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일 밤 11시 55분에 방영된 드라마 스페셜 단막극 시리즈 두 번째 작품 <돌날>은 2002년 동아 연극상 작품상, 연출상, 연기상, 그리고 2001년 한국 평론가 협회 선정 BEST3에 빛나는 연극 <돐날>의 TV 드라마 버전이다. 드라마는 연극의 생생함을 그대로 살려 내고자, 실제 연극에 출연했던 서현철, 박준면 등이 극중 배역 그대로 출연하였다. 하지만 연극 <돐날>이 온갖 상을 수상하며 한때 뜨거운 청춘을 살았으나 이제는 중년이 된 세대의 리얼리티를 소름끼치게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드라마 스페셜이라는 70분에 꾸겨 넣어진 원작의 연극은, 채 무르익지 못한 채 스릴러, 멜로, 심지어 동성애까지 온갖 장르들이 뒤섞여 보는 시청자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는 알겠으나,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공감하기 어려운 괴작으로 남게 되었다.
<돌날>의 장르는 문학으로 치자면 후일담 문학에 속한다. 한때 야학당에 모였던 사회 정의에 눈뜨고, 지식인의 사명에 고뇌하던 청춘들, 하지만 이십여 년이 지나 마흔 줄에 다시 모인 그들은 평범하다 못해 서로가 속물이라 비웃고 조롱하는 보잘 것없는 사십대가 되었다.
돌잔치를 연 정숙(김지영)-지호(고영빈) 부부는 야학당에 만나 결혼에 이르는 동지애적 사랑을 나누었지만, 이젠 무기력한 강사와 그의 아내로, 치솟는 전셋값에 전전긍긍하며, 뱃속의 아기조차 지워야 하는 처지의 가난한 삶에 찌든 부부일 뿐이다. 그리고 한때 그들과 함께 세상의 불의를 논하고 실천했던 친구들도 다르지 않다. 성기(서현철)는 잘 사는 부모 덕에 사업가가 되었고, 그와 함께 젊음을 불살랐던 친구들은 이제 그의 앞에서 어떻게든 떡고물이라도 얻어볼까 전전긍긍하는 만년과장에, 다단계 판매 사원이 되었다. 시인으로 남은 친구라고 나을까, 그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곤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식이다.
정숙-지호의 아이 돌을 기념하여 모여서 좋자고 모인 잔치는 곧 술이 좀 들어 가면서, 세상사의 만화경이 되어 버린다. 돈이 많은 성기 앞에 친구들은 비굴해지고, 이제는 전셋값에 시달린 집주인 지호조차 성기에게 돈을 빌려보려 애쓴다. 하지만 성기는 안하무인 그 자리에 온 여자들을 농락하느라 바쁘고, 친구들에게 돌려주는 것은 모멸의 말과 행동들 뿐이다. 심지어 남은 것이라곤 학자적 자존심 밖에 없는 지호에게 돈을 주고 논문을 사겠단다. 시간이 흐를 수록, 한때 정의를 논하던 친구들은 가장 치졸한 중년의 모습만을 드러낼 뿐이고, 그런 그들 사이에서, 자신에게 의논조차 하지 않고 아이를 지운 정숙으로 인해 생활의 비애가 극에 달한 지호의 분노는 일탈이 되어 점증된다. 술을 가져오라, 음식을 가져오라, 유산으로 인한 휴유증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내에게 권위적인 가부장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다 결국 폭발하고 만다. 그리고 그런 지호의 불만을 아내 정숙도 이기지 못하고, '나가라' 소리피며 무능한 가장의 이면, 허울만 그럴듯했던 마흔 무렵의 폐부가 드러난다.
그렇게 지호-정숙 부부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절묘하게도 내내 이 부부의 신경전의 원인이 되었던 친구 경주(서유정)이 들이닥치며 극은 반전된다. 아내 정숙은 젊은 시절 둘도 없는 친구였던 경주가 자신의 남편 지호와 연인 관계였을 것으로 오해하지만, 다시 돌아와 정숙에게 여전한 애정을 숨기지 못하는 경주는 알고보니 정숙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지호는 정숙을 도발하고 결국 정숙의 손에 들린 칼을 스스로 당김으로써, 견딜 수 없는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한다.
물론 지호의 현실 도피성 자살 시도는 해프닝으로 마무리된다. 남편의 무모한 돌 잔치 강행으로 인해 시달리다 죽은 듯 쓰러져 있던 아내는 지고지순한 아내로 돌아와 눈물을 흘리며남편과 함께 앰블런스를 타고, 친구와 가족들을 멀리한 채 하늘로 둥둥 떠가던 지호는 딸아이의 해맑은 모습에 떠나는 발길을 접는다. 붕괴 직전의 가족과 우정은, 오히려 지호의 자살 시도로 봉합된다. 마치 부부 싸움, 친구 싸움 '칼로 물베기'라는 속담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지만 드라마가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내리는 눈 송이 속에서 서둘러 친구들을 보러 들어가며 여전히 철없는 친구들을 그리는 것으로 행복하게 막을 내렸지만, 보는 시청자들은 방금 전 밥상을 들어엎고, 칼부림을 하던 그 기억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다. 드라마는 이게 이게 다 철이 없어서라고, 제 아무리 동성애의 흔적이라도 살 부비고 산 부부애를 넘지 못한다고 하지만, 보는 사람들은 막장 드라마 한 편을 본듯한 피로감에 젖어든다. 저러고도 해피엔딩이면 다야? 하는 울컥하는 분노까지 느끼며. 120분의 연극이 불과 70여분의 드라마가 되는 동안 놓친 개연성으로 인해, 마흔 무렵 지호의 고뇌는 이해되지만, 난장이 되어버린 돌잔치의 해피엔딩은 쉽게 끄덕여 지지 않는다. 마치 마흔 살의 삶의 무게를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 동성애까지 해볼 수 있는 모든 장르적 실험에 동원된 듯한 느낌이다.
좋은 원작이 곧 좋은 드라마가 아니듯이, 좋은 연극이었다고 해서, 좋은 드라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제 아무리 늦은 밤이라고는 하지만, 공중파의 드라마가 되기 위해서, 아니 70분의 개연성을 위해 주어진 시간을 위해서, 친구들과 지호의 막장 행각은 '철없음'으로 면피도리 만큼 좀 조절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제대로 마무리 할 자신이 없는 동성애 코드라면 없는 게 나았다. 정숙-지호 부부만의 문제로도 단막극에 주어진 시간은 충분했을 테니까. 원작의 배우들까지 출연한 열연에도 불구하고, '과유불급'이란 단어만이 자꾸 떠오른 실험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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