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끝이야?'
<나의 해방일지> 마지막 회를 본 즉자적 소감은 이게 아닐까? 마치 어제 보고, 오늘 보고, 내일 볼 듯하며 흘러가는 주인공들의 일상, '아니 뭐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거야?', 그저 또 하루가 지나듯 드라마가 끝을 맺었다.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은 것같은 드라마, 하지만 시간이 흐르니 밀물처럼 많은 이야기들이 되돌아온다. 지금은 서울 하늘 밑 어느 곳에서 살아갈 이들, 그들을 통해 박해영 작가는 '답'이 없는듯한 이 시대에 '답'을 전한다. 

 

 

'해방'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출판사를 하는 박상민 부장 친구 덕에 오랜만에 '해방 클럽'이 뭉쳤다.  '나의 해방일지'를 출간할 수도 있는 상황에 저마다 자신의 동정을 전한다. 돌고 돌아온 질문, 그래서 '해방은?'이다. 쓰던 걸 그만두자 '해방'에 매진하던 실천도 동시에 멈췄다는 '자조적인 평가', 겨우 내가 누군지 알듯하다는 아쉬움에 염미정(김지원 분)이 말한다.

'그게 다가 아닐까요? 자기 자신을 아는 거.' 

극 초반 세상의 그림자같던 염미정은 이제 마지막 회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확고한' 존재가 되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재혼하셨으며, 회사에서는 그녀의 이름을 도용해 바람을 피던 커플 때문에 외려 그녀가 쫓겨났다. 이제 막 디자이너로서 실력을 인정받아 정직원이 되려던 참이었다. 그녀의 '재능'과는 상관없는 직무를 맡으며 사는 그녀, 그런데 이제 더는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다. 

구씨와 재회한 그녀가 담담하게 그녀의 '개새끼들'에 대해 말한다. 그녀에게 돈을 빌리고 여전히 갚지 않는 전 애인, 그런데 그녀는 외려 그가 돈을 갚을까봐 걱정이었단다. '개새끼'라 부르며 자신의 모든 원망을 한껏 퍼부을 수 있는 존재, 구씨가 전화한 날도 그 '개새끼'의 결혼식에 가서 그가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지 알려주려 했다는 미정, 그런데 미정은 말한다. 그 '개새끼'가 없어지면 그를 핑계대던 자신의 비겁함이 드러날까봐 두려웠다고. 

 

 

해방일지를 처음  쓰던 시절, 해방 클럽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해방'되고픈 그 무엇이 있었다. 어디 해방클럽만인가. 삼포로 네 다섯 시간을 걸려 출퇴근하던 염씨네 삼남매 모두 '해방'이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매달린 삶이 마치 만원 지하철처럼 그들을 시달리게 했다. 머리를 자르고, 차를 사고 싶어하며, 애인에게 돈까지 뜯기며 방황했다. 

<뜻밖의 여정> 속 한 장면이다. 마흔이 된 피디가 윤여정 배우에게 말한다. 마흔쯤 되면 인생이 좀 가닥이 잡힐 줄 알았다고. 세상을 사는 자신감을 좀 얻게 될 줄 알았다고. 그러자 '나도 육십은 처음이라'는 윤여정 배우의 유명한 발언이 다시 등장한다. 78세가 된 윤여정 배우가 여전히 말한다. 이 나이가 되도 여전히 고민이 많다고. 그런데 사람인데,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인데 늘 새로 닥쳐오는 인생이라는 파도에 어떻게 고민이 없을 수 있겠냐고. 당연한 거 아니냐고. 마흔이 되도, 육십이 되도, 그리고 칠십을 한참 넘겨도 사는 건 늘 '고민'이라고. 

윤여정 배우의 말씀처럼, 인생은 늘 녹록치않다. <나의 해방일지> 초반 염씨네 삼남매들은 그런 인생의 답을 '차'를 사는 것처럼 얻으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차가 생기면 인생이 달라질 거라고. 오죽하면 창희(이민기 분)는 구씨의 외제 차를 다 얻어타고 기분을 내려 했을까. 

이 시대의 사랑 방정식
'우리 결혼해요!', '어른들도 엄마가 없으면 슬퍼요?'라고 묻던 조태훈(이기우 분)의 딸이 안쓰러웠던 기정(이엘 분)은 청혼을 했다. 시청자들은 당연히 3년의 시간이 흐른 후 조태훈과 염기정이 결혼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을 하면 결혼을 하고, 그런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답정너'이다. 하지만 사는 게 고달픈 젊은 세대는 그런 '답정너'를 거부한다. 그래서 등장한 게 삼포니, 오포니, 구포 세대이다. <나의 해방일지> 속 염씨네 삼남매 역시 모두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들과의 세상이 말하는 '인생의 프로세스'를 밟는게 여의치 않다. 

창희의 오랜 벗이자 연인인 현아는 자신의 '프리한 영혼'을 주체할 수 없다. 기정의 남자 조태훈은 여전히 자신의 어깨에 드리운 세 여자가 버겁다. 오죽하면 혹시나 하던 기정의 임신이 아님이 드러났을 때 그 신중한 성격에 '잘되었네요'라고 속도 없이 말을 내뱉고 말았을까. 미정의 연인은? 손석구라는 배우의 '매력'에 기대서 그렇지, 셋 중 가장 대책이 없다. 영락없는 알콜릭에, 호빠 관리자에, 결국 그의 머리를 치고 도망간 형의 말처럼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며 사는 존재다. 위협이 문제가 아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그의 앞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이라니. 존재 자체가 위험하고 위태롭다. 

'사랑하는 사람'만 있으면 될 것같던 염기정은 3년의 시간이 흐른 후 여전히 싱글이다. 그런 그녀가 드라마의 초반처럼 헤어스타일을 변화시켰다.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자른다. 그녀는 말한다. 세상에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머리 밖에 더 있냐고. 흔히 그렇듯이 머리를 자르고 이제 '이별'을 하려나 했는데, 기정은 다른 선택을 한다. 

그녀는 말한다. 자신이 태훈의 어깨 위에 짐인 세 여자에 더한 네 번 째 여자가 된 것 같았다고. 왜 자신이 태훈을 사랑하는데, 태훈의 가족들로 인해 자꾸만 작아져야 되는지 모르겠다고. 그런데 여전히 팔이 저리도록 태훈을 사랑한다고. 

기정은 다른 선택을 한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고, 그와의 '가정'을 꾸리는 대신, 그 '가정'을 짐으로 느끼는 이와의 '해방'을 꿈꾼다. 여전히 그들은 따로 살지만 늦은 밤 태훈은 수줍게 기정의 집 창문 앞에서 장미 한 송이와 그녀가 좋아하는 계란빵을 전한다. 꽃봉오리마저 나동그라진 태훈같은 멀대같은 줄기 한 송이에도 감동하는 기정, 계란빵을 좋아한다고 했으니 망정이지, 소고기를 좋아했으면 어쩔 뻔 했냐는 그녀가 한결 편하다. 세상의 '굴레' 대신 사랑을 선택한 것이다. 한 남자를 사랑한다고 해서 꼭 그의 '가족'으로 얹혀져야한다는 것으로 부터 '해방'되니 '사랑'만 보인다. 

 

 
이민기 배우가 보여준 신선한 스펙트럼의 연기로 설득력을 얻은 염창희가 도달한 '해방'은 묵직하다. '차'처럼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욕망을 향해 어쩔줄 몰라하던 그가 도달한 곳은 뜻밖에도 '장례지도사'이다. 죽은 이들의 곁에 늘 머물게 되는 그의 '운명'을 비로소 그 스스로 편안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삶의 궤도를 갑갑해 못견디는 현아를 기꺼이 보내준다. 니 편한대로 살다가, 생각나면 오라고. 늘 '입을 털'지 못해 안달하던 그가 지그시 입을 다문다. 더는 타인의 '공감'을 얻기 위해 안달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다. 

그래도 한 장의 마침표를 찍은 듯한 창희와 기정과 달리, 미정의 상황은 불투명하지 않은가?  가방에 돈을 챙긴 구씨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그런데 거리 선 미정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밝다. 구씨는 물었다. 자신도 '개새끼'였냐고. '개'를 잃어버렸다고 통곡을 하며 시장길을 거닐 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미정은 그를 '개새끼'로 만든 대신, '추앙'했다. 자신이 가득 채워지기를 원했던 그녀, 그 '사랑'을 통해 자신을 충만케 했다. 사랑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기로 한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사랑하는 자신'이 사랑스러운 그녀, 그녀의 '해방'이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이 짊어진 삶의 화두로 부터 저마다 '해방'의 길을 찾아나선다. 끝인가 싶던 드라마의 엔딩처럼 그건 진행형이다. 그리고 드라마는 이제 그 해방의 화두를 보는 이들에게 던진다. 세상의 잣대에 자신을 맞추려 애쓰며 자신을 잃어갈 것인가? 아니면 당신만의 해방일지를 써 볼텐가?  

by meditator 2022. 5. 30. 20:49

언제나 그래왔지만, 특히 이번 노희경 작가의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면 묻어두었던  삶의 질문들이 툭툭 던져진다. 바다 건너 제주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인데, 그들의 이야기 속에 내가 있고, 나와 얽힌 인연들이 있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들'의 블루스인가 보다. 

이정은과 엄정화가 친구라니, 극중 정은희와 고미란 말이다. 그런데 극중 인물에 집중하기 전에, 일찌기 젊은 시절부터 대표적 엔터테이너로 당대를 풍미했던 엄정화란 존재와, 우리에게 그 이름을 알리기 까지 대학로 연출에서 부터 마트 직원에 이르기까지 숱한 인생 역정을 겪으며 뒤늦게 그 이름을 알린 이정은이란 배우가 '친구'로 등장하는 '조합'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이정은 배우가 메인 주연을 하는 드라마에 엄정화란 배우가 친구로 잠시 들렀다 가는 시절이 오는 날도 있구나. 


 

얽힌 인연, 우정 
실존의 배우가 주는 감상과 함께, 극중 고미란과 정은희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시절, 정은희는 도시락도 못싸오는 가난한 집 아이였다.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던 은희를 미란이는 자기 집 승용차를 타고 지나며 구출해 줬다. 게다가 매일 은희를 위해 도시락을 두 개 씩이나 싸왔다. 둘도 없는 친구라며 '의리'를 외치는 은희와 미란, 하지만 세월이 흘러 다시 제주를 찾는 미란을 맞이하는 친구들은 미란과 은희를 '공주님'과 '무수리'라 농을 건넨다. 

보는 이들만이 아니다. 인연의 속내도 그리 간단치 않다. 제주에 도착한 미란은 생업에 분주한 은희에게 '그깟 생선'이라며 자신에게 시간을 내어주지 않음을 야속타한다. 그런데 그 말이 은희의 마음을 후벼판다. 아니, 그저 지금 미란이 던진 말 때문만이 아니다. 오랫동안 켜켜히 쌓아왔던 미란에 대한 은희의 감정들이 자꾸 은희의 마음 위로 솟구쳐오르기 때문이다. 

'친구'란 우리가 살면서 맺는 대표적인 '인연'의 형태이다. 가족이 가족이라서 들여다 보면 가장 많이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이기가 십상이듯이, 친구 역시 친구이기에 서로에게 불평등한 관계의 상흔을 내재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저마다 우정의 이름으로 관계맺은 존재들을 되돌이켜 보면 그 시간만큼 그 안에 부유하는 복잡한 감정들이 느껴질 것이다. 


 

가진 것이 없어 늘 '자존감'에 상처를 입기 쉬웠던 은희에게 미란 역시 그런 존재였다. 미란은 은희의 어려운 처지를 배려했지만 그 상처받기 쉬운 마음까지 배려해주진 못했다. 엔터테이너 엄정화처럼 어릴 적부터 이쁘고 사람들의 주목을 쉬이 받던 미란은 도시락을 두 개 싸오듯 착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생사를 걱정해 달려온 미란의 마음을 사람들과 내기 꺼리로 삼을 만큼 자기 중심적이기도 했다. 은희는 그런 미란이 한없이 고마웠지만 동시에, 그런 미란이기에 늘 상처받았다. 내 맘같지 않은 '친구', 그 친구의 '다름'이 나에게 '내상'을 입힌다. 

거기에 우정의 길을 엇갈리게 하는 건 무엇보다 '존재의 양식'이 아닐까. 은희가 폐경에 이르도록 가족들 뒤치닥거리하느라 여전히 '미혼'인 것과 달리, 미란은 결혼을 세 번이나 했다. 그런 미란이 딸과의 졸업 여행을 뒷전으로 하고 제주에 왔다고 하자,  미란은 '자기 밖에 모르는 년'이라며 자기에게 했듯이 그렇게 딸에게도 했으리라 지레 짐작한다.

은희가 전하지 못한 맘을 대신한 일기장으로 결국 터질 게 터지고야 만 두 사람, 미란이 떠나고 옥동이 말한다. 결혼을 세 번이나 한 그 의지가지 없는 심정을 어찌 알겠느냐고. '세 번이나'인 처지의 속내를 은희 역시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깟 생선'이라는 말도, 은희를 무시한 게 아니라 너무 일만하는 은희가 안타까워 던진 말이었다고 한다. 그 시절 은희가 먹던 도시락을 쓰레기통에 던진 미란의 속내도 들어보면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상처'받기 바빴던 은희는 그런 사정을 들여다 볼 '여유'도, '엄두'도 나지 않았다. 


 
 '시절인연'이란 말이 있다. 그저 한 시절 함께 한다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불교의 업과 인과응보에 기인하여 시기가 되어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깊은 뜻을 지니고 있었다.  '인연'의 때가 있음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미란과 은희의 '시절인연'은 그렇다면 언제일까? 이미 지나가고 있는 것일까? 친구란 이름이었지만 그 속내는 빚갚음이라 여겨졌던 관계는 '우정'일까? 

친구들이 '무수리'라 할 때마다 '내 무슨 무수리냐'는 그런데 은희  자신이 미란과의 관계를 그렇게 '규정'하며 지내왔던 건 아닐까. 어린 시절 가난한 자신을 보아준 그 '고마움'에 미란을 친구란 이름의 빚쟁이로 여기며 지내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 달음에 달려간 은희를 '만만한 친구'라 할 때 그런 미란에게 따지는 대신 입술을 꾹 다물고 돌아선 은희의 마음이 정작 '친구'가 아니라, 채무자의 그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우리 역시 '우정'을 빌어 '채무'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지는 않을까? 

미란과 은희의 이야기는 은희의 묵은 상처를 깨닫게 되는 미란의 이야기인 듯 보인다. 하지만 그 미란의 이야기를 통해 정작 작가가 하고자 하는 건 상처로 겹겹이자신을 감싼 은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나이가 이만큼이 되어도 여전히 은희에게는 어린 시절 자신이 받았던 상처가 아리다. 극중 종종 은희는 미란을 처음 만났던 시절의 아이로 등장한다. 단지 '추억'일 뿐일까. 아니 어쩌면 '은희'도 그렇고, 우리도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그 시절의 '상처받기쉬운 아이'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첫사랑 앞에서도 거침없던, 제주도 수산 시장을 휘젓던 은희가 정작 미란 앞에서는 자꾸 위축된다. 관계를 왜곡하는 건 '그 시절에 멈춘 나'다. 

일기장 사건으로 인해 미란과 은희는 비로소 가난한 어린 시절의 채무 관계를 청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채무' 관계 속에는 이제는 '별로가 된' 미란에 대한 은희의 감정적 우월함도 숨겨져 있다. 변변찮고 자기 중심적이라며 낮잡아 보던 미란의 진심을 서늘하게 깨닫게 된 은희, 늘 한 수 접어주던 은희가 입술을 꾹 다물고 뒷걸음치는 대신 따지러 간다. 비로손 은희는 '무수리'의 마음에서 한 발 나와 미란의 친구가 된다. 무덤으로 들어갈 뻔한 인연을 '재생'시킨 것이다. 





by meditator 2022. 5. 28. 10:20

황망하다. 
이 말이 제일 적당할 듯하다. <나의 해방일지> 공식 홈페이지를 보면, 등장인물 관계도에는 어머니 곽혜숙 씨는 나와있지만, 정작 한 사람씩 나오는 '소개'에는 어머니가 없다. 묵묵히 일만 하는 아버지, 그리로 날마다 힘들어 하면서도 출퇴근을 반복하는 염씨네 삼남매가 돌아오는 집, 그 집의 일부같던 어머니, 이경성 배우가 분한 어머니는 그렇게 작품의 배경같은 존재였다.

그런 어머니가 싱글대디를 만난다는 딸이 걱정되어 만나고 온 날 저녁 세상을 떠났다. 13부에 이르르도록 변변치않은 자식들에 버거운 살림살이로 인해 늘 미간에 갈짓자를 그리고 지내던 어머니가 활짝 웃었다. '지랄 맞은' 성격이 탈이라며 미덥지 않아하던 큰 딸이 만난다는 조태훈(이기우 분)의 선한 인상을 본 어머니의 표정이 모처럼 펴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시장에 들른 어머니는 내색을 하지 않던 막내 딸이 구씨가 떠나고 길거리에서 엉엉 울었다는 말을 전해듣고 그 딸처럼 엉엉 울며 돌아왔다. 늘 삶에 치이던 어머니가 처음으로 '짜증'이 아닌 감정을 드러내 보인 날, 그게 어머니의 마지막 길이었다. 왜 이렇게 땀이 날까 하던 어머니의 푸념은 시청자들조차 스쳐지나간 대사였고, 이제는 정말 힘들어서 못해먹겠다며 밭을 팔자는 어머니의 결심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어머니의 자리 
안타깝게도 우리는 어떤 존재의 소중함을 그 '부재'로 인해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박해영 작가는 어머니 곽혜숙 씨의 '죽음'을 통해 염씨네가 '유지'가능했던 '접착제'로서 어머니의 자리를 말한다. 

메이킹을 보면 손석구 배우가 말하는 '구씨'를 대변하는 것들에 '고구마순 무침'이 등장한다. 염씨네 식구들과 함께 밥상을 받은 구씨가 반찬으로 나온 고구마순 무침을 맛있게 먹자 어머니 곽혜숙 씨는 따로 '고구마순 무침'을 싸서 보낸다. 

고구마순 무침을 해본 사람은 안다. 그게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지. 고구마를 키우는 밭에서 나온 줄기를 손톱이 시커멓게 되도록 까야한다. 그리고 그걸 다시 연해지도록 삶아서, 무치거나 볶아야 만들어 지는 게 한 그릇의 고구만 순 무침이다. 한 아름의 고구마순 묶음이 겨우 한 보시기의 고구마순 무침이 된다. 밥상에서 구씨가 잘 먹는다고 또 보낼 만큼의 고구마순 무침을 만들기 위해 어머니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을까. 

어디 고구마순 무침 뿐일까. 식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밭일을 하고 난 밥상에 닭이 오른다. 갈비를 뜯기도 한다. 그 힘든 밭일을 함께 한 어머니가 만든 음식들이다. 눈썰미가 있는 시청자들은 눈치챘겠지만 늘 염씨네 집 밥상은 풍성하고 넉넉했다. 어디 염씨네 뿐일까. 창희의 동네 친구들은 제 집드나들듯 어머니의 음식을 축냈다. 당연한 듯 어머니가 해댄 그 음식들로 창희와 친구들은 만찬을 즐겼다. 그 흔한 '라면' 먹는 장면이 <나의 해방일지>속 염씨네에서는 등장한 적이 없다. 

장례를 치루고 돌아온 가족들이 끼니를 마련한다. 어머니 혼자 해내던 일을 이제 가족들이 함께 나서 하는데도 밥상이 초라하다. 무거운 김치통을 들어올리던 맏딸 기정이 토해내고 만다. '엄마는 과로사야'라고. 

구씨에게 자신의 가족을 소개하며 미정조차 '아버지'가 불쌍하다고 했다.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 눈에도 묵묵히 일만 하는 '아버지' 염제호 씨가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 앞에서 '차를 사고 싶다'는 아들 창희가 철딱서니없어 보일만큼. 하지만 창희의 '차를 사고싶습니다'라는 '고소원'은 단칼에 거부된다. 아버지의 분노? 분노하는 아버지 옆에는 창희에게 눈치를 주며 어쩔줄 모르는 어머니가 있었다. 

그런 아버지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가족들을 위해 차가 있어야 되겠습니다란 창희의 제안을 대번에 수락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부재한 가족간의 '단합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그건 '미봉책'임을 드라마는 말해준다. 드라마는 결론부터 말한다. 어머니가 떠난 자리, 염씨네도 더는 가족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고. 3년만에 돌아온 구씨를 맞이한 건, 사라진 '염씨네'이다. 

 

 

가정을 메꾼 '접착제', 어머니
아버지는 말한다. 가정을 지탱하는 건 자신인 줄 알았다고. 당미역에서도 다시 마을 버스를 타고 내려서 다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되는 곳, 그곳에서 고집스레 싱크대 공장을 운영하며 텃밭을 가꾸는 아버지 염제호씨, 그는 그렇게 자신의 그늘 아래 가족이 살아간다고 믿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다 큰 자식들이 꾸역꾸역 하루 다섯 시간이 걸리는 출퇴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건, '아버지'라는 실체를 가능하도록 만든 건 '어머니'였다. 가부장으로서의 '아버지'라는 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자식들을 닥달하고 자신의 한 몸이 결국 '과로사'로 무너질 때까지 가정이라는 성긴 울타리를 꼭꼭 메웠던 건 어머니였다고 이제야 드라마는 전한다. 마치 '집게'처럼 어머니의 '해방'은 결국 부재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어머니의 부재로 혼란스러운 가족들을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염씨네를 유지해왔던 어머니 곽혜숙의 존재를 깨닫는다. 한여름에도 에어컨마저 마음대로 켜지 못하는 집이지만, 그들이 돌아와 편히 누울 수 있도록 먹이고, 입히는 그 익숙한 편안함을 마련하기 위해 어머니의 무릎뼈는 쇳조각이 대신해야 했다. 

빚보증으로 모든 걸 잃고도 우직하게 싱크대를 만들며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 있도록, 공장의 보조로, 텃밭의 일꾼으로, 다시 가정의 안주인으로 그 모든 빈자리를 메워 날아가버릴 뻔했던 '가장'과 '가정'의 위기를 견뎌냈던 것도 결국 어머니였다. 

구씨가 좋아하던 고구만순을 아끼지 않고 보내주었던 건, 결국 과로사로 종착역에 이르고야 말 어머니의 고된 일상에 잠시나마 숨쉴 틈을 그가 열어주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런 구씨가 떠나고, 다시 어머니에게 구씨의 무게까지 얹혀졌을 때, 어머니는 앞서가는 승용차를 쫓다 길가로 빠져버린 트럭처럼 결국 주저앉고 만다. 어머니의 육신은 어머니의 의지를 더는 담아낼 수 없었다. 

침묵으로 자신의 세계를 고집하는 아버지로 부터 비롯된 염씨네 일가, 그 식솔인 자식들에게 때로는 잔소리와 종주먹을 들이대며 그 아버지의 세계로 부터 흩어져 나가지 못하도록 독려하던 어머니가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두려움을 알았는지, '차'까지 샀지만 '더 화목해질' 거라는 창희의 장담이 무색하게 '가족'은 사라져간다. 어머니의 부재, 이는 곧 염씨네 아이들의 '이유기'이다. 이제 그들은 더는 온몸으로 가족이라는 구심력을 향해 진력을 다했던 어머니의 '집'이라는 젖줄이 사라진 세상에 던져졌다. 




by meditator 2022. 5. 26. 22:50

'최선이었을까?'
박지혜 선생님은 이렇게 되묻곤 한다. 2020년 봄 코로나로 인한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는데 보름 가까이 한 학생이 출석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부모에게 알리자 아버지는 '내가 우리 아이를 죽이면 되겠느냐'며 폭언을 뱉었다. 지인을 통해 알아보니 오랫동안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했다. ' 저 여기서 나갈 수 있게 해주세요', 아이의 간절한 부탁, 아이는 분리조치됐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학대 아동'에 대한 '메뉴얼'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맨몸으로 나오다시피한 학생, 이후 원활한 학교 생활을 위한 지원금조차 법정대리인인 부모의 동의없이는 받을 수 없었다. 아동 학대 신고 이후, '분리 조치' 외에 정작 학대 아동에 대한 사회적 조치는 전무했던 것이다. 

게다가 학대를 피해 아이를 품어주어야 할 시설은 또 다른 스트레스를 주었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아이, 그런데 가정은 이제 아이를 거부했다. 자신이 버려졌다고 좌절한 아이는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학대'당하는 아이를 위해 사회가 해주어야 하는 건 안전한 곳에서 평범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현실은 여의치않다. 6부작으로 방영된 다큐프라임 <어린 人권>의 5,6부는 지금까지 논의되지 않았던 '아동 학대'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펼친다. 학대 아동을 위해 우리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안성희 검사는 말한다. 자신들의 판결로 세상의 박수를 받는 건 쉽다고, '엄벌에 처하겠습니다'라 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고. 안맞고 사는 것만이 아니라, 부모의 '학대'가 없는 가정에서 아이가 평범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진정 '학대'에 대한 궁극적인 지향이 되어야 한다고 안검사는 주장한다. 



 

'학대' 이후
그런 면에서 전안나 판사는 학대당하는 아이를 가정에서 '분리'하는 대신 가해자인 부모를 보호 시설에 위탁하는 '감호 위탁'판결을 내렸다. 잘못은 부모가 했는데 아이가 기존의 집, 기존의 학교로 부터 분리되는 현행의 제도, 그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른 보호자의 '보호'가 가능하다면 아이에게 '가정'의 울타리를 지켜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가해 부모의 감호 위탁은 '가정'의 '관계 회복'을 목적으로 한 조치이다. 정상 가족, 혈연 가족 프레임이 강한 한국 사회,  '가정'이 우리 사회에서 기본 단위인 이상 가급적이면 그 '가정' 내에서 아동이 평탄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애써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활용되는 제도가 '위탁부모 제도'이다. 배은희 씨는 2015년 3월 한 살도 채 되지 않는 은지의 위탁 부모가 되었다. 아기가 오면 놀아주겠다던 작은 아이가 엄마, 아빠가 아기만 신경쓴다며 보내면 안되겠냐고 하던 고비를 겪으며 이제 8년 차, 종종 자시늗ㄹ이 '위탁 부모'라는 사실을 잊고 지낸다고 한다. '시설'의 부작용이 대두되며 가급적 가정과 같은 조건에서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2003년부터 실시된 '가정 위탁'제도이다. 

'한정된 입양'이라고 말하는 은희씨, 돈은 얼마나 받는 거야라는 세상의 따가운 시선보다 언젠가는 '자신의 삶보다 귀한 아이'와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더 힘들다고 말한다. '얼마를 받아야 할 수 있을까요?'라며 반문하는 은희 씨, 가정 환경조사, 부모 교육 등 엄격한 과정을 거치지만 정작 서류상 '동거인'인 아이의 법적인 보호자 역할은 '친부모' 몫이라 제도적 어려움을 겪곤 했다고 한다. 

사회가 '부모' 역할을 
그런데 그 '시설'조차 시한이 있다. 최근 24살까지 연장은 됐지만, 집, 직장 등 그 모든 것들을 홀로 해내야 하는 아이들, 그래서 그 '생소'한 사회적 경험 앞에 사기 사건을 당하거나, 범죄 사건에 휘말리기가 쉽다. 겨우 일자리를 구해도 오래 일하기가 쉽지 않다. 보육원 출신이라는 피해의식, 자격지심이 아이들 스스로 세상으로 부터 자신을 격리하도록 만들기 십상이다. 시설에서 자란 아이들 중 50%가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국가가 언제까지 책임져줘야 하나?' 이런 의문에 김성민 씨는 반문한다. '부모가 언제가지 필요하세요?' 김성민 씨는 안동초등학교 앞에서 발견되어 3살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랐다. 18살 때까지 머문 곳, 그러나 '가족, 안전, 행복', 그 어느 것도 보장해주지 않던 '시설'은 '집'은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그래서 김성민 씨는 시설에서 자란 아이들이 건강한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자리를 만들었다. 아이들 스스로 '식물'을 돌보며 일도 하고, 상처받은 마음을 회복하는 사회적 기업 '브라더스'이다. 

법저에서 호통치기로 유명한 소년범의 대부 천종호 판사는 '가정 형태'의 '사법적 그룹홈' 시스템을 만들었다. '어떤 아이들이 재판까지 올까요?' 부모들이 있는 아이들, 부모들이 부모 역할을 하려고 하는 아이들은 웬만하면 재판에 오기 전에 '구제'가 된다고 한다. 통계적으로 재판까지 오는 아이들 중 70%가 결손가정, 저소득층 가정, 부모가 '보호'해줄 수 없는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때로는 한 아이를 1년 동안 법정에서 7번이나 보기도 했다는데, '보호'받지 못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아이들, 그 악순환을 막기 위해 천판사는  '사법형 그룹홈'을 마련했다. 가정형태로 이루어지는 그룹홈, 아이들에게 '집'의 경험을 주고자 했다. 경남에서 시작되어 전국 13곳에서 100 명의 아이들이 '집같은 공간'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중이다. 

 


  ​​​​​​​

학대 사후 조치보다, 예방이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학대'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사회적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큐가 주목한 건 미 콜로라도 대학의 데이비드 올즈 교수가 시작한 가정방문 프로그램(Nurse-Family Partnership)이다. 

출산전부터 아이가 24개월이 될 때까지 미혼모나 취약 계층의 엄마가 아이를 잘 돌볼 수 있도록 간호사가 방문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임신은 인생의 큰 전환점이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는 임신과 출산은 엄마는 물론, 아이에게 큰 부담이 된다. 가정 폭력의 출발이 되기도 한다. 

놀랍게도 장기 추적 결과, 이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은 아이들은 보살핌을 잘 받았다는 만족감이 이해와 공감 능력을 높였고, 이는 학습 능력 향상까지 이어졌다. 무엇보다 아동 학대와 방임이 48%나 감소했고, 범죄와의 연루도 줄었다. 

우리나라에서도 2012년부터 시행된 이 제도, 단지 간호사가 방문하여 이야기만 나누는데 정말 '효과'가 있었을까? 벽돌로 뒤통수를 내리친 엄마, 어린 시절 학대의 경험을 가진 하은 엄마 지영 씨는, 아이를 낳고서도 여전히 '학대'하는 부모로 인해 모든 걸 놓아 버리려 할 때 찾아온 간호사는 다독이며 보살펴 주었다. 엄마 노릇에 서툴거나 거부감을 가진 엄마들을 독려한다. '덕분에 살았다'고 말하는 지영 씨, 학대의 '사후약방문'이 아닌 안정된 가정과 좋은 부모를 향한 '예방책'으로의 첫 걸음이다. 

by meditator 2022. 5. 25. 21:03

'직장 생활을 오래 했더니.....'
선배는 답답한 듯이 말했다. 마치 메뉴얼이라도 있는 것처럼 상황에 맞춰 정해진 표현을 하던 분이었다. 그런 분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이 오자 막막해하셨다. 소향기 팀장을 보니 그 선배가 떠올랐다. 

jtbc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주인공 염미정의 해방클럽에 신입회원이 들어왔다. 그간 염미정을 비롯하여 박상민 부장, 조태훈 과장 등 회사 내 조직에 적응을 못하는 것같은 이들 세 사람에게 꾸준히 회사 내 동아리 활동 참여를 독려하던 행복지원센터 소향기 팀장이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미소를 띠며 이들 세 사람을 독려하던 그녀, 그랬던 그녀가 세 사람이 만든 '해방 클럽'을 한번 참관한 후 스스로 '해방 클럽'의 신입회원 신청을 하였다. 

드라마가 시작한 이래 행복지원센터 팀장으로 익숙한 소향기 씨의 표정, 그런데 그녀가 말한다. 이제 다른 표정을 지으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고. 행복지원 센터 팀장에 걸맞는 표정을 지어오던 그 표정이 이제는 상갓집에 가서 그녀를 곤란하게 할 만큼 '혼연일체'가 되었다. 

 

 

해방은 어떻게 오는가
이제는 <나의 해방일지>가 아니라, <나의 추앙일지>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등장 인물들의 '연애사'가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극 초반 우중충하게 출퇴근만 한다며 돌려섰던 시청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있는 중이다. 그런 가운데 조용히 스쳐지나가듯 등장한 소향기 팀장의 장면은 왜 이 드라마가 여전히 '추앙일지'를 넘어 '해방일지'인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페르소나(persona)라고 한다. 그리스 연극 속 '가면'을 뜻하는 이 말을 칼, 융은 우리가 사회 생활을 하며 거기에 걸맞는 '역할'을 해나가는 모습으로 정의한다. 단적으로 '~답게'이다. 학생은 학생답게, 직장인은 직장인답게, 엄마는 엄마답게, 문제는 저마다 다르게 태어난 사람들이기에 사회적으로 주어진 이 '역할'에 맞춘 '페르소나'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괴리'를 느끼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건 '내 자신(self)'과 '페르소나'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지만 사는 게 어디 그런가 말이다. 

조직 부적응자로 행복 지원센터를 들락날락했던 박상민, 조태훈, 염미정 세 사람으로 말하자면 직장이 요구하는 '페르소나'에 떨그덕거리던 사람들이었던 셈이다. 남들 다하는 회사 내 동아리에 드는 것도 마다하고, 사람들이랑 편하게 어울리는 것도 쉽지 않았던 세 사람, 떠나는 구씨가 염미정에게 이젠 '추앙', '해방', 이런 거 하지 말고 '평범'하게 살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미정은 그런 구씨를 붙잡는 대신, 서운하다는 말로 두 사람의 관계에 방점을 찍는다.  자신을 '평범'하다 하지만 '유모차를 끄는' 대신 아이를 업어 키우겠다는 미정,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구씨를 한 살 배기 아이처럼 업어주고 싶다는 미정은 우리 시대의 '페르소나'와는 꽤나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인다. 

어쩌면 박상민, 조태훈, 염미정 이들 세 사람의 '해방 클럽'은 일찌기 세상이 요구하는 '페르소나'를 쓰고 살아가기 버거웠던 세 사람의 '해방 선언'이었는지도. 그런데 그런 세 사람 앞에 '신인 회원'으로 등장한 소향기 씨는 그런 세 사람과 전혀 반대의 지점에 서있는 사람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페르소나에 너무 충실히 살다보니 그 페르소나가 자신이 되어버린 사람, 그래서 이제 그 '가면'을 벗으려 해도 벗겨지지 않는다는 사람, 남들의 '행복'을 열심히 지원하다보니, 정작 자신은 '미소 가면'이 달라붙어 버린 사람, 그 사람에게 '해방'은 웃고 싶지 않을 때 웃지 않을 수 있는 얼굴 근육을 가지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박상민, 조태훈, 염미정, 그리고 소향기라는 양 극점의 그 어느 지점에서 서성이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때로는 자신의 어설픈 페르소나를 원망하고, 또 때로는 어느덧 자신이 되어버린 '페르소나'로 인해  갑갑함을 느끼며 말이다. 드라마의 시작부터 주구장창 출연진들의 출퇴근 길 모습을 비추던 드라마, 그 '출퇴근'에 공들인 시간은 바로 이 드라마가 길바닥에서 자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라 보여진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저마다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들을 최선을 다해 해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을 드라마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보여준다. 몇 시간씩 출퇴근을 하며 주인공 염미정, 염기청, 염창희를 비롯하여, 그들의 아버지 염제호, 어머니 곽혜숙, 그리고 또 다른 등장인물들 모두 참 열심히 일을 하며 살아간다. 젯상 앞에서 고된 노동으로 무너진 관절로 절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디 일만 하나, 역할에 걸맞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애쓴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은 이유이다. 

'해방'은 그렇게 애쓰며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위한 '헌사'이다. 이미 당신들은 충분히 애쓰고 살아가고 있으니, 더는 자신을 다그치지 말라고. 위로하지도, 그렇다고 조언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여 주겠다는 '해방 클럽'의 강령은 바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대로의 '긍정'을 뜻하는 게 아닐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저 가끔 만나 식사가 한 끼 나누던 선배가 '존경'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던 건, 선배가 직장 생활로 인한 '페르소나'가 어느덧 자신이 되어버린 모습을 고민하던 그 즈음이었다. '그의 과거와 현재와.....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이라는 정현종의 시 <방문객>처럼 말이다. 자신을 잃어버릴 만큼의 시간이 그 선배를 연륜이 넘치는 인생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저어'하던 소극적인 염미정은 구씨를 '추앙'하고, '추앙'당하며, 그리고 '해방 클럽'을 통해 자신을 찾아간다. 미정의 해방은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말처럼 그냥 그대로, 생긴대로 미정이 답게 사는 것을 당당하게 가슴펴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과연 소향기 팀장의 '해방'은 어떤 모습이 될까? 아침 방송의 김창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지나가듯 말한다. '가면' 몇 개 안쓰고 사는 사람이 어딨어요. 



by meditator 2022. 5. 21. 00:58

5월 16일 방영된 ebs 다큐 프라임에서는 대한민국 아동 100년의 시간을 조망했다. 백원이던 과자가 천오백원이 되었다며 속상해하는 아이들, 이제 그 아이들은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 선생님을 모르는 세대가 되었다. 대신, 유투브에서 초등학생들을 '잼민이'라며 비하한다며 불쾌해한다. '어린이'가 '잼민이'가 된 세상, 과연 방정환 선생님이 '나라의 자원'이 되어야 한다며 소중하게 여기라 했던 어린이는 '존중'받고 있을까? 

 

 

1923년 5월 1일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날'을 만들고, '어린이 선언문'을 선포하셨다. 선언문에는  '재래의 윤리적 억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인격적 대우를 허'하고 그들을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어린이'는 유상, 혹은 무상의 노동을 폐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윤리적, 경제적인 존중은 쉬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33년에 태어난 아동문학가 신현득 선생의 어린 시절은 '전쟁'으로 얼룩져 있다. 석유 대신 쓴다며 솔공이를 몇 관씩 따기 위한 '근로 봉사'가 일이었다. 50년대만 해도 동생을 업고 학교에 오는 누나들이 흔한 풍경이었다. 어린이의 노동을 폐하라던 방정환 선생의 말씀이 무색하게 우리의 '산업화'의 동력은 값싼 미성년자들의 노동력에 빚졌다. 6~70년대 여공 중 국민학교를 졸업한 비율은 불과 51%에 불과했다. 

1920년대에 18.5%이던 취학률은 1970년대에 비로소  90%에 도달, 의무교육의 본령을 완성했다. 7~80년대 어린이 공원, 어린이 세계 문학 등 어린이는 핵가족의 꽃이 되었지만, 그런 한 편에서 '혜영, 용철이 사건'처럼 국가가 돌보지 않는 '어린이'들의 인권과 복지는 그림자가 깊어져갔다. 또한 김영삼 정부의 531 교육 개혁 이래 우리 사회의 교육은 무한 경쟁의 그늘이 드리워져 갔다. 3인 가정이 점점 일반화되어 가는 오늘날 부모들, 특히 엄마들은 '아이'에게 집중한다. 전략적으로 '육아'에 집중하는 엄마들, 아이들은 '관리'당하는 존재가 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쁜 아이들, 방정환 선생님이 '어린이날'을 선포하던 그 시대와 시대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아이들에게 '해방'이 절실한 시대이다. 

 

 

우리 아이 잘 되라고 한 잔소린데
다른 의미에서의 '해방'이 필요한 이 시대의 아이들, 그 부모와 아이들의 '일그러진 관계'를 조망하기 위해 다큐 프라임은 '잔소리'를 주목했다. 다큐는 초등학생에서부터 고등학생까지 전국의 100명에게 '속마음'을 들었다. 5월 17일 방영된 <역발상 프로젝트 잔소리란 무엇인가>에서이다. 

'그렇게 공부할거면 학원은 왜 다니니?
'한심하다, 시간 약속도 제대로 안지키면 인생 망한다.'

부모들이 한 잔소리다. 이 '잔소리'에 아이들은? 한숨부터 쉰다, 지겹다, 아이들의 반응이다. 억양에서부터 다르다고 한다. 일방적이다. 때려박는 말투다. 내 인생을 포기당하는 것같은 잔소리에 어깨가 꺽인다. 잔소리를 퍼붓고 뒤돌아 설거지하는 엄마는 그 뒷모습에서조차 '거칠게' 감정을 쏟아낸다. 집 문 앞에 서면 긴장되고 떨린다고 한다.

물론 이런 아이들의 반응에 부모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100%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고. 하지만 연구는 다른 결과를 말한다. 잔소리를 듣는 청소년들의 뇌의 반응을 조사하니 부정적 영역이 높아지고, 이성적 판단이 떨어진다고. 정말 부모들은 사심없이 하는 '걱정'일까? 하지만 공부를 잘하면 '존중'받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부모들의 잔소리에 아이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의 의견에 부모들은 말한다.

'어디 따박따박 말대꾸야!'
'말대꾸 대회가 있다면 1등이겠다.'

부모의 잔소리와 아이의 말대꾸는 '창과 방패'와도 같다. 잔소리를 듣다 듣다 자신을 방어하려고 말했는데 말대꾸란다. 그런데 '말대꾸'는 양면적이다. 듣는 부모의 기분이 좋으면 '의견'이 된다. 하지만 듣는 부모의 기분이 나쁘면 '말대꾸'다. 

부모님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답을 들어야 잔소리를 끝낸다. 해명을 하면 변명이라, 핑계라 하고, 결국 원하는 건, '예, 알겠습니다'이다. 잔소리를 하며 화를 내는 엄마, 거기에 말대꾸를 한 아이, 엄마는 자신의 말을 끊었다고 화를 냈다. 집을 나가라 했다. '승복'해야 끝나는 권력 관계, 아이들은 점차 자신을 숨긴다. 

 

 

'말대꾸'는 어떤 대상에게 사용되는 용어인가? 다큐는 묻는다. '말대꾸'라는 용어 자체가 부모와 자녀 사이에 불평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제 아무리 핵가족이 되어도 어른과 아이가 되는 순간, 불평등한 상하, 수직 관계가 된다. 더구나 한국의 정서에서 '말대꾸'는 더욱 용인되기 어렵다. 

부모는 아이의 말을 듣기 보다, '금지'시킨다. 너 잘되라고 하는 '잔소리'니, 아이는 듣고 시인하며 반성하면 끝이나는 '언어적 관습'이다. 그런 부모의 '잔소리'에는 여전히 아이를 어리고 미숙한 존재로 보는 '편견'이 있다. 미숙한 존재에 대한 부모의 잔소리는 그래서 때론 '잔소리'를 넘어 '말상처'가 된다. 아이 잘되라고 시작한 잔소리가, 아이가 스스로 잘할 자신마저 없어지도록 '상흔'이 되어 남는다. 

'반격'을 하던 아이는 끝나지 않는 부모의 '잔소리' 앞에 결국 입을 닫는다. 하지만 결코 그 '속내'가 부모의 '잔소리'를 승인해서가 아니다. 결국 거듭되는 잔소리, '말대꾸'를 용인하지 않는 수직적 관계 앞에 아이는 입을 닫고 관계는 더 멀어져만 간다. 

그런데 그 '너 잘되라고' 잔소리를 하는 부모들은 정말 아이들에 대해 잘 알까? '자녀 탐구 영역', 자녀들에 대한 문제를 푸는데 사소한 것에서조차 아이를 모른다. 모르는 것도 모르는 것이지만, 자신의 기준에서 아이를 판단하고 있음이 시험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모르는 아이들에 대해 '아는 체'를 하는 어른들, 그런 어른들의 '잔소리'가 설득력이 있을까? 

아이들이 보는 부모는 어떨까? '우리 엄마는 개'예요', 겉모습은 강아지처럼 귀엽지만, 화날 때는 사냥개같아서, '개'란다. 때로는 거침없어 달려가는 '말'같단다. 아이들인 보는 부모는 이중적이거나, 맹수같다. 부모들은 60 vs. 40이라며 자신을 변호하지만, 아이들에게는 90%가 잔소리다. 핵가족이 되고, 아이의 미래가 전적으로 부모의 '능력'에 달려있게 된 경쟁 사회에서 부모들의 '불안'이 잔소리로 표출된다. 또한 어린이날 100년이 되었어도, 방정환 선생님이 말씀하신 아이들에 대한 진정한 '존중'이 안되서이다. 존중받은 경험이 부재한 채 '잔소리'에 휩싸여 자라난 아이들, 그 아이들의 '미래'는 어떨까? <어린이라는 세계>의 김소영 작가는 말한다. 작다고 조금만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by meditator 2022. 5. 18. 20:11

Are you happy?
당신의 답은 어떤가? 이 질문에 즉답을 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아마도 <닥터 스트레인지>의 스티븐처럼 잠시 텀을 두고 답을 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 짧은 텀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다. 나는 행복한가?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행복이 뭐지?

 

 

6년 만에 단독 시리즈로 돌아온 두 번째 스트레인지 시리즈는 이 단순하면서도 추상적인 명제를 던지며 시작한다. 닥터 스트레인지로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지만 사랑하는 연인이 그의 곁을 공식적으로 떠나는 날, 그래도 스티븐(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은 연인 크리스틴(레이첼 맥아담스 분)의 질문에 행복하다 답한다. 이 정도면 행복하다는 걸까? 아니면 여전히 크리스틴 앞에서 스티븐은 예의 자존심을 앞세우는 걸까? 그도 아니면 '행복하지 않은 자신을 인정하기 두려운걸까?

하지만 행복하다는 스티븐과 달리, 행복하지 않은 한 사람이 있다. 사랑하는 이와 가정을 꾸리고, 그 사랑하는 이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들과 함께 평범한 행복을 누리고 싶었던 한 사람, 완다(엘리자베스 올슨 분)이다. 그런데 그녀가 사랑하는 비전, 비브라늄과 마인드 스톤이 결합된 완벽한 인공체는 타노스의 공격에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사랑하는 이의 상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완다는 그와의 사랑을 '환타지'를 통해 구현한다. 바로 ott 시리즈로 방영된 <완다비전>이다. 하지만, 완다가 꿈꾸던 가정은 '환타지'답게 허구였음을 드러내고 결말을 맞는다. 그리고 그 파멸 끝에 완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마녀 '스칼렛 위치'로 확인한다.

한 시리즈 내내 몰입했던 자신이 만든 허구의 '해피홈'에 대한 열망을 완다, 스칼렛 위치는 이제 '멀티버스'를 통해 실현하려 한다. 다중우주의 그 어느 곳 여전히 '존재(?)하는 아이들을 찾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를 찾아온 '멀티버스 이동'이 가능한 아메리카 차베즈(소시 고메즈 분)를, 손에 넣고자 하는 것이다. 

이제는 스칼렛 위치가 된 완다의 욕망에 닥터 스트레인지는 반대한다. 그런 닥터에게 완다는 반문한다. '당신은 규칙을 어기고 영웅이 되었고, 나는 그것을 하고 적이 된다?' 그건 공평하지 않다고.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에서 스파이더맨의 청으로 멀티버스의 대혼돈이 문을 열어제친 건 이미 닥터 스트레인지였다. 닥터는 경우가 다르다고 말하지만 행복을 향한 완다의 흑화된 열망을 막을 수는 없다. 

'모성'을 앞세운 완다의 맹목적인 '행복론'에 닥터 스트레인지의 '정의'가 마주선다. 그런데, 그 '정의'도 고민이 된다. 영화가 시작되자 마자 등장한 닥터 스트레인지 꿈 속에서 등장한 또 다른 멀티버스 속 '디펜더 스트레인지'는 '정의'의 이름으로 멀티버스의 여행자 아메리카 차베즈를 소멸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또한 지구 838의 닥터 스트레인지는 '정의'의 이름으로 금단의 영역인 '다크 홀드'에 손을 대고, 그것으로 타노스를 막으려 했다. 그로 인해 서로 다른 두 우주가 충돌하는 '인커전'을 초래햇다. 그래서 지구 838의 비밀결사 조직인 '일루미나티'는 닥터를 처형하고, 허울좋은 동상만을 남겼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멀티버스'의 균형을 파괴하는 스칼렛 위치, 그런 스칼렛 위치를 막기 위해 멀티버스의 여행자를 제거하려는 다른 차원의 닥터 스트레인지, 그리고 '정의'의 이름으로 멀티버스의 대혼란을 일으킨 또 다른 차원의 닥터 스트레인지, 그런 저마다 다른 행복과 정의라는 혼돈의 '멀티버스'는 달리는 기차 앞에 있는 한 사람을 두고 '정의'의 방식을 모색했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 속 '멀티버스'의 대혼란은 여전히 정의의 방식과 실천에 있어, 그래고 개인의 자유와 그 실현 방식에 있어 '혼돈'을 겪고 있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은유'로 다가온다. 

 

 

아는 사람만 알게 되는 멀티버스의 세계관 
<닥터 스트레인지; 대 혼돈의 멀티버스>는 호불호가 갈릴 수 밖에 없는 영화라 보여진다. 이미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마블의 멀티버스 세계관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스칼렛 위치의 습격으로 카마르 타지가 처참하게 파괴되고 완다, 스칼렛 위치를 막기 위한 '비샨티의 서'를 구하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와 난데없이 닥터의 세계에 등장한 멀티버스 여행자 아메리카 차베즈는 '멀티버스'의 여행을 떠난다. 

때로는 흑백으로, 때로는 에니메이션과 같은 다중 우주의 파장을 거쳐 도착한 지구-838, 이 숫자는 다중 우주가 최소한 838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차원을 달리한 그곳 지구에는 또 다른 스트레인지들이 있다. 이미 그의 연기력만으로 캐릭터를 특화시키는데 발군인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분한 여러 차원의 스트레인지들. 그들은 스트레인지 특유의 일관된 자존감을 넘어 자만심에 가까운 캐릭터적 특징과 각 차원별 다채로운 프리즘의 색채를 곁들여 다중우주론을 설득한다. 

우리가 사는 단일한 시간, 단일한 공간을 우주로 확장시킨 '어벤져스'까지는 이미 <스타워즈>이래 익숙한 환타지적 공간이기에 수월했다. 이미 전작의 시리즈로 익숙한 배우들의 스파이더맨이 알고보니 멀티버스 속 다른 차원 속 스파이더맨으로 등장하는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까지도 그러려니 했는데, 지구 838 정도에 이르면 보는 이에 따라 '멀티버스'에 대한 피로감이 충분히 느껴질만한 설정이다. 

무엇보다 <완다비전>, <왓이프>, <로키> 시리즈까지 마블의 다른 시리즈에 대한 '배경 지식'이 필수라고 하듯이, 이즈음 마블 시리즈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그 전체 세계관과 각 시리즈에 대한 사전 인지가 필수가 되고 보니, 마블 세계관의 충실한 독자가 아니고서는 닥터 스트레인지 속 다채로운 설정들이 난해하거나 부담스럽기 까지 할 수 있을 듯 싶다.

일찌기 영국 미니시리즈 <닥터 후>이래 멀티버스를 영접한 기자에게 애니메이션<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속 멀티버스는 '신선'한 설정이었지만,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즈음에 이르르니 시리즈를 이어가기위한 '설정'의 피로감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채로운 멀티버스의 설정과 그 세계를 오가며 혼란을 발생시키고, 그 혼란의 막으려고 애쓰는 완다와 닥터 스트레인지의 대결을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원론적인 질문이다. 

인간의 가장 본원적인 '모성'을 통해 들춰낸 '행복'에 대한 질문, 무한질주하는 행복론에 또 다른 맹목적인 '정의'가 제동을 건다. 하지만, 과연 세계 평화를 넘어 '멀티버스'의 평화를 위해 한 생명의 희생은 정당한가라고 다시 영화는 질문을 건넨다. 어쩌면 답은 쉬이 얻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 계속되는 다중 우주의 충돌이 빚어내는 인커젼처럼,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계속되어야 할 숙제일 듯하다. 아니 한바탕 멀티버스의 회오리가 휩쓸고 간 후 'are you happy?'의 우문에 지금 여기서 나의 할 일을 할 뿐이라는 웡의 현답이 '답정너'일지도 모르겠다. 




by meditator 2022. 5. 12. 22:09

2021년 1월 8일 63년만에 민법 915조 자녀 징계권 조항이 삭제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학대'가 한 해 3만 9백여 건에 이른다. 하루 85명의 아이들이 '학대'당하고 있다. 아이들을 '학대'하는 이의 82%는 부모이다. 부모이기 때문에 쉽게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폭력',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ebs 다큐 프라임이 <어린 人권>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자신을 신고한 엄마 -아동 학대 자진신고 1년의 기록 
'저도 제 자신이 무서워요', 여기 스스로 경찰서로 걸어들어가 '아동 학대'를 자진신고한 엄마가 있다.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엄마와 아이가 있다. 11살, 아들을 혼자 키우는 엄마는 회사를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온다. 집 문을 열자 달려드는 세 마리의 개들, 그 뒤로 쭈볏거리는 아이가 있다. 

아이는 엄마가 오기 전에 빨래도 하고, 숙제도 해놓고, 청소도 하지만 지친 엄마의 눈에는 그저 어질러진 집이고, 제 할 일을 제대로 해놓지 않은 아들일 뿐이다.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너는 엄마, 엄마 주변에서 눈치를 살피며 빨래 너는 걸 도우려는 아이, 하지만 엄마는 그런 아이가 외려 걸치적거린다. 결국 터져나오는 짜증, 아이는 바짝 쫄아붙는다. '언제 불똥이 튈지, 진짜 많이 무서워요.'

시작은 훈육이었다. 8살 무렵 엄마의 지갑에 손을 댄 아들, 그런 아들의 버릇을 고치겠다고 시작했는데, 자진신고한 경찰서에서 '학대가해자'가 된 자신을 발견하고 엄마는 눈물을 쏟는다. '내 아들'이라는 '편안한 존재'가 어느덧 '만만한 존재'가 되어 엄마의 '분노'를 받아내고 있었다.

엄마도 노력한다. 상담도 받고, 아들을 때리던 도구도 함께 버리고, 대화도 하려 한다. 하지만 어릴 적 연탄집게로 딸을 때리던 친정 엄마의 등장처럼 엄마 주변의 상황이 급변하면 엄마는 '분노'는 다시 고스란히 아들에게 향한다. 결국 '아동학대 즉각 분리 제도'에 의거 아들을 '학대'당하는 집으로 부터 '구출'했다. 

'엄마라는 가면을 쓴 악마'라던 아들, 엄마 생각은 나지 않지만 강아지들 때문에 집에 가고 싶다던 아이,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아이는 전화해 보고 싶다고 한다. '무서운 걸까? 보고싶은 걸까?' 유일한 보호자이자, 자신을 학대한 엄마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에 혼란스러워한다. 

'학대'는 아이에게 감정적 트라우마만을 남긴게 아니었다. 학교 생활에 제대로 적응을 못하던 아이, 검사를 해보니 편도체에 과부하가 걸렸다. 지속적인 두려움이 아이로 하여금 그 어떤 자극에도 무뎌지도록 만들었다. 결국 '뇌손상'에 이른 것이다. 

보호 관찰 6개월, 234일 만에 아이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떠날 때랑 달리 훌쩍 커버린 아이, 엄마는 아이의 귀가가 두렵고 반갑다. 학대 아동 83.7%, 10명 중 8명이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아동학대 생존자 
1부, <내 이웃의 아이>에서 엄마는 어떻게든 '학대'의 늪에서 스스로 벗어나고자 노력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5월 10일 방영된 2부 <살아남은 아이들>은 '학대'의 경험을 가진 '어른'이 된 아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요셉의 친구는 몰랐단다.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그의 눈에 요셉의 아버지, 어머니는 좋은 분처럼 보였단다. 챙겨주고 예뻐해주는 것같았는데, 하지만 그건 사람들이 볼 때 뿐이었다. 

그의 집은 지옥보다 더한 지옥이었다. 그는 말한다. 신체적 학대는 '맷집'을 키웠다고. 맞으면서 버티면 시간이 흐르면 끝이 있었다고. 하지만, 자기 자신이 바라봐도 자신의 존재가 싫어지게 만드는 정신적 학대는 차라리 지옥을 택하고 싶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자살 시도도 했다. 부모의 나이가 30대 초중반 무렵부터 시작된 학대, 그래서 요셉은 30대의 사람들이 무서웠다. 부모의 나이가 40대가 되고, 50대가 되고, 세상 사람들이 무서워졌다. 지하철도 탈 수 없었다. 잘못됐다는 걸 알았지만 어린 요셉은 너무 약하고 어렸다. 

 

 

'부모'가 만든 세상, 학대당하는 아이들은 그 세상이 전부이다. 임연(필명)씨가 14살 되던 해 친구가 전해줬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반찬을 바닥에 뿌려놓고 주워먹게 하는 거 부모라면 그럴 수 없는 거라고. 먹을 걸 주지 않고 몇 시간 씩 매질을 해도 '학대'의 발견율은 4%에 불과하다. 그만큼 대부분의 학대는 '가정'이라는 공간 안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그래서 15년에서 27년까지 '학대'의 시간은 길다. 아이들에게는 끝이 없는 터널이다. 

조희정 씨의 첫 기억은 유치원 때였다. 술취한 엄마가 내복 바람의 희정 씨 오누이를 집 밖으로 내쫓았다. 기침만 해도 맞았다. 모든 행동이 학대의 이유가 되었다. 머리채를 잡아당겨 뒤로 넘어져 뇌진탕을 일으켜 고통받는데, 엄마는 꾀부린다고 했다. 결국 아픈 희정 씨가 무릎을 끓고 빌었다. '내가 사라지면 우리 가족이 행복할까'.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입양된 5살 부터 시작된 새엄마의 폭력은 결혼을 하고 임신 3개월에 이를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전안나 작가는 고백한다. '수저없이 태어났다'고 이제는 웃으며 말하는 전작가이지만, 여전히 문이 열려있으면 그 문으로 엄마가 들어와 자신을 때릴까봐 불안하다고 한다. 그녀의 기억하는 스킨십은 '폭력', 이거나 '약을 발라주는 것'뿐, '너는 다를 거냐'며 폭언을 퍼붓었던 양모,그 반대로 사는 게 복수라 생각해서 좋은 엄마가 되려고 공부에 공부를 했다고 한다. 50대 50, 하지만 세상은 폭력의 대물림만을 주목한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어떻게든 그 '대물림'의 고리에서 자신을 끊어내려고 노력한다. 

엄청난 양의 음식을 주고 시간을 쟀다. '3분 줄게 다 먹어, 팽이채가 날아들었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학대의 경험을 책으로 엮은 임연 작가의 <그래도 나는 살아야겠다>속 내용이다. 학대의 연은 질겼다. 가해자인 부모와 인연을 끊기 위해 임연 작가는 등초본 열람도 제한했고, 가족관계부도 정리했다. 그녀가 얼굴을 공개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부모의 동의가 없어 학자금 대출을 받지 못해 주 70시간을 일하며 2년이 더 걸려 대학을 졸업했다. 

20대가 되서도 여전히 '엄마랑 잘 살아보면 안될까'하던 아버지, 조희정 씨 역시 굳게 마음을 먹고 '연'을 끊었다. 자신의 아픔을 되풀이 하지 않고자 희정 씨 역시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3년에 걸쳐 자신의 학대 경험을 역시나 책으로 남긴 전안나 작가 역시 18년 경력의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학대'를 넘어 '세상의 학대'에 맞선다. 



by meditator 2022. 5. 11. 19:22

인생은 고해(苦海)다. 일찌기 붓다의 설법이다. 이제 9회차를 경과하고 있는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네 인생사 고해의 바다에 밀려오는 제 각각의 파고를 경험하게 된다. 9회 차에 들어 전면에 등장한 동석(이병헌 분)과 선아(신민아 분)를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인생의 파도는 무엇일까? 

 

 

십대 청소년 시절 서울에서 전학온 선아와 만난 이래, 이제 마흔 줄이 될 때까지 동석은 선아와 만날 때마다 인생이 꼬였다. 그렇게 얼핏 이야기는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이야기같았다. 트럭 하나를 몰고 제주 인근 섬을 돌며 장사를 하는 동석, 그런 동석이 사는 제주에 그의 인생을 꼬이게 만든 장본인 선아가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보란듯이 그를 농락한 채(?) 떠나고, 다시 그를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잘 살 것 같던 선아가 피죽 한 그릇도 못얻어먹은 얼굴로 돌아왔다. 본인 말로는 발을 헛디뎌서라는데 해녀들이 구하지 않았으면 물고기 밥이 될 뻔했다. 그런 선아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동석의 신경을 거스른다. 죽지 않았으면 됐다고 하면서도 돌아오지 않는 선아를 찾아 온제주를 헤맨다. 

동석과 선아의 상흔 
해묵은 연인처럼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 선아에게 따지듯 그때 왜 자신을 버렸냐던 동석, 그로부터 그저 오랜 연인만이 아닌 의지가지없던 두 '어른 아이'의 이야기가 풀려나온다. 

아버지가 죽고, 물질을 하던 누나가 죽자 어머니는 아버지의 친구네 집으로 들어갔다. 말이 두번 째 부인이지, 병석에 누운 본처의 병수발을 하는 것이었고, 두 의붓 아들을 키우는 것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용납할 수 없었던 동석은 매일매일 두 의붓아들에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보란듯이 그 상처를 들춘다. 

그렇게 얼굴이고, 몸이고 시퍼렇게, 검붉게 멀쩡한 곳이 없는 시절을 살아가던 동석에게 기대어 온 아이가 선아였다. 서울에게 전학왔다는 중학생 아이가 집에는 안가고 매일 동석이 가는 피씨방에서 게임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업을 하다 망한 선아의 아버지가 의탁한 큰아버지네, 하지만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하루가 멀다하고 주먹다짐을 하며 싸웠다. 그렇게 돌아갈 곳이 없는 선아를 동석은 품어줬다. 

하지만 첫사랑이자, 첫정이던 선아는 동석의 친구에게 몸을 허락했고, 그걸 안 동석이 폭주하자 동석이 보는 앞에서 깡패라며 신고를 했다. 그리고 떠나버렸다. 제주 돌담 사이 삐져나온 잡초같은 동석이 유일하게 마음을 줬는데, 그런 동석을 선아가 짓밟아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자신을 버렸냐는 동석의 질문에 선아는 동문서답처럼 말한다. 사랑하는 오빠에게 자신을 망가뜨려 달라고 할 수는 없지 않냐고. 

자신이 맞은 상처를 보여줘 엄마를 고통스럽게 하려던 것처럼, 선아도 그런 식으로 아빠의 관심을 끌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선아의 시도는 아빠의 사랑을 갈구하는 딸을 놔둔 채 바다로 차를 몰아버린 아빠의 이른 죽음으로 무산된다. 그리고 자신의 눈 앞에서 바다로 빠져들어가는 아버지를 목격한 선아는 오랜 지병, 우울증을 얻는다. 

 

 

선아의 우울증은 동석의 맞은 상처와도 같다. 의붓아들에게 매일매일 맞고, 그걸 엉마에게 보여주듯이, 하지만 그런 마음의 아픔을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선아는 자신의 안에 그 상흔을 차곡차곡 쌓아 자신을 갉아먹어간다. 그리고 그 상흔이 이제 선아의 가정을 무너뜨렸고, 아이마저 잃을 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동석이라고 다를까, 선아가 그렇게 떠나고 의붓아버지네 집을 털어 다시는 제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떠난 동석, 하지만 뭍에서도 그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다시 제주로 돌아온 동석, 하지만 여전히 그는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도 않고 트럭 하나를 몰며 제주 이곳저곳을 전전한다. 

김훈 작가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인생은 고해라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종교적 교리에 의하면 인간사 희노애락의 욕망에서 '해탈'하면 되지만 사람 사는 일이 어디 그런가, 그런 '고해'의 삶, 그런데 김훈 작가는 그저 인생이 그런 거라고 받아들이라 말한다. 

인간의 삶은 다 저마다의 욕망과 욕구를 가지고 맞물린다. 내 맘이 네 맘같지 않은 그런 모든 일들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고해'의 풀을 만든다. 그저 인간사가 다 저마다의 이해 관계에 얽혀 이루어지는 것임을 '수용'한다면 될 일이라고 김훈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나와 다른 타인의 삶이 저마다 이루어져 가는 것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동석과 선아는 여전히 그 '어린 시절의 상흔'에 사로잡혀 있다. 에이 설마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 적이 없느냐는 선아의 농반 질문에 동석은 말끝을 얼버무린다. 동석은 늘 자신의 인생이 선아 때문에 꼬였다고 말한다. 마흔 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동석의 인생은 선아 때문에, 엄마 때문에 라는 그 '트라우마'로 부터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동석의 떠돌이 삶이 드러내는 외상, 그리고 선아의 의지가지 없는 우울증의 내상은 모두 여전히 그들이 어른이 되었음에도 '어른 아이'의 그 시절에서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그들이 겪은 '상실의 시간'은 과거가 되었고, 그들은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동석도 선아도 그 상실을 겪은 그 시절에 멈춰있다.

그런 '어른 아이'인 상태인데도 선아는 자신이 '엄마'로서의 주장을 펼친다. '아이만 있다면, 자기 삶에 유일한 의미인 아이만 있다면', 다시 행복해 질 수 있을 거라며 예전 아빠와 함께 살던 곳을 꾸미고 있다. 

그런 선아에게 동석은 말을 건넨다. 재판에서 져서 아이와 함께 할 수 없게 되더라도 너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어쩌면 동석은 인정하고 싶지만 그의 내면은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자신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했던 어머니의 삶을. 그래서 동석에게 용납할 수 없는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자기 자신일지도. 동석에게 선아의 등장은 해묵은 인연의 결자해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동석이 오랫동안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내면의 아이를 들여다 보는 시간이 될 수도 있지않을까.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서로에 대한 '감정'을 놓지 않은 두 사람, 그 '온기'는 아직도 두 사람이 허우적거리는 '고해'의 파고를 넘어서는 힘이 되지 않을까. 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헤집고 보면 다들 내 안에 '아이'를 놓지 못하고 있다. 노희경 작가는 동석과 선아를 빌어 말하고 있다. 그제 그만 그 아이를 놓아주라고.그 시절의 엄마도, 아빠도 그저 각자 자신의 삶을 버겁게 짊어지고 살아갔던 한 사람들일 뿐이었다고. 타인들의 삶으로 인한 고해의 바다에서 그만 허우적거리고 넘어서라고.  진정한 어른됨의 삶을 살아가라고. 



by meditator 2022. 5. 8. 16:23

36살, 안대성(이광수 분)은 이번에도 또 떨어졌다. 처음에는 야심차게 5급 정도는 했다. 하지만 연이은 낙방에 눈을 낮췄다. 9급 정도야, 그러다 보니 어느새 36살이 됐다. 오랜 연인 도아희(설현 분)가 그를 데리고 집에 간 날, 그녀의 아버지는 그의 자기 소개를 듣고 글러브를 꼈다. 다시 그를 만나면 부녀의 연을 끊겠다고 했다.

고시원 벽에 그가 붙인 시험 공지 게시물이 뜯어도 뜯어도 끝이 없다. 이제 또 시험을 볼 의지도, 여력도 없다. 짐을 싸서 터줏대감같은 고시원을 떠난 대성이 돌아간 곳은 대성마트이다. 그런데 '대성마트'의 '대성'이 길거리에 나뒹군다. 대성상회 시절부터 지금의 대성마트까지 그곳을 이끌던 대성의 어머니, 한명숙 여사가 비로소 마트 경영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것이다. 마트 이름을 아들 이름 대성에서 자신의 이름 '명숙'의 이니셜 'ms'로 바꾼 한명숙 여사, 끝없는 공시 터널에서 빠져나온 아들에게 '독립'을 요구한다. 

 

 살인자의 쇼핑목록 ⓒ TVN

 

만년공시생 마트 캐셔가 되다 
고시원에서 공시 준비를 해도 늘 돌아갈 집이 있었던 대성은 졸지에 마트 건물 옥상에 창고로 쓰던 옥탑방으로 쫓겨난 신세가 되었다. 늘 자기 집처럼 드나들던 마트의 캐셔 자리 수습이 됐다. 그런데 마트가 자기를 대접안해준다고 마트가 떠나가라 유세를 떠는 부녀회장에게 그녀가 지난 시간동안 사간 스타킹 갯수와 금액까지 안내하며 그녀의 입을 다물게 만든다. 공시생으로 살아온 지난 시간이 무색하게 그의 '달란트'는 '마트'에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살인자의 쇼핑목록>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tvn 수목 드라마는 이렇게 만년 공시생 안대성과 그의 집이자 일터가 된 'MS마트'를 이렇게 소개한다. 알고보니 어머니가 '대성상회'를 하던 시절부터 카운터를 지키던 '캐셔 경력 30년, 우리 엄마 슈퍼는 내가 지킨다'던 청년도 세상의 흐름에 따라 만년 공시생이 되고말았다. 자칭 타칭 '비공식 슈퍼두뇌'이지만 그 슈퍼 두뇌가 자신의 능력을 살피지 못해 방황하는 사이 시간이 훌쩍 지나버려 '슈퍼집 아들'이란 이유로 그를 좋아했던 연인이 소개팅 자리에 나갈 처지가 되었다. 

사실 능력은 있지만 현실은 '루저'인 주인공, 낯설지 않다. 현실에서는 파리날리는 만화방 주인이지만 사건에 있어서는 '천재적 능력'을 가진 <탐정; 리턴즈>의 강대만?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을 각색하고 감독한 이언희 감독이 <살인자의 쇼핑목록>의 연출을 맡았다. 거기에 장르물 매니아들을 열광케 했던 독특한 구성의 스릴러 <원티드>, <오늘의 탐정>를 쓴 한지완 작가가 의기투합했다. 

이언희 감독, 한지완 작가가 선택한 공간은 '슈퍼'이다. '상회'이던 시절부터, 재개발을 앞둔 현재까지 동네의 중심, 하지만 어느덧 '쓱싹배송, 새벽배송' 등에 밀려 그 자신이 '재개발'되게 생긴 오랜 동네의 터줏대감, 그만큼 그곳에 온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고 동네의 모든 것들이 오가는 곳, 한때는 대성상회였던 지금의 MS마트가 '현장'이다. 

 

 살인자의 쇼핑목록 ⓒ tvn

 

마트 캐셔의 숨겨진 능력 
당연히 스릴러 장르이니만큼 '사건'이 등장한다. 다른 친구들이 다 학원을 갈 때 홀로 동네를 돌아다니는 마트 단골손님 아홉살 세빈이가 가져온 주인을 잃은 슬리퍼 한 짝, 그 주인이던 여성이 주검으로 발견된다. 

그런데 그 여성의 사체를 발견한 사람이 다름아닌 안대성이다. 현장에 온 경찰에게 직업과 우울증 병력에 이르는 그녀의 사소한 프로필까지 줄줄이 꿰는 안대성, 연인이자 경찰인 도아희가 없었다면 딱 용의자이다. 

일찌기 대성상회이던 시절, 5만원 권을 가지고 초코파이 한 개를 사러 온 위폐범을 그가 가지고 온 위폐 번호로 들통나게 만든 어린 시절의 안대성, 통통했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지만 여전히 그의 '슈퍼 두뇌급' 능력이 마트를 찾은 모든 이들을 슈퍼컴퓨터처럼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 대성의 능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찌기 중학교 시절 선생님조차 혀를 내두르던 '오지랖'이라던 그 관찰력과 추리력이 발동한다. 시신의 목에 조른 흔적, 그리고 세빈이가 슬리퍼 한 짝을 찾은 성당 구석에 감겨진 스타킹, 그리고 혼자 사는 여성들의 집에 출몰했던 배달 봉투 안의 스타킹 등을 조합하여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직접 마트에서 파는 모든 스타킹을 가져다가 목을 조를만한 '탄성'의 능력치조차 직접 실험하면서. 

하지만 능력자는 대성만이 아니다. 일찌기 대성상회 시절 셔터문을 내린 상황에서 자신의 목을 조르던 위폐범을 쌀봉지로 가격해 제압한 왕년의 배구 선수 한명숙 여사에, 동네 소식은 모르는 것이 없는 마트 알바에 화장품 외판원 투잡을 뛰는 마트의 '공산' 코너 담당 아줌마, 대성은 들지도 못하는 물건을 거뜬히 들어내는 마트 '알바' 등등 소소한 일상의 한 축을 구성하는 인물들이 스릴러 장르의 주요 인물로 저마다 한 몫을 한다. 

'범인은 마트에 있다', 대성상회 시절 위폐범이 이제 할아버지 분장을 하고 대성의 주위를 맴돌고, 홀로 살며 우울증에 시달리던 여성에 이어, 누군가 자신을 스토킹한다며 마트에 와서 울며 호소를 하던 여성이 그녀의 집에서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그런데 그 피해자들, 혹은 가해자들의 흔적이 마트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우리가 '버려주세요'라는 말로 남기고 온 영수증 안에 마트를 다녀온 모든 이들의 신상명세가 드러나 있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소비한 모든 품목이 그들을 말해주고 있다. 이 기발한 '현대 사회'의 '인증서' 마트를 중심으로 <살인자의 쇼핑 목록>은 시작된다. 

신선한 구성, 그리고 그 신선한 플롯 속에 움직이는 생동감넘치는 이 시대의 평범한 이웃들의 스릴러, 이 흥미진진한  <살인자의 쇼핑목록>이 선전하기를 바란다. 



by meditator 2022. 5. 5. 22:39
| 1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