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규가 다시 왕이 되어 돌아왔다. 

왕인데도 불구하고 면류관은 커녕, 맨 상투를 드러내고, 대전 바닥에 털퍼덕 앉아있다. <뿌리깊은 나무>처럼 '제길헐' 등 쌍욕을 하진 않지만, 말투로 보면, 딱 쌍욕을 내뱉고도 남을 말투이다. <뿌리깊은 나무2>인가 했더니, 이번엔 세종이 아니라, 영조란다. 한석규에 의해 구현된 영조는, 여전히 세종처럼 신하들과 '파워 게임' 중이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기 아들조차 믿지 못하며, 자신의 왕위를 공고하게 하기 위해 7번의 양위 해프닝을 벌인다. 

드라마는 시작과 함께, '이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상상력을 더했음'을 명시한다. 그리고 바로 그 상상력의 영역으로 드라마는 시청자들을 이끌어 간다. 
왕세제였던 영조는 한밤에 그의 눈앞에서 그를 지키던 사람들이 자객들의 칼부림에 의해 쓰러져 나가는 것을 목도한다. 자객의 칼은 이제 그, 왕세제 이금을 노리는 것 같다. 장면은 바뀌어, 노론의 영수 김택과 노론의 무리들이 왕세제 앞에 앉아있다. 이들은, 왕세제가 자신들과 의견을 같이 할 것을 종용하며, 연판장의 마지막에 서명을 할 것을 강권한다. 그리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왕세제는 자신의 이름을 남긴다. 이른바, 드라마 내내 수없이 되풀이 되는 단어, '맹의'의 탄생이다. 이렇게 노론과 정치적으로 야합한 기록을 남긴 왕세제는 왕이 된 후 내내, 노론에 의해 정치적으로 발목을 잡히고, 이를 없애기 위해 맹위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 예측되는 서고를 불태우기에 이른다. 그후 왕은 자신을 괴롭히던 '맹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마음껏 정사를 펼치고, 그런 왕에 대해 노론은 수그릴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사라졌다던 '맹의'가 수면 위에 오른다. 왕도, 노론도, 정치적 주도권을 위해, 다시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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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드라마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맹의'는 가상의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왕이 된 영조와, 노론이 정치적 동반자이자, 애증의 관계인 것만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다. 
드라마에서 자객을 보내 왕세제였던 영조의 목숨을 노리는 것과 달리, 그의 형인 경종 연간에, 왕세제 연잉군이였던 이금은 노론에 의해 노론과, 노론 측인 인원왕후의 적극적 지지를 엎고 왕세제가 되었다. 심지어 병약한 임금을 대신하여 '대리청정'까지 요구되었다. 하지만, 정통성의 문제를 들어 성균관 유생등이 반대하였고, 그 과정에서 노론 대신들은 왕세제를 옹호한다는 이유로 치죄를 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다. 사학자 이덕일은 그의 책에서 경종의 이른 죽음에, 연잉군과 그를 비호하는 노론의 개입을 주장하는 등, 연잉군이 영조가 되는 과정은, 노론과, 노론을 등에 업은 연잉군의 정치적 음모가 개입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게 어렵사리 왕이 된 영조는, 드라마에서처럼 '연판장에 서명을 한' 정치적 부담은 아니더라도, 왕제가 아니었던 자신이 왕이 된 과정에서, 노론에게 정치적 빛이 있음을, 또한 궁중 나인 중 가장 지천한 신분인 희빈 숙빈의 소생인 자신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음을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 복잡한 존재가 되었다. 왕이 된 영조는 그런 자신의 정치적 부담감을 덜기 위해, 혹은 지양하기 위해, 각 정파를 골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통해 노론에 빚을 진 자신의 처지를 덜고자 하나, 그의 의지는 생각만큼 관철되지않는다. 
그리고 드라마는 이런 복잡미묘한 영조 연간의 물고 물리는 정치적 관계를 '맹의'라는 상징적 문서를 통해 풀어내고자 한다. 

드라마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7번의 선위 장면은, 바로 이런, 자신의 정통성에 회의하는 영조가 가장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역설적으로 왕좌를 지켜나가는 정치적 해프닝이다. 즉, 궁중에서 허드렛 일을 하던 나인의 소생인 그를 왕권의 정통성이 없다 비웃는 무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과정이며, 그를 왕에 올림으로써 정권을 좌지우지하려는 노론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인 자신을 다시 한번 드러내는 과정인 것이다. 정통성이 있건 없건, 이미 왕인, 그가 '선위'를 하겠다는데, 그것을 '긍정'하는 것은, 그것이 설사 아들이라손 치더라도 '반역'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한석규라는 동일 인물에 의해 연기되는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뿌리깊은 나무>와 <비밀의 문-의궤 살인 사건(이하 비문)>에서 연기하는 세종과, 영조는, 왕권을 위협하는 신하들의 무리를 상대하여, 자신의 왕좌를 견고히 하고자 한다는데서, 일맫상통한 캐릭터이다. 그런데 세종이, 작가와 배우의 해석을 통해, 쌍욕도 하는 다층적인 캐릭터로 재탄생된 반면, <비문>의 영조는, 실제 52년의 오랜 치세 동안, 자신의 아들조차 정치적 희생양으로 하면서 왕좌를 지켜 나가기 위해, 그 어떤 희생도 불사한, 문제적 인간이었다. 그러기에, 한석규가 연기하는 영조에게서, 세종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은, 비단 그의 연기톤만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해석된 캐릭터의 여지가 그러하다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첫 방을 선보인, <비밀의 문-의궤 살인 사건>은 그렇게 문제적 인간 영조를 근간으로, 드라마에서 등장하듯이, 정통성을 가진 왕자도 태어나, 자신의 정통성에 의심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사도세자의 자유분방함을 '세책 해프닝'을 통해 엮어낸다. 그리고, 호시탐탐 정권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노론과, 그를 상대하는 소론 등의 정치적 반대파의 대치 상황도 드러낸다. 
하지만, 다짜고짜 '맹위'를 앞세우며 진행된 드라마 초반은, 영조 연간의 정치적 역학 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는 쉽게 접근하기 힘든 복잡한 설정을 드러내 보인다. 52년의 치세를 '생존'을 위해 그 무엇도 이용할 수 있는 정치적 인간 영조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영조의 캐릭터는 그저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과 같았고, 정통성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진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와 달리 정통성을 가진 아들이 가진, '꼰대'같은 노론 세력에 대한 반감의 부피가 명확히 잡혀지지 않는다. 그저 자유분방한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 식견이 있는 것인지 앞으로 이 <비문>이 풀어가야 할 과제이다. 아니, 그보다는, '선악'의 가치 기준으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캐릭터 영조가 워낙 압도적이다. 그런데 그 캐릭터가 익숙하는 것이 나름 <비문>이 가진  부담이기도 하다. 

또한 비문> 출연진의 면면은 화려하다. 영조 역의 한석규를 비롯하여, 군 제대 후 야심차게 돌아온 이제훈, 그리고 이름만으로도 걸출한 김창완, 최원영, 장현성, 이원종 등의 조연진에, 김유정, 박은빈의 아름다운 여성 출연자까지. 실제 '김유정이 나온다 하'여 본 사람들 중에서는, 단 몇 컷에 불과한 이 소녀의 출연이 아쉬운 사람이 있었듯이, 이렇게 쟁쟁한 면면의 출연자들에게 제 몫을 부여해 주는 것이, <비문>의 또 다른 과제로 보여진다. 


by meditator 2014. 9. 23. 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