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결국 친정에 접어든 고종 곁에서 그의 힘이 되주었던 박윤강(이준기 분)의 아비, 박진한(최재성 분)은 고종을 무력화시키고자 하는 권문세가 김병제(안석환 분)의 의도대로 최원신(유오성 분)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조선 제일검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딸을 구하고, 아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총구 앞에 피 흘리는 몸을 내민 결과이다. 김병제의 음모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단지 고종의 오른팔을 죽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빌미로 삼아, 박진한을 대원군을 복귀시키려는 반란의 주모자로 몬다. 안동 김씨 가문의 거두 김좌영(최종원 분) 앞에 모여든 권신들은, 저마다 사헌부며, 대신들이며를 책임지겠다며 음모를 키워나간다.
얼마전 종영한 <정도전>에서, 조선의 기틀을 만든 정도전을 대놓고, 왕은 그저 신하들을 품어주는 어버이같은 존재라 일갈한다. 즉, 정치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자신들과 같은 유학을 터득한 선비들이, '민본'의 정신을 살리며 할 터이니, 그저 왕은 그런 자신들의 울타리 노릇이나 하라고 대놓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정도전 자신도, 군권까지 틀어쥐며 요동 정벌에 나선 그의 권력 독점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방원 일파에 의해 제거되고 만다. 그리고 드라마 <정도전>에서 이방원이 자신만만하게 엄포를 놓듯, 조선을 만들다시피 했음에도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사라진 정도전은 고종 대에 이르러서야 정치적으로 복권이 된다.
그런데, 만약에 정도전이 하늘나라에서, 470여년이 지난, 그래서 자신을 복권시켜준 고종 연간의 조선을 보면 어땠을까? 왕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무위소 별장이나 되는 왕의 오른 팔을 가볍게 쳐내고, 그를 반역죄로 몰아가는 권문 세족 김씨 일가를 보면서, 자신이 뜻하던 대로, 유림들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다고 반겼을까?
아마도 하늘 나라에서 고종 연간의 조선을 정도전이 보았다면, 그곳에서 다시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을 정도로, 조선의 마지막은, 그가 만든 제도는 여전하되, 그 제도는 전혀 다른 의도로 전횡되어, 오히려 고려 말 권문 세족이 판치던 세상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괴로워 할 것이다.
(사진; tv리포트)
정도전이 만든 조선은, 단지 그의 뜻이 관철된 제도로써의 유림의 정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나라이다. 왕은 새벽부터 일어나 유학자인 대신들과 유학을 공부하고 논해야 했으며, 왕의 권력은 그 아래 삼정승으로 부터 견제를 받고, 그도 모자라, 사간원처럼 아예 견제를 목적으로 한 기관을 통해 사사건건 간섭을 받아야 했다. 왕이 신하들의 뜻에 거스르는 어떤 일을 하면, 사간원을 비롯한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치고, 전국의 유생들이 궁궐 앞에 몰려와 항의를 했다.
정도전이 이런 제도를 만든 이유는 분명하다. 바로, 유학을 공부한 자들의, 유학의 정신에 입각한, 백성을 생각하는 정치를 펼치겠다는 의도이다. 이런 정도전의 정치 철학은, 일찌기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의 철인 정치와도 궤를 같이 한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자에 의해 선도되는 정치말이다. 하지만, 그 자신이 괴물이 되어가며 자신의 오랜 벗 정몽주와도 대립각을 세우며 새롭게 만들어 냈던 조선이라는 나라가, 불과 몇 백년 사이에, 진짜 괴물인 권문 세족들의 나라가 된 것에 대해 정도전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멀리 갈 것도 없다. 뜻을 함께 해서 조선을 건국했지만, 이방원의 왕자의 난 과정에서, 정도전과 등을 돌린, 조준 등은 이후, 척신이 되어, 조선의 첫 번째 권문 세족이 된다. 자신에게 집중된 권력을 오로지 자신이 뜻을 세운 '민본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쓰고자 했던 정도전과 달리, 이미 조선 초기부터, 온갖 특권과 그에 따른 댓가로 토지를 획득한 공신들로 인해, 정도전 등이 의도했던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겠다는 제도는 조선 초기부터 땅부족 현상을 겪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권력과 부를 나눠가진 공신세력의 등장은, 이후, 고려 말 이후 재야에 묻혔던 또 다른 유림 세력인 사림파와의 갈등을 낳는다. 공신 세력과 사림 세력의 대결, 그리고 사림 세력의 숱한 이합집산은 우리가 일찌기 교과서를 통해 배운바, 다수의 당쟁과, 사화로 연결돤다. 그리고 그 피튀기는 당쟁과 사회의 최종 승자는, 바로 우리가 <조선 총잡이>를 통해 만나게 되는 노론, 그 중에서도 안동 김씨 권문 세족이다. 그들은, 정도전이 뜻하던 대로, 왕을 병풍으로 만들고, 자신들이 국가를 경영한다. 하지만, 그들의 뜻은 정작 정도전의 뜻과 다르다. '민본'을 기치로 내걸고, 유학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는 대신, 노론, 그리고 안동 김씨의 권문 세족들의 정치는 그 목적이 오로지 김씨 일문의 영화를 위해 펼쳐진다. 정도전이 입안한 제도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리고 정도전이 원하던 대로, 유학자들이 나라를 경영하게 되었지만, 정작, 고종 연간의 유학자들은, 정도전이 생각하던 그 유학자들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유학'을 도구로 사용하는 협잡꾼들일 뿐이다. 똑같은 제도이지만, 그것을 누가 어떻게 운용하는가에 따라, 그 제도는 '민본'의 수단일 수도, 권문 세족의 권력 수단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정도전>과 그로 부터 470여년이 흐른 <조선 총잡이>의 조선이 보여준다. 같은 조선, 다른 나라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그들이, 닫혀진 나라를 열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제대로 다스려 보겠다는 고종의 친정 의지를 꺾고자, 아무 죄도 없는 박윤강의 아비, 박진한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거기에, 권력에 붙어 역시나 자신의 이권을 보장받으려는 보부상단의 접장 최원신(유오성 분)이 있다. 당장은 아비의 증언에 따라 보부상단을 향해 복수의 총구를 겨눈 박윤강, 그가 아비의 죽음에 숨겨진 비밀을 밝혀감에 따라 결국 그 총구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망해도, 자신들은 친일파로 거듭나며 권력을 유지해간, 안동 김씨 권문 세족을 향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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