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100주년이다. 유관순 열사, 그리고 일제 시대 인물인 엄복동을 독립 운동과 연관시킨 영화 등이 만들어지고 개봉되는가 하면, 방송사에서도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다큐 및 작품들이 100년의 그날을 기념하고자 한다. 100년 전 그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제의 총칼을 뚫고 거리로 나섰던 사람들, 그리고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2019년의 우리, 오늘의 우리가 있도록 만들어 준 선열들의 뜨거운 독립에의 의지와 열망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동시에 과연 우리가 100년 전 그날 그곳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되돌아 보게 된다.

어린 시절에야 당연히 내가 그 곳에 있었다면 만세를 부르고 독립운동을 하겠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며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지켜간다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가를 깨닫게 되는 만큼, 3.1운동 100주년에 신념을 지켰던 조상들의 삶이 더욱 고귀하게 다가온다. 지난 2월 25일과 3월 1일 양일에 걸쳐 2부작으로 방영된  <3.1주년 100주년 특집 마지막 무관 생도들 2부작>은 바로 이런 반추로 부터 시작된다. 대한 제국 마지막 무관 생도였던 이들의 서로 다른 선택을 통해 독립 운동의 삶을 살았던 선열들의 신념어린 삶을 역설적으로 조망하고자 한다. (이 다큐는 이원규 씨의 마지막 무관생도들를 기반으로 하여 제작되었다)

 

   

 

피를 나눈 맹세- 첫 번째 엇갈림 
1896년 대한제국은 무관을 전문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대한 제국 육군 무관학교를 만들었다. 이응준, 홍사익, 지청천... 이들이 바로 무관학교의 마지막 생도들이다. 1909년 위태로워져가는 나라, 무관학교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대한 제국 무관 학교는 문을 닫게 되고 무관 생도들 중 50 명이 일본의 육군 중앙 유년 학교로 보내졌다. 그리고 1910년 강제 합병 소식이 전해지고, 일본에 남겨진 무관 생도들은 아오야마 묘지에 모였다.

다함께 천황궁 앞에서 자결하자며 울분을 토하며 이응준 등이 무조건 싸우자며 결의를 다지는데, 홍사익은 때를 기다리자 했고, 지청천 역시 홍사익의 의견에 따라 일본군과 싸우려면 지휘관이 필요하다며 이곳에서 일본의 선진 지식을 습득하며 조국이 부를 때까지 기다리자 했다. 이들은 결의를 다지기 위해 다시 육사 23기 였던 김경천의 주도 아래 '우리 민족이 떨쳐 일어나는 날 다 함께 모이자며'요코하마 한 술집에 모여 서로의 피를 나눈 술잔을 나눠 마시며 피의 맹세를 했다. 이들이 이 때 정한 암호는 '요코하마'

1919년 온 민족이 떨쳐 일어난 3.1 운동 김경천은 드디어 때가 되었다 생각했다. 그래서 피를 나눈 동지들에게 '요코하마'라는 단어가 들어간 전보를 보내고. 지청천이 합류했다. 육군 현역 장교였던 두 사람의 탈출에 일제는 체포망을 좁혀갔지만 두 사람은 그 허를 찔러 무사히 조국을 탈출하여 서간도의 신흥 무관학교로 갔다. 

반면 기다려도 오지 않았던 이응준과 홍사익, 당시 홍사익은 일본 육사에 들어가 장교가 되었고, 이응준 역시 홍사익과 다르지 않은 선택을 했다. 이렇게 피를 나눈 맹세의 길은 서로 갈라졌다. 

조국 광복을 위해 싸웁시다.
싸우다 싸우다 힘이 부족할 때는 이 넓은 만주 벌판을 베게 삼아 
죽을 것을 맹세합니다. 
                            지청천 


 

 
독립군과 그 독립군을 진압하는 장교로 마주선 동지들 
1919년 6월 이회영 등이 사재를 털어 만든 무장 항일 투쟁 교육 기관 신흥 무관 학교, 여기에 육군 현역 장교 출신이 김경천, 지청천 두 사람의 합류로 독립 투쟁의 기세는 불타올랐다. 

신흥 무관 학교 출신으로 북간도 항일 무장 투쟁을 이끌었던 신동천과 함께 김경천, 지청천은  '남만 삼천'이라 일컬어졌으며 이들의 합류로 독립 투쟁은 한 단계 승화된다. 일본군을 나오며 군 교재와 지도를 갖춰 나온 지청천 덕분에 현대적 군사 지식과 지도를 얻게 되었으며 이런 전문적 군사 지식에 따라 신흥 무관 학교는 대한 제국 무관 학교의 편제에 따라 14시간 훈련과 학과를 병행하는 체계를 갖춰 나갔다. 

이들 졸업생은 대부분 만주 지역 독립군 부대의 교관과 장교로 활약했고 이들이 이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둔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핵심이 되었다. 이후 이들 '남만 삼천'은 지청천은 서간도로, 김경천은 러시아 연해주로, 신동헌은 북간도로 흩어져 독립 운동의 외연을 넓혀가며 각 지역 독립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반면 홍사익과 이응준은 일본군이 되었다. 홍사익은 만주 사변에서 공을 세우고 관동군 사령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가 접한 조선 항일 조직의 서류에서 그는 한때 동지였던 지청천의 이름을 발견했다. 또한 어느날 그에게 온 인편을 통해 지청천은 '친구여 요코하마를 기억하는가,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라'며 그의 투항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일본군으로 승승장구하던 홍사익은 '친구여 요코하마를 기억하는 이는 더는 내가 아니네'라며 지청천의 청을 거절한다. 

장부가 응당 취하고자 하는 건
만고에 떨칠 이름인데
어찌 하찮은 망아지 구유에 기대어 .....
풍운은 아직 그치지 않고 눈보라 휘날리니
어찌 큰 민족을 세울 용사를 얻을 수 있으랴     -김경천 <경천아일록> 

 

 
소비에트 혁명으로 인한 비극적 생애- 김경천
대대로 무관을 배출한 집안, 사직동 일대에 1000 여평의 집터를 가진 집안, 하지만 가장 김경천이 독립을 위해 조국을 떠나고 남은 가솔들은 그 가옥을 처분하여 근근히 살아가야만 했다. 

러시아 연해주로 온 김경천은 수청 고려 의용대를 만들어 우리 이주민들은 물론 그 지역 토착민들을 괴롭히는 그 지역 마적들을 토벌하는 등 혁혁한 성과로 '백마탄 김장군'으로 칭송받았다. 또한 그 과정에서 '숨쉬기 조차 힘든 그곳의 사정'을  <경천아일록>으로 남겨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비견되는 전쟁 기록의 산 증인이 되었다. 

하지만 언제나 강대국의 정세에 휩쓸리는 우리의 운명이 그렇듯 김경천 장군의 생애 역시 그 비극에서 비껴서지 못했다. 스탈린이 정권을 잡고 숙청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조선인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연해주의 고려인 사회 지식인과 지도층 인사들 다수가 체포되었으며, 김경천 장군 역시 블라디보스톡에서 체포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의 영향에서 조선이을 분리하고자 한 소련의 정책에 따라 18만 명의 조선인들이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하는 과정에서 김경천 장군 역시 카자흐스탄의 집단 농장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하지만 집단 농장 이주도 잠시, 1939년 다시 '인민의 적'이란 명목으로 카라간다 정치범 수용소에 8년 금고형에 처해졌고,  이어 모스크바로, 다시 시베리아 코틀러스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철도 건설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백마탄 조선의 나폴레옹이라 불렸던 독립의 영웅 김경천 장군은 그렇게 소비에트 혁명의 희생자가 되어  1942년 러시아 북부 철도 부설 수용소 병원에서 병명은 비타민 결핍으로 인한 심장 질환으로, 하지만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추정되는 질환으로  쓸쓸하게 눈을 감았다. 

 

 
친일의 결말 - 이응준과 홍사익 
일본군 고위장교가 된 이응준은 가야마 다카토시로 창씨 개명을 하고 매일 신보 등의 강연회에서 '충성'을 강변하는 등 일제에 앞장선다. 용산 조선군 사령부 대좌까지 지내던 중 세계 2차 대전에 참전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원산항 병참 책임자로 있던 이응준은 '조선인으로 돌아간다'며 원산을 탈출한다. 

하지만 미군정청은 해방 후 칩거하던 그에게  조선 임시 군사 위원회 군사 위원장 직을 맡긴다.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다던 그는 하지만 '일본, 만주, 중국 등지에서 군사학을 전공하고 그 나라에서 각각 군인 노릇을 하던 그 경섬이 신생 조국에서 건국의 역군이 될 '것이란 소회로 건군의 주역이 되고 초대 육군 참모 총장 등의 직위를 역임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항복을 할 당시 필리핀 포로 수용소장으로 있었던 홍사익은 그해 12월 b급 전범이 되어 재판을 받는다. 당시 재판을 받던 22명의 장성 중 유일한 조선인이었던 홍사익, 그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진다.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수재로 입신양명의 길을 걸었던 그, '조선인이 일본에 협력하면 조선인들도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며 이씨 왕족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창씨 개명조차 하지 않은 채 조선인 권리를 지키겠다던 그의 최후는 일본군의 전범이었다. 

이응준 등, 심지어 김원봉조차 조국 건설에 필요한 인물이라며 구명 운동을 펼쳤지만 항소를 거부했던 그가 형장으로 가며 부탁한 건 '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로 시작하는 시편 51편, 그렇게 조선인으로 일본인과 동등하게 살고자 했던 일본군 대좌 홍사익은 형장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이응준과 홍사익은 반민족 친일행위자로 친일 인명 사전에 그 이름이 올랐다. 

 

 

마지막 무관 생도들, 그 후 
충칭 임시정부로 간 지청천은 한국 광복군 총사령관이 되어 국내 진공 작전인 독수리 작전을 주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천황의 항복, 태극기, 광복군기를 앞세워 귀국하려던 지청천, 하지만 미 군정은 이를 허락치 않았다. 결국 개인 자격으로 28년에 귀국한 지청천 장군은 대동청년단을 만들어 해방 후 청년 단체 규합에 힘썼다. 

일제 합방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던 이건모는 퇴교 후 조선 총독부 서기가 되었다. 일본군 장교가 되었던 이종혁은 자신으로 인해 독립군 투사가 죽음에 이르는 걸 목도하고 항일 독립 투쟁에 헌신, 그 과정에서 죽음을 맞았다. 44명의 마지막 무관 생도들 중 단 5명만이 독립 운동에 헌신했다. 그리고 그 중 7명이 반민족 행위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남은 32명, 그중 일본군 장교가 13명, 관료가 6명, 은행 직원이 3명, 교사가 4명등이다. 일제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젊은이들의 서로 다른 선택, 3.1운동 100주년에 저 다섯 명의 독립 운동을 했던 선열들의 삶, 그 지난했던 선택 더더욱 고귀하고 존경스러운 이유이다. 



by meditator 2019. 3. 3.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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