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 감정의 영어 feeling은 '느끼다'는 동사의 행위를 나타내는 동명사이다. 즉 감정이란 거울처럼 우리 몸 혹은 우리 몸 밖의 것들을 '느껴'서 만들어 내는 마음의 형태들이라는 것이다. 지극히 개인의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상태이다. 대부분 우리 사회에서 아니 어느 사회에서나 '감정'은 개개인 고유의 것이란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한 집단 구성원들이 공통된 감정을 드러낸다면, 비슷한 정서의 상태를 공유하고 있다면? 그간 다큐 프라임을 만들어 온 제작진은 한국 사회를 진단하는 다수의 다큐를 만들면서 최근 대한민국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불안'해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현재의 대한민국을 '감정'을 통해 설명하는 <감정 시대> 5부작이 제작되었다. 

<감정 시대> 5부작의 관점은 개인의 감정은 사회와 맞닿아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개인의 사적, 주관적, 내면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온 감정,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그 개인은 물론, 그 개인의 감정조차 상품화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한다. 또한 여전히 권위적이고 집단적인 사회 체제는 그 속에서 개인을 품어주지 못한 채 개개인은 온전히 '감정'의 형태로 그 상흔을 부등켜 안고 살아가도록 만든다. '감정'을 통해 대한민국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본, 감정을 지배하다. 
5부작을 연 것은 '실직'이다. <을의 가족-가난의 대물림>은 원치않았던 실직에 봉착한 가장과 가장의 실직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IMF, 2016년 대규모 구조 조정을 겪고 있는 거제 조선소, 그리고 비정규직화 되어가는 서비스 직종의 종사자들을 통해 '실직'이 낳은 그리고 끝나지 않은 가족의 상흔을 들여다 본다. 

'어둠', '사망신고', '신기루', '무서움'이라 당사자와 가족들에게 표현되는 실직, 하지만 문제는 사회적 안전판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가장의 실직이 이후 '을'로써 존재가 규정된 채 자식 세대에게 까지 대물림됨으로써, 그 실직의 상흔조차 대물림되고 있는 지점을 포작한다. 부모는 못나서 미안하다고 하고, 자식은 한 순간에 삶의 조건이 송두리채 빼앗겨 지는 공포로 부터 시작하여 미래가 불투명한 노력 세대가 되는 현실까지, 고스란히 그 공포와 불안을 대물림한다. 



실직이 상흔이라면, 2부는 감정조차도 상품이 된 자본주의 사회, 즉 감정 노동자들이다. 성희롱을 당하고, 욕설이 퍼부어지는 그 어떤 순간에도 '고객'이 우선이라는 '고객 만족'이 모토가 된 서비스 산업, 그 산업의 그늘에서 마트 노동자, 전화 상담원 들이 신음하고 있다. 사회면은 이런 문제를 '갑을 관계'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다루고 있지만, 이런 감정 노동의 본질은 바로 서비스 산업의 핵심이 '인간 감정'이며, 그것을 자본이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소비자의 갑질이 아니라, 기업이 감정을 통제하고, 조직하고 조작하여 이윤을 확보하고자 하는 메뉴얼을 만든, 결국 드러나는 것은 '갑을 관계'이지만, 그 저변에는 기업이 진정한 갑이라는 본질을 다큐는 꼼꼼하게 짚는다. 1983년 앨리 러셀 혹실드의 <감정 노동 the managed heart>의 신노동주의 관점에서 이익을 위해 서비스 직종을 늘려 노동자의 자기 결정권조차 기계처럼 종속시키는 자본을 고발한다. 거리에서 사람들은 '노동자'라는 질문에 부정적이거나 블루 칼라 노동자만이 노동자라 대답하다 스스로 의구심을 느끼기 시작한다. 마트 노동자의 질문처럼,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대다수의 아이들은 '노동자'가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초중고 모두 노동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 5시간을 넘지 못하는 우리 교과서는 '노동' 대신, 경영과 경제에 시선을 고정시켜 왜곡된 시각을 양산한다. 

사회, 그리고 국가가 지배한 감정
3부가 들여다 보는 것은 '아저씨', 그 중에서도 아저씨의 마음이다. 2016년 어느덧 마흔줄을 훌쩍 넘어선 이들, 경제 성장의 호황기의 열매로 성장했지만, 정작 그들이 '가장'이 된 지금 불황을 짊어진 채 하우스 푸어로 살아가는 현실을 온전히 혼자 감내해야 하는 이들의 마음을 들여다 본 것이다. 

자영업자, 치과의사, 회사원 등 이른바 이 시대의 평범한 아저씨들, 그러나 감정 치유 전문가 앞에 내놓은 그들의 첫 마음은 놀랍게도 불안, 부담감, 자책에 공통적으로 귀결된다. 나는 어느덧 사라지고 가장으로서의 역할만이 그들의 전부가 된 이들, 그들은 스스로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내야 하는 것이란 중압감에, 그리고 정글같은 세상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곧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란 사회적 인식 속에 '슈드비(should be 해야만 하는) 컴플렉스'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여유를 갖지 못한 채 가장으로 몰린 이들 중, 결국 그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한 채 스스로 세상을 버린 이들이 있다. 바로 4부 <너무 이른 작별>의 가장들이다. 김명자씨(51)와 김혜정(51)의 남편 두 사람은 1년, 혹은 7년전에 경제적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한 채 자살을 했다. 그리고 그 스스로 생명을 거두어 버린 남편의 뒤에 남겨진 아내와 가족은 그 '자살'의 후유증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 

감정만큼이나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로 치부되고 있는 자살, 하지만 12년째 자살율 1위, 매일 37명이 자살을 하는 우리 사회 현실에서 자살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매일 자살하는 한 사람과 연결된 230여 명의 가족은 그 한 사람이 선택한 결과를 온전히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김혜정씨는 묻는다. 자살율 1위라는데, 도대체 주변에 그런 사람은 왜 없냐고? 즉 천주교 묘지에서 자살이유만으로 배척당하는 죽음, 사회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을 죽은 후에조차도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하물며 그 남은 가족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사람과의 제대로 된 이별은 커녕, 주변의 편견과 외면을 감당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하물며 자살도 이럴진대, 그 죽음이 사회적 죽음이라면 감정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이 시대의 트라우마, 세월호에서 남겨진 이들의 상처입은 감정이다. 아직도 아홉 명이 돌아오지 않은 세월호, 물 속에 잠긴 채 파면 팔 수록 의혹만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사고, 친구들과 함께 그 배에 탑승했던 단원고 2학년 학생들 중 겨우 살아남은 학생들 중 네 친구의 현재를 통해 치유되지 않은 사회적 트라우마의 잔영을 들여다 본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우리 사회가 세월호를 두고 했던 말,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하지만 네 명의 학생들은 반문한다. 정말 잊지 않았냐고, 정말 기억하고 있냐고? 단원고에서 쫓겨난 열 한 개의 교실, 안산 교육 지청에 겨우 마련된 기억 교실, 대통령이 탄핵 심판대에 올라서야 겨우 도달할 수 있었던 청와대 앞, 과연 우리 사회는 그간 무엇을 했는지 다큐는 묻는다. 

뿐만 아니라, 생존한 아이들을 만나면 사고의 기억만을 되묻는 사람들, 아이들은 왜 친구들을, 친구들의 빈자리를 물어봐 주지 않느냐고 한다. 아직도 친구들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아이들, 하지만 어른보다 더 어른스런 아이들은 말한다. 살아남은 친구들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고. 먼저 간 친구들만이라도 좋게 생각해 주고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박준혁 학생)



감정 시대, 상처입은 감정의 치유, 그 첫 걸음은?
시대가 억압하고, 자본이 조작하며, 사회가 짖눌러버린 감정, 그리고 그런 감정의 상흔에 불안에 떨며 고통받는 개인과 가족들, 이 낭자한 시대적 트라우마들 그 치유의 시발점은 어디가 되어야 할까?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를 수용하고,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 첫 걸음이 되어야 한다. 나는 귀한 사람인데 왜 그렇게 당하고 있을까? 라는 자괴감에 시달리던 마트 노동자 이효숙 씨는 감정 노동자가 아닌 감정을 가진 사람으로 자신을 세우기 위해 2016년 메이 데이에 마트를 끌고 거리로 나섰다.

감정 노동을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후기 산업 사회 일반적 노동의 한 현상으로 바라보듯, 자신의 상흔을 사회화, 객관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3명 중 1명이 비정규직인 세상에서 대기업 서비스 센터 직원은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급여를 위해 거리로 나선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 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실직으로 인해 가족까지 고통을 겪은 가장과 가족들은 이제서야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 본다. 마흔 줄의 슈드비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아저씨들은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고, 자신 속에 또아리를 튼 자신도 몰랐던 감정을 터논다. 마음이 어떠세요? 라는 질문에 당혹스러워하던 아저씨들이, 비로소 감정의 고삐를 푼다. 

미안하고, 원망스럽고,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시달리던 자살 유족자들은 '심리 부검'을 통해 비로소 죽은 이의 마음을 헤아려 볼 여유를 가지게 된다. 버림받았단 고통, 남겨진 슬픔이란 자신의 무게 너머, 죽은 이를 이해할 여지가 생겨나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살이란 족쇄로 인해 세상에 없는 존재들처럼 살아던 유가족들, 전 생애가 자살이란 단어로 규정되어 버린 죽은 이, 그런 사회적 편견을 넘어, 자살이라는 사건을 넘어 죽은 이를 추억하고, 추모할 수 있는 세상으로의 첫 발을 내딛는다. 

이런 자살 유족자의 첫 발은, 조금 더 넓게 동심원을 그리며, 5부 세월호 살아남은 친구들의 속마음으로 이어진다. 죽은 자조차도 잊지 않겠습니다 하며 애써 잊고 폄하하려는 사회, 그 속에서 친구들조차 아직 보낼 수 없는 아이들, 그 누구에게도 쉽사리 마음을 열어보이지 않던 아이들의 상처가 비로소 봉인 해제된다. 

물론, <감정 시대>의 전제가 개인의 감정은 사회와 맞닿아 있다고 하듯이, 여러가지 사회적 이유로 상처입은 개인들의 치유 역시,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거리로 나선 마트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해서는 우리의 사회 교과서가 노동을 정당하게 대접해야 하고, 비정규직이 가족을 공포에 떨지 않고 돌보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인간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시스템으로 변화해야 한다. 아저씨들은 가장의 공포에서, 그리고 그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가족들이 그 고통속에 신음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가족이란 단위로 책임지우는 '경제적 부담'이 헐거워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탄핵이 발의되던 날 국회에서 통한의 눈물을 쏟던 세월호 가족들처럼 그날의 진실이 밝혀져야 제대로 밝혀져야 하는 것이다. 결국 개인의 감정을 치유하는 건 사회요, 국가이다. 

by meditator 2016. 12. 14. 14:05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