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ebs는 11월 7일부터 9일까지 <여성 백년사-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3부작을 방영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제목을 비튼 듯한 여성 백년사 3부작의 제목,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이를 통해 다큐는 백년 전 그때 남성 중심 사회 속에 첫 발을 내딛은 여성들의 '잔혹사'를 다루며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기에는 고달픈 여성들의 삶을 살펴보려 한다.
프로그램은 최근 방송가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sbs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와 같은 토크멘터리 형식을 차용한다. 방송인 안현모, 김현숙, 이승국을 오늘의 패널로 등장시켜, 역사학자 심용환과 함께, 그때와 오늘의 이야기를 견주어 보고자 한다.
의문의 방에 들어간 김현숙, 안현모, 이승국 세 사람, 그들에게 갑자기 질문이 던져진다. 남성 독립운동가 세 사람을 말하라. 순간 당황했지만, 무사히 세 사람의 독립운동가를 답할 수 있었다. 다음 질문, 여성 독립운동가 세 사람을 말하라. 세 사람 모두, '유관순 열사' 이상 답을 이어가지 못한다. 세 사람의 무지를 탓할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들같지 않을까? 그렇다면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는 어떨까? 역시나 우리는 근대 소설의 기틀을 마련한 '이광수'는 알아도, 이광수가 자신의 작품만큼이나 칭찬을 아끼지 않은 그 당대의 여성 소설가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시간의 문을 열고 들어간 김현숙, 안현모, 이승국 세 사람, 192,30년대의 경성 역 플랫폼을 재현한 듯한 장소에서 이들을 역사학자 심용환이 맞이한다. 그리고, 이들을 찾아온 한 사람, 그 시대 속에서 빠져나온 듯한 복장의 여성은 이제 부산으로 가서 조선을 떠나려는 김명순을 만나러 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만나려는 김명순은 누구일까?
탄실은 어릴 때부터 생각하기를, 누구든지 퍽 빈곤한 집안에 태어났을 지라도 공부만 잘하고 점잖기만 하면 좋을 줄 알았다
- 김명순, <탄실이와 주영이>
최초의 근대 여성 소설가 김명순
1915년 매일신보에 19살 동경 유학 중인 여학생이 실종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동경 유학을 가는 거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던 시절, 그 중에서도 10명도 안되는 여학생들은 당연히 주목의 대상이었다. 실종된 여학생이 바로 김명순이었다. 평양 갑부의 서녀였던 김명순은 일찌기 동경 유학을 떠났다. 재학 중 소개로 만난 해방 후 초대 육참총장이 된 당시 일본 육군 소위 이응준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것이다.
며칠 후 학교로 돌아온 김명순, 그녀는 피해자였지만 학교와 사회, 그리고 동료 학우들은 그녀를 '남자를 유혹한 헤픈 여자' 취급을 했다. '여자가 처신을 어떻게 했길래'라는 식이었다. 결국 학교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고 만다.
하지만 김명순을 그런 처분에 대해 굴복하지 않는다. 귀국을 해서 다시 숙명여고에 졸업한 김명순은 1917년 최남선이 발행하는 <청춘>에 단편 소설 <의심의 소녀>를 응모해 2등으로 당선, 등단을 하게 된다. 이제 막 근대적 소설이 등장하던 시절, '교훈적 주제에서 벗어난 <무정>에 버금가는 작품'이라는 이광수의 극찬을 받으며 김명순은 최초의 여성 소설가가 된 것이다.
이후 김명순은 '쥐같은 남자에게 짐승같은 팔 힘으로......', '창부같은 계집이라...... 일본 남자와 연애한 줄.....', 자신의 성폭행 경험을 낱낱이 고발한 <탄실이와 주영이>를 1924년 조선일보에 연재한다. 하지만, 주변 문인들은 일찌기 자유 연애를 하며 살던 신여성이었던 김명순에 대해 그녀의 작품이 아닌 사생활을 들어 '협잡'에 가까운 비평을 일삼았다.
당시 대표적인 사회주의 계열 비평가였던 김기진은 1924년 신성에 <김명순 씨에 대한 공개장>을 싣는다. '착한 처녀인지 보증할 수 없다'라던가, '거친 생활을 한 타락한 여자'라며 그녀의 작품에 대해 '분냄새 나는 시'라고 폄하했다.
이 단편집을 오해받아온 젊은 생명의 고통과 비탄과 저주의 이름으로 세상에 내노음니다.
- 김명순, <생명의 과실> 머리말 중
이에 대해 김명순은 <김기진 공고문을 무시함>이라는 글을 당시 신여성에 투고했지만, 잡지 광고에서 등장한 김명순의 글은 정작 발간된 잡지에는 실리지 않았다. 그리고 1925년 시 24편, 소설 2편, 수필 4편이 실린 작품집 <생명의 과실>을 발표했다. 또한 5개 국어에 능통했던 그녀는 공채를 거쳐 매일신보에 입사, 이각경, 최은희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3 번째로 여성 기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문인들의 비판을 넘어선 비난은 끊이지 않았다.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 선생조차, '은파리'라는 필명으로 '남편을 다섯이나 갈았다'던가 식의 가십성 기사를 써, 김명순으로부터 명예훼손 고소를 당할 정도였다.
조선아,
이 다음에 나갓튼 사람이 나드래도/ 할 수만 잇는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이 사나운 곳아/ 이 사나운 곳아
- 김명순, 시 <유언> 중에서
결국 김명순은 더는 조선에서 그녀의 활동을 이어가지 못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녀는 생활고와 정신병에 시달리다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방정환, 김기진,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들조차 '신여성'이자 능력있는 문인이었던 김명순에 대해 파렴치한 협잡을 마다하지 않던 시절, 그 시절에 대해 <여성 백년사>는 당시의 한 광고를 들어 말하고자 한다. 전차에 다리를 드러내고 앉은 여성들, 그녀들의 다리에는 '피아노 한 채만 사주면, 문화 주택만 사주면 일흔 살이라도 괜찮아요.' '돈도 없고, 신경질은 많고, 집세 낼 돈도 없어요', 바로 이 광고가 그 시대가 '신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시대에 '신여성'으로 새로운 삶을 살려했던 김명순은 결국 조선 사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고 프로그램은 말한다. 토크멘터리의 형식으로 '미래를 알 수 없다면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고 살았던 과거의 인물에게서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취지에서 기획된 <여성 백년사>, 과연 선각자였던 김명순의 삶을 제대로 조명했을까?
희생양이 아닌, 주체적 인간상의 조명이 아쉽다
최근 인기를 끄는 토크멘터리 형식으로 역사에 접근하는 프로그램들에서 우선 눈에 띄는 건, 패널로 등장한 이들의 '감정적인 접근'이다. 당연히 일본 유학 중 성폭행을 당하고, 동료 학생들, 그리고 동료 문인들에게 왕따를 넘어서 발을 못붙일 정도의 수모를 당한 김명순의 삶을 굳이 오늘을 살아가는 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안타까움과 분노가 앞서게 된다. 그런데, 그게 김명순에 대한 제대로 된 조명일까? 외려, 희생양, 사회적 피해자라는 부정적이고 제작진이 말하고 싶은 편의적인 면만이 부각된 것은 아닐까?
실제 김명순은 여전히 가문과 집안에 따라 결혼이 정해지던 당시 사회에서 당당하게 '자유 연애'를 하고, 이를 통해 여성의 주체적인 삶을 주장했던 여성이다. 근대 소설의 시발점이 된 이광수의 작품들이 '자유 연애'를 주장한 이유 역시, 근대적 인간의 주체적인 선택과 의지의 문제를 이를 통해 풀어보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주체적인 선택은 당시 사회에서 아직 쉬이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이런 그녀가 살았던 시대적 한계에 대해 조금 더 차분하게 접근하는 지점도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또한 그녀의 자부심처럼 세 번의 일본 유학을 하고, 진명과 이화 등 당시 신여성들이 다녔던 학교를 섭렵했던 그녀는 애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번역할 만큼, 뛰어난 외국어 능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의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근대 소설에 있어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이광수가 찬탄할 정도로 뛰어난 문인이었다. 여성 백년사의 첫 테이프를 끊은 여성이라면, 아직 근대적 의식이 채 자리잡지 못한 조선 사회에서 희생된 여성으로서만이 아니라, 근대 소설가로서 그녀의 작품의 가치를 조금 더 조명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 면에서 여성 백년사가 한 면만이 부각된 것같아 아쉽다. 언젠가 교과서에 김명순이 실린다면, 그녀의 뛰어난 작품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김명순을 제대로 자리매김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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