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1931년 최영숙은 스톡홀름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06년부터 이화학당을 다니던 그녀가 9년 만에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 수학자가 되어 귀국했다는 기사가 신문마다 대서 특필되었다. 조선에서 여성 노동운동을 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가졌던 그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귀국했던 시기는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실업률이 50%를 육박하던 때였다.
수학자로서 교수의 길을 걷고자 했으나 금의환양을 했다며 반기던 때와 달리 자리는 없었다. 5개 국어를 하던 그녀는 어학교수라도 하고자 했으나 그 조차도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수학자가 궁여지책으로 택한 일은 배추와 콩나물을 파는 일이었다. 귀국한 지 6개월, 1932년 스트레스와 생활고로 인한 영양 실조로 최영숙은 27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최고의 엘리트 최영숙에게 허용되지 않은 '직업', 하지만 1920년대 직업 여성의 수는 약 33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성 수학 교수는 허용하지 않던 사회가 많은 여성들을 어떤 분야에 고용했을까? EBS다큐프라임 <여성 백년사 -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2부 직업 부인 순례>는 100년 전 여성들의 일과 삶을 살핀다.
330만 명의 직업 여성들
1920년대에 들어서며 본격적으로 식민지 산업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고무신을 만들고 옷감을 짜는 등 경공업 위주의 산업화에서 '값싼 노동력'은 필수적이었다. 1929년을 기준으로 일본 남성 노동자가 2.32 엔을 받을 때, 조선 남성 노동자들은 1엔을 받았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6.59엔에 불과했다. 당시 330만의 여성들은 '값싼 노동력'으로서의 몫이었다. 여성들은 조선인이라, 그리고 여성이라는 이중차별로 인한 낮은 임금을 받으며 산업전선에 내몰렸다고 <여성 백년사>는 말한다.
당시 여교원들은 35원에서 60원을 받았다. 여기자는 25원에서 60원, 반면 여차창의 월급은 25원에서 30원, 연초 공장 직공은 6원에서 25원을 받았다. 쌀 한 가마니가 12,3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다.
방직 공장 고용주는 여공이 삯이 싸고, 사상이 악화될 우려가 없으며, 결혼하면 자연히 그만두어 승진의 부담이 없고, 애교가 많고 나긋나긋하다며 여성의 고용 이유를 밝힌다.
또한 늘어나는 '직업 여성'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여전히 '직업 여성'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대했다. '여성의 그림자는 나날이 늘어가' 라는 식으로 여성들의 직업적 참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순종적이지 않고 사치스럽고 반항적이라며 신여성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고, '가정'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부추겼다.
그런 환경에서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건 쉽지 않았다. 1929년 광주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 여학생을 성추행 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이에 경성의 여학생들도 시위를 벌여 항의하고자 하였다. 경성의 13개 여학교 학생들이 모였던 곳은 다름아닌 경성여자 상업학교에 다니던 송계월의 집이었다. 이 사건으로 수감된 송계월은 다행이 집행유예로 나오게 되었다.
이후 조지아 백화점에서 근무하던 송계월은 <신여성> 지의 유일한 여성 기자로 특채되었다. 그녀가 쓴 첫 번째 기사는 <내가 신여성이기에>, 남자의 기생충이 아니라 스스로 경제적 독립의 토대를 쌓아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최초', 혹은 '유일한'이라는 수식어를 지녔던 당시 여성들처럼 그녀의 삶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여성운동을 계급 해방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했던 사회주의 패미니스트였던 그녀는 옥살이 하며 얻은 폐결핵과, 아이를 낳으러 갔다는 둥 '사회의 비열한 공격'으로 인한 상심으로 인해 고향으로 떠나게 된다. 나는 꼭 사라야겠다. 엇전 일인지 죽을 마음은 조금도 업다. 할 일은 만치, 나는 젊지' 라며 삶에 의지를 불태웠던 송계월, 결국 23살 약관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
물론 직업 전선에 나선 모든 여성들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여자가 운전을 하면 호기심에라도 타볼 거야'라는 택시 운전을 시작했던 이정옥은 집을 담보로 잡아 크라이슬러 자동차 2대를 사서 직접 '운수 회사' CEO로 한 달에 600원에서 1000 원을 버는 성공을 거두었다. 요즘으로 치면 '플렉스'의 대상이었던 당시 택시, 당연히 많은 남성 승객들의 유혹이 있었지만 이정옥은 그걸 참아내며 직업부인으로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알렸다.
또한 아직 '미용'이라는 인식이 흔하지 않던 시절, 그리고 대부분 미용실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시절에 자신의 이름을 딴 '엽주 미용실'을 당시 조선인이 운영하는 화신 백화점에 연 오엽주의 성공도 프로그램은 주목한다. '여성이여, 튼튼하고 건강하라'는 표어를 내건 엽주 미용실은 당대 최고 배우가 찾는 '핫 플레이스'가 되어갔다.
열악한 사회적 인식과 근무 환경에도 여성들은 직업을 찾기 위해 나섰다. 20명의 여점원을 모집하는데 180명이 모여들었고, 벼스 여차장 30명 모집에 126명이 모였다.
그렇다면 100년이 지난 오늘은 어떨까? 기자가 된 송계월은 데파트 걸(백화점 직원)로 일할 당시보다는 훨씬 나은 월급을 받았지만, <신여성>이라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잡지사에 그녀는 유일한 여성 기자였다. 프로그램은 OECD 유리천장지수(Glass Ceiling Index ; 충분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성별이나 인종 등의 이유로 조직에서 일정한 서열 이상 오르지 못하게 만드는 장벽) 최하위인 한국의 현실을 말한다. 여성의 91.5%가 스스로 차별받는다고 말하는 삶, 지난 10년 동안, 아니 지난 100년 동안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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