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1911년 뉴욕 의류 공장로 무려 146명이 사망했다. 노동자들이 근무 시간 중 딴 짓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문을 잠궈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런데 문을 잠근 공장주는 결국 풀려났다. 1920년대까지도 경제 활동은 사적인 영역이었다. 국가가 개입할 수 없었다.
그러던 기조가 대공황을 계기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공황으로 인해 대규모로 거리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생계 보장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그저 공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동시에 공장에서 만들어낸 물건의 소비자였다. 그들의 생존에 자본과 국가의 생존이 달려있었다. 국가가 나섰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노동 3권, 8시간 노동이 보장되었다. 금융 기관을 규제하여 예금자를 보호했다. 급진적인 뉴딜 정책, 국가의 개입이 위기의 미국 경제를 되살려냈다.
이처럼 '위기'는 국가의 위상을 제고하게 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 생태, 보건 위생적 관점에서 국가의 역할이 급격하게 변화를 겪고 있다. ebs다큐 프라임 포스트 코로나 3부 국가의 탄생은 코로나 시대 변화하는 국가의 위상에 대해 논의한다.
19세기가 노예 해방, 20세기가 보편적 선거권 도입의 시기였다면 21세기는 기본 소득의 세기가 될 것이다.
벨기에 경제학자 필리프 판 파레이스 교수는 그의 책 <21세기 기본 소득>에서 주장한 말이다. 2018년 출간된 이 책은 '기본 소득'과 관련된 다양한 사회적 주장을 담았지만 그것의 '실현'은 그리 쉽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그 '기본 소득'의 문턱을 코로나가 넘어서게 만들었다. 바로 우리나라에서도 시행된 전국민 재난 지원금이다.
21세기는 기본 소득의 시대?
국가가 직접 국민들에게 돈을 준다? 코로나 이전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일시적이냐 지속적이냐 라는 차이는 있지만 개별적으로, 보편적으로, 그리고 의무 조항없이 전국민 모두에게 돈을 나눠준다는 기본 소득, 하지만 코로나는 이 불가능할 것같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었다.
지금까지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국가가 유도했던 방식은 이른바 '낙수효과'를 노리는 것이었다. 중앙 은행에서 대형 금융 기관으로, 그리고 기업으로 돈이 흘러들어가게 하여 고용을 유지하고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코로나는 이런 방식이 더는 유효하지 않게 만들었다. 문을 닫은 거리의 가게들, 그로 인해 거리로 나앉게 생긴 자영업자들, 그리고 생계의 위협에 내몰린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코로나로 인한 봉쇄 기간 동안 '생존'을 위해 금기시되던 현금을 지원하는 것이 최선의 방식이었다.
효과는 놀라웠다. 소비자 심리 추이가 단 몇 달 사이에 눈에 띄게 증가했고, 재난 지원금을 받은 75.7%가 만족감을 드러냈다. 경제가 호전되었고, 사회적 스트레스가 완화되었다. 특히 당장 돈이 필요하지 않은 고소득층이 돈을 저축 등으로 흡수하지 않고 '소비'로 이어질 수 있도록 기한을 정한 것이 유효했다.
하지만 일시적인 재난 지원금을 지속적인 기본 소득으로 이어가는건 쉽지 않다. 무엇보다 '재원'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이러한 기본 소득의 딜레마를 알래스카 영구 기금은 현명하게 해결한 사례로 꼽힌다. 1982년 도입된 기급은 천연 자원으로 기금을 조성하여 그 운용 이익을 1년 이상 거주한 사람에 한해서 매년 지급한다.
이 기금의 효과는 파격적이었다, 공짜로 돈을 나눠준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외려 일자리가 늘어났고, 가난한 가정의 3세 이하 아이들의 비만이 개선되는 등 양극화 문제 해소에 기여하였다. 물론 이는 풍부한 석유와 상대적으로 작은 70만 정도의 인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풍부한 석유와 함께 석유를 공유자산으로 여기는 사회적 공감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지속적인 기본 소득이 불가능한 것일까? 기본 소득의 재원으로 '토지'를 제기하는 학자가 있다. 다량 탄소 배출 상품에 '탄소세'를 얹어 이를 재원으로 삼자고도 한다. 인간을 대신하는 '로봇'에 매기는 세금은 어떨까? 하지만 아직은 그 어느것도 사회적 공감대를 얻는 것이 쉽지는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전국민 재난 지원금으로 이미 기본 소득의 첫 발을 떼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과연 이 첫 발을 뗀 기본 소득이 21세기 보편적 화두가 될 것인가, 그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이 주목되는 시점이다.
코로나와 관련된 국가적 통제, 어디까지여야 할까?
재난 지원금과 관련된 기본 소득의 실현이 국가의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역할에 대한 지점이라면 코로나와 관련하여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면 지점도 있다. 바로 '통제'적 측면이다.
지난 해 8월 호주는 코로나와 관련하여 강력한 4단계 봉쇄 정책을 펼쳤다. 일몰 이후 외출을 금지하였고, 낮에 쇼핑, 산책 등으로 외출을 하여도 5km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으며, 이를 어길 시 150만원의 벌금을 물도록 하였다. 계엄령에 준하는 봉쇄령이었다. 당연히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2020년 9월 빅토리아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안전을 위한 것이라며 찬성을 표명했다.
코로나로 인한 국가의 강력한 통제가 당연시 되는 세상이 되었다. 일상 생활에 국가가 개입했다.
2020년 3월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대테러 작전용으로 씌이던 디지털 추적을 코로나와 관련하여 국민들에게 허용하도록 하였다. 휴대전화가 위치 정보, 동선이 추적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중국의 경우 디지털 감시 시스템이 상용화되고 있다. 횡단 보도에 설치된 안면인식 전광판, 무단 횡단을 할 경우 안면 인식을 통해 전광판에 신상 정보가 표시된다. 벌금을 내거나 사회 봉사를 해야 지워진다. 이 기술은 마스트를 착용하더라도 식별할 수 있도록 업그레이드 되는 중이다. 텐왕 쉐량 프로젝트라는 기술적 통제를 통해 전국민적 삶이 기록되고 있다.
과연 이러한 통치 편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국가의 기술적 통제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시민 사회의 붕괴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다. 원론적으로 질병의 통제가 국가의 역할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다큐는 묻는다. 여기 팔찌 하나가 있다. 중앙 집중적 서버에 연결된 팔찌는 당신의 정보를 통해 미리 당신의 질병을 경고할 수 있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이 팔찌를 원하는가라고 묻는다. 정부의 통제에 당신의 신상을 넘겨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미 코로나로 인해 과도한 신상 정보의 공개가 사회적 화두가 되었던 우리 사회에서 국가적 역할의 한계에 대한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1930년대 네덜란드에서는 복지 효율화 정책의 일환으로 이름 등 다양한 개인 정보를 담은 인구 등록부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나치'에 의해 학살용 데이터베이스로 활용되고 만다. 이와 다르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코로나로 인한 신상 정보의 공개가 문제된 바 있다. 극한의 위기 상황에 선택한 극한의 조처지만 지나친 노출로 인해 '인권의 사각 지대'가 되어 '낙인'이 되고 '트라우마'를 남기게 된 것이다.
결국 코로나로 인한 정부 역할의 증대는 21세기의 또 다른 '빅브라더'의 탄생을 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진보적인 박노자 교수는 최근 벌어지는 일련의 국가적 통제 상황을 '인권의 부정'이라고 주장한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함정'이라 정의내린다. 쉴러가 주장한 '삶은 최고의 선이 아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선택한 편의가 '위생 독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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