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에 대해 포털에 물어 보았다.

임오군란; 1882년(고종 19) 6월 일본식 군제(軍制) 도입과 민씨정권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구식군대의 군변(軍變). (두산백과)
하지만 드라마 <조선 총잡이>가 광복절 하루 전날인 8월 14일 방송을 통해 다룬 '임오군란'은 이와 달랐다. 

<조선 총잡이>라는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역사적 갈등의 근간은 개혁 세력인 고종과 그의 측근들, 그리고 이에 대해 반기를 드는 기존 수구 세력들이다. 
실권을 쥐고 정권을 흔들어 왔던 집권 세력들에 대해, 젊은 왕이 야심차게 개혁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왕에 대해 기존 수구 세력들은 '중종 반정'처럼 왕을 갈아치우는 방식으로 대응하고자 했고, 그 결과로 드러난 것이 '임오군란'인 것이 드라마적 내용이다. 졸지에, 구식 군대의 '난'은 기존 수구 세력의 '반정' 도구가 되었다. 

역사란 '해석'이다. 
누구든 자신만의 입장에 서서 새롭게 해석할 자유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앞에 펼쳐진 역사는 당시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전달 된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디딤돌이 빠져있는 냇물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디딤돌을 놓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역사'를 건넌다. 하지만, 디딤돌을 놓는 방식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끝나지 않는 전쟁이 되어가는 '국사 교과서' 선정과 관련된 논란은 바로 이런 디딤돌의 선택과 선정 방식에 대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총잡이>의 '임오군란'의 해석은 매우 위험하다. 

실제 '임오군란'의 진행 과정을 보면, 구식 군대들은 군란의 진행 과정에서, 당시 정권을 틀어쥐고 있었던 명성황후 세력에 대해 반발을 하는 한편, 사태가 발생하자, 대원군에게 달려가 자신들의 입장을 토로하며 함께 해줄 것을 종용했다. 또한 이후의 과정에서 대원군의 수하가 가담했다는 내용도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실 그 어디에도 그들의 배후에 당시의 수구 권력 세력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또한 그들과 함께 했던 수구세력이 있다해도, 5위영 군인들의 실직을 막지 못했을 만큼 실질적 능력이 없었다. 

오히려, 당시 '임오군란'을 일으킨 군사들의 경우, 그들이 목표로 삼았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명성황후와 그 측근들의 권력 남용이었다. 즉,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 격화라고는 하지만, 이미 정권은 명성황후와 그 측근들에 의해 전횡되었고, 그들의 매관매직과, 권력 남용이 도를 넘었고, 그들이 만든 신식 군대 별기군에 대한 '편애'와, 5위영 등 구식 군대 군인들의 실직과, 개편된 무어영, 장위영 군대에 대한 형편없는 처우, 밀린 녹봉들이, 구식 군대의 '난'을 일으킨 직접적 원인이었던 것이다. 


즉, 드라마는 기존 권력을 잡아오던 집권 세력에 대해, 개혁세력으로서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그 측근을 설정하였지만, 이미 '임오군란'이 일어날 당시, 조선은, 명성황후와 그 측근들이 권력을 틀어쥔 상태였고, 그들의 도를 넘은 권력 남용과, 그로 인한 후유증이 사회적 불안을 야기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또한 <조선 총잡이>가 미처 그려내지 못하고 있는 혹은 그리고 있지 않은, 하지만 그래서 위험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 군민들은 별기군 병영으로 몰려가 일본인 교련관 호리모토(掘本禮造) 공병소위를 죽이고, 민중과 합세하여 일본 공사관(서대문 밖 청수관)을 포위, 불을 지르고 일본순사 등 13명의 일인을 살해했다. 그러나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 등 공관원들은 모두 인천으로 도망쳐서 영국 배의 도움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근현대사사전)

즉, 드라마에서는 개혁 세력은 상당히 자주적인 세력으로 등장하며, 별기군의 책임자는 좌상의 서자인 김호경(한주완 분)으로 그려져 있지만, 당시 별기군의 교관은 일본인이었고, 임오군란  과정에서 구식 군대의 군인들이 그 분노의 향방으로 일본을 삼았다는 것은 이미 당시 궁정에 일본의 영향력이 상당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임오군란에 가담했던 군인들이 이후, 일본에 대항한  '의병'의 단초가 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미 당시 정권의 친일본적 폐해가 드러나기 시작했던 시기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고종은 강단있는 개혁 세력일뿐이고, 명성황후는 그런 왕의 지혜로운 조력자일 뿐이다. 별기군의 책임자 김호경은 그저 일본에서 유학을 했을 뿐이고, 드라마의 주인공 박윤강(이준기 분)는 그저 우연히 운명처럼 김옥균을 만나 일본에 가서 일본인의 도움을 받았을 뿐이다. 
14일 마지막 장면, 왕후조차 궁궐에서 도망친 후 고립무원의 고종에게 측근은 청의 도움을 받을 것을 청한다. 그때 김옥균은 반대한다. 청의 도움을 받는다면, 나라가 청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하지만, 정작 드라마는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그가, 말한 청의 도움을 받는다면 나라가 청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이면에, 그가 의존하고 있는 것들을. 즉, 드러나지 않는 '친일'이 바로 <조선 총잡이>의 결정적 문제점이다. 


구한말 조선이 스러져간 상황을 목도한 한 이방의 역사학자는 말한다. 어떻게 그토록 집권 세력이 순진하게 나라를 외국에 넘겨줄 수가 있는지 신기했다고. 고종과 명성황후의 문제점은, 단지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청을 불러들인 것이 아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개혁을 주체적인 능력이 아닌, 일본에 의지해서 실행하다, 그게 안되니 청을 불러들이고, 또 그게 안되니 러시아 공관으로 도망가고, 한반도를 열광들의 놀이터가 되도록 자진해서 그들을 불러들인, 그 얄팍한 역사적 안목, 그리고 그에 의지해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려던 안일한 자세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박윤강의 아비의 억울한 죽음에 몰두한 <조선 총잡이>는 그렇게 드라마를 끌고가지 않는다. 고종은 하염없이 의분강개한 개혁적 군주요, 명성황후는 그의 옆에서 고독한 왕을 품어주고 도와주는 '영리하고 따뜻한 여인'일뿐이다. 주인공 박윤강도, 정수인(남상미 분)도 그저 의로운 인물들일 뿐이다. 시대는 바야흐로 열강 세력들이 몰려오는 조선 말기인데, 드라마가 그려내고 있는 상황은 흡사, 조선 중종 시기의 권력 구도와도 같다. 그러다 보니, 단순하게, 고종은 마치 정조처럼 개혁을 꿈꾸는 군주라 단순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이고, 명성황후는 실질적 권력자가 아니라, 단순하게 그를 지켜주는 '여인'이 되는 것이다. 

<조선 총잡이>가 가진 문제점은 그저 '임오군란'에 대한 색다른(?) 해석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말하지 않은, 그래서 더 심각한 당시 조선에 이미 짙게 드리우고 있는 '일본'의 그림자이다. 일본 상인의 도움을 받은 박윤강, 일본을 통해 들어온 신식 문물에 깊게 경도되어 있는 정수인, 그리고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호경, 오랫동안 일본에 칩거하다 돌아온 김옥균까지, 그 누구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확히 드러내지 않은 채, 의로운 인물인 척, 드라마를 이끌어 간다. 이렇게 가다보면, 이른바,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근대화 과정이자, '진보'이자, '발전'이라는  해석도 그리 이물감이 없이 그려질 거 같다는 불안감은 노파심일까? 그래서, '임오군란'에 이어, 다가올 '갑신정변'이 더욱 의심스럽다. 과연 이 드라마는 '갑신정변'을 어떻게 설명해 낼까? 


by meditator 2014. 8. 15. 1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