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계팔과 재미삼아 화투를 치던 장노인 도끼(정종준 분)는 승부에 집착하다 결국 쓰러지고 만다. 그런데 도끼 노인이 입원한 병실, 그의 옆에 홀로 누워 말기 위암과 싸우는 노인은, 한때 도끼와 영역 싸움을 벌이던 '독사'라는 또 다른 전설의 조폭이다. 한때 서로 구역을 차지하기 위해 주먹다짐을 벌이던 그들은 이제 서로 인사 치레도 제대로 못 나눌만큼 운신하기 힘든 병든 몸으로 병실에서 만난다. 독사 노인의 존재를 안 밴댕이(윤용현 분)은 과거 자신을 코피가 터지도록 패고 자신의 돈을 빼앗은 독사의 기억에 이를 갈며 병실을 찾는다. 하지만, 그렇게 잊을 수 없었던 독사는, 그 누구하나 들여다 보는 자 없이 홀로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한낱 불쌍한 노인일 뿐이다. 자신이 누군지 알겠냐는 밴댕이의 말에 독사는 힘들게 말한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밴댕이는 떨리는 그의 손을 잡고, 고통으로 힘들어 하는 그의 땀을 닦아준다.
9월 23일 방영된 <유나의 거리>의 이 장면은, 드라마의 주요 스토리와 상관이 없는, 그져 스쳐지나가는 에피소드임에도, '성스럽기'까지 하다. 한때 조폭으로 자신의 '업'을 쌓던, 독사가, 과거 자신의 잘못으로 고통받은 자를 만나, 속죄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관계 해소이지만, '죄사함'을 받는 종교적인 면죄의 상징까지 띤다. 비록, 그가 과거에 해를 끼쳤던 숱한 피해자 중 한 사람에게 불과하지만, 죽음의 과정에서 독사는 자신이 현세에서 쌓은 카르마를 이렇게 풀어내고 간다. 아마도 저승길을 떠나는 그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사진; 뉴스엔)
밑바닥 사람들의 삶을 정감 가득히 풀어내는 드라마 <유나의 거리>, 하지만, 김운경 작가가 바라보는 인간의 삶은, 한편에서 냉정하다. 저마다, 현세에서 각자가 쌓은 '카르마', 즉 업보는 결국 각자 풀고 가야 할 삶의 과제로 등장한다.
한때 주먹으로 이름을 날리던 도끼 영감, 자식과도 연을 끊고 만복의 문간방에 얹혀 사는 말년에 춤이나 화투 등 소소한 삶의 재미를 얻어보려고 하지만, 그때마다 그의 발목을 잡는 건, 이제는 더는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그의 나이이다. 춤을 좀 배울까 싶으면, 쓰러지고, 화투 좀 전투적으로 쳐볼까 싶으면 쓰러지는, 그를 두고, 한때 부하였던 밴댕이는, 주책이라 흉을 본다. 그런 그에게, 만복은 말한다. 나라고 늘 도끼 형님이 좋기만 하겠냐고, 싫고 번거로울 때가 더 많지만, 그게 다 과거 조폭의 무리에 몸 담았던 내 업보라 생각하며 감수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유나의 거리> 속 등장인물은 저마다의 업보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풀어간다.
36회, 이제 중후반을 넘어서는 <유나의 거리>에서 주된 스토리는 그러기에 당연히 바로 소매치기인 여주인공 유나의 카르마다.
유나를 사랑하는 창만은 세상에 자기보다 더 큰 도둑놈들이 더 떵떵거리며 잘 산다며, '소매치기'를 그만 둘 뜻이 없는 유나의 손을 씻기기 위해 고심한다. 그런 그가 찾아낸 방법은, 바로 어린 유나가, 소매치기로 들어설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원인을 찾아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창만이 찾아낸 방법은 어머니가 돌봐주지 않아 소매치기를 하며 살아가야 했던 유나의 어머니를 되찾아 주는 것이다. 창만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어렵사리 유나의 어머니를 찾는다. 하지만, 이제는 기업 회장의 아내가 된 유나의 어머니는 어두웠던 자신의 과거를 상징하는 유나를 만나기를 꺼려한다. 현재의 유나가, 유나의 어머니에겐 또한 과거의 카르마가 되는 지점이다. 결국, 창만의 설득으로, 그리고 자신이 홀로 남겨 둔 바람에 소매치기가 되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유나의 엄마는 어렵사리 유나를 만난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 유나는, 그렇게 목놓아 불러도 대답해 주지 않던 엄마를 용서할 수 없다는 말만 퍼붓고는 자리를 뜬다. 그래도 혈육인지라,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것도 무색하게, 번듯한 어머니의 존재를 드러내지 말아 달라는 어머니의 노파심에, 유나의 마음은 다시 닫히고 만다.
하지만 창만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유나의 첫사랑, 그야말로, 유나가 자신의 업이 된 '소매치기'로 유나를 인도한 결정적 인물이라는 것을.
유나와 함께 활동하던 태식(유건 분)은 유나와 함께 쫓기던 중 경찰에 잡혀, 유나의 죄까지 뒤집어 쓰고 감옥에서 살아야 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출소한 후, 손을 씻기 전 마지막으로 하는 큰 건에 유나의 도움을 청한다. 그리고 얼마전부터 그 어떤 나쁜 짓도 하지 않아, 주변에서 슬슬 손을 씻게 되는게 아닌가 라며 희망적으로 바라보던, 유나는, 자신때문에 옥살이를 한 태식을 위해 그의 '한 건'에 합류하기로 결정한다. 자신을 처음 '소매치기' 무리로 인도했던 첫사랑, 바로, 유나 자신의 업을, 유나만의 방식으로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업보로서의 유나, 그리고 유나의 업보로서의 창만이 뒤얽히며, 과연 그 과정에서, 유나가 소매치기로서 손을 씻게 될지, 아니면, 결국 다시 '재범'의 늪에 빠지게 될지가 <유나의 거리> 후반부 이야기의 관건이 된다.
거창하게, 카르마니, 업보니 했지만, 결국 <유나의 거리>란 드라마가 풀어내고자 하는 건, '인지상정'이요, '결자해지'이다. 사람으로, 사람답게, 제 할 도리를 다하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나의 거리> 속 갈등 들은 극단으로 치닫는 가 싶어도, 결국은 '인지상정'이요, 결자해지인 식이다. 단식하는 부모들 앞에서 '피자 파티'를 벌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의 밥줄 자르는 건, 남의 목줄 죄는 건 예사로 하는 세상에서, <유나의 거리> 속 이야기와 해결 방식들은, 그래서 때로는 너무 소박하고, 심지어, 환타지적으로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또 그래서, 사람사는 냄새를 맡기 힘든 요즘 세상에서, 푸근한 사람 사는 맛을 찾기 위해, <유나의 거리>를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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