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의 다큐 프라임은 5월 26일에서 28일에 걸쳐, 그리고 다시 6월 1일 8시부터 연방으로 3부작 법과 정의 시리즈를 방송하였다. <1부; 법은 누구의 편인가?>, <2부;정의의 오랜 문제, 어떻게 나눌까?>, <3부; 죄와 벌-인간을 처벌하는 어려움에 관하여 >로 나뉘어 방송된 <법과 정의> 3부작은 법학도 출신의 작가 성석제가 그 답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방식으로, 법과 정의의 역사와, 오랜 화두를 돌아봄으로써,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법과 정의'의 의미를 찾아본다.
3부작으로 진행된 <법과 정의> 시리즈의 진행 방식은 대체적으로 법이 과연 누구의 편인까 혼돈스런, 과연 사회적 분배 문제에서 정의는 실행될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공정한 처벌이란 무엇인가와 관련된 구체적인 질문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 각각의 시리즈는 법이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고대 그리스, 바빌로니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를 통해 처음에 그것이 만들어 졌을 때의 본래적 의미를 되돌아 보고, 그것이 실제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를 살펴본다. 고대에서 처음 만들어진 법과 제도들은 하지만 중세까지의 신분제 사회를 거치면서 여전히 편향된 집단의 이익을 반영하며 지속되어 왔음을 알려준다. 그러기에, 프랑스 대혁명, 그리고 거기서 발현된 인권 선언을 통해 드러난 근대 시민 사회가 만들어 낸 법의 정신과 의미가 중요함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근대 시민 사회를 통해 기본적으로 만인의 권리를 인정한 법은 현대 사회를 오면서,새롭게 해석되거나, 그 본연의 의미가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을 각가 3부작은 형벌 제도와, 분배 문제, 정의의 실현이라는 주제를 통해 짚어보고자 한다.
(사진;pd 저널)
1부 <법은 누구의 편인가>를 여는 것은 미국 최악의 판결이었던 캐리 벅 판례로 시작한다. 수용시설로 보내진 엄마에게서 태어난 캐리 벅은 입양이 되지만 그 집에서 하녀처럼 부려지던 중 성폭행으로 임신까지 하게 된다. 낳은 딸을 빼앗기고 수용시설에 보내진 캐리 벅은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우생학적 관점에 따라, 법의 결정으로 겨우 21살의 나이에 나팔관을 절제하는 불임 수술을 받는다. 이 판결을 통해 <법은 누구의 편인가>는 묻는다. 과연 법은 누구의 편인가? 후에 나찌의 불임 수술의 전례가 된 이 우생학적 관점에서 치뤄진 재판 뒤에 숨겨진 건 국가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치뤄야 하는 비용을 줄이거나, 부담하지 않기 위한 경제적 동기가 숨어있었다. 근거없이 저능아로 판명되어버린 캐리 벅은 스물 한 살의 나이에 그 어떤 도움을 받지도 못한 채 법의 폭력에 노출되어 버렸다. 즉 신분제 사회를 거쳐 인간은 나면서 부터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졌다는 주장을 한 프랑스 인권 선언문에 따라 근대 법의 원칙이 만들어 졌지만, 법은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쓰여질 수 있는 것이다.
2부 <정의의 오랜 문제, 어떻게 나눌까>에서는 존 롤스의 정의론에 나온 '무지의 베일'의 원칙에 따른 실험을 실시한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빚 6000만원을 경제적 형편이 다른 네 형제자매가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실험에 참가한 다섯 그룹은 각자 자신이 실제 네 형제 자매 중 누군인가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무지의 베일) 어머니 빚의 분배를 논한다. 그 결과 다섯 그룹은 물론 금액의 차이는 있지만, 고소득자인 맏이가 많이 내고, 상대적으로 어려운 막내가 덜 내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즉, 결과에 따른 '리스크'를 고려하여 가장 손해보지 않은 결과를 선택한 것이다. 실험 전에 네 자녀들은 쉽게 합의를 이루지 못했지만,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없던 사람들은 합의를 도출해 낸다. 막상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되었을 때 각자 아쉬워하는 면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결론을 뒤집지는 않았다. 근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벤담의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최선의 분배의 원칙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벤담의 입장에 따르면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결과를 낳고, 때로는 그 소수가 경제적 약자일 수 있다는 것이 20세기의 정의론을 내세운 존 롤스의 입장이다. 즉 존 롤스는 삶의 출발점에서 존재하는, 즉 경제적 부의 정도, 인종, 남녀와 같은 불평등의 영향력을 없애는 것이 이 시대의 정의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에서 이익이라면 불평등은 승복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의 정의론이다. 그
3부 <죄와 벌-인간을 처벌하는 어려움에 관하여>는 얼마전 화제가 되었던 대주 산업 회장의 금고형으로 부터 시작된다. 3일동안 노역은 커녕 별다른 일을 하지 않은 채 감옥에 머무른 대주 산업의 회장은 하루에 5억씩 15억을 탕감받아 사회적 공분을 샀었다. 형벌의 역사를 훑어 본 다큐는 과연 범죄의 크기에 비례하는 형벌은 어느 정도일까 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함무라비 법전으로 부터 시작하여, 중세를 거치며 형벌은 피해자가 받은 만큼 응징을 하는 방식이나, 신께 죄의 유무를 묻지 위해 물에 담그거나, 불을 견뎌야 하는 비상식적 과정을 거쳐왔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일찌기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명시되어 있듯이, 귀족와 평민의 법적 처벌은 언제나 달랐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 이후 전세계의 법은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에 도달했다. 하지만, 실제 현실은 여전히 또 다른 사회적 차별인 '유전무죄, 유권무죄'의 판결에 대한 고민을 던져준다.
이렇게 지극히 아카데빅하고 철학적 관점에서 장구하게 훑어 본 <법과 정의>가 늘 종착점에서 명시하는 것은 우리의 헌법 조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모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하지만 익히 알고 있듯이 우리의 현실은 저 헌법 조항과는 다르다.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지도 않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지만, 현실의 국민들의 행복은 언제나 뒷전이다.
존 롤스가 21세기에는 21세기에 어울리는 정의가 만들어 져야 한다고 주장하듯이, 3부에 걸려 법과 정의의 문제를 살펴 본 <법과 정의> 3부작의 결론은 1부 마지막에 표명된다. 즉 사회적 약자인 캐리 벅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다수의 사람들이 노력한 결과 2002년 법원으로 부터 사과 성명서를 얻어내고 '그때나 지금이나 올바르지 않았다'는 판결의 반성이 뒤따른 것처럼. 시민들이 제 목소리를 낼 때에만 비로소 정의는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거나, 잊거나하면 결국 정의의 반대 편에 법은 세워지게 된다고 못박는다.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린 형태를 띤다고 한다. 눈을 가린 것은 중의적 의미이다. 즉 눈을 가린 채 자신의 앞에서 판결을 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라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정반대로 이해 관계에 따라 불공평한 판결을 내릴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즉 해석 여하에 따라, 혹은 운용하는 자의 의지에 따라 이현령 비현령이 될 수 있는, 법이 반대편이 아닌 정의의 편에 서도록 하기 위해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고, 그런 참여의 가장 적극적인 방식 중 하나는 '투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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