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결혼 첫 날 밤, 당신은 당신의 남편에게 당신이 나의 네 번 째 남자라는 걸 고백해야 할까?
21세기에 이 뜬금없는 결혼 첫 날밤의 고백이 화두가 된 것은 2월 3일 방영된 <힐링 캠프> 시청자 특집의 한 장면이다.
시청자 특집에서 강사로 초빙된 '다상담'의 철학자 강신주는 이제 남자 친구를 만난지 22일 된 새내기 연인에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가면을 벗어 던지고 민낯의 자신을 보여주어야 외롭지 않은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면을 벗어던진다는 미명 하에 던지는 진실이 진실일까? 심리학적으로 접근하자면, 진실이란 미명하에 내 마음의 짐을 벗어던지는 것은 아닐까? 아니 좀 더 철학적으로 접근하자면, 과연 내 맘 속에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나의 언어를 통해 상대방에게 전달되었을 때 온전히 진리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듣는 상대방의 생각과 관점에 의해 얼마든지 왜곡되고 변질될 파편들이 아닐까? 아니 무엇보다, 결혼 첫 날 밤이든, 이제 겨우 22일 만나는 사이이든지, 그 두 사람 관계 사이에 딱 이렇다 라고 정의내릴 진리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사진; 영남 일보 )
하지만 강신주는 단호했다.
가면을 벗고 자신의 민낯을 보여주는 용기야 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가면 뒤에 숨어서 외로울 것이라고, 둘 중 어떤 삶을 택할 것인지 선택하라고 말한다. 선택을 강요받은 사람, 당연히 외로움을 피한다.
이런 식이다.
병들어 퇴직한 아버지를 걱정하는 딸에게, 본질은 나이들어 낯선 아버지가 귀찮아 하는 당신의 마음이라고 돌직구를 날린다. 그리고 그동안 돈 버느라 아버지의 자리에서 벗어나 '모르는 사람'이 된 당신의 아버지를 이해해 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혼자 사는 것이 더 이상 힘들지 않다고 말하는 김제동에게 사자 인형 따위나 사지 말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하라고 충고한다.
돌직구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그의 직설은 결국 '사랑'으로 향한다.
쿨하고 싶지만 결국 자신이 던진 말들로 인해 잠들지 못하는 성유리에게도 자신이 속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나아질 것이라고 말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주듯이, 정의롭고 성숙한 사랑이야말로 사회적 모순조차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방송 초반 사연을 보낸 70여 명의 방청객의 열렬한 환호를 받고 입장한 강신주에게 mc 이경규는 다짜고짜 힐링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고 질문을 던진다. 그러자, <힐링 캠프>에 출연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강신주는 그 말을 거부하지 않는다. 힐링은 결국 '위로'에 다름아닌데, 그렇게 달콤함 위로는 세상의 험한 벽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본질적인 것을 가르치지 못하는 미봉책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정의내린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는 식의 김제동 어록은 조작일 뿐이라며, 자신은 도화지에 불과하며, 자신과의 상담을 통해 그 도화지에 그려지는 상담자의 맨 얼굴을 직시하는 것이 자신의 방식으로 힐링과 전혀 다른 효과를 준다고 단언한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YES라고 할 수 있다'며 우리 사회 가장 큰 문제는 NO라고 말할 수 없는 것에 있다고 덧붙인다.
그런데 강신주의 혹독한 상담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텔레비젼에서 봤던가, 영화에서 봤던가 어떤 무당집이 떠오른다. 앞의 상을 '땅'치며 '틀렸어!'라고 단호하게 말하며, '인연이 아니야!'라고 말하던. 모욕인가? 아니 우리가 이젠 무당의 그 말이 낭설이라고 믿는 시대를 살고 있을 뿐이지, 과학과 기술이 발달되기 이전의 시대에, 신의 대리인으로서 전지전능의 권위를 자랑하던 자들이 바로 그들 샤먼들이었다. 우리가 즐겨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웅들도 전쟁에 나가기 전에 신전에 찾아가 신의 말씀 신탁을 듣지 않았던가 말이다. 하지만 내 운명을 확고하게 인도할 것 같던 그 신의 존재는 산업 사회가 발달하면서 그 존재가 희미해져 간다. 더불어 신의 말씀을 전하던 샤먼들은 음침한 골목에서 외로움 깃발 하나에 의지한 채 '영험'하다는 말로 포장한 채, 삿된 요술의 존재가 되어가고. 사람들은 개별자로서의 외로움에 떨고.
(사진; 스포츠 동아)
그래서 대신 등장한 것이, 정신과 상담이요, 그것보다 유연한 것이 '힐링' 이요, 이제 '힐링'이 또 다르게 '업그레이드'된 것이 '다상담'과 같은 것들이다. 상당해 주는 사람들이 방책으로 삼는 처방들은 제 각각이지만, 결국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들에게 신의 말씀을 전해주던 신탁과 본질적으로 효과면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렇다. 신탁은 때로는 영웅들에게 전쟁에 나가 이기리라는 승전보를 알려주기도 했지만, 살아돌아오기 힘들다는 비보를 전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는 영웅들이 비보를 들었다고 그의 걸음을 물렸던가.
결국, <힐링 캠프>에 출연했던 많은 출연자들이 전해주었던 힐링의 달콤한 말이 옳냐, 강신주식의 직설이 옳냐가 문제가 아니다. '직설'이라면 지난 번 출연했던 법륜 스님의 즉문 직설도 사실 만만치 않았다. 강신주든, 법륜 스님이든 그 모든 사람들이 결국 말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엎어치나 메치나'위로'이다. 그저 위로의 방식이 어깨를 도닥여 주느냐, 선방의 죽비처럼 어깨를 내리치느냐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과 더불어 조금 더 행복하게 사랑하고 살라'는 소박한 주문이다. 단지 그것들이 텔레비젼이라는 공적인 매체를 통해, 조금 더 공신력 있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달될 뿐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생긴 부작용이 있다. 그런 누군가의 방식이, 그 옛날 샤먼의 그것처럼 전지전능해 보인다는 것이다. 어느 덧 이 시대의 텔레비젼이 바보 상자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신전이 되어, 신탁인 양 그런 정언 들을 옮겨대는 것이다. 그 또한 그저 강신주의, 법륜의 생각이요, 주장에 불과한 것을, 우리는 마치 교실 속 착한 학생들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결혼 첫 날밤 고백을 하던 그렇지 않던 그게 그 사람의 진실과 별개의 문제일 수 있는 것을, 아버지를 걱정하는 마음 속에 숨어 있는 간사한 귀찮음이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사람 마음 속에 누구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을 끄집어 내는 충격 요법은 그저 여러 치료법 중 하나라는 것을 텔레비젼을 보는 우리가 매번 간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아무리 꿈을 꾸어도, 사랑을 해도, 사회가 변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덮어두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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