벗어난 문제 이기에 언제나 '도덕적 논란'의 기준이 되곤 한다. 이 '현실'과 '이데올로기'의 사이에서 이 소재를 이야기한다는 건 그래서 언제나 조심스러운 줄타기와도 같다. 바로 그런 줄타기를 절묘하게 하려 애쓴 작품이 개봉했다, 바로 <스물>의 이십대 청년들의 이야기를 '리얼'하게 다루었다 평가받았던 이병헌 감독의 신작 <바람바람바람>이다. 




'동(動)'하였느냐? 
<바람바람바람>은 프롤로그와도 같은 씬으로 시작된다. 모범 택시를 모는 석근(이성민 분)의 차에 중년의 여성이 승차해 앞의 자가용을 미행할 것을 요구한다. '미행'을 거부하는 석근에게 그녀는 그 자가용에 바람을 피는 남편과 내연녀가 타고 있다며 다시 부탁을 한다. 기꺼이 그녀의 청을 들어 그 자가용을 미행한 석근의 차는 어느 호텔 앞에 이르고, 차에서 내린 중년의 여성은 호텔로 향하던 두 남녀의 사이에 끼어들어 여성의 머리채를 잡는다. 그리고 뒤늦게 차에서 내린 석근이 그런 그녀를 '잡으려면 남편을 잡지 왜 여자를 잡느냐'는 궁시렁거림과 함께 적극적으로 말리는데, 그때부터 상황이 묘해진다. 바로 내연녀의 머리채를 잡던 중년의 여성이 자신을 백허그하다시피 말리는 석근때문에 애초에 하려던 행동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을 머뭇거리던 여성은 결국 잡았던 머리채를 놓고 휭 하니 돌아서서 석근의 차로 향한다. 그녀와 함께 사라진 석근의 모범 택시, 그들이 떠난 자리에 그녀의 남편과 내연녀가 망연자실 서있다. 

뜻밖에도 영화 <바람바람바람>을 보고 난 후 기억에 남는 장면은 봉수(신하균 분)와 제니(이엘 분)의 바람도, 반전의 미영(송지효 분)과 효봉(고준 분)도 아닌 이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 장면이야말로 이병헌 감독이 <바람바람바람(이하 바람)>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두 시간 여의 이야기를 가장 명쾌하게 설명한 장면이기도 하다. 남편의 바람을 단죄해야 하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신의 몸에 밀착한 석근에게 '동(動)'하는 여성의 변화야 말로 '바람'을 가장 잘 '정의'내린다. 그리고 그 '정의'에 따라 노골적인 추파에도 흔들림없었던, 바람같이 택시를 타고 이 여자, 저 여자를 자유롭게 떠도는 석근을 비웃던 봉수가 '바람'이 나며 영화 <바람>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영화의 초반을 장악한 남자, 남편들, 봉수와 석근의 바람은 초반 프롤로그에서처럼, 그들의 아내 미영과 석근의 아내(장영남 분)의 바람으로 바톤 터치되며 결혼의 행간을 메운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결혼에 대한 불온한 '농담'으로 채워간 이병헌 감독의 <바람>을 보다보면 2000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이만교의 작품을 유하 감독이 영화화 한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떠오른다. 영화는 노골적으로 제목에서 지적하듯, '결혼'이라는 이미 사회적으로 유효기간이 지난, 그럼에도 그 제도적 편의에 타협하는 젊은 세대의 아이러니함을 대학 강사인 준영과 연희의 적나라한 만남을 통해 그려간다. 그리고 그들의 편의가 자초한 딜레마를 통해, 과연 2001년, 혹은 2002년이라는 시대에 사랑을 담아낼 수 없는 결혼이라는 제도의 부실함을 질문한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야한 영화로 소문났던 영화 속 결혼할 수 없는 애잔한 연인이 풀어낸 그 직설적인 담론에 친구와 함께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아직 '결혼'에 대한 로망이 남았던 시절의 '이불킥'같은 추억이다. 

그리고 10년하고도 훌쩍 시간이 흐른 2018년 이병헌 감독은 마치 2018년판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도 같은 <바람바람바람>을 들고 왔다. 이제 결혼에 대한 '로망' 따위 없어진 나이에 <바람>이 그려내는 바람, 혹은 불륜은 새삼스럽지 조차 않다. 이 영화를 가지고 왜 불륜을 들고 나오냐고 한다는 자체가 사실 '비현실적'인 세상인 것이다. 그런데 '바람'이 현실적이면 일 수록 세상은 그 바람에 대한 '불륜'으로의 재단은 엄격해졌다. 

'불륜'에 대한 부담때문이었을까? 2018년의 이병헌 감독은 유하 감독처럼 노골적이지 않다. '코믹'하게 철부지 어른들의 이야기라 내세운 영화는 설사 그들이 바람을 피지만, 2002년의 준영과 연희 처럼 결혼이란 제도를 '개떡'같이 여기지 않는다. 바람처럼 떠돌며 수많은 여자를 만나도, 제니에게 영감과 자신감을 얻어 자신의 중국집을 열게 되어도, 그들에게는 '인륜지대사' 결혼이란 제도는 고정 불변의 진리값이다. 2002년에 이미 사회적 안정을 위한 안이한 타협처라 낙인찍혔던 결혼, 하지만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지나고, 다시 또 한번 변해가려는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봉수, 미영, 석만에게는 지켜야할 그 무엇이다. 심지어 아이의 아버지를 속이더라도. 세월은 흘렀지만, 외려 결혼이란 제도는 공고해 졌다. 

그리고 영화 <바람>의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 결혼 8년차 각자 자신의 레고와 sns에 빠져살던 봉수와 미영이, 각자의 바람 파트너에게서 삶의 활력소를 얻었음에도, 그럼에도 그들을 결혼으로 묶어내는 결정적 그 무엇이, 무엇일까 영화를 보고 나오면 궁금해 진다. 제니의 앞에서도 여전한 아내와의 추억을 애틋하게 말하는 봉수의 변치않는 연정일까? 그러기엔 8년차 그들 부부의 행간은 헐겁다. 그건 바람처럼 여자들에게 떠도는 석근으로 인해 상처받아 그녀 스스로도 탈출구를 찾았음에도 여전히 석근을 애증처럼 놓지 못했던 그녀의 아내가 놓지 못한 '인륜지대사' 혹은 '부부의 정'이었을까. 아내가 좋아하는 게 꽃인지, 가방인지조차 모르는 석근이 그리워하는 조강지처 아내가 끓여주는 보말 칼국수 같은 것일까? 집 밖에 나가면 '남의 편'이라 태연하게 말하는 경지에 이른 중년의 주부들의 '득도'함일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강고한 결혼이란 제도에 갖가지 해프닝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동의한 <바람>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결혼'이란 제도에 의문을 남긴다. 바람으로 행간을 메워하고, 헛헛함을 달래준 결혼은 과연 무엇일까 라고. 과연 저들 철부지 중년이라 포장된 이들에게는 '바람'이 본질일까? 결혼이 본질일까?

그렇게 결혼에 대한 아이러니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지은 <바람>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결혼이란 제도를 모호하게 한다. 문득 미친 짓인 줄 알면서도, 멀쩡한 척 사는 우리네 삶이 씁쓸해지지만 그런 게 사는 건가 싶다. 그래서 그 모호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이 영화가 반갑다. 무엇을 말해서가 아니라, 이런 것도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여유가 편하다. 어쩌면 우리는 조금 더 이런 이야기들을 영화관에서 조금 더 솔직하게 나눌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프롤로그의 그녀를 욕할 수만 없었던 <바람>, 그리고 철부지라 포장된 봉수, 석근, 그리고 석근의 아내, 미영, 그리고 제니의 해프닝을 타박할 수 만은 없었던 <바람>, 조금 더 솔직했으면 싶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만 이야기를 할 수 있어도 어딘가 싶었던 <바람>, 그저 '도덕'으로 치장하며 살다 가끔은 한숨 한번 쉬듯, 우리 삶의 그림자를 들여다 볼 여유를 준 <바람바람바람> 같은 영화가 또 기대된다. 
by meditator 2018. 4. 7. 23:51

몇 년 전 어린이 위인전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당시 공교롭게도 내가 맡아서 하던 인물이 이번에 <레디 플레이어 원>으로 돌아온 스피븐 스필버그 감독이다. 당시 어린이 위인전으로는 획기적인 시리즈로 기획된 그 작업에서 스티븐 스필버그는 '나폴레옹', '이이' 등 고전적 위인을 대체할 새 시대의 '위인'이었다. 


당시 위인전 작업은 그의 영문판 평전을 기초로 해서 이루어 졌었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대학 시절 그리고 영화를 만들기 까지, 그 중에서도 그를 세상에 알리게 된 <죠스>를 만든 과정이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죠스>라는 영화가 만들어 지기 이전에도 납럅 특집 용 상어가 등장하는 영화들은 있었다. 하지만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 뻔한 피칠겁의 섬머 스릴러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해석하며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바로 우리가 기억하는 죠스의 첫 장면이다. <죠스>라 하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기억하는 그 존 윌리암스의 '빠밤, 빠밤~'하며 시작되는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 죠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정작 '죠스'가 등장하는 건 영화가 시작하고서도 65분 여가 지나서이다. 대신, 죠스의 시선으로 바닷가에서 한갓지게 유영하는 '먹이들'을 제시하고 그를 향해 돌진하는 바다 괴물의 역동성과 먹이를 향한 집요함을 한껏 드러내 보이며 관객들의 공포심을 극단적으로 몰고간다. <죠스>에 여러 사람들의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아가리, jaws인 것처럼, 영화 <죠스>는 바로 그 '상어'가 주인공으로 맹활약한 영화이다. 즉 그 이전에 '무서운 대상'을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공포'를 제공했던 방식의 새로운 해석이었던 것이다. 




스필버그의 창조적 방식 
하지만 당시 위인전 작업을 할 당시만 해도 저런 평전의 해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평전'이 평가한 스필버그의 가치를 깨닫게 만든건, 그로 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2018년 그의 최신작 <레디 플레이어 원>을 만나고서이다. 한 화면에서 날뛰는 킹콩과 티라노사우르스, 그리고 그 날뛰는 괴수들의 지면 아래로 차를 몰아 질주하는 주인공, 그 장면에서 왜 스티븐 스필버그가 80년대에도, 그리고 여전히 21세기에도 '명장'인가를 절실하게 깨닫게 해준다. 그가 여전히, 그리고 늘 명장인 이유는 무엇을 보여주느냐가 아니랴, 어떻게 보여주느냐 라는데 선구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시간적 배경은 2045년 '디스토피아'이다. 발전한 과학 기술은 인간에게 가상 현실의 오아시스를 제공하지만, 그 오아시스를 벗어던진 현실은 기술의 독과점 기업과 그에 모든 것을 빼앗긴 빈민층들뿐이다. 기술과 자본에 주도권을 넘긴 세상에 대한 스필버그 식의 담론이다. 위태로운 그들의 컨테이너 탑을 벗어날 희망은 '오아이스'에 접속하는 것뿐인 암울한 미래이다. 마치 피씨방 스크린과 핸드폰의 액정 불빛에 위로받는 이 시대의 사람들처럼. 그리고 그 암울한 미래를 지배하는 기술은 천재 과학자 제임스 할리데이(마크 라이런스 분)의 가상 현실 시스템. 

어느 틈에 블록버스타라 하면 이젠 dc와 마블이 아니고서는 발 붙이기 힘들어진 시대, 코믹스의 영웅이, 그들의 이합집산이 어떻게 구현되는가가 블록버스터의 성공 여부가 된 세상에서, 웬만한 '블록버스터' 환타지는 명함도 내밀기 힘든 처지가 되었다. 바로 그 독점된 블록버스터 환타지의 세계에 당당하게 도전장을 내민건, 바로 '죠스'를 통해 영화 산업에  최초 흥행 1억 달러 돌파 '블록버스터'란 장르를 처음 연 스필버그 자신이다. 

그저 흔해빠진 여름철 납량 특집용 상어 영화를 보이지 않는 추적자를 통해 자아내는 서스펜스를 통해 새로운 장르로 업그레이드 시킨 스필버그의 방식은 <미지와의 조우(1977)>의 결정판 <ET(1982)>, <인디애나 존스>시리즈 , <쥐라기 공원(1993)>, <AI(2001)>까지 언제나 대중의 '허'를 찔렀다. 상어도, 모험가도, 공룡도, 인공 지능도 스필버그가 만들어 낸 건 아니지만, 스필버그의 손을 거치면 전혀 새로운 경지의 캐릭터로 관객들을 매료시키곤 했다. 

그랬던 그가 코믹스의 영웅들이 득세하는 블록버스터 시장에 들고 나온 건, 뜻밖에도 '응답하라 1980년대'였다. 2045년의 빈익빈 부익부의 기술 디스토피아를 벗어나기 위해 가상 현실 오아시스에서 사람들이 '조우'한 것이 스필버그란 이름을 세상에 가장 빛나게 했던 80년대의 복고라는 방식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어찌보면 그 '화려한 시절'을 살아온 스필버그에겐 '사필귀정'같은 선택이다 싶다. 

그렇다. 마치 어르신이 후손들에게 내가 한창 잘 나가던 그때가 좋았었지 하는 후일담의 재기발랄한 버전같은 <레디 플레이어 원>은 2045년의 디스토피아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오아시스 보물 찾기에 뛰어든 웨이드 와츠(타이 쉐리던 분)는 그가 숨겨놓은 열쇠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신화가 된 과학자의 삶을 복기한다. 전설이 되어 신봉되는 그의 삶을, 하지만 '천재'라는 신화를 걷어내면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매달려 한 평생을 보잰 괴짜 소년과도 같은 한 시대를 살아낸 이의 삶의 방식을 열쇠 찾기를 통해 반추하는 것이다. 마치 스티븐 스필버그란 천재가 자신의 삶을 후대에게 전해주듯. 



스필버그의 '응답하라 1980년대'
기존에 제시된 길을 거꾸로 가보고, 주저했던 그 순간에 다시 도전해 보고, 그리고 결과가 아니라, 마치 <응답하라> 시리즈가 그 처음을 '피시 통신'에 접속하던 그 시절에서 부터 시리즈의 서막을 열듯, 가장 결정적인 열쇠를 괴짜 과학자가 처음 매료되었던 게임을 통해 제시하는 그 '방식'은 그 열쇠를 찾는 과정에서 등장했던 킹콩과, 티라노 사우르스의 캐릭터 들, 듀란듀란의 음악, 스티븐 킹의 소설과 그 소설을 영상으로 구현한 스탠리 큐브릭의 서스펜스적 방식과 절묘하게 맞물리며,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시대에 여전히 던지는 명장의 교훈이 된다. 

하지만 과거를 길어 새로운 블록버스터의 길을 열어내 보인 스티븐 스필버그는 여전히 이 시대에도 시대를 앞서가는 선지자가 된다. 그 이유는 그가 <레디 플레이어 원>를 통해 제시한 '콘텐츠'의 구현이 바로 우리 시대 문화적 담론으로 제시되는 '융합'과 '에디톨로지'의 방법론을 원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그의 책 <에디톨로지>에서 '창조는 편집(에디톨로지EDITOLOGY)이다'라 주장한다. 즉, 하늘 아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신의 영역'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창조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김정운 교수의 주장은 일찌기 에드워드 윌슨으로 부터 시작하여 우리나라의 최재천 교수를 통해 대두된 '서로 다른 것을 묶어 새로운 것을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통섭(CONSILIENCE)와도 맥락이 닿는다. 

각각이 한 영화, 한 문화적 콘텐츠의 원형이었던 주인공들이 해체되고 <레디 플레이어 원>을 통해 새롭게 재구성된다. 어쩐지 가상 현실 레이스 속에서 거칠게 날뛰는 킹콩이 반갑기 까지 할 정도로, 고전이 되어버린 <샤이닝>이 활개를 치는 공간은 무섭기보다, 경이롭다. <토요일 밤의 열기>와 듀란듀란의 음악들은 정겹다. 2045년의 디스토피아에서 사람들을 위무하는 과거의 콘텐츠들이라니. 마치 지난 몇 년 우리 사회를 휩쓴 <응답하라>의 열풍처럼. 

마블과 디시 코믹스가 범람하는 세상을 보며, 즉 첨단 과학의 산물과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인물들이 뒤엉켜 현대 세계의 영웅으로 대두된 콘텐츠들을 보며 스필버그는 그렇다면 나도 내가 살아온, 혹은 내가 작업했던 시대들을 '에디톨로지', 혹은 '통섭'해볼까 라고 생각했을까? 이미 그 자신이 한 세대 이상의 '문화'를 창조해 온 주도자로써, 바로 그 자신이 만들어 낸, 혹은 그 자신이 활동했던 그 시대의 주인공들을 불러 모으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겠는가란 '도발적 아이디어'를 유츄해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건 그가 <죠스>를 비롯하여, <인디애나 존스>, <AI> 등을 통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는 문화 콘텐츠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던 그 방식적 전통의 활용이기도 했다. 덕분에 우리는 킹콩과 티라노사우르스가 가상 현실의 RPG 게임에서 다시 한번 맹활야을 하고, 스티븐 킹과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을 다시금 조우하게 되었다. 물론 그들이 그저 '대상화'된 콘텐츠로만 등장한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창고 속의 그들이 다시금 '현역'으로 돌아온 반가움이 크다. 그리고 그 끝에서 만난 건,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노익장'이란 말이 무색하게 '현역'으로 펄펄한 '또 한 명의 괴짜 소년'이다. 여전한 소년은 말한다. 기술과 독점의 디스토피아를 극복할 구원은 결국 '인간' 그 자신일 뿐이라고. 물론 그의 담론과 주장은 소박하고 낭만적일 지로 모른다. 하지만, 그의 소박한 낭만이 2018년의 새로운 블록버스터로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을 보면, 그걸 그냥 어르신의 후일담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by meditator 2018. 4. 5. 16:45

군주의 시대 군주에 대한 거짓말은 '역모'로 취급되어 '대역죄'로 다스려졌다고 역사학자 전우용은 증언한다. 그렇다면 나라의 주인이 군주에서 국민으로 바뀐 민주주의 사회, 국민에 대한 '거짓'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기군망상죄', 즉 대역죄가 아닐까? 그런데, 우리의 현대사 70년, 안타깝게도 그 역사는 권력이 국민들을 기만한 역사였다. 우리의 권력들은 끊임없이 '거짓'을 일삼으며 자신들의 권력을 지탱해 왔다.

그런데 왜 지금 '거짓'에 주목해야 하는 걸까? 4월 1일 <sbs스페셜- 권력과 거짓말(부제; 피노키오의 나라)>는 새로운 권력의 시대, 그럼에도 여전히 쉬이 '처단'되기 힘든 권력의 거짓말을 짚고 넘어감으로써 현재 진행중인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안갯속에 가려져 있던 세월호의 진실, 그 빙산의 일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구명 조끼를 학생들이 입었다던데 발견하기 힘듭니까'라며 뒤늦게 나타나 늘어놓았던 그 '거짓말'의 진실말이다. '저는 정상적으로 보고 받고 체크하고 있었다'던 그 4년 전의 거짓말, 국민들은 묻고 또 물었었다. 수백 명의 국민들이 사지에 내몰린 그 시각, 대통령은 무엇을 하고 있었냐고. 하지만 대통령은 손바닥으로 하늘를 가리듯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았었다. 대통령뿐이랴, 그의 조력자라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나라와 국민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거짓말의 퍼레이드를 벌었다. 그리고 그 날의 진실은 4년이 지난 이제야 드러나기 시작한다. '침실에 있었다고......'

진실의 기회, 그러나 거짓의 향연이 된 국회 청문회
왜 4년이 지난 지금에야 우리는 진실의 장막을 겨우 벗겨내기 시작할 수 있는 것일까? 다큐는 말한다. 기회는 있었다고. 바로 국회 청문회다. 국회 청문회는 국민의 앞에 진실을 말해야 하는 기회이다. 국회에 선 증인은 선서한다. '양심에 따라 숨김이나 보탬이 없이 진실만을 말할 것을. 그리고 이것을 어겼을 때는 위증의 죄를 지겠다'고. 그러나 심지어 원세훈 전 국정원장처럼 이 '선서'부터 거부하는 증인이 등장한다.

국민 앞에 선 당시 사건의 관계자들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모릅니다', 기억이 없습니다'를 되풀이 했다. 김장수 장관도, 김기춘 비서실장도, 우병우 민정수석도, 조윤선 장관도, 조여옥 대위도, 이영선 비서도, 이임순 교수도. 누구라 가릴 것 없이. 국민을 바보 등신으로 아느냐 국회의원들이 일갈하고 분노해도, 그것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피가 거꾸로 솟아도. 그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심지어 우병우는 46일이나 잠적했다, 국민들이 현상금을 걸자, 마지못해 참석했다. 그러고는 '별 신경을 안썼단다'며 '아는 게 없다'고 했다.





국민 앞에 선 그들, 하지만 그들은 60일간의 진실 게임 동안, 오로지 자신의 안전과 형량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짓말을 일삼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들의 거짓말은 '통'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1심에서 위증에 대해 유죄를 받았지만 2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우병우 전 민정 수석은 위증죄가 공소 자체가 기각되었다. 이임순 순천향대 교수 역시 우병우와 마찬가지다. 이영선 비서 역시 집행 유예다. 진실과 정의에 대한 열망은 뜨거웠지만, 정작 그들이 한 거짓의 대가는 치뤄지지 않았다.

국회 증감법은 '선서한 증인 또는 감정인이 허위의 진술이나 감정에 대해 위증을 한 때에는 1년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을 명기하고 있다. 그런데 왜 저들은 '법' 앞에서 거짓의 대가를 치루지 않고 미꾸라지처럼 피해갔을까?

'사실에 반하지만 그 이야기를 할 때는 기억이 없다'는 식의 모르쇠 전략, 애초에 상황을 애매하게 증언하거나, 무능함을 자인하는 진술 방식은, 그 자체로 그들의 '위증죄'를 어렵게 한다고 법 관련 전문가들은 안타까워 한다. 우병우 민정 수석이 청와대의 검찰 수사 압력에 대해 증거를 들이대자 마지 못해 인정을 하면서도 의례적이란 관례를 통해 피해가는 식이다.

거기에 국회 청문회 자체가 한시적 특위라는 태생적 존재론의 한계가 발목을 잡는다. 우병우의 경우, 그가 협박을 한 사실이 윤대진 광주 지검 검사의 진술로 밝혀졌지만 이미 그때는 청문회가 끝난 이후였다. 청문회에서의 위증에 대한 고발은 재적 위원 1/3 이상 연서를 해야 가능한데, 이미 끝난 국회 청문회는 '위증죄 고발'의 효력이 없어진다. 즉 한시적 기구로서의 청문회는 시간이 지나버리면 고발 주체가 될 수 없다.

결국 미국이나 영국보다도 높은 형략을 내세운 국회 청문회 위증죄, 그러나 현실은 '엄포'만 논 것이 되어 버린다. 출석에서 부터, 선서, 증명할 수 있는 죄명, 그리고 시한까지, 국회 청문회를 통한 위증죄의 처벌은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다.

거짓의 역사, 70년- 우리가 용서한 거짓말 
그런데 우리 국민에게 정치인들의 거짓말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아니 우리의 지난 70년 정치사는 곧 국민을 대표하는 리더들의 '거짓의 역사'였다 . 한강 다리가 끊기지 않았다며 북진을 하고 있다던 이승만 대통령은 피난민을 눈 앞에 두고 다리를 끊어버리고 자기 혼자 살겠다고 내빼버렸다. 그리곤 자신의 거짓을 덮기 위해, 다리가 끊겨 도망치지 못한 피난민들을 '부역자'로 '빨갱이'로 몰아 처단했다. 박정희의 거짓말은 그의 정권 연장의 슬로건이 되었다. 민정 이양을 하겠다더니, 총선을 하겠다더니, 더는 집권을 하지 않겠다더니, 다시는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더니, 총탄에 목숨을 잃을 때까지 그는 거짓말을 되풀이 했다. 광주학살의 주모자로 대통령이 된 전두환이나 노태우라고 다를까.




그리고 이들의 거짓말은 안타깝게도 이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연장하도록 허용한, 우리가 용서한 거짓말이 되었다. 즉 지난 70년, 우리의 현대사는 바로 우리가 용서한 정치인들의 거짓말의 역사였다. 바로 이 지점을 다큐는 짚는다. 왜, 우리는 정치인들의 거짓말에 관대한 거일까?

전 정치인 전여옥 씨는 그 '용서'의 관습을 우리의 고속 성장에서 찾는다. 즉 과정과 수단이 잘못되어도, 목표를 달성하면 용서가 되었던 고속 성장의 시대, 정치인들의 거짓말 쯤이야 눈 질끈 감고 용서해 주었던 국민들의 전반적 정서가 오늘날 두 대통령의 감독 행을 결과했다.

물론 인간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인간 개인으론 하루에 10번, 많게는 200회 까지 거짓말을 한다. 이렇게 보면 거짓말은 '인간의 속성'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하지만, 다큐는 주장한다. 그저 인간의 거짓말과 정치인의 거짓말은 다르다고.





거짓을 용서하는 관행에서 부터 
미국의 경우, 클린턴 전 대통령이 탄핵을 받은 이유는 그의 성스캔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국회 에서 위증을 한, 그 거짓말이 그를 대통령직의 위기로 몰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은 국회, 즉 국민 앞에서의 거짓말을 국가 전복, 반란에 준거한 죄로 여긴다. 반면 일반인들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관용적이다. 그러나, 부패 범죄, 직권 남용과 관련한 거짓말에 대해서는 '관용' 대시 '기소'로 다스린다. 특히 '살림의 여왕'이라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마사 스튜어트의 사례에서 보여지듯 조사 과정에서 정의의 실현을 방해하면 기존 형량에 4년을 더하는 등 단호한 처벌이 행해진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오히려 반대다. 모르쇠로 일관했던 이영선 비서관에 대해 1심에서 위증을 인정했던 법원은 2심에서 집행 유예를 선고했다. 그의 거짓말을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충성심'으로, 즉 '상사의 지시에 의한 불가피한 이유'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법조인 생활을 오래했기'에, '국가 성장에 이바지했기에' 라는 식으로 그들의 거짓말에 '면죄부'를 준다. 이에 '노회찬 의원'은 반발한다. '오랫동안 노동을 해왔기에 법적으로 처벌을 완화해 준 적이 있냐? '고

다큐는 우리 현대사 비극의 시작을 '그들의 거짓말'로 부터라 본다. 부정 부패가 반복된 역사, 그 베이스가 되는 건 바로 권력자의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력의 거짓말'에 대한 문제 제기는 곧,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그러해 왔던 시스템과 문화에 대한 질문이 된다. 과연 우리는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사회와 격리시켰던 적이 있는가? 심지어 유죄를 받아도 정치적 탄압이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주장하는 사회, 거짓말과 한 배를 탄 권력, 처벌받지 않는 권력, 이제 우리가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가고자 한다면, 바로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도 권력을 유지해 갈 수 있는 관행에 대한 분명한 '징죄' 시스템을 만드는 것에서 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라 방향을 제시한다. 어쩌면 당연한, 하지만 누구나 그러려니 했던 그 '관행'에 대한 문제 제기, 바로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그 '기초'와 시스템에 대한 제언이다.

by meditator 2018. 4. 2. 15:49

제목만으로도 도무지 그 내용을 예측할 수 없는 3월 29일 개봉한 제페니메이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2017년 우리가 조우할 수 있는 '일본 문화'의 결정체, 혹은 집합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이 희한한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 지기 위해서 일본 문단의 기대라 칭해지는 모리미 토미히코라는 작가의 동명의 소설이 전제된다. 2003년 <태양의 탑>으로 15회 일본 판타지 노벨 대상을 받으며 데뷔한 모리미 토미히코는 2006년 영화와 동명의 소설인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로 20회 야마고토슈고로 상을 수상하는가 하면 나오키 상 후보에 오르는 등, 그해의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었고 일본 문단의 기대주로 각광받고 있다. 



모리미 토미히코의 매직 리얼리즘 환타지로부터 비롯된
<밤을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청춘 판타지물이다. 짝사랑하는 후배 여학생의 사랑을 얻기 위한 선배의 '최눈알 작전', 이른바 '최대한 그녀의 눈 앞에서 알짱거리기' 작전을 다룬 이 소설은 하지만, 풋풋한 연애물을 연상하면 그 기대는 무참히 깨지고 만다. 선배의 낭만적 연애 감성을 자극하는 아직 소녀티를 벗지 않은 검은 머리 아가씨는 태평양 바다가 럼주였으면 좋겠다는 두주불사에 어른들의 세계를 맛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교토 밤거리에서 벌어지는 환타지적 모험의 주인공이 된다. 반면, 그런 그녀를 짝사랑하면서도 그녀 앞에서는 늘 '어쩌다 지나가는 길이었어'라는 말 밖에 되뇌이지 못하는 선배는 그런 그녀를 따르기 위해 '팬티 실종 사건'에서부터 그녀의 헌책 사수 작전, 감기 광풍까지 본의 아니게 환타지에 휘말리게 된다. 

교토라는 특정한 지역을 배경으로 한 밤의 문화, 그 속에서 때론 음란하게, 때론 장광설을 펼치며 문화를 유영하는 사람들, 그리고 대학과 거리의 책과 각종 동아리 공연 문화를 기반으로 한 환상의 서사는 새로운 환타지의 영역이다. 그곳엔 '신화'도, '영웅'도 없지만, 교토라는 곳을 기반으로 한 갖가지 문화적 행사와 모임들이 가진 '리얼리즘'이 '매직'으로 승화되며 환타지의 새로운 세계를 연다. 그저 하룻밤, 하지만 영화 속 이백의 말처럼 사계절을 겪어 낸 듯한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풍성한 환타지의 세계는 바로 이 '원저자' 모리미 토미히코의 문학으로 부터 시작된다. 



문화의 도시 교토가 진짜 주인공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매직'의 기반이 된 '교토'이다. 교토에서 태어나 교토에서 자라, 아직도 교토 도서관에서 근무하며, 교토의 천재라 칭해지는 모리키 토미히코의 작품은 단 한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토를 배경으로 한다. 특히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이하 밤은 짧아 )>는 교토의 문화적 거리를 배경으로 한다. 

우리 나라의 '경주'와 같은 곳 이른바 일본판 '천년 고도'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곳이 바로 교토이다. 하지만 <밤은 짧아>에서  등장하는 교토는 유적지와 벚꽃의 풍경이 아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 술을 마시기 위해 거리로 나온 검은 머리 아가씨와 선배가 활보하게 된 곳은 바로 교토의 중심지 '기온'으로 간주되는 동네이다. 바둑판처럼 가로 세로 구획된 길들이 이어진 동네, 그곳의 밤은 낮보다 빛난다. 술을 위해 의기투합한 괴물이라 자칭하는 유카타를 입은 남자 히구치와 애주가 여성 하누키가 검은 머리 아가씨와 함께 이 술집 저 술집을 전전하는 거리는 늦은 시간까지 술을 파는 술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조명과 저마다의 간판을 뽐내는 명소이다. 이백의 배가 닿는, 그리고 잠시 숙취를 깨는 환기의 장소로, 그리고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등장하는 가모가와 강 또한 빠질 수 없다. 

한바탕 술판을 벌여 결국 술내기로 술의 신으로 칭해지는 '이백'까지 이겨낸 검은 머리 아가씨의 밤은 아직도 한참, 그 깊어진 밤만큼이나 계절도 무르익어 한 여름의 열기를 뿜어내고, 그 열기 속의 밤 거리엔 '책 축제'의 향연이 펼쳐진다. 시모가모 신사를 향하는 참배객의 넓은 길을 간이 서가가 채우고, 그곳에 오래된 책들이 켜켜이 쌓여 고서 매니아들의 방문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린 시절의 책을 찾기 위해 서가를 헤매는 검은 머리 아가씨, 그 아가씨의 책을 먼저 찾아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아이로 등장한 헌 책 시장의 신에게 이끌려 책 구하기 작전에 휘말리게 된 선배의 모험담은 바로 이 코토의 '책 축제'와 오래된 책을 사랑하는 문화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명소의 거리나, 책 축제와 같은 구체적인 장소나 무형의 유산만이 영화를 채우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환타지적 해프닝의 행간을 메우는 출연진들의 갖가지 문화적 행태들이다. 나이가 많으면 많은 대로, 혹은 젊으면 젊은대로, '괴변'을 비롯한 갖가지의 공통적 취미를 통해 만나지는 기온 거리의 각양각색의 술집 부터, '통제'된 암흑의 시대에 게릴라처럼 번지는 대학의 문화, 우리나라에서는 도저히 용납되기 힘든 '춘화 매니아', '팬티 패티쉬' 등등의 하위 문화가 버젓이 영화의 행간을 당당하게 채워간다. 다종다양한  b급의 문화적 정서들이 교토의 밤거리, 책 축제라는 도시의 문화와 함께 어우러져 <밤은 짧아>의 주인공으로 교토를 기억되게 한다. 그저 영화 한 편을 봤을 뿐인데, 교토라는 도시에 담뿍 빠져 여행을 하고 온 기분이 든다. 



나카무라 유스케의 일러스트를 통해 구현된 캐릭터 
교토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빚어지는 청춘들의 환타지적 모험담이 '에니메이션'이란 장르로 영화화 된건 영화를 보면 당연한 결과물이라 여겨진다. 그저 술을 마시고 싶어 밤 거리로 나선 검은 머리 아가씨가 그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혹은 괴물, 신들과 함께, 술과 책과 사랑의 모험을 겪어 가는 신비한 세계를 풀어가는데 에니메이션만큼 유효한 장르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모리미 토미히코의 원작이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의 영화가 되기 까지에는 일러스트레이터 나카무라 유스케라는 관문이 있다.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이 모리미 토미히코의 작품을 영화화한 건 <밤은 짧아>가 처음이 아니다. 

2010년 tv 시리즈로 소개된 <다다미 넉장 반 세계 일주>가 그 첫 시도로, <밤은 짧아>에서 등장한 대학 내 다양한 동아리들이 신입생의 고민으로 등장하며, 익숙한 캐릭터들이 선보여 졌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카무라 유스케는 모리미 토미히코 작품의 캐릭터 원안을 담당했다. <밤은 짧아>의 여주인공인 검은 머리 아가씨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나카무라 유스케의 일러스트는 소녀와 동물이 어우러진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마치 일본의 옛 그림의 정취가 배어나는 화풍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우리나라에서도 매니아 층을 가지고 있다. 



긍정적 인간애에서 비롯된 러브 스토리 
이렇게 자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 갖은 환타지적 고난을 겪어 내는 찌질한 선배와 그런 선배의 구애 작전은 아랑곳없이 어른의 세계에 용감하게 뛰어든 검은 머리 아가씨의 성장 환타지는 이렇게 교토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원작과, 그 원작을 절묘하게 구현한 일러스트 등 갖가지 문화적 콘텐츠들의 조합으로 탄생되었다. 하지만 아우성치듯 저마다의 개성으로 빛나던 문화적 콘텐츠들은 영화의 절정에 이르러서는 결국 애초에 작가, 혹은 감독이 추구했던 청춘 서사로 절묘하게 모아진다. 

팬티를 갈아입지 않던 선배의 희한하다 못해 괴팍한 취향도, '최눈알 작전'이니 뭐니 소심했던 선배의 짝사랑도, 그리고 '어른'의 세계만을 탐닉하느라 정작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검은 머리 아가씨도, 결국은 하룻밤을 빙자한 교토 사계절의 환타지 모험을 겪어내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향한 용기를 내게 된다. 여전히 서툴고, 머뭇거리지만 더는 '알짱거리거나 기다리지만은 않는 그들의 사랑은 영화 초반 '찌질했던' 그들을 이해하게 될만큼 애틋한 러브 스토리로 마무리된다. 마치 한바탕의 난장을 겪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이제 그들은 가슴 설레는 사랑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러브 스토리'를 가능하게 한건, 때론 찌질하고, 종종 변태스럽기도 하며, 심지어 위악적이기도 했던 등장 인물들의 군상을 여유롭게 '인간사'의 한 장으로 품어낸, 그래서 어쩐지 영화를 보고 나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이해할 마음의 여유가 느껴지는 <밤은 짧아>의 넉넉한 세계관이 있기에 가능했다. 
by meditator 2018. 3. 31. 05:08

올해로 제주 4.3 사건이 70주년이 되었다. 다행히도 새 정부 들어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조명이 좀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건 물론, 그 어느 때보다도 전국민적 관심을 받는 희생자 추념식이 될 예정이어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신 영령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70주년이 될 듯하다. 


그런데 이렇게 활발하게 조명을 받는 제주 4.3 사건, 그러나 이 비극의 역사는 오래도록 우리의 역사 속 행간에 드러나지지 못한 채 숨죽여 왔었다. 그저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상흔도 마음대로 드러내지 못한 희생자와 그 가족들, 그들의 아픔에 대해 우리의 역사는 외면해 왔었다. 방송이라고 다를까. <알쓸신잡>을 통한 유시민 작가의 회고, 그리고 최근 70주년 기념식 사회를 맡은 이효리가 자신의 예능 <효리네 민박>에서 언급을 통해 새삼스레 '조명'받고 있지만, 재야 언론을 제외하고 예능은 물론, 다큐에서 조차 제주 4.3은 접해보기 힘든 '희귀한' 이야기였다. 

1978년 아직은 서슬이 퍼랬던 유신 시대 현기영 작가는 자신의 작품 <순이 삼촌>을 통해 4.3 사건의 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문화 영역에서의 4.3에 대한 말문을 텄다. 89년대에 들어서서 <제주 민중 항쟁>, <잠들지 않은 남도> 등의 출판 연구 분야에서의 4.3에 대한 조명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고, 제주의 지역 신문인 '제주 일보'가 4.3에 대한 증언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군사 정권이 종식된 1990년대 들어 유족 들을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진상 규명에 대한 움짐임이 시작되었다. 1993년 '제주 4.3 특별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99년 제주 4.3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4.3 특별법 제정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그해 12월 2일 국회의원 102인의 발의로 '제주 4.3사건 특별법'이 제출되었다. 



바로 이렇게 제주 4.3 특별법이 제정되는 등 우리 사회에서 4.3이 행간 속에서 역사로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1999년 9월 12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첫 회로 제주 4.3 사건을 다루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방영된 100부작 다큐멘터리였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6.25, 독재 정권 시기까지 역사의 행간에 숨겨져 있는 역사적 사건을 '복기'해낸 프로그램으로 실미도 사건 등을 다루며 일요일 밤 11시 30분이라는 불리한 시간대임에도 '인기 프로그램'이 되었다. 이렇게 '금기의 시대'를 다룬 프로그램이었던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그 첫 방송으로 제주 4.3 사건을 다룬다는 건 그만큼 이 사건이 한국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방송에서 본격적으로 4.3 사건을 다룬 첫 번째 기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선구자'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방송을 통해 4.3을 이야기하는 건 쉽지 않았다. 

비극의 역사 속 숨겨진 진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 봉기가 시작되었다. '탄압 중지, 단독 선거, 단독 정부 반대, 통일 정부 수립'을 내세운 이들은 12개 경찰 지서와 우익 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다. 이 과정에서 15명이 사살되었다.'

이것이 1999년까지 세간에 알려진 4.3사건이었다. 다큐는 바로 이 사실에 대한 검증부터 들어가기 시작한다. 4.3 사건이 일어나기 전 친일 경찰이었던 조병옥의 비호를 받은 서북 청년단의 무차별적 테러가 이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라 짚는다.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의 발포 사건으로 민간인 6명이 사망하고 이는 제주도민의 민심을 악화시켰고, 이는 총팡업에서 95%가 넘는 참여율로 이어졌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 대해 미군정은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를 외지인으로 교체하고, 서북 청년단을 파견하여 무차별적 테러, 구금, 고문으로 이어진 체포 작전이 벌어졌다. 


이렇게 '경찰이 사람 때려죽이는 게 보통'이었던 당시의 상황은 도민의 감정을 격화시켰고 이를 절대 지지 세력으로 믿은 체포 작전으로 위기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 봉기를 감행하기에 이르렀다고 결론내린다. 또한  당시 미군정이 주장하듯 이 '무장 봉기'가 남로당 중앙당의 계획적인 봉기였다는 사실에 다큐는 이의를 제기한다. 무엇보다 당시 미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잘 알고 있는 중앙당이 그런 무모한 지시를 내릴 리 없다는 것이다.
 
'사상' 보다는 매 맞지 않기 위해 가입했던 사람들이 대다수였던 남로당 제주도당이 무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진압 작전에 대응한 불가피한 무장 봉기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무장 봉기의 실상 조차도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의 실상이라는게 5~60명 정도의 작은 부대 단위, 당 자체는 커녕 계통의 조직체가 없었을 것으로 간주되는, 그들 대부분이 죽창이 주요 무기였으며, 소총은 겨우 한 두 자루가 있을 정도, 공격을 해서 겨우 한 사람 정도를 사살할 정도의 전투 능력을 가진 이들의 무장 봉기란 실상 그리 '가공할만한' 정도가 아니었다고 다큐는 밝힌다. 

다큐는 72시간 내 전투 중지, 점차적 무장 해지, 주모자들의 신변 보장이라는 파격적인 내용의 4.28 평화 협상을 무력화시켜 버린 5.1 오라리 방화 사건을 주목한다. 무장 폭도에 의한 방화로 회담을 결렬시켰던 이 사건, 하지만 생존해 있는 오라리 주민들은 당시 폭도의 만행을 증언했던 주민들이 오라리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대동청년단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런 이유에 힘을 실은 건 이미 불이 꺼져 가는 상황인데도 경찰이 와서 주민들을 쏴죽였다는 사실이다. 미 군정의 딘 소장이 제주를 극비로 방문한 이후, 귀순 작전을 펼치며 협상을 주도했던 김익렬 장군이 해임되고 초토화 작전이 본격화 된다. 

대리전의 리허설로써의 4.3
다큐가 줄기차게 질문하고 있는 건 바로 이런 민족적 비극의 책임 소재가 어디에 있는가이다. 그리고 다큐가 가리키고 있는 대상은 바로 미국. 후에 공개된 미군정 보고서는 당시 경찰이 지나치게 폭력적이었다는 사실을 미군정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즉, 미국은 이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것이다. 왜? 그건 바로 제주 도민의 70%가 좌익, 혹은 그 동조자라는 미국의 냉전주의적 시각에서 부터 비롯된다. 

5.10 선거를 앞둔 미 군정은 자신들이 주도한 단독 선거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남한 내 반공 정권에 대한 조바심을 숨기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도 내에서 번지고 있는 반정부적 움직임에 미 군정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씨를 말려버리는 초토화 작전을 사전에 구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후의 미군정 문건은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군 정찰기가 제주도 상공을 수시로 정찰했으며, 함대가 제주도를 봉쇄하고 있었으며, 통신 부대의 촬영은 지극히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편집'시켰다고 다큐는 밝힌다. 

특히 5.10 총선 과정에서 전국의 200여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치뤄졌는데, 제주도에서는 소요 사태로 인해 3대의 선거구 중 2개가 투표 미달로 대표적인 단독 선거 거부 지역이 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토벌이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주민들을 해안선 5km 밖으로 소개하고 제주도를 횡단하여 병력을 배치한 후, 한라산을 기점으로 해안까지 빗질하든 소탕해 가는 과정에서, 농사일 등으로 떠나지 못한 주민들은 즉결 처형되었고, 이미 산으로 피신한 청년들 대신, 가족을 죽이는 '대살'이 횡행했던 토벌, 사망 군인에 대한 보복으로 소개된 주민들에 대한 집단 학살, 전쟁이 터진 후에는 예비 검속이란 명분으로 또 사살, 암매장, 제주 도민 중 3만 여명이 목숨을 잃는 '집단 학살극'이 벌어졌다고 다큐는 증언한다. 



미군정은 이승만 정부가 수립된 이후 자신들은 직접적 책임은 없다고 발뺌을 하지만 이후 밝혀진 보고서에서는 49년 6월 30일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한국군과 경찰이 미군의 통제 하에 있었다는 비밀 협약이 밝혀진다. 또한 보고서는 공산주의와의 냉전 과정에서 '한국군을 훈련시키는 목적이 미군을 대신해 피를 흘리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대리전'의 한국 전쟁, 그리고 그 대리전의 '리허설'로써, 본보기로써 '좌익, 혹은 그 '동조자'에 대한 무차별 초토화 작전을 방조한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것을 다큐는 강조한다. 

그렇다고 이승만 정부는 이런 책임에서 피해갈 수 있을까? 일제 하 경찰들을 그대로 이어받는 한편, 서북 청년단을 경찰로 흡수시킨 이승만 정부는 단독 선거, 이후 단독 정부 수립으로 불안정했던 정권을 지켜내기 위해, '공산주의를 심하게 탄압하면 할 수록 미국의 지원을 받기 용이하다는' 정권 이해의 차원에서 이런 '민족적 비극'에 앞장 서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발각되지 않기 위해 동굴로 피신했지만,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얼마되지 않은 참혹한 시련, 발각되지 않기 위해 우는 아기의 입을 막다 죽이고, 만삭의 산모가 배를 드러낸 채 총살 당하고, 두 아들은 사살, 나머지 세 아들은 실종, 그 과정에서 죽어간 3만 여명의 주민들.  제주 도민 전체의 한으로 남겨진 역사, 그 누구라도,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이든, 혹은 공산주의자라도 그렇게 인간이 정당한 법질서의 영역 밖에서 '집단적으로 무차별적으로 학살'되어서는 안된다는 참혹한 교훈을 1999년 제주 4.3 특별법이 첫 삽을 뜨던 그해, 첫 회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프로그램의 정체성으로서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밝힌다. 




by meditator 2018. 3. 29. 04:41

'즐거운 나의 집'이 행복한 가정의 '로망'이던 시절 아이들이 있는 집이라면 이른바 '세계 명작 50권' 한 질쯤은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세계의 명작 중에 추려낸 겨우 50권의 작품 중에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작품이 무려 두세 권 들어 있기가 십상이었다. 바로 <소공녀> <소공자> <비밀의 화원> 등이다. 이제는 중년, 혹은 노년에 들어서는 사람들이라면 익숙할 제목의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과 서사는 달라도 주제는 일관된 편이다. 어려움에 빠진 소년, 혹은 소녀가 주변의 학대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심성과 의지를 굳히지 않고 지내다 결국은 '해피엔딩'에 이르게 된다는 이야기다. 미국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던 소년 세드릭이 완고한 영국 귀족 할아버지와 홀로 살게 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소녀가 아버지의 죽음과 파산으로 하루아침에 다락방으로 쫓겨나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이야기들이다. 

소년과 소녀는 위기를 겪으며 '집' 혹은 즐거운 나의 집으로 상징되는 '행복한 가정'을 잃는다. <소공녀>의 새라는 비록 아버지뿐이었지만 인도에서 성공한 아버지 덕택에 기숙 학교에서 공주 대접을 받으며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실종으로 새라는 모든 것을 잃고 하루아침에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된다. 기숙 학교 공주에서 기숙 학교 '하녀'가 된 새라. 하지만 생전 겪어보지 못한 배고픔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힘든 시절을 '상상놀이'를 하며 견뎌낸다. 그리고 그녀의 상상은 하룻밤 판타지에서 현실로 변하는데, 그 '해피엔딩'에는 꼭 '그녀들이 놓친 어려움에 대한 경제적 보상'이 따른다.

 영화 <소공녀>의 포스터

영화 <소공녀>의 포스터ⓒ 광화문 시네마


'힘든 환경을 이겨내는 밝고 따뜻했던 소년, 소녀'들의 이야기는 시절의 변화와 함께, 신데렐라, 백설공주와 함께 세계 명작의 대열에서 사라져갔다.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서 돈을 번 아버지 덕택에 잠시 공주 대접을 받던 새라에게 닥친 우연한 해피엔딩은 더 이상 과거처럼 찬사를 받을 수 없었다. 더구나 '공녀'라는 시대착오적인 제목부터 거부감의 대상이 되었다. 더 이상 우연한 행운을 얻은 '소공녀'가 존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세상의 사람들은 '공주'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2018년 또 다른 소공녀가 찾아왔다. 그녀는 돈 잘 버는 아버지 덕택에 공주 대접을 받은 적도 없다. 하지만 새라가 기숙학교에서 방을 잃고 다락방으로 쫓겨나듯, 또 다른 소공녀는 알량한 월세방마저 잃고서 여전히 꿈을 꾼다.

당신은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미소(이솜 분)'라는 인물이 있다. 이십 대 후반, 혹은 삼십 대 초반 정도의 나이. 자칭 자신의 직업이 '가사 도우미'라 하는 <소공녀>의 여주인공 이름이 미소이다. 그녀는 건물 외벽 가파른 철계단을 올라 도달하는 방 한 칸에 산다. 집주인이 세를 놓은 곳에 다시 세입자가 세를 놓은 방이다. 방 안에서도 온기 하나 없어 껴입은 옷을 벗고 벗다, 너무 추워 애인과의 섹스를 다음 해 봄으로 미뤄야 할 정도로 추운 곳이다. 애인 한솔(안재홍 분)은 기업의 기숙사에 살며 대학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빠듯한 삶을 산다. 

미소는 '가족'의 그림자 하나 없이, 쉴 사이 없이 지낸다. 그녀의 머리색을 침범하는 '새치'를 막아내기 위한 한약을 꼬박 챙겨 먹는다. 그리고 한 잔의 위스키와 담배 한 갑에 드는 돈을 벌기 위해 가사 도우미를 한다. 남들은 '가사 도우미?'하며 어색하게 억양을 올리며 물어보지만, 적어도 그 일을 하는 순간 그녀는 전문 전동기구까지 동원하며 청소하고, 집주인이 원하는 갖가지 반찬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프로다.

하지만 일을 하는 순간만 프로일 뿐,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 그녀는 여전히 도시의 '아마추어'처럼 보인다. 아니, 애초에 이 도시가 강요하는 편제된 삶에 자신을 맞출 의도가 없다. 담배값이 오르면 담배를 끊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싼 값의 담배를 구한다. 위스키 값이 오르고 방세가 오르자, 그녀의 선택은 위스키 한 잔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방을 포기한다. 그리고 방을 포기한 그녀는 과거 한 때 자신의 방을 자신의 집처럼 드나들던 밴드의 멤버를 찾아다니며 잠시 의탁을 구하는 여정을 떠난다.

한 잔의 위스키와 담배 한 갑을 위해 방을 포기하고 짐 싸들고 거리에 나선 미소. 영화는 미소의 여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집'의 의미를 묻는다. 우리 사회에서 '집'은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 조건이다. 집이 있고, 거기에 머무는 기본적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집 한 칸 마련하기 힘든 청춘'의 시대의 퍽퍽함을 삼포 세대니 하는 세대 용어로 항변하기도 한다.

그런데 영화 <소공녀>는 집을 가질 수 없는 청춘의 시대에 질문의 깊이를 보탠다. 누군가에게는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위스키 한 잔, 그리고 백해무익하다는 담배, 그 의미를 말이다. 미소가 찾아간 옛 밴드 멤버들은 그녀에게 당연하다는 듯 "아직도 담배를 안끊었니?"라거나 "넌 아직 철이 안들었구나"라고 말한다. 그녀의 사치스럽고 쓸 데 없어 보이는 '취존(취향존중)'을 통해, 영화는 '과연 우리에게 집은 왜 필요한가'를 묻는다.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광화문 시네마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광화문 시네마


위스키 한 잔, 담배 한 갑을 위해 집을 포기하다니

그리고 이와 같은 질문을 두텁게 하기 위해 영화는 집이 있는 옛 동료들을 비교한다. 한때는 미소처럼 위스키 한 잔과 담배를 즐기고, 음악이 좋고 함께하는 게 좋아서 어울렸던 동료들. 하지만 이제 이들은 이 사회에 '철든 어른'들이 되어 살아간다. 그들은 모두 각자 자신의 집에 머무르고 있다. 

잘 나가는 직장인이 되어 사는 친구는 쉴 사이 없이 몰아치는 업무의 피로를 담배 한 대 대신 포도당 링거로 대신한다. 결혼을 위해 20년 동안 매달 100만 원의 월세 아닌 월세로 아파트를 마련한 후배는 이제 사랑하는 이 없이 '장기 이자'만을 짊어진 채 외려 미소의 위로를 받는다. 일찌감치 결혼했던 또 다른 동료는 집은 있지만, 미소를 하루 재워주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는 '층층시하'의 처지다. 그리고 동료가 선택한 집에는 한때 작곡을 잘 했던 그녀의 음악을 위한 자리는 없다. 

방이 스무 개도 넘어 미소에게 거뜬히 방 하나 쯤은 내어줬던 선배 언니의 담장 높은 집에는 그녀가 두 손 모아 시중 들어야 할 남편의 그늘이 짙다. 보컬이었던 선배의 집에서는 식구들이 '즐거운 나의 집'을 합창하지만, 노래가 끝난 그곳엔 '미소'를 감금하려는 강박과 허울뿐이다. 과연 그들이 안주하는 집은 미소의 위스키 한 잔, 담배 한 갑보다 가치 있는 걸까?

영화는 예전 멤버들의 집을 일주한 여행을 통해 '집'이라는 경제적 가치로 매겨지는 삶의 가치를 묻는다. 집이 당연하게 필요하다는 사회, 그런데 그 '집'은 무엇을 위한 집인가? 그래서 당신은 집을 위해서 무엇을 포기했는가? 어른이 되어 집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 포기한 것들이 진정 포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 영화는 기꺼이 세상에 편재되어 살아가기 위해 애닳아 하는 이 시대 청춘들에게 '우문'을 던진다. 이는 최근 트렌드가 된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에 대한 또 다른 담론이다.

하지만 그 우문에 현답은 없다. 미소는 그저 위스키와 담배와 함께, 애인이 옆에만 있어주면 괜찮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연인 한솔은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헌혈 센터에서 피를 뽑아야 하는 신세다. 한솔은 가난한 연인의 삶을 견디는 대신, 웹툰 작가로서 자신의 꿈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한솔은 돈을 벌어 두 사람의 '스위트 홈'을 구하기 위해 세 배의 월급을 주는 사우디 아라비아로 떠난다. 그렇게 유보된 꿈, 혹은 포기된 꿈 대신 '집을 갈구하는 세상에서 이제 미소는 새치가 번지는 걸 막기 위해 먹던 한약 값마저 구하기 힘들다. 

미소는 흰 머리를 날리며 거리에 남는다. 어둠이 드리운 도시, 그 강변 둔치에 오도카니 불 켜진 미소의 텐트, 미소의 소확행은 그 '불법 점유물' 텐트처럼 불온하고 아득하다.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소공녀>지만, 영어 제목은 'microhabitat'이다. 동화 속 집을 잃은 소녀의 이야기인 듯 시작된 영화는 '미소 서식지'라는 신조어를 통해 반문을 한다.

정혜윤은 그의 책 <사생활의 천재들>에서 '마이크로헤비타트(미소 서식지)'에 대해 말한다. "비가 오면 잠시 피해갈 처마 같은 곳, 지렁이 수준의 숨어있을 만한 곳, 새 수준, 고양이 수준... 인간 한 명에게도 이 도시에서 잠시 쉬어갈 곳이 필요하답니다"라고. 미소한 미소가 서식할 만한 공간에 대한 질문. 더 이상 앞 세대처럼 집으로 재테크를 할 여력이 없는 세대에게 집은 최소한의 서식할 '여지'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변화한 서식지'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 <소공녀>는 이솜이라는 배우에 기대어 풀어놓고자 한다. <족구왕>의 기획자였던 전고운 감독의 '여성 버전 족구왕'이랄까.

by meditator 2018. 3. 26. 1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