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은 스스로 주장하지 못하고, 자유는 스스로 보호하지 못하며, 민주주의는 스스로 성공하지 못한다'

이는 최근 극우주의가 기승하고 있는 독일 현실에 대한 독일 메르켈 총리의 경고성 발언이다. 이와 함께 메르켈 총리는 '독재자가 독일 사회의 다양성을 쓸어버리는데 고작 6개월이 걸렸다. 나치의 부상과 함께 한 엘리트 들과 이를 묵인한 사회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다시 한번 독일인들의 각오를 촉구했다.

 

벌집을 발로 찬 소녀. 2

 

유럽 쪽 작품을 읽다보면 아동성애자 등 같은 이상 성범죄에 대한 것을 다룬 소설들이 제법 많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런데 아동성애자이건 혹은 그렇지 않은 여타 성범죄이건, 그 범죄 심리의 근원을 따라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것이 이른바, '남성 우월주의' 혹은 '가부장주의'적 사고방식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가부장중의'적 사고방식에 의존해 자신의 파시즘적 영향력을 급속도로 확산시킨 것이 바로 위에서 메르켈이 경종을 울리고 있는 '나치즘'이다.

 

스티그 라르손

 

스티그 라르손은 바로 그런 유럽 사회의 '인권'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해치는 극우 세력에 대항한 언론사의 기자로 평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쓴 '밀레니엄 3부작'은 흥미진진한 스릴러물임과 동시에, 스티그 라르손이 싸워왔던 그 극우주의 세력의 그물과도 같은 실체를 낱낱이 폭로한 작품이기도 하다.

 

밀레니엄 1부가, 스웨덴의 전통적인 기업 가문인 방예르 가문의 추악한 과거를 역추적해 감으로써 아동성애자 혹은 이상성애자의 근원이 나찌즘 혹은 극단적 극우파로 연결되어 있음을 밝혔다면,

밀레니엄 2부를 통해, 2차 대전이 종전된지가 한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시즘 세력들의 잔재가 민주주의 국가로 스며들어 국가적 비호를 받으며 그 사회적 악의 근원으로 성장되는 과정을 폭로했다.

1부와 2부가 잡지 [밀레니엄]의 열혈 기자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와 2부의 '주구' 샬라와 묵은 해원을 가진 가족의 일원이자, 천재 해커인 리스베트의 눈부신 활약을 통해 거대한 음모를 밝혀가는 과정이었다면, 그에 반해 3부 바람치는 궁전의 여왕은, 지금까지 스웨덴 사회에 암약해 왔던 전근대적 악의 세력을 민주주의적 세력이 힘을 모아 소탕하며 정리해 가는 과정을 담았다.

 

그러기에 3부를 읽다보면 어김없이 나오는 미카엘의 러브 모드나 마지막 오빠와의 조우를 제외하고는, 두 사람의 활약이 그다지 돋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리스베트는 2부 마지막 아버지와의 일전에서 당한 부상으로 3부 중반까지 침상 신세를 지는 신세였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그런 주인공 두 사람의 활약과 달리, 국가 기관 속의 또 다른 권력으로 행세하며 지나간 자신들의 과오를 덮거나 확대하기 위해 활동하는 극우적 세력들과, 그들에 맞서 스웨덴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뭉치는 검, 경, 안보기구의 연합 작전이야말로 바로 밀레니엄 3부의 대미가 아닐까 싶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흔히 국가 기관의 일원이 되면 당연히 가지게 되는 보수적 혹은 자기 안위적 사고 방식이, 스웨덴이라는 국가에서는 그들이 이뤄낸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정의로움으로 발현되는 '신기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스웨덴 역시 그들의 민주주의를 이루는 과정에서 때로는 보수적 정당이 정권을 잡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스웨덴이라는 국가를 이루는 정체성을 만드는 그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사민주의' 정신이 정부의 관료들을 통해 실현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꽤나 묘한 쾌감과 부러움을 낳는다.

 

결국 이는 한 사회의 건강함 혹은 민주주의 라는 것이 시스템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길고 지난한 투쟁과 더불어, 그 사회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이 일개 잡지사 기자이건, 고위 공무원이건, 거기에 대한 확고한 자기 신념이 체화되어야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하는 과정이었다.

 

겨우, '소설 나부랭이' 였지만, 매력적인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를 통해, 스웨덴 인권과 자유와 민주주의 사수를 향한 길고 지난한 투쟁서를 일독한 듯한 보람을 준 책이었다

by meditator 2013. 2. 7. 19:13

kbs2의 월화 드라마 <광고 천재 이태백>은 실존 인물 이제석을 모티브로 삼아 방영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이제석이 누구인가? 지방대 출신에, 동네 간판 가게에서 일을 하다, 미국으로 유학, 그 이후 국제 광고제에서 수상을 거듭하며, 획기적인 공익 광고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바로 그 화제의 인물아닌가. 그런 당대의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하는데........그런데 웬걸, 실제 드라마 <광고 천재 이태백>에서 만난 인물은 80년대 드라마에서 종종 조우하던 좌충우돌 열혈 청년, 그 사람이다.

 

 

 

얼마전 조용히 종영을 한 <드라마의 제왕>이란 드라마가 있었다. 연기에 있어 '본좌'라 칭해지던 김명민의 모처럼 드라마 복귀작으로 기대를 받았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연 <드라마의 제왕>은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는 부족했었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사람들에게 '드라마'라는 건 보기엔 익숙해도, 그 뒷이야기까지 관심을 가지기에는 익숙치 않은 장르이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줄곧 '드라마'를 만드는 '자신'들의 고뇌와 고통을 논한 <드라마의 제왕>을 사람들은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들만의 리그'로 끝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광고 천재 이태백>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도 마찬가지이다. 제 아무리 이제석이란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도입한다 하더라도 눈만 뜨면 만나는 것이지만 '광고' 역시 '드라마' 만큼이나 사람들에게는 낯선 이야기일 수 있으니, 그 딜레마를 <광고 천재 이태백>의 제작진은 이른바, '이십대의 태반이 백수'라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공통적 고민에서 부터 풀어가고자 한다. 즉, 가진 것 없고, 지방대 출신의 낮은 스펙으로 면접도 보기 전에 떨어지지만 세상을 향한 패기 하나는 그 누구보다도 거칠 것 없고, 정의로움 또한 따를 자 없는 젊은이의 이야기로.

그런데 그러다 보니, 보편적 고민에서 출발하는 건 좋은데, 이 드라마가 다루고자 하는 '광고 천재'라는 측면에서는 역으로 영 부실한 내용을 담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동차 광고판을 세로로 붙이느냐, 가로로 붙이느냐, 혹은 아이들의 게임기로부터 모티브를 얻어 광고 컨셉을 만드느냐 라는 지엽적인 소재를 차치하고는, 이 드라마가 진짜 '광고'를 다루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심하게는 이 드라마의 구도를 그대로 가져다가, 2012년에 '패션'을 다룬다 하여 화제를 끌었던 '패션왕'이나, 혹은 거기서 더 거슬러 올라가, 1998년도의 <미스터 Q>에 가져다 놓는다 해도 크게 이물감이 없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게다가 과거의 사랑했던 한 여인(고아리; 한채영 분)을 둘러싼 주인공(이태백; 진구 분)과 서브남9에디 강; 조현재 분)의 대립 구도에, 대기업 본부장인 서브남은 언제나 그렇듯 야심만만에, 이제 주인공과 사랑에 빠질 여자(백지윤; 박하선 분), 그것도 전형적으로 회장님의 딸을 자신의 야망을 위해 이용하려까지 하니, 이보다 더 전형적일 수 없는 인물 구도이다. 더구나, 주인공은 할머니와 여동생을 거느린 가장에 마음은 따스하기가 이를데 없으며, 서브남은 직설적인데다가, 아버지와도 서먹서먹한 냉혈한에 가까운 인물이라니(물론 거기에 또 사연이 있겠지만), 1회부터 대놓고, 주인공은 좋은 편, 서브남측은 나쁜 편하고 편을 먹고 시작하는 이 방식은 전형적이어도 너무도 전형적이다. 이렇게 구도가 만들어져 버리면 결국 드라마를 끌고 가는 건, 또 역시나 주인공의 선한 의지와, 그 반대 측의 이기주의, 혹은 그것을 지속하기 위한 악행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심지어, 동네 간판을 싹쓸이 하는 간판 가게 사장님이 알고보니, 한때 광고계를 주름잡았던 전설의 광고쟁이라는 설정에 그를 찾아가 이태백이 무릎을 끓는 엔딩에서는, 전설의 타짜를 찾아가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하는 '타짜'의 한 장면이 오버랩된다. (또 마침 그 장면에서 전설의 광고쟁이는 화투를 치며 말한다. 광고는 낙장 불입이라고 !)

 

정작 이 드라마를 보면서 사람들이 궁금해 할, 왜 이태백은 광고를 하게 되었을까?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주인공과의 술자리 대화로 단번에 해결해 버린다. 그리고 그냥 처음부터 이태백은 '천재'다. 그가 책상에서 끄적거린 광고 아이디어는 광고 전문 기업 금산 에드 기획팀과 본부자의 머리를 단번에 뛰어넘을 정도로. 그리고 아마도 이 다듬어지지 않은 천재는 무림의 고수 마사장을 만나 '사사'하면서 더더욱 <타짜>의 '고니'같은 '천재'로 거듭나 안그래도 무능력해 보이는 금산 에드 광고팀들을 날려버릴 것이다.

 

과연 이런 천재 이태백을 보면서, 이 시대의 진짜 이태백들은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일단 사람은 잘 나고 봐야해, 이런 거?

21세기의 꽃인 광고, 그리고 21세기의 영웅 이제석이란 인물을 그저 뻔한 성공 스토리에 차용하기에 앞서, 이 시대에 광고가 무엇인지, 이제석이란 인물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고민이 좀 더 앞서야 하지 않을까? '타고난' 히어로가 아니라, 갈고 닦여 성장하는 맛이라도 있어야, 시청률은 차치하고,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이라도 주지 않겠나.

by meditator 2013. 2. 6. 09:10

엉뚱하지만 종편 방송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 한다. 나이가 든 사람들이 자꾸 종편 쪽으로 리모컨을 돌리는 이유 중 하나는 편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제는 공중파에서는 진부하다고 밀려난 컨셉, 스타일들이 종편에서는 늘 익숙하게 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그 익숙함 속에는 자신들이 살아온 세월들 속에서 더 익숙해진 사고와 관념의 스타일 또한 여전하게 자리잡는다. 새롭게 맞출 필요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그런 생각들, 그걸 우리는 '보수적'인 것이라 통틀어 쉽게 이야기 하곤 한다. 하지만 굳이 보수적인 것들을 꼭 종편에서만 만날 필요는 없다. 젊은이들이, 조금씩 외면하기 시작하는 공중파의 시간대는 자꾸 중장년층들의 눈치를 보며 시선을 맞추려고 애쓴다. 그런 의미에서 2월 4일 힐링 캠프는 조금 용감했고, 모처럼 '힐링' 캠프 다웠다.

 


SBS 통합 포토뷰어 해당 이미지 바로가기

 

<힐링 캠프> 홍석천 편이 방영되는 동안, 이경규는 여러 번에 걸쳐 자신은 홍석천을 게스트로 하는 것에 반대했다는 말을 표명했다. 그 말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지배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른바 '보수적'인 시선들을 의식한 말들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국의 여배우가 시상식에서 거침없이 자신의 성적 성향을 밝히는 이즈음에 홍석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라는 역설적 토닥임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이경규가 던지는 질문들은 더욱 돌직구성이었을 수가 있고, 또 그래서 홍석천은 공중파를 통해 모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자리를 깔 수 있었다.

 

물론 홍석천은 바로 몇 주 전에 <라디오 스타>에도 등장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었다. 하지만, 그 자신의 표현처럼 아직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라디오 스타>라는 웃자고 판을 벌이는 곳에서 홍석천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자신을 희화화 시키면서 조금은 편하게 사람들이 '성적 소수자'를 바라보게 하는 그 정도 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힐링 캠프>는 그저 웃고 떠들며 홍석천을 편하게 보자는 방식을 버렸다. 대신 그 누구보다도 '보수적'이라며 편견어린 그리고 일상의 우리들도 사실은 궁금했던 질문들, 동성애는 정신병인가? 동성애자의 사랑은 어떤가? 당신의 부모님은 당신을 이해하는가? 등을 마구 던졌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홍석천은 '성적 소수자'로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삶에 대해 오히려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대한민국의 대표적 '게이'인 홍석천의 입을 빌어 알 수 있었던 것은 유럽의 어느 나라는 동성 결혼이 허용되고, 동성애 부부의 입양이 허용되는 현실에서도 여전히 우리나라에서는 자신의 성적 취향이 남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버려야 하고, 그들의 죽음조차도 '성적 비관'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쓴 채 덮어져야 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진다는 사실이다. 그저 우리가 무심히, 혹은 그저 편하게 자신의 색안경을 끼고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누군가가 사회적 압사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그것이 애초에 본원적으로 뇌의 형성 과저에서 부터 타고난 것이라던가, 혹은 청소년기의 질풍노도의 감정에서 그런 것이거나, 구분조차 할 시간도 없이, 선이 그어지고, 가족과 친구와 사회 밖으로 밀쳐져 극단적 선택을 하기가 쉽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거기에 덧붙여, 그저 동성애를 이해할 수 있어, 라고 편하게 생각한 뒤에 숨겨진 많은 사실들, 여전히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 동성애자라면 쉽게 에이즈에 걸리겠지 라는 편견들을 인식하게 되었다.

홍석천이란 한 사람을 통해, 게이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보다 열 배 이상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던 이 '성적 소수자'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굳어 있던 우리 뇌의 한 부분이 조금은 말랑말랑하게 되었다.

그 누구보다도 '보수적'이라고 주장한 이경규도, 자신은 깨어있다고 했지만 알고 보면 보수적인 면이 많다는 김제동도, 그리고 그 '보수'에 한 표를 더한 한혜진까지도 홍석천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할 수 있었던 시간, 홍석천이 자신이 '게이'임을 밝히고, 그것을 공중파를 통해 이해받을 수 있기까지, 13년의 세월이 걸렸다.

by meditator 2013. 2. 5. 10:06

연예부 기자는 H.O.T를 취재하러 다녀오느라 바쁘다. 극중 어린 여주인공은 자동차 카 스테레오를 통해 H.O.T음악을 틀어달라 앙탈을 부리다 교통 사고를 유발한다.

그저 H,O.T면 다 설명되는 어설픈 설정이지만, <돈의 화신>은 마치 <응답하라 1997 >의 경제버전처럼, 지금으로 부터 10년전 한국 사회를 H.O.T를 넣어 배경색을 칠하고, 거기에 '돈'을 향한 욕망에 자신을 거침없이 팔아넘기는 이 사회 지식인층을 등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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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철, 장영순 작가의 전작 <자이언트>는 6.25 전쟁이 끝나고 개발 독재 시기까지, 돈을 향해 혹은 돈을 이용해 자신의 꿈을 이루고 복수를 완성하려는 인간 군상들을 대하 드라마로 다루었다. 그 시기의 돈을 향한 꿈들은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폐허에서 입지전적으로 부를 형성해 가는 방식은 원시적 자본주의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모하고도 무자비한 이른바 '졸부'의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한민국의 부의 반열을 형성한다.

이제 그들이 부의 몸통을 이뤄 행세하는 1990년대의 대한민국은 어떻게 다시 재편되어 가는가를 장영철, 장영순 작가는 <돈의 화신>을 통해 해명하고자 한다.

 

최근 차기 정권의 총리 후보자가 온갖 돈과 관련된 추문으로 말미암아 자진 낙마를 할 수 밖에 없게 되자, 차기 정권을 준비하는 측에서는, 당직 후보에 대한 검증에 있어 도덕적 부분을 완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한 사람이 일을 하는데 있어 능력과 그의 도덕적 수준과는 별개의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하면서. 즉 이는 대한민국에서 내로라 하는 자리에 앉을 사람치고 깨끗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는 셈이 된 것이다.

바로 <돈의 화신>이 그려내고자 하는 지점이 이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정계, 법계를 막론하고 그들이 누구하나 도덕적 검증 과정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가는 과정에 <돈의 화신>은 포커스를 맞춘다.

 

드라마 속 이중만 회장은 홀홀단신 서울로 올라와 땅을 비롯한 갖은 부를 축적한 전형적인 졸부의 현신이다. 그러던 그가 자식처럼 아끼던 차세광의 복수극 음모로 인해 목숨을 물론,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차세광은 누구인가? 현재 사법 연수원생에, 변호사 보로 일하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다. 하지만, 그의 드러난 간판의 현란함과 달리, 아버지가 이중만 회장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불우한 사연을 지닌 복수로 되갚으려는 사적 복수의 신봉자요, 이중만 회장의 내연녀를 사랑 놀음에 이용하거나, 복수를 위해서는 은인의 아들을 죽이고, 그 아내를 평생 정신 병원에 가두는 그 좋은 머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써먹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런 차세광을 옆에서 직접적으로 돕는 사람은 바로 이중만 회장의 변호사요, 이중만 회장의 아들이 마지막으로 손을 내밀은 사람은 어머니 사건을 담당한 검사였다. 뿐만 아니라, 시민의 발이 되어야 하는 기자는 이강석의 소재를 알리는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이들이 누구인가. 대한민국이라는 시스템이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제도적 틀을 공고하게 지켜나가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른바 '돈'의 유혹에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자신의 신념을 팔아넘긴다. <돈의 화신>이라는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거대한 은유,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매번 청문회를 보면서, 씁쓸함을 삼키는, 이제는 그 마저도 비공개로 한다는 현실을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즉, 아버지의 세대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만들어 놓은 부, 그 아들들은 다시 직업의 소명 의식따위는 개나 주어 버리고, 아버지 세대의 방식 그대로 아니 더 교묘하게 자신들의 직위와 좋은 머리를 이용해서, 그것을 자신들의 부로 이어간다. 심지어, 아버지 세대의 부를 찬탈해가면서. 이제 거기에 대해, 다음 세대, 이강석의 세대는 이전 <자이언트>의 황태섭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 자신이 부를 일궈 나가듯이, 차세광이 만들어 놓은 법의 그물로 교묘하게 짜여진 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또 다른 법을 이용해 갈 듯하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그것이 사업이 되었건, 법이 되었건 여전한 대한민국의 논리라는 결론을 내리며.

by meditator 2013. 2. 4. 09:57

김준호, 박성호, 김준현, 정태호, 양상국, 허경환 , 여섯 남자가 꾸려가는 쓰레기가 없는 일주일, 그런데 쓰레기는 둘째치고, 이 여섯 남자의 일상에서 빚어지는 푸근함이 일주일의 고단함을 싹 풀어버린다.

 

 

 

 

 

전에도 한번 말했다시피 <인간의 조건>은 이미 개그 콘서트를 통해 선후배 사이로 호흡을 맞췄던 여섯 남자들의 시너지가 빛나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그 느낌이 우리가 흔히 사회 생활에서 선후배 관계에서 빚어지는 감정과 다른 빛깔을 낸다. 사회 생활에서 우리가 가장 크게 고통을 받는 부분이 바로 선후배가 갑과 을의 관계로 만나졌을 때이다. 사회 생활을 먼저 했다는 이유만으로, 고참이라는 이유만으로 후배에게 갑이 되는 선배로 인해 받은 고통은 사회 생활을 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한번 이상은 겪었을 일이니까.

그런데 웬걸, 개그 콘서트 최고참이라는 박성호를 비롯하여, 그 보다 한 살 어리지만 역시나 최고참인 김준호에게서는 그런 선배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

물론 전화가 울리면 후배가 냉큼 달려가 받긴 하지만, 그 외의 생활에서 선배랍시고, 혹은 선배라고 이런 게 없다. 오히려, 김준호는 들어올 때마다 집에서 기다리는 후배들을 위해 꼬박꼬박 먹을 걸 사들고 온다. 쓰레기 남긴 사람을 위한 벌칙도 잔머리를 써보고 앙탈도 부려보지만 준엄한 후배들과 가혹한 제작진 덕분에 제일 먼저 웃통을 벗고 찬 바닥에 무릎 끓고 '나는 쓰레기입니다'를 외쳐야 했다. 그리고 그걸 김준호는 노여워하지 않고, 아니 오히려 극적으로 만들어 가며 살려낸다.

<인간의 조건>에서 김준호의 컨셉은 좀 구질구질하다. 쓰레기를 만들지 않기 위해, 웬만하면 먹을 걸 사지 않고 후배가 먹는 걸 한 입씩 얻어 먹질 않나, 기껏 사놓은 숟가락은 내 먹을 건데 어때? 라며 씻지도 않고 쓰질 않나, 후배들은 '형, 제발~'을 외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서 당연히 따라붙은, 그에게는 개그 콘서트 최고참이라던가, 그곳에 모인 개그맨들의 소속사 사장이라는 권위 따위가 없다. 제 아무리 선배라도 좋은 개그를 위한 '배틀'에서 지면 개그 아이디어는 후배 몫이 되는 걸 당연지사로 받아들인다. 거기에 내가 선밴데~ 하는 위압적 언어나 태도는 찾아볼 수 없다. 개그맨들의 위계 질서가 엄격하다고 하는데, 이 여섯 남자들의 합숙에서는 그걸 찾아보기 힘들다. 애초에 권위와는 별 무관해 보이는 박성호에, 권위 자체가 생겨나기 힘든 김준호 덕분이다. 그래서 사회 생활 속 위계 질서에 지친 사람들에게 <인간의 조건>을 보는 건 그 자체로 힐링이다.

 

 

게다가 이미 개그 콘서트를 통해 인간적 친밀감을 쌓은 여섯 남자의 조우는 한 집에서 생활하기를 통해 이미 또 하나의 가족같은 분위기를 자연스레 형성해 나간다.

모르는 사람들이었다면, 서로 알아가느라 보내는 시간 대신에, 이들은 이미 익숙한 관계를 더욱 공고히 쌓아간다. 서로의 부모님을 뵈었을 때 자연스레 '허그'를 할 수 있는 친숙함이 있고, 말 한 마디면 서둘러 마트에 가서 고등어를 사다가 구워 동료의 부모님을 위한 상을 차리는 수고를 마다치 않는다.

박성호의 아들이 남긴 음식을 자연스레 김준현이 덥혀서 먹고, 뒤늦게 온 정태호가 동료들이 남긴 스파게티 면을 남은 갈비탕 국물에 말아먹는 모습에서 예전 어머님들이 하셨던 그 모습이 자연스레 오버랩 되면서, '쓰레기를 없애'는 게 아니라 '정을 쌓아'가는 인간의 조건을 체험하게 된다.

지렁이를 키워 음식물 쓰레기를 없앨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낸 양상국에게 동료들은 이제 네가 <인간의 조건>의 에이스구나 라며 감탄하고 칭찬을 하지 한번도 네가 우리보다 앞서나간다는 질시의 눈빛을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 중 가장 한가했던 양상국을 '양엄마'라 북돋아주며 그가 해낸 일을 으쌰으쌰 해주는 분위기다. 다른 프로그램에서 늘 익숙했던 다그침이나 경쟁이 <인간의 조건> 하우스에만 오면 스르르 풀려가는 김준현의 눈처럼 녹아 없어진다. 그저 밥만 먹으면 코 골고 자는 김준현도, 지렁이를 애완동물 다루듯하며 오는 사람마다 자랑하는 양상국도, 잔머리를 쓰다가도 뒤집어 쓰고 마는 김준호도 그저 원래 있었던 가족처럼 푸근하다.

'쓰레기'는 점점 없어져 가지만, 오히려 인간다움은 쌓여만 가는 힐링 하우스, 바로 여기 여섯 남자들의 공간이다.

by meditator 2013. 2. 3. 10:54

달빛 프린스를 두번 째 회를 맞이했다.

첫 회에 대한 반응을 수용했는지, 선정된 책 [리어왕]에 대한 간략 소개를 넣고, 탁재훈을 아예 책을 읽지 않는 컨셉으로 변화시키는 등 지난 1회에서 불거진 비판에 대한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여전히 <달빛 프린스>라는 프로그램 한 회를 내내 진득하게 보고 있기엔 너무 지루하고 의미를 찾기도 버겁다.

 

 

 

1. 도대체 누가 mc야?

<달빛 프린스>는 아직 캐릭터가 잡혀지지 않은 프로그램의 빈약함을 게스트의 비중으로 채워나가려고 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1회의 이서진에 이어, 2회 김수로 등, 그 자신 만으로도 충분히 한 회를 꾸려나갈만한 예능감이 충만한 인물들을 게스트로 불러들였다.

 

1회의 이서진은 그래도 본인이 나서서 프로그램을 좌지우지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2회의 김수로의 경우, 안타깝게도 김수로 라는 게스트는 훌륭했지만, 안타깝게도 역설적으로, mc들의 무능력함을 증명한 한 회가 되어버렸다.

과연, 2회 한 회 동안, 메인 mc 강호동이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강호동은 진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멘트를 제외하고, 생뚱맞은 공격하라 외에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토크'의 맥은 게스트 김수로를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고, 안 그래도 좌석 배치 조차도 김수로를 중심에 놓고, 좌우에 mc들을 배치해 놓으니, 더더욱 강호동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았다.

 

강호동의 마력은, 프로그램을 그의 에너지로 장악할 때 그것을 일필휘지와 같은 힘으로 좌우하며 끌어갈 때 제대로 발산된다. 하지만 <달빛 프린스>의 강호동은 여전히 이 프로그램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 지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 여전히 그를 사로 잡고 있는 것은 자신이 '무식'하다는 컴플렉스인지, 설정인지 모를 그 지점이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선뜻 책을 매개로 한 이 프로그램 전반에 나서서 휘젖지 못하게 하는 장애가 되고 있는 듯하다. 안타깝게도, 그의 '무식'을 무기로 삼고 나갈 계기를 탁재훈이 이미 선점해서, 아예 책을 읽지 않은 캐릭터로 자리잡아 버리니, 더더욱 강호동의 입지는 좁아질 밖에.

과연, 컨셉조차 겹치는 게다가 시너지나 호흡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강호동, 탁재훈 이란 두 mc, '지식'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기만 하는 강호동과, 책이고 뭐고 주구장창 '딴지'나 걸겠다는 탁재훈의 부조화를 언제까지 지탱할 건지.

 

덕분에, 달빛 프린스는 심각한 결점을 노출하고 말았다.

과연, 김수로처럼 예능감이 충만하지 않은, 한 회 내내, 프로그램을 이끌어갈 능력이 되지 않는 게스트가 나온다면? 김수로 정도의 인물이 나와도, 재미없는 <달빛 프린스>인데, 상상만으로 최악이다.

 

이상하게, <달빛 프린스>를 보노라면, 자꾸 <이야기쇼 두드림>이 떠오른다. <이야기쇼 두드림>은 프로그램 배경 조차도 책장이 즐비한 거실같은 분위기이다. 도무지, 피터팬과 책이 무슨 상관이지도 모를 유치한 복장의 mc가 나오는 <달빛 프린스> 와는 그 분위기에서 부터 차이가 난다. 더구나, <이야기쇼 두드림> 정도의 mc진영이라면, 이 정도로 책 하나를 붙들고, 도무지 토크를 해야할 지, 책을 읽어야 할 지 우물쭈물하면서 한 회를 보내지는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문득, 김c의 리어왕에 대한 촌철살인 한 마디가 그리운 건, 지난친 사심일까?

 

 

2. 책을 읽으라는 건지, 읽지 말라는 건지

<달빛 프린스>를 보노라면, 교양에 가 있어야 할 프로그램이 걸맞지 않는 예능의 옷을 입고 어색하게 앉아있는 듯한 느낌이 자꾸 전해진다.

 

여전히 이 프로그램은 책을 이용하겠다는 건지, 책을 활용하겠다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1회에 탁재훈이 책을 읽지 않고 나왔다는, 혹은 프로그램의 내용이 되는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이 프로그램을 보겠냐는 비판에 직면한 제작진이 내세운 묘책은 아예 탁재훈을 책을 읽지 않은 컨셉으로 변용시킨 거였다.

여기서 제작진의 오류는 다시 한번 반복된다.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해서, 책에 내용에 지레 섣부른 판단을 내리거나, 책의 내용과 관련된 토크에 딴지를 걸거나, 토크 내용을 귀동냥해서 읽은 척 하라는 건 아니지 않은가?

최악의 경우, <달빛 프린스>는 책을 읽지 말고, 그저 프로그램에서 흘려들은 글 줄 몇 줄을 가지고 책을 읽은 척 하라는 메시지를 주는 프로그램으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책을 읽지도 않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을 지향한다면, 조금 더 신변잡기 식의 토크보다는,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형식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 책 속의 문구 맞히기 식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런 형식을 고집하고 싶다면, 문구를 맞히는 것이 아니라, 책의 내용이나 주제와 관련된 문제로 바꾸어도 되지 않을까?

제 아무리, 강호동이 물어보고, 탁재훈이 대답해 주는 복습으로, 그저 책 속의 글 몇 줄을 이해시킨다고, [리어왕]이 이해되는 건 아니니까?

정작 [리어왕]의 주제는 인간의 무지몽매한 욕망인데, 주구장창 음담패설식 남자의 코 이야기나 하고 있는 토크 쇼는 재미도, 의미도 없다.

by meditator 2013. 1. 30. 10:04

"러브라인'이 하나도 없네"

<학교2013>의 종영 자막이 올라가는 걸 보면서 아들녀석이 던진 말이다.

"아쉽지. 뭐 그래도, 러브라인은 아니라도, 이상하게 학교는 그냥 어울림만으로도 좋은 커플은 많았어. 정인재, 강세찬 선생님 커플처럼"

그렇다. 장장 16부작이라는 긴 시간동안 학교2013은 유일무이하게 사랑 이야기가 하나도 없는 드라마였다. 하지만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가 없을 뿐, 이 드라마 올 겨울 그 어느 드라마보다 또 다른 '사랑'으로 가슴을 따스하게 만들었다.

 

 

 

 

1. 놓는 것과 놓치는 것이 무엇이 다른거죠?

선생님이 되고 나서 처음 맞이한 제자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언제나 냉정하게 아이들과의 거기를 유지하려던 강세찬 선생은 이미 자기도 모르게 선뜻 아이들과 가까워진 그 무게에 짓눌려 사직서를 쓴다. 그런 강세찬 선생에게 찾아간 정인재 선생이 말한다.

'아이들의 손을 놓는 것과 놓치는 것이 무엇이 다르냐'고.

2013년 현재 대한민국의 냉엄한 학교의 현실을 조명하는 것으로 시작한 이 드라마는 16부작 종영에 이를 때까지 그 무엇도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학교는 성적 지상주의에, 무슨 일만 생기면 학교 폭력 위원회나 여는 관료적이고, 속물적 가치관에 의해 지배되는 곳이다. 정인재 선생이 아이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해도, 강세찬 선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도 현실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마치 돌아오지 않는, 돌아올 수 없는 오정호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16부작을 차근차근 밟아 온 <학교2013>은 현실의 우리가 무기력하게 좌절하고 마는 그 제도라는 벽을 다함께 손을 잡고 올라가는 도종환 시인의 시 '담쟁이'처럼, 다시 한번 살아볼까? 하며 서로 손을 맞잡게 하는 힘을 주었다.

16부 마지막회, 종례를 마친 아이들은 '러브라인'은 아니지만, 서로 서로 손을 맞잡고, 혹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교실을 나선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였던 고남순과 박흥수는 다시 그 예전의 불알친구 모드로 회귀했고, 도둑질을 한 계나리는 도둑을 당한 신혜선과 손을 꼭 잡았다. 일진 그룹이었던 이지훈은 한영우에게 사과를 하고, 그 사과를 한영우는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물론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결론이다. 현실의 학교에서는 쉽사리 일어나지 않을. 오히려 현실의 학교에서는 저런 원인들로 인해, 아이들이 옥상으로 올라가고, 학교 교문을 나서고, 마음에 상처를 입을 뿐이다. 기본적으로 아이들을 닥달하는 부모가, 이 사회가 달라지지 않고, 그들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버거운 학교 라는 제도는 달라지지, 혹은 달라질 수 없는 상황에서, 16부작의 마지막회는 여전히 환타지에 가깝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쯤은 생각해 보게 된다. '손을 내미는 것'에 대해.

<학교 2013>의 장점은 일방적으로 선생님에 의한 학생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드라마를 이끌어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그들이 겉으로 보기에 제 아무리 싸가지 없고, 회생불가능해 보여도, 여전히 아직은 '개과천선'이 가능한, 아니 그 이상, 상처받은 자신을 그저 감싸기에도 버거운 청소년이란 사실을 짚는다. 거기에, 여전히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인간답게 지켜나갈 자생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오정호가 학교를 떠나려고 하지만, 그의 나직한 말, '이젠 나쁘게는 안살아요'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 것은 강세찬, 정인재 선생님만이 아니다. 그의 똘마니라고 치부했던 '친구'들이 그를 버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머리를 조아리며 애를 쓰는 그 마음때문이다.

친구 계나리를 왕따로 부터 구원한 건, 계나리의 도발을 이해한 친구 신혜선의 따스한 마음인 것처럼.

<학교 2013>이 굳세게 밀고 나간 것은 '성선설'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차가운 학교라는 제도 조차도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구제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2. 주목할만한 이현주의 세계관

작가 이현주가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미니 시리즈 사이에 살포시 '땜방'으로 들어간 '보통의 연애' 로 인해서 였다.

<보통의 연애> 역시 풀기 어려운 아니 애초에 풀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두 남녀를 마주 세웠다. 살인자의 딸과, 그 살인자로 인해 죽음을 당한 형을 가진 남자를,

그리고 그 두 사람은 당연하게도 자신이 가진 트라우마에 갇혀 서로를 헐뜯고 미워한다. 하지만 작가 이현주는 그 미움 속에 싹트는 '사랑' 에 주목하고, 거기에 작가의 따스한 시선으로 물을 주며 그들의 사랑을 완성한다. 그저 '보통'의 사랑 얘기라고 하지만, 그 사랑에 이르기까지 인간으로서의 딜레마를 극복한 인간 승리까지 덤으로 얹으며.

학교도 마찬가지다.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해 보이는 박흥수의 다리를, 박흥수의 미래를 망가뜨린 고남순이 할 수 있는 건 없어 보였다. 불구가 된 다리나, 절단된 미래처럼. 하지만, 작가 이현주는 나지막하게 말을 건넨다. 사람이 사는 게 그게 다가 아니지 않냐고. 너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가 된다면, 어쩌면 불가능해 보이는 관계도, 다시 이어 붙일 수 있찌 않겠냐고,

사람이 사는 거 그까이꺼, 서로 진심으로 손을 맞잡으면 다 넘어설 수 있다고.

이 상식적이고 어찌보면 진부한 원칙을 작가 이현주는 <보통의 연애>4부작을 통해, <학교 2013>의 16부작을 통해, 마치 벽돌을 쌓아가듯 하나씩 차분하게 자신의 주장을 쌓아올린다. 근래에 보기 드물게 '수미일관'하게 주제 의식을 성공적으로 완성도 있게 그려낸 작품으로. 그러기에 드라마의 마지막 그 상투적이지만 인간적인 결론에 어느 새 시청자들은 동화 되어 버린다.

다음 작품의 또 다른 따스한 온기를 기대해 보게 만드는 작가이다.

 

Daum view
by meditator 2013. 1. 29. 10:58

다시 드라마 스페셜 연작 시리즈가 돌아왔다. 이번 연작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등장한 것은 4부작 <시리우스>이다.

사시 출신의 마약반 수사 과장이 된 동생과 살인 전과자 출신의 쌍둥이 형제가 묵은 해원을 풀어내지도 못한 채 마약 거래를 둘러싼 음모 속에 얽혀들면서 풀어내는 스토리이다. 밤 하늘의 가장 밝은 별인 시리우스가 알고 보면 그 속에 숨겨진 그림자 쌍둥이 별을 지니고 있다는 과학적 사실을 스토리 텔링의 상징으로 끌어들이며 깔끔하게 4회 만에 두 형제의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가족애를 가슴 찡하게 풀어냈다. 길지도 않는 회차였지만 여느 미니 시리즈에 버금가는 감동을 주는데 성공한 돌아온 드라마 스페셜의 첫 연작 시리즈이다.

 

시리우스

 

우리가 흔히 4부작 드라마를 조우할 수 있는 것은 주중 미니시리즈 한 꼭지가 끝나고 다음 드라마가 준비가 덜 됐거나, 혹은 경쟁작 드라마와의 방영일을 맞추기 위해 들어가는 경우이다.

지난 해 mbc에서 방영된 <못난이 송편>의 경우, <아랑사또전>과 <보고싶다> 사이에 편성을 받았었고, <보통의 연애> 역시 <난폭한 로맨스>와 <적도의 남자> 사이에 등장했었다. 물론 <보통의 연애>의 경우, 드라마 스페셜 연작 시리즈라는 명분을 붙이고 들어갔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땜방'이라기엔 아까운 드라마였다 정도였다.

외국의 경우, <셜록>이 단 3부작에 불과함에도 전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며 매년 한 시즌씩을 제작하며 명작 드라마로 인정받고 있으며, 지난 '서울 드라마 어워즈'에서 상을 받은 유수의 외국 드라마들을 보면 다종다양한 길이에 드라마들이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4부작 이하의 드라마들은 주중으로 오면 땜방 신세에 다짜고짜 시청률은 곤두박질치는 신세가 된다. 그러기에, 드라마 스페셜의 자리는 드라마의 길이가 어떻든 그 드라마가 본래의 가치를 인정받고 제대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명당이라 하겠다.

 

 

시리우스 4부작

 

 

최근 우리나라 드라마의 경우 주중 미니시리즈는 16부작을 넘어 20부작, 24부작 등으로 넘어가는 추세에, 사극은 36부작, 심지어 50부작을 넘나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문제는 이런 드라마의 길이가 길어지는 경향이 작품의 완결성과 비례하지 않는다는데 있다는 것이다. 공공연하게 사극 등 대작 드라마는 이미 만들어진 세트의 활용도 등 길면 길수록 순익이 늘어난다는 속설이 진담이 되어가고 있고, 미니 시리즈 분량을 연장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미니 시리즈 역시 20부작이 되어가고 있는 것 역시 수출 단가 등과 관련된 제작비와 관련된 경제 논리에 지배되는 경향에서 기인한다는게 중론이다.

여기서 문제는, 스토리 상의 완결성이 아니라, 경제 논리에 의해 드라마가 만들어지다 보니, 중반 이후 눈에 띄게 스토리가 이른바 '산을 타'면서 드라마의 질을 떨어뜨리게 된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종영한 '보고싶다'의 경우, 12회 정도 두 주인공이었던 한정우와 이수연의 스토리를 완성해 버리고는, 무리하게 이야기를 끌고 가기 위해, 악역이었던 해리에게 공을 들였다.

이 작품만이 아니라, 최근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이른바 '개연성있는 악역'이라는 미명 하에 악역의 악행에 시간과 공을 들이는 것, 이것은 스토리 텔링의 발전이 아니라, 경제 논리에 의해 드라마를 끌어가자니, 두 주인공으론 풀어낼 이야기가 없거나, 호흡이 딸리고, 그러다 보니 보다 긴 20부 작의 호흡을 위해 이른바 악역의 비중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이 자주 도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눈 앞의 이익을 따르다 결국은 스토리의 완결성도, 드라마의 완성도를 해치는 꼴이 되고, 당장이야, 한류를 등에 업고 한국 드라마가 잘 나간다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조차도 스스로 발목을 잡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대장금' 이후 그만큼 폭발적인 결과물을 가진 드라마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미 예견된 결과라 할 수 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 스페셜]의 다양한 시리즈가 행하는 실험들은 우리 드라마계를 그나마 무너지지 않게 하는 근간이 될 것이다. 형식적면에서 이미 젊은 층에서 매니아적 인기를 누렸던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8부작 드라마라든가, 현대와 과거를 넘나들며 시리즈로 제작되고 있는 '노철기 시리즈' 라든가, <시리우스>와 4부작으로 완결성을 가진 단편 드라마의 실험까지, 내용적으로역시 스릴러, 코믹, 호러 등 전 분야를 넘나드는 역동적 내용으로, 주중, 혹은 주말 드라마에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시도들이 한계에 봉착한 우리 드라마계의 돌파구를 마련해줄 또 다른 계기가 되리라 본다. 제작비 대비, 혹은 시청률 대비 그저 손가락 꼽아서 댈 수 있는 눈 앞의 사실들 만으로는 [드라마 스페셜]의 무궁무진한 가치를 매길 수 없다는 말이다.

 

 

 

Daum view
by meditator 2013. 1. 28. 11:27

4회분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방영되었던 <인간의 조건>이 드디어 정규 방송으로 편성되어 돌아왔다. 박성호, 김준호, 김준현, 정태호, 양상국, 허경환 등 여섯 남자들이 일주일 동안 모여, ㅇㅇ없이 살아보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

 

 

 

1. 여섯 개그맨들의 성공적 활용법

실험적으로 겨우 단 몇 주만을 했을 뿐인데, 돌아온 여섯 남자들의 일상이 무척 반갑다.

단 몇 주 만에 이토록 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리얼리티라니!

일반적으로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면 이질적인 멤버들을 모아놓음으로써 거기서 발생하는 물리적 충돌을 프로그램의 재미로 가져가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예능적 이미지 소모가 적은 멤버들을 구하다 보니 2012년 방송 연예 대상 신인상을 타 분야에서 모조리 휩쓸어 가듯 이젠 가수니, 개그맨이니 영역 구분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인간의 조건>의 선택은 남달랐다.

이미 개그 콘서트를 통해 일정 부분 대중들에게 검증받았던 친숙한 개그맨들을 모조리 구성원으로 충원했다. 친숙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예능 나들이가 잦은 김준호를 제외하고는 예능적 이미지 소모는 거의 없는 구성원들이기에 그들이 모여있을 때 주는 이미지는 신선함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조건>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저 이질적인 구성원들을 모아 놓아 그들이 캐릭터를 만드는 좌충우돌이 이미 또 하나의 트렌드로써 진부함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일정 정도 검증받은 이미지를 구축한 사람들, 또 이미 그들간에 어느 정도 위계 질서와 친숙함이 깔린 멤버들을 한 집에 모이게 함으로써 색다른 재미를 발생시켰다는 것이다. 즉, 오랫동안 한 작품을 하면서도 서먹서먹했던 박성호, 김준호의 야릇한 선후배 관계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가 하면 화해의 계기가 되었고, 개그 콘서트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맺어진 '전우'와도 같은 친숙함이 <인간의 조건>을 버텨가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거기에 방송 분은 4주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일주일이라는 기간을 함께 한 집에서 뒹굴었던, 더구나, 인간의 정신을 쏙 빼놓아 버리는 문명의 이기 없는 혹독한 조건이 역으로 그들간의 친밀도를 한껏 올리는 시너지까지 낳으니, 다시 돌아온 그들이 반갑지 않은 게 이상할 지경이다.

이런 <인간의 조건>의 인력 활용도는 새 프로그램을 만든다 하면 그저 이 프로그램 저 프로그램에서 잠깐 나와 이벤트성으로 인기를 끌었던 타 분야의 스타들을 모셔다 놓고, 시너지는 커녕, 시청자들에게 그 어색한 부조화를 견디게 하는 타 프로그램들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지점이다.

더구나 한 해에 수 십명씩 개그맨들을 뽑아 놓고는 그들의 밥벌이를 걱정하지만 말고, <인간의 조건>처럼 적극적으로 개발해 봄이 어떨지.

 

 

2. 쓰레기 리얼리티라니!

지난 파일럿 <인간의 조건>은 '3무', 즉 핸드폰, 컴퓨터, 텔레비젼이 없는 일상을 다룬 무공해 프로그램이었다. 들로, 산으로, 그것도 모자라 바다 건너 야생을 찾아 다니는 것으로도 한계를 맞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찾은 새로운, 하지만 적절한 모색이었고, 성공적이었다.

이제 정규 방송으로 돌아온 <인간의 조건>은 거기에 쓰레기를 얹는다.

<인간의 조건>이 바람직한 것은, 그저 일주일 체험으로 물질적 힐링을 경험해 보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어서 이다. 다시 체험 공간으로 돌아온 여섯 명의 남자들은 자연스레 투명 플라스틱 상자에 그들의 핸드폰을 넣는다. 이전과 달리 그 집 안에서 이지만, 이미 체험해 본 경험들이 쌓이어, 거부감없이, 그러려니 하면서, 그리고 한번은 해봤으니 이제는 해볼만 하다는 듯이, 다시 '세가지가 없는' 생활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거기에 얹어 이번엔 쓰레기란다.

제작진의 기지가 돋보였던 것이 무조건 쓰레기를 없이 생활해 본다가 아니라, 하루의 시간을 주고, 여섯 명의 남자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이 얼마나 많은 음식물 쓰레기며 재활용 쓰레기를 방출하는가를 보여주고, 그것을 맞추어 보게 하고, 그 다음에 쓰레기없는 생활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단 하루였지만, 카메라를 통해 본 여섯 남자의 일상에서 무한대로 쏟아져 나온 쓰레기들은 곧 시청자 자신의 생활과 다르지 않았기에 '쓰레기없는' 일주일이 뻔하다는 느낌은 사라지고, 경각심을 가지고 그들의 일주일을 지켜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작된 '쓰레기없는' 생활, 텀블러와 수저를 사고, 음식물을 남기지 않으려 애쓰고, 휴지 대신 손수건을 사용하면서, 때로는 '지렁이'를 사는 재치를 반짝이고, 때로는 땀내나는 손수건에 자신이 '쓰레기'가 되어가는 듯한 시간들이 핸드폰, 컴퓨터, 텔레비젼이 없는 생활과는 또 다른 역동적인 '힐링'의 시간이 될 듯한 기대감이 든다.

 

 

 

 

Daum view
by meditator 2013. 1. 27. 11:00

'조난 객이 되는 것은

계속 원의 중심점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것이 변하는 것 같아도 원점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의 시선은 언제나 반지름이다.

조난객이 되는 것은 춤추듯 겹쳐지는 원들 사이에 붙들리는 것이다......

고요한 받 한가운데서 누군가 당신처럼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지 않을까 궁금해진다.

그 사람도 점에 갇혀서, 두려움과 분노 , 광기, 무력감, 냉담으로 발버둥치고 있을까'

(소설 파이 이야기 중에서)

 

<파이 이야기>로 부커상을 받으며 단번에 세계적 작가로 발돋움한 얀 마텔의 소설이 <라이프 오브 파이>로 영화화되었다.

중국 출신으로 이제는 헐리우드에서 독자적 작품 세계를 펼치고 있는 이안 감독의 작품답게 <파이 이야기>는 이안 버전 <라이프 오브 파이>로 색다른 방점을 찍고 우리에게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소년은 가족 모두와 떠난 항해에서 가족 모두를 잃은 채 오직 맹수 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함께 조난을 당한다. 철모르는 어린 시절 아버지 덕분에 일찌기 깨닫게 된, 아니 미처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단숨에 소년 조차 배 밖으로 밀어내버리는 리차드 파커의 맹수성으로 인해 조난이나 가족을 잃은 슬픔에 잠길 사이도 없이 생존의 롤러코스터에 몸을 맡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절박한 위기 상황은 역으로 망망한 태평양에서 소년을 구하는 계기로 자리매김한다. 마지막 항해가 끝나고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숲으로 사라지는 리차즈 파커가 섭섭해 눈물을 터뜨릴 만큼.

 

 

'나는 아이처럼 울었다.

고난을 딛고 살아나서가 아니었다. ........

내가 흐느낀 것은 리파가 아무 인사도 없이 날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었다.

서투른 작별을 하는 것은 얼마나 끔직한 일인가......그래야만 놓아버릴 수 있으니까. 그러지 못하면 우리는 꼭 해야 했지만 하지 못한 말을 남기게 되고 , 후회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리처드 파커, 다 끝났다. 우린 살아남았어. 믿을 수 있니? 네게 도저히 말로 표현 못할 신세를 졌구나. 네가 없었으면 난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정식으로 인사하고 싶다. 고맙다......"'(소설 <파이 이야기> 중에서)

 

이안 감독 버전 영화에서나, 얀 마텔의 소설에서나, 삶은 언제나 예측 불허이다. 아이들의 입신양명을 위한 항해에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고, 겨우 함께 한 것은 맹수이되, 그 맹수로 인해 또 목숨을 구한다.

영화는 소설 속 그저 막막하고 거침없기만 했던 태평양을 3D의 화련한 볼거리를 통해, 거칠지만 우주 만물의 영롱한 자연의 신비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소년 파이의 신에 대한 예찬이 뜬금없다 느낄 수 없을 만큼.

그러나 영화 전편을 통해 리차드 파커라는 맹수를 조련해 가는 소년 파이의 고군분투를 보노라면, 인도어로 비속어가 되는 자신의 이름을 멋들어지게 '파이'로 거듭나게 했던 소년의 영특한 판단 에피소드처럼, 결국은 태평양에서 소년을 구한 것은 일찌기 아버지가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가르쳐 준 '이성'이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더구나, 영화의 마지막 조난 후 소년에게서 각색되어진 사실들(?), 함께 조난당한 어머니와 사람들을 조리장이 생존을 위해 난폭하게 희생시키고, 다시 그를 소년이 죽였다는 이야기는 문득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영화의 진실성 여부에 큰 혼란을 느끼며, 내가 본 것과 내가 믿어야 할 것, 믿고 싶은 것에 대한 강한 물음표로 영화는 우리를 이끌어 간다.

즉, 이 험난한 세상에서, 우리가 믿고자 하는 것이 과연 정말 존재하는 것이냐, 혹은 그저 우리가 우리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만들어 낸 것은 아닌가 라는, 종교의 존재론적 고민으로 우리를 끌어들여 버리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안 감독 버전, <라이프 오브 파이>는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는, 그래서 결국은 그 어느 종교도 인간에 의한 것이라는 영화 서두의 암묵적 의미처럼, 인간에 의한 종교라는 엄밀하게 평가하자면 '무신론적 잔향'를 짙게 드리우며 끝나게 되는 것이다.

 

 

 

소설은 이안 감독의 버전보다는 보다 종교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얀 마텔이 말하는 바의 종교는, 우리가 세속적으로 믿는 종교라기 보다는 철학적인 측면에 가깝다.

즉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종교, 혹은 신이란 내 편이란 의미가 강한 반면에, 얀 마텔이 말하는 바의 종교는 힌두의 신으로서, 우주 만물에 드리운 종교적 신성을 의미하는 바가 더 크기 때문이다. 즉, 영화 속 광폭한 리차드 파커는 우리에게 신성의 발현으로 다가오기 보다는 '적'이나 '혼돈'일 뿐이지만, 얀 마텔이 말하는 종교에 있어서는 그 조차도 또 다른 형태의 신인 것이다. 우리가 받아들익 힘든, 힌두교의 다양한 신들, 때론 악마의 모습으로, 때론 동물의 형태로, 혹은 그 무엇으로 발현되지 않은 아우라로 현현하는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인간의 능력 이외의 신비로운 '신성'으로 작가는 정의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살아야 하는 의지를 잃은 소년 파이가, 리차드 파커를 동료로 받아들이고, 태평양이라는 삶의 조건을 기반으로 삶의 파행을 극복해 냈을 때, 신을 예찬하는 상황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상적 삶의 구복으로서의 '신'을 갈구하는 우리가 봤을 때는, 그저 그건 삶의 성실성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

 

작가는 늘 작품을 통해, 인간이 인간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서 삶의 의미를 묻곤 한다. 그의 또 다른 작품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을 보면, 어린 나이에 에이즈에 걸린 소년이라던가, 음악가를 꿈꾸지만 현실은 청소부인 것처럼 현실에서 탈출구를 꿈꾸기 힘든 상황 속에 주인공들을 자리매김한다. 거기에 비하면 호랑이와 태평양을 건너는 소년은 그 중 나은 편이다 싶게.

그리고 그의 주인공들은 그것이 '이성'이든, '신성'이든 그저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사과 나무를 심겠다는 그 예전의 철학자들처럼, 주어진 삶의 고해 속을 묵묵히 버텨간다. 열 아홉 에이즈 소년은 남은 기간 동안 미지의 헬싱키의 로카마티오 일가의 내력을 써내려 가고, 청소부는 세상 그 누구도 알아주지도 않을 지도 모를 음악을 계속 만든다. 망망대해 태평양을 리차드 파커를 조련하며 조난하는 파이처럼.

 

<파이 이야기>가 영화화 된다고 했을 때 저 피상적인 스토리가 이해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던졌었는데, 지구라는 고해에서 조난당한 이 시대의 수많은 파이들은, 얀 마텔의, 혹은 이안 감독의 메시지를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공감했겠구나 싶은 게 아마도 <라이프 오브 파이>의 성공 비결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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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3. 1. 26. 1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