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고 싶었던 청년이 있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청년을 매료시킨 건, '이미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이미지'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청년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된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청년, 그는 이들의 이야기를 '서사'가 있는 영화로 제작하고자 결심한다. 33세, 이젠 청년이라기엔 머쓱한 나이가 된 그는 처음으로 장편의 영화를 만든다. 그리고 그 영화는, 1995년 베니스 영화제 촬영상(황금오셀리오니 상), 카톨릭 협회상, 이탈리아 영화 산업 협의회 상을 수상하고,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을 받으며, 그에게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데뷔작'이라는 수식어를 남겼다. 바로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환상의 빛>이다. 




상실의 서사
<환상의 빛>이라는 제목과 달리,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영화를 압도하는 건, 흑백의 정서다. 아니, '어둠'이 더 정확할까. 도시의 다리 밑 웅크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궁색한 삶으로 시작된다. 마당 대신 집앞 어두운 골목에서 많은 것이 이루어지는 도시의 한 구석, 그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뽑아 온 곳의 분명한 지명이 아직 남아있는 시간에서, 결국 할머니는 그 어두운 시간을 견디는 대신 정처없이 자신의 고향을 향한 길을 떠난다. 어린 손녀는 그런 할머니를 차마 말리지 못하고, 아들 내외는 한 술 더 떠서, 그런 노인의 가출이 일상이라 치부하며, 자신들의 일상을 지속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런 할머니의 실종은 손녀 유미코(에스미 마키코 분)의 꿈 속에 각인된다. 

그렇게 아픔을 꿈 속에 숨긴 채, 손녀를 비롯한 도시에 머무른 이들은 그 공간 속에서 다시 가정을 이루고, 그곳이 고향인 양 깃들어 산다. 여전히 할머니의 꿈에 가위 눌리는 손녀는, 그것을 악몽으로 치부한 채 갓 태어난 아이와, 그 옛날 자전거를 타던 소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묵묵히 자기 곁에 머무는 남편 '이쿠오(아사노 타다노부 분)'와 평범하지만 행복한 일상을 꾸려간다. 하지만, 단 하루 저녁 아이를 맡긴 채 남편의 공장을 찾아 남편과 찻집을 찾는 행복에도 웃음이 마냥 퍼져나갔던 유미코의 행복은 그저 그렇게 다리 저 너머로 슬며시 사라져 버렸던 할머니처럼, 찾아온다. 자전거를 두고 나갔던 남편이, 기찻길 위에서 자살한 것이다. 



아이의 울음조차 달래지 않고 망연자실했던 유미코, 하지만 시간은 그녀를 추스리게 만든다. 남편과 함께 했던 그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몇 년을 더 보낸 유미코는 도시를 떠나, 바닷바람이 거센 새로운 지방에서 새로운 가족을 꾸린다. 처음 오랜 여행을 마친 유미코 모자가 타미오(나이토 타카시 분)를 만났을 때 서먹서먹했던 분위기는 그들의 충실한 일상과 함께 서서히 서로에게 스며든다. 유미코는 충실한 아내, 공손한 며느리, 따순 엄마였고, 타미오 역시 든든한 남편에, 자상한 아버지로. 그리고 타미오의 일가도 유미코에겐 울타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일상은 마치 균열을 가진 유리 구슬처럼 조심스레 흘러간다. 이쿠오 앞에서 천진난만한 소녀같던 유미코는 이제 그저 슬며시 미소 한 자락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그림자를 지닌 여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그림자는 일상 속에서 슬며시 나타났다 사라지는가 싶더니, 그녀가 다시 '도시'로 갔다온 후, 그리고 할머니의 꿈을 다시 꾸고, 타미오의 친척이 태풍으로 돌아오지 않는 날을 경과하며, 더 이상 그림자로 숨겨지지 않는다. 

오랫동안 다큐를 찍어왔던 감독의 첫 데뷔작답게, <환상의 빛>에서 보여진 유미코가 겪은 상실의 서사는 담담하게 진행된다. 할머니의 실종도, 남편의 자살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미코의 슬픔도 시종일관 덤덤하게 지켜본다. 그리고, 한 치도 덜어냄이 없는 자연 다큐를 통해, 그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절박한 삶을 그려내듯이, 여전히 덤덤하게 진행되는 일상의 묘사, 그리고 그 일상을 벗어난 바다를 통해, 유미코의 그럼에도 여전히 이어지는 삶을 그려낸다. 



상실, 그 이후의 삶
할머니에 이어, 남편을 잃은 여인, 그 여인의 슬픔을 그린 <환상의 빛>은 마야모토 테루의 소설집 속 단편이다. 그중 <환상의 빛>은 죽은 남편에게 보낸 독백체의 편지글이다. 
'당신은 왜 그날 밤 치일 줄 알면서 한신 전차 철로 위를 터벅터벅 걸어갔을까요......'
영화에서도 끝내 밝혀지지 않듯이, 유미코는 자신과 어린 아들을 두고 '자살'을 택한 남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끝내 접어두지 못한다. '죽으려는 그 마음의 정체'를 놓지 못한다. 7년이 지난 후 새 남편과의 평안한 일상 속에서도. 이런 독백의 서간체 소설이,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1991)>라는 다큐를 찍으며 홀로 남겨진 미망인을 통해 죽음과 상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만나 영화로 탄생된다. 유미코가 겪는 상실과, 그 일상, 그리고 변화를 영상을 통해 표현해 냄으로써, 죽음과 상실에 대한 끝없는 질문으로 이어진 독백의 서간체 소설을 영상으로 구현해 낸다.



그리고 첫 작품으로서의 '상실'은 그저 첫 작품의 특징을 넘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특유의 주제 의식으로 성장해 간다. <환상의 빛> 이후 <원더풀 라이프>,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 <바닷마을 다이어리>까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에는 늘 '상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이 주목하는 건 그저 상실이 아니다. <환상의 빛>에서 사라진 할머니의 행방도, 자살한 남편의 이유도 드러나지 않는다. 아니 중요치 않다. 그거 보다는 그 앞서 가버린 사람들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산 사람들의 삶이다. 그들은 살아있지만 그들의 삶은 유미코처럼 늘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한다. 아니 유미코만이 아니다. 도대체 왜 유미코가 도시를 떠나 이 거친 바다까지 왔을까란 의문, 그리고 못내 사랑했던 아내 대신 왜 자기를 택했냐는 유미코의 애꿏은 앙탈에 '무서운 이야기'라는 남편 타미오의 답처럼, 그리고 한때는 바다사람이었지만, 자신을 유혹했던 환상의 빛을 견뎌낸 채 삶을 지속한 시아버지처럼, 죽음이란 공통의 아픔을 함께 한 사람들의 유대 역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환상의 빛>을 통해 그려내기 시작한 세계이다. 결국 견뎌내지 못하고 전 남편에대한 의문을 토해 냈을 때, 마치 예전부터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해 왔던 사람처럼 덤덤하게 아버지의 경험을 말하는 타키오의 모습은, 상실의 아픔을 터트리는 스즈를 품는 큰 언니 사치를 연상케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레에다 감독이 주목하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상실이 여사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주목'일 터이다. 삶이라지만, 따지고 보면 삶은 여사로 죽음과 맞물린다. 그런 경계가 불분명한 삶에 대해 고레에다 감독의 천착, 그 시작이 <환상의 빛>이다. 바다로 나간 유미코의 시아버지를 매료시켰던 그 빛처럼, 유미코가 찾아간 그 바닷 마을, 터널을 지나 저머리에서부터 환하게 빛나는 그 마을의 빛은 죽음에 침잠되어 있는 유미코에겐 삶의 환상의 빛이 된다. 일용할 양식을 주는 바다와, 풍랑으로 해녀를 삼킬 수 있는 바다가 다르지 않듯. 우리 삶 속에 삶과 죽음은 늘 혼재되어 있고, 그 죽음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 깃들여 보듬는다. 

by meditator 2016. 7. 19. 15: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