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과 서인, 그리고 다시 노론과 소론 등 조선의 파당사는, 그것이 국멸의 원인이라 칭해진 것처럼 우리가 역사를 통해 심지어 도표로 세세히 그려지며 공부할 수 있었다. 오죽하면 탕수육 소스를 부어먹는 방식, 소위 '부먹'이나 '찍먹'이냐를 놓고 조선의 파당을 설명하는 우스개가 회자할 정도로 조선의 정치적 파당사는 명확하다. 


하지만, 정작 '왕조 국가'인 조선에서, 그런 파당을 다루는 왕의 자세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런 왕의 자세에 따라 정국이 어떻게 격동에 휘말려 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늘 애매모호하거나, 그저 '무능력'이란 단어로 얼버무리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파당'이 필요 조건이라면, 결국 그 '파당'을 다루는 왕은 그로 인한 제 역사적 결과물의 '충분 조건'이다. 더구나, 일찌기 삼봉 정도전에 의해 유학자들의 이상적 집단 통치 체제로 이상화된 제도 조선이란 나라에서, 군주인 왕과, 신하들인 유학자들의 갈등과 이합집산이야말로 조선의 정치적 격변을 일으키는 근본적 원인 중 하나였다. 2월 14일 새로 시작된 <징비록>은 바로 이런 조선의 격변,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임진왜란이란 결과물을 선조와 동인, 그리고 서인의 정치적 갈등의 결과물로 그려가고자 한다. 




정치적 정당성이 결여된 군주, 선조

얼마전 종용한 kbs2의 <왕의 얼굴> 역시 <징비록>과 동일한 선조라는 문제적 군주를 다루었다. <왕의 얼굴>이던, 그리고 새로이 시작된 <징비록>이던 모두 중종의 일곱번째 아들 덕흥 대원군의 세째 아들이었던 적통이 아닌 방계 혈통 군주이란 컴플렉스를 다룬다. 어미가 노예라면 실제 아비가 양반이라 해도 양반이 될 수 없는 적서 차별이 엄격했던 조선이란 국가에서, 군주가 적통이 아니라는 의미는 상상 이상의 부담을 지게 한다. 그래서, <왕의 얼굴>에서 선조(김태우 분)는 그것을 '관상', 즉 왕다운 얼굴에 연연하는 모습으로 그려냈었다. 그에 반해, <징비록>은 1회 명으로 부터 '대명회전'을 받아들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기뻐하는 선조의 모습으로 형상화시킨다. 즉, 적통이었던 선대의 왕들도 해내지 못했던 명에 의한 조선 왕조 역사의 훼손을 적통이 아닌 선조가 해냈었다는, 그로 인해 자신의 정통성을 스스로 획득해 내었다는 자부심을 그려내는데 집중을 한다. 그럼으로써 역으로 선조란 인물이 얼마나 적통이 아닌 컴플렉스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 컴플렉스로 인해 대명회전을 통해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해준 명에 대해 얼마나 저자세일 수 있는가를 단번에 설득해 낸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하가 명에 대해 사은사를 거하게 보내자는 주장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자기 중심적인 선조의 면면을 그려낸다. 또한 그런 한편의 주장에 대해, 강직하게 그것은 명이 잘못한 걸 바로 잡으니 사은사 따위는 보낼 필요가 없다는 병조판서 류성룡(김상중 분)의 원칙적 입장과, 그런 모든 것을 어우르면서 명에 대해서는 적당한 사례와, 조선의 명분을 세우는 편의적 입장을 취하는 영의정 이산해(이재용 분)를 드러냄으로써, 전체적으로 실리적 정치 노선을 걷는 '동인'의 성격을 단번에 드러낸다.

그러기에 이런 동인을 정치적 '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골몰하는 정권에서 소외된 윤두수(임동진 분), 정철(선동혁 분)이 어떤 정치적 행보를 보일 것이 지를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게 만든다.
굳이 구구절절 동인과 서인이 가져온 파당의 역사를 설명하지 않아도, 단 한 건의 정치적 사안을 둘러싼 왕과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신하들의 대립으로, 임진왜란 전 조선의 정치적 정세를 그려낸다. 

그리고 거기에 불을 지핀 것은, 끊임없이 조선에게 국교를 청한 일본이다. 명에 의해 어렵사리 얻은 정통성에 연연하는 왕, 하지만 현실 정치를 담당해야 하기에 실리적 입장을 취하게 되는 동인, 당연히 자신들을 거둘 수 있는 사람은 왕밖에 없기에 왕의 의중에 의탁해야 하기에 무조건 왕의 의견을 따르는 각 정치 세력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는 드라마가 설정한 캐릭터로 인해 손에 잡히듯 명확하게 그려진다. 



16세기 조선에서 21세기의 대한민국이?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16세기 조선의 정치적 상황임에도 2015년 대한민국의 상황이 느껴지는 기시감이다. 
일본의 국교 제의에 왕인 선조는 분노한다. 심지어 국교가 아니라, 그저 그들의 사정을 알아보자는 제의 보차도 꺼내지 못하게 한다. 명으로 부터 얻은 정당성에 연연하는 그에게, 어렵사리 얻은 결과물을 폄훼하는 그 어떤 조짐조차도 못마땅하다. 그의 말대로 '백성'을 생각하는 왕이 아니라, 그 자신의 정치적 처지에 연연하는 소인배의 모습 그 자체다. 그런 왕에 대해 당시 실질적으로 정치를 담당했던 동인은, 어떻게든 잠재적 위협 요소인 왜와 통교를 통해 그 사정을 알아보고자 하고, 이런 동인에 반대하는 서인은, 왜와의 통교는 말도 안된다며 왕을 돕는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뜻을 달한 정체 세력에 따라, 백성들조차 시시때때로 해안 주변을 침탈하는 왜에 대한 입장을 놓고 양분한다.

어디서 많이 보던 정황이 아닌가? 오랜 국교 단절로 인해 도대체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왜, 하지만 수시로 벌어지는 해안 지방의 침탈과 대마도 영주의 언급으로 알 수 있는 그 폭력성, 전쟁에의 조짐. 그렇게 조선을 시시때때로 괴롭히는 정치적 정당성조차 불분명한 왜에 대해 조선의 정치 세력은 의견이 갈린다. 폭력적이고 그 실체를 잘 모르니 그들을 잘 알고 잘 다루기 위해서라도 친해두어야 한다는 입장과, 그렇게 폭력적이고 심지어 조선 백성들을 종종 괴롭히는 세력과는 상종조차도 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 극명하게 정치적 포지션에 따라 갈리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풍신수길이란 드라마가 그리듯 폭력적인 하지만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 왜의 정권은, 2015년 대한민국의 잠재적 위협인 '북한'을 떠올리게 만든다. 또한, 그런 북한에 대해 '햇볕 정책'을 펼치며 그들을 양지로 끌어들이겠다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비롯한 민주당 세력과, 우리를 괴롭히는 북한과는 상종도 못한다며 실질적으로 '단교'에 가까운 조치를 취한 새누리당을 비롯한 보수적 정치 집단의 행보가 묘하게도 겹친다. 심지어 대국 명의 심기를 거스릴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조차 익숙하다. 드라마는 16세기 임진왜란 전의 풍전등화와도 같은 조선의 정국을 비추는데,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거기서 자꾸 21세기의 대한민국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미 16세기 양분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조선이 선택한 정치적 판단의 결과가 어떤 결과물을 가져왔는지를 알고 있는 21세기의 시청자들은 16세기의 정쟁을 바라보는 입맛이 점점 더 써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역사 드라마의 매력이다. 드라마의 초반 그려내듯이, 피로써 되새김질을 한 <징비록> 임진왜란 7년의 역사는, 그저 16세기의 역사가 아니라, 여전히 열강에 의해 둘러싸이고, 늘 함께 하면서도 그 정체를 알길 없는 북한과의 대치가 항시적으로 위협이 되는 대한민국의 현재를 복기하게 만든다. <징비록>은 그런 역사 드라마의 본분을 충실히 수행하며 서막을 열어간다. 답답하게 전개되어지는 조선의 정황을 보며, 21세기의 교훈을 얻을 일이다. 
by meditator 2015. 2. 15. 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