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 이후의 상실을 다룬 또 한 편의 영화
일본 영화계는 2011. 3.11 동일본 대지진을 기점으로 나뉘어진다. 3.11 대지진 이후 고레에다 히로카즈에서 부터 최근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너의 이름은>과 같은 애니메이션까지 일본 사회가 겪은 '사회적 상실'에 천착한다. 2016 부산 국제 영화제를 비롯하여, 벤쿠버 영화제 등에 초청된 <아주 긴 변명> 역시 이 '상실'으로부터 시작된다.
영화는 부부의 일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남편(모토키 마사하루 분)이 출연한 방송을 틀어놓고 남편의 머리를 다듬어 주는 아내. 이 여유로운 일상은 곧 자기 비하를 시작으로 무례하다싶을 정도로 감정을 토해놓는 남편의 언어로 인해 파열음을 낸다. 심지어 아내가 웃으며 보던 tv까지 꺼버리는 남편. 하지만 아내는 그런 남편이 토해놓은 감정에 눈빛은 동요하지만, 끝까지 미소를 잃지않고 남편의 머리를 매만진다. 남편에게 둘러놓은 미용용 덮개도 미처 치우지 못하고 길을 떠나는 아내. 그런 아내가 떠나자마자 서둘러 온 메시지를 확인하는 남편, 그리고 그의 집에 찾아온 여자. 아내가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겨울 산을 오를 때 남편은 아내와 함께 있던 그 짜증스럽던 남편이 아닌, 가장 로맨틱한 남성이 되어 밀애를 즐긴다. 그리고, 그 밀애의 끝에 걸려온 전화, 아내가 죽었다.
영화는 그렇게 엇갈리는 부부의 일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엇물렸던 일상처럼, 남편은 사고 후 만난 조사관에게 '아내'에 대해 엇박자를 짚는다. 아내의 옷차림, 행선지는 물론, 아내가 동행했던 친구의 존재조차 '무심'했던 남편, 하지만 미디어에 알려진 유명 작가답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자'의 코스프레를 그럴 듯하게 하며 장례를 치뤄낸다. 틈틈이 자신의 상실이 얼마나 세간에 관심 대상이 되는가를 확인하며. 하지만 사고 이후 가증스러울만큼 천연덕스러웠던 남편의 삶은 아내가 없이는 세탁기 하나, 전자렌지 하나 돌리지 못하는 일상으로 돌아오며 무너지기 시작한다. 어서 빨리 아내를 보내고 연하의 애인과의 정사에 맘이 도망가있던 그는 정작 돌아오지 않는 아내가 돌보지 않는 일상은 버텨내지 못한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무너져가는 그에게 아내의 친구 남편(다케하라 피스톨 분)이 찾아오고 그는 덥석 그의 아이들을 돌보겠다 선심을 쓴다.
영화는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전작 <유레루(2006)>나 <우리 의사 선생님(2009)>처럼 전혀 다른 모습의 두 남자를 대비시킨다. 틈틈이 아내가 남긴 메시지를 반복 청취하며 시도때도 없이 아내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요이치, 그와 달리 아내의 사고 이후 한번도 울 수 없었던 사치오, 그 두사람이 요이치의 아이들을 매개로 '상실'을 살아낸다.
나의 사랑하는 플라타너스여
아름답고 무성한 잎이여
그대를 위한 운명은 반짝인다
천둥, 번개, 태풍이라 할 지라도
그대의 아늑한 평화를 범하지 말라
사나운 갈바람도 다가와 그대를 욕하지 말라
그립고 사랑스러운 나무 그늘도
지난 날 이렇듯 아늑하지는 않았다.
늘 사랑하는 이를 사랑했던 건 아니다.
영화는 결혼 20년 여전히 이기적이기만 한 남편 사치오를 통해, 상실의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당신은 어땠습니까? 가족이라는 관계, 혹은 사랑이라는 관계로 얽혀진 인간 군상, 하지만 늘 그 관계가 교과서적 전형으로만 진행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교과서적이지 않는 인간 관계를 <아주 긴 변명>은 들여다 본다. 아내가 사고를 당하는 그 순간, 다른 여자를 안고 있던 남자는 아내를 추모하러 간 호수에서, 자신을 남기고 죽어버린 것이 바로 형벌이라며 하늘의 아내에게 소리를 높일 정도로 차마 자신이 저지레해버린 파열된 관계를 들여다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더구나 아내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부터 흘리는 요이치는 여전히 쉬이 눈물이 흐르지 않는 그에겐 또 다른 죄책감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에게 '공감'의 여지를 준 건 요이치의 아들이다. 감정을 쏟아놓은 아버지, 철없는 동생 사이에서 애어른처럼 의젓한 그의 아들, 아버지에게 차마 말하지 않는 감정, 심지어 눈물을 보이는 그 아이를 보며 사치오는 자신이 둘러친 상실의 벽을 들여다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두 아이를 돌보는 한 줄의 글을 쓰기도 힘든 일상, 어느덧 어린 여자 아이의 지시에 따라 밥도 하고, 빨래도 개는 그 일상에 사치오는 빠져드는데, 그의 매니저는 그런 그를 두고 '도피'란다.
요이치의 사고 소식을 듣고 숨가쁘게 달려가는 사치오의 그 순간 흘러나오는 '라르고'처럼 사치오가 자신의 죄책감, 자신의 상실을 들여다보는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사치오라는 인물을 '느리게' 들여다 본다. 아내의 부재를 자신에게 벌주는 것이라 발버둥을 치기도 하고, 아내의 털끝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문자에 분노하기도 하지만, 그의 상실은 쉬이 자신을 들여다 볼 엄두를 내지 않는다. 그 '쉬이 들여다 볼 엄두'를 내지 않는 상실은, 영화의 제목처럼,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아주 긴 변명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계와 그 관계가 인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오랜 고찰로, 그리고 치유에 대한 반문으로 귀결된다.
정작 아내 이야기만 나오던 요이치가 뻔뻔하리만치 천연덕스러웠던 사치오와 달리 시간이 흐르자 아내의 메시지를 지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 하자, 사치오는 아내의 죽음의 그때와는 달리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요이치 가족과의 시간은 사치오에게 아내의 부재를 대신할 그늘이었으며, 비겁했던 자신을 인정할 '연옥'이었던 것이다. 자신과 같았던 요이치의 아들을 돌보며, 어린 딸아이의 엄마 노릇을 하는 그 '외면'의 시간 사치오는 천천히 아내와 자신을 돌아볼 '짬'을 낸 것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어쩌면 '치유'가 아닐 지도 모른다. 오히려 다친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여 상처를 말끔히 낫게 만들려는 인간 세상의 조급증에 대한 반문일 수도 있다. 사치오와 아이들과 함께 바다에 간 요이치는 말한다. 아내만 있다면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어쩌면 도망이고, 어쩌면 상실의 과정일지도 모를, 그 시간이 요이치와 사치오에겐 또 다른 삶의 과정이다. 그 오랜 삶의 여정을 통해, 변명에 변명을 하며 아내의 죽음과 함께 하겠다던 사치오는 비로소 자신과 아내를 들여다 보고, 그때서야 사치오 자신으로 돌아와 작가로 선다. 하지만, 그건 비로소 자신의 머리를 자를 용기를 낸 것처럼, 진짜 이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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