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래왔지만, 특히 이번 노희경 작가의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면 묻어두었던  삶의 질문들이 툭툭 던져진다. 바다 건너 제주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인데, 그들의 이야기 속에 내가 있고, 나와 얽힌 인연들이 있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들'의 블루스인가 보다. 

이정은과 엄정화가 친구라니, 극중 정은희와 고미란 말이다. 그런데 극중 인물에 집중하기 전에, 일찌기 젊은 시절부터 대표적 엔터테이너로 당대를 풍미했던 엄정화란 존재와, 우리에게 그 이름을 알리기 까지 대학로 연출에서 부터 마트 직원에 이르기까지 숱한 인생 역정을 겪으며 뒤늦게 그 이름을 알린 이정은이란 배우가 '친구'로 등장하는 '조합'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이정은 배우가 메인 주연을 하는 드라마에 엄정화란 배우가 친구로 잠시 들렀다 가는 시절이 오는 날도 있구나. 


 

얽힌 인연, 우정 
실존의 배우가 주는 감상과 함께, 극중 고미란과 정은희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시절, 정은희는 도시락도 못싸오는 가난한 집 아이였다.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던 은희를 미란이는 자기 집 승용차를 타고 지나며 구출해 줬다. 게다가 매일 은희를 위해 도시락을 두 개 씩이나 싸왔다. 둘도 없는 친구라며 '의리'를 외치는 은희와 미란, 하지만 세월이 흘러 다시 제주를 찾는 미란을 맞이하는 친구들은 미란과 은희를 '공주님'과 '무수리'라 농을 건넨다. 

보는 이들만이 아니다. 인연의 속내도 그리 간단치 않다. 제주에 도착한 미란은 생업에 분주한 은희에게 '그깟 생선'이라며 자신에게 시간을 내어주지 않음을 야속타한다. 그런데 그 말이 은희의 마음을 후벼판다. 아니, 그저 지금 미란이 던진 말 때문만이 아니다. 오랫동안 켜켜히 쌓아왔던 미란에 대한 은희의 감정들이 자꾸 은희의 마음 위로 솟구쳐오르기 때문이다. 

'친구'란 우리가 살면서 맺는 대표적인 '인연'의 형태이다. 가족이 가족이라서 들여다 보면 가장 많이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이기가 십상이듯이, 친구 역시 친구이기에 서로에게 불평등한 관계의 상흔을 내재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저마다 우정의 이름으로 관계맺은 존재들을 되돌이켜 보면 그 시간만큼 그 안에 부유하는 복잡한 감정들이 느껴질 것이다. 


 

가진 것이 없어 늘 '자존감'에 상처를 입기 쉬웠던 은희에게 미란 역시 그런 존재였다. 미란은 은희의 어려운 처지를 배려했지만 그 상처받기 쉬운 마음까지 배려해주진 못했다. 엔터테이너 엄정화처럼 어릴 적부터 이쁘고 사람들의 주목을 쉬이 받던 미란은 도시락을 두 개 싸오듯 착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생사를 걱정해 달려온 미란의 마음을 사람들과 내기 꺼리로 삼을 만큼 자기 중심적이기도 했다. 은희는 그런 미란이 한없이 고마웠지만 동시에, 그런 미란이기에 늘 상처받았다. 내 맘같지 않은 '친구', 그 친구의 '다름'이 나에게 '내상'을 입힌다. 

거기에 우정의 길을 엇갈리게 하는 건 무엇보다 '존재의 양식'이 아닐까. 은희가 폐경에 이르도록 가족들 뒤치닥거리하느라 여전히 '미혼'인 것과 달리, 미란은 결혼을 세 번이나 했다. 그런 미란이 딸과의 졸업 여행을 뒷전으로 하고 제주에 왔다고 하자,  미란은 '자기 밖에 모르는 년'이라며 자기에게 했듯이 그렇게 딸에게도 했으리라 지레 짐작한다.

은희가 전하지 못한 맘을 대신한 일기장으로 결국 터질 게 터지고야 만 두 사람, 미란이 떠나고 옥동이 말한다. 결혼을 세 번이나 한 그 의지가지 없는 심정을 어찌 알겠느냐고. '세 번이나'인 처지의 속내를 은희 역시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깟 생선'이라는 말도, 은희를 무시한 게 아니라 너무 일만하는 은희가 안타까워 던진 말이었다고 한다. 그 시절 은희가 먹던 도시락을 쓰레기통에 던진 미란의 속내도 들어보면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상처'받기 바빴던 은희는 그런 사정을 들여다 볼 '여유'도, '엄두'도 나지 않았다. 


 
 '시절인연'이란 말이 있다. 그저 한 시절 함께 한다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불교의 업과 인과응보에 기인하여 시기가 되어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깊은 뜻을 지니고 있었다.  '인연'의 때가 있음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미란과 은희의 '시절인연'은 그렇다면 언제일까? 이미 지나가고 있는 것일까? 친구란 이름이었지만 그 속내는 빚갚음이라 여겨졌던 관계는 '우정'일까? 

친구들이 '무수리'라 할 때마다 '내 무슨 무수리냐'는 그런데 은희  자신이 미란과의 관계를 그렇게 '규정'하며 지내왔던 건 아닐까. 어린 시절 가난한 자신을 보아준 그 '고마움'에 미란을 친구란 이름의 빚쟁이로 여기며 지내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 달음에 달려간 은희를 '만만한 친구'라 할 때 그런 미란에게 따지는 대신 입술을 꾹 다물고 돌아선 은희의 마음이 정작 '친구'가 아니라, 채무자의 그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우리 역시 '우정'을 빌어 '채무'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지는 않을까? 

미란과 은희의 이야기는 은희의 묵은 상처를 깨닫게 되는 미란의 이야기인 듯 보인다. 하지만 그 미란의 이야기를 통해 정작 작가가 하고자 하는 건 상처로 겹겹이자신을 감싼 은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나이가 이만큼이 되어도 여전히 은희에게는 어린 시절 자신이 받았던 상처가 아리다. 극중 종종 은희는 미란을 처음 만났던 시절의 아이로 등장한다. 단지 '추억'일 뿐일까. 아니 어쩌면 '은희'도 그렇고, 우리도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그 시절의 '상처받기쉬운 아이'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첫사랑 앞에서도 거침없던, 제주도 수산 시장을 휘젓던 은희가 정작 미란 앞에서는 자꾸 위축된다. 관계를 왜곡하는 건 '그 시절에 멈춘 나'다. 

일기장 사건으로 인해 미란과 은희는 비로소 가난한 어린 시절의 채무 관계를 청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채무' 관계 속에는 이제는 '별로가 된' 미란에 대한 은희의 감정적 우월함도 숨겨져 있다. 변변찮고 자기 중심적이라며 낮잡아 보던 미란의 진심을 서늘하게 깨닫게 된 은희, 늘 한 수 접어주던 은희가 입술을 꾹 다물고 뒷걸음치는 대신 따지러 간다. 비로손 은희는 '무수리'의 마음에서 한 발 나와 미란의 친구가 된다. 무덤으로 들어갈 뻔한 인연을 '재생'시킨 것이다. 





by meditator 2022. 5. 28. 10:20

'최선이었을까?'
박지혜 선생님은 이렇게 되묻곤 한다. 2020년 봄 코로나로 인한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는데 보름 가까이 한 학생이 출석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부모에게 알리자 아버지는 '내가 우리 아이를 죽이면 되겠느냐'며 폭언을 뱉었다. 지인을 통해 알아보니 오랫동안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했다. ' 저 여기서 나갈 수 있게 해주세요', 아이의 간절한 부탁, 아이는 분리조치됐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학대 아동'에 대한 '메뉴얼'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맨몸으로 나오다시피한 학생, 이후 원활한 학교 생활을 위한 지원금조차 법정대리인인 부모의 동의없이는 받을 수 없었다. 아동 학대 신고 이후, '분리 조치' 외에 정작 학대 아동에 대한 사회적 조치는 전무했던 것이다. 

게다가 학대를 피해 아이를 품어주어야 할 시설은 또 다른 스트레스를 주었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아이, 그런데 가정은 이제 아이를 거부했다. 자신이 버려졌다고 좌절한 아이는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학대'당하는 아이를 위해 사회가 해주어야 하는 건 안전한 곳에서 평범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현실은 여의치않다. 6부작으로 방영된 다큐프라임 <어린 人권>의 5,6부는 지금까지 논의되지 않았던 '아동 학대'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펼친다. 학대 아동을 위해 우리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안성희 검사는 말한다. 자신들의 판결로 세상의 박수를 받는 건 쉽다고, '엄벌에 처하겠습니다'라 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고. 안맞고 사는 것만이 아니라, 부모의 '학대'가 없는 가정에서 아이가 평범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진정 '학대'에 대한 궁극적인 지향이 되어야 한다고 안검사는 주장한다. 



 

'학대' 이후
그런 면에서 전안나 판사는 학대당하는 아이를 가정에서 '분리'하는 대신 가해자인 부모를 보호 시설에 위탁하는 '감호 위탁'판결을 내렸다. 잘못은 부모가 했는데 아이가 기존의 집, 기존의 학교로 부터 분리되는 현행의 제도, 그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른 보호자의 '보호'가 가능하다면 아이에게 '가정'의 울타리를 지켜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가해 부모의 감호 위탁은 '가정'의 '관계 회복'을 목적으로 한 조치이다. 정상 가족, 혈연 가족 프레임이 강한 한국 사회,  '가정'이 우리 사회에서 기본 단위인 이상 가급적이면 그 '가정' 내에서 아동이 평탄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애써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활용되는 제도가 '위탁부모 제도'이다. 배은희 씨는 2015년 3월 한 살도 채 되지 않는 은지의 위탁 부모가 되었다. 아기가 오면 놀아주겠다던 작은 아이가 엄마, 아빠가 아기만 신경쓴다며 보내면 안되겠냐고 하던 고비를 겪으며 이제 8년 차, 종종 자시늗ㄹ이 '위탁 부모'라는 사실을 잊고 지낸다고 한다. '시설'의 부작용이 대두되며 가급적 가정과 같은 조건에서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2003년부터 실시된 '가정 위탁'제도이다. 

'한정된 입양'이라고 말하는 은희씨, 돈은 얼마나 받는 거야라는 세상의 따가운 시선보다 언젠가는 '자신의 삶보다 귀한 아이'와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더 힘들다고 말한다. '얼마를 받아야 할 수 있을까요?'라며 반문하는 은희 씨, 가정 환경조사, 부모 교육 등 엄격한 과정을 거치지만 정작 서류상 '동거인'인 아이의 법적인 보호자 역할은 '친부모' 몫이라 제도적 어려움을 겪곤 했다고 한다. 

사회가 '부모' 역할을 
그런데 그 '시설'조차 시한이 있다. 최근 24살까지 연장은 됐지만, 집, 직장 등 그 모든 것들을 홀로 해내야 하는 아이들, 그래서 그 '생소'한 사회적 경험 앞에 사기 사건을 당하거나, 범죄 사건에 휘말리기가 쉽다. 겨우 일자리를 구해도 오래 일하기가 쉽지 않다. 보육원 출신이라는 피해의식, 자격지심이 아이들 스스로 세상으로 부터 자신을 격리하도록 만들기 십상이다. 시설에서 자란 아이들 중 50%가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국가가 언제까지 책임져줘야 하나?' 이런 의문에 김성민 씨는 반문한다. '부모가 언제가지 필요하세요?' 김성민 씨는 안동초등학교 앞에서 발견되어 3살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랐다. 18살 때까지 머문 곳, 그러나 '가족, 안전, 행복', 그 어느 것도 보장해주지 않던 '시설'은 '집'은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그래서 김성민 씨는 시설에서 자란 아이들이 건강한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자리를 만들었다. 아이들 스스로 '식물'을 돌보며 일도 하고, 상처받은 마음을 회복하는 사회적 기업 '브라더스'이다. 

법저에서 호통치기로 유명한 소년범의 대부 천종호 판사는 '가정 형태'의 '사법적 그룹홈' 시스템을 만들었다. '어떤 아이들이 재판까지 올까요?' 부모들이 있는 아이들, 부모들이 부모 역할을 하려고 하는 아이들은 웬만하면 재판에 오기 전에 '구제'가 된다고 한다. 통계적으로 재판까지 오는 아이들 중 70%가 결손가정, 저소득층 가정, 부모가 '보호'해줄 수 없는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때로는 한 아이를 1년 동안 법정에서 7번이나 보기도 했다는데, '보호'받지 못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아이들, 그 악순환을 막기 위해 천판사는  '사법형 그룹홈'을 마련했다. 가정형태로 이루어지는 그룹홈, 아이들에게 '집'의 경험을 주고자 했다. 경남에서 시작되어 전국 13곳에서 100 명의 아이들이 '집같은 공간'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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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 사후 조치보다, 예방이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학대'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사회적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큐가 주목한 건 미 콜로라도 대학의 데이비드 올즈 교수가 시작한 가정방문 프로그램(Nurse-Family Partnership)이다. 

출산전부터 아이가 24개월이 될 때까지 미혼모나 취약 계층의 엄마가 아이를 잘 돌볼 수 있도록 간호사가 방문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임신은 인생의 큰 전환점이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는 임신과 출산은 엄마는 물론, 아이에게 큰 부담이 된다. 가정 폭력의 출발이 되기도 한다. 

놀랍게도 장기 추적 결과, 이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은 아이들은 보살핌을 잘 받았다는 만족감이 이해와 공감 능력을 높였고, 이는 학습 능력 향상까지 이어졌다. 무엇보다 아동 학대와 방임이 48%나 감소했고, 범죄와의 연루도 줄었다. 

우리나라에서도 2012년부터 시행된 이 제도, 단지 간호사가 방문하여 이야기만 나누는데 정말 '효과'가 있었을까? 벽돌로 뒤통수를 내리친 엄마, 어린 시절 학대의 경험을 가진 하은 엄마 지영 씨는, 아이를 낳고서도 여전히 '학대'하는 부모로 인해 모든 걸 놓아 버리려 할 때 찾아온 간호사는 다독이며 보살펴 주었다. 엄마 노릇에 서툴거나 거부감을 가진 엄마들을 독려한다. '덕분에 살았다'고 말하는 지영 씨, 학대의 '사후약방문'이 아닌 안정된 가정과 좋은 부모를 향한 '예방책'으로의 첫 걸음이다. 

by meditator 2022. 5. 25. 21:03

'직장 생활을 오래 했더니.....'
선배는 답답한 듯이 말했다. 마치 메뉴얼이라도 있는 것처럼 상황에 맞춰 정해진 표현을 하던 분이었다. 그런 분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이 오자 막막해하셨다. 소향기 팀장을 보니 그 선배가 떠올랐다. 

jtbc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주인공 염미정의 해방클럽에 신입회원이 들어왔다. 그간 염미정을 비롯하여 박상민 부장, 조태훈 과장 등 회사 내 조직에 적응을 못하는 것같은 이들 세 사람에게 꾸준히 회사 내 동아리 활동 참여를 독려하던 행복지원센터 소향기 팀장이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미소를 띠며 이들 세 사람을 독려하던 그녀, 그랬던 그녀가 세 사람이 만든 '해방 클럽'을 한번 참관한 후 스스로 '해방 클럽'의 신입회원 신청을 하였다. 

드라마가 시작한 이래 행복지원센터 팀장으로 익숙한 소향기 씨의 표정, 그런데 그녀가 말한다. 이제 다른 표정을 지으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고. 행복지원 센터 팀장에 걸맞는 표정을 지어오던 그 표정이 이제는 상갓집에 가서 그녀를 곤란하게 할 만큼 '혼연일체'가 되었다. 

 

 

해방은 어떻게 오는가
이제는 <나의 해방일지>가 아니라, <나의 추앙일지>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등장 인물들의 '연애사'가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극 초반 우중충하게 출퇴근만 한다며 돌려섰던 시청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있는 중이다. 그런 가운데 조용히 스쳐지나가듯 등장한 소향기 팀장의 장면은 왜 이 드라마가 여전히 '추앙일지'를 넘어 '해방일지'인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페르소나(persona)라고 한다. 그리스 연극 속 '가면'을 뜻하는 이 말을 칼, 융은 우리가 사회 생활을 하며 거기에 걸맞는 '역할'을 해나가는 모습으로 정의한다. 단적으로 '~답게'이다. 학생은 학생답게, 직장인은 직장인답게, 엄마는 엄마답게, 문제는 저마다 다르게 태어난 사람들이기에 사회적으로 주어진 이 '역할'에 맞춘 '페르소나'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괴리'를 느끼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건 '내 자신(self)'과 '페르소나'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지만 사는 게 어디 그런가 말이다. 

조직 부적응자로 행복 지원센터를 들락날락했던 박상민, 조태훈, 염미정 세 사람으로 말하자면 직장이 요구하는 '페르소나'에 떨그덕거리던 사람들이었던 셈이다. 남들 다하는 회사 내 동아리에 드는 것도 마다하고, 사람들이랑 편하게 어울리는 것도 쉽지 않았던 세 사람, 떠나는 구씨가 염미정에게 이젠 '추앙', '해방', 이런 거 하지 말고 '평범'하게 살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미정은 그런 구씨를 붙잡는 대신, 서운하다는 말로 두 사람의 관계에 방점을 찍는다.  자신을 '평범'하다 하지만 '유모차를 끄는' 대신 아이를 업어 키우겠다는 미정,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구씨를 한 살 배기 아이처럼 업어주고 싶다는 미정은 우리 시대의 '페르소나'와는 꽤나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인다. 

어쩌면 박상민, 조태훈, 염미정 이들 세 사람의 '해방 클럽'은 일찌기 세상이 요구하는 '페르소나'를 쓰고 살아가기 버거웠던 세 사람의 '해방 선언'이었는지도. 그런데 그런 세 사람 앞에 '신인 회원'으로 등장한 소향기 씨는 그런 세 사람과 전혀 반대의 지점에 서있는 사람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페르소나에 너무 충실히 살다보니 그 페르소나가 자신이 되어버린 사람, 그래서 이제 그 '가면'을 벗으려 해도 벗겨지지 않는다는 사람, 남들의 '행복'을 열심히 지원하다보니, 정작 자신은 '미소 가면'이 달라붙어 버린 사람, 그 사람에게 '해방'은 웃고 싶지 않을 때 웃지 않을 수 있는 얼굴 근육을 가지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박상민, 조태훈, 염미정, 그리고 소향기라는 양 극점의 그 어느 지점에서 서성이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때로는 자신의 어설픈 페르소나를 원망하고, 또 때로는 어느덧 자신이 되어버린 '페르소나'로 인해  갑갑함을 느끼며 말이다. 드라마의 시작부터 주구장창 출연진들의 출퇴근 길 모습을 비추던 드라마, 그 '출퇴근'에 공들인 시간은 바로 이 드라마가 길바닥에서 자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라 보여진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저마다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들을 최선을 다해 해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을 드라마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보여준다. 몇 시간씩 출퇴근을 하며 주인공 염미정, 염기청, 염창희를 비롯하여, 그들의 아버지 염제호, 어머니 곽혜숙, 그리고 또 다른 등장인물들 모두 참 열심히 일을 하며 살아간다. 젯상 앞에서 고된 노동으로 무너진 관절로 절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디 일만 하나, 역할에 걸맞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애쓴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은 이유이다. 

'해방'은 그렇게 애쓰며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위한 '헌사'이다. 이미 당신들은 충분히 애쓰고 살아가고 있으니, 더는 자신을 다그치지 말라고. 위로하지도, 그렇다고 조언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여 주겠다는 '해방 클럽'의 강령은 바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대로의 '긍정'을 뜻하는 게 아닐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저 가끔 만나 식사가 한 끼 나누던 선배가 '존경'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던 건, 선배가 직장 생활로 인한 '페르소나'가 어느덧 자신이 되어버린 모습을 고민하던 그 즈음이었다. '그의 과거와 현재와.....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이라는 정현종의 시 <방문객>처럼 말이다. 자신을 잃어버릴 만큼의 시간이 그 선배를 연륜이 넘치는 인생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저어'하던 소극적인 염미정은 구씨를 '추앙'하고, '추앙'당하며, 그리고 '해방 클럽'을 통해 자신을 찾아간다. 미정의 해방은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말처럼 그냥 그대로, 생긴대로 미정이 답게 사는 것을 당당하게 가슴펴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과연 소향기 팀장의 '해방'은 어떤 모습이 될까? 아침 방송의 김창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지나가듯 말한다. '가면' 몇 개 안쓰고 사는 사람이 어딨어요. 



by meditator 2022. 5. 21. 00:58

5월 16일 방영된 ebs 다큐 프라임에서는 대한민국 아동 100년의 시간을 조망했다. 백원이던 과자가 천오백원이 되었다며 속상해하는 아이들, 이제 그 아이들은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 선생님을 모르는 세대가 되었다. 대신, 유투브에서 초등학생들을 '잼민이'라며 비하한다며 불쾌해한다. '어린이'가 '잼민이'가 된 세상, 과연 방정환 선생님이 '나라의 자원'이 되어야 한다며 소중하게 여기라 했던 어린이는 '존중'받고 있을까? 

 

 

1923년 5월 1일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날'을 만들고, '어린이 선언문'을 선포하셨다. 선언문에는  '재래의 윤리적 억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인격적 대우를 허'하고 그들을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어린이'는 유상, 혹은 무상의 노동을 폐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윤리적, 경제적인 존중은 쉬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33년에 태어난 아동문학가 신현득 선생의 어린 시절은 '전쟁'으로 얼룩져 있다. 석유 대신 쓴다며 솔공이를 몇 관씩 따기 위한 '근로 봉사'가 일이었다. 50년대만 해도 동생을 업고 학교에 오는 누나들이 흔한 풍경이었다. 어린이의 노동을 폐하라던 방정환 선생의 말씀이 무색하게 우리의 '산업화'의 동력은 값싼 미성년자들의 노동력에 빚졌다. 6~70년대 여공 중 국민학교를 졸업한 비율은 불과 51%에 불과했다. 

1920년대에 18.5%이던 취학률은 1970년대에 비로소  90%에 도달, 의무교육의 본령을 완성했다. 7~80년대 어린이 공원, 어린이 세계 문학 등 어린이는 핵가족의 꽃이 되었지만, 그런 한 편에서 '혜영, 용철이 사건'처럼 국가가 돌보지 않는 '어린이'들의 인권과 복지는 그림자가 깊어져갔다. 또한 김영삼 정부의 531 교육 개혁 이래 우리 사회의 교육은 무한 경쟁의 그늘이 드리워져 갔다. 3인 가정이 점점 일반화되어 가는 오늘날 부모들, 특히 엄마들은 '아이'에게 집중한다. 전략적으로 '육아'에 집중하는 엄마들, 아이들은 '관리'당하는 존재가 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쁜 아이들, 방정환 선생님이 '어린이날'을 선포하던 그 시대와 시대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아이들에게 '해방'이 절실한 시대이다. 

 

 

우리 아이 잘 되라고 한 잔소린데
다른 의미에서의 '해방'이 필요한 이 시대의 아이들, 그 부모와 아이들의 '일그러진 관계'를 조망하기 위해 다큐 프라임은 '잔소리'를 주목했다. 다큐는 초등학생에서부터 고등학생까지 전국의 100명에게 '속마음'을 들었다. 5월 17일 방영된 <역발상 프로젝트 잔소리란 무엇인가>에서이다. 

'그렇게 공부할거면 학원은 왜 다니니?
'한심하다, 시간 약속도 제대로 안지키면 인생 망한다.'

부모들이 한 잔소리다. 이 '잔소리'에 아이들은? 한숨부터 쉰다, 지겹다, 아이들의 반응이다. 억양에서부터 다르다고 한다. 일방적이다. 때려박는 말투다. 내 인생을 포기당하는 것같은 잔소리에 어깨가 꺽인다. 잔소리를 퍼붓고 뒤돌아 설거지하는 엄마는 그 뒷모습에서조차 '거칠게' 감정을 쏟아낸다. 집 문 앞에 서면 긴장되고 떨린다고 한다.

물론 이런 아이들의 반응에 부모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100%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고. 하지만 연구는 다른 결과를 말한다. 잔소리를 듣는 청소년들의 뇌의 반응을 조사하니 부정적 영역이 높아지고, 이성적 판단이 떨어진다고. 정말 부모들은 사심없이 하는 '걱정'일까? 하지만 공부를 잘하면 '존중'받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부모들의 잔소리에 아이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의 의견에 부모들은 말한다.

'어디 따박따박 말대꾸야!'
'말대꾸 대회가 있다면 1등이겠다.'

부모의 잔소리와 아이의 말대꾸는 '창과 방패'와도 같다. 잔소리를 듣다 듣다 자신을 방어하려고 말했는데 말대꾸란다. 그런데 '말대꾸'는 양면적이다. 듣는 부모의 기분이 좋으면 '의견'이 된다. 하지만 듣는 부모의 기분이 나쁘면 '말대꾸'다. 

부모님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답을 들어야 잔소리를 끝낸다. 해명을 하면 변명이라, 핑계라 하고, 결국 원하는 건, '예, 알겠습니다'이다. 잔소리를 하며 화를 내는 엄마, 거기에 말대꾸를 한 아이, 엄마는 자신의 말을 끊었다고 화를 냈다. 집을 나가라 했다. '승복'해야 끝나는 권력 관계, 아이들은 점차 자신을 숨긴다. 

 

 

'말대꾸'는 어떤 대상에게 사용되는 용어인가? 다큐는 묻는다. '말대꾸'라는 용어 자체가 부모와 자녀 사이에 불평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제 아무리 핵가족이 되어도 어른과 아이가 되는 순간, 불평등한 상하, 수직 관계가 된다. 더구나 한국의 정서에서 '말대꾸'는 더욱 용인되기 어렵다. 

부모는 아이의 말을 듣기 보다, '금지'시킨다. 너 잘되라고 하는 '잔소리'니, 아이는 듣고 시인하며 반성하면 끝이나는 '언어적 관습'이다. 그런 부모의 '잔소리'에는 여전히 아이를 어리고 미숙한 존재로 보는 '편견'이 있다. 미숙한 존재에 대한 부모의 잔소리는 그래서 때론 '잔소리'를 넘어 '말상처'가 된다. 아이 잘되라고 시작한 잔소리가, 아이가 스스로 잘할 자신마저 없어지도록 '상흔'이 되어 남는다. 

'반격'을 하던 아이는 끝나지 않는 부모의 '잔소리' 앞에 결국 입을 닫는다. 하지만 결코 그 '속내'가 부모의 '잔소리'를 승인해서가 아니다. 결국 거듭되는 잔소리, '말대꾸'를 용인하지 않는 수직적 관계 앞에 아이는 입을 닫고 관계는 더 멀어져만 간다. 

그런데 그 '너 잘되라고' 잔소리를 하는 부모들은 정말 아이들에 대해 잘 알까? '자녀 탐구 영역', 자녀들에 대한 문제를 푸는데 사소한 것에서조차 아이를 모른다. 모르는 것도 모르는 것이지만, 자신의 기준에서 아이를 판단하고 있음이 시험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모르는 아이들에 대해 '아는 체'를 하는 어른들, 그런 어른들의 '잔소리'가 설득력이 있을까? 

아이들이 보는 부모는 어떨까? '우리 엄마는 개'예요', 겉모습은 강아지처럼 귀엽지만, 화날 때는 사냥개같아서, '개'란다. 때로는 거침없어 달려가는 '말'같단다. 아이들인 보는 부모는 이중적이거나, 맹수같다. 부모들은 60 vs. 40이라며 자신을 변호하지만, 아이들에게는 90%가 잔소리다. 핵가족이 되고, 아이의 미래가 전적으로 부모의 '능력'에 달려있게 된 경쟁 사회에서 부모들의 '불안'이 잔소리로 표출된다. 또한 어린이날 100년이 되었어도, 방정환 선생님이 말씀하신 아이들에 대한 진정한 '존중'이 안되서이다. 존중받은 경험이 부재한 채 '잔소리'에 휩싸여 자라난 아이들, 그 아이들의 '미래'는 어떨까? <어린이라는 세계>의 김소영 작가는 말한다. 작다고 조금만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by meditator 2022. 5. 18. 20:11

2021년 1월 8일 63년만에 민법 915조 자녀 징계권 조항이 삭제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학대'가 한 해 3만 9백여 건에 이른다. 하루 85명의 아이들이 '학대'당하고 있다. 아이들을 '학대'하는 이의 82%는 부모이다. 부모이기 때문에 쉽게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폭력',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ebs 다큐 프라임이 <어린 人권>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자신을 신고한 엄마 -아동 학대 자진신고 1년의 기록 
'저도 제 자신이 무서워요', 여기 스스로 경찰서로 걸어들어가 '아동 학대'를 자진신고한 엄마가 있다.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엄마와 아이가 있다. 11살, 아들을 혼자 키우는 엄마는 회사를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온다. 집 문을 열자 달려드는 세 마리의 개들, 그 뒤로 쭈볏거리는 아이가 있다. 

아이는 엄마가 오기 전에 빨래도 하고, 숙제도 해놓고, 청소도 하지만 지친 엄마의 눈에는 그저 어질러진 집이고, 제 할 일을 제대로 해놓지 않은 아들일 뿐이다.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너는 엄마, 엄마 주변에서 눈치를 살피며 빨래 너는 걸 도우려는 아이, 하지만 엄마는 그런 아이가 외려 걸치적거린다. 결국 터져나오는 짜증, 아이는 바짝 쫄아붙는다. '언제 불똥이 튈지, 진짜 많이 무서워요.'

시작은 훈육이었다. 8살 무렵 엄마의 지갑에 손을 댄 아들, 그런 아들의 버릇을 고치겠다고 시작했는데, 자진신고한 경찰서에서 '학대가해자'가 된 자신을 발견하고 엄마는 눈물을 쏟는다. '내 아들'이라는 '편안한 존재'가 어느덧 '만만한 존재'가 되어 엄마의 '분노'를 받아내고 있었다.

엄마도 노력한다. 상담도 받고, 아들을 때리던 도구도 함께 버리고, 대화도 하려 한다. 하지만 어릴 적 연탄집게로 딸을 때리던 친정 엄마의 등장처럼 엄마 주변의 상황이 급변하면 엄마는 '분노'는 다시 고스란히 아들에게 향한다. 결국 '아동학대 즉각 분리 제도'에 의거 아들을 '학대'당하는 집으로 부터 '구출'했다. 

'엄마라는 가면을 쓴 악마'라던 아들, 엄마 생각은 나지 않지만 강아지들 때문에 집에 가고 싶다던 아이,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아이는 전화해 보고 싶다고 한다. '무서운 걸까? 보고싶은 걸까?' 유일한 보호자이자, 자신을 학대한 엄마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에 혼란스러워한다. 

'학대'는 아이에게 감정적 트라우마만을 남긴게 아니었다. 학교 생활에 제대로 적응을 못하던 아이, 검사를 해보니 편도체에 과부하가 걸렸다. 지속적인 두려움이 아이로 하여금 그 어떤 자극에도 무뎌지도록 만들었다. 결국 '뇌손상'에 이른 것이다. 

보호 관찰 6개월, 234일 만에 아이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떠날 때랑 달리 훌쩍 커버린 아이, 엄마는 아이의 귀가가 두렵고 반갑다. 학대 아동 83.7%, 10명 중 8명이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아동학대 생존자 
1부, <내 이웃의 아이>에서 엄마는 어떻게든 '학대'의 늪에서 스스로 벗어나고자 노력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5월 10일 방영된 2부 <살아남은 아이들>은 '학대'의 경험을 가진 '어른'이 된 아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요셉의 친구는 몰랐단다.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그의 눈에 요셉의 아버지, 어머니는 좋은 분처럼 보였단다. 챙겨주고 예뻐해주는 것같았는데, 하지만 그건 사람들이 볼 때 뿐이었다. 

그의 집은 지옥보다 더한 지옥이었다. 그는 말한다. 신체적 학대는 '맷집'을 키웠다고. 맞으면서 버티면 시간이 흐르면 끝이 있었다고. 하지만, 자기 자신이 바라봐도 자신의 존재가 싫어지게 만드는 정신적 학대는 차라리 지옥을 택하고 싶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자살 시도도 했다. 부모의 나이가 30대 초중반 무렵부터 시작된 학대, 그래서 요셉은 30대의 사람들이 무서웠다. 부모의 나이가 40대가 되고, 50대가 되고, 세상 사람들이 무서워졌다. 지하철도 탈 수 없었다. 잘못됐다는 걸 알았지만 어린 요셉은 너무 약하고 어렸다. 

 

 

'부모'가 만든 세상, 학대당하는 아이들은 그 세상이 전부이다. 임연(필명)씨가 14살 되던 해 친구가 전해줬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반찬을 바닥에 뿌려놓고 주워먹게 하는 거 부모라면 그럴 수 없는 거라고. 먹을 걸 주지 않고 몇 시간 씩 매질을 해도 '학대'의 발견율은 4%에 불과하다. 그만큼 대부분의 학대는 '가정'이라는 공간 안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그래서 15년에서 27년까지 '학대'의 시간은 길다. 아이들에게는 끝이 없는 터널이다. 

조희정 씨의 첫 기억은 유치원 때였다. 술취한 엄마가 내복 바람의 희정 씨 오누이를 집 밖으로 내쫓았다. 기침만 해도 맞았다. 모든 행동이 학대의 이유가 되었다. 머리채를 잡아당겨 뒤로 넘어져 뇌진탕을 일으켜 고통받는데, 엄마는 꾀부린다고 했다. 결국 아픈 희정 씨가 무릎을 끓고 빌었다. '내가 사라지면 우리 가족이 행복할까'.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입양된 5살 부터 시작된 새엄마의 폭력은 결혼을 하고 임신 3개월에 이를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전안나 작가는 고백한다. '수저없이 태어났다'고 이제는 웃으며 말하는 전작가이지만, 여전히 문이 열려있으면 그 문으로 엄마가 들어와 자신을 때릴까봐 불안하다고 한다. 그녀의 기억하는 스킨십은 '폭력', 이거나 '약을 발라주는 것'뿐, '너는 다를 거냐'며 폭언을 퍼붓었던 양모,그 반대로 사는 게 복수라 생각해서 좋은 엄마가 되려고 공부에 공부를 했다고 한다. 50대 50, 하지만 세상은 폭력의 대물림만을 주목한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어떻게든 그 '대물림'의 고리에서 자신을 끊어내려고 노력한다. 

엄청난 양의 음식을 주고 시간을 쟀다. '3분 줄게 다 먹어, 팽이채가 날아들었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학대의 경험을 책으로 엮은 임연 작가의 <그래도 나는 살아야겠다>속 내용이다. 학대의 연은 질겼다. 가해자인 부모와 인연을 끊기 위해 임연 작가는 등초본 열람도 제한했고, 가족관계부도 정리했다. 그녀가 얼굴을 공개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부모의 동의가 없어 학자금 대출을 받지 못해 주 70시간을 일하며 2년이 더 걸려 대학을 졸업했다. 

20대가 되서도 여전히 '엄마랑 잘 살아보면 안될까'하던 아버지, 조희정 씨 역시 굳게 마음을 먹고 '연'을 끊었다. 자신의 아픔을 되풀이 하지 않고자 희정 씨 역시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3년에 걸쳐 자신의 학대 경험을 역시나 책으로 남긴 전안나 작가 역시 18년 경력의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학대'를 넘어 '세상의 학대'에 맞선다. 



by meditator 2022. 5. 11. 19:22

인생은 고해(苦海)다. 일찌기 붓다의 설법이다. 이제 9회차를 경과하고 있는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네 인생사 고해의 바다에 밀려오는 제 각각의 파고를 경험하게 된다. 9회 차에 들어 전면에 등장한 동석(이병헌 분)과 선아(신민아 분)를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인생의 파도는 무엇일까? 

 

 

십대 청소년 시절 서울에서 전학온 선아와 만난 이래, 이제 마흔 줄이 될 때까지 동석은 선아와 만날 때마다 인생이 꼬였다. 그렇게 얼핏 이야기는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이야기같았다. 트럭 하나를 몰고 제주 인근 섬을 돌며 장사를 하는 동석, 그런 동석이 사는 제주에 그의 인생을 꼬이게 만든 장본인 선아가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보란듯이 그를 농락한 채(?) 떠나고, 다시 그를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잘 살 것 같던 선아가 피죽 한 그릇도 못얻어먹은 얼굴로 돌아왔다. 본인 말로는 발을 헛디뎌서라는데 해녀들이 구하지 않았으면 물고기 밥이 될 뻔했다. 그런 선아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동석의 신경을 거스른다. 죽지 않았으면 됐다고 하면서도 돌아오지 않는 선아를 찾아 온제주를 헤맨다. 

동석과 선아의 상흔 
해묵은 연인처럼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 선아에게 따지듯 그때 왜 자신을 버렸냐던 동석, 그로부터 그저 오랜 연인만이 아닌 의지가지없던 두 '어른 아이'의 이야기가 풀려나온다. 

아버지가 죽고, 물질을 하던 누나가 죽자 어머니는 아버지의 친구네 집으로 들어갔다. 말이 두번 째 부인이지, 병석에 누운 본처의 병수발을 하는 것이었고, 두 의붓 아들을 키우는 것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용납할 수 없었던 동석은 매일매일 두 의붓아들에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보란듯이 그 상처를 들춘다. 

그렇게 얼굴이고, 몸이고 시퍼렇게, 검붉게 멀쩡한 곳이 없는 시절을 살아가던 동석에게 기대어 온 아이가 선아였다. 서울에게 전학왔다는 중학생 아이가 집에는 안가고 매일 동석이 가는 피씨방에서 게임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업을 하다 망한 선아의 아버지가 의탁한 큰아버지네, 하지만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하루가 멀다하고 주먹다짐을 하며 싸웠다. 그렇게 돌아갈 곳이 없는 선아를 동석은 품어줬다. 

하지만 첫사랑이자, 첫정이던 선아는 동석의 친구에게 몸을 허락했고, 그걸 안 동석이 폭주하자 동석이 보는 앞에서 깡패라며 신고를 했다. 그리고 떠나버렸다. 제주 돌담 사이 삐져나온 잡초같은 동석이 유일하게 마음을 줬는데, 그런 동석을 선아가 짓밟아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자신을 버렸냐는 동석의 질문에 선아는 동문서답처럼 말한다. 사랑하는 오빠에게 자신을 망가뜨려 달라고 할 수는 없지 않냐고. 

자신이 맞은 상처를 보여줘 엄마를 고통스럽게 하려던 것처럼, 선아도 그런 식으로 아빠의 관심을 끌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선아의 시도는 아빠의 사랑을 갈구하는 딸을 놔둔 채 바다로 차를 몰아버린 아빠의 이른 죽음으로 무산된다. 그리고 자신의 눈 앞에서 바다로 빠져들어가는 아버지를 목격한 선아는 오랜 지병, 우울증을 얻는다. 

 

 

선아의 우울증은 동석의 맞은 상처와도 같다. 의붓아들에게 매일매일 맞고, 그걸 엉마에게 보여주듯이, 하지만 그런 마음의 아픔을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선아는 자신의 안에 그 상흔을 차곡차곡 쌓아 자신을 갉아먹어간다. 그리고 그 상흔이 이제 선아의 가정을 무너뜨렸고, 아이마저 잃을 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동석이라고 다를까, 선아가 그렇게 떠나고 의붓아버지네 집을 털어 다시는 제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떠난 동석, 하지만 뭍에서도 그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다시 제주로 돌아온 동석, 하지만 여전히 그는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도 않고 트럭 하나를 몰며 제주 이곳저곳을 전전한다. 

김훈 작가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인생은 고해라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종교적 교리에 의하면 인간사 희노애락의 욕망에서 '해탈'하면 되지만 사람 사는 일이 어디 그런가, 그런 '고해'의 삶, 그런데 김훈 작가는 그저 인생이 그런 거라고 받아들이라 말한다. 

인간의 삶은 다 저마다의 욕망과 욕구를 가지고 맞물린다. 내 맘이 네 맘같지 않은 그런 모든 일들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고해'의 풀을 만든다. 그저 인간사가 다 저마다의 이해 관계에 얽혀 이루어지는 것임을 '수용'한다면 될 일이라고 김훈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나와 다른 타인의 삶이 저마다 이루어져 가는 것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동석과 선아는 여전히 그 '어린 시절의 상흔'에 사로잡혀 있다. 에이 설마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 적이 없느냐는 선아의 농반 질문에 동석은 말끝을 얼버무린다. 동석은 늘 자신의 인생이 선아 때문에 꼬였다고 말한다. 마흔 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동석의 인생은 선아 때문에, 엄마 때문에 라는 그 '트라우마'로 부터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동석의 떠돌이 삶이 드러내는 외상, 그리고 선아의 의지가지 없는 우울증의 내상은 모두 여전히 그들이 어른이 되었음에도 '어른 아이'의 그 시절에서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그들이 겪은 '상실의 시간'은 과거가 되었고, 그들은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동석도 선아도 그 상실을 겪은 그 시절에 멈춰있다.

그런 '어른 아이'인 상태인데도 선아는 자신이 '엄마'로서의 주장을 펼친다. '아이만 있다면, 자기 삶에 유일한 의미인 아이만 있다면', 다시 행복해 질 수 있을 거라며 예전 아빠와 함께 살던 곳을 꾸미고 있다. 

그런 선아에게 동석은 말을 건넨다. 재판에서 져서 아이와 함께 할 수 없게 되더라도 너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어쩌면 동석은 인정하고 싶지만 그의 내면은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자신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했던 어머니의 삶을. 그래서 동석에게 용납할 수 없는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자기 자신일지도. 동석에게 선아의 등장은 해묵은 인연의 결자해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동석이 오랫동안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내면의 아이를 들여다 보는 시간이 될 수도 있지않을까.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서로에 대한 '감정'을 놓지 않은 두 사람, 그 '온기'는 아직도 두 사람이 허우적거리는 '고해'의 파고를 넘어서는 힘이 되지 않을까. 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헤집고 보면 다들 내 안에 '아이'를 놓지 못하고 있다. 노희경 작가는 동석과 선아를 빌어 말하고 있다. 그제 그만 그 아이를 놓아주라고.그 시절의 엄마도, 아빠도 그저 각자 자신의 삶을 버겁게 짊어지고 살아갔던 한 사람들일 뿐이었다고. 타인들의 삶으로 인한 고해의 바다에서 그만 허우적거리고 넘어서라고.  진정한 어른됨의 삶을 살아가라고. 



by meditator 2022. 5. 8. 16:23

36살, 안대성(이광수 분)은 이번에도 또 떨어졌다. 처음에는 야심차게 5급 정도는 했다. 하지만 연이은 낙방에 눈을 낮췄다. 9급 정도야, 그러다 보니 어느새 36살이 됐다. 오랜 연인 도아희(설현 분)가 그를 데리고 집에 간 날, 그녀의 아버지는 그의 자기 소개를 듣고 글러브를 꼈다. 다시 그를 만나면 부녀의 연을 끊겠다고 했다.

고시원 벽에 그가 붙인 시험 공지 게시물이 뜯어도 뜯어도 끝이 없다. 이제 또 시험을 볼 의지도, 여력도 없다. 짐을 싸서 터줏대감같은 고시원을 떠난 대성이 돌아간 곳은 대성마트이다. 그런데 '대성마트'의 '대성'이 길거리에 나뒹군다. 대성상회 시절부터 지금의 대성마트까지 그곳을 이끌던 대성의 어머니, 한명숙 여사가 비로소 마트 경영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것이다. 마트 이름을 아들 이름 대성에서 자신의 이름 '명숙'의 이니셜 'ms'로 바꾼 한명숙 여사, 끝없는 공시 터널에서 빠져나온 아들에게 '독립'을 요구한다. 

 

 살인자의 쇼핑목록 ⓒ TVN

 

만년공시생 마트 캐셔가 되다 
고시원에서 공시 준비를 해도 늘 돌아갈 집이 있었던 대성은 졸지에 마트 건물 옥상에 창고로 쓰던 옥탑방으로 쫓겨난 신세가 되었다. 늘 자기 집처럼 드나들던 마트의 캐셔 자리 수습이 됐다. 그런데 마트가 자기를 대접안해준다고 마트가 떠나가라 유세를 떠는 부녀회장에게 그녀가 지난 시간동안 사간 스타킹 갯수와 금액까지 안내하며 그녀의 입을 다물게 만든다. 공시생으로 살아온 지난 시간이 무색하게 그의 '달란트'는 '마트'에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살인자의 쇼핑목록>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tvn 수목 드라마는 이렇게 만년 공시생 안대성과 그의 집이자 일터가 된 'MS마트'를 이렇게 소개한다. 알고보니 어머니가 '대성상회'를 하던 시절부터 카운터를 지키던 '캐셔 경력 30년, 우리 엄마 슈퍼는 내가 지킨다'던 청년도 세상의 흐름에 따라 만년 공시생이 되고말았다. 자칭 타칭 '비공식 슈퍼두뇌'이지만 그 슈퍼 두뇌가 자신의 능력을 살피지 못해 방황하는 사이 시간이 훌쩍 지나버려 '슈퍼집 아들'이란 이유로 그를 좋아했던 연인이 소개팅 자리에 나갈 처지가 되었다. 

사실 능력은 있지만 현실은 '루저'인 주인공, 낯설지 않다. 현실에서는 파리날리는 만화방 주인이지만 사건에 있어서는 '천재적 능력'을 가진 <탐정; 리턴즈>의 강대만?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을 각색하고 감독한 이언희 감독이 <살인자의 쇼핑목록>의 연출을 맡았다. 거기에 장르물 매니아들을 열광케 했던 독특한 구성의 스릴러 <원티드>, <오늘의 탐정>를 쓴 한지완 작가가 의기투합했다. 

이언희 감독, 한지완 작가가 선택한 공간은 '슈퍼'이다. '상회'이던 시절부터, 재개발을 앞둔 현재까지 동네의 중심, 하지만 어느덧 '쓱싹배송, 새벽배송' 등에 밀려 그 자신이 '재개발'되게 생긴 오랜 동네의 터줏대감, 그만큼 그곳에 온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고 동네의 모든 것들이 오가는 곳, 한때는 대성상회였던 지금의 MS마트가 '현장'이다. 

 

 살인자의 쇼핑목록 ⓒ tvn

 

마트 캐셔의 숨겨진 능력 
당연히 스릴러 장르이니만큼 '사건'이 등장한다. 다른 친구들이 다 학원을 갈 때 홀로 동네를 돌아다니는 마트 단골손님 아홉살 세빈이가 가져온 주인을 잃은 슬리퍼 한 짝, 그 주인이던 여성이 주검으로 발견된다. 

그런데 그 여성의 사체를 발견한 사람이 다름아닌 안대성이다. 현장에 온 경찰에게 직업과 우울증 병력에 이르는 그녀의 사소한 프로필까지 줄줄이 꿰는 안대성, 연인이자 경찰인 도아희가 없었다면 딱 용의자이다. 

일찌기 대성상회이던 시절, 5만원 권을 가지고 초코파이 한 개를 사러 온 위폐범을 그가 가지고 온 위폐 번호로 들통나게 만든 어린 시절의 안대성, 통통했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지만 여전히 그의 '슈퍼 두뇌급' 능력이 마트를 찾은 모든 이들을 슈퍼컴퓨터처럼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 대성의 능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찌기 중학교 시절 선생님조차 혀를 내두르던 '오지랖'이라던 그 관찰력과 추리력이 발동한다. 시신의 목에 조른 흔적, 그리고 세빈이가 슬리퍼 한 짝을 찾은 성당 구석에 감겨진 스타킹, 그리고 혼자 사는 여성들의 집에 출몰했던 배달 봉투 안의 스타킹 등을 조합하여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직접 마트에서 파는 모든 스타킹을 가져다가 목을 조를만한 '탄성'의 능력치조차 직접 실험하면서. 

하지만 능력자는 대성만이 아니다. 일찌기 대성상회 시절 셔터문을 내린 상황에서 자신의 목을 조르던 위폐범을 쌀봉지로 가격해 제압한 왕년의 배구 선수 한명숙 여사에, 동네 소식은 모르는 것이 없는 마트 알바에 화장품 외판원 투잡을 뛰는 마트의 '공산' 코너 담당 아줌마, 대성은 들지도 못하는 물건을 거뜬히 들어내는 마트 '알바' 등등 소소한 일상의 한 축을 구성하는 인물들이 스릴러 장르의 주요 인물로 저마다 한 몫을 한다. 

'범인은 마트에 있다', 대성상회 시절 위폐범이 이제 할아버지 분장을 하고 대성의 주위를 맴돌고, 홀로 살며 우울증에 시달리던 여성에 이어, 누군가 자신을 스토킹한다며 마트에 와서 울며 호소를 하던 여성이 그녀의 집에서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그런데 그 피해자들, 혹은 가해자들의 흔적이 마트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우리가 '버려주세요'라는 말로 남기고 온 영수증 안에 마트를 다녀온 모든 이들의 신상명세가 드러나 있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소비한 모든 품목이 그들을 말해주고 있다. 이 기발한 '현대 사회'의 '인증서' 마트를 중심으로 <살인자의 쇼핑 목록>은 시작된다. 

신선한 구성, 그리고 그 신선한 플롯 속에 움직이는 생동감넘치는 이 시대의 평범한 이웃들의 스릴러, 이 흥미진진한  <살인자의 쇼핑목록>이 선전하기를 바란다. 



by meditator 2022. 5. 5. 22:39

영화 <부산행>, <염력>, <반도>에 이어 최근 <방법 재차의>, 그리고 드라마 <방법>, <지옥>, <돼지의 왕>에 이르기까지 연상호 감독이 각본을 집필하거나, 연출한 작품들이다. 이젠 '연상호월드', 혹은 '연니버스'라는 고유명사가 등장할 정도로 초월적 세계관과 그로 인해 혼돈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연상호 감독의 작품은 하나의 고유한 장르가 되어가고 있다.

4월 29일 티빙을 통해 공개된 <괴이>는 그러한 연상호 감독 고유의 세계관에 기반한 또 하나의 시리즈이다. 연상호 감독이 각본에 참여하고 장건재 감독이 연출한 <괴이>는 이른바 '연니버스'의 전형성을 그대로 드러냄과 동시에, 연상호월드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귀불, 봉인이 풀리다
'발견하지 말았어야 했다.'라고 <괴이>의 포스터는 말한다. 천보산의 절터에 오래전 묻힌 불상의 머리가 발견되었다. 거기에 '관광 산업'이라는 세속의 욕망이 곁들여 진다. 진양 군수 권종수(박호산 분)는 이를 파내서 사람들이 이 불상을 보러 진양군에 올 '관광산업'의 꺼리로 삼고자 한다.

하지만 스님들은 이에 반대한다. '귀불', 말이 불상이지 오래전 악귀가 들린 이 불상은 티벳어로 씌여진 가리개로 '봉인'이 되어 묻힌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 '봉인'이 풀리는 순간 세상에 재앙이 시작된다고 하는데 그런 스님들의 반대가 '관광 산업'의 열망을 가라앉힐 수 없다. 

예정대로 진행된 출토작업, 귀불의 눈을 가렸던 가리개를 치우자 그 눈을 마주친 인부로 부터 '지옥'이 시작되었다. 오래전 자신과 어머니를 학대했던 아버지가 다시 나타나 자신을 구타한다고 생각한 순박한 청년이었던 인부는 결국 아버지로 오인하여 술집 주인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어깨뼈가 튕겨져 나올 정도로 용을 쓰며 폭주한다. 

게다가 귀불이 출토되자 진양군에는 검은비가 내리고 그 비로 인해 농작물의 피해를 본 사람들이 군청에 모인다. 그리고 그들이 보게 된 귀불, 사람들은 저마다의 지옥 속으로 빠져들어가 서로를 죽고 죽이는 처절한 폭력의 레이스를 벌인다. 

그것이 좀비였든, 혹은 지옥의 사자였든, 그리고 귀불이었든 연상호 월드에서 밑도 끝도 없이 다짜고짜 '지옥과 같은 상황'은 시작된다. 사람들은 그 자신이 '지옥'의 불쏘시개가 된다. 가장 평범한 갑남을녀가 귀불의 젯밥이 되어 서로를 해친다. 

 

 

차별성인가 한계인가 
그리고 이런 초자연적, 혹은 초현실적인 '현실의 지옥도'를 '배양'하는 건 부조리한 인간의 권력이거나, 그 권력에 편승한 인간들이다. 부산행에서 김의성이 분한 '용식'은 귀불을 파내 관광 산업의 재미를 보려는 박호산이 분한 권종수가 되어 돌아온다. 그들은 자신의 사적 욕망을 공적인 권위에 의존하여 풀어내고 그로 인해 '초현실적인 파멸'의 방아쇠를 당긴다. 군수라는 자릿값으로 큰소리를 펑펑치다가, 자신의 수하조차 필요에 의해서 기꺼이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비겁한 상사, 하지만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한참 어린 청년 앞에서 기꺼이 비굴함을 감내할 수 있는 인간의 가장 나약하고 비겁한, 그래서 비열한 모습이 '권력'이나 '권위의 탈을 쓰고 사람들을 '지옥'으로 내몬다. 

<괴이>에서 이전 연상호 월드의 작품들과 차별성을 들자면 보다 강력해진 폭력성이다. 주인공보다 더 도드라진 캐릭터 곽용주(곽동연 분)에 의해 대표되는 무자비한 폭력이다. 이제 막 출소한 용주, 하지만 외려 그의 폭력성은 더욱 증폭되었을 뿐이다. 자신과 갈등을 일으켰던 한도경(남다름 분)을 마구잡이로 때리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 그의 폭력성은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지옥도' 안에서 외려 쾌재를 부른다. 그리고, 죽지 않기 위해, 검은비를 맞은 사람들, 혹은 귀불의 눈을 본 사람들을 앞장서 죽이기 시작한다. 사람을 죽이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지지부진했던 그의 삶에 있어 유일한 즐거움인양, 결국 그 스스로 제물이 되어 죽음에 이를때까지 폭력의 질주는 그치지 않는다. 

곽용주로 대표되는 가학적 폭력에 사람들은 고개를 조아린다. 그리고 어느새 만인대 만인의 투쟁 상황에서 우월한 수컷인 양 구는 곽용주가 내세운 힘의 논리 앞에 따라간다. 피가 튀기도록 때리고, 찌르고.....  무작정 나타나 사람들을 지옥으로 데려가는 <지옥> 속 죽음의 사자들처럼, 그 어떤 개연성도 없이 진양군에 지옥을 선사한 귀불의 등장이 주는 공포를 설득할 것은 보다 잔인한 설정 밖에 없다는 듯이 귀불의 등장 이후, 특히 진양 군청에 모인 사람들의 집단적 히스테리는 누가 더 잔인하게 '피의 카니발'을 벌이는가하는 '질주'이다. 

 

 

가족만이 구원이다? 
그렇게 개연성과 상관없는 초현실적인 공포, 그리고 거기에 제물이 된 사람들이 벌이는 폭력과 피의 향연, 그런 가운데 역시나 <부산행> 이래로 드라마의 중심은 '가족애'이다. <월간 괴담>의 정기훈(구교환 분)과 이수진(신현빈 분)은 티벳어를 능수능란하게 해석해 낼 수 있는 고고학과 문양 해석의 전문가들이다. 또한 이들 부부는 얼마전 잃은 어린 딸로 인해 서로에 대한 짙은 감정적 앙금이 남아있다. <괴이>는 초현실적인 현상으로 인한 사람들이 벌이는 피의 카니발이라는 한 축에 곁들여, 정기훈 이수진 부부의 트라우마를 귀불에 대한 제압 과정을 통해 해소해 나간다. 
거기에 또 한 축은 파출소 소장이자 한도경의 엄마인 한석희(김지영 분)의 모성애이다.


정기훈과 한석희는 아내와 아들을 구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진양군청을 향한다. 부산행>의 장점이자 단점이 '신파'였듯이, 결국은 <지옥>의 감동을 끌어낸 것이 박정민 원진아 부부의 자식을 향한 살신성인이었듯이, <괴이> 역시 정기훈과 한석희 등의 '가족애'를 통해 드라마를 끌어간다. 

부부였든 아는 사람이었든 부하 직원이었든 상관없이 귀불로 인해 정신줄을 놓고 칼부림을 하거나, 혹은 자신이 살기 위해 상대를 죽이거나, 위험에 내맡기는 상황에서 정기훈과 한석희의 몸을 던진 가족애는 당연히 흑과 백처럼 대비를 만들어 낸다. 고고학자거나, 파출소장이라는 그들의 '직분'은 '가족애' 앞에서 유명무실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넘치는 사람들의 폭력적 신들림이 밑도 끝도 없는 과한 폭력성으로 인해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듯 정기훈과 한석희의 가족애는 상투적이다. 또한 곽용주와 한도경의 우정인지, 사랑인지 미묘한 감정선은 뜬금없다. <괴이>는 연니버스 체인점의 메뉴얼을 다 갖추었지만 어쩐지 소스는 과하고, 재료는 설익은 듯 느껴진다. 

그런 가운데 더욱 아쉬운 것은 여성 캐릭터들이다. 김주령은 <오징어 게임>보다 더욱 소모적인 캐릭터로 사라진다. 신현빈의 출연으로 관심을 모은 이수진은 아이를 잃은 상실감으로 내내 전전긍긍한다. 문양 해석학자로서의 역할은 '장식적'이다. 파출소장 한석희는 제 아무리 파출소장이라 하더라도 부하 경찰에게 '야야' 거리는 호칭이나 '반말'로 일관하는 태도는 한석희라는 캐릭터의 미덕을 상실케 한다.



by meditator 2022. 5. 5. 22:25

5월이다. 부모님도 계시고, 자식들도 있는 연배의 사람들이 5월에는 외식은 꿈도 못꾸겠다는 농담반 진담반 이야기들을 한단다. 어버이날도 있고, 어린이 날도 있는 5월, 그래서일까? <우리들의 블루스> 호식과 인권의 이야기가 쓰리게 다가온다. 

호식(최영준 분)과 인권(박지환 분)의 딸 영주(노윤서 분)와 아들 현(배현성 분)이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지역 균형 선발로 서울대 의대 갈 날만 바라고 공부에 매진해 왔던 영주는 임신임을 알고나서 자신의 미래에 걸림돌이 될 거라는 이유로 아이를 지우려 했다. 하지만 임신 주수가 이미 6개월을 넘어 중절조차 쉽지 않은 상태, 산부인과에서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들은 두 사람은 결국 '부모'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당하게 아이를 가지고서도 학교를 다니게 해달라고, 지역균형 선발로 대학에 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던 영주, 그리고 학교를 그만두고서라도 아이 아빠 노릇을 하겠다던 현도 막상 아버지들 앞에서는 말문이 쉽게 열리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의 아버지가 그냥 아버지들인가. 

아버지로 살다; 인권과 호식
한때는 주먹으로 날리던 현의 아버지 인권은 시장에서 순대국밥을 만다. 말끝마다 아직은 이새끼 저새끼 하지만, 아직은 '내 꺼'라며 현을 애지중지한다. 그의 불만이라면 그저 현이 호식의 딸내미 영주에게 늘 전교 1등을 내주고, 전교부회장인 거다. 그래도 자기보다 잘 생기고 공부도 잘하는 아들내미가 그의 '자랑'이다.

호식이라고 다를까, 은희가 가난해서 버렸다던 호식이, 그런 호식이가 시장에서 얼음을 나른다. 그런 와중에서 생선까지 굽고, 제철 과일까지 챙겨 딸내미 영주의 아침상을 마련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구멍난 양말에 늘어진 티쪼가리다. 둘 다 아내가 떠나고, 그저 아들내미, 딸내미만 보고 여기까지 왔다. 말끝마다 호식이는 영주가 대학만 가면 저 바다에 배 띄워 낚시나 하며 살겠단다. 

그렇게 아이들 대학보낼 날만 바라며 정신없이 달려온 두 사람 앞에, 아이들이 사랑한다며 아이를 낳겠다고 한다. 심지어 현은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겠다고 둘이 살 집만 마련해 달란다. 청천벽력이다. 두 아버지는 자신들답게 반응한다. 인권은 차마 현을 때리지 못하고 집안을 다 때려부순다. 호식은 자신의 따귀를 때리며 하염없이 운다. 

 

 

처음 현이 영주의 이야기를 했을 때 인권은 늘 자기 아들 앞에 한 자리를 차지하던 영주라는 걸림돌이 사라진 걸 안심했다. 호식은 영주의 이야기를 듣자 믿을 수 없다며 함께 병원에 가서 확인하자 했고, 그 다음엔 아이를 지우자고 한다. 

영주와 현의 이야기를 듣고 난 두 사람의 다음날, 일을 하는 인권과 호식, 두 사람에게 지나온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동네에서 피붙이처럼 친했던 두 사람, 그래서 호식을 겁박하면 인권이 무릎을 끓던 시절, 이 담에 아이들이 크면 사돈을 맺자며 그러니까 죽지 말라고 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내가 떠나고 밥통에 밥알도 말라버린 채 영주가 배가 고프다고 한 날, 호식은 그래서 가장 친한 인권을 찾아 돈을 구했다. 하지만 그게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 번에도 그렇게 호식은 인권으로부터 돈을 가져갔고, 그 돈은 도박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이번에 인권의 태도가 달랐다. 인권은 영주에게 다가가 '돈주세요'하라고 하고, 그런 영주에게 돈을 주었다. 그리고 호식에게 말했다. 딸 앵벌이 시켜 돈얻으니 좋냐고. 그 말 한 마디가 호식을 변하게 했다. 아내가 떠나도 끊지 못하던 도박을 인권의 그 한 마디가, 딸의 손에 얹힌 돈다발이 호식을 변하게 했다. 대신 인권과 호식은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 

 

 
부모라는 자리 
피붙이같던 인연을 끊고 자식키우는 목표 하나로 달려온 두 사람이다. 이제 아이들이 번듯한 대학만 가면, 고지가 저긴데, 그 고지 앞에서 두 아이들이 다른 선택을 했다. 

첫 회부터 만나기만 하면 아웅다웅하던 인권과 호식, 두 아버지들의 둘도 없는 자식 현과 영주의 러브스토리, 그 애틋하고 안타까운 이야기를 통해 노희경 작가는 역설적으로 '부모'를 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가장 헌신적인 아버지들을 통해 '이타적'이기만 할 것같은 '부모' 자리의 '이기적인 내면'을 들여다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의 삶이란 없이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 달려온 듯한 인권과 호식, 심지어 두 사람은 아버지이지만, 엄마가 없는 아이들에게 두 사람은 완전체로서의 부모다. 아이들의 대학 입학을 위해 가속을 붙여 달려온 자기 희생적인 삶, 그 삶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작가는 묻는다. 당신이 원했던 부모의 자리는 어떤 것이었냐고. 당신은 당신의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냐고, 아니면 당신의 아이가 이룬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냐고. 

아내도 못끊게 했던 도박을 끊게 만들고, 잘 나가던 주먹질을 접게 만들었던 맹목적인 부모의 자리, 하지만 그 '맹목성'은 동시에 잘 나가는 자식이라는 '보상'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라고 드라마는 묻는다. 그래서 영주의 임신 소식에 인권은 자기 아들이 1등을 하게 됐다며 좋아했고, 호식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딸의 앞길을 막는 아이를 지우자고 단호하게 결정한다. 물론 거기에는 아내가 떠나버린 상실감과 홀로 아이를 키우며 감내했던 시간이 준 트라우마가 있다. 

어느 부모가 전교 1, 2등을 다투던 내 아이가 대학 입시를 앞두고 아이를 낳고, 학교를 그만두고 가장 노릇을 하겠다면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또 물론, 아이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인권과 호식이기에 결국은 현과 영주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부모 노릇을 통해 작가는 묻는다. '내 새끼'만을 향했던 그 마음의 향배를. 

또한 그 '맹목성'이 놓치고 있던 내 삶의 자리는 어떤 것이었냐고 묻는다. 가끔 인권의 순대국밤 노점에는 한때 그와 함께 '주먹' 좀 쓰던  친구들이 온다. 그리고 인권을 신기해하는지, 비웃는지 묘한 뉘앙스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인권도 현에게 늘 말한다. '돼지 냄새' 맡아가며 너를 키운다고. 늘 어디 동호회 무료 티셔츠 나부랭이나 입으며 얼음을 나르는 호식의 마음이라고 다를까. 서로를 향한 적대적인 감정 안에는 어쩌면 많은 것을 놓치고 사는 듯한 자기 삶에 대한 서러움이 묻혀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 새끼 좋은 대학 갈 날만을 향해 달려왔던 삶, 과연 그건 내 새끼의 좋은 대학 입학만으로 '보상'받아야 할 삶일까? 주먹질을 하던 인권이, 도박판을 전전하던 호식이 아이들로 인해 '보상'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미래의 꽃길 대신 현재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아이를 선택한 현과 영주의  행복말이다. 우리는 늘 먼 훗날의 여유와, 행복을 그리지만, 사실 어쩌면 고단한 지금 여기의 삶이 현생을 사는 나의 '황금기'일 지도 모른다. 



by meditator 2022. 5. 1.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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